이곡(李穀)의 기문에, “지정(至正) 기축년 윤달에 내가 한(韓)으로부터 영주를 거쳐 서울로 가게될 때에 군수 성(成)군이 고을의 정자 이름을 부탁하면서 말하기를, ‘옛날 태조께서 백제를 치려 할 때, 술자의 말이, 왕자성은 다섯 용이 구슬을 다투는 형국의 땅이니 진지를 구축하고 군사를 조련하면 삼국을 통합하여 왕이 되는 것을 당장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고 하여, 풍수를 살펴 이 성을 경영하고 군사 10만을 주둔하여 마침내 견훤을 항복시켰는데, 그 진영을 쳤던 곳이 고정(鼓庭)이라고 군의 문헌[郡乘]에 이렇게 실려 있습니다. 예전에 정자가 고정에 있어서 거기에서 관도(官道)를 내려다 보면 이른바 구슬을 다투는 형국이라는 왕자산의 산 밑인데, 왕자는 산의 모양입니다. 내가 그 정자가 퇴락하고 좁으며 또 이름도 잃어버렸음을 안타깝게 여겨, 이제 옛 것을 헐어 버리고 새로 확장하여 지었으니, 이제 이름을 지어 주시어 사람들로 하여금 이 정자의 지음이 우연이 아님을 알게 하여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나의 고향이 이곳에서 3백 리 남짓한 거리이므로 내가 여기를 지나 다닌 것도 여러 차례이기에 영주의 일을 내가 잘 알고 있다. 백성들이 일정한 직업이 없고, 관리가 일정한 거처가 없다면 어느 겨를에 정자를 중축하였겠는가. 병술년 봄에 내가 사신으로 왔을 때에는 이귀을(李龜乙) 군이 군수로 있었는데, 풀밭을 일구어 밭을 만들고, 가시덤불을 베어내고 길을 열어 주었으니 그가 참으로 훌륭한 관리임을 알았다. 지난해 가을에 근성(覲省)차 돌아올 때는 지금 성군이 군정을 맡은 지 반년쯤인데 이군의 치적보다도 더 낫다고 하였다. 부임한 지 두어 달 동안에 민정을 모두 알아서 이로운 일은 일으키고, 해로운 것은 힘써 없애버리고, 농사를 권장하고 학문을 힘쓰게 하며, 과세를 고르게 하고 흉년을 구제하는 등 질서 있게 행하므로 백성들이 모두 기뻐 복종하였다. 곧 명령을 내리기를, ‘너희들은 이곳에 살게 된 유래를 알고 있느냐. 이곳은 왕업을 일으킨 땅으로서 태조의 신궁(神宮)이 있다. 이제 그 건물들이 허물어져서 위로는 비가 새고 벽에 구멍이 뚫려 신령을 모실 수가 없는데도 신령께서 돌보고 흠향하신다고 하겠느냐. 사람이 근본에 보답할 줄을 모르면 이는 공경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또 관사(館舍)와 공해(公?)는 손님을 받들고 관부(官府)를 위엄 있게 하는 것인데, 이제 모두 황폐하고 수리되지 않았으니 이는 게으름을 나타내는 것이다. 공경하지도 않고 게으른 데 대해서는 적용시킨 떳떳한 법이 있으니, 이는 수령만의 책임이 아니라 너희 백성들도 어찌 벌을 벗어날 수가 있겠는가.’ 하니, 모두 말하기를,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이리하여 온 고을 사람들이 지체 높은 집안도 막론하고 집집마다 골고루 부역을 책정하고 재목을 다스리고 기와를 구워서, 먼저 신궁의 예전(禮殿)과 재방(齋房)을 새로 지어 건물을 모두 다 웅장하고 아름답게 한 뒤에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엄숙히 지냈으며, 다음은 관사와 공해를 수리하여 짓고 백성들을 격려하고 감독하여 금년의 농한기에는 반드시 공사를 끝내어 일체 완성하지 않은 것이 없게 하려 하였으나, 때마침 나라에서 정사를 새롭게 하기 위해 먼저 관리를 임명한다는 말을 듣고 ‘나는 가게 될 것이니 너희들은 일단 공사를 중지하라.’ 하고, 그 재목과 기와의 수량을 조사하여 기록해 두게 하고, 주관하는 이에게 주의시키기를, ‘잃어버리지 말고 새로 오는 원[新官]을 기다려 나의 뜻이 달성되도록 하라.’ 하고 또 말하기를, ‘이 정자는 한 고을의 명승지를 차지하였으며, 사방으로 통하는 요지에 놓여 있으니 짓지 않을 수 없다.’ 하여 날을 서둘러 성취하였다. 아, 성군(成君)이 이 고을을 조왕(祖王)의 남은 은덕이 있는 곳이라 하여, 나아가서는 태조의 초상은 뵙고 엄연하신 창업의 자세에 대하여 극히 공경하고 황송히 여겼으며, 물러나서는 고정(鼓庭)에 노닐면서 아득한 행군(行軍)의 자취를 길이길이 사모하여, 마음과 힘을 다하여 근본에 보답하고 옛 것을 회복하는 일을 힘쓰지 않았었는가. 그의 행실이 이러하므로 내가 정자의 이름을 회고(懷古)라 하였다. 정자가 작아서 기문을 쓸 만한 것이 못 되지만, 이것으로 말미암아 그 나머지를 볼 것이므로 아울러 기록하노라. 성군의 이름은 원규(元揆)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이요, 동한(東韓)의 이름난 집안 동암(東庵)의 외손이다.” 하였다. 모산부곡(毛山部曲) 고을 북쪽 36리에 있다. 이곳을 지나서 아산현(牙山縣) 북촌(北村)에 들어간다. 신종부곡(新宗部曲) 고을 서쪽 80리에 있다. 지나서 예산현(禮山縣) 북촌에 들어간다. 덕흥부곡(德興部曲) 고을 서쪽 69리에 있다. 지나서 신창현(新昌縣) 서촌(西村)에 들어간다. 돈의향(頓義鄕) 고을 서쪽 62리에 있다. 지나서 아산현 서촌에 들어간다.
이리하여 온 고을 사람들이 지체 높은 집안도 막론하고 집집마다 골고루 부역을 책정하고 재목을 다스리고 기와를 구워서, 먼저 신궁의 예전(禮殿)과 재방(齋房)을 새로 지어 건물을 모두 다 웅장하고 아름답게 한 뒤에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엄숙히 지냈으며, 다음은 관사와 공해를 수리하여 짓고 백성들을 격려하고 감독하여 금년의 농한기에는 반드시 공사를 끝내어 일체 완성하지 않은 것이 없게 하려 하였으나, 때마침 나라에서 정사를 새롭게 하기 위해 먼저 관리를 임명한다는 말을 듣고 ‘나는 가게 될 것이니 너희들은 일단 공사를 중지하라.’ 하고, 그 재목과 기와의 수량을 조사하여 기록해 두게 하고, 주관하는 이에게 주의시키기를, ‘잃어버리지 말고 새로 오는 원[新官]을 기다려 나의 뜻이 달성되도록 하라.’ 하고 또 말하기를, ‘이 정자는 한 고을의 명승지를 차지하였으며, 사방으로 통하는 요지에 놓여 있으니 짓지 않을 수 없다.’ 하여 날을 서둘러 성취하였다. 아, 성군(成君)이 이 고을을 조왕(祖王)의 남은 은덕이 있는 곳이라 하여, 나아가서는 태조의 초상은 뵙고 엄연하신 창업의 자세에 대하여 극히 공경하고 황송히 여겼으며, 물러나서는 고정(鼓庭)에 노닐면서 아득한 행군(行軍)의 자취를 길이길이 사모하여, 마음과 힘을 다하여 근본에 보답하고 옛 것을 회복하는 일을 힘쓰지 않았었는가. 그의 행실이 이러하므로 내가 정자의 이름을 회고(懷古)라 하였다. 정자가 작아서 기문을 쓸 만한 것이 못 되지만, 이것으로 말미암아 그 나머지를 볼 것이므로 아울러 기록하노라. 성군의 이름은 원규(元揆)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이요, 동한(東韓)의 이름난 집안 동암(東庵)의 외손이다.” 하였다. 모산부곡(毛山部曲) 고을 북쪽 36리에 있다. 이곳을 지나서 아산현(牙山縣) 북촌(北村)에 들어간다. 신종부곡(新宗部曲) 고을 서쪽 80리에 있다. 지나서 예산현(禮山縣) 북촌에 들어간다. 덕흥부곡(德興部曲) 고을 서쪽 69리에 있다. 지나서 신창현(新昌縣) 서촌(西村)에 들어간다. 돈의향(頓義鄕) 고을 서쪽 62리에 있다. 지나서 아산현 서촌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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