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민 교수의 한국교회 인물 이야기
YMCA서 기독사회운동 이끈 월남 이상재
민족 계몽 앞장선 '영원한 청년' … 좌우통합 '화합의 리더십'탁월
개화파 유학자이던 이상재는 한미수교 후 공사 박정양을 수행하여 일찍이 미국을 방문했다. 근대 문명의 수용 필요성과 기독교의 실제적 힘에 대한 나름의 견해를 지니게 된 계기로 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론 일본의 급속한 팽창과 위협을 크게 염려하였다. 일본시찰단의 일원으로 방일했을 당시, 도쿄의 병기창을 둘러보고 행한 이상재의 일갈은 후일을 예견하는 말로 오래 기억된다. “오늘 동양에서 제일 큰 도쿄의 병기창을 보니 과연 일본이 동양의 강국임을 알게 되었소. 그런데 한 가지 걱정은 성경에, ‘칼로 일어서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였으니 다만 그것이 걱정이오.”
문호개방에 대한 관심이 높고, 새로운 시대정신에 대한 이해가 깊었던 이상재는 기독교 개종 이전에도 성서를 즐겨 탐독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가 정작 진정한 기독교인으로서 신앙을 수용한 것은 1900년대 초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복역하였던 한성감옥에서였다. 이상재의 인품을 흠모하며 함께 활동했던 선교사 에비슨(당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및 연희전문학교 교장)은 월남의 부음을 듣고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선생이 철창생활을 하실 동안에 예수교의 독신자가 되셨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세주로 섬기셨는데, 그 때로부터 별세하실 때까지 이 신앙에 대해서는 조금도 변함이 없으셨습니다.”
이상재가 지도자로 활동하기 시작한 한국기독교는 민족사회에 있어 ‘기독교사회운동’의 신뢰성을 크게 얻었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청년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이상재의 활동은 한국기독교의 대(對)사회참여에 있어 시대적 모범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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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내 좌우(사회주의 성향과 민족주의 성향) 양 세력의 싸움이 치열한 상황에서 선생은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는데 자기가 필요하다면 나서야지 하는 태도이었다. 그리고 선생은 동업자(東亞日報)와 경쟁하지 말고 합심하여 민족의 계몽육성에 힘써야 한다는 조건을 붙이고 수락했던 것이다.”
이 시대의 사회나 교회나 모두 월남 이상재의 리더십이 새삼 그리운 것이 사실이다. 1927년 3월 29일 별세하여 사회장으로 장례가 엄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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