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당시 좌우익의 민족인사들이 민족유일당(民族唯一黨)을 위해 결성한 신간회에 선생이 초대회장으로 추대된 것은 이념을 초월해 이미 광범위한 민족적 신망을 얻고 있던 선생의 위상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선생은 미처 신간회의 활성화와 조국독립의 날을 보지못한채 서거했다.
선생은 언제나 청년의 마음으로 살아간 선각자였다. 고난의 일제시대에 선생은 우리 민족에게 희망을 심어주고 그 희망을 온몸으로 구현한 스승이었다.
선생은 슬하에 4형제를 두었으나 지금은 모두 작고하고 4남 승준(承俊)씨의 부인 송귀복(宋貴福)씨와 손자 홍직(鴻稙)․안직(安稙)․은직(垠稙)․강직(綱稙)씨가 생존해 있으며 은직씨가 서천에서 할아버지의 생가를 지키고 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지난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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