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시모음집 ▒

小柏舟 소백주 조그만 잣 배(황진이 1506~1544)

천하한량 2007. 2. 22. 20:33

小柏舟   소백주   조그만 잣 배

 

 

     黃眞伊(朝鮮)  황진이 1506~1544

 

     

汎彼中流小柏舟   범피중류소백주   저 강 복판에 떠 있던 조그만 잣나무 배

     

幾年閑碧波頭   기년한성벽파두   몇 해나 이 물가에 한가로이 매였던고

     

後人若問誰先渡   후인약문수선도   누가 먼저 건넜느냐 사람들이 묻는다면

     

文武兼全萬戶侯   문무겸전만호후   문무를 모두 갖춘 만호후라 하리

 

 

 

 

황진이(1520?-1560?,개성)

황진이는 조선 중종 때 개성(송악)의 기생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정확한 생존연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그녀가 1520년대에 나서 1560년대쯤에 죽었을 것이라는 것만, 황진이와 사귄 사람들의 일화로부터 추측할 수 있다.

황진이 어머니는 진현금이란 아전의 딸로서 그다지 미인은 아니었다고 한다. 어느날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는데 마침 지나가던 황진사의 아들과 서로 반하였다. 둘은 정을 통하였지만 결혼은 할 수 없는 사이였다. 이후 진현금은 딸을 낳았는데, 바로 황진이다.

세월이 지날수록 황진이의 거침없는 성격과 미모는 돋보이기 시작했다. 황진이가 15세 되던해의 일화이다.황진이가 글을 읽고 있는데 지나가던 상여가 황진이의 문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황진이를 사모하다가 상사병으로 죽은 동네 총각의 상여였던 것이다.황진이가 소복을 입고 밖으로 나가 자기 치마를 벗어 관을 덮어주며 슬프게 곡을 하였더니 그때서야 상여가 움직였다. 사람들은 이일로 인하여 그녀가 기생이 되었다고도 한다.



황진이는 첩의 딸로서 멸시를 받으며 규방에 묻혀 일생을 헛되이 보내기보다는 봉건적 윤리의 질곡 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였다. 그 결심을 실천하자면 당시 그의 신분으로서는 불가능하였으므로 오직 길이라면 기생의 인생을 걷는 것이었다. 황진이는 부모의 만류를 뿌리치고 기적에 입적하게 되었다. 황진이가 기생이 되자 각지의 내노라 하는 풍류객들이 그녀를 보기 위해 송도에 몰려들었다. 당시만 하여도 전국에 공식적으로 약 3만 명의 기생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개성에는 유명한 학자와 선승이 있었으니, 학자는 곧 화담 서경덕선생이요, 선승은 지족암에서 三十년동안을 면벽참선한 지족선사였다. 지족선사는 생불이라고 불릴 만큼 덕망이 높았다. 황진이는 평소에 두사람을 다 흠모하던 중 한번은 그 인물의 됨됨이를 시험하여 보려고 먼저 화담선생을 찾아가서 수학하기를 청하니 선생은 조금도 난색이 없이 승낙하였다. 황진이는 얼마 동안 선생에게 공부를 하러 다니다가 하루는 밤에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선생의 침실에서 같이 자며 공부하기를 청하니 선생은 또한 허락하였다. 그렇게 수년 동안을 한방에서 동거하는 중에 황진이는 별별 수단을 다 써서 선생을 유혹시키고자 하였으나 선생은 목불과 같이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황진이는 이미 여색의 경지를 넘어선 화담 앞에 무릎을 꿇고 정중히 말했다. “역시 선생님은 송도 3절의 하나이십니다.” 화담이 나머지 둘은 무엇이냐고 묻자 “하나는 박연폭포요, 다른 하나는 접니다”라고 당당히 답했다. 그 뒤로 이들 셋은 고려 왕도였던 송악에서 가장 빼어난 것으로 여겨졌다.



황진이는 이와 같이 서화담을 한번 시험하여 본 뒤에 다시 지족선사를 시험하여 보려고지족암을 찾아갔다. 황진이가 제자로서 수도하기를 청하니 지족선사는 여자는 원래 가까이 할 필요가 없다고 하며 처음부터 절대 거절을 하였다. 황진이는 며칠 있다가 다시 소복 단장으로 청춘과부의 복색을 하고 지족암으로 가서 그 선사가 있는 바로 옆방에다 침소를 정하고 자기의 죽은 남편을 위하여 백일간 불공을 한다고 가칭하며 밤마다 불전에 가서 불공을 하는데 자기의 손으로 축원문을 지어서 청아한 그 좋은 목청으로 처량하게 읽으니 그야말로 천사의 노래와도 같고 선녀의 음률과도 같아서 아무 감각이 없는 석불이라도 놀랄만 하거늘 하물며 감정이 있는 사람으로서 그 누가 감히 귀를 기울이고 듣지 않을까 보냐. 이와 같이 며칠 동안을 계속하여 불공축원을 하니 노선사가 처음에는 무심하게 들었으나 하루 이틀 들을수록 자연히 마음에 감동이 생겨서 그 三十년 동안이나 잔뜩 감고 옆에 사람도 잘 보지 않던 눈을 번쩍 떠서 황진이의 태도를 한번보고 두 번 보니 보면 볼수록 선계의 정념은 점점 없어지고 사바의 욕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여 불과 며칠에 황진이와 서로 말을 붙이게 되니 황진이는 예의 그 능란한 교제술과 영롱한 수완으로 그 선사를 마음대로 놀리어서 최후에는 그만 파계를 하게 되니 지금가지 세상에서 쓰는 「망석중 놀리듯 한다」는 말이라든지 「십년공부 아미타불」이라는 말은 그 사실을 일러서 하는 말이다



「청산리벽계수야 쉬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이 시조는 황진이가 지은 시조로서 몇 백년이 된 지금까지도 세상에서 흔히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 노래를 지은 출처에 있어서 또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숨어있다. 그때에 왕족중에서 벽계수 이은원이 있었다. 그는 황진이 소문을 듣고, 만일 내가 그 계집을 본다면 침혹은 커녕 천하 요망스러운 년이라고 당장에 호령을 하여 축출하겠다고 장담을 하였었다. 이야기를 들은 황진이는 그가 얼마나 고결한가 한번 시험에 보리라 하고 중간에 사람을 놓아 벽계수를 유인하여 만월대구경을 오게 하였는데 때는 마침 만추시절이라 중천에 월색이 교교하고 만산에 낙엽은 소소하여 누구나 감개한 회포가 일어날 즈음이었다. 황진이는 단장소복으로 숲속에 숨어 있다가 연연히 나와서 이씨의 말고삐를 휘여잡고 위에 적은 노래를 한곡조 부르니 이씨가 월하에서 그 어여쁜 자태를 보고 또 청아한 노래를 들으니 스스로 심신이 황홀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부지중에 말에서 떨어져서 창피를 당했다고 한다.



황진이의 연정 가운데 가장 짧았던 건 대제학을 지낸 소세양과 나눈 사랑. 두 사람은 애초 30일을 기한으로 애정생활에 들어갔다. 날을 채운 뒤 소세양이 떠나려 하자 황진이는 시 한 수로 발걸음을 잡아맸다.



“달빛 어린 마당에 오동잎은 지고/ 차거운 서리 속에 들국화는 노랗게 피어 있네/ 다락은 높아 하늘과 한 척 사이라/ 사람은 취하여 술잔을 거듭하네/ 물소리는 거문고 소리를 닮아 차가웁고/ 피리 부는 코끝에 매화 향기 가득하도다/ 내일 아침 이별한 뒤에는/ 우리들의 그리움은 푸른 물결과 같이 끝이 없으리라”



두 사람의 사랑이 그 뒤 얼마나 지속됐는지는 알 길이 없다. 분명한 건 황진이가 소세양과 헤어진 뒤에도 그리움에 찬 나날을 보낸 점이다.



서경덕이 죽고 난 후 황진이는 서경덕의 발걸음이 닿았던 곳을 두루 찾아다녔다고 한다. 금강산, 지리산, 속리산, 묘향산을 막론하고 그의 체취가 남아 있는 곳이라면 마다하지 않았다. 나이도 서른을 훨씬 넘기고 있었다.



여러 곳을 두루 구경하고 집으로 돌아와 여독을 풀고 있는데, 담 밖에서 남자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듣자니 분명 서울의 풍류객 이사종이겠다 싶어 집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며칠을 함께 보냈다. 이사종이 함께 살자며 설득하자 황진이는 망설이다가 40세가 되는 6년 동안만이라고 다짐을 받았다. 6년이 지나자 이사종은 그녀를 붙잡았으나 황진이는 살림살이를 정리하고 송도로 돌아갔다.



황진이는 이와 같이 일생을 지내다가 사십 내외에 불행히 병에 걸려 죽었다. 그는 죽을 때에 집안 사람들에게 유언하되 『나는 평생에 여러 사람들과 같이 놀기를 좋아하였은 즉 고적한 산중에다 묻어주지 말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대로변에다 묻어주며, 또 평생에 음률을 좋아하였은 즉 장사지낼 때에도 곡을 하지 말고 풍악을 잡혀서 장례를 지내달라』하였다. 그의 무덤은 몇 백년 전까지도 송도 대로변에 있었다. 천하의 호협 시인 백호 임제 같은 이는 평안도사로 부임하던 길에 일부러 제문을 지어가지고 그의 무덤에까지 가서 제를 지내 주었다가 그것이 언관에게 말썽거리가 되어 그 일로 좌천까지 된 일이 있었다.

 

 

잣나무 배   <황진이>

 

 

저 강 한가운데 떠 있는 조그만 잣나무 배
몇 해나 이 물가에 한가로이 매였던고
뒷사람이 누가 먼저 건넜느냐 묻는다면
문무를 모두 갖춘 만호후라 하리

小栢舟(소백주)

汎彼中流小柏舟 幾年閑繫碧波頭 後人若問誰先渡 文武兼全萬戶侯
범피중류소백주 기년한계벽파두 후인약문수선도 문무겸전만호후

* 세월이 흐른 뒤, 황진이가 자신의 첫사랑을 생각하며 지었을 법한 시이다.

 

 

 

 

 

 

 

 

 

누가 곤륜산 옥을 깎아 내어
직녀의 빗을 만들었던고
견우와 이별한 후에
슬픔에 겨워 벽공에 던졌다오

詠半月(영반월)


誰斷崑山玉 裁成織女梳 牽牛離別後 愁擲壁空虛
수착곤산옥 재성직녀소 견우이별후 만척벽공허

* 이 시는 초당(草堂) 허엽(許曄, 1517~1580)의 시인데 황진이가 자주 불러 황진이의 시로 오인되고 있다는 학설도 있다.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晝夜)에 흐르거든 옛 물이 있을손가
인걸(人傑)도 물과 같도다 가고 아니 오는 것은

 

 

* 황진이 자신을 청산에 비유하여 변치 않는 정을 노래하고 있다.

 

 

 

 

청산(靑山)은 내 뜻이요 녹수(綠水)는 님의 정이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
녹수도 청산을 못 잊어 울어예어 가는고

 

 

* 황진이 자신을 청산에 비유하여 변치 않는 정을 노래하고 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 외로운 밤을 한 허리 잘라내어 님 오신 밤에 길게 풀어 놓고 싶다는 연모의 정을 황진이만의 맛깔난 어휘로 노래하고 있다.

 

 

  

 

 

마음이 어린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 운산(萬重雲山)에 어느 님 오리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V가 하노라
- 화담 서경덕

 

 

내 언제 무신(無信)하여 님을 언제 속였관데
월침 삼경(月沈三更)에 올 뜻이 전혀 없네
추풍(秋風)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 황진이

 

 

* 그리운 정에 떨어지는 잎 소리마저도 님이 아닌가 한다는 화담의 시조에 지는 잎 소리를 난들 어찌하겠느냐는 황진이의 안타까움을 전한다.

 

 

 

 

 

청산리 벽계수(靑山裏 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一到蒼海)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 황진이와 벽계수와의 이야기는 서유영(徐有英,1801~1874)의 <금계필담(錦溪筆談)>에 자세히 전한다.

 

 

-황진이는 송도의 명기이다. 미모와 기예가 뛰어나서 그 명성이 한 나라에 널리 퍼졌다. 종실(宗室) 벽계수가 황진이를 만나기를 원하였으나 ‘풍류명사(風流名士)'가 아니면 어렵다기에 손곡(蓀谷) 이달(李達)에게 방법을 물었다.
이달이 “그대가 황진이를 만나려면 내 말대로 해야 하는데 따를 수 있겠소?”라고 물으니 벽계수는 “당연히 그대의 말을 따르리다”라고 답했다. 이달이 말하기를 “그대가 소동(小童)으로 하여금 거문고를 가지고 뒤를 따르게 하여 황진이의 집 근처 루(樓)에 올라 술을 마시고 거문고를 타고 있으면 황진이가 나와서 그대 곁에 앉을 것이오. 그때 본체만체하고 일어나 재빨리 말을 타고 가면 황진이가 따라올 것이오. 취적교(吹笛橋)를 지날 때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으면 일은 성공일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할 것이오” 했다.
벽계수가 그 말을 따라서 작은 나귀를 타고 소동으로 하여금 거문고를 들게 하여 루에 올라 술을 마시고 거문고를 한 곡 탄 후 일어나 나귀를 타고 가니 황진이가 과연 뒤를 �i았다. 취적교에 이르렀을 때 황진이가 동자에게 그가 벽계수임을 묻고 "청산리 벽계수야..." 시조를 읊으니, 벽계수가 그냥 갈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리다 나귀에서 떨어졌다.
황진이가 웃으며 “이 사람은 명사가 아니라 단지 풍류랑일 뿐이다”라며 가버렸다. 벽계수는 매우 부끄럽고 한스러워했다. 한편 구수훈(具樹勳, 영조 때 무신)의 <이순록(二旬錄)>에는 조금 달리 나와 있다.

-종실 벽계수는 평소 결코 황진이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고 말해왔는데, 이 이야기를 들은 황진이가 사람을 시켜 그를 개성으로 유인해왔다.
어느 달이 뜬 저녁, 나귀를 탄 벽계수가 경치에 취해 있을 때 황진이가 나타나 “청산리 벽계수야...” 시조를 읊으니 벽계수는 밝은 달빛 아래 나타난 고운 음성과 아름다운 자태에 놀라 나귀에서 떨어졌다.

 

 

 

 

 

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르던가
이시랴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어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 이별의 회한을 노래한 것으로 황진이가 시조의 형식을 완전히 소화하고 있다는 평을 듣는 시조이다.

 

  

 

 

 

月下梧桐盡(월하오동진) 달빛 아래 오동잎 모두 지고
霜中野菊黃(설중야국황) 서리 맞은 들국화는 노랗게 피었구나.
樓高天一尺(누고천일척) 누각은 높아 하늘에 닿고
人醉酒千觴(인취주천상) 오가는 술잔은 취하여도 끝이 없네.
流水和琴冷(유수화금랭) 흐르는 물은 거문고와 같이 차고
梅花入笛香(매화입적향) 매화는 피리에 서려 향기로워라
明朝相別後(명조상별후) 내일 아침 님 보내고 나면
情與碧波長(정여벽파장) 사무치는 정 물결처럼 끝이 없으리.

 

 

* 소세양이 소싯적에 이르기를, “여색에 미혹되면 남자가 아니다”라고 했다. 황진이의 재주와 얼굴이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는 친구들에게 약조하기를 “내가 황진이와 한 달을 지낸다 해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자신이 있네. 하루라도 더 묵는다면 사람이 아니네”라고 호언장담을 하였다.
그러나 막상 송도로 가서 황진이를 만나보니 과연 뛰어난 사람이었다. 30일을 살고 어쩔 수 없이 떠나려 하니, 황진이가 누(樓)에 올라 시를 읊었다. 이 시를 듣고 소세양은 결국 탄식을 하면서 “나는 사람이 아니다”라며 더 머물렀다.
이 때 황진이가 읊은 시가 바로 <봉별소양곡세양(奉別蘇陽谷世讓)>이다.

 

 

 

  

 

 

三世金緣成燕尾 (삼세금연성연미) 삼세의 굳은 인연 좋은 짝이니
此中生死兩心知 (차중생사양심지) 이 중에서 생사는 두 마음만 알리로다
楊州芳約吾無負 (양주방약오무부) 양주의 꽃다운 언약 내 아니 저버렸는데
恐子還如杜牧之 (공자환여두목지) 도리어 그대가 두목(杜牧)처럼 한량이라 두려울 뿐.

 

 

 

 

 

一派長川噴壑? (일파장천분학롱) 한 줄기 긴 물줄기가 바위에서 뿜어나와
(용추백인수총총) 폭포수 백 길 넘어 물소리 우렁차다
飛泉倒瀉疑銀漢 (비천도사의은한) 나는 듯 거꾸로 솟아 은하수 같고
怒瀑橫垂宛白虹 (노폭횡수완백홍) 성난 폭포 가로 드리우니 흰 무지개 완연하다
雹亂霆馳彌洞府 (박난정치미동부) 어지러운 물방울이 골짜기에 가득하니
珠?玉碎徹晴空 (주용옥쇄철청공) 구슬 방아에 부서진 옥 허공에 치솟는다
遊人莫道廬山勝 (유인막도려산승) 나그네여, 여산을 말하지 말라
須識天磨冠海東 (수식천마관해동) 천마산야말로 해동에서 으뜸인 것을.

 

 

* 황진이가 자신을 포함한 송도삼절의 하나로 꼽을 정도로 사랑한 박연폭포. 송도의 기생이었던 황진이는 물론 이곳을 자주 방문하여 풍류를 즐겼을 것이다. 눈앞에 그려지는 듯한 유려한 표현은 박연의 장관을 짐작케 한다.
박연폭포는 현재 개성시 개풍군(開豊郡) 천마산(天摩山) 기슭에 있다.

 

 

 

 

  

 

 

古寺蕭然傍御溝 (고사소연방어구) 옛 절은 쓸쓸히 어구 옆에 있고
夕陽喬木使人愁 (석양교목사인수) 저녁 해가 교목에 비치어 서럽구나
煙霞冷落殘僧夢 (연하냉락잔승몽) 연기 같은 놀(태평세월)은 스러지고 중의 꿈만 남았는데
歲月嶸破塔頭 (세월쟁영파탑두) 세월만 첩첩이 깨진 탑머리에 어렸다.
黃鳳羽歸飛鳥雀 (황봉우귀비조작) 황봉은 어디가고 참새만 날아들고
杜鵑花發牧羊牛 (두견화발목양우) 두견화 핀 성터에는 소와 양이 풀을 뜯네.
神松憶得繁華日 (신송억득번화일) 송악의 번화롭던 날을 생각하니
豈意如今春似秋 (기의여금춘사추) 어찌 봄이 온들 가을 같을 줄 알았으랴

 

 

 

 

 

雪中前朝色 (설중전조색) 눈 가운데 옛 고려의 빛 떠돌고
寒鐘故國聲 (한종고국성) 차디찬 종소리는 옛 나라의 소리 같네
南樓愁獨立 (남루수독립) 남루에 올라 수심 겨워 홀로 섰노라니
殘廓暮烟香 (잔곽모연향) 남은 성터에 저녁연기 피어 오르네

 

 

* 황진이는 옛 고려의 수도인 송도에서 태어나 평생을 송도를 중심으로 살았다. 남아 있는 몇 편 안 되는 황진이의 시 중에 두 편이 송도를 노래한 것이다.

 

 


 

 

 

相思相見只憑夢 (상사상견지빙몽) 그리워라, 만날 길은 꿈길밖에 없는데
?訪歡時歡訪? (농방환시환방농) 내가 님 찾아 떠났을 때 님은 나를 찾아왔네
願使遙遙他夜夢 (원사요요타야몽) 바라거니, 언제일까 다음날 밤 꿈에는
一時同作路中逢 (일시동작로중봉) 같이 떠나 오가는 길에서 만나기를

 

 

* 이 시는 김안서 작사, 김성태 작곡으로 <꿈길에서> 라는 제목의 가곡으로 만들어졌다.

 

 

 

 

 

*<성옹지소록>에 보면 황진이가 거문고를 즐기는 모습이 나온다.

-황진이는 성품이 소탈하여 남자와 같았으며 거문고를 잘 타고 노래를 잘 불렀다.
-평생에 화담 선생을 사모하여 반드시 거문고를 메고 술을 걸러 선생의 거처에 가서 한껏 즐기다가 돌아가곤 했다.

*서경덕 또한 거문고를 즐겼으며, 거문고에 대한 몇 편의 시를 남기고 있다. 그의 성리설은 우주의 근원과 현상세계를 모두 '하나의 기(一氣)'로 파악하였는바, 그는 이 하나의 기를 '태허(太虛·우주 생성 이전의 상태)' 개념으로 표출하고 '선천(先天)'과 일치시켰다. 모든 현상세계가 생성되어 나오는 동정(動靜) 생극(生克)의 계기는 이 하나의 태허 속에 내포되어 있으며, '기'가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이라 해석한다. 그는 '이(理)'를 '기'의 위에 두기를 거부하고 '기'가 생성 작용하는 '후천(後天)'의 현상세계에서 그 정당성을 잃지 않게 하는 자기통제력으로 파악하였다.

즉 '이'는 '기를 주재하는 것'이라 하여, '이'를 '기'의 한 속성으로 한정한 것이다. 그가 <줄 없는 거문고에 새긴 글>과 <줄 있는 거문고에 새긴 글>을 나란히 지었던 것도 바로 소리 없는 가운데 소리를 듣는 음악의 본체와 소리 속에서 음률의 조화를 즐기는 음악의 응용으로, '태허―선천과 동정―후천'의 구조로 이루어진 그의 기철학적 세계를 생생하게 암시해주는 것이다.

 

 

 

 

 

無絃琴銘(무현금명) 줄 없는 거문고에 새긴 글 <화담 서경덕>

 

1.
琴而無絃, (금이무현) 거문고에 줄이 없는 것은
存體去用. (존체거용) 본체(體)는 놓아두고 작용(用)을 뺀 것이다.
非誠去用, (비성거용) 정말로 작용을 뺀 것이 아니라
靜基含動. (정기함동) 고요함(靜)에 움직임(動)을 함유하고 있는 것이다.
聽之聲上, (청지성상) 소리를 통하여 듣는 것은
不若聽之於無聲, (불약청지어무성) 소리 없음에서 듣는 것만 같지 못하며,
樂之刑上, (악지형상) 형체를 통하여 즐기는 것은
不若樂之於無刑. (불약악지어무형) 형체 없음에서 즐기는 것만 같지 못하다.
樂之於無刑, (악지어무형) 형체가 없음에서 즐기므로
乃得其 , (내득기 ) 그 오묘함을 체득하게 되며,
聽之於無聲, (청지어무성) 소리 없음에서 그것을 들음으로써
乃得其妙. (내득기묘) 그 미묘함을 체득하게 된다.
外得於有, (외득어유) 밖으로는 있음(有)에서 체득하지만,
外得於無. (내득어무) 안으로는 없음(無)에서 깨닫게 된다.
顧得趣平其中, (고득취평기중) 그 가운데에서 흥취를 얻음을 생각할 때
爰有事於絃上工夫 (원유사어형상공부) 어찌 줄(絃)에 대한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가?


2.
不用其絃, (불용기현) 그 줄은 쓰지 않고
用其絃絃律外官商. (용기현현율외관상) 그 줄의 줄소리 밖의 가락을 쓴다.
吾得其天, (오득기천) 나는 그 본연을 체득하고
樂之以音. (락지이음) 소리로써 그것을 즐긴다.
樂其音, (락기음) 그 소리를 즐긴다지만,
音非聽之以耳, (음비청지이이) 소리는 귀로 듣는 것이 아니요,
聽之以心. (청지이심) 마음으로 듣는 것이다.
彼哉子期, (피재자기) 그것이 그대의 지표이거늘
曷耳吾琴. (갈이오금) 내 어찌 거문고를 귀로 들으리?

琴銘(금명) 거문고에 새긴 글 <화담 서경덕>

1.

鼓爾律, (고이율) 그대의 가락을 뜯으며
樂吾心兮, (락오심혜) 나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諧五操, (해오조) 여러 가지 곡조를 고르되
無外淫兮 (무외음혜) 밖으로 지나치진 않는다.
和以節, (화이절) 강단으로써 조화시키어
天其時兮, (천기시혜) 날이 가고 사철이 바뀌듯하며,
和以達, (화이달) 통달함으로써 조화시키어
鳳其儀兮. (봉기의혜) 봉황새도 법도를 따라 춤추게 한다.

2.

鼓之和, (고지화) 그것을 뜯어 조화시킴으로써
回唐虞兮, (회당우혜) 요순시대로 돌아가며,
滌之邪, (척지사) 사악함을 씻어냄으로써
天與徒兮. (천여도혜) 자연과 융화되는 사람이 된다.
操?洋, (조아양) 높다란 소리?넓은 소리를 타지마는
人孰耳兮. (인숙이혜) 그 누가 귀담아 듣겠는가?
繁而簡, (번이간) 번거롭기도 하거니와
有如味兮. (유화미혜) 간략한 데 뒷맛이 있느니.

 


偶吟(우음) 우연히 짓다 <화담 서경덕> 

 

殘月西沈後(잔월서침후) 잔월도 서쪽으로 진 뒤에
古琴彈歇初(고금탄헐초) 오랜 거문고 타기를 비로소 쉬네
明喧交暗寂(명훤교암적) 밝고 소란함과 어둡고 적막함이 섞이니
這裏妙何如(저리묘하여) 이 속의 오묘함이 어떠하냐

 

 

 

 

* 황진이의 임종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 바로 백 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이다. 평생 황진이를 못내 그리워하고 동경하던 그는 마침 평안도사가 되어 가는 길에 송도에 들렀으나 황진이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절망한 그는 그길로 술과 잔을 들고 무덤을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다음의 시조를 지어 황진이를 애도했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紅顔)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盞)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조정의 벼슬아치로서 체통을 돌보지 않고 한낱 기생을 추모했다 하여 백호는 결국 파면을 당하며 얼마 지나지 않아 임종을 맞게 된다. 슬퍼하는 가족들에게 "내가 이같이 좁은 나라에 태어난 것이 한이로다" 하고 눈을 감았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