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啓)
상 정당 계(上政堂啓)
이곡(利穀)
무릇 물(物)이 불평(不平)하면 우는 것은 심중(心中)에 감동되어 밖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시기는 얻기 어렵고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기에 졸렬(拙劣)한 자는 뒤떨어지고 교묘한 자는 앞서는 법입니다. 감히 심정을 피로(披露)하여 높은 들으심에 더럽히오니 한 번 들어주시기 바라나이다. 사람의 출처(出處)는 세상이 잘되고 못되는 것입니다. 어려서 배워 커서 행하는 것, 이것이 유학(儒學)을 배운 보람이고, 물이 깊으면 벗고 건너고 얕으면 옷을 걷고 건너는 것은 내 몸 가짐의 방법입니다. 그러나 만나기 어려운 것은 기회이고 행(行)하여야 할 것은 도(道)입니다. 뗏목[?]을 타고 바다에 떠가려 한 것이 공자(孔子)의 본심(本心)이 아닐 것이요, 폐백(幣帛)을 싣고 나라 국경에 나간다고 한 것에서 고인(古人)의 뜻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은 70번이나 점을 쳐 보기도 하며, 혹은 3천 면이나 되는 글을 아뢰기도 하는 것입니다. 비록 감노(監奴)에게 설할 생각은 없습니다마는 그렇다고 어찌 이름을 도둑질하는 처사(處士)가 되겠습니까. 행적(行迹)은 황황(皇皇)하여 미치지 못할 것 같으나 마음만은 작작(綽綽)하게 여유가 있습니다. 설류(泄柳)가 목공(繆公)에게 신하노릇 하기를 부끄럽게 여긴 것에 대해 맹자(孟子)께서는 문을 닫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라고 나무랐고, 염구(?求)가 계씨(季氏) 집의 가신(家臣)이 되니, 중니(仲尼)께서는 북을 울리며 성토(聲討)하라 하였습니다. 의(義)와 이(利)의 분간을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되겠고, 나아가고 그만 두는 것을 아무렇게나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옛날 한유(韓愈)는 재상(宰相)에게 세 번 글을 올려 구품(九品) 벼슬을 얻었고, 소진(蘇秦)이 육국(六國) 정승의 인장(印章)을 허리에 찼으니 두어 이랑[二頃]의 밭을 의뢰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굽히고 곧은[枉直] 것이 다른 까닭으로 기회를 만나는 것도 같지 않는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정당(政堂)께서는 세상에 드문 영재(英才)로서 나라에 크게 쓰이었으니 임금님을 과실이 없도록 하시려면 선비를 빠짐없이 거둬들여야 할 것입니다. 아는 사람을 들어올리면 군자(君子)들이 발모(拔茅)하듯이 나올 것이요, 은혜를 미루어 주면 노인(老人)들이 결초(結草)하여 갚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맑은 것을 드날려 올리고 탁한 것을 헤쳐 버리니, 참으로 검붉은 색이 붉은 색을 현란하지 못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마치 악공(樂工)이 음률(音律)을 자세히 알아 금(金)?석(石)?사(絲)?죽(竹)?포(匏)?토(土)?혁(革)?목(木)이 서로 차례가 바뀌어지지 않고, 대목이 집을 짓는 데 있어 주두(株頭)?들보?문설주[店楔]가 다 제자리에 들어 맞게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에게 구비함을 구하지 않으시면 천리마(千里馬)가 오는 것도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낭서(郎署)에는 머리가 희었다고 탄식하는 이가 없을 것이요, 국풍(國風)에 시[緇衣之詩]를 이을 것입니다. 조화(造化)의 풀무 가운데 넓고 좁고 모나고 둥근 것이 구비되어 있지마는 남을 추켜 주는 붓 끝에는 누르고 날리고 일으키고 엎치는 것이 다른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오랫 동안 진흙에 서리어 있으면서 항상 물을 치고 놀고 날기를 희망하였으나 사해(四海) 안에 나를 알아주는 이를 만나지 못하여 10년 동안이나 길이 과거보는 수재(秀才)가 되었습니다. 수레와 면류관이 혹시 나올 것인지, 나이가 늦기 전에 뒤에 오는 자들이 모두 위에 올라가니, 뒷걸음치면서 앞으로 나아가려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고기가 아니니 어찌 물고기의 마음을 알 것인가. 와철(臥轍)의 붕어와도 흡사하고, 말[馬]이 없어서인가 말을 모르는 것인가. 곧 백락(伯樂)이 수레 채 잡는 것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기쁜 것은 때마침 성명(聖明)하신 임금을 만난 것이요, 마음으로 슬픈 것은 집에 노모(老母)가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늘이요 운명인 줄 알겠고, 남들이 〈벼슬을〉 구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화장품(化粧品)이 어찌 없으리요마는 누구를 위하여 얼굴을 곱게 단장하며, 비록 지혜가 있다 하더라도 시세(時勢)를 잘 타는 것만 못한 것입니다. 여태껏 나아가나 물러가나 이루어진 것 없으니 누가 좌우에서 천거(薦擧)하여 주겠습니까. 만약 도끼를 휘두르기를 사양하지 않는다면 영인(?人)의 바탕이 될 것을 자신(自信)할 것이요, 진실로 옥(玉)을 바쳐 팔리기를 원한다면 초왕(楚王)의 의심을 걱정하겠습니까. 외람되게 호랑이를 그릴 재주를 가지고 정서(?鼠)를 판별하는 감식(鑑識)을 모독(冒瀆)하나이다. 은혜의 물결을 내리어 이 침체한 몸을 구원하여 주십시오. 한 자도 짧은 점이 있고, 한 치도 긴 곳이 있다 하오니[尺有所短 寸有所長], 쓰이는 자리를 따라 노력할 것입니다. 저울은 사정으로 평평해지는 것이 아니요, 거울은 사정으로 비춰 주는 것이 아니오니, 사정없이 뽑아 주심을 어찌 저버리겠나이까.
[주D-001]뗏목을 …… 것이요 : 공자가 말하기를, “도(道)가 행해지지 않아, 뗏목을 타고 바다에 떠가려 하면 나를 따를 사람은 유(由) 뿐인가.” 하니, 자로(子路)가 듣고 기뻐하였다 한다. 《논어(論語)》공야장(公?長)
[주D-002]소진(蘇秦)이 …… 찼으니 : 소진이 합종설(合從說)을 부르짖으며 조(趙)ㆍ한(韓)ㆍ위(魏)ㆍ연(燕)ㆍ제(齊)ㆍ초(楚) 육국(六國)의 재상(宰相)이 되어 진(秦) 나라에 대항하였다.
[주D-003]두어이랑 …… 습니까 : 《사기(史記)》 소진전(蘇秦傳)에, “나로 하여금 낙양(洛陽) 성(城) 근처에 부곽전(負郭田) 이경(二頃)이 있었더라면 내가 어찌 육국상(六國相)의 인(印)을 할 수 있었을 것인가.”라고 하였다.
[주D-004]군자들이 …… 것이요 : “발모여이기휘정(拔茅茹以其彙征 띠 뿌리를 뽑듯이 모두들 나을 것이다).”라 했다. 《주역(周易)》
[주D-005]은혜를 …… 갚으리라 : 《좌전(左傳)》 선공(宣公) 15년의 위과(魏顆) 고사(故事). 즉 위과가 진(秦) 나라 군사에게 패(敗)하고 진나라 역사(力士) 두회(杜回)를 사로잡았다. 위과의 부친 위무자(魏武子)에겐 첩(妾)이 있었는데 무자가 병이 들자 첩에게 개가하라 했다가, 죽을 당시엔 순사(殉死)시키라 한 것을, 위과가 부친의 말을 어기고 첩을 개가시켰다. 그 첩의 죽은 부친의 귀신이 딸의 은혜를 갚기 위해 풀을 매어 매듭을 지어 두었다. 두회가 거기에 걸려 넘어져 포로가 된 것이라 한다.
[주D-006]나이가 …… 올라가니 : 한(漢) 나라 급암(汲?)이 무제(武帝)에게, “폐하께서 신하를 쓰는 것은 마치 섶을 쌓아 올리는 것과 같아, 뒤에 오는 사람이 위에 오르게 됩니다.” 하였다.
[주D-007]영인(?人)의 …… 될 것을 : “장석(匠石)이 영인(?人) 코에 묻은 흙을 도끼를 휘둘러 깎아내니 장석의 기술보다는 그것을 참고 서 있는 영인의 바탕이 더욱 훌륭하다.” 했다. 《장자(莊子)》
[주D-008]옥(玉)을 …… 습니까 : 변화(卞和)가 형산(荊山)에서 박옥(璞玉)을 얻어 왕에게 올렸다가 발을 잘리웠다.
[주D-009]외람되게 …… 재주 : 마원(馬援)이 한 말에, “호랑이를 그리다가 잘못 되어 개새끼를 그리고 말았다.”는 것이 있다.
[주D-010]정서(?鼠)를 …… 하나이다 :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가 표범 문채가 있는 쥐를 얻으니, 두유민(竇攸?)이, “정서(?鼠)입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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