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저(雜著)
책제(策題)
이곡(李穀)
묻노라. 홍범팔정(洪範八政)에 식(食)이 제일 머리에 있고 화(貨)가 그 다음 간다. 대개 식은 백성에게 있어서는 하늘인데, 이른바 화는 무엇인가. 화를 전폐(錢幣)라고 이름한다면, 4대의 글에 그 이름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태공(太公)이 구부환법(九府?法)을 지었는데, 전(錢)이 그 하나로 끼었으니, 그 법이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는가. 관자(管子)에 이르기를, “탕(湯)이 장산(莊山)의 금으로 돈을 만들었고, 우(禹)가 역산(歷山)의 금으로 돈을 만들었으니, 대개 이것은 처음에는 흉년 때문에 만들어 백성을 구원한 것이다.” 했다. 그러면 곡식과 의복은 근본이 되고, 돈은 말단이 되는데, 뒷세상에 그 말단이 되는 것을 중하게 여기고, 그 근본이 되는 것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돈에 대한 규격과 무게가 여러번 고쳐진 것은 사기(史記)에서 볼 수 있는데, 이른바 삼수(三銖)이니, 반량(半兩)이니, 오수(五銖)이니 하는 것들 중에는 어느 것이 가장 적당한가. 선유(先儒)들은 돈의 폐단을 의논하여, 완전히 돈을 폐지하고 곡식과 의복만을 쓰려고 하였으니 그렇게 해서 되겠는가.
저폐(楮幣) 가 성행하면서부터 전폐(錢幣)가 행하지 않았으니, 그 법이 또 어느 때 시작되었는가. 저폐와 전폐의 이 두 가지가 처음 생겼을 때를 생각해 보면 대개 전(錢)은 어머니가 되고, 저(楮)는 아들이 되어, 이것은 그 한 시대에 알맞은 것을 참작하여 만든 것에 불과하다. 지금 와서 그 어머니가 되는 것은 폐지해 버리고, 그 아들이 되는 것만을 쓰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생각하건대 원(元)나라가 나라를 세워 나라 다스리는 법을 정할 때, 예와 악(樂)도 제정하였는데, 돈에 대해서는 근세의 누습을 그대로 인습하였으니, 이것이 가하겠는가. 나라를 도모하는 신하와 헌의(獻議)하는 선비가 언제나 이 전(錢)과 저(楮)를 겸행하여, 그 경중을 알맞게 하려고 말을 하는데, 전은 결국 쓸 수가 없겠는가. 전은 쓰지 않지만 민간에는 아직도 쓰는 사람이 있는데, 유사(有司)가 금하지 않는 것은 백성의 편리를 위해서 금하지 않는 것인가. 전은 만들기가 어려운데도 사사로이 만드는 이가 오히려 많고, 저는 만들기가 쉬우므로 더욱 위조하는 이가 많아서, 비록 극형에 처해도 능히 이것을 그만두지 않으니, 앞으로 이 폐단을 어떻게 막겠는가. 우리 나라는 옛날에 전법(錢法)이 없었고 오직 은폐(銀幣)만을 썼는데, 이것이 오래됨에 폐단이 생겨서, 날로 그 무게가 가벼워져서 지금에 와서는 폐지해버리고 쓰지 않으니, 요사이 나라의 경비가 점점 부족되고 민생이 점점 곤궁해지는 것이 은폐를 안 쓰는 폐단에 의한 것이 아닌가.《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선왕(先王)이 이룬 법을 살펴서 길이 허물이 없도록 하라.” 하였으니, 화폐 역시 한 큰 성법(成法)인데, 폐지하여 버리고 쓰지 않는 것이 가하겠는가. 이제 농(農)과 용(用)과 식(食)과 화(貨)의 정사를 본말(本末)이 서로 알맞고 상하가 서로 흥족(興足)하도록 하고자 하는데, 여기에 좋은 꾀가 무엇인가. 제생들은 경국 제세의 술로써 뽑아 조정에 올리려 하니 필시 옛날의 제도에 통하고 시무(時務)를 알 것이다.
자세히 말하여 보라.
[주D-001]저폐(楮幣) : 저(楮)는 종이라는 말이요, 폐(幣)는 돈이란 말이다. 중국에서 남송말년에 종이로 돈을 인쇄하여 쓰는 법이 나왔는데, 그것을 초표(?票)라 하였다. 그 법이 원(元) 나라에 계승되고,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조 말년에 그것이 수입되어 조선 세종대왕 초년까지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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