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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한산 인물들-신증여지승람-

천하한량 2007. 3. 1. 20:00

【인물】고려 이지명(李知命) 널리 많은 서적을 보았으며, 사부(詞賦)에 능하고, 초서(草書)와 예서(隸書)를 잘 썼다. 과거에 급제하여 황주 서기(黃州書記)로 나갔는데 청렴 정직하였고, 흉년을 당하여 심력을 기울여 백성을 구제하였다. 뒤에 충주 판관(忠州判官)이 되어서도 그 정사가 황주와 같으니, 사람들이 은혜로운 행정에 감동하였다. 정중부(鄭仲夫)의 난을 면하고 벼슬이 정당문학 태자소부(政堂文學太子少傅)에 이르고, 시호는 문평(文平)이며, 정승이 되어서는 옛 대신의 풍도가 있었다.

 

【인물】이당모(李唐?) 이지명(李知命)의 아들로서 문장에 아버지의 기풍이 있었으며,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국자 사업(國子司業)에 이르렀다.

 

【인물】이곡(李穀) 충숙왕(忠肅王)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예문 검열(藝文檢閱)을 지내고, 충숙왕 후원년(後元年)에 정동성 향시(征東省鄕試)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드디어 제과(制科)에 올랐다. 앞서 본국 사람은 비록 제과(制科)에 합격하여도 거의가 하열(下列)에 참여했는데, 이곡의 대책(對策)이 크게 독권관(讀券官)의 칭찬을 받아 제이갑(第二甲)에 발탁되고, 한림국사원 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에 임명되어 중국의 문사들과 교유하게 되었다. 학교를 일으키라는 황제의 조서(詔書)를 받들고 본국으로 돌아왔다가 얼마 후에 다시 원 나라로 가서 중서성 좌우사 원외랑(中書省左右司員外郞)에 제수되었다. 원 나라에서 자주 본국에 동녀(童女)를 요구해 왔었는데, 이곡이 글을 올려 이를 혁파하게 하였다. 충혜왕(忠惠王) 후 2년에 표문[表]을 받들고 원 나라로 가서 이내 머물러 있다가, 충목왕(忠穆王) 때에 본국으로 돌아와서 누차 벼슬을 옮겨 정당문학 한산군 도첨의찬성사(政堂文學韓山君都僉議贊成事)에 이르렀다. 충정왕(忠定王)이 즉위하자, 이곡이 일찍이 공민왕(恭愍王)을 세울 것을 청한 적이 있었던 관계를 스스로 불안을 느껴 나가서 관동(關東) 지방을 유람하였는데, 원 나라에서 또 봉의대부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낭중(奉議大夫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에 임명하였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며, 저술로는 《가정집(稼亭集)》이 있다.

 

【인물】이순효(李純孝) 사람됨이 청백하였고, 일 처결하기를 민첩하게 하였다. 일찍이 사명을 받들고 몽고(蒙古)로 가서 한 가지의 물건도 안 가지고 돌아오니 행탁(行?)이 모두 비었는지라, 여염의 부녀자와 역졸(驛卒)들이 모두 그 청백한 절조에 탄복하여 말하기를, “참 관인(官人)이다.” 하였다.

 

【인물】이색(李穡) 이곡(李穀)의 아들로서 타고난 자품이 총명 민첩하고 널리 많은 서적을 보았으며, 시문(詩文)을 지을 때에는 붓을 잡고 곧 내려썼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또 정동행성 향시(征東行省鄕試)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서장관(書狀官)으로 원 나라에 가서 정시(廷試)에 응시하였는데, 구양현(歐陽玄)이 이색의 대책문(對策文)을 보고 크게 칭찬하여 드디어 제이갑 제이명(第二甲第二名)에 발탁되었다. 본국으로 돌아와 여러 벼슬을 역임하고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으며, 국가의 문한(文翰)을 수십 년 동안 맡아 보았는데, 여러 차례 중국 사람들에게 격찬을 받았다. 후학(後學)을 끌어 등용하기에 힘썼으며, 유학(儒學)을 일으키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으니, 학자들이 모두 우러러 사모하였다. 본조에 들어와서 한산백(韓山伯)에 봉해졌고,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목은집(牧隱集)》 50여 권이 세상에 간행되었다.

 

【인물】이종덕(李種德) 이색(李穡)의 아들이며, 벼슬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이르렀다.

 

【인물】이종학(李種學) 이종덕(李種德)의 아우이며, 벼슬이 첨서 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에 이르렀다.

【인물】본조 이종선(李種善) 이종학(李種學)의 아우이며, 나이 15세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벼슬이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양경(良景)이다.

 

【인물】이계린(李季?) 이종선(李種善)의 아들로서, 세조(世祖) 때에 좌익공신(佐翼功臣)으로 벼슬이 좌찬성(左贊成) 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공무(恭武)이다.

 

 

【인물】이계전(李季甸) 이계린(李季?)의 아우로서, 세조(世祖) 때에 정난 좌익공신(靖難佐翼功臣)에 봉해졌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한성부원군(韓城府院君)에 이르고, 문형(文衡)을 맡았으며,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인물】이맹균(李孟畇) 나이 15세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벼슬이 우찬성(右贊成)에 이르렀다.

 

【인물】이숙치(李叔?) 청백하고 정직하다는 명성이 있었다. 세종(世宗) 때에 대사헌(大司憲)이 되었고, 여러 관직을 거쳐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에 이르렀다.

 

【인물】이숙묘(李叔畝) 벼슬이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에 이르렀고, 시호는 양도(良度)이다.

 

【인물】이축(李蓄) 벼슬이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에 이르렀다.

 

【인물】이훈(李塤) 이축(李蓄)의 아들이며, 성종(成宗) 때에 좌리공신(佐理功臣)이 되어 벼슬이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에 이르렀고, 한성군(韓城君)에 봉해졌다.

 

【인물】이우(李?) 이계전(李季甸)의 아들이며, 두 번 문과에 올랐고 벼슬이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이르렀는데 일찍 죽었다.

 

【인물】이파(李坡) 이우(李?)의 아우이며, 나이 18세에 문과에 올라 집현전(集賢殿)에 뽑혀 들어갔으며, 여러 벼슬을 거쳐 의정부 좌찬성에 이르렀다. 시호는 명헌(明憲)이다. 사람됨이 총명하였으며, 전고(典故)를 많이 알았다.

 

                 점필재집 문집 제2권   
 
 
 명(銘)
 
 
조선의 고 의정부 좌찬성 이공의 묘지명[朝鮮故議政府左贊成李公墓誌銘] 
 

공의 휘는 파(坡)이고 자는 평중(平仲)인데 한산인(韓山人)으로, 가정(稼亭 이곡(李穀)의 호임) 문효공(文孝公)의 사세손(四世孫)이다. 문효공은 그 사자(嗣子)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호임) 문정공(文靖公)과 함께 서로 이어서 원조(元朝)의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함께 규재(圭齋) 구양공(歐陽公)의 문하(門下)가 됨으로써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동방(東方)에 한산(韓山)이 있음은 이씨(李氏) 부자(父子)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알게 하였고, 우리 동방에서도 태산 북두(泰山北斗)처럼 앙모(仰慕)하는 데 있어 후세에까지 아무런 이의가 없게 된 것은 또한 이공(二公)에게로 돌아갔다.
문정공이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에 추증된 양경공(良景公) 종선(種善)을 낳았고, 양경공이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문열공(文烈公) 계전(季甸)을 낳았는데, 문열공은 우리 세조 대왕(世祖大王)에게 알아줌을 입어, 공훈이 태상(太常)에 기재되었으니, 인덕(仁德)을 쌓은 은택이 더욱 원대하여졌다. 공은 바로 문열공의 중자(中子)이다. 비(?) 대구군부인(大丘郡夫人) 진씨(秦氏)는 지봉산군사(知鳳山郡事) 호(浩)의 딸이다.
공은 막 나서부터 보통 아이들과 달랐고, 15세가 되어서는 이미 경사(經史)를 다 섭렵하여 대의(大義)를 통하였으며, 또 글을 잘 지었다. 17세에는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18세에는 신미년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으로 집현전 박사(集賢殿博士)에 선발되고, 누차 승천하여 응교(應敎)에 제수되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시험을 보아 부지돈녕부(副知敦寧府)가 되었다가 지승문원(知承文院)에 승진되고 이어 사헌 집의(司憲執義)에 전임되었다. 공은 급제한 이후 8년 동안에 초탁(超擢)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는데, 나이는 젊고 지위는 높았으나, 남들이 공에게서 교긍(驕矜)의 빛을 볼 수가 없었다.
기묘년에는 문열공의 상을 당하여 복을 마친 다음 세자 보덕(世子輔德)에 제수되고, 누차 승천하여 판내자시(判內資寺), 판예빈시(判禮賓寺)가 되었다. 계미년에는 첨지중추부사로부터 승정원 우승지에 발탁 제수되고 이어 좌승지, 도승지가 되었다. 모두 3년 동안 승정원에 있으면서 조석으로 임금을 개도(開導)하는 데 있어 비익(裨益)한 것이 매우 많았다. 세조(世祖)가 일찍이 편전(便殿)에 나가 유독 공만을 불러서 그 손을 끌어당겨 용안(龍顔)으로 공의 얼굴을 비비었다. 이 때 세자(世子)가 곁에 모시고 있었으므로, 세자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이 사람이 후일 너의 신하가 될 것이니 잊지 말라.”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세자에게 명하여 친히 술을 따라서 공에게 마시도록 하게 하였다. 이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한성 부윤(漢城府尹)이 되었다가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전임되었다.
무자년 9월에는 예종(睿宗)이 즉위하자, 경사(京師)에 가서 승습(承襲)을 청하고 돌아왔다. 갑오년에는 대구군부인의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廬墓)살이를 하였고, 복을 마치고는 동지중추(同知中樞)로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겸하였다. 이어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승천되어서는 인재를 선발 등용하는 데 있어 각각 그 재능에 맞게 하였다.
그 후 상(上)이, 평안도(平安道) 일로(一路)는 천사(天使)가 경유하는 곳이므로 반드시 풍채(風采)가 있고 응대(應對)를 잘할 만한 사람을 써야 했기에 바로 공에게 자헌대부(資憲大夫)를 더하여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삼았다. 그 명년에 어떤 일로 파면되어 돌아와서 지중추부사로 도총관(都摠管),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겸하고, 또 경사에 가서 정조(正朝)를 하례하였다.
경자년에는 예조 판서(禮曹判書)가 되었다. 하루는 공이 경연(經筵)에 입시하였다가 물러나와 빈청(賓廳)에서 식사를 하는데, 상이 중관(中官)을 시켜 오서대(烏犀帶) 하나를 싸서 하사하면서 이르기를,

“경(卿)을 매우 가상히 여기노라. 3년 동안 예(禮)를 관장하면서 전혀 과실이 없었고, 또 공직(供職)의 여가에는 경사(經史)를 잊지 않고 늘 보는구나.”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공을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치올리자, 대간(臺諫)이 서로 그 부당함을 논박하니, 상이 대간의 상소에 비답(批答)하기를,

“사람을 논할 것이요 작급(爵級)을 논하지 말라. 이 일은 곧 내 평소의 뜻이니, 다시는 말하지 말라.”
하였다.
공은 본디 전고(典故)에 박식하다고 일컬어졌는데, 의례(儀禮)가 더욱 그의 소장(所長)이었다. 그래서 모든 조정의 대례(大禮)에 있어, 옛 제도가 비록 있기는 하나 소략하여 의심스러운 경우에 대해서는 공이 반드시 고금의 예를 헤아려서 힘써 사리에 맞게 행하였다. 정희왕후(貞熹王后)의 초상 때에는 급박한 일들이 많았는데, 공이 그 변통(變通)을 잘 조절하였다. 일찍이 영녕전(永寧殿)에 쓰는 음악이 종묘(宗廟)의 음악과 다르므로, 공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세조(世祖)의 말씀을 기억하건대, ‘오목청묘(於穆淸廟)는 문왕(文王)을 제사 지낸 시인데, 교제(郊祭)에도 쓰고 묘제(廟祭)에도 썼으니, 우리 나라에서는 보태평(保太平)·정대업(定大業)의 음악을 종묘(宗廟)와 영녕전(永寧殿)에 통용(通用)하여도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이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시를 보건대, 태조(太祖)의 공(功)만을 기술한 것이 아니라 환왕(桓王) 이상 사조(四祖)의 덕을 겸하여 기록하였으니, 영녕전에 음악 쓰는 일은 세조의 전교대로 따르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옳게 여겼다.
임인년 남지일(南至日)에는 명을 받들어 공이 황종관(黃鍾管)을 제작하여 갈대 재[?灰]를 채워서 기후를 살폈는데, 기후가 이르자 갈대 재가 과연 비동(飛動)하였으니,공의 박식하기가 이와 같았다.
공이 예조(禮曹)에 모두 6년을 있었고, 을사년(1485, 성종16) 3월에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에 임명되었다가 이윽고 좌찬성에 임명되었는데, 그 다음해 2월 모일(某日)에 질병으로 작고하니, 향년이 53세였다.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상이 크게 애도하고 공을 위하여 2일 동안 조회(朝會)를 정지하였으며, 공의 질병을 상께 아뢰지 않은 의관(醫官)을 처벌하고, 조제(吊祭)와 부증(賻贈)을 일체 옛 법식대로 하였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호매하고 활달하며 총명이 뛰어나고 특히 담론(談論)을 잘 하였다. 그리하여 평소에는 글을 읽지 않으나, 성리(性理)의 근원 및 역대의 치란 흥망(治亂興亡)에 대하여 마치 물 흐르듯이 줄줄 얘기하였다. 일찍이 선정전(宣政殿)에서 상이 여러 재신(宰臣)들로 하여금 《중용(中庸)》, 《대학(大學)》을 논난(論難)하게 하자, 선성(宣城) 노공 사신(盧公思愼)이 으뜸으로 성(性), 도(道), 교(敎) 세 글자를 말하고 다음으로는 이기(理氣)의 선후(先後)와 《중용》, 《대학》의 표리(表裏)에 관하여 끝없이 서로 말을 주고받았는데, 이 때 공이 마치 메아리처럼 민첩하게 대응하였다. 그러자 상이 이르기를,

“이 판서(李判書)가 아니면 능히 할 수 없다.”
고 하였다.
그리고 동인(東人)들의 씨족(氏族)에 대해서는 세대가 아무리 오래된 씨족이라 할지라도 모두 그 지파(支派)를 분간하였고, 고려 때의 여러 가지 과거(科擧)가 있어온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아무 방[某榜]에 아무가 장원(狀元)하고 아무가 몇째라는 것을 하나하나 다 세어서 한 사람도 착오가 없었다. 전후로 관직 임명 때마다 관각(館閣)의 직임을 함께 띠었고, 계속해서 지공거(知貢擧)에 참예하여 인재를 매우 많이 얻었다. 그래서 하동(河東) 정공 인지(鄭公麟趾)는 항상 공을 공보(公輔)의 재목으로 허여하였고, 공 또한 스스로 기약했었는데, 겨우 고경(孤卿)의 장(長)으로 있다가 갑자기 성명(聖明)을 하직하니, 슬프다.
공은 영평위(鈴平尉) 윤계동(尹季童)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니, 바로 태종 대왕(太宗大王)의 외손이다. 아들이 둘이었는데, 큰아들은 일찍 죽었고, 차남 덕윤(德潤)은 상서원 부직장(尙瑞院副直長)이다. 딸이 둘인데, 막내는 일찍 죽었고, 큰 딸은 부평 교수(富平敎授) 정수(鄭洙)에게 시집가서 아들 하나를 낳았다. 직장은 보성 군수(寶城郡守) 이찬(李?)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을 낳았다. 이 해 4월 아무 날에 장차 아무 언덕에 장사지내려 한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한산의 이씨는 / 韓山之李
가정이 그 뿌리를 북돋았고 / 稼壅其根
목은이 또 따라서 빛을 내어 / 牧又濯濯
석대하고 또 번성해져서 / 碩大以蕃
구한과 같은 훌륭한 명성이 / 歐韓令聞
온 천하에 드날렸는데 / 揚于天下
대대로 그 아름다움 이었으니 / 世以趾美
공은 조상을 닮은 분이로다 / 公其肖者
젊어서부터 속에 가득 쌓아 / 少而充積
문채가 화려하게 빛나서 / 英華曄然
누차 성명한 임금을 만나 / 累遭聖明
큰 꿈을 펼칠 길 순탄했어라 / 鵬路翩翩
한림원에선 인재 가르쳐 뽑고 / 金?迪簡
이에 승정원의 장이 되어서는 / 爰長喉舌
하늘의 위엄이 멀지 않았으니 / 天不違顔
어찌 지척일 뿐이었으랴/ 奚?咫尺
편전에서도 경서를 휴대하여 / 便殿橫經
공의 신중함을 상이 칭찬하였네 / 睿奬密勿
인청당안에서는 / 寅淸堂中
진실로 고금의 예를 통했기에 / 展也揚?
통천서로 장식한 띠를 하사받아 / 通天之犀
그 빛이 큰 길에 번쩍이었네 / 絢耀周行
당당한 풍채와 법도가 / 堂堂?度
진실로 재상에 알맞았는데 / 允合巖廊
하늘이 어찌 그리 가혹하여 / 天公何酷
백세 향수 못하게 하였는고 / 不使期?
묘지석에 시 지어 새겨서 / 刻詩?石
오직 어두운 구천에 남기노라 / 維昧之?


[주D-001]규재(圭齋) 구양공(歐陽公) : 원(元) 나라 때의 문장가로서 호가 규재인 구양현(歐陽玄)을 가리킨다. 그는 벼슬이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에 이르렀는데, 조정에 있는 40여 년 동안에 무릇 종묘(宗廟)와 조정(朝廷)의 문책(文冊)·제고(制誥) 등의 글은 대부분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元史 卷一百八十二》
[주D-002]오목청묘(於穆淸廟) : 《시경(詩經)》 주송(周頌) 청묘(淸廟) 편을 가리키는데, 이 시는 주공(周公)이 낙읍(洛邑)을 이룬 뒤, 제후(諸侯)들로 하여금 새 도읍(都邑)에서 성왕(成王)에게 조회하게 한 다음, 제후들을 거느리고 문왕(文王)의 사당에 가서 제사(祭祀) 지낼 때에 부른 노래이다.
[주D-003]갈대 재[?灰]를……비동(飛動)하였으니 : 후기(候氣)의 법칙에 의하며, 밀실(密室) 안의 나무 탁자 위에다 십이율관(十二律管)을 각기 그 방위에 맞게 안치하고, 율관 속에는 각각 갈대 재를 채워서, 어느 기후가 이를 때마다 해당 율관의 재가 비동하는 것을 가지고 기후를 점치는데, 예를 들면 동지절(冬至節)이 이르렀을 경우에는 황종관(黃鍾管)의 갈대 재가 비동한다는 것 등이다.
[주D-004]고경(孤卿) : 주(周) 나라 때 삼공(三公)의 다음 가는 관직으로, 즉 삼고(三孤)인 소사(少師), 소부(少傅), 소보(少保)를 가리킨다.
[주D-005]구한 : 모두 문장(文章)의 대가(大家)로 일컬어진 당(唐) 나라의 한유(韓愈)와 송(宋) 나라의 구양수(歐陽脩)를 합칭한 말이다.
[주D-006]어찌 지척일 뿐이었으랴 : 《좌전(左傳)》 희공(僖公) 9년 조에 “하늘의 위엄이 멀리 있지 않아, 항상 내 안면의 지척에 있다.[天威不違顔咫尺]” 한 데서 온 말로, 임금을 아주 가까이서 모시는 것을 이른 말이다.
[주D-007]인청당 : 예조(禮曹)를 가리킴. 순(舜) 임금이 백이(伯夷)에게, 후세의 예부(禮部) 장관에 해당하는 질종(秩宗)을 임명하면서,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오직 공경하여 곧게 하여야만 마음이 청결해질 것이다.[夙夜惟寅 直哉惟淸]” 한 데서 온 말이다. 《書經 舜典》
 

이파(李坡) 
 
 
간략정보 
 
시대 조선 
생몰년 1434-1486(세종16-성종17) 
본관 한산(韓山) 
자 평중(平仲) 
호 송국재(松菊齋)/소은(蘇隱) 
시호 명헌(明憲) 
활동분야 문신 
 
 
 
 
이파(李坡)에 대하여 
 
이파(李坡)
1434(세종 16)∼1486(성종17).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평중(平仲), 호는 송국재(松菊齋)·소은(蘇隱). 색(穡)의 증손이며, 영중추원사 계전(季甸)의 아들이고, 개(塏)의 동생이다.
1450년(세종 32)진사가 되고, 이듬해 증광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교서관저작랑(校書館著作郎)·집현전박사·응교·지승문원사·집의·보덕 등을 거쳐, 1462년(세조 8) 판내자예빈사(判內資禮賓事)로 예문관을 겸하였다.
이듬해 《동국통감 東國通鑑》 찬수에 참여하였고, 이 해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우승지를 거쳐 1465년 도승지·공조참의를 지냈고, 이듬해 한성부좌윤으로 발영시(拔英試)에 2등으로 급제하였다.
1467년 호조참판을 거쳐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대사성이 되고, 예종이 즉위하자 승습사(承襲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75년(성종 6)이조참판이 되어 《삼국사절요》를 찬진하였으며, 이해 덕종의 부묘문제(祔廟問題)가 일어나자 부묘에 적극 반대하였다.
이듬해 지중추원사로 정조사가 되어 또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77년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하였으나, 평안도로 이민시킨 남도의 백성들이 모두 흩어지자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480년 다시 지중추부사 겸 도총관·예문관제학이 되고 이어서 예조판서가 되었다. 예조판서로 재직 때 그 직무를 수행함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왕으로부터 서각띠〔犀角帶〕를 하사받았으며, 품계도 숭정(崇政)으로 승진되었다.
1485년 좌참찬을 거쳐서 우찬성이 되고, 이어서 좌찬성에 이르렀으나 폭음으로 인하여 죽었다.
젊은 나이에 벼슬이 높았으나 교만하거나 뽐내는 기색이 없었다. 또한, 자질이 호탕하고 활달하며 총명이 남보다 뛰어나고 특히 담론을 잘 하였다 한다.
성리학에 밝았고 고제(古制)에 해박하였으며, 문장이 뛰어났다. 시호는 명헌(明憲)이다.
 

 

 

【인물】이봉(李封) 이파(李坡)의 아우이며, 을유년 과거에 장원으로 뽑혔고, 벼슬이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이르고, 문장에 명성이 있었다.

 

【인물】『신증』 이언호(李彦浩) 이색(李穡)의 후손으로 과거에 급제하였고, 벼슬이 관찰사(觀察使)에 이르렀다.

 

【효자】 본조 이하(李夏)ㆍ이렴(李廉)ㆍ박지(朴地) 모두 효행이 있어 정문(旌門)되었다.

 

【열녀】 본조 윤씨(尹氏) 사성(司成) 윤기(尹耆)의 누이로서 자못 글을 잘하였다. 그 남편 나계문(羅繼門)이 재상 홍윤성(洪允成)의 집종에게 피살되었는데, 세조(世祖)가 온양(溫陽)에 거둥하였을 때, 윤씨가 스스로 소장을 지어 원통한 정상을 호소하니, 그 사연이 애절하고 이치가 발랐다. 임금이 이를 민망하게 여겨, 명하여 홍윤성의 종을 저자에서 찢어 죽이고, 해마다 미곡(米穀)을 내리고, 부역을 면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