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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문(祭文) 교감 김천조가 어머니에게 제사지내는 글을 대신 지음-이곡(李穀) -

천하한량 2007. 2. 14. 18:03

제문(祭文)
 
 
교감 김천조가 어머니에게 제사지내는 글을 대신 지음[爲金校勘天祚祭母文]
 

이곡(李穀)

부모가 자녀를 기를 때에 충효를 기대하였으니, 진실로 그 뜻을 잇지 못하면 누가 본연의 마음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생각하건대, 저의 이 조그만한 몸은 아들의 도를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심에 어머니께서 몹시 쓸쓸하신데도 저는 벼슬과 학문을 구하려고 어머니 곁을 멀리 떠났습니다. 남북으로 떠돌아다니다가 마침내 서울에 갔으나 조그마한 벼슬도 이루지 못하고 다만 어머니와 이별만 하였습니다. 어찌 돌아가기를 생각하지 아니하였으리오마는 이 포의(布衣)가 부끄러웠습니다. 과거가 일어남으로부터 강습을 부지런히 하여 과장(科場)에서 재주를 다투어 다행히도 두 번을 급제하였습니다. 진사(進士)가 되어서 와서 뵈오니 한 번 빙긋이 웃으셨습니다. 3년을 한림(翰林) 벼슬을 맡았는데, 한림 벼슬은 벼슬 중에 낮은 벼슬이었습니다. 그 후 예각(藝閣)에 가서 7년간 글을 교정하였는데, 이것은 임시직이었습니다. 벼슬이란 헛이름은 소용이 없으니 아들의 직분에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무진(戊辰)년에 와서 뵈오니, 어머니께서 비록 노병이었으나 심히 밝고 여위셨습니다. 그 이듬해 봄에 하직하고 가려 하니 감히 간다고 말씀을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이미 늙으셨으니, 어찌 간다고 하겠습니까. 그때 어머니깨서는 저를 격려하여 말씀하시기를, “네가 가는 것이 왜 그렇게 더디냐. 며느리가 조석으로 내밥을 맡고 있으니, 뜻으로써 봉양(奉養)하는 것을 네가 왜 의심하느냐. 네가 가서 노력하여 좋은 벼슬로 입신양명(立身揚名)해서 효도를 다하라.” 하시거늘, 그 가르침을 받들고 길을 떠났지만 마음은 불안하였습니다. 세월이 얼마나 되었는가. 겨우 1년이 지났는데, 그간 꿈에도 언제나 어머니를 생각하여 마음이 달리고 혼이 날아갔습니다. 그런데 부고가 문득 이르니 길이 한됨이 여기에 있습니다. 누구를 믿고 누구를 믿으리오. 모든 것은 끝났도다. 아, 슬프다. 아들이 7형제가 있어 자손이 번성하였습니다. 맏아들도 착하고 막내도 씩씩하여 부창부수에 밭갈고 길쌈해서 부모를 잘 받들었는데, 오직 나만이 그렇게 못하고 사지(四肢)를 게을리하여 나이 40이 넘도록 소용없는 것을 배워서 조그마한 녹으로는 반찬 한 가지도 제공할 것이 없었습니다. 뒤에 비록 뜻대로 되어 만종(萬鍾)의 녹을 얻는다 하더라도 어디에 베풀겠습니까. “쌀을 짊어지고 와도 드릴 곳이 없다.”고 한 말은 고인이 슬퍼한 것인데, 때가 두 번 오지 아니하니 후회한들 다시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한 잔의 전(奠)을 드리니, 정성과 슬픔이 한이 없도다. 생시와 같이 저의 이 애사(哀辭)를 들어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