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書)
여 동년조중서최헌납 서(與同年趙中書崔獻納書)
이곡(李穀)
가난하고 문벌 없는 집안과 궁벽한 시골의 선비는 원래 스스로 출세할 수 없고 반드시 청운의 지기가 있어 그를 끌어서 써야만 이에 그 굽은 것을 펴고 그 움츠린 것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나는 본래 노둔하고 비겁해서 진퇴를 부끄러워하여 머뭇머뭇했고 지위가 높은 관리의 집을 바라보면 함정 같아 발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으며, 높은 갓을 보면 귀신같아 머리를 감히 들지 못하여 이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뒤져 한 번도 임명에 젖지 못했습니다. 두 공에게 지우(知遇 학문이나 재능을 인정받아서 좋은 대우를 받음.) 함이 있은 이래로 이미 청운지사(靑雲之士)를 얻어 끌어서 쓸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조화(造化)가 날이 오램에 이르러 여러 가지 아름다운 꽃이 수하(手下)에서 거듭거듭 불어남을 보는데 그늘 뒤에 있는 한 꽃가지가 예대로 푸르고 있습니다. 그런 연후에야 지우도 보장할 수 없고 조화도 혹 잊는 일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옛날에 원 찬(袁粲)은 단양 윤(丹陽尹)이 되어 일찍이 들 사이를 내쳐 걷다가 한 선비를 만나서 곧 불러 함께 흥치 있고 달게 술을 마셨는데, 이튿날 이 사람은 지우(知遇)한 줄 생각하고 문에 이르러 천거를 요구하자, 찬이 이르기를,
“어제의 음주는 짝이 없어 애오라지 서로 맞았을 뿐이다.”
하고, 마침내 함께 서로 만나지 않았습니다. 지금 내가 지우라고 말하는 것이 어찌 이 사람에 닮지 않음을 알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에서 집정한 것을 조화에 비교하는 것은 잊는 일이 없고 사심이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남쪽 가지가 북쪽 가지보다 먼저 피는 것은 대개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의탁한 바의 형세가 선후의 사이를 만드는 것뿐입니다. 어찌 남쪽 가지는 이미 꽃이 피고 꽃이 피었다 열매를 맺으며 열매를 맺었다 시드는데, 북쪽 가지가 되었다 해서 오히려 예대로 푸르를 이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이른바 사람이 오히려 유감스럽게 여기는 바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일찍이 사람의 빈궁과 영달은 운수가 있는 것이니, 그것을 구한 것도 운수요, 구하지 못한 것도 또한 운수라고 생각했습니다. 구하다 얻지 못하여 무안해 하는 것이 어찌 구하지 않아서 얻지 못해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것과 같겠습니까. 이로 말미암아 구하지 아니하고 오늘날에 이르렀는데, 그것을 구한 사람은 모두 채찍을 잡고 먼저 간 것을 본 연후에야 내가 꾀하는 것이 크게 우회하는 것임을 알았으나, 운수는 족히 말할 수도 없습니다. 엎드려 보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대저 사람이 할 바는 충과 효입니다. 옛사람이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연로한데도 벼슬하지 않음은 불효라고 했으니, 내가 그것을 구하는 누(累)를 면하지 못하는 것도 이 까닭입니다. 그것을 구하다 또한 얻지 못한다면 진실로 운수인 것이니, 내가 대체 다시 무엇이라 말하겠습니까. 황공하고 황공하여 절합니다.
'▒ 가정선생글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書) 우본국재상 서(寓本國宰相書) -이곡(李穀) - (0) | 2007.02.10 |
---|---|
대언관청파취동녀 서(代言官請罷取童女書) -이곡(李穀) - (0) | 2007.02.10 |
문(文) 조 당고 문 병서 (吊黨錮文 幷序 ) -이곡(李穀) - (0) | 2007.02.10 |
찬(贊) 후한 삼현 찬 병서 (後漢三賢贊 幷序 ) -이곡(李穀) - (0) | 2007.02.10 |
찬(贊) 순암 진찬(順菴眞贊) -이곡(李穀) - (0) | 2007.0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