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재/언론인·사회운동가
“세브란스의 에비슨 교장은 그를 ‘한국의 거인(巨人)’이라고 불렀다. 과연 그는 거인이었다. 서양서 손님이 오면 대개 선생의 가신 곳을 찾아 인사를 드리는 것을 영광으로 알았다. 영어도 한 마디도 못하는 영감 같은 초라한 이 노인을!”(김동길 교수의 기념강연 중에서) 세계 열강의 침탈야욕으로 겨레의 앞날을 가늠하기 어렵던 시대, 그는 선교와 교육·계몽의 기치를 들었던 개화의 선각자였다. 한말(韓末)과 일제 강점기의 정치가이자 언론인·사회운동가였던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1850~1927) 선생.
그의 80주기를 1년 앞두고 사상과 활동을 다시 짚어보는 학술세미나가 고향인 충남 서천에서 열린다. 서천군과 서울YMCA, 월남시민문화연구소, 한산이씨 진사공 종중은 17일 오전 10시~오후 1시 서천군민회관 대강당에서 ‘한민족의 등불, 월남 이상재: 새시대 새로운 정신으로 부활하소서’란 주제로 세미나를 연다.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는 기념강연 ‘월남 선생을 통해 본 지도자의 리더십’을 통해 1887년 월남 선생이 주미(駐美) 공사관의 일등서기관으로 부임했던 당시의 일화를 소개한다. 청나라측이 ‘모든 일을 우리에게 보고하라’고 우기자, 월남은 박정양 공사가 꾀병을 앓게 하고 혼자 청나라 공사관을 찾아갔다.
- 서울 종묘공원에 있는 월남 이상재 선생의 동상/조선일보
김 교수는 “공사관을 찾은 월남이 사리와 기개로서 이리 차고 저리 쳐서 마침내 상대방을 굴복시키고, 신임장 봉정(奉呈)은 우리가 단독으로 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면서 “요새 한국을 대표하는 외교관들도 월남을 생각하고 각성하라”고 목소리를 돋운다. 김 교수는 월남이 “잘못된 일을 싫어하셨지만 그 사람을 미워한 적이 없었고, 민족과 국가를 위해 일하셨지만 남에게 신세를 지거나 폐를 끼치는 일이 없었다”고 말한다.
이현희 성신여대 명예교수는 ‘월남 이상재 선생이 민족운동에 미친 영향’을 발표한다.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이 된 뒤 관직에 나간 월남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활동을 주도, 자유민권운동과 의회설립운동을 전개했다. 1902년부터는 기독교를 통한 국권 회복운동에 나섰으며, 일제 강점 이후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렀다. 조선교육협회 회장, 조선일보사 사장과 신간회 회장을 역임하며 민족 계몽과 좌우합작에 투신했다. 이 교수는 “월남 선생은 시대의 변화에 수용해 근대적 개혁을 추진해 갈 수 있었던 지도자였다”며 “늘 해학과 기지 속에서 젊고 여유 있게 살면서 민족의 단결만이 광복을 앞당길 수 있다는 것을 교훈으로 남겼다”고 말한다.
‘월남 이상재 선생과 YMCA’를 발표하는 민경배 백석대 석좌교수는 “월남의 공헌은 두 극단의 상반된 동력을 연계 규합시키는 데 있었다”고 말한다. 영혼과 육체, 계층, 장유(長幼),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연계를 추구한 그의 원대한 활동은 역사에 거대한 공적을 남겼다는 것. 지금의 분열된 사회상은 바로 월남의 ‘연계 동력의 원천’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주최측은 세미나에 맞춰 논문집 ‘월남 이상재의 사상과 활동연구’를 발간할 예정이다. 행사문의 (02)723-3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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