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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墓誌) 대원 고 장사랑 요양로 개주판관 고려국 삼중대광 흥녕부원군 영예문관사 시 문정 안공 묘지명-이곡(李穀)-

천하한량 2007. 2. 14. 18:23

묘지(墓誌)
 
 
대원 고 장사랑 요양로 개주판관 고려국 삼중대광 흥녕부원군 영예문관사 시 문정 안공 묘지명(大元故壯仕郞遼陽路蓋州判官高麗國三重大匡興寧府院君領藝文館事諡文貞安公墓誌銘)

 

 


 이곡(李穀)

내가 경사(京師)에 있을 적에 근재(謹齋)가 앓아 누웠다는 소문을 듣고 돌아와서 문병을 하였다. 나를 보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나는 세상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하며, 그 아들 종원(宗源)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자네가 만일 나를 생각한다면 우리 아들을 잊지 말게.” 하고, 또 묘지(墓誌)를 부탁하면서 말하기를, “내 평생에 아무것도 자랑할 만한 것이 없지만 내가 네 번이나 법관이 되어 무릇 종이나 백성들을 억누르는 자는 처리하여 제대로 하였으니, 이것이 기록할 만한 일이네.” 하였다. 내가 듣고 슬퍼하면서 우선 대답하여 말하기를, “병들었다고 어찌 다 낫지 않으리오. 말이 어찌 이렇게 급합니까.” 하였는데, 아, 천명을 미리 아는 군자라고 말할 것이다. 이미 죽어 장차 장사를 지내려 하는데 공의 아우 보(輔)는 나와 동년(同年)이라, 공의 행장을 가지고 와서 명문을 청한다. 아, 내가 일찍이 공에게 수업하였으며, 공이 또한 친히 명령하였는데 감히 사퇴할 것인가.
공의 휘는 축(軸)이요, 자는 부지(富之)이니 복주 흥녕(福州興寧)이 본향이다. 증조부는 득재(得才)이며, 조부는 희서(希?)이니 모두 본부에 호장(戶長)을 하였다. 부친 석(碩)은 급제하고 그만 은거하면서 벼슬을 하지 않으니, 이 때문에 그 관직은 모두 증직이다. 모친은 흥녕군 대부인(興寧郡大夫人) 안씨(安氏)이니, 같은 고을 사람 검교 군기감(檢校軍器監) 성기(成器)의 딸이다.
공은 나면서부터 총명이 뛰어났고 독서할 줄 알면서는 힘써 배우고 문장을 잘 지으며, 성균시에 합격하고, 진사 시험에 뽑혀 금주사록(金州司錄)에 보직되었으며, 예문춘추관 검열 수찬에 뽑혔다. 다시 향시에 합격하여 사헌규정에 임명되었으며, 계해년에 또 향시에 제1등으로 합격하였다. 갑자년에 경사(京師)에서 정대(廷對 임금이 친히 뽑는 과거, 제과〈制科〉라고도 한다)에 제3부 갑(甲) 7명 중에 한 사람인데, 칙명(勅命)으로 개주판관(蓋州判官)을 제수하였다. 그때 충숙왕(忠肅王)이 황궁[輦?]에 머물게 있게 된 지 4년이었다.
공이 동지(同志)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임금의 근심은 신하의 욕이며, 임금이 욕을 보면 신하는 죽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배운 것이 이러하다.” 하며, 이에 상서하여 왕의 죄 없음을 호소하니, 왕이 심히 아름답게 여겨 성균악정(成均樂正)에 특진시키니, 개수태수가 사람을 보내어 예로 청하였다. 왕이 바야흐로 마음에 들어 임용하였으므로, 본국을 떠나 임소(개주판관)에 가지 못하였다.
악정(樂正)에서 전법(典法)ㆍ판도(版圖)ㆍ군부(軍簿)ㆍ전리(典理)의 네 총랑(摠郞)으로 전직하고 우사의 대부(右司議大夫)에 영전하였다. 영릉(永陵 충혜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명하여 강릉도(江陵道)를 안무하게 하였다.
문집(文集)이 있었으니 《관동와주(關東瓦注)》라 한다. 재차 판전교 지전법사(判典校知典法事)에 임명되었다. 충숙왕이 복위하자 무릇 영릉에서 귀여움을 받던 자는 모두 쫓겨났는데, 어떤 사람이 공을 쫓겨난 자의 친한 이라 하여 그 직을 파면당하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얻는 것은 제 덕이요, 잃은 것은 친한 이 때문이다.” 하였다. 얼마 후에 전법판서(典法判書)에 기용되었다가 후에 또 내시 가운데에 세도하는 자의 비위를 거슬려 파직을 당하였다.
영릉이 복위하자 다시 전법 판서 동지공거(典法判書同知貢擧)에 기용되어 지금 판밀직사사 이공수(李公遂) 등 33명을 뽑았는데, 세상에서들 선비를 얻었다고 칭찬하였다. 판서에서 감찰대부로 전직하였는데, 악정(樂正) 이상으로 있을 때는 관직을 항상 겸하여, 비록 헌사(憲司)의 우두머리에 있을 때도 오히려 그대로 하였으며, 원 나라에 보내는 표전(表箋)과 사명(詞命)이 많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
계미년에 검교평리로 나가서 상주 목사(尙州牧使)가 되었는데 상주는 복주(福州)와 접경하여 았으며, 대부인이 고향에 있으므로 왕래 문안하면서 효도를 다하였다. 갑신년 봄에 왕(충목왕)이 새 정치를 하는데 먼저 정승될 사람을 의논하여 부사밀직으로 불렀다가 조금 후에 정당문학에 승진하고, 이듬해에 첨의평리(僉議評理)를 더하였다. 정해년 가을에 병이 났는데 흥녕군(興寧君)을 제수하니, 대개 정사 보는 이들이 우리 선비들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명(命)이 있었던 것이다. 그해 겨울에 공론이 떠들썩하게 일어나서 처음대로 복직하였다. 무자년 봄에 병이 다시 일어나서 이에 치사(致仕)하기를 청하니 여름 6월 초하루에 다시 흥녕군을 제수하였으며, 직품을 올려 개부(開府)로 하였다.
21일에 이르러 부음(訃音)이 알려지니 왕이 유사를 명하여 조상하고 증여함을 예로써 하고, 시호를 문정(文貞)이라 하며 백관이 모여서 장사지내게 하니, 나라와 같이 한 생애에 모자람이 없다고 이를 만한 것이다. 7월 11일에 대덕산(大德山)에 장사지냈다. 향년(享年) 67세이다.
부인은 감천군부인(甘泉郡夫人) 문씨(文氏)이니,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귀(龜)의 딸인데 2남 1녀를 낳았다. 맏아들은 종기(宗基)이니 보마 배행수 별장(寶馬陪行首別將)인데 먼저 죽었고, 다음 아들은 종원(宗源)이니 급제하여 현재 유비창부사(有備倉副使)가 되었다. 딸은 별장 정양생(鄭良生)에게 출가하였다. 두 아우가 있었으니, 보(輔)는 급제하였고 경사(京師) 을유년 과거에 합격하여 요양성 조마(遼陽省照磨)에 제수되었는데, 근친하러 귀국하여 현재 우대언(右代言)이 되었으며, 집(輯)은 급제하여 현재 성균좨주가 되었다. 선공(先公)이 일찍 세상을 떠나니 공이 두 아우들을 가르치는데 자기 소생이나 다름없이 하여 성인(成人)이 되게 하였으므로, 그 아우들이 공을 섬기기를 아버지같이 섬겼다. 본국 제도에 세 아들이 과거에 합격하면 그 어머니는 종신할 때까지 나라에서 먹여준다. 그런데 공은 두 아우와 함께 이미 과거하였고, 또 그 중씨(仲氏)와 더불어 모두 황조(皇朝) 갑과에 합격하였으니 실로 세상에서 드문 일인데 이 모두가 또한 공의 교양(敎養)의 힘이다.
공은 마음가짐이 공정하고 집을 다스리기를 부지런하고 검소하게 하였으며, 발언할 때에는 명확하게 하여 꾸며대는 말이 없었다. 관직에 있어서는 부지런히 일하고 게으른 기색이 없으며, 착한 일을 보면 칭찬을 그치지 않았기 때문에 칭찬이 많았고, 나쁜 일을 보면 피하며 가까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망이 적었다. 스스로 거처하는 데를 이름하여, ‘근재(謹齋)’라고 하였으니, 여기서도 그 뜻을 알 만하다.
명문에 이르기를,

수하지 아니했다 하랴 / 謂非壽耶
나이가 7순에 가까웠으니 / 年簿七旬
귀하지 아니했다 하랴 / 謂非貴耶
지위가 여러 봉군 중의 제1이었네 / 位冠諸君
아우 있고 자식이 있으며 / 有弟有子
덕도 있고 칭찬도 있다네 / 有德有言
나의 명문은 과장 아니라 / 我銘不諛
공의 봉분 그대로이네 / 維公之墳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