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지사 월남 이상재 선생의 뜻을 기린 표창, 제24회 수상자 4인 선정돼
항일지사 월남 이상재(月南 李商在 1850~1927) 선생의 뜻을 기리고, 바람직한 노후를 사는 원로에게 사회적으로 치하하기 위해 제정한 제27회 월남장(月南章) 수상자가 선정됐다. 이번 수상자는 총 4명으로 80~83호에 해당된다. 독립운동가 정기복(82) 선생, 한국방송사의 선구자 최장봉(78) 선생, 생물학자 정용재(78) 박사, 공직자이자 사회봉사가 고정환(74) 선생이 각각 월남장의 명예를 안게 됐다.
사단법인 한국평생교육복지진흥회 월남장증정위원회 박규채 회장은 “수상자들이 하나같이 너무나 훌륭한 분들이다”며, “고매한 원로를 ‘심사’라는 잣대로 평가하는 것이 송구스러워 누구도 심사위원 명단에 오르기를 꺼린다. 그래서 월남장은 전통적으로 심사위원을 발표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항일독립운동가 정기복 선생 |
한국방송언론의 개척자 최창봉 선생 |
80호 월남장 수상자 정기복 선생은 구국운동에 몸을 내던졌던 항일 독립운동가이다. 동경유학 시절 각계각층 인물들을 규합해 독립운동의 필연성을 강조했으며, 일황을 살해할 방법을 찾았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1938년 2월 중순경 대구에서 맨주먹으로 일본경찰과의 접전을 벌이다가 투옥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81호 수상자 최창봉 선생은 한국 주요 방송국들의 개국을 주도했으며 그 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방송계의 거목이다. 최 선생은 우리나라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인 대한방송(HLKZ-TV)의 개국에 참여해 텔레비전 문화를 실험했으며, 국영 한국방송(KBS-TV) 개국의 책임을 맡아 본격적인 텔레비전 시대를 열었다. 뿐만 아니라, KBS-TV가 세계적인 방송이 되기 위해서는 ‘정부로부터 독립해 공사 형태로 전환돼야 한다’고 생각, 이를 실현해 공영방송의 기반을 다지기도 했다. 그밖에도 민영방송인 문화방송, 동아방송을 개국하는 등 한국 방송언론의 장을 개척한 장본인이다.
최 선생은 ‘앵무새 사건’으로도 유명하다. 1964년 ‘6·3 사태’ 와중에 정부는 동아방송이 ‘앵무새’라는 시사프로그램을 통해 내란을 선동하고 학생시위를 배후 조종했다며 당시 방송부장이던 최 선생을 구속했다. 최 선생은 이 같은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방송언론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으며, 한국문화예술진흥원에 재직하며 문화예술 창달에 힘쓰는 등 문화 전반의 성장에 큰 기여를 했다.
한국 생물학 발전의 선구자 정용재 박사 |
봉사와 지역발전에 한평생 바친 고정환 선생 |
82호 수상자 정용재 박사는 평생 생물학과 생물교육 발전을 위해 몸 바친 공적이 높게 평가됐다. 정 박사는 한국생물학계의 태두(泰斗)며, 해방 직후의 미개척 한국유전학 중 집단유전학에 큰 족적을 남겼다. 특히, 선진국의 과학교육 최신조류를 도입, 한국생물교육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한국생물과학협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국내외 권위 있는 학술잡지에 논문 및 저서를 다수 발표하는 등 학술 발전에 공헌한바 또한 크다. 생물학 연구와 생물교육은 물론, 대학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대학발전에도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83호 수상자 고정환 선생은 오랜 공직 생활을 하면서 청렴하고 정직한 공직상을 정립해왔다. 고 선생은 ‘주민이 있는 곳에 행정이 있어야 한다’ ‘행정은 봉사’ ‘주민이 고마움을 느끼게 하라’는 신념아래 김천시장, 포항시장 등 공직 재직시 투철한 국가관과 사명감 및 봉사정신으로 솔선 수범해 주민에게 존경받았다.
특히 고 선생은 저소득층의 어려움을 알고자 주민의 집을 직접 방문해 고충을 듣고 도와주는 ‘어려운 가정 방문날’을 제정, 더불어 함께 사는 건전한 지역사회 분위기 조성을 위해 노력했다. 퇴임 후에도 고 선생은 ‘봉사는 정년이 없다’고 주장하며 현재도 어려운 이웃과 함께 하는 봉사활동에 여념이 없다.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김천한국전통춤회’ 등을 창립, 지역사회문화예술창달에도 앞장섰다.
지난 4월 18일 포항에서 제 27회 월남장 수상대상자를 선정하기 위한 추진위원회 전체회의가 열렸다. |
높은 인품, 긍지와 활기로 넘치는 노년
월남장위원회는 ‘사회적으로 원로를 우러르는 기풍을 장려하고 나아가서 바람직한 인간상과 본이 될 삶의 모습을 찾고자’ 월남상을 제정했다고 취지를 밝혔다.
월남상은 ‘인생을 어느 특정 연령기의 삶의 자세나 업적만으로 평가하지 않고 평생을 통해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를 중시한다는 전제 아래, 노년에 임해서도 긍지와 활기 그리고 높은 기품과 격조를 지닌 원로에게 주는 사회적 찬사의 표창’인 것이다.
이 같은 뜻으로 월남 이상재 선생을 사표로 월남장을 제정했다.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등에서 적극 활동하며 일찍이 민족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던 이상재 선생은 59세의 연세에 일개 사설 단체인 황성기독청년회(서울 Y.M.C.A의 전신)의 한 부서인 간사직을 기꺼이 맡아서 일했으며, 조선교육협회의 회장으로 민립대학 건설에 열정을 쏟기도 했다. 78세의 천수를 다할 때까지 이상재 선생은 늘그막을 오로지 적극적인 자세로 성심을 다해 살았다.
후세는 이 같은 그를 지칭해 ‘백발청년’이니 ‘구원청년’ 같은 호칭을 붙였다. 월남장위원회 박규채 회장은 “이상재 선생의 한 평생은 흠모하고도 남을만한 것이다”며, “특히 오늘날과 같이 노년층이 소외되고, 원로가 대접받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에서는 이상재 선생의 삶이 시사하는 바는 더욱 크다”고 강조했다.
월남장은 1977년 첫 수상자 문학박사이자 언론인 최은희 선생을 시작으로 해마다 열렸으며, 올해 24회까지 84명의 수상자를 선정했다. 이번 증정식은 11월7일 경북 포항시 시그너스호텔에서 열린다.
월남 이상재 선생 연보 1850 10월26일 충청남도 한산군 북면 종지동(현 서천군 한산면 |
정춘옥 기자 ok337@sisa-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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