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연명시집 ▒

陶淵明의 人品과 背景

천하한량 2007. 2. 25. 22:10
 

제목 : 陶淵明의 人品과 背景

■ 背景과 記錄

 

도연명의 전기는 <宋書 隱逸傳><晋書 隱逸傳><南史 隱逸傳>등에 보이고 특히 도연명과 친교 했던 <顔延之 384-456>가 쓴 <陶徵士뢰>와 梁의 昭明太子 <소통 501-531>이 쓴 <도연명전기>와 <도연명집>의 서문이 중요한 기록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도연명 자신이쓴 <五柳先生傳>을 소흘이 할 수 없다. 이 글에서 연명은 자화상을 철저히 격관적으로 묘사했다. 성명도 출신도 밝히지 않은 채 다만, 집 둘레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가 있어 오류선생이라 했다. 오류선생은 한적한 성품에 말이 적고 榮利를 쫒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詩書를 즐겼다. 집이 가난하여 떯어진 옷을 걸치고 이따금 굶기도 했으나 태연했다. 술은 좋아 했으나 가난한 처지라 자주 마실 수 가 없었고, 혹 친구가 술 대접을 하면 사양 않고 마시며 취했다. 평생을 제 뜻대로 자유롭게 살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글을 짓다가 죽었다. 이것이 오류선생전의 내용이다. 도연명의 인생을 삼기로 나누면, 1기는 29세 이전으로 勉學과 농사를 짓고 살았을 때며, 2기는 29-41세까지 그가 여러 차려 벼슬을 나갔다가 다시 돌아왔던 시기며, 3기는 42세에서 죽을때 까지 그가 철저히 은퇴했던 시기이다.

 

■ 陶淵明의 傳來

 

萬族皆有託  모든 사람이 다 의지할 바 있는데
孤雲獨無依  나만 홀로 외로운 구름 같이
曖曖空中滅  어디에도 기댈 때가 없노라
何時見餘暉  하늘 보며 눈을 껌벅이며 빛을 본다.
 
도연명이 살아 있을 때 그를 가장 잘 이해해준 사람은 顔延之 였다. 그는<陶徵士뢰>라는 글을 지었다. 徵士란 부름을 받고도 벼슬에 나가지 않은 선비란 뜻이다. 이 글에서 도연명을 다음과 같이 그렸다. 「隱遁者, 고고한 精神의 所有者, 學文이나 生活을 자유롭게 한 사람. 가난하여 손수 밭 갈아 먹은 선비 부모에게 효도하고 가족에게 인자 했으며 타고 날 때부터 술을 좋아했다」그후 도연명이 죽은지 60년이 지나 沈約 이 지은 宋書 隱逸傳을 바탕으로 梁 蕭統의 <陶淵明傳>과 시집의 서문이 나왔다.
 

蕭統은「연명의 문장은 일반 수준을 뛰어나 정채롭다 」「적절하게 그리는 듯 현실을 비판하고 넓고 참된 경지에서 회포를 풀고, 아울러 굳은 정절로서 도에 안주하고 절개를 지켰으며, 스스로 농사 짓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고, 재산 없음을 걱정하지 않았다 」<語時事則指而可想, 論懷抱則曠而且眞, 加以貞志不休, 安道守節, 不以躬耕爲恥, 不以無財爲病>라고 하여 인격과 학문을 높였다. 또 <簡文帝503-551>도 도연명을 특히 좋아했다. 대체로 梁대의 문풍은 섬세하고 기염했던 宮體를 따랐다. 그럴수록 그들 귀족들은 흙 냄새가 풍기는 소박한 도연명의 시를 좋아 했다. <鐘嶸?-552>는 가장 높게 도연명의 시를 평 했다. 「연명의 시문은 문체가 간결하고 말숙하며 정신은 돈독한 옛날의 진실을 좇았다. 글 속에 깊은 뜻을 지니게 했고, 그의 글을 보면 인덕을 알 수가 있다」라고 했다.
 

종영의 말대로 도연명은 일상에서 국화를 따며 남산을 보았고, 밤 늦게 이슬을 맞으며 흙 묻은 옷으로 지개를 지고 달 그림자를 길동무하며 돌아오는 농군의 모습과 가난에 쪼달리고 남루한 옷차림인데도 망건에 술을 걸어 이웃과 나누워 마시며 도연히 취하는 인간적인 모습에서 그의 인품이 더욱 빛나는 것이리라. 또 北齊의 陽休之는 「연명의 글은 문장이 빛나고, 우아하지는 못해도 신기하고 방일하며 고고한 경지에 도달했다」 唐의 시인들은 모두가 도연명을 삶을 공감하며 그리워 했다. 그 중에서도 白樂天은 도연명의 찬미사 였다. 그는 도연명을 본따는 시를 十六수나 지었다. 淵明이 죽은 후 그의 故鄕인 江州의 司馬로 부임해간 白樂天은 陶淵明의 옛 집을 찾아 이렇게 읊었다. 


今來訪故宅  오늘 그대의 옛집을 찾아
森若君在前  숙연한 마음으로 그대 앞에 섯노라.
不慕樽有酒  허나, 나는 그대의 단지에 있는 술이 그리운 것도 아니고,
不慕琴無絃  또는 줄 없는 그대의 거문고가 그리운 것도 아니다.
慕君遺榮利  오직 그대가 명예나 이득을 버리고
老死此丘園  이 산과 들에서 자유롭게 스쳐간 것이 그리웁노라

또 蘇東坡는 「陶淵明은 나가서 벼슬하고 싶으면 벼슬했고, , 隱退하고 싶으면 隱退했다. 그렇다고 高潔 하다고 自處하지도 않았다. 배가 고프면 남의 대문을 두들이고, 살림이 넉넉해지면 닭이나 술을 빗어 손님을 청했다」
 

후에 蘇東坡는
【采菊東離下, 悠然見南山】【嘯傲東軒下, 요復得此生】【客養千金軀, 臨化消其寶】위의 세 구절을 道를 득한 경지의 詩 귀라고 했다. , 梁啓超는【客陽千金軀, 臨化消其寶】를 七千券의 大藏經에 맞먹는 명언이라 했다. 世俗의 名利에 탐한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陶淵明의 人品과 詩를 共感 할 수도 없을 것이다. 虛構와 假飾에 사는 오늘날 우리 내 삶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세계다. 『人生이란, 잠시 現世에 寄寓 하다가 다시, 없는 것으로 돌아갈 몸이거늘 後世에 무엇을 남기려고, 重傷과 謨略으로 世上을 사는가 』 라고 評 했다.
 
참으로 사람답게 살다간 人物이다. 도연명은 스스로 수절한다고 했다. 인간적인 巧智나 奸狡 또는 권모술수를 쓰지 않고 소박한 대 자연의 순수한 德性을 지켯다.
歐陽修는「진에는 글이 없고 오직 陶淵明의 歸去來辭만이 있다」했으며, 黃庭堅은「자로 재지 않고도 저절로 맞는 경지의 詩, 淵明은 詩를 지은 것이 아니라 자기 가슴속의 日常을 그 대로 그렸다」또 우리나라에서는 退溪가 도연명에게 심취했다. 퇴계는 <和陶集飮酒>20수와 <和陶集移居韻>2수를 지었다. 퇴계는 성학을 밝히고 왕도를 구현하기 위해 충성을 바쳤다. 그러나 한편으로 염치를 높이고 절의를 지키기 위해 염담청정한 은퇴를 몸소 실천했다. 퇴계는 도연명을 이렇게 읊었다.「한잔의 술을 홀로 마시면, 한가롭게 도연명의 시를 영하노라 숲이나 시내 사이를 거닐면서 후련한 심정으로 즐기노라」라고 했다.

<張基槿 선생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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