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조선 시대에 이르면 태종∼세종대를 거치면서 지방제도가 확립되어 각 지방에는 지방관이 파견되고 교육과 군사시설, 역원이나 봉수 같은 제반 시설들이 마련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행정편제는 약간의 출입은 있지만, 조선 후기를 거쳐 한말 1894년의 갑오개혁으로 지방제도가 새롭게 개편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조선 시대 충청도는 4목, 1도호부, 14군 35현으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서천과 한산은 14군 중의 하나였고 비인은 35현 중의 하나였다. 한편 조선 시대에는 군현 아래의 말단 행정조직으로 면 리제가 실시되었는데, 조선 전기의 사정은 알 수가 없고, 다만 조선 후기의 자료가 남아 있어 그 편린을 살필 수 가 있다. 『여지도서』(1759년)와 『호구총수』(1789년)가 바로 그러한 자료인데, 이에 의하 면 영주∼정도대에는 다음과 같은 면 리 체제가 마련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영조시대) 면 리명>
이러한 지방제도는 갑오개혁 이후 약간의 변화를 겪게 된다. 즉 고종 32年에 새로운 지방제도의 완성을 보게 되는데, 이 때에 종래의 8도를 폐지하고 전국을 새로이 23 부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부의 하급 행정단위로써 목, 부, 군, 현(목, 부, 군, 현) 등도 군(군) 이라는 명칭으로 통일시켰다. 1896년에는 지방제도를 다시 개정하여 종전의 23부를 한성부 외 13도로 고치고 13도의 하급 행정구역으로 8부, 1목과 333군을 5등급으로 구분하게 되었 는데 이 때 서천지역의 서천군, 한산군, 비인군 등은 충청도의 4등급에 속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홍주부는 22군으로 구분되게 되었는데, 서천 지역은 서천군, 한산군, 비인군 등 3개 군으로 나뉘어져 홍주부의 관할하에 놓이게 되었다. - 『서천·서천 사람들』중에서... (유승광 지음, 1997) 이렇게 독립된 군현편제를 유지하던 서천군 지역의 3개 군현(서천, 한산, 비인)이 서천군으로 합쳐진 것은 일제에 의해서였다. 일제는 식민지 지배체제를 용이하게 하고자 지방제도 개편을 착수하는데, 이 때 서천, 한산, 비인 등의 3개 군을 폐합하여 1개 군으로 개편(부령 제111호, 1913. 12. 29 공포)한 다음, 1914년 3월 1일에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확정에 의하여 서천군으로 명명(命名)되고, 그 후 1917년 11월 1일에 남양면을 서천면으로 고치고 1938년 10월 1일(부령 제 197호, 1938. 9. 27 공포) 서남면의 옥남, 옥동, 장항의 3개 리와 마동면의 산소, 수동의 2개를 갈라서 장항읍을 새로 설치하고 이에 따라 마동면은 송내리, 당선리, 도삼리, 덕암리, 어리, 장선리, 신포리, 산내리의 8개 리와 서남면의 송석리, 죽산리, 한성리, 옥산리, 계동리, 월포리, 남산리, 봉남리, 옥북리 등 9개 리를 병합하여 마서면이라 하고 1읍 12면 172동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 『서천·서천 사람들』중에서... (유승광 지음, 1997) 현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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