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저(雜著)
혐의를 받았을 때 취할 태도에 대한 해석[釋疑]
이곡(李穀)
사람이 자기가 한 일이 없는 것을 가지고 의심한다면, 반드시 변명하는 것이 가하다. 그런데 혹 반드시 변명하지 않을 것이 있으니, 만약 성급하게 이것을 변명하려 하면, 저 사람의 의심이 더 심해진다. 그러므로 천천히 여유를 두고 변명하면, 이치가 풀릴 것이다.
어떤 집에 계집 종이 있었는데, 그 주인을 위해 유아에게 젖을 먹였는데, 얼마 있지 않아 아이를 배어 낳은 것을 주인여자가 알고는 매질하면서, “대개 유모 되는 법은 남자를 절대로 꺼리는 법인데, 그것은 유모가 아이를 배면 그 유아에게 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는 이에 그 죄가 하나이고, 너는 유모가 될 때부터 한 발도 문밖에 내어 디디지 말고, 밤낮으로 아이나 안아주고 업어주며 집안에 있으라고 하였는데, 감히 네가 남자와 내통을 하였으니, 이에 죄가 둘이다.” 하고 심문하였다.
계집 종은 겁이 나서 애매한 말로 바깥 주인을 지목하니, 그 주인 여자는 다시 말이 없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주인이 막 중국에 갔다가 반 년만에 돌아와서 그 말을 듣고, “아, 내가 다른 미인도 가까이 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유모인 너에게 있어서야 더 말할 것이 있느냐. 그러나 내가 어찌 너와 같이 변명하겠는가.” 할 뿐이었다. 그뒤에도 유모가 자복을 하지 아니하므로, 주인 여자의 의심은 끝내 풀리지 않았지만, 주인은 여기에 대해서 태연하였다.
나는 이런 말을 듣고 해석을 내렸다. 비록 계집 종으로 하여금 주인과 관계가 없음을 자복 하게한다 하여도 주인 여자의 의심은 풀리지 않을 것이니, 응당 주인은 태연하게 있을 수밖에 없다. 직불의(直不疑)가 한 집에 묵고 있던 사람의 잃어버린 금(金)을 대신 물어준 일이 있었는데, 이것은 그가 그후에 잘못 가져간 이가 나옴으로 해서 자기가 변명이 될 줄을 어떻게 미리 알고 하였겠는가. 그가 갚아준 속셈은 이러하였을 것이다. “대개 사람이 나를 의심하는 것은 나의 본래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신용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마음을 분개하고 입을 놀려서 관청에 소송하고, 신명(神明)에게 물어보아 반드시 변명을 하고 난 뒤에 말아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마는, 그러나 차라리 내가 밖으로 허명(虛名)을 받는 것보다 안으로 실덕(實德)을 닦아서, 이것이 쌓이고 쌓여 자연히 발현되어 사람들이 모두 심복을 하면, 비록 전일에는 참으로 도둑놈이 되었다 하더라도 금일에는 그 아름다운 것이 충분히 전일의 허물을 덮어 줄 것이니, 하물며 전일에 도둑질함이 없음에 있어서랴.” 한 것이니, 이것이 고인들이 자기 반성을 귀하게 여긴 것이다. 정말 사람이 자신을 반성하여 스스로 믿음이 있으면 천지ㆍ귀신도 믿을 것인데, 더욱이 내가 사람들에 대해서야 무슨 염려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누명 가운데는 반드시 밝힐 필요가 없는 것도 있고, 또 밝히려고 해도 잘 안 되는 것이 있으니, 부옹(婦翁 아내의 아버지)을 때렸다고 하는 말같은 것은, 그에게 아내가 없다는 것을 잘 살펴보면, 부옹을 때린 일이 없음을 알 수 있고, 증삼(曾參)이 사람을 죽였다고 하는 말같은 것은, 진짜 증삼이 아닌 것을 알게 되면, 분명해질 수 있는 것이지마는, 그러나 들으면 의심나기 쉽고 이 의심을 분별하기가 어려워서, 이것을 분별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더 그 죄가 드러나는 것이 있으니, 오직 간악한 도둑에 대한 것이 그러하다. 그래서 법을 만드는 이는 도둑에 대한 그 조목을 더욱 엄하게 하여 귀로 듣고 마음으로 의심하는 것은 묻지 말라고 금해 두었다. 그러나 그 의심이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것을 법령으로는 막을 수 없는 것이니, 변명하지 않는 것이 낫다. 그러므로 직불의가 참으로 도둑질을 한 것처럼 변명하지 않고 있었는데도, 다행히 잘못 가져간 이가 금을 돌려 보냈으니, 여기에 금 주인은 스스로 자기 실수를 후회하여 몸을 어찌할 줄 몰랐으며, 다른 사람을 대할 면목도 없었고, 직불의의 점잖은 명예가 한때 성하였으며 책에까지 실리게 되었으니, 앞에 말한 주인 여자의 소행도 이 일과 근사하구나.
나는 또 이것으로 말미암아 그 계집 종이 죄를 면하기 위하여 악을 주인에게 넘기는 것을 미워한다. 이것은 남의 아래에 있는 사람에게 경계가 되는 점이다. 대개 비첩(婢妾)이 주인에게, 아들이 어버이에게, 신하가 임금에게 대한 그 의(義)는 똑같은 것이다. 옛말을 듣건대 소진(蘇秦 옛날의 말 잘하던 사람)은 말하기를, “객이 먼 곳에 아전이 되어 갔는데, 그의 아내가 다른 사람과 간통하였다. 그의 남편이 돌아올 때가 되어서 그 간부(姦夫)가 걱정을 하니, 원의 아내가 말하기를, ‘걱정 마세요. 내가 사약을 넣은 술을 빚어놓고 기다리고 있소.’ 하였다. 사흘 뒤에 그의 남편이 돌아오므로 그녀는 비첩을 시켜 그 술을 원에게 주기로 하였다. 그런데 비첩이 사실대로 원에게 말하려고 하다가, 그 주모를 쫓아낼까 걱정되어 말을 하지 않으려 하니, 그 주인을 죽일까 걱정이 되어 그만 일부러 넘어지면서 술을 땅에 버렸다. 주인이 성을 내어 그 비첩에게 매질을 50번이나 하였다.” 하였으니, 이것은 이른바 충신(忠信)을 하다 윗사람에게 죄를 얻은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계집 종은 거짓말로 죄를 면하려 하고, 또 주인과 주모 사이에 틈이 나게 하려고 하였으니, 아, 소인의 마음은 참으로 두렵구나. 주인은 누구냐 하면 삼한(三韓)의 명가(名家)인데, 호는 양파(陽坡)선생이다. 나와 더불어 잘 지내는데, 지금 함께 같이 도하(都下 서울)에 살고 있다. 이런 사실을 이야기하다가 한바탕 웃고 난 뒤에 이 글을 짓게 되었다. 그래서 계자(季子 소진의 자〈字〉)의 말을 인용하여 남의 아래에 있는 사람의 경계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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