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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墓誌) 고려 국 광정대부 첨의평리 예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상호군 치사 윤공 묘지명-이곡(李穀)-

천하한량 2007. 2. 14. 18:24

묘지(墓誌)
 
 
고려 국 광정대부 첨의평리 예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상호군 치사 윤공 묘지명(高麗國匡靖大夫僉議評理藝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上護軍致仕尹公墓誌銘)

 

 


 이곡(李穀)

공의 휘는 선좌(宣佐)요, 자는 순수(淳?)이며, 영평군(領平郡)이 본향으로 삼한공신(三韓功臣) 신달(莘達)의 후손이다. 신달의 현손(玄孫) 태사 문하시중(太師門下侍中) 관(瓘)이 오랑캐를 평정하고 국토를 개척하여 왕묘(王廟)에 배향되었고, 관의 손자인 태사 문하시중 인첨(鱗瞻)은 난을 평정하고 나라를 바로잡아 국가에 훈공이 있었다. 인첨이 판예빈성사(判禮賓省事) 종해(宗海)를 낳았고, 종해는 내고 부사(內庫副使) 세방(世芳)을 낳았고, 세방은 증 판사재시사(贈判司宰寺事) 응식應植)을 낳았고, 응식이 증 첨의평리(贈僉議評理) 균(均)을 낳았는데, 균이 증 찬성사(贈贊成事) 송세견(宋世堅)의 딸에게 장가 들으니, 공에게는 고비(考?)가 된다.
공은 나면서부터 영리하여 7세에 능히 글을 지었고, 무자년 과거에 제1등으로 급제하여 김해(金海)의 장서기(掌書記)를 거쳐 내직으로 들어와서 비서랑(秘書郞)에 보직되어 문한서직(文翰署直)으로 있다가 여러 번 당후관(堂後官)에 천전하고, 정미년에 충선왕(忠宣王)이 왕위를 이어 정사하게 되어 여러 관원을 도태하매 좌정언(左正言)에 임명되고, 재차 우사보(右思補)로 전직하여 언부 산랑(?部散郞)을 겸하였으며, 외임으로 나가서 회양도(淮陽道)를 안렴 하였고, 다시 내서 사인(內書舍人)ㆍ선부 의랑(選部議郞) 등의 직에 옮겼으며, 임자년에 전라도를 순안할 때는, 옛날의 말고삐를 잡고 민정을 살피며 도끼를 가시고 형정을 집행하던 풍모가 있었고, 그 일이 왕의 귀에 들려서 도진령(都津令)에 승진되었다.
계축년에 왕이 충숙왕(忠肅王)에게 왕위를 전하니, 충숙왕은 전부터 그 이름을 들은 바 있어 성균좨주를 제수하고 명하여 부인(符印)을 맡겨 왕의 좌우에 있도록 하였으며, 인하여 《자치통감》을 강의하게 하였다. 또 감찰 집의(監察執義)에 전직하였다가 중간에 사고로 파직되었는데, 신유년에 전직에 다시 복직되었다. 이해에 심왕(瀋王)이 원 나라 영종(英宗)에게 잘 보여서 왕을 무고하여 그 자리를 빼앗으려 하니, 벼슬 줄이 떨어질까 근심하는 무리들이 모두 심왕에게 붙었는데, 그 일당 수십 명이 홀연히 도성으로부터 와서 말하기를, “심왕이 이미 이 나라를 얻었으니, 국민들이 어찌 지금 왕의 비행을 써서 원 나라 조정에 보내지 아니 하려는가.” 하고, 수십 장의 종이에 써서 민천사(旻天寺) 문 위에 펴서 붙이고 백관을 불러 거기에 서명하게 하니, 모든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달려갔으나 공만은 홀로 말하기를, “나는 우리 왕의 비행을 알지 못하거니와 신자로서 임금을 참소한다는 것은 개나 돼지도 하지 않는 일이다.” 하고는 그 서장에 침을 뱉고 가니, 이로 말미암아 대간과 문한서(文翰書)의 관원들이 서명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뒤에 일이 다 정돈되고 나서 중서성(中書省)에서 그 서명한 서장을 왕에게 돌려보내니, 왕이 그 중에 서명하지 않은 사람의 수를 세어보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윤모(尹某)가 헌사(憲司)에 있지 아니하였던들 그 밖의 사람들은 꼭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그때에 왕이 5년 동안이나 원(元) 나라에 억류를 당하여 재물을 뇌물로 다 쓰고 고갈하니, 심왕의 무리들이 그런 줄 알고서 부고(府庫)를 봉쇄하고 물화의 수송을 방해하므로 공은 찰관(察官) 조관(趙琯)에게 격문을 보내어 창고 주관하는 자를 독책하니, 물자의 운반이 비로소 행하게 되었다. 을축년에 왕이 본국으로 돌아와서 판전교(判典校)를 제수하고, 통헌계(通憲階)로 승진하였다. 조금 뒤에 민부 전서(民部典書)로서 한양 윤(漢陽尹)이 되어 나가고 나서 바로 왕이 공주와 같이 용산(龍山)에 가서 좌우의 측근자에게 이르기를, “한양윤 윤이 청백하고 검소하기 때문에 목민관으로 삼았으니, 너희들은 부디 그를 흔들어 혼탁하게 하지 말라.” 하였다.
신미년에 연로함을 진달하고 퇴직을 구하여 치사(致仕)하였고, 을해년에 왕이 친히 수령을 내었는데, 계림 윤(鷄林尹)에 이르러 붓을 놓고 한참 생각하고 나서 말하기를, “조정에 신하가 가득히 있으나, 윤윤(尹尹)만한 사람이 없다.” 하고, 즉시 공에 주의(注擬)하였으니, 왕에게 신임을 얻은 것이 이와 같았다. 공이 다시 큰 고을에 윤(尹)이 되어, 더욱 청렴하고 더욱 근로하여, 무릇 백성의 병폐가 되는 일은 반드시 제거하려고 힘썼고, 백성에게 이로운 일이면 이를 시행하여 하나도 놓치는 것이 없었다. 병자년에 첨의 평리(僉議評理)의 벼슬로 올리고 인하여 치사하게 하였다.
계미년 9월 모(某) 갑자(甲子)일에 경미한 병을 얻으니, 자녀를 불러 앉히고 말하기를, “지금 사람들이 흔히 형제간에 서로 화목하지 못하는 것은 재물을 다투는 일로 연유하기 때문이다.” 하고, 아들 찬(粲)에게 명하여 문서를 쓰게 하고, 가산을 고르게 나누어 주고 나서 또 경계하기를, “화목하게 지내고 다투지 말라는 것으로 너희들 자손에게 훈계한다.” 하고, 말을 마치고는 의관을 바르게 하고 단정히 앉아서 서거하였다. 모월 모일에 북원(北原)에 장사하니 나이 79세였다.
부인은 윤(尹)씨니 국학 대사성(國學大司成) 해(諧)의 딸이다. 아들 셋을 낳았으니, 맏아들 체(?)는 공보다 먼저 죽었고, 다음은 찬(粲)인데, 급제하여 지금 전의 시승(典儀寺丞)이 되었고, 딸은 대호군 유양준(庾良俊)에게 시집갔다. 계실은 승평군부인(昇平郡夫人) 박(朴)씨니 아들 둘을 낳았는데, 음(陰)은 급제하여 지금 통례문 지후(通禮門祗候)가 되었고, 막내는 머리 깎고 불도(佛道)를 배웠으며, 두번째 계실은 임(林)씨인데 아들이 없다.
공은 평생에 집안 살림을 다스리지 아니하였고, 성품이 술을 마시지 않아서 다른 사람이 일찍이 그가 희롱하고 해학하거나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며, 교제를 삼가고 응락을 신중히 하였다. 혼자서 있을 때에도 항상 손님을 대함과 같이 공경히 몸을 가지고 오직 경사(經史)를 스스로 즐겨하며, 의심나는 것을 와서 묻는 자 있으면 늘 경(經)에 의거하여 대답하였으며, 노장(老莊)의 서적과 형명(刑名)의 학문도 궁극히 연구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으므로, 학자들이 많이 따랐다. 문장도 맑고 민첩하여 정언(正言) 이상의 관직을 겸하고 있었으므로, 한때의 표전문(表?文)은 그의 손에서 나온 것이 많았다.
장사한 지 7년 뒤에, 나와 같은 해에 과거에 급제한 우대언(右代言) 윤택(尹澤)이 그가 지은 공의 행장을 가지고 와서 묘명(墓銘)을 청하면서 말하기를, “슬프다. 이 어른이 비록 나의 고모부이나 은혜는 아버지와 같다. 마침 공이 돌아갔을 때에, 내가 남쪽 지방에 있었으므로 장사에도 오지 못하였고, 장사 날이 또 임박하여 묘명도 갖출 여가가 없었다. 사람의 묘에 명하려면 우리 윤공 같은 분이라야 가히 부끄러울 것이 없을 터인데, 오히려 지금까지도 묘명이 없이 있었으니, 한스러울 뿐이다. 자네는 남의 묘명을 많이 하였을 것이나, 또한 우리 윤공 같은 분이 일찍이 있었던가.” 한다. 나는 사양할 말이 없어 그냥, “그렇지, 그렇지.” 하고 명한다. 명에 이르기를,

사람들은 가난함을 근심하는데 / 人以貧憂
공은 부유한 것을 부끄럽게 여겼고 / 公以富羞
어떤 이는 임금 앞에 아첨도 하건만 / 或?于君
공은 곧은 것으로서 알려졌네 / 公以直聞
누가 그 벼슬 높은 것 만을 주장하던고 / 孰尸厥爵
벼슬이 그 덕만은 못하리라 / 爵劣于德
덕과 나이가 함께 높았으니 / 德與齒尊
공의 존귀를 말해 무엇하리 / 公貴何言
재식과 명망이 출중하였지만 / 才名出衆
등용할 길이 막혔네 / ?其見用
등용의 길이 막혀 있었지만 / 見用之?
공은 또한 서운해 하지 않았도다 / 公亦不?
혁혁하게 빛난 자 그 누구이던고 / 赫赫者誰
다 민멸하지만 / 泯滅如?
공은 죽었어도 오히려 산 것과 같으니 / 公死猶生
이 묘비에 새겨져 있는 명을 볼지어다 / 視此刻銘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