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낙천시집 ▒

白樂天의 삶과 思想과 詩

천하한량 2007. 2. 24. 06:32

제목 : 白樂天 評傳

白樂天

 

■ 平民의 벗 白

 

天의 詩는 原文을 보고 다양한 백낙천의 시를 비교평가 하여 스스로 올린 까닭에 전문가의 글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며 정확한 텍스트가 아니기에 부족함이 많습니다. 淵明의 詩 내용을 참조 하시는 분 들은 참고만 하시고 論文이나 레포트, 혹은 硏究를 목적으로 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으니 다양한 서적을 비교검토 하신 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淸虛/徐天>그리고 아래의 글은 張基槿 선생님이 쓰신 글을 부분 발취하여 올린 것입니다.

 

樂天은 醉吟先生 또는 香山士로 불렸으며, 唐 代宗 大曆 7(772)정월 二十일 滎陽에서 출생했다. 동리 이름은 新鄭縣 東郭里 라고 전해진다. 형제는 모두 4형제로 형 幼文과 동생 行簡과 金剛奴와 두 누이 동생이 있었다.

 

李白이 죽은 지 10, 杜甫가 죽은 지 2년 후에 태어났으며, 같은 시대의 韓愈와 더불어 ‘李杜韓白으로 불리기도 한다. 어려서 부터 총명하여 5세 때부터 시 짓는 법을 배웠으며 15세가 지나자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하는 글 재주를 보였다. 대대로 가난한 관리 집안에 태어났으나, 800 29세로 進士에 급제하였고 32세에 황제의 親試에 합격하였으며, 그 무렵에 지은 『長歌』가 있다.807 36세로 한림학사가 되었고, 이듬해에 左拾遺가 되어 유교적 이상주의의 입장에서 정치 ·사회의 결함을 비판하는 작품을 계속 써냈다. 『新樂府 50수』(805)는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811 40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이듬해에 어린 딸마저 잃자 인생에 있어 죽음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불교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814년 태자 左贊善太夫에 임용되었으나, 이듬해에 일찍이 사회를 비판하는 그의 시가의 대상이 되었던 고급 관료들의 반감을 사서 주장[九江]의 司馬로 좌천되었다

 

그 곳에서 인생에 대한 회의와 문학에 대한 반성을 거쳐 명시 『琶行』(816)을 지었다. 818년 忠州刺史가 되었으며, 임기를 마치고 長安에 돌아오자 권력 다툼의 소용돌이를 피하기 위하여 822년 자진해서 杭州刺史가 되었다. 항저우의 아름다운 風光에 촉발되어 詩作은 계속되었고, 문학적 知己로서 트고 지내던 元拂과 만나게 되어 그것을 계기로 『 白氏慶集)(50, 824)을 편집하였다. 825년 蘇州刺史로 전임하였으나 827년에는 중앙으로 불리어 秘書監에 임명되었다.829 58세가 되던 해 뤄양에 영주하기로 결심, 河南府의 성주가 되었던 때도 있었으나 대개 太子補導官이라는 명목만의 직책에 자족하면서 시와 술과 거문고를 三友로 삼아 ‘취음선생’이란 호를 쓰며 유유자적하는 나날을 보냈다. 831년 원진 등 옛 친구들이 세상을 떠나자 인생의 황혼을 의식하고 뤄양 교외의 龍門의 여러 절을 자주 찾았고 그 곳 香山寺를 보수 복원하여 ‘香山居士’라는 호를 쓰며 불교로 기울어졌다

 

이에, 문학에 대한 충동도 번뇌로 보여서 참회하는 입장에서 ‘狂言綺語의 문집인 『 劉白唱和集 5권』『白氏文集』60권을, 다시 65, 67권을 834839년에 걸쳐 마음의 증표로서 연고 있는 사찰에 봉납하였다. 842 71세 때 刑部尙書의 대우로 퇴직하였는데, 『백씨문집』》은 70권에 이르렀다. 그 뒤로도 ‘狂詠’은 계속되었고 정부의 불교탄압정책을 풍자하는 작품을 통해서 자기 시대의 종말을 예감하고 인생의 마무리로서 75권의 전집을 編定, 그것이 완성된 이듬해 그 생애를 마쳤다. 이 밖에 詩文을 짓는 편의를 위해서 고사성어를 모은 『 白氏六帖事類集』 30권이 있다.현재 전하는 것은 『백씨장경집』 75권 가운데 71권이 있고, 『백향산시집』 40권도 있다. 현존하는 작품 수는 3,800여 수이고, 그 중에서 『琵琶行』『長恨歌』『遊悟眞寺는 불멸의 걸작이다.

 

■ 白樂天의 思想

 

白樂天의 思想은 敎와 道敎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그가 44세에 江州司馬로 貶謫 되었던 시기를 놓고, 전과 후로 양분한다. 즉 초기에는 儒家 思想이 짖고, 후 반부로 갈수록 道, 佛 에 기울어 은퇴와 독선을 높였다.

 

그는 스스로 말 하길「나는 본래 유학에 젖은 집의 가손이다 . 지금은 진나라 땅 함양의 나그네지만 전에는 주 나라의 맹자와 공자를 따르는 유학자 였노라」백거이 만큼 평민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 또 있었을까 ? 「백성을 귀중히 여겨 사직하는 것은 그 다음이고 임금은 또 그 다음으로 대단치 않다」라고 한 맹자의 사상에 동조하여 항상 백성들 편에 섰다. 따라서 그의 시에는 과중한 세금에 시달리는 평민들의 애환이 구구 절절히 잘 그려져 있다.

 

, 白樂天은 逍遙詠에서 이렇게 읊었다. 이 몸을 그리워도 말고 또한 싫어 하지도 말아라. 이 몸은 만겁 번뇌의 뿌리거늘 어찌 그리워 하랴. 또 이 몸은 허공 같은 먼지가 웅친 것이니 어찌 싫어하랴라고 했다. 이 시는 佛家의 精神世界를 그린 것이라 하겠다. 아래의 시 讀老子에서

 

言者不知知者默   말 하는 자는 알지 못하고, 아는 자는 침묵 한다고

此語吾聞於   나는 노자로 부터 배웠다.

若道老君是知者   그런데, 노자가 참으로 아는 자라면

綠何自著五千文   왜 오천자의 도덕경을 지었을까 ?

 

莊子 에서는 다음과 같은 글로 반박하기도 했다. 「장자는 만물이 다 같고, 다 하나로 돌아 간다고 했으나 내 생각에는 같은 중에서도 같지 않음이 있다고 본다. 모든 것이 한결 같이 본성을 따라 소요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난새나 봉황새는 어디까지나 뱀이나 벌래 보다는 뛰어 났노라」이 시는 그의 나이 63세에 지은 것이다. 이를 보면 백낙천은 老莊思想에서 좋은 것은 다 취했다. 儒家思想에 투철했던 은 도를 따라 청빈을 높이고, 절대로 명리에 욕심을 채우고자 혼탁한 속세에 끼여 들지 않았다. 그는 언재나 주어진 삶을 고맙고 만족 스럽게 즐길 줄 알았다.

 

「이것 저것 탐내지 않으니 마음이 편안하고, 또 엉키는 것 없으니 몸도 태평하다. 이렇게 십년을 지내니 몸이나 정신이 한가롭기만 하다. 더우기 나이를 먹으니 많은 것들이 필요하지도 않구나. 옷 하나면 겨울 따듯이 나겠고, 밥 한기면 종일 배가 부르다. 집이 작다고 말 하지 마라. 방 하나면 잠잘 수 있다. 말 도 만을 필요가 없다. 나 같이 행복한 사람은 열중 일곱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 같이 안분지족 할 줄 아는 사람은 백중의 하나도 없을 것이다 」 라고 했다. 贈內에서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은 육신의 존재를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배 부르고 춥지 않게 옷이나 음식을 취하면 되고, 초조하고 간소한 음식으로 허기를 메꾸면 되지 고량진미를 먹을 필요가 없다. 또 추위를 막을 솜 옷이면 족하지 비단에 무늬 옷이 슨 필요가 있는가」 라고 했다. 참으로 검소하고 無爲自然다운 삶을 살다간 詩人이다.

 

그가 여산의 빼어남을 표현한

匡廬奇秀甲天下   광려산의 빼어난 경치는 천하의 으뜸

이란 말은 후세에 여산을 소개할 때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명구이다.

 

그는 스스로를 이렇게 평가했다

 

「말쑥하게 말라 비틀어진 몰골이 지만 시 쓰는 게 버릇이 되었다. 평생 갚아야 할 빛이 시와 노래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은 신선이라 하고 모르는 사람은 시마 라고 한다. 전생의 나는 필경 중이였을 것이다 」

 

또 시와 거문고와 술을 三友라 하여 늘 함께 하며 즐겼다.

 

詠拙에서는 이렇게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다.「귀한 사람 부럽고, 천한 몸 되기 싫으며,부유함이 좋고 가난함이 싫어라. 남과 같이 천지간에 태어 났거늘 나라고 어찌 다르겠는가 ? 그러나, 내가 타고 난 운수가 그러하거늘 억지로 순리를 바꾸면 오히려 하늘의 노여움 사리」 라고 했다. 거칠 것 없이 살다간 樂 그도 陶淵明을 무척 그리워 했다.

<張基槿 先生님의 글>

 

■ 붙이는 글

白樂天은 陶淵明과 너무도 흡사한 삶과 思想을 가지고 글을 지었다. 비슬한 시대에 태어난 두 사람. 백낙천은 도연명을 몹시 그리워 하면서 그를 닮고자 했다. 유연한 일상과 함께 물욕을 버리고 淸貧하게 살다간 두 시인은 쉽게 흉내낼 수 없는 奇人이다. 당대 수많은 詩人들이 中原을 누비며 마음껏 취하고 글 쓰며 天下를 노래했어도 淵明과 樂天같이 스스로 실천하며 살다간 이는 드물다. 이에 두 사람의 시를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