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 조선정부가 우편 전담부서인 우정총국(郵政總局)을 세우고
서울~인천구간에서 처음 시행했다.
당시 우정총국 인천분국의 초대국장이 월남 이상재(李商在) 선생이었다
인천은 국내에서 서울 다음으로 일반 우편업무를 시작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에 의해 강제개항(1883년)되던 해 일본인들이 본국과 통신을 하기 위한 수단중 하나로 인천에 「우편국」을 설립한 것이다. 따라서 당시 「우편국」을 이용하던 사람들은 주로 일본인이었다. 그러다 이듬해 우리 조정에서도 우정총국 인천분국을 열면서 실질적인 「인천우체국」의 역사가 시작됐다. 서울에 이어 국내 우편업무를 취급했으므로 인천우체국은 결국은 아주 빨리 근대우편업무를 시작한 셈이다.
우정국 백년사에 따르면 1880년(고종 17년) 5월 월남 李商在(이상재)와 洪英植(홍영식)은 제 2차 수신사 김광집을 따라 일본에서 4개월 머무는 동안 일본우정사업의 총 본산인 농상공부역체로(農商工部驛遞寮)의 요두(寮頭)인 마에지미를 찾았다. 이들은 우편제도를 국내에 도입하기 위해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며 일본 우편사업 현황을 살폈다. 마에지미는 회고집을 통해 『조선으로 부터 정치상의 사찰원을 일본에 보내 왔다. 그 가운데 이상재와 홍영식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역체국(驛遞局)에 와서 우편에 관한 일들을 질문하였다. 나는 관계되는 모든 서류를 속관(屬官)으로 하여금 그 실무의 실지를 설명케 했으며, 조선에 빨리 우편을 개설하도록 권하였다···』고 전한다.
우리 조정은 우정총국 인천분국 문을 열면서 후일 민족지도자로 국민들에 추앙을 받았던 월남 이상재선생(1850∼1927)을 인천분국 초대 분국장으로 임명했다. 월남은 당시 일본의 우편제도를 조정에 보고하면서 우체국 설립의 필요성을 강조해 국내 우편제도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렇게 세운 우정총국은 그해 일어난 갑신정변 등 우여곡절을 겪다 몇달 지나지 않아 폐지됐다. 이후 11년 뒤인 1895년 6월 일본의 우편국과 별도로 우리 국민을 위한 「우체사(郵遞司)」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우체사는 그 무렵 일본인들이 주로 이용하던 인천우편국과는 별도로 운영됐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우편에 대한 주민들의 인식이 부족한 데다 이미 일본인들이 우체국을 운영하고 있던 터라 우체사 이용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후 우리나라는 1900년 만국우편연합(UPU)에 가입, 외국 우편을 처리하며 발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당시 인천과 서울에 이어 경기도 이천·개성·안성·수원, 충청도 충주·공주·홍성·청주, 전라도 전주·광주·남원·무안·제주 등 전국에 걸쳐 4백여 곳의 임시우체소를 두었다. 그러다 1905년 4월에 맺은 한·일 통신협정으로 인해 인천우체사도 일제의 우편국에 흡수, 폐지됐다. 결국 해방 전까지 우리 국민들은 일본인이 운영하는 우편제도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 인천우체국이 사용하고 있는 중구 항동 6가 1번지에 위치한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은 지난 82년 인천시 지방 유형문화재 8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국전쟁 당시 포화 속에서 몇 안남은 「개항관련」 건물중 하나다. 인천우체국은 여자우편배달부를 처음 도입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78년 남인천우체국에서 우리나라 1호 여자집배원을 채용, 당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1946년 인천우체국에 입사한 뒤 78년 남인천우체국 초대국장을 지낸 정덕용씨(73)는 『인천우체국은 우리나라 우편업무를 잉태한 우정백년사에 없어선 안될 중요한 곳』이라며 "우정인들은 통신수단이 부족했던 때 빨간색 자전거를 타고 시내 곳곳을 누비며 시민들의 애환을 실어 날랐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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