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墓誌)
고려국 중대광 첨의찬성사 상호군 평양군 조공 묘지(高麗國重大匡僉議贊成事上護軍平壤君趙公墓誌)
이곡(李穀)
옛날 원(元) 나라 세조황제(世祖皇帝)가 이미 천하를 통일하고, 수천 리 밖에 있는 나라까지도 포용하여 편안하게 하고는, 우리 충헌왕(忠憲王 고려 제23대 왕 고종(高宗))의 정성껏 귀부(歸附)하심과, 충경왕(忠敬王 고종의 아들. 고려 제24대 왕 원종(元宗))의 근로(勤勞)를 다하심을 아름답게 여겨, 덕을 높이고 공을 갚는 은전을 행하여, 이에 황제의 따님을 충렬왕(忠烈王 고려 제25대 왕)에게 강가(降嫁)시키니, 그 이실(貳室 황제의 사위를 맞는 집)로 삼은 은혜와 날마다 세 번 접견한 총애는 천하에 비할 곳이 없었다.
이때를 당하여 어질고 재능 있는 신하가 모두 나와서, 분주히 보좌하여 삼한(三韓)의 왕업을 빛냈으니, 정숙(貞肅) 조공(趙公)은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분이었다. 정숙공의 휘는 인규(仁規)이니, 벼슬이 첨의 중찬(僉議中贊)에 이르러서 평강부원군(平康府院君)에 봉하였다. 이미 중흥의 공은 세우고 몸이 상상(上相)의 자리에 앉으니, 훈공으로나 연덕(年德)으로나 성대히 원로대신이 되었고, 아들이 많고 인후하여 모두 능히 그 가정에 전래를 이어 공명과 부귀가 한때에 으뜸 되었는데, 공은 그 중에서 막내였다.
공의 휘는 위(瑋)요, 자는 계보(季寶)이며, 평양 상원(祥原)이 본향이다. 증직(贈職)으로 추밀원 부사인 영(瑩)의 손자이며, 사재경치사(司宰卿致仕) 조공(趙公) 온려(溫呂)의 외손이요, 관군 만호(管軍萬戶) 나공(羅公) 유(裕)의 사위이다. 나서 9세 때에, 가문의 공훈으로 창희궁 권무(昌禧宮權務)에 임명되어, 다시 섭호군(攝護軍)에 옮기고, 다섯번째로 대호군(大護軍)에 전직되었다. 경술년에 밀직 좌부대언(密直左副代言)에 임명되고 네 번 옮겨서 우대언(右代言)이 되었으며, 을묘 년에 언부 전서(?部典書)에 제수되고, 다음해에 총부 전서(摠部典書)로서 행평양윤사(行平壤尹事)에 임명되고, 또 그 다음해에 외임으로 나가 청주 목사(淸州牧使)가 되었다. 북쪽 변계에는 사람들이 횡폭한 자가 많았고, 남방에는 풍속이 또한 간활하였다. 공은 한결같이 은혜를 베풀며 위력으로 누르지 않고, 평온무사하기로 기필하여 송사를 다스리는 여가에는 술도 마시고 사냥도 하면서 지나니, 사람들이 처음에는 그의 덕을 알지 못하였다가, 그가 떠나간 뒤에야 비로소 그 어진 덕을 사모하였다.
연우(延祐 원나라 인종(仁宗)의 연호) 말년에 충숙왕(忠肅王)이 심왕(瀋王 연안군 고(延安君高)를 일컬음)과 사이가 벌어지매, 어떤 자가 공을 이간하므로 공에게 원윤(元尹)을 제수하여 일 없는 한산한 자리에 두었는데, 일이 다 진정되고 나서 공이 다른 마음이 없음을 충숙왕이 알고, 계유년에 다시 지밀직(知密直)에 임명하고, 을해년에는 판밀직(判密直)으로 옮기고, 조금 뒤에 첨의 찬성사(僉議贊成事)에 승진시켰다. 이때에 충숙왕이 정사를 게을리 하고 모든 나라 일을 재상에게 맡기니, 공은 대체를 잡고 미세한 지엽의 것은 힘쓰지 않으며 발언이 강직하니, 사람들이 그 공정한 것에 심복하여 그 아버지의 풍모가 있다 이르고, 장래에 총재(?宰)가 될 것을 기대하였다. 무인년 윤달에 어떤 일로 인하여 벼슬에서 물러나니, 이때 재상에게 은총으로 습봉(襲封)하는 예에 따라 평양군(平壤君)으로 봉하였다. 그리고 나서 충숙왕이 세상을 버리니, 사태도 또한 따라서 변하였다. 공은 집으로 물러 나와 날마다 친구들과 모여서 담화와 술잔으로 일을 삼았다.
지정(至正)으로 연호를 고치던 해(1341년) 봄에, 남에게 화를 입히기 즐겨하는 무리들이 공이 손들과 같이 나라 정책을 논의하였다고 무고하니, 영릉(永陵 충혜왕(忠惠王))이 몹시 성을 내어 공을, “복주목(福州牧 지금의 안동(安東))으로 폄직하여 위사(衛使)로 하여금 압송하게 하라.” 명하고, 한 시각의 지체도 허락하지 않았다. 공은 창황하게 도성을 떠나 임지로 달려갔는데, 마음이 자못 즐겁지 못하여 점점 화기(和氣)가 손상되었고, 이미 집으로 돌아왔을 때 병이 나서 행보가 어렵고, 말이 어둔하여 백방으로 치료하여도 효험이 없었다. 정해년 가을에 부원군(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으나 병환으로 사은하지 못하고, 무자년 11월 을사일에 본가에서 돌아가니, 나이가 62세였다.
부인 나(羅)씨는 통의군부인(通義郡夫人)을 봉하였으며, 아들 흥문(興門)을 낳았는데 지금은 소부윤(少府尹)이 되었고, 손자가 한 명 있다. 다음해 3월 기미일에 송림원(松林原)에 장사하였는데, 장사하려 할 때에, 그의 형 원조삼장법사선공(元朝三藏法師旋公)이 나에게 묘지(墓誌)를 부탁하며 말하기를, “우리 조카가 바야흐로 만리 먼 길에 분상하러 왔기 때문에, 와서 청탁할 겨를이 없으므로 내가 대신 청한다. 내 아우의 평생 뜻은 그대가 알고 있는 바이다. 바라건대 묘지를 써 달라.” 하고, 또 말하기를, “우리 아우의 덕과 행실은, 진실로 옛날 사람들에게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 마땅히 다시 한 번 일어나서 동국 사람이 기대하고 바라는 것을 위로하여 줄까 하였더니 아, 이제는 모두가 끝나고 말았다. 또 그의 죽음이 비록 국상(이때 충목왕(忠穆王)의 상중이었다)중에 있었으나, 여러 사람의 공론으로 시호를 논의하여 이름을 바꾸었고, 관에서 부담하여 모여서 장사하였으니, 그의 생전의 덕이 사람들의 마음을 깊이 감동하게 함이 이와 같은데 어찌 명(銘)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내가 이를 허락하고 명하기를,
하늘이 재능을 내림에 / 天之降材
이 사람에게 더욱 후히 하였도다 / 彌篤于人
어떻게 후히 하였던가 / 何以篤之
밝은 임금을 만났고 어진 어버이를 두었으니 / 有君有親
정숙공의 아들이요 / 貞肅之子
충숙왕의 신하이다 / 忠肅之臣
이미 힘을 다하여 효도하고 / 旣能竭力
또 몸과 생명을 다하여 충성했다 / 又致其身
이를 준 자에게 뿔을 제거한 것은 / 予齒去角
품부함이 본래 같지 않은 것이려니와 / 賦已不鈞
덕을 주고서도 수를 빼앗았으니 / 予德奪壽
하늘의 마음을 알 수 없구나 / 天或匪人
내가 공의 묘에 명을 써서 / 我銘公墓
슬퍼함은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니 / 其悲爲民
부끄럽지 않은 말로 엮어 / 措辭無愧
이 좋은 옥돌에 새기노라 / 刻此貞珉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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