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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贊) 후한 삼현 찬 병서 (後漢三賢贊 幷序 ) -이곡(李穀) -

천하한량 2007. 2. 10. 17:16

찬(贊)
 
 
후한 삼현 찬 병서 (後漢三賢贊 幷序 )

 

 


 이곡(李穀)

내가 역사를 읽다가 후한 영제(後漢靈帝)의 기사에서 천하에 이른 바 명현(名賢)이란 사람들을 모두 당고(黨鉤)로 얽어서 남김없이 죽여버렸다. 아. 화란(禍亂)이 어쩌면 이렇게 심하였는가. 그 사이에 몸을 깨끗이 하며 말을 삼가하여 그 화에 걸려들지 않은 사람은 더욱 얼마 없었다. 그 중에서 더욱 뚜렷한 인물을 뽑아서 글을 지어 그를 찬(贊)한다.
태원(太原)의 임종(林宗)은 그 이름은 곽태(郭泰)다. 공부를 많이 하고 사리에 밝았다. 처음으로 낙양(洛陽)에 나갔을 때에 한 번 보고 그에게 감탄한 이는 지혜로운 왕부(王符)와 공융(孔融)이었다. 인하여 이응(李膺)에게 소개하여 명성이 일반에게 알려졌다. 전송하는 수레 천 대나 되는 속에 배에 올라 고향으로 돌아갔다. 사방에 다니며 교육을 베풀어 거리의 건달도 감화를 받았다. 원(原)을 위로하여, 윤(允)을 경계하였고 모용(茅容)을 친구로 삼고 구향(仇香)은 스승으로 섬겼다. 깨어진 시루에 성격을 알았고 던진 술잔에도 인정이 보였다. 송충(宋沖)은 받자 하지 아니하였고 유자(孺子)의 말만을 받아들었다. 스승이나 친구로 삼을 수 없다고 이것을 안 사람은 범방(范滂)이었다. 흐린 세상에서 몸을 온전히 하였으니, 사람의 스승이며 도의 빛이로다. 그의 상대를 아직 보지 못하였다. 아, 선생이여.
유자 서서(孺子徐?)는 예장(豫章)이 고향이다. 자기 노력이 아니면 먹지 않았고 집이 가난하여 직접 농사지었다. 사람들은 그의 인격에 감복하는데 황제의 불음에도 나가지 않았다. 진번(陳蕃)에게 초청을 받아서 갔더니 의자 하나 내어 놓고 서로 맞이하였다. 관가에서 여러번 초빙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니 무슨 관계 있으랴. 부르는 데는 가지 아니하고 책상자를 지고 남의 집에 문상(問喪)하러 갔었다. 사방의 명사들이 모두 모여서 황경(黃瓊)을 조문(弔問)하러 왔었다. 처음엔 유자(孺子)를 아무도 몰랐는데 모두들 나중에 깜짝 놀랐다. 계위(季偉)가 쫓아가, 그와 만나서 친한 친구 대한 듯 반가이 맞이하였다. 그러나 나라일에는 대답하지 아니하고 농사짓는 일만 자상히 얘기했다. 임종(林宗)이 말하지 않았던 것과 비교할 때 누가 더 현명했던지 알 수 없도다. 아아, 어질도다. 영원히 남기신 덕 추앙하리라.
실천이 철저하여 말이 없던 사람으로는 진류(陳留)의 구향(仇香)이다. 나이가 40인데도 그의 이름 아는 이 없었다. 시골서 모두들 업신여겨서 마침내 무리로 벼슬에 나아가 포정(蒲亭)의 장(長)이 되었다. 인격으로 진원(陳元)을 감화시키니 세상에서 비로소 이름을 알았다. 당초에 원(元)의 어미가 자식을 사랑하지 아니하여 불효라고 고발하였다. 향은 곧 깜짝 놀래어 교화를 펴지 못한 자신을 책하였고, 그들을 지성으로 타일러서 모자간에 전과 같이 잘 지내게 되어 사랑과 효성이 서로 극진하였다. 고성(考城)의 왕환(王奐)이 봉급을 덜어 여비를 장만하여 그를 태학(太學)에 입학시키어 학업을 이루게 되었고 임종(林宗)이 그를 스승으로 섬기니 그의 도가 마침내 빛났다. 그러나 출세를 단념하고 여생을 집에 마쳤으니 아아 일대의 영웅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