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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김명구 교수 서울장신대학교 )

천하한량 2007. 1. 29. 18:07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1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活動)과 사상

 

 

외부의 문명과 사상이 수용될 때에는 다각적인 문화·사상과의 접촉이 진행되며 이에 따른 대응작용(對應作用)도 활발해져 새로운 차원으로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 일부의 학자들은 19세기 말, 조선에서 일어났던 개화사상이 중국, 일본과 같이 체제 내의 요구(要求)로 생긴 것이 아니라, 주로 외부(外部)로부터의 침략에 대한 위기의식(危機意識)에 의해 촉발된 것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개화사상(開化思想)이 외부적 조건에 의해서만 당시의 조선정체(朝鮮政體)의 중심사상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러한 조건이 충족(充足)될 수 있었던 것은 서양문명을 수용할 수 있는 적극적이고 내재적(內在的)인 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19세기 조선에서 이러한 역할을 한 것은 종래의 주자학(朱子學) 전통이 도학주의(道學主義)와 이념(理念)에만 치중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민(民)의 경제적 안정과 국부(國富)를 추구했던 실학사상(實學思想)이었다. 근대적 개혁사상이라 할 수 있는 개화사상은 실학사상을 계승한 것으로 새로운 서양문물이 쇄도(殺到)하여 들어올 때 가시화(可視化)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 입교(入敎) 전(前)의 이상재는 개화관료로서 고종(高宗)의 절대적 신임 하에 개화정책(開化定策)을 수행하였던 박정양의 겸인으로 출발하였다. 그리고 그는 박정양이 별세하기 전까지 그의 적극적(積極的)인 후원 아래 관료와 사회활동가로 활약하였다. 박정양의 사상적 영향 아래서 이상재는 유가(儒家) 사대부(士大夫)들이 대부분 치렀을 새로운 문화나 사상에 대한 갈등을 극복하고 적응(適應)·조화(調和)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조선사회에 그러한 새로운 문명을 접목(接木)시키려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이상재의 사상은 기독교에 입교하기 전인 일본과 미국의 근대문명(近代文明)을 경험한 이전의 개화관료의 시절과, 기독교 입교(入敎) 이후의 근본적인 사상의 대(大) 전환(轉換)하게 되는 YMCA의 활동시기로 구분된다.
이 장에서는 기독교의 입교 전까지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적 성격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2.1 시대적 배경
18세기말부터 이른바 이양선(異樣船)이 빈번히 조선 해안(海岸)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당시 조선 정부는 이를 거절하고 쇄국(鎖國)을 고집하고 있었다. 그러나, 1860년(철종11년) 8월 영불(英佛)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占領)하는 사건과 1866년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와 관련한 프랑스 군함의 강화도 침공사건, 제너럴 셔먼호 사건,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 등으로 인해 서양세력에 대한 기왕(旣往)의 인식(認識)을 바꿔야만 하는 불가피한 상황(狀況)이 일어났다.

그런데, 동지사 일행(특히 역관)을 통해 국제사회의 실정을 접하게 되는 일부의 세력들이 기왕의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 세계관이 아닌 국제사회(國際社會) 속에서 조선의 명맥(命脈)을 보존(保存)하고 발전시키려는 의도(意圖)를 구체화해나가고 있었다.

이 세력의 중심은 평양에서 난동을 벌였던 제너럴 셔먼호 사건 당시 평양감사였던 박규수라 할 수 있다. 특히, 박규수는 당시의 국제정세 속에서 러시아의 남하정책(南下定策)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열강의 세력균형(勢力均衡) 속에서 조선이 살 길을 찾아야 된다고 인식하고, 이를 위해서는 전략적으로 개항(開港) 혹은 개화(開化)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확신을 김옥균, 김윤식 등 젊은 유가의 사대부(士大夫)들을 대상으로 의식화(意識化)하였다.

이러한 박규수의 노력은 결실을 맺어 박규수 사후(死後), 조선 사회에서는 박규수의 문하생이라 할 수 있는 젊은 양반들을 중심으로 개화운동(開化運動)이 전개되었다.

한편, 조선정부는 ‘위정척사(衛正斥邪)’와 ‘존화양이(尊華洋夷)’를 기치(旗幟)로 내건 보수적 양반 유생(儒生)들이 반발하고 개국(開國)을 요구하는 열강들이 밀려들어오는 상황에서 어느 한 쪽을 택해야만 하는 난관(難關)에 봉착(逢着)하였다. 선택(選擇)이 요구되던 때에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에 가게 된 김홍집은 청국공관에서 청국의 참찬관(參贊官) 황준헌으로부터 러시아의 남진(南進)에 대한 견제목적으로 지어진 『조선책략(朝鮮策略)』을 헌의(獻議)받았다.

이 내용은 앞으로 러시아의 침략은 반드시 아시아의 요충(要衝)인 조선부터 착수할 것이니 조선은 급히 러시아에 대해 방비(防備)하여야 한다는 것과, 청국과 친할 것이요, 일본과는 결맹(結盟)하고 미국과는 연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러시아의 남하(南下)를 두려워하고 있던 청국은 미국과 일본을 조선에 유입시켜 러시아를 견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2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이 때에『만국공법(萬國公法)』과 정관응(鄭觀應)의 『이언(易言)』이 기증되어 조선에 소개되었는데, 국제법을 소개한『만국공법(萬國公法)』은 조선이 서구 열강과의 국제관계, 열강의 정세, 조선 외교의 진로(進路)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기준과 참고자료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중국의 양무(洋務)개혁운동의 사상이 자세히 들어있는『이언(易言)』은 조선의 개화 지식사회로 하여금 세계의 정세와 서양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인식을 가속시켰다. 균세(均勢)·자강(自强)의 내용이 담긴『조선책략(朝鮮策略)』에 자극을 받은 조선정부는 러시아에 대한 경계와 함께 구미제국과 평화적으로 국교를 체결하고 통교(通交)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것은 조선정부가 기존의 공식정책이었던 쇄국정책(鎖國政策)을 포기하고 개방정책(開放政策)을 공식정책으로 바꾼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서구 열강들과의 교류에 대한 열망과 그 이론을 내부적으로 확보하고 있던 개화파들은 고종 임금이 사대적 국제관계를 청산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기로 결심을 굳히자 이에 고무되어 적극적으로 가세하였다.

조선정부는 1880년 12월부터 근대적 외교·통상(通商)과 부국강병책(富國强兵策)을 관장하고 처리할 행정기구의 개편에 착수하여 청(淸)의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모방하여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과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 내무부(內務府) 등, 국정의결 및 집행기구를 두고 그 산하에 기기국(機器局), 전환국(典煥局), 교환국(交換局) 등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중국의 양무(洋務) 자강(自强)의 모델을 알아보기 위해 어윤중으로 하여금 중국의 근대화 정책을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다.

또한, 짧은 시일에 서구의 근대화된 문명의 도입으로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루었다고 보고된 명치일본(明治日本)의 경험을 알아보기 위하여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을 일본에 파견하여 중국과 일본의 근대화를 비교하려 하였다. 이것은 근대화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서구열강(西歐列强)에 일반적으로 밀린 바 있던 중국의 방식에만 전적(全的)으로 신뢰를 보낼 수 없다는 조선정부의 판단일 수 있었다. 64명으로 이루어진 일본의 조사시찰단은 삼권분립사상(三權分立思想)에 입각한 정치·행정제도, 서구법사상에 기초한 근대적 사법제도(司法制度), 근대적 군사제도(軍事制度), 재정·예산·조세 등 경제제도(經濟制度), 실리위주의 외교·통상제도, 실용주의적 근대 교육제도(敎育制度), 산업진흥정책 등에 관한 지식과 정보를 파악했다. 일본의 근대화에 찬탄을 보낼 것이라는 일본측의 기대와는 달리, 어윤중을 제외한 조사(朝士) 대부분은 일본의 근대문명에 대해 비판적 자세를 견지하였다.

이들은 일본의 근대적 제도, 부국강병 등 외형적인 성장에 대해서는 인정했다. 그러나, 그로 인해 발생된 재정(財政) 압박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한편 서구에 대한 무분별한 수용에 치중한 나머지 전통적인 동양사상(東洋思想)을 단절했다고 비판(批判)하였다.

미국에 대한 호의적인 인식 아래 조선정부는 1882의 미국과 조미조약(朝美條約)을 맺은 것을 계기로 1883년 민영익을 정사(正使)로 하고 홍영식을 부사(副使)로 하여 미국에 보빙사(報聘使)를 파견하였다. 민영익으로 하여금 아더(Chester A. Arthur) 대통령에게 국서를 봉정(奉呈)하게 하였다. 그리고 청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갑신정변(甲申政變) 이후인 1887년에 박정양을 초대 주미전권 공사로 임명하는 등 개방정책(開放政策)을 신속하게 시행(施行)하였다. 조선정부가 미국과 국교(國交)를 맺는다는 것은 전통적인 사대관계(事大關係)를 단절(斷切)하고 독립국이 되겠다는 의지(意志)라 할 수 있다. 이것은 개화(開化)하여 국가의 위기를 탈피함과 동시에 이를 계기로 중국으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사실, 성리학적 세계관은 불평등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곧 상위 개체를 중심으로 하위 개체가 종속되는 계층구조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중국이 중심에 있다는 세계관과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천하의 주인인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지배 계층중심의 세계관 속에서 조선이라는 위치는 정치적 실체뿐만 아니라 사상적으로도 독자성을 갖기에 거의 불가능하였다. 조선의 전통 지식사회에서도 존화양이(尊華洋夷)와 위정척사(衛正斥邪)를 부르짖으며 전통적인 중국중심의 세계관을 고집하고 있었다. 이들은 고종(高宗)에게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를 올리며 거세게 항의하였는데, 그것은 서도(西道) 즉, 기독교(基督敎)에 의해 도학(道學)의 기존 가치체계가 훼손(毁損)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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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승정원일기」에는 “협약(協約)이 맺어지면 기독교가 나라 전체에 퍼질 것”이라는 최익현의 상소가 기록되어 있으며, “기독교가 전파됨으로 성리학(性理學)의 세계가 무너짐과 아울러, 국내 신자들의 호응으로 외국이 침략할 것”이라는 우려(憂慮)가 제기되고 있었다.
이들은 외부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전통적(傳統的)인 주자학적(朱子學的) 사유(思惟)가 훼손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당시 조선의 지식사회의 기본적인 틀은 중화(中華) 혹은 화이(華夷) 개념이었다.

이 개념은 한족(漢族)이 자신들을 중화(中華)·중하(中夏)·화하(華夏)라고 칭하고, 주변의 제국들은 이(夷)·만(蠻)·적(狄) 등으로 칭한 데서 유래하는 것으로 중화(中華)가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세계의 중심을 이룬다는 중국중심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개념이다.
이것은 중국을 문화의 기원으로 볼 뿐만 아니라, 윤리와 도덕뿐만 아니라, 문물이나 과학지식 등 인간의 생활 전반에 걸쳐 가장 완성된 이상사회로 인식했고, 그 결과 사대주의(事大主義)가 생겨났다.

특히 중화(中華)의 개념은 예(禮)라고 하는 유교적인 규범에서 나온 것으로, 중화문화의 은혜를 입지 못하는 주변 민족들은 열등한 인간으로 취급되어 이적(夷狄)이나 금수(禽獸)로 구분되었다. 이들 그룹의 중심에 있던 이항로는 우주의 만물에 이(理)와 기(氣)의 두 가지 요인이 있다고 주장하며, 이존기비(理存氣卑), 이귀기천(理貴氣賤)이라고 하여 도덕주의적인 가치이념 및 그것을 기초로 하는 가치질서를 강조하고 있었다.
그는 “4 이(夷) 8 만(蠻)이 중국을 모열(慕悅)하고 화하(華夏)를 모방하는 것은 자연부역(自然不易)의 이(理)이다”라고 하여 중국과 주변국을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으로 구분하고,
중화(中華)를 이적(夷狄)의 불변적인 중심문화로 인식하고 있었다.

필연적으로 조선의 지식사회는 힘과 문명으로서의 서양을 인정하고 그 문화를 수용해야만 한다는 개화지식인들과 기존의 사상과 전통을 고수해야 한다는 보수적인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가 정치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들 개화지식인들은 중화사상이라는 이론의 토대 위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웠던 소위 위정척사파들에 맞서 적극적인 이론적 논쟁(論爭)으로 대응(對應)하고 있었다.
이미 이들은 이에 맞설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들의 사상은 조선 지식사회(知識社會)의 한 지류(支流)를 형성하고 있었던 실학사상이었다. 그 중에서도 이용후생(利用厚生)을 강조하고 있던 북학사상이었다. 북학사상의 기본적인 특성은 대(對) 청조(淸朝) 자세의 재정립과 이용후생론을 구체적으로 제시함으로써 북학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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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즉, 이들은 중국중심의 세계관을 폐쇄적이라고 인식하여 조선사회를 보다 개방적인 것으로 전환시키고, 조선의 체제를 경제적·물질적 기반을 기초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신분적 사회질서를 생산과 능률 중심으로 전환시키려는 입장을 밝힘으로써 실학사상이 지향하는 이념의 구체적이고 기초적인 방법을 제시하였다.

북학사상은 정덕(正德)의 명제보다 이용후생(利用厚生)을, 명분보다 공리(公利)의 추구를, 폐쇄보다는 개방을 우위에 놓는 가치체계를 지향하여 상공업의 유통 및 생산기구, 일반 기술면의 혁신을 지표로 하였다. 또한, 북학파들은 모든 학문을 자유롭고 개방적인 자세로 이해하고 수용할 것도 주장하였다. 즉 서학에 대해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양명학에 대해서도 호의적인 이해를 보였다. 더 나아가 도교·불교 등 이단에 대해서도 섭취하려는 개방적인 자세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북학파의 사상과 외래문명에 대한 태도는 북학파의 거두였던 박지원에 의해 그의 손자인 박규수로 이어졌다.

박규수는 이러한 북학사상을 개화사상으로 연계시켜 젊은 개화지식인들로 하여금 서구의 이질적인 가치관에 주체적으로 대응토록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박규수 사후(死後), 문호개방에 대한 개화지식인들의 사고(思考)는 분화(分化)되어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그것은 서구 문명의 현실적인 힘의 우세를 인정하여 문호를 개방해야 한다는 데에는 모두 생각을 같이하였으나, 개화에 대한 방법과 개념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그래서 이들은 분화된 개화사상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서로 갈등하였다.

분화(分化)된 개화그룹과 각 그룹의 사상을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김옥균과 박영효를 중심으로 했던 그룹은 개화를 근대화된 서구문명에 의한 문명개화로 여겨 서구의 정치제도나 사회체제 뿐만 아니라, 서구문명을 뒷받침하는 서도(西道), 즉 기독교까지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던 그룹이었다.

이들은 동도(東道)를 버리고 서도(西道)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에게 있어 개화는 동도(東道)의 단절을 전제로 하였던 서도서기(西道西器)의 방식이었다. 또 다른 그룹은 김윤식을 중심으로 했던 그룹으로 이들은 조선을 소화(小華)로 보았고, 조선이 불변자(不變者)인 도덕을 갖추고 있는 문명국이라는 인식을 전제로 하였다. 이들은 서양 기술을 수용하는 것을 동도(東道)의 유지·강화의 차원에 국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에게 있어 서도(西道)는 여전히 사학(邪學)이었으며, 그래서 이들은 서기(西器)만을 받아들여 동도(東道)를 유지하고 보완(補完)하는 차원에서 개화(開化)를 이해했다.

이 양분(兩分)된 그룹사이에 있었던 사람이 이상재와 박정양이었다. 이상재는 정치적으로 청국의 속방체제(屬邦體制)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조선이 전통적 사대국이었던 청국(淸國)을 벗어남으로써 정치적인 독립국이 될 것을 꿈꾸었으며,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여 자주적이고 점진적인 개혁을 하고자 했다. 그는 김윤식 그룹과는 달리 서양문명, 특히 미국문명을 더 나은 도덕 문명으로 인정하였다. 그리고 조선사회의 체제를 미국의 것으로 대체하려 하였다. 그러나, 동도(東道)를 포기하지 않았고 서도(西道)는 거부하였다.

그에게 있어 동도(東道)는 불변자(不變者)였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개화개념과 방법에 대해 다양한 그룹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모두 이용후생을 부르짖었던 북학파의 후신(後身)들이라 할 수 있다. 이들 개화지식인들은 서양의 군사, 과학기술의 효용성과 그 위치를 도(道)와 같은 상위(上位)개념으로 인정하여 적극적으로 근대화된 서양문명에 의한 개화를 받아들이려 하였다. 그래서 강병(强兵)과 부국(富國)의 꿈을 이루고자 하였다. 이상재도 이들 그룹에 속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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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2.2 이상재와 북학파와의 상관성
2.2.1 이상재의 활동(개화관료부터만민공동회 활동까지)

기독교에 입교하기 전, 이상재의 활동은 박정양과 떼어놓고 설명될 수 없다. 이상재는 박정양의 정치 문화생이면서 참모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며, 박정양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던 인물이다. 1850년 10월 26일, 충청남도 한산에서 태어난 이상재는 18세(1867년)에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친족 이장식의 소개로 죽천(竹泉) 박정양(朴定陽)의 겸인이 되었으며 청·장년기 전반을 박정양과 보냈다.

이후 박정양의 추천으로 정치에 입문하여서도 20여 년 동안 박정양을 보좌하거나 보필하며 참모로서 정치적·사상적 활동을 같이했다. 13년간의 겸인생활을 마치고 고종 18년인 1881년, 일본에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을 파견할 때 조사(朝士)중 한 명인 박정양의 수원(隨員)으로 참가하여 4개월 동안 명치이후의 일본을 살폈다. 당시 조선정부에서는 보수파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하여 「동래부 암행어사」라는 이름으로 조사(朝士)·수원(隨員)·통사(通事)·하인(下人) 등 62명을 비밀리에 일본으로 파견했다. 이 때 조사중 한 명이었던 박정양은 이상재를 수원(隨員)으로 하여 그 해 4월에서 7월까지 일본에 머물렀던 것이다.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의 조사(朝士)들은 일본의 정치·행정제도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수집하였는데 박정양이 맡았던 일은 내무성의 조사(調査)였다. 그런데, 농상무성이 내무성과 같은 구내(構內)에 있어 이 관청도 같이 조사하였다. 이때 박정양은 명치일본의 정치·행정제도뿐만 아니라 내무성 관할하의 경찰의 업무와 사찰활동 등에 관한 정보도 수집하였다. 당시 수원(隨員)의 역할은 조사(朝士)들의 활동을 돕는 역할이었다. 짧은 기간 동안 한 국가의 내무성과 농상무성을 조사하여 분석한다는 것은 수원(隨員)들의 적극적인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수원(隨員) 이상재는 박정양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관여(關與)했다고 볼 수 있다. 1884년 이상재는 우정국이 개설될 때 미국의 보빙사의 일원으로 참가한 적이 있던 홍영식의 추천으로 우정국 주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하급관리였다. 그해 12월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이 일으킨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고 홍영식이 피살되자 우정국을 사퇴하고 낙향을 하였다. 그러나, 박정양의 추천으로 친군영(親軍營)의 문안(文案)일을 하다가, 1887년 초대 미국공사 임명받은 박정양을 따라 서기관의 신분으로 미국의 신문명을 견문(見聞)할 수 있었다.

이때 고종(高宗)은 박정양에게 미국을 비롯한 조약체결국들과의 친목 및 화호도모(和好圖謨), 조선의 상민(商民) 보호와 통상의 진작(振作)이외에 미국 “정부와 인민의 정형(情形)”을 파악하라는 임무를 부여했다. 미국에서 박정양은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미국의 전반적인 실정을 정확히 파악하려고 애썼다. 미국의 체제에 대해 집필한 「미속습유(美俗拾遺)」에는 미국이 부국강병하게 된 실상과 그 원인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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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서기관이었던 이상재가 박정양이 집필하는 데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였던 것은 당연하였을 것이고, 미국사회에 대한 의견도 개진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이상재의 미국관과 박정양의 그것이 동일한 것을 보아 증명된다. 박정양을 보좌했던 이상재는 초기에 경험했던 이질적인 서구문명에 문화적 충격을 극복하고 미국사회를 분석하고, 미국이 세계최대의 부국(富國)이 될 수밖에 없다고 인정했다.

그것은 미국의 근대문명이 일본과는 달리 정신문명으로부터 외연(外延)된 것이라고 파악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에 따라 이상재는 미국을 모델로 하는 개화정책을 추진하는 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이상재가 체미(滯美)중 가장 성과로 꼽았던 것 중 하나는 주미 공사관에 태극기를 게양했던 일이었다. 이것은 중화주의적(中華主義的)인 주종관계(主從關係)를 유지하고 있던 청국(淸國)으로부터 벗어나 자주외교와 독립국가를 선언하는 것이었다.

이는 또한 이상재가 불평등을 전제로 하였던 성리학적 세계관을 극복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상위 개체를 중심으로 하위 개체가 종속되는 중화의 세계관을 벗어나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독자성을 갖겠다는 인식(認識)의 표출(表出)이었다.

이러한 인식 하에, 이상재는 청국공사의 간섭을 물리치려고 노력했다. 그는 청의 압력에 저항하였고 조선이 독립국가라는 데 큰 자부심을 갖기도 했다. 이러한 이상재의 인식은 독립된 주권을 행사하는 평등적인 국가관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졌다.

1888년 청국(淸國)의 파미(派美) 허락 조건이었던 임지에서의 이른바 ‘영약삼단’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박정양이 조선으로 소환명령을 받았을 때에 이상재도 서기관을 사임하고 귀국했다.

이 때가 1888년 11월 18일이었다. 박정양은 서울에 도착하기 전 이상재를 서울로 먼저 보내 국내사정을 알아보도록 할 정도로 이상재를 신임했다. 이상재는 미국에서 돌아온 후 통위영(統衛營) 문안(文案)으로 있다가, 1892년 전환국이 인천으로 옮겨지며 근대식 화폐제도를 도입하고 신식화폐의 발행을 준비하고 있을 때 위원(委員)이 되었다. 1894년 그는 승정원(承政院) 우부승지(右副乘旨)와 경연각 참찬관(參贊官)을 겸하면서 고위직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해에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 회의원(會議員)이 되었다가, 8월에는 학무아문(學務衙門) 참의(參議)에 임명되어 신(新) 교육령을 펴는 동시에 외국어 학교가 설립되자 교장이 되었다. 그리고 1895년 봄에 학부(學部) 참서관(參書官)이 되었다.
박정양은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국민의무교육, 근대적인 학교체제 및 교과내용 에 대한 분석된 정보를 확보하고 있었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7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그는 내각의 요직(要職)을 차지하여 그 영향력이 증대되자 교육제도개혁과 학교설립을 적극 추진하였다. 이 때 이상재는 교육제도를 개혁하는 데 있어 실무를 담당하였다. 이상재는 한글 교육과 실업교육에 특히 집중했다.

한글 교과서 편찬사업은 학무아문(學務衙門)의 참의(參議)였던 이상재의 책임이었다. 또한, 이상재는 근대적 교육이념을 확립하여 한성사범학교, 소학교, 외국어학교 등 근대식 학교의 법적 토대를 마련하고 이를 설립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통적으로 천시하였던 실업교육을 동일한 학문의 위치로 끌어올려 기예학교(技藝學敎)를 설립하도록 하였다.

이상재는 교육의 목표를 자신이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북학(北學)의 세계관에 두었다. 그것은 조선이 독립국가로서 합리적이고 인화(人和)를 바탕으로 한 평등적인 사회여야 한다는 인식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생각을 근대 교육제도를 도입함으로 실천하였다. 그는 근대교육이 쇠(衰)하여 가는 조선을 건지는 데 필요한 동력(動力)을 제공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학무국장 시절 이상재는 황해도 수안군(遂安郡) 관립(官立) 진명학교에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낸다.
“夫國之根與基維何人民 是也 將何爲而固之培之乎 非敎育 不得也 是故 論世界列强之興替盛衰 必先觀其敎育之善不善 善者 興而盛 不善者 衰而替 理之常也”

이상재는 나라의 뿌리와 터전이 곧 백성이므로 뿌리와 터전을 튼튼히 하고 북돋아 주려면 교육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또한, 교육을 잘하면 나라가 세계의 열강이 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망할 수 있다고 인식하여 근대지향의 교육입국(敎育立國)을 주장하였다.

이상재가 담당한 근대 교육제도 개혁의 가장 큰 공헌은 민주교육이념(民主敎育理念)을 도입함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신분철폐와 기회균등이라는 민권(民權)의식을 심어주었다는 것이다. 이상재의 이러한 근대의식은 그의 근대적 실업교육관(實業敎育觀)으로 표출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실업관은 북학사상의 가장 중요한 핵심 중의 하나였다. 다시 말해, 이상재에게 있어서 기(器)로서의 실업(實業)은 도(道)와 비교할 때 더 이상 하위개념(下位槪念)에 속하지 않았던 것이다.

1895년 8월에 법부(法部) 참서관을 겸직하다가 을미사변(乙未事變) 후 박정양이 이에 대한 책임으로 관직을 물러났을 때, 이상재도 사임하려 했으나 박정양의 만류로 학부 참서관은 계속했다. 1896년 고종이 아관파천(俄館播遷)을 했을 때 그는 내각(內閣)총서(總書)와 중추원(中樞院) 일등의관(一等議官)이 되었다가 후에 의정부 총무국장(總務國長)이 되었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8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당시 고종이 전운사(轉運司) 제도를 복구하려 하였을 때, 이상재는 1894년의 동학 농민난이 전운사의 횡포라 여겨 끝까지 고종의 뜻에 반대하여 전운사(轉運司)의 재도입을 막기도 하였다. 1896년 이상재는 고종의 허락으로 서재필이 독립협회를 조직했을 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윤치호가 회장이 되는 1898년 8월 28일에 부회장으로 선출되어 독립협회활동의 전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독립협회 창립 시, 이상재는 자립(自立)과 자수(自修)를 주장하였다. 그런데, 서재필에게 동조하여 처음부터 노골적인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적인 개혁사상을 내세우지는 않았다. 그는 군권(君權)의 확립을 주장하되 차후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며 내세웠던 민권(民權)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조심스럽게 피력하였다.

“나라가 나라꼴을 하는 것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립(自立)해서 딴 나라에 의뢰하지 않는 것이요, 하나는 스스로 닦아서 정법(政法)을 한 나라에 행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상천(上天)이 우리 폐하(陛下)에게 주신 하나의 큰 권리(權利)이니 이 권리가 없으면 그 나라가 없는 것입니다.

이른바 독립문을 세우고 독립회를 만드는 것은 위로 황상(皇上)의 지위를 높이고 아래로 인민의 뜻을 굳혀서 억만년 끝없는 기초(基礎)를 확립하자는 것입니다. …(중략) … 이에 감히 소리를 같이하여 한 번 폐하 앞에 부르짖는 바이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황상(皇上)께서는 마음을 확호(確乎)히 잡으시와 삼천리 일천 오백 만 적자(赤子)의 마음을 마음으로 하시어 그 분한 마음을 함께 하시고 그 근심을 함께 하시어 안으로는 정해진 법을 실천하시고 밖으로는 딴 나라에 의지하지 마시와 우리 황상(皇上)의 권리(權利)를 스스로 세우신다면 비록 열이나 백의 강적이 있은 들 누가 감히 관여하겠습니까”

독립문이 세워지는 1897년까지만 하더라도 이상재는 군권(君權)의 굳건한 확립 위에서의 자립(自立)과 자수(自修)를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노골적인 민권(民權)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는 내정(內政)의 개혁(改革)을 주장하며 현존하는 권력구조를 인정하는 가운데 법률(法律)을 촉구할 뿐이었다.

그러나, 독립협회가 반러운동(反露運動)을 계기로 만민공동회를 주도하는 1898년부터 이상재는 전면에 나서고 있다. 이때부터 민권의 기초 위에 군권(君權)을 확립하는 입헌군주제를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독립협회 초기와 후반기의 이상재의 인식이 바뀐 것이 아니고 주미공사관의 서기관 시절 이후의 일관된 민권인식이었다.

1898년에 접어들자 러시아는 노골적으로 조선의 내정에 간섭했다. 1898년 1월 6일, 러시아는 부동항(不凍港)을 얻기 위해 목포와 진남포의 토지매입에 나섰고, 21일에는 부산 절영도(絶影島)의 조차(租借)를 강력히 요구하면서 군함을 부산에 입항시켜 무력시위를 벌였다. 1898년 2월 21일 이상재는 이건호의 도움으로 이른바 ‘구국운동상소문(救國運動上訴文)’을 올렸다.

이 상소문에서 이상재는 러시아에 재정권과 군사권을 빼앗긴 것을 통탄하고 완전한 자립과 자수(自修)하는 자주독립을 이루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또한, 자주독립을 위해서는 부패관료들을 제거하고 민권(民權)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립협회는 2월 27일 새로 회칙을 개정하고 회장에 이완용, 부회장에 윤치호, 회계에 이상재를 선출했다. 그리고 3월 10일 반러운동(反露運動)의 일환으로 종로(鐘路)에서 대중집회를 열었는데,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개최하였다고 하여 이를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라 불렀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9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1898년 3월 독립협회가 주최한 관민공동회를 거쳐 만민공동회에까지 적극적인 활동을 보이기도 하였던 이상재는, 10월 15일 외국의 의회규칙을 모형으로 중추원(中樞院)의 의관을 구성할 때 정부와 독립협회가 절반씩으로 구성하기로 합의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고종을 폐위하고 공화제로 바꾸려 한다는 조병식을 중심으로 한 친러파들의 모략으로 고종은 1898년 12월 23일에 서울에 계엄을 펴고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의 간부 340명을 체포하고 12월 25일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영구해산을 명령하였다. 이상재는 이때 투옥되었다가 다음해 출옥하였으나, 1902년 정권(政權)을 장악하고 있던 친러내각(親露內閣)은 민영환의 조선 협회가 일본에 망명중인 박영효, 유길준 등과 공모하여 역모를 꾸민다는 명목으로 독립협회의 관계자들과 반대파들을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서울로 돌아와 있던 이상재는 1902년 6월에 아들 승인과 체포되어 한성 감옥에 투옥된다.

2.2.2 이상재의 인적·사상적 계보
기독교에 입교하기 전, 이상재의 사상을 알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그의 인적 계보를 파악해야만 하며 그의 인적계보를 논의하기 위해 이상재를 한국의 개화행정을 주도한 인물 가운데 하나인 박정양과 연계시키는 것은 당연하다. 이상재의 사상은 박정양과 정치적·사상적 행로(行路)를 같이 함을 염두에 두지 않고서는 파악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정양의 개화의식을 이해하는 데는 반남(潘南) 박씨의 종친이며 한국 개화사상의 시조(始祖)라 할 수 있는 박규수를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다. 따라서 개신교 입교 전의 이상재 연구에 있어 박정양과 박규수의 연구는 필연적이며 이상재의 개화사상은 반남 박씨였던 북학파의 박지원과 그의 손자였던 박규수와의 사상의 영향 아래에서 이해될 수 있다.

2.2.2.1 이상재와 박정양
죽천(竹泉) 박정양은 일본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의 조사(朝士, 1881년), 기기국(機器局)의 초대 총판(總辦, 1883-1885년), 그리고 주미전권공사(駐美全權公使, 1887-1888), 군국기무처의원(軍國機務處議員, 1894년), 학무대신(1894년), 총리대신(1895년), 내부대신(1895년, 1896년), 의정부 참정(參政, 1897년), 양지아문(量地衙門) 총재관(總裁官, 1899년) 등의 요직을 거쳤던 인물이다. 그는 조선왕조의 개화·자강운동에 관여한 인물로 갑오경장, 독립협회, 광무개혁 등을 주도적으로 담당했던 고종임금의 개화 핵심측근이었다. 1892년 전환국(典 局)이 인천으로 옮겨지며 근대식 화폐제도를 도입하고 신식화폐를 발행을 준비하고 있을 때 박정양과 이상재는 독판(督辦)과 위원(委員) 등의 역할을 분담하였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10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청일전쟁, 동학농민봉기 및 명성황후 시해사건 등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전개되었던 갑오경장기(甲午更張期)에도 이상재는 박정양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1894년 박정양이 학부대신이었을 때 학부참서관으로 그 실무를 담당하였고,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시 박정양이 총리대신(總理大臣) 임시 서리(署理)였을 때 이상재는 내각총서(內閣總書)를 맡아 일련의 개혁들을 실행에 옮겼다.

이때 이상재는 친미파로 분류되는 박정양과 더불어 정동개화파의 핵심세력으로 일컬어진다. 이상재는 1904년 전후에 박정양이 별세(別世)하기까지 박정양의 정치적 문하생이 되어 그 노선을 따라 밀접하게 행동을 같이했다.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가 창립된 것은 그 목적이 본래 독립문과 독립공원을 건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독립협회는 1898년 12월 25일 해산될 때까지 회원구성에 많은 변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완용·윤치호·이상재·이채연 등 박정양이 중심이 되는 정동 개화파 인사들이 협회의 핵심 직책을 맡으면서 실질적으로 조직을 운영해 나갔다. 독립협회에서 활약을 했던 이상재의 활동은 박정양의 지원 아래 이루어졌다.

당시 내무대신이었던 박정양은 고종의 지시로 독립문 건립 보조금 모집에 심혈을 기울였고, 1896년 7월 18일에는 독립협회의 임원들과 각 부의 칙(勅)·주(奏)·판임관(判任官)들과 한성부에 모여 논의하는 등 독립협회 창립을 실질적으로 지원하였다. 독립협회의 발기인을 보면 안경수, 이완용, 김가진, 이윤용, 김종한, 권재형, 고영희, 민상호, 이채연, 이상재, 현흥택, 김각현, 이근호, 남궁억 등이었다. 이 가운데 이윤용, 고영희, 김각현 등을 제외하고 다음과 같이 임원진이 구성되었다.

회장(會席 의장 겸 會計長) - 안경수, 위원장- 이완용, 위원 - 김가진, 김종한, 민상호, 이채연, 권재형, 현흥택, 이상재, 이근호, 간사원 - 송헌빈, 남궁억, 심선석, 정현철, 팽한주, 오세창, 현제복, 이계필, 박승조, 홍우관. 이상재는 초기뿐만이 아니라 독립협회가 해산될 때까지 주체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독립협회가 초기 주도세력이 바뀌고 그 지향점이 전환되었던 1898년 초에도 독립협회의 중심에 있었다.

그는 2월에는 회계를 맡았고, 윤치호가 회장이 되는 8월부터는 부회장을 맡아 독립협회의 전과정에 참여하였다. 박정양의 경우 총리대신 서리로 있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는 독립협회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비공식적으로는 긴밀한 관련을 맺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재의 경우 다른 위원에 비해 상대적으로 하급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위원이 된 것은 박정양의 지원 때문이었을 것이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11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만민공동회의 이름으로 이상재가 올린 상소문을 기화로 친러파들은 만민공동회측이 고종을 폐위하고 박정양을 대통령, 이상재를 내무대신(內務大臣)으로 하는 공화제를 실시할 것이라고 무고(誣告)할 정도로 박정양과 이상재의 관계는 매우 밀접했다.

2.2.2.2 박정양과 박규수
한국에 있어 개화사상은 반남 박씨였던 북학파의 박지원과 그의 손자였던 박규수와의 사상의 영향 아래에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박규수의 영향을 받은 개화파들은 북학론을 계승하여 개화사상으로 전환했던 관료집단을 의미한다. 그들의 구상은 근대국가 수립에 의한 자주성의 달성에 있었다. 갑신정변-갑오개혁-독립협회로 이어지는 개화파 세력의 근대변혁운동은 그러한 입장에서 진행되었다. 전통사회에 있어서 권력 내부의 충원기회는 제도상으로나 현실적으로 매우 폐쇄적이다.

지배층은 충원기회 뿐만 아니라, 경제력과 정치권력까지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혈육관계에 의하여 권력공동체를 형성한다. 따라서 명문세족(名門世族)이 통혼권(通婚圈)에 의하여 형성되고 이들이 정치권력을 독점한다. 같은 가문의 원로인 박규수와 잦은 접촉은 박정양의 진로에 큰 영향을 끼쳤다. 문인이고 소극적인 성격의 그가 관료로 입문해서 일관되게 개화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되었던 것은 박규수의 개화의식에 영향을 받은 때문이라 할 수 있다.
1880년부터 정부에서 주도한 개화정책에 박정양이 계속해서 적극 참여하고 있음은 그 좋은 증거이다.

박규수의 천거로 1874년 경상좌도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대원군 시대 대일 교섭을 담당했던 전 동래부사 정현덕 등의 행적과 비리를 조사함과 동시에 당시 교착상태에 빠졌던 조·일 외교의 재개 및 개선방법을 모색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개화에 대한 그의 인식은 김옥균 등과 같은 급진적이고 과격한 것은 아니었지만, 독립협회나 독립신문, 관민공동회의 지원 등 개화에 대한 그의 의지는 일관되게 지속되었다.
박정양은 1881년 정부의 내정을 개혁할 목적으로 일본을 시찰(視察)하였을 때 홍영식, 김옥균 등의 개화파 지식인들과 친분을 가졌고 이들과 공유된 개화의지를 표명(表明)하였다. 또한, 청(靑)의 간섭에서 독립된 자주외교를 감행하였다.

당시 사대종주국이었던 중국에 대한 의존성을 탈피하고자 했던 것은 박규수의 생각을 따라 화이론적(華夷論的) 세계관을 벗어나고자 했던 것과 일치하는 것으로, 자신의 사상적 계보와 연계된 것이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12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그는 자신의 겸인이었던 이상재와 미국 공사시절 참찬관이었던 이완용, 자신의 통역관이었던 이채연, 자신의 영향 아래 있던 민상호, 이계필을 통해 독립협회운동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다.

그가 당시의 정세(政勢)를 개혁으로 해결하고자 하여 독립협회에 대한 기대와 지원이 남달랐던 것과 관민공동회의 건의를 왕에게 헌의(獻議)하는 등 개혁정책 수행에 힘썼다는 것은 그의 개화의지가 강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수구파로부터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제를 꿈꾼다고 지목될 정도로 진취적이고 개혁적인 인물로서 한국의 개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2.2.2.3 박규수의 북학(北學)사상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박규수가 대일개국(對日開國)을 주장한데 대해서 박규수를 일관된 사상의 바탕이 없이 다만 시의(時議)에 영합한 기회주의자로서 간주하였다.
그러나, 박규수가 청나라를 배격하고자 했던 것은 급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외적 위기에 대응하려고 했던 북학파의 ‘화이일야(華夷一也)’적 세계관의 계승이라 볼 수 있다.

그는 대외적으로 예질서(禮秩序)에 의한 종래의 계서적(階序的) 세계관을 타파하고 ‘이적(夷狄)’의 세계에 대하여 개방적 국제관을 확립함으로써 고립지환(孤立之患)을 면하기 위한 것이었다. 제너럴 셔먼호 당시 평양감사였던 박규수는 당시의 국제정세 곳에서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열강의 세력균형 속에서 조선(朝鮮)의 갈 길을 찾아야 된다고 주장하고, 이를 위해서는 전략적으로 개항(開港) 혹은 개화(開化)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박규수는 1861년에 열하부사(熱河副使)로 처음 청나라를 방문하여 국제형세를 목격할 수 있었고, 1866년에는 평안감사로 대동강에 침입한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의 격침을 직접 지휘하였다.

그로부터 1871년 신미양요에 이르기까지 그는 청국(淸國) 예부(禮部)에의 자문(諮問) 및 미국 측의 통상요구에 대한 답장 등을 기초하였다.
박규수는 미국이 셔먼호 사건을 일으켰고, 이 사건을 기화로 신미양요(辛未洋擾)를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대해 내용적으로 이해하려 했다.

이것은 그가 개화에 대해 적극적 인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윤식은 스승이었던 박규수의 미국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내가 듣건대 미국은 지구상의 여러 나라 중에서 가장 공평하다고 일컬어지고 난리(亂離)의 배제(排除)나 분쟁의 해결을 잘하며, 또 6주(州)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토를 확장(擴張)하려는 욕심도 없다고 하니 저쪽에서는 비록 말이 없다고 하나 우리는 마땅히 먼저 수교를 맺기를 힘써 굳은 맹약을 체결한다면 고립되는 우환은 면할 것이다. 그런데도 도리어 밀쳐서 물리친다면 어찌 나라를 도모하는 길이겠는가

그의 이와 같은 세계관은 당시의 중화(中華)·이적(夷狄)·금수(禽獸)와 같이 계서적(階序的)인 예질서(禮秩序) 속에 자리한 중국중심의 세계관을 부정하고, 이미 중국이 아닌 미국을 중심으로 개화하였으면 하는 개화의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더욱이 대원군의 쇄국정책 하에서 관료로서 또한 미국의 셔먼호가 보여준 몰지각한 행태를 직접 경험한 그의 이러한 인식은 당시로는 극히 획기적이라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친미적 사고는 사대주의적인 발상이 아니라 조선의 자주성과 독립성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13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박정양이 미국으로부터 돌아와 고종에게 체미(滯美) 1년 간 복명한 것을 보면, 고종과 박정양의 대미인식은 매우 긍정적이었고, 이것은 당시 신진 개화지식인들의 일각(一角)에서 미국을 모델로 하는 개화책이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박규수가 신미양요(辛未洋擾) 직후 조정에서 “오랑캐와 화호(和好)할 수 없다”는 논의 내용을 보고 동생 박선수에게 보낸 편지는 중화의 세계관을 가진 성리학적 지식인들의 사고구조와 구별되고 있음을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이다.

所謂禮義之邦 見侮於遠夷 一至於比 比何事也 輒稱禮義之邦 比說吾本陋之 天下萬古 安有爲國 而無禮義者哉 是下過中國人 嘉其夷狄中乃有比 而嘉賞之曰 禮義之邦也 比本可羞可恥之語也 不足自豪於天下也 稍有地閥者 輒稱兩班兩班 比爲最堪羞恥之說 最無識之口也 今輒自稱禮義之邦 是不識禮義爲 何件物事之口氣也

즉 「소위 우리 나라를 가리켜 예의지방(禮義之邦)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본래 이 말을 달갑지 않게 여긴다. 천하만고에 국가가 되어 가지고 어찌 예의 없는 자가 있겠는가? 이는 중국인이 이적(夷狄)중에 가상할 만한 자가 있으면 이를 가상히 여겨 예의지방이라고 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는 가히 수치스러운 말이며, 스스로 천하에 호언하기는 부족하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박규수의 중화사상을 벗어난 사고체계는 박정양이 중국으로부터 독립하여 미국과 독립국가로서 외교관계를 가지려는 것과 같은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만년(晩年)에 박규수는 지구의(地球儀)를 스스로 제작하여 자신의 집 사랑(舍廊)에 모이는 김옥균 등에게 이것을 꺼내 보이면서, “오늘의 ‘중국’이 어디 있는가 저리 돌리면 미국이 중국이 되고 이리 돌리면 조선이 중국으로 되어 어느 나라든지 중앙에 오도록 돌리면 중국이 되는데 금일 중국이 어디 따로 있는가”라고 하여 개화의 중심에 자주적인 탈(脫)중화의 세계관이 있음을 보여 주었다.

박규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서법(西法)이 동양에 들어오면 오랑캐와 금수(禽獸)됨을 면할 수 없다고 하나 나는 오히려 동양의 법도가 서양에 들어가서 오랑캐와 금수를 모두 인간화할 것으로 본다.”고 하여 개화(開化)는 동도(東道)를 불변자로 하여 금수(禽獸)라 여기는 서양의 오랑캐까지 인간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박규수는 당시 열강의 세력균형 속에서 조선의 갈 길을 찾아야 된다고 인식하고, 전략적으로 개항(開港) 혹은 개화(開化)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박규수가 동도(東道)가 불변자(不變者)라는 개념을 벗어나지는 않는 것에 대해 그의 문하생이었던 김윤식은 스승의 인식을 그대로 계승한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청국에 의존하려고 했던 점에서 스승과 중국에 대한 태도를 달리한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동도서기파의 대(對)중국인식이 정치적으로도 청국과의 기존질서를 유지하면서 점진적인 개화를 주장하며 조선은 소화(小華)로써 문명의 중심인 중국을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 태도 때문이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14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박규수는 조부인 박지원의 북학(北學)을 수용하여 현실의 모순을 개혁하려고 하였다. 그는 북학파였던 홍대용의 손자인 홍양후(洪良侯)에게 보낸 답신에서 조부를 비롯한 홍대용의 경제·이용후생(利用厚生)의 방책(方策)에 깊이 공감(共感)하여 이들의 주장에 따라 세상을 변개(變改)시키고자 하였으나, 조정에서 이 문제에 큰 관심이 없음을 탄식하고 있다.

따로 보여준 경제이용후생(經濟利用厚生)의 방안(方案)은 양가의 선덕(先德)이 평생 고심하여 마련한 것들인데, 이것들을 어찌 한두 가지라도 일찍이 시도해 보지 않았겠는가!그러나 천한 습속(習俗)이 이 법을 본받지 아니하므로 효과도 없이 그치고 말았다. 조정에서 국가를 도모(圖謀)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이것들의 실천을 급하게 보지 않았고 매년 사신의 행차에서도 별도의 다른 일에 급급(汲汲)하여 마침내 뜻이 이것들에 이르지 못하였던 것이다.
종전부터 이와 같이 해왔으니 누가 지금 이 의혹을 변석하여 이 길을 열 수 있겠는가? 나는 어렸을 때부터 매번 이것을 탄식하여 왔으며, 몸소 이것들을 실천하여 우리 나라를 발전된 노(魯)나라와 같이 변개시키고 싶었다.

이상(以上)의 글에서 박규수의 개화의지는 조부(祖父) 박지원이 속해있던 북학파의 사상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박규수는 조부의 영향을 받아 개화사상을 시동케 한 인물로 『연암문집』을 그의 문하생인 김옥균, 김윤식, 홍영식, 서광범, 박영교, 박영효, 유길준에게 강의하면서 신사상을 고취시키고 있었다. 또한, 반남 박씨의 종친(宗親) 박정양 등에게도 영향을 끼쳤고 이상재에게도 그 영향이 미쳐 독립협회활동과 만민공동회 활동에 반영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2.3 개화파 이상재의 사상적 위치
북학파의 전통을 이어받은 개화파들은 서구의 근대문명을 받아들이되, 서구문명을 기존의 체제를 유지·발전시키는 하나의 도구로 생각했던 그룹과, 서구문명을 절대적으로 우위의 문명으로 인식하여 근대문명으로의 대체를 주장했던 그룹으로 분화되어 갈등을 빚게 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서양 기술을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수단으로 수용하게 하여 조선의 전통적인 체제와 가치체계를 유지·강화시키겠다는 입장과, 서양의 정치·사회 제도의 수용뿐만이 아니라 종교까지 받아들여야 서양과 같은 근대화를 이룩할 수 있다는 그룹이었다.

이렇게 개화사상가들이 분화(分化)되는 것은 각 그룹이 이해한 개화(開化)의 개념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들의 개화에 대한 상이한 개념은 각기 다른 개화 방법을 주장하게 된다. 이들은 구미(歐美)의 근대문명을 정신문명, 즉 도(道)가 결여된 물질문명이나 기(器)로만 본 그룹과, 구미(歐美)열강들의 외형적 힘의 발휘가 정신문명(精神文明)을 바탕으로 한다고 보아 서구의 근대문명을 진정한 문명으로 보는 그룹으로 나뉘어졌다. 이 절에서는 분화된 각 개화그룹의 사상과 그 주장을 서술하여 이상재의 개화사상은 어떤 위치에 속하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2.3.1 갑신 개화파의 사상
갑신개화파는 1884년 12월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등이 주축이 되어 일으켰던 갑신정변을 주도한 인물들로 서양의 근대문명으로 서양의 기술, 법과 제도, 나아가서 그것들의 기반이 되는 기독교로 조선의 가치체계까지 대체하고자 하였던 그룹이다. 즉 이들은 동도(東道)를 서도(西道)로, 동기(東器)를 서기(西器)로 대체하여 조선을 개혁시키고자 하였다.
이 그룹은 서구의 근대문명이 보여준 힘에 매료되어 서구열강들에게 일방적으로 침탈(侵奪)당하는 청국(淸國)에 더 이상 조선이 종속되는 것을 거부하였다. 이들에게 있어서 개화는 곧 청에 의존된 모든 체제와 체계를 완전히 벗어나는 것을 의미했다. 이들은 청국(淸國)이 추구하는 문명, 즉 동양의 문명이 기력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이들은 중국의 문명인 기존의 동양문명을 부정하고 새로운 서구제국의 문명으로 조선의 모든 체제와 가치체계를 대체하고자 하였다.

그러한 이유에서 이들의 개화관은 일본의 근대화의 모델이었던 ‘탈아입구(脫亞入歐)’형의 문명개화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조선이 일본처럼 근대화를 받아들인다면 조선이 장차 세계의 열강들과 같이 부국 강병의 문명국으로 비약할 수 있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조선이 ‘동도동기(東道東器)’에서 ‘서도서기(西道西器)’로 전환(轉換)만 한다면 장차 부국강병의 근대 문명국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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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박규수의 제자였던 김윤식은 “김옥균은 구주(歐洲)를 크게 존중하면서 유교적인 인륜(人倫)을 야만이라고 하고 서양의 도(道)로서 공·맹의 도(道)을 바꾸려 한다”고 비판한다. 김윤식도 김옥균이 갑신정변을 일으킨 것은 동도(東道)를 서도(西道)로 대체하기 위함이라고 본 것이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갑신개화파들이 서도서기(西道西器)를 주장한 것은 도(道)와 기(器)가 떨어질 수 없다는 유가(儒家)의 기본적이고 본래적 인식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성리학의 일반론에 의하면, 도기(道器)는 반드시 서로 합쳐져서 하나의 사물을 이루는 것이다.

즉, 도(道)는 기(器)의 체(體)가 되고, 기(器)는 도(道)의 용(用)이 되는 것이다. 주자(朱子)는 도(道)를 본(本)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의 본(本)이란 근본(根本) 또는 형상(形相)을 의미한다. 그러한 이유에서 도(道)는 기(器)를 주재(主宰)하는 것으로 이 둘은 서로 떨어질 수 없다.

갑신개화파는 중국이 서구 열강들에게 일방적으로 침탈당하는 이유가 중국 문명의 기(器)가 서구의 기(器)보다 열등하기 때문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서도서기(西道西器)을 주장하였다. 기(器)가 열등하다면 기(器)를 발생시키는 도(道)가 열등하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따라서 동도(東道)가 열등하다고 하였을 때, 동도(東道)를 서도(西道)로 대체해야 한다는 것은 유가적 전통에 살아왔던 이들의 인식에서는 당연했다. 이러한 인식 하에, 서도(西道)를 기독교로 인식했던 이들은 인민의 교화수단으로 기독교를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후에도 여전히 기독교(基督敎)의 유입(誘入)에 대한 이들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이는 여전히 서도서기(西道西器)를 바탕으로 조선이 문명 개화해야 된다는 일관된 인식 때문이었다. 미국을 경험한 박영효는 개명한 나라들이 부강한 이유가 기독교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1885년 일본에서 스크랜튼(William B. Scranton) 등과 만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기독교관을 피력한다.
“우리 백성이 지금 필요로 하는 것은 교육과 기독교화입니다. 선교사들과 그들이 세운 학교를 통하여 우리 백성을 교육하고 향상시켜 주어야 합니다. … 우리의 재래의 종교는 지금 기운을 다하였습니다. 기독교로 개종할 수 있는 길은 환히 열려 있습니다. 기독교 교사와 사업가의 일단은 우리 나라 어느 구석에나 필요합니다. 우리가 합법적인 개종에 앞서 우리 백성은 먼저 교육을 받아야하며 기독교화 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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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그는 또한 “동양제국이 야소교(耶蘇敎)를 신봉(信奉)하지 않으면 구미 각국과 같이 병존(竝存)할 수 없음은 필연(必然)하다”고 단언(斷言)하였다.

그러나, 박영효는 기독교를 종교라 하기보다는 근대 문명의 기저로 이해하였고, 그러한 이유로 기독교를 조선에 유입하고자 했다. 다시 말해, 종교적 차원의 개심(改心)에서 보다는 나라의 강성(强盛)을 기독교의 제구미국(諸歐美國)만큼 이루어 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엄격히 말한다면 갑신개화파는 서도서기(西道西器)가 아닌 서기서도(西器西道)를 주장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서도(西道)보다는 서기(西器)에 무게의 중심을 두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서구의 근대문명이 갖는 현실적인 ‘힘’을 동경한 나머지 서도(西道)를 오히려 서기(西器)의 도구(道具) 정도로 이해하는데 그쳤다. 이들의 이러한 외형적인 ‘힘’에 대한 동경은 서기(西器)만을 진정한 문명이라고 인식하는 데서 드러난다. 갑신개화파의 대외관을 살펴보면, 이들의 관심이 서기(西器)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갑신개화파의 일원으로 일컬어졌던 윤치호는 자신의 일기에서 근대문명의 외형적 힘을 갖추고 있던 일본의 예를 들고 있다.

“일본이 서양과 통상한지 30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문명부강이 60년 된 청(淸)보다 백 배 낫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혁고효신(革古效新)했기 때문이다. 우리도 일본을 본받아야 한다.”

윤치호도 조선에 대한 청의 영향력에 반감을 갖고 있었으며 조선도 근대화를 받아들여 일본처럼 힘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조선이 일본을 모델로 하여 일본식의 근대화방안을 수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882년 일본을 방문하여 명치유신(明治維新)이 이룩한 성과들을 목격한 김옥균도 일본을 모델로 한 근대화 정책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동인에 의하면, 김옥균은 일본이 형제국으로 유사시에 의뢰할 수 있는 대상이라고 전망하였다. 그러한 생각에서 근대 국가를 달성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일본을 끌어들이려 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갖고 있는 근대문명은 서구문명이 갖고 있는 외적인 힘만을 추구하여 이룩한 것이지 서도(西道)를 근거로 하여 외연(外延)된 것이 아니었다. 이들 갑신개화파는 근대문명이 보여주는 힘의 실체를 약육강식이 횡행하는 국제관계 속에서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필연적인 것이라고 인식하였다.

따라서 급박한 국제형세 속에서 외형적인 힘만을 가질 수 있다면 기독교가 아니더라도 상관이 없었다. 이들 갑신개화파는 서구열강의 개국(開國) 외압에 대한 해결방안과 부국강병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서구의 가치체계와 모든 체제를 도입하고자 하였을 뿐이다.
이들은 서구의 근대문명이 갖고 있는 힘을 도입하여 문명개화를 이룩함으로써 부국강병과 대외적 독립을 달성하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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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동도동기(東道東器)의 기존가치관과 기존의 중화주의적 체제를 서도서기(西道西器)의 체제로 급격히 대체 시킬 것을 주장하였지만, 실제로는 서기(西器)가 중심이고 서도(西道)가 주변인 서기서도(西器西道)의 개념을 주장했다고 볼 수 있다.

2.3.2 동도서기파(東道西器派)의 사상
동도서기파는 서양의 근대문물이 갖고 있는 물질적 우수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했다는 점에서 존화양이(尊華洋夷)를 주장했던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와는 엄격히 구별된다. 이들은 조선이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관념(觀念)이 우위(優位)가 되는 전통을 거부하고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용성을 중요시하였다. 동도서기파(東道西器派)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김윤식은 박규수의 제자로 북학파가 추구하였던 이러한 사상을 계승한 인물이었다. 일본과의 불평등한 강화도조약을 체결함에 있어 조선(朝鮮)의 대표자로 참여한 바 있던 이들 동도서기파는 근대문명이 가지고 있는 현실적인 ‘힘’을 인정할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피동적(被動的)인 수용만이 아니라, 북학파의 전통에 따른 자각(自覺)에 의한 수용이었다. 당시의 집권세력중 하나이기도 하였던 이들은 근대문명의 과학기술과 효용성을 인정하여 이를 수용(受容)함으로써 조선의 부국강병책(富國强兵策)을 도모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들이 서기(西器)를 수용하고자 하는데 적극적이었다는 것은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을 바라보던 이들의 시각을 살펴보면 분명해 진다.

영의정 이최응(李最應)은 “신이 보건대, 그(황준헌)의 모든 논변이 우리와 같습니다. 한번 보고 묶어 두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 그 가운데 믿을 만한 것을 믿고 채용할 것은 채용함이 가합니다.”라고 하여 서양의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할 것을 주장하였다. 윤선학(尹善學)도 다음과 같이 서양의 과학기술과 학문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오호라, 서법이 나오자 그 기계의 精巧, 부국의 術인즉, 비록 주를 일으킨 呂尙, 蜀을 다스린 제갈공명이 있다 하더라도 다시 더불어 그 사이에서 논할 수 없다. … 君臣·父子·夫婦·朋友·長幼의 논리는 하늘에서 얻고 백성에게 부과하는 것으로서, 천지에 통하는 만고불번의 진리이며 위로는 道가 되는 것이다. 배와 수레와 농기계는 백성이 사용하여 나라를 이롭게 하는 것으로서 밖으로 나타나 器가 되는 것이다. 신이 변화를 바라는 것은 바로 이 器이며 道가 아니다.”
윤선학(尹善學)은 이 상소에서, 기(器)의 차원에서 서구의 물질문명을 수용하여 현실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이들 동도서기파(東道西器派)는 도기(道器)는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위정척사파의 도학적(道學的) 인식을 거부하고 있다.
윤선학을 비롯한 동도서기파(東道西器派)는 도(道)와 기(器)의 분리가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동양의 도(道)는 변할 수 없지만(不變者), 기(器)는 언제든지 바꿀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형이상(形而上)으로서의 도(道)와 형이하(形而下)로서의 기(器)를 엄격히 구분하여, 현실문제 해결을 위하여 기(器)만을 취득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 아래 동도서기파(東道西器派)는 서양의 기(器)를 도입하여 기존의 도(道)를 유지·보완하는 것을 개화의 목표로 삼았다. 서양의 과학기술과 학문을 도입함으로써 전통적인 윤리와 도덕체계를 기반으로 하는 유교적인 사회·정치체제를 유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유교적 윤리와 도덕을 기본이념으로 하는 동도(東道)의 가치체계를 확고히 하는 것이었다.

이들이 동도(東道)의 가치체계를 공고히 하려고 했던 것은 조선의 전통적 가치체계에 대한 문명적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근대적 문명으로의 개화를 꿈꾸었지만 갑신개화파와 대립관계에 있었던 김윤식 등의 동도서기파는 자신들이 주장하는 개화(開化)가 서구의 ‘도(道)’를 수용하겠다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특히, 기독교에 대한 이들의 거부의식은 일본과의 강화도조약에서도 뚜렷이 나타난다. 이들에게 있어 서도(西道)는 무군무부(無君無父)하는 비문명(非文明)의 사학(邪學)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들 동도서기파(東道西器派)는 외국과 조약을 체결할 때도 조약의 불평등 문제보다는 아편과 기독교에 대한 문제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18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19세기 초에 스코틀랜드의 신학자인 토마스 찰머스에 의해 ‘간격이론’이 등장하였는데, 이는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 오랜 기간의 시간 간격이 있다고 주장하며, 그 기간을 과학이론에서 제시하는 지질학적 연대와 기본적으로 일치시킨다.

이러한 방식으로 간격이론은 지구의 오랜 역사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24시간의 창조일을 견지함으로서 창세기 1장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했다. 간격이론가 중에 어떤 부류는 2절의 혼돈과 공허가 루시퍼의 타락에 의해 폐허가 된 지구를 묘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모든 지층과 화석들은 이대 형성되었다고 주장하였다. 19세기 초에 스코틀랜드의 신학자인 토마스 찰머스에 의해 ‘간격이론’이 등장하였는데, 이는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 오랜 기간의 시간 간격이 있다고 주장하며, 그 기간을 과학이론에서 제시하는 지질학적 연대와 기본적으로 일치시킨다.

이러한 방식으로 간격이론은 지구의 오랜 역사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24시간의 창조일을 견지함으로서 창세기 1장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했다. 간격이론가 중에 어떤 부류는 2절의 혼돈과 공허가 루시퍼의 타락에 의해 폐허가 된 지구를 묘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모든 지층과 화석들은 이대 형성되었다고 주장하였다. 19세기 초에 스코틀랜드의 신학자인 토마스 찰머스에 의해 ‘간격이론’이 등장하였는데, 이는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 오랜 기간의 시간 간격이 있다고 주장하며, 그 기간을 과학이론에서 제시하는 지질학적 연대와 기본적으로 일치시킨다.

이러한 방식으로 간격이론은 지구의 오랜 역사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24시간의 창조일을 견지함으로서 창세기 1장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했다. 간격이론가 중에 어떤 부류는 2절의 혼돈과 공허가 루시퍼의 타락에 의해 폐허가 된 지구를 묘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모든 지층과 화석들은 이대 형성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정동 신정부에서는 分派分爭이 잠시도 식지 않는다. 학부대신 申箕善씨와 중추원고문 徐載弼씨가 相爭하였다. 즉, 徐씨는 申씨를 ‘조선은 지금 점차 개화의 길로 들어서서 國運昌隆의 조짐을 보이려고 하는데, 당신은 무슨 의도로써 이를 沮格하고 국가를 舊時의 夢寐함으로 복구시키려고 하는가. 당신이 조금이라도 開眼해서 세계의 대세를 관찰해 주기를 바란다’고 매도하였다. 이에 신씨는 서씨를 ‘公은 원래 조선의 臣子로서 일찍이 不軌를 모의하여 외국으로 망명한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결국 귀하해서 外臣이 되었다. 이제 무슨 염치로 다시 와서 한갓 異說을 부르짖으며 華를 夷로 바꾸려고 하는가. 공은 아직 우리 나라 人士가 당신의 비루한 마음을 얼마나 나쁘게 여기고 있는가를 알지 못하는가’라고 힐문하였다. 이처럼 兩氏의 논쟁은 거의 그칠 바를 모른다.”

동도서기파(東道西器派)로 분류되는 신기선은 정동개화파를 공격하였고, 박정양에 이어 학부대신이 되자 그 동안 박정양 등 정동개화파가 추진하고 있던 제도 개혁에 대해서도 정면으로 거부하며 비판하고 나섰다. 그는 정동개화파에 의해 개정된 관제(官制)를 구제(舊制)로 복구할 것을 요구하며 정동개화파에 대한 탄핵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아관파천(俄館播遷) 직후 정동개화파의 박정양과 이완용 등이 주축이 되어 세워진 내각은 서재필로 하여금 독립신문을 창간할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하였다. 이것은 신문발간에 대한 박정양의 정확한 이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따라서 독립신문은 정동개화파에 대해 매우 우호적인 지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19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정동개화파 내부에 있던 갑신개화파 출신으로 이미 기독교인이 되었던 서재필이나 윤치호는 동도(東道)를 기독교로 대체시키는 서도서기(西道西器)를 주장하기도 하였지만, 박정양 등 정동개화파의 주류들은 이와 같은 인식을 거부하였다. 독립협회의 활동 중 기독교에 대한 박정양의 인식은 이상재의 생각을 통해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훗날, YMCA의 브로크만(F. M. Brockman)은 독립협회 시절의 이상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미국에서 공부한 한국인으로 이 협회의 고문으로 선출된 서재필 박사(Dr. Jaisohn)가 이 기회에 기독교 원리를 전파하고 기독교에 대한 강연을 시작하였을 때, 이상재는 반대의 근거로 민족이 요구하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개인의 권리임을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주장이 청중에게 잘 부합되었기 때문에 그는 논쟁이 승리자가 되었다.”

YMCA를 통해 절친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브로크만의 증언과 정동개화파 주류의 활동을 놓고 보더라도 독립협회 시절 이상재가 기독교를 거부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미국사회를 가까이에서 경험할 수 있었던 정동개화파들은 서양, 특히 미국의 사회체제 속에서 자신들이 기왕에 갖고 있던 북학파의 이상적 세계관을 발견하였다.

그러한 이유로 이들은 미국의 제도와 체제를 조선에 접목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갑신개화파들과 달리 동도(東道)를 불변자(不變者)로 인식하고 있었고 도입 방법에 있어서도 점진적인 방법을 사용하였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이들 정동개화파도 동도서기(東道西器)를 주장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동도서기파(東道西器派)들과는 달리 서구의 근대문명을 오랑캐(夷)의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들이 갑신개화파와 같이 서도서기(西道西器)를 꿈꾸었던 것도 아니었다. 이들은 갑신개화파와 동도서기파의 주장을 종합하려고 하였다.

2.4 이상재의 사회사상
2.4.1 동도(東道)중심의 문명 해석
이상재는 미국 체류의 첫 해인 1887년에만 하더라도 미국이 정신문명이 없고 외형적인 힘에만 의존한다고 비판하였다.

그것은 미국의 정신문명이 저급한 것이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미국 사회를 경험하면서 이러한 기존의 문명관에 대한 변화를 일으킨다.
그 변화는 미국이 부국강병을 목적으로 단순히 힘만을 숭상하는 나라가 아니라는 인식의 변화였다. 그가 본 미국은 사회를 이끌어 가는 뚜렷한 정신적 가치체계와 기준이 있었다.
그리고 그 기준을 엄격히 적용하고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부국강병을 이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 비해 조선은 “정령(政令)을 옳게 행하지 못하고 그 형법(刑法)을 바르게 쓰지 못하여 모든 행동에 자주(自主)를 얻지 못한”, 가렴주구가 판치는 사회였다. 이상재는 다음과 같이 조선의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

目今我韓之時國形便 國歌曰存乎亡乎 民可曰生乎 死乎 軍制之未備 財政之不整 外他許多貪虐 許多痼疾 指不勝數 必待人存然後事也 因不可遲 而用人之際 銓衡不平 賢不肖之進退 失當 形賞紊雜 善惡之勸 相反.

이상재가 보기에 미국의 사회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도덕규범을 자기 내부의 도덕감으로 일치시키는 윤리공동체였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20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그리고 사민(四民)에 관계없이 보편적인 동률(同律)로 치리된다고 보았다. 그것은 자신의 계보인 북학파의 이상적 목표였다. 미국의 사회체제와 그 운용(運用)은 동도(東道)의 세계에 속하여 있던 조선의 것보다 훨씬 상등(上等)하였고, 미국은 서도(西道)의 바탕에서 나오는 서기(西器)로 도덕문명의 근간이 외연(外延)되는 사회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상재는 미국의 체제와 제도를 모델로 하여 조선의 체제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상재가 조선사회의 체제를 미국을 모델로 하여 변화시키려고 시도한 것은 김옥균이나 김윤식의 개화 방식과는 달랐다. 그것은 동도(東道)를 불변자(不變者)로 인식하여 유지하려한 점에서 김옥균의 방식과 다르며, 미국문명도 정신문명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김윤식의 방법과도 구별된다. 그가 미국을 모델로 하여 조선의 사회체제를 개혁하려고 했던 것은 미국의 근대문명이 일본의 그것과는 달리 정신문명을 바탕으로 외연(外延)된 것이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그는 정신문명으로부터 외연(外延)된 물질문명만이 불변적(不變的)인 정신문명인 동도(東道)와 조화(調和)를 이룰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1894년 학무아문참의(學務衙門參議)와 학무국장을 겸했던 이상재는 황해도 수안군(遂安郡) 군립(郡立) 진명(眞明)학교 창립에 부쳐 축하의 글을 보낸다. 여기에서 이상재는 서구의 근대화된 문명이 진정한 문명이요, 이를 배우고자 하는 학문이 진정한 학문이라는 견해를 뚜렷이 한다. 그리고 조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근대화된 새로운 문명을 받아들여야 함을 역설한다.

“오직 바라건대 총명하고 준걸스러운 여러 학생들은 眞正한 학업을 探究하고 그 文明한 새 기운을 吸取해서 사람마다 모두 眞眞明明한 지경에 도달한다면, 어찌 교육이 떨치지 못하는 것을 근심할 것이며, 또 우리 나라가 망하는 것을 바꾸어서 일어나고 쇠하는 것을 바꾸어서 성하게 되는 것이 모두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 그가 진정한 ‘문명’이라 일컫는 것은 미국의 근대문명의 체제에 제한된 것이 아니라, 정신문명(精神文明)으로부터 외연(外延)되는 물질문명(物質文明)이며 이는 북학파의 이상(理想)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도(道)는 형이상자(形而上者)이고 기(器)는 형이하자(形而下者)가 아니다. 도(道)와 기(器)는 같은 위치에 있는 것이라는 인식이다.

이상재는 기(器)에 있어서 뛰어난 미국의 모델을 도입하여 이를 동양의 정신문명과 이상적으로 조화시키려 했다. 이상재는 전통적인 가치체계 자체를 부정하거나 비판하지 않았다. 그것은 조선사회가 전통적으로 중요시하였던 주자학이 도학적(道學的)이고 이념주의적(理念主義的)인 것에만 치중한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이상재는 문명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백성들의 경제적 안정과 부강을 추구하고 있다. 또한, 진명학교가 신분에 상관없이 입학할 수 있는 학교였음을 감안하였을 때, 경학적(經學的) 측면에서 사민평등(四民平等)의 신분제 타파까지 이룩되는 미국과 같은 이상적인 사회를 꿈꾸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상재가 보기에 정신문명에 그치는 조선의 사회보다는 외형적인 ‘힘’이 발휘되는 미국 사회가 진정한 문명사회였다.

이상재는 근대문명이 갖고 있는 힘을 알고 있었고 다른 개화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당시가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세계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위기의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도(道)와 기(器)가 평등한 관계에서 이상적으로 조화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21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방법에 있어서는 불변자(不變者)이고 정신문명인 동도(東道)를 중심으로 하되 외형적인 힘이 발휘되고 있는 미국의 것으로 물질문명을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힘을 갖추지 못하면 조선은 결국 멸망하게 된다고 보았다. 조선이 서구 근대문명에 적응하면 흥성(興盛)하고 그렇지 않으면 쇠망(衰亡)하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는 것은 자연의 이치라 인식하고 있다.

이상재는 미국사회가 도덕문명을 갖고 있다는 점을 사민(四民)의 신분에 관계없이 법률을 엄격히 적용하는 것에서 발견하였다. 미국이 부강한 것은 “이른바 헌법(憲法)”이 백성들에게 공평과 자유를 주어 속박과 질곡(桎梏)으로부터 해방을 시키고 있기 때문이라 보았다. 인화(人和)를 목적으로 하되, 뚜렷한 기준을 가지고 공동체의 인화(人和)를 저해하는 모든 요소를 공평하게 치리(治理)하면 그러한 체제는 자동적으로 부국강병으로 외연(外延)된다고 확신했다.

그는 동도적(東道的) 문명을 자랑하는 조선의 전통사회에는 동도(東道)에 대한 이상(理想)만 있을 뿐이지 실천이 없다고 본다.
당시 조선은 부패와 가렴주구가 판치는 사회였고 백성들은 학정(虐政)에 시달리고 있었다. 민초들이 가학(苛虐)을 견디지 못하여 폭동을 일으킬 수밖에 없으며, “안으로는 탐관오리(貪官汚吏)들이 있어 계급이 낮은 자는 훔쳐먹고 지위가 높은 자는 긁어먹고 빼앗아 먹어 인민들이 어육(魚肉)이 되었다”고 고발한다. 이러한 사회현상은 조선의 문명이 정신문명의 관념과 이상(理想)에만 치중한 나머지 실천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상재는 미국을 모델로 기(器)로서의 근대의 물질문명과 사회체제를 도입하고 이를 조선사회에 적용하여 동도(東道)의 이상을 재발견하려고 하였다. 그는 조선도 황제를 중심으로 하여 백성들과 함께 인화(人和)하는 사회와 법률이 엄격히 적용이 되어 누구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과 노력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조선내의 정치적인 파벌들간의 세력을 확보하기 위한 갈등, 외세(外勢)의 일정한 방해와 함께 그가 주장했던 개혁이 결국은 조선의 전통방식을 해치는 과격한 행동으로 비추어졌고 고종황제 즉, 대한제국의 국체를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이상재는 “천하 열강들이 문화와 부강(富强)이 나날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고 자신의 이상(理想)이 실현되지 못하는 한계에 부딪치자, 만약 조선이 멸망한다면, 멸망의 책임은 강대국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태의연하고 문명개화를 이룩하지 못한 조선 자신에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인식 아래에서 그는 동학난에 개입한 일본을 우방(友邦)으로까지 평하였으며, 1895년의 을미사변(乙未事變)도 한국 내부가 개혁하지 않은 잘못에 원인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內而民生 不堪苛虐 始焉 哀號 終乃暴動 外而友邦 不忍坐視 始焉 勸告 終乃威壓 如是而猶不悔悟者 何也.

전술(前述)한 대로 이상재는 미국의 사회체제가 인화(人和)와 공평한 법률을 가지고 치리(治理)되는 것을 보고 미국 사회가 도덕문명을 갖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도(道)와 기(器)를 분리하여 동양의 도(道)는 불변자이며 미국이 갖고 있는 서도(西道)는 동양의 도(道)와 일정 부분 공유될 수 있다고 인식했다.
그리고 동도(東道)의 바탕아래 서도(西道)가 갖고 있는 기(器)만 조선에 도입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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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이상재는 도(道)와 기(器)가 분리될 수 있다는 사고(思考)에 따라 외적(外的) 도체(導體)인 서기(西器)에서 출발하여 조선사회가 전통적으로 갖고 있던 동도(東道)라는 불변자를 재발견하려고 시도하였다. 이상재는 동도(東道)를 서도(西道)로 대체하는 서도서기(西道西器)의 문명관을 거부한 데서 여전히 동도(東道)를 중심으로 한 문명(文明)을 주장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미국의 사회가 갖고 있는 합리성, 사민 평등성, 이용후생을 중시하는 체제가 북학파의 이상과 부합되는 것을 보고 그 문명을 높이 평가했으나 동도(東道)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미국의 사회체제를 조선에 도입하여 조선이 본래 추구하던 동도적(東道的) 이상을 재발견하려고 하였다.

2.4.2 동도적(東道的) 이상(理想)과 민권관
이상재는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천부적(天賦的)권리와 의무로 보았고 이러한 인식은 독립협회와 특히, 만민 공동회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然則 爲國家者 赤豈不先加商量於基礎與方向也哉 國之所以爲國 非一二人 所獨居 可成者 及幾千萬人 團聚群居 而所成者 苟無比衆人 奚以成國設 有比衆人之團居 苟不能各守其天予之 權責便是走肉動屍 何以異於草木禽獸 地方雖廣大 土壤雖膏沃 必不能自守而自保”

이상재는 정부에게 보낸 상소를 통해 개인의 권리에 관한 자각을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민(民)이 국가의 중심이라는 인식이다. 이상재의 이러한 민권의식은 전통 주자학적인 세계에 속하여 있던 조선의 전통적 개념이 아니라 실학의 사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전술(前述)한 대로, 성리학의 세계는 개체(個體)를 상위의 것이 있다는 전제 밑에 하위의 것이 있다는 불평등의 관계로 보았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실학은 개체를 서로 평등한 관계로 보기 시작하였다.

이익(李瀷)은 각 개체를 기능의 관점에서 설명하며 나라의 바탕인 백성은 노력이사지(勞力以事之)의 생산기능을 수행하고, 군(君)은 백성의 이러한 역할을 도와 노심이치지(勞心以治之)의 기능을 수행하며, 신(臣)은 군(君)을 보좌하는 기능을 수행한다고 주장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군(君)은 없더라도 민(民)은 자립할 수 있다고 보았다. 민(民)이 군(君)을 부양(扶養)하는 것에 대해 군(君)도 백성에 보혜(報惠)를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서 보면, 실학은 민(民)을 국가(國家)의 중심개체로 보았고 주종(主從)의 관계가 아닌 기능을 수행하는 유기체적 성격으로 설명했다. 곧 군(君)·신(臣)·민(民)은 인체(人體)와 같이 기능을 수행하는 상호보완의 주체로서 유기체적 관계에 있다.


실학의 계보였던 북학의 사상도 이러한 민(民)을 사회중심의 유기체적 개체로 보는 인식을 수용하여 평등적 관계로 발전시키고 있다. 북학(北學)의 거두(巨頭)인 홍대용은 신분제 자체의 개혁에는 소극적이었지만, 신분의 여하를 막론하고 모두 노동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철저하였다. 그는 양반의 유식(遊食)을 허용치 않고 신분에 구애됨 없이 재학(才學)있는 자를 중직(重職)에 임명할 것과 면 단위까지 학교를 설치하여 면내의 자제는 8세 이상이면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 교육을 받게 하고, 공거제(公擧制)를 통하여 이들을 순차적으로 상급학교나 관직에 추천할 것을 주장했다.

우리 나라는 본래 명분을 중히 여겨 양반족속은 몹시 궁색하여도 팔짱을 끼고 앉아 쟁기 보습을 들 생각을 아니한다. 혹 무실근업(無實勤業)하여 몸이 비천해지는 것을 달게 아는 사람이 있으면 이를 노비나 된 듯이 조롱(嘲弄)한다. 유민(遊民)은 많고 생산하는 사람은 적으니 재물이 어찌 궁하지 않을 것이며 백성이 어찌 가난하지 않겠는가. 마땅히 과조(科條)를 엄히 세워 사농공상(士農工商)이 어느 신분임을 막론하고 유의유식(遊衣遊食)하는 자는 형벌을 주고 또 세상에서 버림받게 해야 할 것이다.

홍대용은 “재(才)와 학(學)이 있으면 비록 농공(農商)의 아들이 정부의 요직에 앉는다 하더라도 이를 외람되다 할 것이 아니오, 재(才)와 학(學)이 없으면 비록 공경(公卿)의 아들로서 천역(賤役)에 종사더라도 이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다”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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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박지원도 학문의 연구에 있어서 사실과 진실에 토대를 두고 권위적인 이념에 구속되는 것을 벗어나 자율적인 입장에서 자유로운 탐구의 의지를 존중하고, 폐쇄적 권위를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그는 사대부들이 성리학의 논의에 골몰하여 경제를 잊고 사화(詞華)에만 몰두하여 정치에는 무책이라고 비판하면서 민(民)의 주류의 일이었던 농(農)·공(工)·상(商)을 학문의 위치에까지 올려두고 있다.

선비의 학문이란 실로 농·공·상의 이치를 포괄해야만 하니, 이 세 가지는 모두 선비를 기다린 이후에야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소위 농사를 밝히고 상거래를 통하고 공업을 좋게 한다는 것인데, 그 밝히고 통하게 하고 좋게 하는 바는 선비의 일이 아니고 누구이겠습니까. 그런 때문에 신은 그윽이 이르기를 “후세에 농·공·상이 실업(失業)하게 된 것은 선비들이 실학을 하지 않은 잘못에서 기인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박지원은 당시 선비들이 농(農)·공(工)·상(商)의 이치를 연구하는 실학을 잡학이라 하여 천시하는 것을 비판하며 백성들의 주된 일을 학문적으로 돕는 것이 곧 선비들이 해야할 임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북학파가 사민평등(四民平等)과 사민개농(四民皆勞)을 주장한 것이 비록 신분질서의 타개를 직접적으로 요구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관직과 교육의 기회균등, 노동의 신성화, 능력에 따른 직능의 분화 등을 주장한 것은 당시 사회의 신분적 가치관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몰락한 양반출신이며 겸인 출신으로 조선의 정치체제 속에서 주변부에 머무르고 있던 이상재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계보인 북학파의 이상적 목표중 하나인 사민평등(四民平等)을 이루고 있고, 이를 보존하기 위해 엄격한 기준의 법률로 운용되는 미국의 사회체제가 이상적 사회로 비추어 질 수 있었다. 그러한 이유에서 그는 미국의 사회체제에 고무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

또한 그의 미국관은 이상재가 주인이라 하여 섬겼던 박정양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박정양도 미국사회의 원리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該國은 合衆心成의 권리가 민주에 있는 나라이다. 그러므로 비록 細氓, 小民이라 할지라도 국사를 자기 일처럼 돌보아 盡心竭力하여 극진히 하지 않음이 없다. 또 交友의 道는 尊卑가 같으며 귀천의 구별이 없어 무릇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를 얻는다고 한다. 자주라는 것은 누구나 다같이 하늘이 부여한 것이고 貴賤·尊卑는 모두 바깥에서 이르는 것이니 바깥에서 이르른 것이 어찌 자주를 毁損할 수가 있겠는가”

박정양은 미국사회를 주권재민(主權在民)과 천부인권(天賦人權)의 평등사회요 민주주의 사회로 보고 있다. 국민들이 신분이나 계급에 상관없이 평등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은 조선사회에서는 생각지 못할 일이었다. 전통적인 유가(儒家)의 전통에서는 만인이 동등하게 누릴 수 있는 평등주의적 권리관이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 성리학의 전통에서는 각 개인의 평등한 권리관(權利觀)이 없다.

그러나, 권리개념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서구(西歐)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은 날 때부터 사회적 신분에 관계없이 평등하다. 따라서 사회적 신분의 차이나 인격의 고하에 상관없이 인간은 누구나 똑같은 기본권을 누릴 수 있다. 그러므로 타인의 권리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 그러한 권리는 객관적인 규범 즉, 법률에 의해 보호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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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사실, 유가(儒家)에는 개개인의 권리를 존중해주는 개체주의적 인간관과 사회관은 없지만, 개개인들인 속해 있는 공동체 안에서 각각의 사람됨(도덕적 완성)을 이룰 수 있도록 각자의 역할이 부여된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각자 맡은 역할과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그 역할이란 공동체의 구성원이 인자하게 서로를 보살펴주고 서로의 복지를 위해 주는 화목한 공동체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에서 동도(東道)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사회는 도덕적 자아수양을 강조함으로써 군주(君主)의 사리(私利)추구를 위한 학정(虐政)까지도 방지(防止)하려는 사회였다. 군주라 해도 천하를 자의(自意)대로 양도할 수 없고 하늘만이 이를 주고 빼앗을 수 있다고 본다. 오직 하늘이 실질적인 소유주이며 따라서 천자는 천하의 소유권을 행사할 수 없다. 그리고 군주의 역할은 인정과 덕치(德治)로써 상·하·빈·부의 격차에서 오는 사회불화를 해소하여, 조화로운 사회를 이룩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성에서 일탈(逸脫)될 때 비난받으며, 자신보다 타인의 관심을 위해 일할 때 덕인(德人)으로 칭송을 받는다. 인(仁)·의(義)·예(禮)·효(孝)·신(信) 등은 공동체 생활에 중요한 덕목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개념들은 공동체내부에 윤리적인 규범인 동시에 객관적인 규범이 되었다.

또한, 유학에서 말하는 인(仁)은 때때로 자기가 당하기 싫어하는 일을 타인에게도 시키지 않을 의무가 있다. 이기심을 극복하여 예(禮)로 돌아감이 인(仁)이다.
즉 남의 정당한 몫을 가로채지 않는다거나 남의 이익을 침해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최소한의 도덕원칙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仁)은 ‘정의의 준수’나 ‘권리의 존중’의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 유학에서는 개개인이 인·의·예· 효·신 등의 도덕적 자아완성의 잠재성을 가졌다고 보았고, 그래서 인간의 존엄성을 중요시하였다.

그러나, 실제사회에서는 권리와 평등을 인정하지는 않았다. 무어(Charles Moore)는 유가의 전통에서는 오직 도덕적 성인만이 참다운 개인이었기 때문에 실제 유가의 전통에서는 개인의 권리는 전혀 바람직한 것으로 고려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무어의 지적처럼 실제 동도(東道)를 중시하는 유학의 세계는 이상만 있었지 실제로 평등한 사회였다고 말 할 수는 없다.

이상재가 본 조선사회는 미국사회와 비교하여 오히려 동도적(東道的) 이상을 거부하는 사회로 보여질 수 있었다. 이상재가 본 미국은 권리를 인간의 존엄성 보장의 수단으로 채택하고 있는 나라였다. 그리고 미국사회는 각 개개인에게 복지여건과 후생여건을 마련해 주고 있다.
오히려 이상재에 있어서 미국사회는 공자(公子)의 말처럼 “유교무류(有敎無類)”라 하여 출신에 관계없이 교육의 혜택이 베풀어지며 “불환빈(不患貧), 환불균(患不均)”라고 하여 나라가 부강해지는 것보다 부의 균등한 분배가 더 중요한 사회로 보일 수 있었다. 맹자의 기본적인 삶의 수단이 있은 후에야 도덕범절을 가르칠 수 있다는 주장이 조선의 사회가 아닌 미국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상재가 보기에 미국사회는 엄격한 법률적용으로 백성들에게 기본적인 삶을 영위하도록 하는 사회였지만, 당시의 조선사회는 부패와 가렴주구가 판치는 사회였고 백성들은 학정(虐政)에 시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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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이상재는 동학란이 일어난 것도 결국은 민초들이 가학(苛虐)을 견디지 못하여 결국을 폭동을 일으켰다고 보았으며, “안으로는 탐관오리(貪官汚吏)들이 있어 계급이 낮은 자는 훔쳐먹고 지위가 높은 자는 긁어먹고 빼앗아 먹어 인민들이 어육(魚肉)이 되었다”고 당시의 부패를 고발하고 있었다. 이상재가 볼 때, 동도(東道)는 인욕(人欲)과 천리(天理)를 정밀하게 분변하며, 천리(天理)를 모든 행사(行事)에서 한결같이 실천하여야 하는 유가의 중심사상이었다.

그리고 동도(東道)는 내성외왕(內聖外王)의 도(道)로 인간의 심성(心性)에서 천리(天理)를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개인의 행위와 정치의 교화를 실현하려는 수기치인(修己治人)·정기물정(正己物正)의 유교적 근본이념과 행도수교(行道垂敎)의 실천 의지가 보여야 한다. 따라서 관료(官僚)는 백성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아야 하며(以民爲心), 군주(君主)와 관료는 백성을 위하여 존재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백성을 근본으로 삼는 민유방본(民惟邦本)의 사상인 것이다. 그런데, 이상재에게 있어서 조선은 이러한 동도(東道)의 이상이 거부되고 있는 사회로 인식되었다.

박정양은 인화(人和)가 미국의 사회전반에 나타나고 있다고 보았다. 미국은 편민이용(便民利用)에 관한 일에 힘쓰기 때문에 철도와 도로가 전국에 걸쳐 만들어지고 기차와 전차, 자동차 등도 요금이 저렴해서 인민들이 걸어다니는 것을 보기 힘든 나라였다. 그는 서구인들이 동양의 인력거를 보며 “어찌 차마 사람으로서 사람을 탈 수가 있는가. 생각건대 이는 천리인정상(天理人情上) 마땅히 행할 바가 아니다”라며 동양 사회가 비인화의 사회라고 인식한다고 보았다. 하물며 인화(人和)는 죄인들에게 법을 집행하는 데도 나타나고 있다. 미국은 엄정하게 형법을 시행하지만 형법 시행의 목적이 ‘권징인민(勸懲人民) 교도선량(敎導善良)’에 있기 때문에 “옥(獄)이 비록 광대(廣大)하나 민(民)이 오히려 작다고 여기며, 법(法)이 비록 번다(繁多)하나 민(民)이 가혹(苛酷)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인식하고 있다. 이상재의 미국관(美國觀)은 박정양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이상재는 미국의 사회체제 전반에는 동도(東道)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인화(人和)가 곳곳에서 나타나는 반면, 동도(東道)를 숭상한다는 조선은 “백성을 위하고 나라를 위하여 염려는 조금도 하지 않고 서로 헐뜯고 모함하고 비방하고 시기하기만 일삼고 다만 자기들 한 몸의 영리(榮利)에만 급급하여 삼천리 강토가 뉘 손으로 들어가고 이천만 민중들이 어떤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까맣게 몰라 불쌍한 민중들이 서로 붙들고 가슴을 치고 통곡을 하려고 하여도 할 곳이 없는 나라”였다.

이상재는 이러한 인식에서 조선사회에 미국의 사회체제를 접목하여 실학의 북학파적(北學派的)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동도(東道)의 전통 하에 있던 군권(君權)을 포기하지 않으려 하였다. 그는 군주와 백성이 인화(人和)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체제가 입헌군주정이라 생각하고 이를 주장했다.
“그러면 지금 우리 나라에 있어서 가장 급한 일로 제일 먼저 할 일이 무엇이냐고 물을 것 같으면 바로 대답하기를 국권을 공고히 하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국권을 어떻게 공고히 할 것이냐 하면 황권(皇權)을 존중히 해야 한다고 할 것이며, 황권을 어떻게 해야 존중하게 하느냐고 하면 정부에서 각각 그 직권과 책임을 완수하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니 정부의 권력은 민중의 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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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당시 고종은 조선에 공화정이 실현될까 두려워하였다. 따라서 고종은 이상재가 내심 공화정을 목표로 하여 대중운동을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에 그를 투옥하였다.

2.4.3 동도서기적 (東道西器的) 인식
이상재는 미국의 사회체계를 북학파적(北學派的) 이상사회로 보았지만, 미국 문명의 기초가 되는 서도, 즉 기독교는 거부하였다.
브로크만(F. M. Brockman)에 의하면 이상재는 미국의 문명이 발전한 원인이 기독교 때문이라는 것을 청국(淸國)의 공사로부터 전해들었고, 미국을 파악하기 위해 여러 번 성경을 읽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는 대단히 고지식하게 성경을 열심히 읽었으며 성경에서 국가가 위대하게 된 비결을 찾아내고자 했다. 그러나, 군대를 훈련시키는 방법이나 전함을 어떻게 건조하는지에 대한 소개 대신에 5개의 빵 덩어리와 물고기 몇 마리로 5천 명을 먹였다거나, 육체의 부활에 대한 어리석은 이야기를 발견하고는 혐오감을 느껴 던져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이 책이 서구 문명의 기초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읽다가 인내심을 잃고 던져버렸다가 또다시 집어들고 읽기를 계속했다. 이러기를 몇 년 한 뒤에 그는 결국 읽기를 포기했다.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갈 때 그는 성경 한 권을 가지고 갔다.
브로크만은 이상재가 독립협회 활동을 할 때 기독교의 원리에 의해 독립협회의 성격이 규정지어지는 것에 대해서 반대했었다고 적고 있다.

“미국에서 공부한 한국인으로 이 협회의 고문으로 선출된 서재필 박사(Dr. Jaisohn)가 이 기회에 기독교 원리를 전파하고 기독교에 대한 강연을 시작하였을 때, 이상재는 반대의 근거로 민족이 요구하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개인의 권리임을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주장이 청중에게 잘 부합되었기 때문에 그는 논쟁의 승리자가 되었다.”

YMCA를 통해 절친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브로크만의 증언과 정동개화파나 독립협회의 활동을 놓고 보더라도 이상재가 기독교를 거부한 것은 확실하다. 그는 일본에 조사시찰단의 수원(隨員)으로 참여하고 미국에 처음 갔을 때만 하더라도 철저히 동도(東道)의 세계만이 진정한 문명이라는 동도서기파(東道西器派)의 입장이었다. 당시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의 조사(朝士)들이 보고한 내용에는 일본의 재정이 부실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부실의 원인은 동·서양의 문화적 차이를 무시한 급격한 서구화정책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서양과의 통상이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서구 열강의 동진(東進)을 막는 수준에 머물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인식에서 이들은 서양의 학(學·耶蘇之敎)과 사(事·功利之貪)를 구분하였다. 즉 서양의 교(敎)와 사(事)를 분리하여 ‘서사(西事)’를 수용하여 ‘동학(東學)’을 중지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보고에 고종은 동도서기론적 개혁론에 찬동했다. 박정양의 수원(隨員)이었던 이상재도 이러한 일본 조사시찰단의 조사(朝士)들과 큰 차이가 없이 이러한 인식에 동의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상재는 미국사회를 인화(人和)를 덕목으로 삼는 사회로 보았고 그와 같은 이유에서 미국을 북학파들이 꿈꾸었던 진정한 동도(東道) 실현의 장(場)으로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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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그러한 이유에서 조선의 문명을 미국의 사회체제를 접목시켜 진정한 동도(東道)의 사회를 이룩하겠다고 생각한 것이지 서도(西道)로 대체하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대개 한 사상이 전통적(傳統的) 사상과 마찰(摩擦)을 가져오면서 기존(旣存)에 대해 반기(反旗)를 들었을 때, 그 자체 하나만을 보고 반동적(反動的) 사상을 기존의 것을 부정 내지는 배척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북학파의 사상이 실학사상이라는 이유만으로 조선의 가치체계였던 도학(道學)의 위치에 대해 거부했다고 오해할 수 있다. 그리고 북학파의 사상이 실학사상이라는 이유만으로 조선의 가치체계였던 도학(道學)의 위치에 대해 거부했다고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실학은 동도(東道)의 기반이 없이는 결코 가능할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실학의 출발동기와 목적이 성현지도(聖賢之道)를 현실구현(現實具現)하자는 데로 모아지기 때문이다. 즉, 도(道)와 기(器)는 같은 위치에 있는 것으로, 북학파들은 성현의 도(道)가 책 속에만 있고 머리 속에만 있는 데 그칠 뿐, 현실과 유리되고 만다면 그것은 허(虛)요 실(實)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지 동양 성현의 도(道)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북학파의 계보에 속해 있는 이상재도 미국의 사회체제를 동경하지만 동도(東道)를 부정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서구열강의 외압이라는 상황에서 전통의 가치관인 동도(東道)를 재음미(再吟味)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미국의 가치체계 속에서 자신의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던 북학적(北學的) 사고(思考)를 발견했고, 그것을 조선이라는 장(場)에 구현하겠다는 목적으로 활동한 것이다.

한편, 동도서기파는 도(道)는 동양의 것이 우월하고 기(器)는 서양의 것이 우월하며, 도(道)는 불변자(不變者)요 기(器)는 가변자(可變者)로 보았다. 이러한 시각에서 동양을 벗어났을 때 동양의 도(道)는 존재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상재는 동도(東道)는 불변자(不變者)로서 조선이라는 공간을 초월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동양의 도(道)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미국의 가치체계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인식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동양의 도(道)는 동양과 서양이라는 공간에 관계없이 존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이상재에게 있어 형이상자(形而上者)인 도(道)는 시공(時空)의 제약을 받지 않는 불변의 이념적 존재였다.

이런 인식 하에서 이상재는 서양 문명의 근거가 되는 서양의 도(道)는 인정하지 않았다. 동양의 도(道)만이 참다운 도(道)요 불변자(不變者)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상재는 도(道)와 기(器)를 같은 위치에서 보는 북학파의 인식에 따라 동도(東道)와 서기(西器)를 같은 위치에서 보았지만, 갑신개화파와는 달리 동도(東道)를 거부하지 않았다.
기독교 입교 전의 이상재는 동도서기파(東道西器派)보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동도(東道)의 이상 실현을 위해 활동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제3장 기독교 입교후의 이상재의 사상

이상재의 사상은 일정 부분 연계와 단절을 가지고 있지만, 기독교 입교(入敎) 전후(前後)에 따라 명백하게 구분된다.
기독교에 입교(入敎)하기 전(前), 이상재는 동도적(東道的) 이상(理想)을 기독교 사회에서 발견하였지만 기독교를 여전히 거부했다. 그러나, 입교 후에 이상재는 기독교가 바로 동도(東道)의 이상과 실천 그리고 완성이라고 확신하였다. 이 장에서는 이상재의 기독교 입교(入敎) 과정과 그것이 갖는 의미와 사상적 성격을 규명하고자 한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28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3.1. 이상재의 기독교 입교(入敎) 과정
3.1.1 기독교와의 접촉(한성감옥에 수감 전까지)
이상재는 기독교에 입교한 1903년경 이전에도 기독교에 대해 나름의 이해를 갖고 있었다. 그는 미국의 사회체제가 서도(西道)인 기독교에 의해 움직여진다고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재는 자신의 계보 가까이에서 기독교를 대할 수 있었고, 미국에 체유(滯留)하는 동안 나름대로 기독교를 분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독교가 서기(西器)의 근간인 서도(西道)라고 인식하였으면서도 유가(儒家)의 전통 아래 있었던 그로서는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전술(前述)한대로 브로크만(F. M. Brockman)에 의하면 이상재는 체미(滯美)기간 동안 미국 문명이 발전한 원인이 기독교 때문이라는 것을 전해들었고, 미국을 파악하기 위해 여러 번 성경을 읽었다. 그러나, ‘오병이어’나 ‘예수의 부활’과 같은 신비한 사건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서양문명의 기초가 기독교라는 것은 믿고 있었지만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브로크만은 서재필이 독립협회 활동의 당위성을 기독교의 내부에서 찾을 때에도 이상재가 이를 거부했다고 밝히고 있다.

“미국에서 공부한 한국인으로 이 협회의 고문으로 선출된 서재필 박사(Dr. Jaisohn)가 이 기회에 기독교 원리를 전파하고 기독교에 대한 강연을 시작하였을 때, 이상재는 반대의 근거로 민족이 요구하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개인의 권리임을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주장이 청중에게 잘 부합되었기 때문에 그는 논쟁의 승리자가 되었다.”

이상재가 자신이 이상적 사회체제로 여겨 도입하려고 했던 미국의 민주주의적 사회제도가 기독교로 인한 것이라고 인지(認知)하면서도 끝까지 이를 거부하고자 했던 것은 조선의 전통문명인 동도(東道)에 대한 강한 집착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국사회는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던 동도(東道)로만 설명되지 않는 사회체제일 수밖에 없었다.
즉 유가(儒家)의 유기적인 사회통합의 논리로만 설명될 수 없는 필연적 구조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민경배가 지적한 것처럼, 서양의 문명을 기독교의 서양적 전개의 거대한 힘인 서구 기독교 문명의 종교적 진리나 복음과는 별개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판단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1898년 11월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백성들의 항의로 인해 10일만에 석방되었던 이상재는 12월에 독립협회에 대한 해산과 간부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령이 떨어지자 피신했다.

이 때 그는 기독교를 유교와 비교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이러한 행동은 자신이 절대적인 믿음 아래 추구하였던 독립협회 활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자신에게 위기가 닥쳤을 때, 실패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찾는 인간의 본능적 행위일 수 있다.
브로크만은 당시 이상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독립협회는 마침내 정부에 의해서 해산을 당했다. 이상재는 몇몇 섬들로 도망쳐야 했다. 그는 섬에 있는 사찰에서 공자와 맹자가 쓴 책들과 신약성서를 비교해 보았다. 여전히 성서에 대한 거부감은 있었지만 왠지 신비한 점이 있어 버리지 못하였다.”
박정양이 「미속습유(美俗拾遺)」를 통해 밝힌 것처럼 이상재가 기독교에 대해서는 매우 우호적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박정양은 미국에 있을 때, 기독교를 ‘권징도선(勸徵導善)의 규(規)’로 파악함으로써 개신교가 도덕과 윤리를 지향하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과 같이, 이상재도 개신교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는 도덕과 윤리를 지향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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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그러한 이유에서 개신교가 정신문명으로 미국의 사회체제를 움직이고 있다고 믿고, 미국사회가 자신이 꿈꾸던 동도적(東道的) 이상을 일정 부분 공유한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 아래에서 기독교와 동도(東道)를 비교해 보았다. 이상재는 자신의 이상(理想)이었던 동도적(東道的) 세계에 대한 완성을 독립협회의 활동을 통해 이루고자 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그는 실패의 원인을 서도(西道), 즉 기독교를 분석하여 찾고자 하였으나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을 떨칠 수 없었다. 브로크만이 대신한 이상재의 진술(陳述)은 서구의 문명과 체제를 동도적(東道的) 관점만을 가지고 이식(移植)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 유가(儒家)의 분석만을 가지고는 기독교가 갖고 있는 종교적 신비에 대한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에도 이상재는 전반적으로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는 가지고 있었다.

3.1.2 기독교 입교(入敎)과정(한성 감옥 수감시)
1902년 정권(政權)을 장악하고 있던 친러내각(親露內閣)은 민영환의 조선협회가 일본에 망명중인 박영효, 유길준 등과 공모하여 역모를 꾸민다는 명목으로 독립협회의 관계자들과 일본사관학교 출신 등 친일적(親日的) 인물이라고 판단되던 반대파들을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서울로 돌아와 있던 이상재는 1902년 6월에 아들 승인과 체포되었다.

이때 유길준의 동생이자 내부협판이었던 유성준(兪星濬), 법부협판과 승지(承旨)였던 이원긍(李源兢), 경무관(警務官)이었던 김정식(金貞植), 참서관(參書官)이었던 홍재기(洪在箕), 강화 진위대(鎭衛隊) 장교 유동근(柳東根)과 홍정섭(洪正燮), 후일 제국신문 사장이 된 이종일 등도 체포되었는데, 감옥““) 이상재 부자(父子)는 체포된 후 60일간 가혹한 고문을 당했고, 8월에 한성감옥(현재 종로구 서린동 42번지)으로 이감되었다.
””에는 이미 독립협회 활동에 적극 가담하였던 이승만, 신흥우, 박용만, 양의종, 성낙준 등 배제출신 학생들도 복역하고 있었다. 이상재의 죄명(罪名)은 일본에 있던 유길준과 연락하여 역모(逆謀)를 도모(圖謀)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무고(誣告)였고, 실제로는 유길준의 포섭대상에 이상재가 들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친러내각(親露內閣)의 대대적인 검거 탓에 한성감옥은 관료출신의 개화파 지식인들과 학생들로 가득 찼다. 당시의 감옥은 매우 열악했다.
더구나 1902년 8월부터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퍼진 콜레라는 엄청난 피해를 주어 한성감옥에서도 수십 명이 죽어나가고 있었다. 이승만은 당시의 한성감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작년 가을에 괴질이 옥중에 몬저 들어와 사오일동안에 륙십여 명을 목적에서 쓸어내일새 심할 때는 하로 열닐곱 목숨이 압헤서 쓸허질 때에 죽는 자와 호흡을 통하며 그 수족과 몸을 만저 곳 시신과 함겨 지내엿스되…”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친러파(親露派)들은 이들을 가혹(苛酷)하게 다루었고, 수감자(收監者)들은 보복(報服)을 꿈꾸었다. 그러나, 조기석방(早期釋放) 될 것이라는 예상이 빗나가자 그들은 좌절(挫折)과 절망(切望)에 빠져들었다. 이상재와 함께 체포되었던 유성준은 당시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고(回顧)하고 있다.

“다섯 평에 불과한 감옥 방에 20여 명을 가두었으니 앉고 눕고 하기를 임의로 할 수 없을 뿐더러 강도·절도·사기·횡령 등 죄인과 섞여 있음으로 그 말과 행동은 참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없으며, 또 서책을 감옥서장에게 청구한즉 옥중규칙에 허락치 아니한다 하나 이때에 감옥 관리들도 우리들이 무죄히 갇힘을 동정함으로 이상재 이외 제씨가 각금 한 자리에 모이게 되면 우리들이 이 옥에서 나가는 날에는 이근택을 무고죄로 고소하여 도로혀 법을 지우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는 분한 말이나 하면서 이럭저럭 세월을 보내는 중이었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30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유성준은 이상재가 수감자(收監者)들이 울분을 토로(吐露)하며 보복을 다짐할 때 유일(唯一)하게 빠져있었다고 증언(證言)하였지만, 이상재 역시 정치적 박해와 독립협회를 통한 개혁의 실패로 인한 분노와 함께 낙담(落膽)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후일, 이상재와 함께 YMCA에 들어가 주도적 활동을 같이 하였던 김정식도 당시의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옥중에서 허다한 苦楚로 무정한 세월을 보낼 때에 사람을 怨望하며 세상을 歎息하는 맘이 가슴에 가득하고 창자에 얼켜 每樣 이 몸이 毒手에 팔린 바 됨을 생각하면 분한 마음이 폭발하여야 머리털이 우(위)를 가르치고(솟구치고) 더운 기운이 목에 막켜 적은 음성도 내일 수 없을 때에 그 寃痛한 心事가 엇더하리오.” 이러한 때, 이들에게 위안을 주었던 것이 두 가지였는데, 그것은 기독교 선교사들이 찾아와 적극적인 위로를 하여준 것과 배재학생이었던 이승만과 신흥우의 노력과 이들을 동정한 감옥서장인 김영선의 배려로 한성감옥에 개설된 학교와 서적실(書籍室)이었다.

당시에 책들은 대부분 선교사들이 넣어주었는데, 이들은 양반 관료출신인 정치범들이 기독교에 관심을 갖도록 중국에서 간행된 서적들을 한성감옥의 서적실(書籍室)에 공급하였다.
당시 한성감옥에는 아펜젤러(H. D. Appenzeller)와 벙커(D. A. Bunker)부부를 비롯하여 헐버트(H. B. Hulbert), 애비슨(O. R. Avison), 언더우드(H. Under- wood), 게일(G. S. Gale), 존스(G. H. Jones) 등이 국사범이었던 이들을 면회하고 전도(傳道)하는 한편, 옥중(獄中)의 처우(處遇) 개선과 이들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특히, 배제학교의 교사로 있었던 벙커는 이승만, 신흥우 등이 만든 감옥학교에 주일이면 찾아와 성경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들 선교사들의 도움에 대해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혈육의 연한 몸이 오륙년 역고로 큰 질병이 업시 무고히 지내며 내외국 사랑하는 교중 형제자매들의 도우심으로 ?宕? 보호를 만히 밧엇거니와 성신이 나와 함께 계신줄을 밋고 마음을 졈졈 굿게하여 령혼의 길을 확실히 차젓스며…”

감옥학교(監獄學敎)는 당시 큰 뉴스였는데, 벙커선교사의 감옥학교에 대한 기여(寄與)와 그 효과에 대해 황성신문은 1903년 1월 19일자 잡보(雜報)에 "옥수교육(獄囚敎育)"의 제목으로 기사가 실렸다.
“監獄署長 金永善씨가 인민의 교육이 無하야 近日에 犯科處役한 者 甚多함을 慨歎하야 月前붓터 감옥서내에 學敎를 設立하고 罪囚를 敎育하는데 敎師는 李承晩, 梁義宗씨오 敎科書는 改過遷善한 冊子오 英語, 算術, 地誌 等書로 열심 敎導하는 故로 英人 房巨씨가 每日 一次로 往來하야 敎科를 贊務하고 書冊을 多數 供給함으로 竊盜죄로 處役한 兒 二名이 受學한지 數朔에 悔過하야 漢城府에 歎願하되 處役시에 他人의關한 바의 姓名을 변역變易하얏스니 今來 思量한則 悔之莫及이라 役丁簿에 本姓名으로 還錄하라 하얏더라”

선교사들의 정기적인 방문과 사역(使役)은 한성감옥의 수인(囚人)들이 개신교로 입교(入敎)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하였는데, 그것은 이상재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쳐 그가 기독교로 입교(入敎)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편, 도서관의 역할을 하였던 한성감옥의 서적실(書籍室)은 이상재가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데 큰 부분을 담당하였다.
당시 서적실(書籍室)에 비치된 책들은 대부분이 기독교에 관계된 책과 서양의 정치·경제·역사·법률·전기·과학에 관한 것들이었는데, 이상재는 총 24종의 책을 44회에 걸쳐 대여하였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31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그중 기독교 관계서적은 신약성경을 비롯하여 「기독실록(基督實錄)」등 10여 종에 이른다.
그러나, 이상재가 입교(入敎)하는 데는 그가 브로크만에게 고백하기도 했던 신비한 체험이 결정적이었다. 브로크만은 이상재가 체험한 것을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그는 당시 자신의 생애에 아주 낯선 체험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위대한 왕이 보낸 사자’가 자신에게 말하기를 ‘나는 몇 년 전 당신이 워싱턴에 있을 때 성경을 주어 믿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지만 그대는 이를 거절하였다.

이것이 첫 번째 죄이다. 또 나는 그대가 독립협회에 있을 때도 기회를 주었지만 당신은 반항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믿는 것까지도 방해를 했다. 이런 식으로 당신은 민족이 앞으로 나갈 길을 막았으니 이것이 더욱 큰 죄이다.
나는 그대의 생명을 보존하여 감옥에 그대를 두었는데, 이것은 내가 그대에게 주는 신앙을 갖게 하는 또 다른 기회이다. 만일 지금도 그대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 죄는 이전보다 더욱 큰 것이 될 것이다’ 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 그는 주님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성경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러한 체험으로 이상재에게는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났는데, 하나는 정치적 보복을 다짐하며 증오했던 정적(政敵)들 즉, "자신을 부당하게 대했던 이들에 대한 강한 증오심을 버리게 되었고”, 자신이 그토록 거부하고자 하였던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한 존재를 인정하게”된 것이다.

입신(入信) 후, 브로크만은 이상재가 아주 엄격하게 새벽마다 성경을 외우고 기도를 하였으며, 사람들에게 새벽에 일어나 자신과 같이 기도와 묵상하기를 권하기도 하였다고 증언한다. 이것은 목덕(穆德, J. Mott)의 「신경(晨更)」을 번역한 이상재가 이 글의 발문(跋文)에서 독자들에게 자신의 엄격한 신앙생활을 알려주고 있는 데서 잘 나타난다.

이 내용은 “비루한 사람(역자 자신을 가리킴)이 알지 못했던 두 글자(신경, 晨更)를 알고 난 이래로, 성경을 외우고 기도를 드리는 데 힘썼다. 평소의 마음을 경험하건대, 매일 신경(晨更)을 지키면 중심이 기쁘고 상쾌하며 일을 할 때 타당하게 협력하게 된다.

만일 믿음이 냉담해지고 사사로운 감정이 넘치는 것은 신경(晨更)을 지켰느냐 아니 지켰느냐에 달렸는데, (이러한 감정이 드는 때는) 무릇 도덕적인 마음이 가장 적은 때라. 이로써 경험하건대, (신경을 지키면) 백에 하나라도 잃지 아니하니, 즉 이러함을 보아도 신경(晨更)을 지키지 아니하는 신도의 그 심경이 위축되고 흐릿해지는 것과 같음을 또한 알 수 있다”는 것으로 이상재 자신이 새벽마다 엄격하게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함으로 하루를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선교사들의 정성어린 전도(傳道)와 한성감옥 안에서의 기독교 서적의 탐구, 신비한 체험은 동도(東道)를 고집하던 이상재로 하여금 기독교로 입신(入信)케 하였다.

이때 이상재와 함께 기독교로 입교(入敎)한 인물들 중에는 이원긍, 홍재기, 김정식, 유성준 등의 양반관료 출신들이 있었다. 이러한 정황에 대해 이원긍의 아들인 이능화는 자신이 쓴 「조선기독교와 외교사(朝鮮基督敎及外交史)」에서 감옥이 천당으로 변했다는 뜻에서 ‘지옥즉천당(地獄卽天堂)’이라는 제목으로 기록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이상재를 포함한 관료출신들은 세례를 받기 전에 신약전서를 연구하고 벙커선교사의 전도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능화는 이들이 기독교 신자가 된 것을 ‘시위관신사회신교지시(是爲官紳社會新敎之始)’라 하여 이들을 시작으로 한국 역사상 관료와 양반사회 안에 기독교가 시작되었다고 기록하였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32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이러한 기록대로 이상재는 북학파계보의 양반관료 출신으로 기독교의 신자가 된 것이고, 이것은 이상재 개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한국의 지성사(知性史)에서 북학파의 계보가 한국 기독교내에 한 지류(支流)를 형성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양반관료군 출신의 기독교인들이 활동할 수 있는 장(場)과 이들 계층의 성격에 부합될 수 있는 기독교관(基督敎觀)이 마련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암시하며, 한국 기독교에는 유교적 교양을 가진 유가(儒家)의 지식인들의 기독교관이 일반 부서층(婦庶層)의 기독교관(基督敎觀)과 구별되어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상재는 감옥전도에서 영향을 받은 게일을 좇아 연동교회로 간 후, 정치와 인연을 끊고 관료로만 활동하다가 YMCA(황성기독교청년회)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기독교 활동을 시작한다.

3.2 기독교 회심(回心)의 성격
이광린은 유교출신(儒敎出身)의 개신교 신봉자(信奉者)들이 유교와 기독교를 서로 모순(矛盾)되는 것으로 보지 않았고, 오히려 기독교는 유교사상(儒敎思想)의 보완(補完) 내지는 완성(完成)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은 기독교 신앙을 기왕의 유교사상과 단절(斷絶)된 것이 아닌 연속적(連續的)인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매우 설득력(說得力)이 있다.
이상재는 기독교에 입교(入敎)한 후에도 기존에 가졌던 동도적(東道的) 이상(理想) 즉, 도덕적(道德的)인 가치체계(價値體系)가 기준이 되는 유기체적(有機體的)인 공동체를 포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개신교에 입교(入敎)하면서 이러한 그의 사상은 강화(强化)된다.
그는 기독교 속에 자신의 이상(理想)과 동도(東道)의 원형(原形)과 실천, 그리고 완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즉 회심 후, 그는 기독교가 동도(東道)의 세계관을 완성시켜줄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브로크만은 이상재가 옥중(獄中)에서 성경연구반 활동을 통해 기독교와 유학(儒學)의 사상을 비교하고 토론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 성경연구반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 작았지만 진지한 이 모임은 날마다 성경을 연구하였으며 성경을 공자의 사상과 불교의 고전과도 비교함으로써 역사상 위대한 성경연구반의 하나임을 증명하였다.
그 결과 모임에 참여한 모든 이들은 이후에 한국교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는 열정적 기독교인이 되었다.”

신비한 체험을 한 이상재였지만 당시 유가(儒家)의 지식인이었던 이상재는 지식인(知識人)이 갖는 회심의 특성상, 성경을 기존의 자신이 알고 있던 것들과 비교 연구하여 자신이 경험하고 이해했던 것들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이상적으로 꿈꾸었던 동도적(東道的) 세계관(世界觀)이 기독교 속에 있다는 것을 알고 기독교가 불변자로서 세계의 기준이 된다고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 안에 동도적(東道的) 이상이 통합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한 이유에서 이상재에게서는 윤치호의 기독교관에서 나타나는 전통 파괴의 이변(異變)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동도(東道)에서 말했던 인륜의 기초에 기왕(旣往) 뿌리박고 있었던 원초적 질서가 기독교 속에 원형으로 간직되어 있고 기독교 세계 안에서만 발휘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상재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동도(東道)의 완성이었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33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이상재는 일관성 있게 자신의 기독교관을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주장은 그가 1926년에 『청년』지에 연재했던 ‘청년이여’에 잘 나타난다.
“眞正한 我를 何에 求할까. 人生의 生命되는 精神이 是也니 精神이라 함은 孔聖의 所訓良性이오, 基督의 所論靈魂이라”
여기에서 이상재는 인간을 진정으로 구하는 방법은 정신인데, 그 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공자와 성인들이 가르쳐준 선량(善良)한 품성(品性)이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바 영혼이라고 주장하여 유가(儒家)의 가르침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넣어 변증(辨證)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글 “진평화(眞平和, 참된 평화)”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유학(儒學)에 대한 긍정적 인식(認識)을 드러내고 있다.

“馬太 十二章 二十五節 「國마다 스스로 分爭하면 滅亡할 것이요, 城이나 家이나 스스로 分爭하면 入치 못한다」하였고, 東洋 先聖이 曰 天時不如地利요, 地利不如人和라 하였으니, 天下萬事가 和平이 아니고는 하나도 될 수 없나니라. …(중략)… 우리 基督이 自己를 犧牲하여 人의 罪를 代贖하신 眞意를 不忘할지니, 眞平和의 本源은 愛와 怒에 在하다 하노라. 東洋 先聖도 夫道는 人怒뿐이라 하셨나니라.”

이상재는 참된 평화를 설명하면서 마태복음 12장 25절의 말씀뿐만 아니라, 하늘의 때가 땅의 이로움과 같지 아니하고 땅의 이로움이 사람의 화평과 같지 않다는 동양(東洋) 성현(聖賢)의 말을 인용하여 동양의 하늘이 기독교의 하나님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동양의 성인(聖人)의 도(道)가 어짊과 용서뿐이라고 하여 사랑과 용서(容恕)의 의미인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뜻과 유형적(類型的)으로 다르지 않다고 본다. 이상재의 유가(儒家)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그의 인식주체(認識主體)의 지평(地坪)이 변화(變化)하는 것을 의미(意味)하는 것이다. 이상재는 자신이 발견한 기독교 내(內)에 있는 도덕적 가치가 시공(時空)을 초월하는 중심가치(中心價値)라고 생각했다. 다음의 여러 글에서 이상재의 이러한 생각을 알 수 있다.

“倫理와 道德은 上帝께서 우리 人類에게 賦與하신 原則이요 要素이거늘, 만일 比에 一離하면 野蠻이요 禽獸니라. 우리 朝鮮 民族의 今日 現狀을 默想하라 所有者가 무엇인가. 形式이나마 皮膚나마 倫理이니 道德이니 僅僅殘餘한 것뿐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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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0년 5월 14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조선부노(朝鮮父老)에게 고(告)함”과 5월 17일자에 실린 “가명인두상(假明人頭上)에 일봉(一棒)과 진수(眞髓)”라는 사설을 비판하며, 이상재는 기독교의 중심적 매체를 윤리와 도덕이라 보았고 이러한 윤리와 도덕만이 한국을 구할 수 있는 참된 가치라 보았다. 그리고 그러한 도덕과 윤리가 자신이 이상으로 삼는 중심가치였다.

이상재는 “도덕이라고 하는 것은 천하(天下)에 공통적(共通的)이기 때문에 어느 나라든지 지역(地域)이나 시대(時代)를 따라 나눌 수 없고, 도덕을 갖추고 있어야만 개인이나 국가가 존경(尊敬)을 받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자신의 글 ‘문명의 해석’에서는 “우리 민족의 행복과 영원한 문명(文明)이 도덕에 있다”고 피력하며 “도덕과 종교는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상재는 도덕과 윤리를 가치의 중심의 놓고 그의 삶에 가장 우선적(優先的)인 기준으로 삶는다. 그에게 있어서는 도덕과 윤리가 진정한 선(善)으로 가치판단의 기준이 된다. 그러한 관점에서 자기 자신이나 사회문제, 민족의 문제에 윤리와 도덕이 행동의 잣대가 된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34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3.3 이상재의 기독교 사상과 그 성격
1903년 옥중(獄中)에서 입신(入信)한 이상재는 다음해 2월 석방(釋放)된다. 그리고 자신의 기독교적 이상을 실현할 장(場)으로 Y.M.C.A.를 선택하여 활동한다. 이후, 그는 관료생활보다 YMCA활동을 적극적으로 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그는 구한말의 관료들이 대거 몰렸던 자강운동(自强運動)에 소극적 자세로 일관한다.

이것은 이상재의 개신교 입교(入敎)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이는 이상재가 기독교에 입교 후, 입교 전(前)에 가지고 있었던 사상(思想)의 틀과 달리한다는 뚜렷한 증거가 된다. 그것은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에 보다 분명히 나타난다. 을사늑약(乙巳勒約) 후, 국권회복운동(國權回復運動)은 의병에 의한 무장투쟁과 일명 실력양성운동의 자강운동으로 나타났다. 특히, 독립협회 출신들은 이러한 자강(自强)을 목표로 하는 운동단체들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이 ‘자강운동단체’는 윤치호, 윤정효, 김가진 등이 주도하였던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와 대한협회(大韓協會), 서북학회(西北學會), 이종일이 조직한 대한제국민력회(大韓帝國民力會), 그리고 가장 규모가 컸던 신민회(新民會) 등이었다.

이 자강단체는 국권회복(國權回復)을 위해 실력의 양성을 주장하거나 실력양성을 위한 정신의 분발을 강조하였다. 또한, 이들 단체들은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여 국권회복의 도모를 목표로 하였지만 자신들의 목표를 실천하기 위해 일제(日帝)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한국을 독립국가로서 인정하는 조건으로 일본을 힘의 중심으로 하는 ‘동양평화론’을 수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상재는 이러한 의병에 의한 무장투쟁운동이나 실력양성(實力養成)의 자강운동단체(自强運動團體)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그것은 이상재의 사상이 개신교에 입교(入敎)한 후 변화했기 때문이었다.

3.3.1 서도(西道)중심의 문명 해석
기독교 입교 전(前) 독립협회에서 활동할 때만 하더라도 이상재는 19세기의 근대문명이 갖고 있는 외형적인 힘을 동경(憧憬)하였다. 합리적이고 사민평등의 평등성,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중시하는 근대문명의 외형적인 ‘힘’은 조선(朝鮮) 백성들에게 공평과 자유를 주어 그들을 속박과 질곡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근대적인 힘을 갖고 있는 사회가 문명하다는 인식 하에 문명사회의 수용을 위해 활동하였다.

이것은 당시 일부 개화지식인들이 갖고 있던 ‘외형적 힘이 곧 정의’라는 사회진화론적(社會進化論的) 태도였다. 기독교에 입교한 후, 이상재의 태도는 급변한다.
그것은 서로 다른 도(道)와 기(器)를 나누어 붙일 수 없고 기(器)는 도(道)를 바탕으로 하여 외연된다는 인식으로의 변화였다. 그는 미국의 사회체제 속에 동도(東道)의 이상적 실체가 있다는 확신, 즉, 합리성과 건전성, 사민평등(四民平等)의 인간관에서 비롯된 인화(人和) 등이 성서적 교훈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미국을 통하여 근대국가가 발휘하는 '힘'의 원천이 바로 기독교의 도덕력에 있다고 인식했다. 이상재는 기독교가 갖고 있는 도덕력이 사회체제 전반에 기본으로 자리잡아야만 진정한 문명국으로서의 진정한 힘이 외연(外延)된다고 보았다. 이광수는 이상재의 기독교 입신(入信)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35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翁은 조선의 更新은 정치적 更張에 求하여 보려다가 못하고 마침내 ‘朝鮮을 復活시킬 길은 오직 朝鮮人의 靈魂을 罪惡에서 건지어 朝鮮人으로 하여금 純潔한 民族이 되게 하는데 있다’고 自覺하였다. 純潔한 정신과 純潔한 生活이 모든 힘의 源泉인 것을 自覺한 翁의 自覺은 위대한 自覺이었다. …(중략)… 信仰이 없는 傍人의 눈으로 보면 痴라고 할만하게 翁은 信仰의 人이다. 다만 神에게 대한 信仰뿐이 아니요 모든 義에 대한 信仰이다.”

이광수가 본 것처럼 기독교에 입교한 이상재의 활동은 더 이상 독립협회에서와 같은 방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사상이 근본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상재의 활동방식은 더 이상 문명개화를 목적으로 하여 사회체제를 바꾸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한국의 모든 체제가 혁신하려면 한국인(韓國人)들이 기독교 신앙과 그 윤리의 결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것만이 한국을 되살릴 수 있다는 자각(自覺)이었다. 다시 말해, 개개인에게 기독교가 갖고 있는 도덕력이 성취되면 자동적으로 에너지로 외연(外延)되어 나라와 사회의 정돈, 자유와 평화가 실현된다는 논리였다.

여기에서 이상재가 주장하는 ‘순결함’과 ‘의’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도덕과 하나님의 의를 말한다. 그것은 곧 한국인이 필연코 가져야 할 의무인 것이다. 그와 같은 이유에서 이상재는 나라의 위기가 있을 때, 그 문제의 해결을 한국내부에서 찾으려 했다. 1909년 이상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韓國病源이 在何오. …就其中 最緊者가 有四?榻? 曰貧暴 曰嫉妬 曰騎倣 曰懶惰 是也니 雖四症이나 統以論之하면 一急心病也라. 여차?? 急心病으로 豈望生活乎아. …義務는 維何오 上帝의 誡命을 謹守하야…奧旨를 解悟하야 彼以干戈어든 我以道德하고 彼以暴虐이어든 我以仁愛하고 彼以强制어든 我以柔弱하면 却掠他人之財産者를 謂之善乎아. 以財産彼脫者를 謂之惡乎아. …善惡이 旣判하얏슨즉 上帝 서 賞罰이 豈無하오릿가. 惟我國民의 義務는 在此而巳라 하옵는이다.”

여기에서 이상재는 한국에는 가난과 폭력, 질투, 무분별한 모방, 게으름의 중병(重病)이 있다고 보았다. 이 네 가지 병의 원인은 급심병(急心病)에 있다고 진단하였다.

이러한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켜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상대방이 그릇 되었을 때 나는 도덕을 지키고, 상대가 포학할 때 나는 인애하고, 상대가 강제할 때 (비록) 나는 유약하지만 남의 재산을 약탈하는 자를 막는 다면 선하다 할 것이요, 재산을 빼앗는 자를 악하다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선한 자에게는 상을 주고 악한 자에게는 벌을 주시는데, 우리 국민의 의무는 바로 이런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상재에게는 성서적 교훈과 동양적 도덕이 원만하게 지지되고 있으며, 그는 기독교 속에 동양적 교훈의 이상적(理想的) 실천과 완성이 있다고 보았다.

이상재와 독립협회활동을 함께 하였고, 대한자강회 회장이기도 했던 윤치호는 이상재와 달랐다. 그는 서구 문명국이 벌이는 19세기의 제국주의적 식민지확장을 인류의 문명화를 위해 하나님이 선택한 수단으로, 비서구 세계에 대한 도덕적 투쟁이라고 까지 주장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사회진화론적 태도는 서구의 열강들을 문명국이요 도덕적 선(善)으로 보고, 비서구국들을 하등국(下等國) 내지는 미개국(未開國)으로, 그리고 도덕적 악(惡)으로 파악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36>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그는 이러한 미개인들을 강제적으로 문명화시키려고 하는 것은 서구인이 문명의 교사로서 인류의 문명화라는 성스러운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라고 이러한 침탈의 행위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윤치호의 이러한 인식은 일관되게 주장되었다. 외형적인 힘을 동경하는 사회진화론적 인식은 한국 전통적 가치관에 대한 파괴를 주장하게 되고 서구의 문명의 길로 들어서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부정적 존재로 취급하게 되는 우(愚)를 범하게 된다. 윤치호는 일본과 조선을 비교하여, 일본사회는 국민들의 선천적인 내재적 자질 즉, ‘빠른 지성, 높은 야망, 예절바름, 평화적임, 진보적임, 질서와 체제와 법을 애호함, 청결, 자연을 미화 내지는 개발할 수 있는 능력, 오랜 기간의 봉건주의에 의해 성숙된 명예에 대한 높은 의욕, 용기와 애국심’ 등이 있는 ‘덕성을 갖춘 사회’로 문명화에 대한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고 보았다. 그리고 한국은 문명화의 기회를 놓쳤다고 보고, "만일 우리들에게 독립이 주어진다 해도 우리들은 그것에 의해 이익을 얻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말하면서 한국의 독립에 대해 냉소적 견해를 드러냈다.

그러나, 이상재는 이러한 힘의 문명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에서 이상재는 일본의 침탈(侵奪)의 위기 속에서 한국의 빈곤을 타파(打破)하고 문명개화(文明開化)와 함께 국권의 회복을 이루겠다는 자강단체의 목표와 이들이 벌이는 실력양성(實力養成) 운동에 동의(同意)하지 않았다. 그는 진정한 개화와 자강이 인간의 도덕적이며 정신적인 기초를 통해 자동적인 외연(外延)으로 에너지화 되어야지 목표(目標)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이상재가 볼 때, '힘'의 원천을 무시하고 외형적인 '힘'만을 갖겠다는 발상은 외형적 문명의 제도적 변혁을 꿈꾸었던 독립협회에서의 방법과 동일하였다. 그러한 방법이 결국 실패를 하게 된다는 것을 이상재는 이미 경험하였다.
이상재는 오직 국민들의 정신을 기독교가 갖고 있는 도덕력으로 바꾸면, 이것이 외연(外延)되어 국가가 위기를 극복하고 한국이 되살아 날 수 있다고 인식하였다.
이광수가 지적한 것처럼, 이상재는 국민들이 도덕력을 갖고 있다면 하나님의 의(義)를 지키는 것이고, 하나님은 의로우시기 때문에 의(義)는 반드시 최후의 승리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낙관(樂觀)했다.

이상재에 있어서 도덕은 개인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의 국가관에도 똑같은 기준이 된다. 그는 “만일 자기 민족만 주장하고 남의 민족은 돌아보지 않거나 힘을 믿고 억압하거나 침략·약탈한다면 이는 하나님이 동일한 사랑으로 돌보는 넓은 은혜를 무시하는 것이며 진리에 따르지 않는 죄를 짓는 것”이라며 남의 나라를 강제로 빼앗는 침탈행위는 역사의 주재(主宰)이신 하나님에게 도전하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그것은 진정한 문명국이 취할 행동이라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상재에게서 진정한 문명국은 하나님의 계명, 즉 각인(各人)과 각국(各國)에 품부(稟賦)하신 도덕을 지키는 나라를 말하는 것이다.

근대문명이 가지고 있는 외형적인 힘만을 얻기 위한 문명개화는 결국 시공(時空)을 초월하고 불변(不變)하는 정신문명 즉, 하나님이 부여하신 도덕을 파괴한다고 보았다. 그것은 개인간의 문제일 뿐만이 아니라 국가간에도 적용이 된다.
그러한 외형적인 힘만의 문명은 천부(天賦)의 도덕과 그 가치체계를 파괴하는 것으로 진정한 문명이 될 수 없었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37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現今 所謂 文明이니 富强이니 닐아나바는 無非殺戮을 잘하는자인듯하니 이것이 改造되야 眞文明 眞富强에 드러감이 上帝의 뜻이라 하겟슴니다. …인人이 荒淫無度하야 酒肆靑樓에 밤을 보내고 女를 간함만 淫亂이 아니라 心身이 淫亂하고 所欲이 放蕩하면 이것이 곳 淸潔을 바리고 淫逸에 잠김이니 上帝의 旨를 知코자?糖? 이것을 바려야하겟슴니다.… 人의 財物을  取함이 盜賊은 盜賊이지마는 이 흔 小盜외에 自 車 馬車로 大道上에 橫行하며 意氣揚揚하는 大盜賊이 比世界處處에 多數往來하며 心靈이 物慾에 交蔽함이 되야 晝宵로 他人을 盜賊하야 自己의 幸福을 求코자하는자 許多함니다. 比와 갓흔 世上에 上帝의 公平하신뜻이 一日이라도 速히 現出됨을 祈禱하는 바올시다.”

여기에서 이상재는 외형적인 힘만을 앞세운 일본의 근대문명을 비판한다. 외형적 힘을 우선으로 하는 근대문명은 물질문명만을 추구한 결과로 나타나는 것으로서, 하나님이 개인과 각 국가에 권리로써 부여하신 도덕적 가치관을 파괴한다. 이러한 이상재의 인식은 하나님의 공의(公義)를 저버리는 행위로 결국 하나님의 징벌의 대상이 되며 공평하신 하나님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는 논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지만, 이상재는 내적인 정신적인 것만을 진정한 문명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에게 있어 진정한 문명이란 내적인 것으로서의 도덕문명과 외적인 것으로서의 물질문명의 조화였다. 그것은 도(道)와 기(器)처럼 나눌 수 없는 것이다. 이상재는 내적인 도덕문명과 외적인 물질문명이 어느 한 쪽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 道德은 基礎이며 根底이요, 物質은 棟樑窓壁과 枝葉花實이니 集脚이 어찌 疾走하며 獨掌이 어찌 有聲하리오. …(중략)… 만일 道德文明이 衰弱을 自取하였다 하여 物質的 科學에만 置重하여 全速力으로 急進하고 道德을 輕視한즉 無根底한 草木과 無基礎한 家屋과 如히 畢竟은 顚覆腐敗의 禍가 立至하리니 暫時的 强暴를 自恃하고 禍毒을 世界에 普被하다가 己亡한 某某國과 將亡할 何何族으로 殷鑑을 作하면 우리 民族의 無窮한 幸福과 永遠한 文明이 比에 在하다 하노니, 道德은 宗敎에 不外하도다.”

그는 이러한 미개인들을 강제적으로 문명화시키려고 하는 것은 서구인이 문명의 교사로서 인류의 문명화라는 성스러운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라고 이러한 침탈의 행위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윤치호의 이러한 인식은 일관되게 주장되었다. 외형적인 힘을 동경하는 사회진화론적 인식은 한국 전통적 가치관에 대한 파괴를 주장하게 되고 서구의 문명의 길로 들어서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부정적 존재로 취급하게 되는 우(愚)를 범하게 된다. 윤치호는 일본과 조선을 비교하여, 일본사회는 국민들의 선천적인 내재적 자질 즉, ‘빠른 지성, 높은 야망, 예절바름, 평화적임, 진보적임, 질서와 체제와 법을 애호함, 청결, 자연을 미화 내지는 개발할 수 있는 능력, 오랜 기간의 봉건주의에 의해 성숙된 명예에 대한 높은 의욕, 용기와 애국심’ 등이 있는 ‘덕성을 갖춘 사회’로 문명화에 대한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고 보았다.
그리고 한국은 문명화의 기회를 놓쳤다고 보고, “만일 우리들에게 독립이 주어진다 해도 우리들은 그것에 의해 이익을 얻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말하면서 한국의 독립에 대해 냉소적 견해를 드러냈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38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그러나, 이상재는 이러한 힘의 문명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에서 이상재는 일본의 침탈(侵奪)의 위기 속에서 한국의 빈곤을 타파(打破)하고 문명개화(文明開化)와 함께 국권의 회복을 이루겠다는 자강단체의 목표와 이들이 벌이는 실력양성(實力養成) 운동에 동의(同意)하지 않았다. 그는 진정한 개화와 자강이 인간의 도덕적이며 정신적인 기초를 통해 자동적인 외연(外延)으로 에너지화 되어야지 목표(目標)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이상재가 볼 때, ‘힘’의 원천을 무시하고 외형적인 ‘힘’만을 갖겠다는 발상은 외형적 문명의 제도적 변혁을 꿈꾸었던 독립협회에서의 방법과 동일하였다. 그러한 방법이 결국 실패를 하게 된다는 것을 이상재는 이미 경험하였다.

이상재는 오직 국민들의 정신을 기독교가 갖고 있는 도덕력으로 바꾸면, 이것이 외연(外延)되어 국가가 위기를 극복하고 한국이 되살아 날 수 있다고 인식하였다.
이광수가 지적한 것처럼, 이상재는 국민들이 도덕력을 갖고 있다면 하나님의 의(義)를 지키는 것이고, 하나님은 의로우시기 때문에 의(義)는 반드시 최후의 승리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낙관(樂觀)했다. 이상재에 있어서 도덕은 개인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의 국가관에도 똑같은 기준이 된다.

그는 “만일 자기 민족만 주장하고 남의 민족은 돌아보지 않거나 힘을 믿고 억압하거나 침략·약탈한다면 이는 하나님이 동일한 사랑으로 돌보는 넓은 은혜를 무시하는 것이며 진리에 따르지 않는 죄를 짓는 것”이라며 남의 나라를 강제로 빼앗는 침탈행위는 역사의 주재(主宰)이신 하나님에게 도전하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그것은 진정한 문명국이 취할 행동이라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상재에게서 진정한 문명국은 하나님의 계명, 즉 각인(各人)과 각국(各國)에 품부(稟賦)하신 도덕을 지키는 나라를 말하는 것이다.
근대문명이 가지고 있는 외형적인 힘만을 얻기 위한 문명개화는 결국 시공(時空)을 초월하고 불변(不變)하는 정신문명 즉, 하나님이 부여하신 도덕을 파괴한다고 보았다.
그것은 개인간의 문제일 뿐만이 아니라 국가간에도 적용이 된다. 그러한 외형적인 힘만의 문명은 천부(天賦)의 도덕과 그 가치체계를 파괴하는 것으로 진정한 문명이 될 수 없었다.

“現今 所謂 文明이니 富强이니 닐아는바는 無非殺戮을 잘하는자인듯하니 이것이 改造되야 眞文明 眞富强에 드러감이 上帝의 듯이라 하겟슴니다. …인人이 荒淫無度하야 酒肆靑樓에 밤을 보내고 女를 간함만 淫亂이 아니라 心身이 淫亂하고 所欲이 放蕩하면 이것이 곳 淸潔을 바리고 淫逸에 잠김이니 上帝의 旨를 知코자하면 이것을 버려야하겟슴니다.… 人의 財物을  取함이 盜賊은 盜賊이지마는 이 흔 小盜외에 自 車 馬車로 大道上에 橫行하며 意氣揚揚하는 大盜賊이 比世界處處에 多數往來하며 心靈이 物慾에 交蔽함이 되야 晝宵로 他人을 盜賊하야 自己의 幸福을 求코자하는자 許多함니다. 比와 갓흔 世上에 上帝의 公平하신뜻이 一日이라도 速히 現出됨을 祈禱하는 바올시다.”

여기에서 이상재는 외형적인 힘만을 앞세운 일본의 근대문명을 비판한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39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외형적 힘을 우선으로 하는 근대문명은 물질문명만을 추구한 결과로 나타나는 것으로서, 하나님이 개인과 각 국가에 권리로써 부여하신 도덕적 가치관을 파괴한다.
이러한 이상재의 인식은 하나님의 공의(公義)를 저버리는 행위로 결국 하나님의 징벌의 대상이 되며 공평하신 하나님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는 논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지만, 이상재는 내적인 정신적인 것만을 진정한 문명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에게 있어 진정한 문명이란 내적인 것으로서의 도덕문명과 외적인 것으로서의 물질문명의 조화였다. 그것은 도(道)와 기(器)처럼 나눌 수 없는 것이다. 이상재는 내적인 도덕문명과 외적인 물질문명이 어느 한 쪽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 道德은 基礎이며 根底이요, 物質은 棟樑窓壁과 枝葉花實이니 集脚이 어찌 疾走하며 獨掌이 어찌 有聲하리오. …(중략)… 만일 道德文明이 衰弱을 自取하였다 하여 物質的 科學에만 置重하여 全速力으로 急進하고 道德을 輕視한즉 無根底한 草木과 無基礎한 家屋과 如히 畢竟은 顚覆腐敗의 禍가 立至하리니 暫時的 强暴를 自恃하고 禍毒을 世界에 普被하다가 己亡한 某某國과 將亡할 何何族으로 殷鑑을 作하면 우리 民族의 無窮한 幸福과 永遠한 文明이 比에 在하다 하노니, 道德은 宗敎에 不外하도다.”

이상재는 정신문명인 도덕문명과 물질문명이 나눌 수 없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물질문명의 출발점은 정신적인 도덕문명으로부터 시작된다. 즉 도덕문명은 기초이며 뿌리이고, 물질문명은 가지와 잎, 꽃과 열매인 것이다. 뿌리를 심으면 가지와 잎, 꽃과 열매가 자동적으로 나타나듯이 도덕을 근본으로 해서 물질문명이 나타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한국이 일본의 압제 하에 들어간 것은 극단적으로 도덕문명만을 숭상하여 물질문명을 억제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외적인 힘을 얻을 목적으로 물질문명만 고집하면 한국도 힘을 갖게되겠지만, 그 힘은 남을 침탈하는 강포(强暴)로 오용(誤用)되어 일본과 같이 결국은 하나님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고 보았다. 이상재에 있어 그러한 역사의 과정을 필연적인 것이었고, 역사의 주재자이신 절대자(絶對者)가 애초에 세운 원리(原理)였다.

이상재가 일본을 강하게 비판하는 이유는 근대의 문명국이라는 일본이 도덕문명은 무시하고 외적인 힘의 문명만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본이 한국을 침탈한 사실이 분명히 일본의 문명이 근대문명 중 물질문명만을 취하였다는 증거가 된다.
도덕문명을 근거로 하여 물질문명이 외연(外延)되는 것이라면 타인(他人)과 타국(他國)을 침탈하고 피폐시킬 수 없다. 일본은 물질문명만 취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된 도덕을 망각하여 한국을 침탈한 것이다. 이상재는 일본은 강포(强暴)한 행동으로 하나님이 각인(各人)과 각국(各國)에 부여한 '도덕'이라는 불변자(不變者)를 근본적으로 거부하였기 때문에 결국 멸망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외형적인 힘만을 추구하면 결국은 파멸로 가고 만다고 확신한 이상재로서는 당시의 자강운동을 지지할 수 없었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40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그에게 있어 외적(外的)인 힘을 도구로 하는 실력양성 운동이란 일본의 모범(模範)을 따라가는 것이 된다. 이상재는 그러한 이유에서 자강운동에 불참하였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를 통해 진정한 힘의 원리를 파악했던 이상재로서는 자신이 실패했던 독립협회에서의 활동과 동일한 성격의 자강운동에 회의(懷疑)를 갖고 있었다.
이상재는 도덕심에 기초한 기독교적인 구원을 낙관(樂觀)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한국의 전통 속에 내재(內在)해 있던 동도(東道)의 문명 속에 기독교의 도덕과 일정부분 공유점이 있다고 발견했기 때문이다. 도덕문명을 지켜왔던 한국 민족은 결국 하나님의 의를 지킬 수 있는 바탕을 가진 민족이라는 확신이었다. 따라서 이상재는 쇠잔(衰殘)해 있는 도덕문명을 기독교를 통하여 재발견하면 한국이 참다운 문명국이 되는 동시에 국권도 회복될 수 있다고 낙관하였다.

3.3.2 하나님 나라의 민권관

일반적으로 근대문명에서 말하는 민권(民權)은 한 개인이 다른 사람의 자유나 이익을 침범하지 않는 ‘불간섭의 원칙’(the principle of non-interference)이 기본이다. 따라서 어떠한 이유로도 개인의 자유를 제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단지 국가는 오직 한 개인이 다른 개인의 자유(혹은 이익)를 침해할 경우에만 그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을 뿐이다. 이는 개인으로서의 인간에게 최고의 존엄성과 가치를 부여하는 인본주의적(人本主義的) 가치관을 전제(前提)로 한다. 이러한 가치관은 근대문명의 사회 진화론적 관념 아래서 보다 발전하는데, 사회 진화론적 사고를 가진 이들은 각기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원자적 개체들이다. 이들은 서로에 대해 무관심하며 각자 자기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챙기려는 경향을 가진다. 이들에게 있어서 국가는 이기적인 개인들이 서로 충돌 없이 공존하기 위한 대행기관이며, 충돌이 생길 때에 서로 보상토록 조정하는 도구이다.

공동체(共同體)는 구성원들간의 지속적인 정감(인자함, 애정, 동정심 등)이 권리 또는 정의와 같은 불협화음적(不協和音的)인 주장들을 대체한다. 그러나, 구성원들의 가치관이나 관심이 서로 다르면 그 공동체는 와해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러한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공동체가 지향해야 하는 가치와 각 개인이 추구하는 가치의 방향이 일치해야 한다. 이와 같은 원리에서 이상재는 기독교의 도덕력이 객관적·주관적인 가치체계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고, 기독교의 도덕이 중심규범이 되는 공동체적인 민족유기체를 꿈꾸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탕이 되는 민권의식(民權意識)을 강조했다.

북학파 계보의 일원(一員)으로서 민권의식에 있어 진취적이었던 이상재는 기독교에 입교한 후, 민권의식이 보다 강화된다. 이상재의 이러한 의식은 그의 초기 YMCA 활동에서 확연히 드러나는데, 그것은 조선의 상류층을 위한 기관으로 YMCA를 창설하고자 했던 선교사들의 의도와는 달리 이상재가 YMCA를 계급이나 계층에 상관없이 활동할 수 있도록 한 것에서 잘 나타난다.

1899년 당시 한성부윤(漢城府尹)이었던 민경식(閔景植)을 포함한 150명의 상류층 청년들이 자신들이 서명한 진정서를 언더우드(H. G. Underwood)에게 보이며 YMCA의 창설을 강력히 요청하였다. 언더우드는 당시의 교회에는 하류층의 사람들만 모이기 때문에 상류층, 즉 양반 관료층이나 잘 사는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장소를 절실히 바라고 있었다. 실제로 양반의 자제들은 기독교 복음에 관심이 많았지만 상민(常民)들이 대부분인 교회에 출석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언더우드는 아펜젤러(H. G. Appenzeller)와 협력하여 YMCA 세계 본부에 편지를 보냈고, YMCA 국제 위원회는 이미 한국에 와있던 중국 YMCA의 창설자인 라이언(D. Willard Lyon)으로 하여금 그 가능성 여부를 조사토록 하였다. 그리고 1903년 10월 28일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라는 이름으로 창립총회를 개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양반이고 고위관료였던 이상재에게는 상류(上流)와 하류(下流)라는 의식이 없었다. 이상재는 1913년 YMCA의 총무가 되자, YMCA를 상하의 구분이 없는 장소로 만들었으며 양반 관료층들이 꺼려했던 실업교육을 보다 강조하였다.

그는 특히 공업교육에 주력하였다. 1914년 12월에는 공업관을 증축하여 공업교육의 발판을 마련했다. 개신교에 입교(入敎)한 이상재는 1904년 2월에 석방된 후, 1906년경 교육위원장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07년 이후에는 종교위원장으로 활약했다. 그는 의정부 참찬(參贊)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각의(閣議)에 결석하면서까지 YMCA 사업에 열성을 내었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41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1913년 질레트(P. L. Gillett)에 이어 두 번째 총무가 된 이상재는 실업교육 특히 목공(木工)과 철공(鐵工) 등 공업교육에 주력을 했는데, 이는 당시 사회 통념상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뿐만 아니라, 양반 관료층이 대거 모여있던 YMCA에서도 계층의식에 대한 거부를 선언하는 이상재의 이와 같은 행동은 파격적이었다. 스나이더(L. Snyder)는 국제 YMCA에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1913년은 참으로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지내야만 했던 해였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6월의 정기 총회에 절정에 달했습니다. 그렇지만 한국 YMCA는 드디어 돌파구를 찾았습니다. 그것은 YMCA가 수천 원에 달하는 전년도 잉여금으로 공업부 사업을 강화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YMCA 선생들과 학생들은 자신의 개인사업을 하는 것처럼 열심을 다했습니다. YMCA가 직접 주문을 받았고 학교, 병원, 회사, 가정 등에 가구를 만들어 팔았으며 풍금이나 기계를 수선하고 구두를 배달하였으며 인쇄 출판, 사진 촬영과 현상, 환등과 슬라이드를 제작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청소년들로 하여금 유능한 기독교적 시민이 되게 하는 방법중 하나입니다.”

당시 천역(賤役)에 속하였던 이러한 실업(實業)에 대한 적극적 지원은 이상재의 계보적(系譜的) 성격이 잘 드러나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농공상(士農工商)이 동등하다는 그의 민권의식이 기독교에 입교한 후에도 단절(斷絶)되지 않고 오히려 강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극명한 예(例)이다.

이상재가 YMCA에서 보다 중점을 두었던 실업교육은 이용후생(利用厚生)만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 입교 후의 이상재의 실업교육 강화는 국가의 부강을 꿈꾸던 대한제국기의 학무국장(學務局長)시절의 것과는 구별된다.
다시 말해, 학무국장 시절의 교육개혁을 시도했던 때에 가졌던 목표와는 다르다. 이때의 이상재는 YMCA를 상하의 구별이 없는 공동체적 유기체의 장(場)으로 만들려는 의도(意圖)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이상재의 의도를 뒷받침해주는 증거는 1922년에 창립 2주년을 맞아 동아일보에서 당시 한국의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책을 사회 저명인사에 듣는 특집기사에 잘 나타난다. 당시 한국 YMCA(중앙청년회) 회장이었던 윤치호는 빈곤에 대한 해결책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상공업(商工業)을 발뎐식히어야 하겟슴니다. 세상 만사가 돈 업시 되는 일이 업고, 먼저 육쳬의 활을 유지하지 못하면 도덕도 법률도 직힐수업스니 상공업을 진흥식히어 실력을 길너야 하겟슴니다. 무엇이니 무엇이니 경륜과 배포가 잇스되 결국 되지못하는 것은 돈이 업서 안되는 것이니 우리는 하다못해 어린아해 작란감이라도 만드러 돈을 버러야하겟소. 성인중 공자나 예수나 석가가튼 어른들이 물질을 그리 중대시하지 아니하얏지마는 그것은 초월한 개인에 대한 일이요 사회나 국가로는 경제력이 아니고는 될수업슴니다. 조선인은 종래 실업을 천시하기 때문에 이 모양이 되엿스니 어서 적은것이라도 상관말고 상공업을 진흥식혀야 하겟슴니다.”

윤치호는 당시의 자강(自强)을 명분으로 하는 실력양성(實力養成)의 일환으로 실업(實業)을 생각하고 있다. 그것이 경제적 피폐에 대한 해결책이었다.
그러나, 이상재는 이러한 윤치호의 해결방안을 거부한다. 이상재는 당시의 일제의 피탈(被奪)로 인한 시대의 질곡(桎梏)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결책을 제시한다.

“무엇보다도 도덕심을 양성하여야 하겟소. 조선인은 과거의 도덕과 정치가 부패한 닭에 긔와 질투심이 만하 제 일흠이 나지 아니하면 하지 아니하고 피차 긔 무함으로 일을 삼으니 먼저 종교를 미더 도덕심을 길어야 할터인대 다른 사람은 엇덜는지 모르지마는 내  각에는 긔독교를 미더 제몸 희 하는 주의를 배워야하겟소 예수는 남을 위하야 자긔 목숨을 밧첫스니 그것을 배워서 세야 하겟소. 남들은 경제상 곤난이 제일 위급하다하지마는 내 생각에는 마음만 잘먹고 일을하면 하나님이 먹을 것을 주실줄로 아오.”

이상재는 1920년대의 한국의 물질적 피폐(疲弊)에 대한 해결책으로 YMCA에서 중요하게 자리잡고 있던 실업교육이나 이용후생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다.
오히려 민족간의 협력과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의 신앙에서 나오는 도덕적 힘이었다.
그는 기독교의 도덕력만이 한국인들의 이기심을 극복하여 경제적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다고 믿었다. 이상재는 기독교의 도덕이 중심이 되는 공동체적인 유기체로서의 한국을 만드는 것이 한국을 살리는 길이라고 믿고 있었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42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그가 총무가 되었을 때 강조했던 실업교육은 단지 이용후생만의 방편이 아니었으며, 계층적 편견을 버리고 민족이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이상재의 의도가 숨어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상재는 기독교의 사랑을 바탕으로 한 민족간의 상호부조의 정신이면 빈곤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상재는 공동체 안에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도덕규범을 자기 내부의 도덕심과 일치시켜, 객관적인 도덕규범과 자기 내부의 도덕감이 하등(何等)의 괴리감(乖離感)이 없는 윤리공동체를 꿈꾸고 있었다.

이러한 구조는 개인의 심성을 잘 다스려 객관적인 도덕규범에 잘 부응하려는 유가적(儒家的) 인식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회는 신분상의 차등을 극복할 수 있는 도덕적 평등을 조건으로 갖추어야 한다. 유가(儒家)의 사회는 인품(人品)의 정도에 따라 각 개인(個人)이 누릴 수 있는 권리가 달랐던 사회였다. 따라서, 개개인이 도덕적 자아완성(自我完成)의 잠재성을 가졌다는 점에서 인간이 존엄하며 평등하다고 보았으나, 실제사회에 있어서는 권리 평등이 인정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유가(儒家)의 사회는 그 이상(理想)과는 달리 백성들을 자율적(自律的)인 판단능력이 없는 갓난아기에 비유하여 전제정치(專制政治)와 독선(獨善)으로 다스리던 예가 비일비재(非一非再)하였다.

이상재는 객관적 규범과 사회 규범이 괴리감이 없는 사회, 즉 공동선(共同善)을 이룰 수 있는 동도적(東道的) 이상의 실천을 미국의 사회체제 속에서 발견하였다. 이상재에게는 절대적인 규범에 의해 사민(四民)이 평등하고 인화(人和)로 연결되어 있는 미국 사회체제가 자신이 꿈꾸었던 동도적(東道的) 이상(理想)의 실천으로 비추어졌던 것이다. 옥중에서 기독교에 입교(入敎)할 때, 이상재는 자신이 이상적으로 보았던 미국의 사회체제의 근저가 기독교에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는 기독교 복음에 도덕력과 각 개인을 형제로 보는 공동체적 평등의식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으며, 사민이 평등하고 인화(人和)로 움직여지던 미국사회의 근저(根底)가 기독교의 복음이었다는 것을 자각하였다. 그는 자신이 꿈꾸었던 유기체적 동도(東道)의 세계관의 이상과 실천 그리고 완성이 기독교에 있다는 발견이다. 이상재가 꿈꾸었던 인화(人和)로 연결된 세계는 사실 기독교에 그 원형이 보존되어 있다. 공동체성을 빼놓고는 기독교를 말할 수 없다고 보았다. 기독교는 그리스도를 세계 구속(救贖)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세계성을 강조한다.

이 공동체는 조직적인 기구인 동시에 친교(親交)로서의 사랑의 세계공동체이다. 이상재는 이러한 사랑과 인화(人和)의 세계공동체를 한국인이 실현해 나가야 할 하나님의 나라로 인식했다. 그리고 한국의 사회가 하나님의 나라가 추구하는, 즉 사랑과 자기 희생이 공동선(共同善)이 되는 윤리적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것이 하나님이 뜻하시는 것이었다. 이상재는 다음과 같이 희생과 봉사의 도덕이 중심이 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피력한다.
“세상의 군국주의나 침략주의는 사람의 목숨을 죽이고 상하게 하지마는, 우리 主義는 사람의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는 것이며, 또 저 공산주의자는 다름 사람의 金錢을 탈취하여 나눠먹고자 하는 것이지만, 우리 주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금전을 공급하여 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은 모든 것을 다 자기의 소유로 알며, 또 이렇게 된 것이 자기 수단으로 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임의로 自我의 이익을 위주로 하지만, 우리들은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섭리 하에 있으며, 또 하나님의 구원과 도움으로 保全하여 가며, 또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을 좇아 수행하는 것입니다. …(중략)… 하나님 나라 실현이 아직 이루어지지 아니한 조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 실현에 철저한 성공을 하게 인도하려면 主와 또는 그를 위하여 충성을 다한 여러분 선배들의 발자취를 밟아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이상재는 하나님의 사랑은 객관적 규범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 규범은 자기의 것을 사랑으로 나누어주어야 하는 실질적인 규범이었다. 이상재는 그러한 객관적 규범을 만들기 위해 청년들의 노력이 절실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이상재는 다음과 같이 청년들에게 당부하고 있다.
“吾輩靑年이 心을 一致하여 力을 齊發하여 學問上에 進進하여 大軍이 臨敵함과 同一케 하여 上帝께서 降哀하신 仁愛로 大本營을 作하고 智識으로 參謀部를 說하며 誠信은 軍餉이요, 公義는 砲 이라 一己의 私慾을 先爲 滅하여 天良을 克復하고 公益을 完全케하여 吾國의 榮耀를 顯揚하며 세계世界에 행복을 共享함이 實로 吾輩靑年의 今日 當行事務요, 上天이 吾輩肩上擔負하신 至意을 不負함이로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43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이상재는 기독교의 복음에서 나오는 도덕력이 객관적 규범(規範)으로 사회의 중심이 되는 철저한 윤리적(倫理的) 민족 공동체를 하나님의 나라로 인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유기체적(有機體的) 관계에서 자동적으로 외연(外延)되는 민권(民權)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신채호에게서 나타나는 국수주의적인 민족주의가 아니라 세계가 하나님의 유기적(有機的)인 사랑의 공동체라는 개념으로 발전되는, 즉 장차 다가올 하나님 나라라고 인식한 새롭게 변혁된 세계에 대한 추구였다. 따라서 이상재를 단순히 민족주의자(民族主義者)라고만 평할 수는 없다. 이상재는 『청년』지(誌)를 통해 다음과 같이 사회주의자들을 비판한다.

“靑年이여, 世界的 革命의 氣運을 順應하여 比를 實行코자 할진대 各個人이 自己의 革心을 先行하여야 完全한 成功에 就한다함은 前號에 略述하였거니와 現今 思想界의 複雜이 日甚一日하여 曰 民族主義니 曰 社會主義이니 하여 各自 主義가 각자 結團하여 比는 彼를 攻駁하며 彼는 比를 排斥하여 甚至於 同一民族으로도 主義가 不同한즉 異族과 仇敵으로 認做하는 偏見이 往往有之하여 於是乎 世人의 注目하는 資料가 되는도다. 試思하라. 民族이라 함은 自己同族만 위함이오 社會라 함은 世界他族을 泛稱함이니 各其 民族이 아니면 어찌 社會가 組織되며 社會를 無視하면 어찌 民族이 獨存할까. 民族을 自愛하는 良心이 充溢한 然後에야 可히 社會에 普及할지오 社會까지 博愛하는 眞誠이 有한즉 民族은 自然的 相愛할지어늘 萬一 自己民族만 主張하고 他民族은 不顧하여 恃强抑壓하든지 爭鬪掠奪하든지 하면 是는 上天이 一視同仁하는 洪恩을 無視하여 眞理에 得罪함이오. 또는 社會만 主張하고 각기 民族은 不恤하여 路人의 疾病을 救護한다 籍稱하고 自族의 死亡을 不問하거나 遠隣의 傾覆을 往扶키 爲하여 自家의 火殃을 不求하면 是는 不敬其親하고 而敬他人하는 古聖의 戒訓을 犯하여 人道上 倫序에 違反함이니 比를 어찌 合理的이라 하리오.”

이상재는 1920년대의 사회주의자들이 세계성을 강조한 나머지 민족적 연고와 전통적 가치관을 무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이상재가 볼 때, 이들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주의와 주장만을 강조한 나머지 타인(他人)들의 주장(主張)과 견해를 배척(排斥)했다. 이들의 이러한 행동은 공동체적 유기체로서의 민족에 대한 관계성을 무시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이들은 진리에 따르지 않는 죄를 지었다. 그러나, 이상재가 보기에는 개인은 민족이라는 틀로, 각 민족은 세계라는 틀로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 되어있다. 즉, 개인 없이 민족이 없으며, 민족 없이 세계란 없다.

이상재가 볼 때에 진정한 민권이란 공동체의 상호부조(相互扶助)에서 도출되며, 그러한 힘은 곧 도덕(道德)과 인화(人和)가 외연되는 기독교 복음의 도덕력이다. 따라서 타인을 강압할 뿐 아니라 타국을 강압하는 것도 결국은 이 공동체성에 위배된다.
또한 각 개인이나 각 민족은 각기 권리에 있어 동일하며 그 권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간이든, 민족 내에서든, 각 국가간에 천부(天賦)의 권리는 서로 보장이 되어야 한다.
이상재는 기독교의 복음에서 나오는 도덕력이 객관적 규범(規範)으로 사회의 중심이 되는 철저한 윤리적(倫理的) 민족 공동체를 하나님의 나라로 인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유기체적(有機體的) 관계에서 자동적으로 외연(外延)되는 민권(民權)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신채호에게서 나타나는 국수주의적인 민족주의가 아니라 세계가 하나님의 유기적(有機的)인 사랑의 공동체라는 개념으로 발전되는, 즉 장차 다가올 하나님 나라라고 인식한 새롭게 변혁된 세계에 대한 추구였다.
따라서 이상재를 단순히 민족주의자(民族主義者)라고만 평할 수는 없다. 이상재는 ‘청년’지(誌)를 통해 다음과 같이 사회주의자들을 비판한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44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靑年이여, 世界的 革命의 氣運을 順應하여 比를 實行코자 할진대 各個人이 自己의 革心을 先行하여야 完全한 成功에 就한다함은 前號에 略述하였거니와 現今 思想界의 複雜이 日甚一日하여 曰 民族主義니 曰 社會主義이니 하여 各自 主義가 각자 結團하여 比는 彼를 攻駁하며 彼는 比를 排斥하여 甚至於 同一民族으로도 主義가 不同한즉 異族과 仇敵으로 認做하는 偏見이 往往有之하여 於是乎 世人의 注目하는 資料가 되는도다. 試思하라. 民族이라 함은 自己同族만 위함이오 社會라 함은 世界他族을 泛稱함이니 各其 民族이 아니면 어찌 社會가 組織되며 社會를 無視하면 어찌 民族이 獨存할까. 民族을 自愛하는 良心이 充溢한 然後에야 可히 社會에 普及할지오 社會까지 博愛하는 眞誠이 有한즉 民族은 自然的 相愛할지어늘 萬一 自己民族만 主張하고 他民族은 不顧하여 恃强抑壓하든지 爭鬪掠奪하든지 하면 是는 上天이 一視同仁하는 洪恩을 無視하여 眞理에 得罪함이오. 또는 社會만 主張하고 각기 民族은 不恤하여 路人의 疾病을 救護한다 籍稱하고 自族의 死亡을 不問하거나 遠隣의 傾覆을 往扶키 爲하여 自家의 火殃을 不求하면 是는 不敬其親하고 而敬他人하는 古聖의 戒訓을 犯하여 人道上 倫序에 違反함이니 比를 어찌 合理的이라 하리오.

이상재는 1920년대의 사회주의자들이 세계성을 강조한 나머지 민족적 연고와 전통적 가치관을 무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이상재가 볼 때, 이들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주의와 주장만을 강조한 나머지 타인(他人)들의 주장(主張)과 견해를 배척(排斥)했다. 이들의 이러한 행동은 공동체적 유기체로서의 민족에 대한 관계성을 무시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이들은 진리에 따르지 않는 죄를 지었다.

그러나, 이상재가 보기에는 개인은 민족이라는 틀로, 각 민족은 세계라는 틀로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 되어있다. 즉, 개인 없이 민족이 없으며, 민족 없이 세계란 없다.
이상재가 볼 때에 진정한 민권이란 공동체의 상호부조(相互扶助)에서 도출되며, 그러한 힘은 곧 도덕(道德)과 인화(人和)가 외연되는 기독교 복음의 도덕력이다. 따라서 타인을 강압할 뿐 아니라 타국을 강압하는 것도 결국은 이 공동체성에 위배된다.
또한 각 개인이나 각 민족은 각기 권리에 있어 동일하며 그 권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간이든, 민족 내에서든, 각 국가간에 천부(天賦)의 권리는 서로 보장이 되어야 한다.

3.3.3 서도서기적(西道西器的) 인식

이상재는 기독교 입교전(入敎前)만 하더라도 동도서기(東道西器)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즉 도(道)와 기(器)는 나눌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동도서기는 19세기 서구의 열강이 개방을 요구하면서 외압을 가할 때 나타난 것으로, 동도서기파(東道西器派)는 주자학에서 나눌 수 없는 것을 되어있는 도(道)와 기(器)를 나누어 불변적인 동양의 도(道)와 가변적(可變的)인 서양 오랑캐(夷)의 기(器)를 합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상재도 동도서기(東道西器)가 가능하다고 인식했다. 동양의 도(道)와 공유되는 도덕문명이 미국의 사회체제 속에 들어 있다고 확인은 했지만 동양의 도(道)만이 불변자(不變者)로서 참다운 것이라 인식하였다.
그러한 이유로 독립협회의 활동 시, 서재필이 독립협회를 기독교적 성격으로 만들려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회심 후 이상재는 서도서기(西道西器)의 인식으로 전환되었다.
신일철은 이상재가 기독교에 입교한 후에도 여전히 중체서용(中體西用)을 주장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즉, 서양의 과학기술과 물질문명은 받아들이되 정신문명에서는 동아시아의 전통윤리가 중심이라고 인식했다는 것이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45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그는 기독교가 도구일 뿐, 이상재의 정신적 중심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신일철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거(論據)로써 이상재가 1925년 ‘문명’에 발표했던 ‘문명의 해석’이라는 글 가운데 “그 시(時)를 수(隨)하여 변천(變遷)이 유(有)할지언정, 그 근저(根底)는 상이(相離)치 아니할 것이오”를 내세우고 있다.

또한, 그는 이상재가 동도서기적(東道西器的)인 윤리적 틀 속에서 유교의 전통적인 인애(仁愛)의 윤리를 본(本)으로 하고 서구 물질문명의 수용(受用)을 용(用)으로 간주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상재가 개화(開化) 이래 변함 없이 갖고 있던 문명관(文明觀)이었다고 보고 있다. 계속해서 신일철은 이상재가 1920년대 좌우익의 대립과 사상적 혼돈(混沌) 가운데서도 동양의 정신적 문화를 부동의 기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양무론적(洋務論的) 논리를 계속 견지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일철은 기독교에 입교한 후 이상재가 역사의 변혁을 꿈꾸며 주장하는 이상세계,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한 종말론적 기대감을 보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에 입교(入敎)한 후, 이상재는 중체서용(中體西用)·동도서기적(東道西器的) 인식에서 서도서기적(西道西器的) 인식으로 입장을 전환한다. 그는 동도(東道)가 불변자가 아니오 서도(西道), 즉 기독교가 시공(時空)을 초월한 불변자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동도(東道)가 추구하는 이상적 원형과 완성이 기독교 속에 들어있다고 확신하였다.

다시 말해, 이상재는 한국의 전통 문명 속에는 서도(西道)와 공유되는 도덕문명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서도(西道)의 가시적 예표를 도덕으로 보았다. 서도(西道), 즉 기독교의 중심을 '하나님 나라'로 보았고 가시적 예표를 도덕으로 보았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 실현의 가능성 또는 가시적 예표를 도덕(道德)이라고 할 때, 한국이 전통적으로 지켜오려 했던 도덕중심의 정신적 가치체계는 서도(西道) 안에서 통합될 수 있는 것이다.

이상재는 기독교에 입교(入敎)하기 전에 서양의 문명을 사학(邪學)이라 배척하고 동양의 문명의 진정한 문명이라고 주장했던 동도서기파(東道西器派)의 사고를 비판하여, 이미 정동개화파 시절과 독립협회 활동시 미국의 사회체제의 적극적인 도입을 시도한 바 있다. 또한, 이상재는 용(用)과 기(器)를 갖기 위한 자강운동단체의 실력양성운동에 거부의 뜻을 분명히 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구 문명을 용(用)과 기(器)로 보았다.
그는 이미 체미(滯美) 기간에 서구 문명이 용(用)과 기(器)만의 문명이 아님을 알고 있었고, 서구의 사회체제 속에 자리잡고 있는 동양과 공유될 수 있는 도덕문명을 보았다. 기독교에 입교한 이후 서양의 도(道) 속에 동도(東道)의 원형과 실천, 그리고 완성이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것은 불변자(不變者)로서 시공(時空)을 초월(超越)한다고 인식하였던 것이다.
이상재 사상의 중심에 동도(東道)가 서도(西道)로 전환된 명백한 증거는 개신교 입교 후 그의 역사관에 잘 드러난다. 이상재에게는 기독교 입교 후, 동도(東道)에는 들어있지 않는 만물의 창조주(創造主)와 역사의 주재자(主宰者)로서 상제(上帝)가 존재한다는 인식의 변화가 있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46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중보자로서의 예수에 대한 개념이 뚜렷하다. 그것은 유가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기독교 중심의 매체를 도덕심으로 보고 도덕을 지키면 이것이 자연히 외연(外延)되어 역사의 변혁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하였다. 이상재는 도(道)를 기독교가 갖고 있는 도덕심(道德心)으로 보고 용(用)이나 체(體)는 외연되는 현상(現狀)으로 보았다. 기독교에 내재된 도덕심은 서양의 과학문명이나 기술문명에서만 용(用)이나 체(體)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문화나 문명에서도 얼마든지 현상화 될 수 있다. 본래 유가(儒家)에서는 천(天)의 내재성(內在性)은 강조하지만 초월성에는 비중을 두지 않는다. 유학(儒學)에는 창조에 대한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서학(西學)의 사상을 거부하였던 신후담(愼後聃)은 마테오 릿치가 천주(天主)는 천지만물을 제작(製作)하고 주재(主宰)·안양(安養)한다고 주장한 데 대해 주재(主宰)는 인정하지만 제작(製作)은 부인한다. 그는 정주(程朱)가 주재(主宰)로써 말할 때 그것을 제(帝)라고 했으므로 천주(天主)가 천지(天地)를 주재(主宰)한다는 말은 가능하지만, 천지(天地)는 태극(太極)에 의하여 이루어졌고 그것을 상제(上帝)가 주재(主宰)할 따름이기 때문에 천지가 천주(天主)에 의하여 제작될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재에게서는 기독교의 초월적 주재자(主宰者)의 개념과 창조에 대한 신앙적 태도가 분명히 나타난다. 또한, 이상재의 사상에는 유가(儒家)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중보의 개념이 뚜렷이 존재한다. 이상재는 자신의 글 “진평화(眞平和, 참된 평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의 要求에는 平和는 比等의 假粧的 和平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世界를 創造하신 時에 우리 人類에게 充滿하여 不足함이 無히 與하신 眞正한 和平이라 하노라. 眞正한 和平이란 무엇인가. 첫째 仁愛요, 둘째 容恕이니, 하나님은 恒常 우리 人類를 仁愛하시며 容恕하시나니, 우리 人類도 하나님의 仁愛와 容恕를 仰體하여 人과 人이 서로 愛하며 서로 恕하여 他人의 權威·勢力·金錢·名譽를 我에 有한 것과 같이 尊重視하여 우리 基督이 自己를 犧牲하여 人의 罪를 代贖하신 眞意를 不忘할지니 眞平和의 本源은 愛와 恕에 在하다 하노라. 東洋 先聖도 夫道는 仁恕뿐이라 하셨나니라” 이상재는 창조의 하나님과 역사의 하나님을 인식하고 있었고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함을 강조했다. 그는 기독교의 도덕심을 사랑과 용서, 자기 희생으로 표현하며, 기독교의 도덕이 중심이 되어야 세계는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도덕을 실천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 길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다만, 계속 되는 글에서 그는 동양의 고성(古聖)들이 강조하는 어짊과 용서의 교훈 속에도 기독교의 도덕심과 공유되는 도덕심이 있다고 인식했다. 이상재는 서구 근대국가들도 용(用)과 기(器)를 내세워 불변자인 도(道)를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 도덕은 피조세계의 불변자(不變者)요 하나님이 태초에 만들었고 부여한 권리였다. 이상재가 볼 때,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모든 인간들에게 충만하고 부족함이 없도록 진정한 평화의 세계를 주셨고, 모든 국가에 도덕을 권리로 주셨다. 따라서 도덕을 가지고 있는 모든 나라는 완전한 세계를 완성할 바탕을 지녔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하나님의 세계를 죄악의 세계로 만들었다. ‘노아의 홍수사건’이나 ‘소돔과 고모라 사건’은 인간의 세계가 본래의 모습대로 회복되도록 경고하신 하나님의 계시였다. 제 1차 세계대전도 죄악된 세상을 본래의 모습대로 만들고자 하는 하나님의 경고와 계시였다.
그는 1차 세계 대전이 서구의 국가들이 불변자(不變者)인 정신문명의 도(道)를 어기고 물질문명인 용(用)과 기(器)만을 앞세운 까닭에 하나님이 이를 징계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전 세계인들이 도덕문명을 다시 회복하는 개조(改造)가 일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47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故로 今에는 上帝 셔 比世界를 一次改造치 아니면 아니되겟다 시고 昔日과 갓치 洪水로 滅亡을 심이 아니라 人을 擇시고 人을 命샤 人을 悔悟케시며 人을 改造케실  比와갓흔 上帝의  이 歐洲戰亂의 風雲이 비로소  친 今日에 全世界에 낫타나보이지 아니 가 比改造를  하신 하 님의  이 우리압헤 當야 밧을바 實蹟이 올시다”

이상재는 이 설교문에서 1차 세계대전은 도(道)를 무시한 기(器), 즉 도덕문명을 무시하고 물질문명만 앞세웠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보고있다. 전쟁으로 인한 참상(慘狀)은 하나님께서 본래 품부(稟賦)하신 도덕을 어긴 징벌(懲罰)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이상재에게는 더 이상 도(道)와 기(氣)가 분리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기(器)는 도(道)의 자연적인 외연(外延)으로, 만일 기(器)를 도(道)에서 분리하여 우선(優先)으로 하였을 때는 인간은 탐욕과 이기심에 사로잡혀 타인과 타국을 침탈하게 된다. 도(道)와 기(器)는 분리될 수가 없는 것이며, 기(器)는 도(道)의 자동적 외연(外延)으로 현상화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창조주의 뜻을 어기게 되며 결국 멸망으로 치닫는다고 보았다.
한편, 이상재가 인식하는 서도서기(西道西器)에는 갑신개화파의 것과 뚜렷한 차별성이 나타난다. 갑신개화파가 주장했던 서도서기(西道西器)에는 서도(西道)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었다. 이들은 종교적 입신(入信)이 거의 전무(全無)한 상태에서 부국강병(富國强兵)과 자강(自强)을 목적하여 구미(歐美)문명으로 모든 체제와 가치관을 교체하려 한 것이다. 이들에게 집중된 관심은 서기(西器)였지 서도(西道)가 아니었다. 이들은 서기(西器)에 무게의 중심을 두고 서도(西道)는 이를 위한 도구로 보았다.

따라서 엄격히 말한다면, 이들의 이러한 인식은 서도(西道)를 서기(西器)의 도구로 보는 서기서도(西器西道)라 말해야 할 것이며 서기(西器)를 서도(西道)의 자동적 외연(外延)으로 보았던 이상재의 사고(思考)와 엄격히 구별된다.
또한, 이상재의 서도서기(西道西器)는 민족적 활동을 같이했던 이승만이나 윤치호의 인식과도 일정하게 구별이 된다. 1903년 옥중(獄中)에서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기독교(基督敎) 입국(立國)을 주장한다.

“대한에 자초로 유교가 잇서 정치와 합하여 행하야 세상을 다사리기에 극히 선미한 지경에 이르러 보앗슨즉 사람마다 이 교만 실상으로 행하면 다 이전갓치 다시 되어 볼 줄로만 생각하야 다른 도리는 구하지 안코 다만 이 도를 사람마다 행치 안는 것만 걱정하니 비컨대 어려서 입어 빗나던 옷슬 장성한 후에 다시 입으려 한즉 해져 무색할 쁜 아니라 몸에 맛지 안는 줄은 생각지 못하고 종시 입기만 하면 전갓치 친란할 줄로 넉임과 갓흔지라 …(중략)… 부럽도다 저 개명한 나라에서 들은 사람의 몸과 집안과 나라를 통히 하나님의 도로써 구원을 엇엇스니 …(중략)… (한국도) 이 세대에 처하야 풍속과 인정이 일제히 변하야 새거슬 숭상하여야 할 터인대 예수교는 본래 교회속에 경장(更張)하는 주의를 포함한고로 예수교가 가는 곳마다 변혁하는 힘이 생기지 안는데 업고 예수교로 변혁하는 힘인즉 피를 만히 흘니지 아니하고 순평히 되며 한번 된 후에는 장진이 무궁하야 상등문명에 나아가니 이는 사람마다 마음으로 화하야 실상에서 나오는 연고-라 우리나라사람들이 맛당히 이 관계를  달아 서로 가라치며 권하야 실상 마음으로 새거슬 행하는 힘이 생겨야 영원한 긔초가 잡혀 오날은 비록 구원하지 못하는 경우를 당할지라도 장래에 소생하야 다시 일허서볼 여망이 잇슬거시오. …”

이승만의 사고(思考)에는 동양의 도(道)와 기독교가 완전히 차별적 가치체계였다. 또한, 기독교의 문명은 상등의 문명으로 한국의 기존의 가치체계가 목표로 삼아야할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상재는 동양이 말하는 도(道)를 거부하지 않는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48>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이상재는 동양의 도(道)에는 기독교의 도덕문명과의 공유점이 있으며, 동도(東道)라는 도덕적 문명의 전통 속에 있던 한국은 이미 문명적 바탕을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인식에 있어 한국은 하등문명(下等文明)에 속하여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이상재가 보기에 이승만이 주장하는 기독교의 복음의 현상 즉, “하나님의 도(道)는 악한 일을 못하게 하는 거시니 사람으로 하여금 착한 도(道)와 올은 교(敎)를 배화(배워)” 올바른 행동을 하는 것이 동도(東道)가 추구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기독교의 중심을 도덕으로 인식하되 동도(東道)가 추구하는 가치관을 버리지 않았고, 따라서 이승만의 문명관과 일정한 거리를 갖는다. 이상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요새 靑年들을 보면 失望落心하여 일을 하여 보려는 자가 몇이나 있는지 모르겠소. 이렇게 가다가는 참 말이 아니요. 이리된 原因은 基礎的 修養이 없었기 때문이오. 修養이라하면 여러 가지 있겠지오마는 다만 眞理로 把持하고 나아가는 그 修養이라야 하겠소. 簡單히 말하자면 天理에 循하고 人力을 盡하여야 事業의 成功을 바랄 수 있겠소. 무엇이거나 다 偶然히 될 줄로 알기 쉽지마는 其實은 다 이 두 가지로 말미암아 될줄 아오. 眞理는 어디 있겠소. 썩은 글이라 하여 내버리는 四書三經 같은데서도 眞理를 採求할 수 있고 耶蘇敎의 新約 舊約 가운데서도 眞理를 많이 배울 수 있소. 나는 二十歲 靑年에게 眞理를 배우라는 말 한마디 밖에는 할 말이 없소.”

이상재는 기독교의 중심과 핵심을 ‘하나님 나라’로 보았고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 실현의 가능성 또는 가시적 예표를 ‘도덕’이라고 보았다. 즉 기독교의 중심적 매체가 도덕과 윤리라고 본 것이다. 도덕과 윤리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역사의 가장 중요한 매체라고 인식될 때 동양의 전통적 도덕적 교훈도 중요한 문명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또한, 도덕이 가치체계에 있어서 중심이 될 때, 전통적으로 도덕을 중요시하였던 한국은 문명국일 수밖에 없었다. 이상재의 입장에서는 한국은 진정한 문명국이었으며, 따라서 기독교의 중심과 공유된다고 믿었던 동도(東道)를 거부할 필요가 없었다.

윤치호는 이승만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서도(西道), 즉 기독교가 한국의 모든 가치체계를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치호는 한 민족이나 국가의 성패가 민족성의 우열 여부에 달려있다고 보고, 한국인들의 쇠퇴가 조선왕조시대 이래 형성된 저열(低劣)한 민족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인식한다.

이러한 인식하에 도덕적 독립이 없다면 정치적 독립은 쓸모 없는 것이라는 극단적인 태도를 드러낸다. 그는 한국인들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독립운동이 아니라 개개인의 인격수양에 의한 민족성 개조(改造)라고 생각하였다. 심지어 “일본정권이 조선에 가져다 준 극소수의 은혜 중의 하나는 정치로부터 조선인들을 떼어낸 것”이라고 하며 3·1운동 이후 한국인들 사이에 정치적 열기가 고조되었다고 불만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그는 한국인들이 충실과 정직, 신용, 공공정신, 노동존중 정신 등의 덕목을 함양하여 민족성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국전통에는 애초부터 공동선(共同善)과 사회적 도덕성, 그리고 일본인들과 같은 청결과 근면, 단결력과 순종(順從)의 정신이 없다고 보고, 이러한 것들을 기독교가 갖고 있는 윤리규범과 덕목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윤치호는 기독교의 윤리적 덕목은 근대 산업 사회의 공리적 사회규범을 만들어냈으며, 서구의 국가들은 이것을 준수함으로써 ‘행복과 이익’을 얻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기독교의 금욕주의적인 생활 윤리의 규범들이 서구의 산업문명을 창출하는 힘을 도출(導出)시켰으며, 기독교를 믿는 사회는 부와 권력을 소유하는 보다 강대한 문명국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49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산업문명을 발달시킨 거대한 힘이 기독교라는 인식하에서 볼 때, 농업중심이었던 유학(儒學)의 전통적인 세계는 '반문명적'이요, 힘에 있어서 열등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동도(東道)의 세계관에 묶여 살아왔던 한국은 열등국(劣等國)이고 한국인들은 열등한 민족성(民族性)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상재는 기독교에 입교(入敎)한 이후에도 한국의 전통적 가치체계를 단절시키지 않고 이를 오히려 기독교 속에서 완성시키고자 한다. 그는 한국인들 사이에 폐습과 악덕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한국의 가치체계를 지켜왔던 동도(東道)로 인한 것은 아니었다. 동도(東道)는 한국인들에게 도덕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동도(東道)의 세계에는 이상(理想)만 있을 뿐 실천(實踐)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관리들은 가렴주구(苛斂誅求)하고 백성들은 나태에 빠졌다. 기독교 세계에 동도(東道)의 이상과 완성이 있다고 인식할 때, 기독교의 도덕력은 한국인들을 자극시켜 한국인들이 전통적으로 알고 있고 배워왔던 도덕심을 일깨울 수 있다.

이상재는 기독교가 말하는 도덕만이 존엄과 인격으로 서로 인화(人和)할 수 있는 이상 사회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확신했다. 동양적 전통의 핵심에는 도덕이라는 이상(理想)이었지만 그 실천이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한국은 도덕적 바탕을 갖고 있어 반드시 이상적 세계를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한다. “어째 조선 청년에 대해서 희망이 크다고 허는고 허니, 조선 청년은 도덕상 지식이 있는 청년이여, 본래, 본래 사천년 내려오면서 습관이라든지, 무엇으로 보던지 길러 오기를 도덕심으로 길러 온 까닭에 그 지식이 도덕으로 자라나고, 그걸 무엇으로 짐작해 보느냐 하면, 시방 세계는 점점 악화해 가서 도덕이란 건 없어지고… 긔여 남은 죽이고 나만 살자는, 남은 해치고 나만 위허자는 그러헌 목적으로 하는 것이니까. 그건 무엇으로 되아 나가느냐 하면 물질로 되아 나가. …조선 청년은 본래 어려서버텀 제 가정에서 훈계받을 때부텀, 네 밖에 나가거던 남허고 싸우지 말아라. 남을 해롭게 말아라. 남을 해치지 말아라. 아무쪼록 남을 도와주고, 널라 네, 네가 어려운 일이 있더래도 참고, 남은, 남으게 해룬 노릇은 말라고 상은 가정에서버텀 가르쳐 논 까닭에 차차 차차 자라나서 자라날수록 그 마음이 자라나 가주구서, 필경에서 장성(長成)해 살지라도 그 맘에 변허지 않는 그런 도덕심이 있어. 그건 하늘이 당초에 품부(稟賦)해준 그 도덕심(道德心)(이여)…”

전통적으로 한국인들은 어려서부터 도덕교육을 받아왔고, 도덕지식은 풍부하였다. 이러한 도덕교육은 유학(儒學)이 담당해 왔었다. 그러나, 게으름과 시기와 나태 등의 나쁜 습관이 병폐가 되어 한국사회를 망쳤다. 이러한 병폐는 도덕력이 쇠잔하였고, 그 실천력이 없었기 때문에 발생되는 것이다. 이러한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켜야 한다. 하나님의 계명은 사람들로 하여금 “상대방이 그릇 되었을 때 나는 도덕을 지키고, 상대가 포학할 때 나는 인애하고, 상대가 강제할 때 (비록) 나는 유약하지만 남의 재산을 약탈하는 자를 막는” 힘을 가졌다고 확신한 것이다.

이상재는 기독교의 계명이 이러한 병폐를 고칠 수 있고, 한국인들이 본래 갖고 있는 도덕적 바탕에 자극(刺戟)을 주어 한국의 사회를 개혁(改革)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상재에게는 성서적 교훈과 동양적 도덕이 원만하게 지지되고 있으며, 그는 기독교 속에 동양적 교훈의 원형과 그것을 일깨울 힘이 있다고 인식했다. 이상재는 옥중에서의 회심을 통해 그간의 동도서기(東道西器)에 대한 사고를 극복하고 이를 서도서기(西道西器)로 대체시켰다. 그의 서도서기적(西道西器的)사고는 전통과 단절이 되는 이승만이나 윤치호의 그것과는 뚜렷이 구별된다. 그는 동도(東道)의 원형(原形)과 실천, 그 발전적 확장이 서도(西道) 속에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상재에게는 기독교에 입교(入敎)한 후에도 전통의 파괴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50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이상재는 기독교에 입교(入敎)한 후, 자강(自强)을 목적으로 설립되고 있던 민족운동단체에는 소극적으로 가담하였다. 그러나, 참찬(參贊)의 직무마저 등한히 하면서 YMCA에는 적극 참여하였다.
그가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했던 자강단체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반면, YMCA에 적극적이었던 이유는 이상재의 회심 후 사상과 YMCA의 성격이 서로 부합(附合)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장에서는 이상재가 왜 YMCA를 선택했으며 그가 자강단체와는 달리 그곳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상재가 기독교로 입교(入敎)한 후, 왜 교회보다는 YMCA 활동에 집중하였는지, YMCA는 어떤 곳이었는지, 이상재의 YMCA에서 어떠한 활동과 역할은 무엇이며, YMCA를 중심으로 하여 벌였던 흥업구락부의 운동과 그 사상적 의미는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한다. 아울러 그의 활동을 통하여 한국 YMCA의 정체성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도 알아보고자 한다.

4.1 YMCA 선택과 활동의 동기(動機)
4.1.1 게일과 이상재의 사상
이상재는 1904년 2월에 출감(出監)하자, 1900년 5월부터 연동교회에서 시무하고 있던 게일(James Scarth Gale)을 찾아갔다. 한성감옥에서 벙커와 게일을 통하여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였던 이상재는 연동교회에 입적(入籍)하였다. 그리고 게일이 회장으로 있던 YMCA의 전신(前身)인 황성기독교청년회에도 입회(入會)하였다.

이상재가 연동교회에 입적한 후, 얼마 되지 않아 YMCA에 입회한 동기(動機) 가운데 하나는 당시 YMCA의 회장이 게일이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상재가 연동교회와 YMCA에 입적과 입회를 할 때, 그는 한성감옥에 같이 투옥되었던 김정식(金貞植), 이승인(李承仁), 이원긍(李源兢), 홍재기(洪在箕) 등과 같이 하였다. 그런데 독립협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진보적 지식인들인 이들은 게일과 함께 ‘국민교육회’를 만들어 활동하였지만, 비정치적인 계몽운동임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 정치적 성향이 강했던 신민회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사실 출감(出監) 후 이들이 제일 먼저 찾아갔던 곳은 감리교였다. 그러나 이들의 정치적 과격성을 우려한 감리교 선교사들은 이들 진보적 지식인들이 감리교회에 입적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게일은 당시 한국에 나와 있던 선교사들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비정치화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게일의 성향은 일관되게 유지된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볼 때, 게일은 이들이 직접적인 정치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연동교회 입적(入籍)을 허락하지 않았나 하는 추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 게일 자신의 신학적 성향이 이들 지식인들 그룹의 개신교 입교에 대한 열렬한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는 점도 간과(看過)할 수 없다.

1904년 6월에 설립된 국민교육회는 규칙 제 10조에 정치적인 일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공표(公表)하였는데, 국민교육회를 비정치화 시키려 했던 태도는 이상재를 비롯한 이들 한성감옥에서 회심했던 양반 관료출신들의 사상적 변화가 한 원인이기도 했겠지만, 게일의 일관(一貫)된 의도(意圖)라 할 수 있다.

‘기독교의 비정치화’를 주장했던 게일은 YMCA를 처음 설립할 때도 YMCA가 비정치적인 조직이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YMCA 설립의 중책을 맡았던 중국 YMCA의 선구자였던 라이언(D. W. Lyon)은 YMCA 설립에 대한 의견을 청취할 때 ‘YMCA가 결코 정치적 활동의 중심지가 되어서는 안 되며, 그 안에서 그런 행동은 절대적으로 금지되어야 한다’는 비정치화에 대한 확신에 찬 게일의 인식(認識)에 대해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상재와 연동교회에 속해 있던 이들 양반관료출신들은 1908년 이상재가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의 교육위원장 때에 위원과 총무를 맡고 있었다.

이들은 YMCA 내에서 철저히 연동교회의 담임자인 게일과 서로 영향력을 주고받으면서 행동하였다. 한편, 이상재가 연동교회에 입교하고 YMCA에 입회하는 등 게일과 행보를 같이했던 것은 둘 사이의 문명관에 대한 사상적 공유가 많았기 때문이다.
1919년 3월 22일 서울의 조선호텔에서 장로교회 장로이며 서울 YMCA 명예이사였던 대법원 판사 와타나베 노보루(渡邊暢)와 가타야마(Katayama)가 개신교 선교사들을 초청하여 3·1운동에 관한 논의를 하는 자리에서 게일은 한국은 미문명화 된 저급한 나라라는 이들의 비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신의 확신을 피력했다.

“지난 30년 동안 나는 한국인을 이해하려고 했으나 아직까지 방관자에 불과하다. 한국은 고대로부터 내려온 문명세계이다. 그러한 이유에서 나는 한국을 알면 알수록 한국을 존경하게 되었다. … 한국을 통치하려고 하는 어떠한 방법도 먼저 한국의 문명을 존경해야 하며, 어떤 외래적인 것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한국적인 문명을 기초로 해서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한국을 문명국으로 인식하는 이러한 게일의 태도는 이상재의 문명관에 대한 인식과 일치한다. 또한, 한국이 쇠퇴하게 되는 원인에 대해서도 게일과 이상재는 동일한 인식을 하고 있다. 1928년 11월 2일자 조선일보는 ‘기일씨(奇一氏) 조선관(朝鮮觀)’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싣는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51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그는 우리 조선이 일찍부터 개명하(開明)여 문화(文化)의 찬란(燦爛)하던 것을 역사적(歷史的)으로 서술(敍述)하고, 근대에 와서 한국쇠망(韓國衰亡)의 칠인(七因)으로서 첫째는 조선인(朝鮮人)이 역사적(歷史的)으로 축적(蓄積)하여온 정신(精神), 다시 말하면 조선혼(朝鮮魂)이란 것을 상실(喪失)하였음을 말하였고, 다음에는 도덕(道德)의 상실(喪失)을 말하였고, 그 다음에는 예의(禮儀)의 상실(喪失)을 말하였으나 이것은 광의(廣義)로는 도덕(道德)에 포함(包含)될 것이어니와 예술(藝術)을 상실(喪失)하고 문학(文學)을 상실(喪失)한 것과 기타 남여(男女)의 별(別)이며 의복(衣服)까지 상식(喪失)한 것을 말하였음은 그의 논평(論評)이 보통외인(普通外人)의 건드리지 못한 바를 능(能)히 건드린 것이다.…”

게일의 이러한 한국관(韓國觀)은 이상재가 주장했던 것과 거의 일치한다. 이상재는 당시 한국이 전통적으로 갖고 있었던 도덕문명을 소진하였다고 보았다. 원래 한국은 개명(開明)한 나라로 전통적으로 지켜왔던 도덕문명은 바로 한국의 정신문명이며 조선혼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이러한 전통적인 도덕문명을 소진하고 있다.

이렇게 도덕문명이 소진하자 양반 관료층에는 가렴주구의 행태들이 나타나고, 상민층에는 가난과 폭력, 질투, 무분별한 모방, 게으름이 중병(重病)처럼 번지고 있었다. 게일은 한국인의 본래의 성품은 미국인보다 더 신뢰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동도(東道)가 전통적으로 갖고 있었던 정신적인 문명의 힘은 상실되고 교조적(敎條的)으로 변해있었다. 그는 이러한 상황 아래서 나타나는 양반층들의 허례허식과 비독립적인 의존성을 비판하고 있다. 그가 볼 때 그러한 것들이 한국을 쇠망하게 한 원인이었다. 게일은 19세기의 한국이 전통적 정신문명의 힘을 상실한 것은 한국의 전통적 가치에 대한 상실이며 역사의 마지막을 뜻한다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9세기말은 한국의 마지막을 뜻한다. 그때부터 문명 그 자체라고 부를 수 있는 서양이 그 위압적인 힘을 갖고 이 나라에 왔으며 한국은 이제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는 존속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 거대한 파괴의 힘이 오기 전에 중국으로부터 전해져 왔던 고전(古典)이 쇠퇴되었고 공인(公人)을 훈련시켰던 중국 고성(古聖)의 교훈도 이미 끝이 났다. 인간의 영혼을 위로하고 인간과 사회를 융합시켰던 옛 종교도 오래 전에 사라지고 잊혀졌다.”

여기에서 보듯이, 게일은 이상적 가치로 정신문명을 중요시하고 있다. 그는 현대에 와서 기독교의 세계라 할 수 있던 서구사회가 정신적 가치체계를 잃어버렸다고 보고 강한 비판을 하고 있다. 도덕적 계율과 본(本)을 보여야 할 기독교 문명의 서양사회가 복음의 도덕성과 기독교적 전통성을 잃어버릴 때, 서구 사회는 기존(旣存)의 가치체계가 파괴되고 공산주의(共産主義)나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 등 사회적?사상적 혼란이 야기(惹起)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은 동양세계에까지 파급되어 이들이 간직하고 있던 전통적인 정신문명까지 파괴시킨다고 보고 서구로 인한 피탈적(被奪的)인 폐해에 대해 강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우리는 한국을 포함한 동양의 파멸을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파멸을) 가져오게 하였다. 서양이 이렇게 마음대로 동양에 이러한 결과를 가져왔다면 동양이라고 그렇게 하지 말라는 법이 있을까? 서양이 그들의 조상을 돌보지 않는데 동양이라고 항상 그렇게 할 필요가 있을까? 서양에는 남녀의 구별이 없다. 동양이 그렇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동양이 서양에서 보는 모든 것, 종교도 무의미해진 서양, 동양이 그렇지 말라는 법이 있을까? 노동조합, 공산주의, 사회주의, 볼쇼비키, 무정부주의가 서구의 진정한 현상이라면 동양이 이러한 아름다운 이름들을 빌려오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우리가 펜을 쓰는데 동양이 서양화를 그리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트렘펫이나 바이올린은 어떻고? 이혼 젊은이들의 향락이 동양에 오지 않으라는 법이 있는가? 한때 잭 론돈(Jack London)이 예측했던 극단의 혼동이 오늘날 서울의 젊은이들의 마음을 잘 표현한다.”

선교사 게일은 비정신적 서구문명의 출현이 한국사회에 부정적 결과를 가져오는 현상을 가장 안타깝게 인식하고 서구문명의 과오를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에서 기독교 복음의 도덕력은 가장 중심적 위치에 속하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에서 게일은 한국의 전통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도덕적인 정신문명에 대해 극찬을 하였던 것이었다. 한국의 전통적 정신문명을 도덕적 가치로 높이 평가하고 이러한 전통적 가치를 소중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게일과 “도덕을 존숭하는 데 지역을 구별하는 것은 편협하다”는 인식 아래 전통적인 한국의 도덕문명을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도덕력과 차별시키지 않는 이상재의 태도는 사상적으로 일치한다.

또한, 조상(祖上)과 남녀유별(男女有別)에 대한 게일의 동양적 사고관(思考觀)의 긍정성과 “늙은 아버지의 과거 사업이 선한 일과 아름다운 일에 힘썼거나 힘쓰지 않았거나 오늘날에 추론할 바도 아니거니와, 설혹 선한 일과 아름다운 일에 힘쓰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후손들이 “선한 일과 아름다운 일에 힘써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 영예를 돌려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이상재의 유가적(儒家的) 사고는 서로 밀접하게 부합되고 있다. 게일은 이상재에 대하여 “귀족이자, 동양의 스승이며, 학자, 겸손한 신앙인, 기독교 설교가, 그리고 성인(Saint)”이라고 극찬한다. 게일은 이상재가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정신적 귀족성, 민족에게 교훈(敎訓)을 주는 인물, 하나님의 뜻을 이웃과 겨레에 실현하는 태도, 자신의 신앙적 체험을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시키고 역사적 체험으로 전달하는 적극성 등을 갖고 있다고 본 것이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52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게일의 평가는 신앙이 단지 개인의 경건과 밀실에서의 기도로만 끝나서는 신앙 훈련(訓練)과 사표적(師表的) 동력으로 발휘되기는 힘들다는 자신의 인식을 드러낸 것이다.
그는 기독교 신앙이 높은 도덕력과 문화적 소양으로 사회적 책임을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게일은 국권회복(國權回復)이라는 절대명제(絶對命題)를 위해 직접적인 무장저항운동을 하는 것에 소극적인 자세를 보임으로써 일정한 비판을 하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초월적 성향이 강해 역사에 대해 무관심한 기독교인들에 대해서도 일정하게 비판을 한다.
“일종의 열광적인 애국심은 자결, 혈서, 그리고 게릴라전과 재래식 무기에 의한 저항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는 아직도 상당한 정도로 계속되고 있지만, 경쟁 세력들에 의해 사로잡힌 계곡의 불쌍한 백성들은 조선의 실패한 과거로 인한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조선이 이러한 위기를 어떠한 방법으로 헤쳐 나가야 하는지, 그것의 옳고 그름은 어떤지 그리고 무엇이 행해져야 하고 또 행해져서는 안 되는지에 관한 문제는 우리가 다룰 문제가 아니다.”

“개종자들은 나라가 파멸하는 데 무관심한 것 같으며 따라서 애국을 한다는 것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교회는 끝까지 일본이나 일본을 적대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옳은 일이 아니었다. 그들에 찬동하지도 반대하지도 않는 미온적인 태도는 한국의 살아있는 영혼들로부터 경멸을 받았다.”
게일은 기독교가 정치에 대해 불간섭해야 한다는 것은 확신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하여 역사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게일이 볼 때, 사회체제는 도덕적인 계율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힘을 갖출 수 없게 되고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된다.

게일은 독립협회 출신자들이 정치적 행동에 개입하는 것을 우려하고 이를 단호히 배격하려는 태도를 견지했으나, 한국문명에 대해서는 긍적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회심한 이들에게 외연화되어 나타나는 복음의 도덕성에 대해서는 고무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상재도 게일과 사상적 견해를 같이하여 국권회복(國權回復)을 목표로 하는 정치활동에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으며, 기독교 복음의 정신적 문명과 그 도덕력에 기초한 민족운동의 차원에서 YMCA를 선택하였다고 추론할 수 있다.

4.1.2 계몽적 자강단체와 이상재의 사상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일어나자, 한국의 각지에서는 이에 반대해서 국권회복이라는 단일 목적 아래 의병운동과 교육을 통한 계몽과 민도(民度)의 향상을 위한 애국계몽운동, 언론활동, 자강(自强)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학회(學會)운동 등 다양한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애국계몽운동은 독립협회 출신의 개화 지식인, 중인그룹, 지주, 진취적인 유학자들에 의해 전개되었는데, 이들은 백성들로 하여금 서구의 근대문명을 매개로 국난(國難)의 위기를 타개(打開)할 능력을 갖추도록 하는 것을 지상과제로 삼았다. 자강운동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던 것은 ‘생존경쟁(生存競爭)’과 ‘우승열패(優勝劣敗)’를 내세운 사회진화론이었다.
19세기 후반 이후, 다윈(C. Darwin)의 생물진화의 원리는 자연과학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고 사회·정치·문화 등의 영역에서 다양하게 확산되었는데, 국권을 잃은 한국에도 그 영향이 미쳤다.

당시 서우사범학교의 학도가(學徒歌)는 이러한 당시의 경향을 잘 말해주고 있다.

“…생존경쟁당비시대(生存競爭當比時代)에 국가흥망(國家興亡)이 니게달네. 열강(列强)의 대우(待遇) 생각사록 노예희생(奴隸犧牲)의 치욕(恥辱)일세 이천만동포(二千萬同胞) 우리 형제(兄弟)아 비시(比時)가 하시(何時)며 비일하일(比日何日)고 육대주대륙(六大洲大陸)의 형편(形便)살피니 약육강식(弱肉强食)과 우승열패(優勝劣敗)라…”

이렇게 사회진화론에 기초했던 자강운동(自强運動)은 일명 한일합방(韓日合邦)이라는 1910년의 국치일(國恥日)까지 계속되었다.
독립협회 해산 후 일반 대중들의 계몽을 위해 1904년에 보안회, 공진회, 1905년에 헌정연구회가 조직되지만 그 활동은 미미했고 정부에 의해 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후 헌정연구회가 1906년 4월에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로 재편되는 것을 시작으로 대한자강회의 후신(後身)인 대한협회, 서우학회를 비롯한 한북(흥)학회와 이 두 학회를 통합한 서북학회(西北學會), 기호학회(畿湖學會), 관동학회(關東學會), 호남학회(湖南學會) 등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들 자강단체들은 국권회복(國權回復)은 단시일 내에 불가능하다고 보고 점진적으로 국권을 회복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강의 방법으로 교육과 식산(殖産)을 강조했다. 대한자강회는 취지서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연(然)이나 여구기 자강(如究其 自强)의 술(術)이면 무타(無他)라 재진작교육야(在振作敎育也)요 재식산흥업야(在殖産興業也)니 부교육(夫敎育)이 부흥칙민지미개(不興則民知未開)고 산업(産業)이 부식칙국부막증(不殖則國富莫增)니 연칙(然則) 개민지양국력지도(開民智養國力之道) 단부재교육산업지발달호(亶不在敎育産業之發達乎)아 시지교육산업지발달(是知敎育産業之發達)이 즉유일(卽唯一) 자강지술(自强之術)이라.”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53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이들에게 있어 자강의 방법은 교육을 진작하고 식산을 흥(興)하게 하는 것이었다. 교육이란 국민의 지(智)를 계발하는 것으로서 이것만이 미개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유일의 방법이라고 보았다. 또한, 자강지술(自强之術)만이 국가의 부강과 국권의 회복을 가져올 수 있다고 역설하고, 서구의 부강은 국민이 교육을 통해 얻은 지력과 지식에서 연원 된다고 보고, 지적(知的)으로 우세한 자가 생존경쟁에서 승리하고 열등한 자는 패하게 되므로 국민들을 교육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그래야만 국제사회에서 승리할 수 있고 국권을 회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여기에서 이들이 말하는 교육은 국권회복과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강(自强)의 술(術)’로서 개인의 인격함양을 목적으로 했던 기존의 교육방식이 아니었다. 이들이 강조한 교육은 힘을 기르기 위한 것으로, 조선의 전통에서 경시되었던 신체적인 교육과 군사교육, 애국심을 고양하기 위한 의식화 교육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이 진보적(進步的)라는 인식이었다. 이들이 볼 때 한국은 약한 국력 때문에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했던 서우학회는 월보(月報)인 ‘서우(西友)’를 통해 교육의 목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교육(敎育)의 종국목적(終局目的)은 국민(國民)으로 기인격(其人格)을 발달(發達)케?에 재(在)?나 기직접목적(其直接目的)은 국민(國民)으로 현하(現下) 생존경쟁(生存競爭)에 적응(適應)? 성질(性質)을 구비(具備)케?에 재(在)?니 차생존경쟁(次生存競爭)에 자(資)치 못? 교육(敎育)은 무용(無用)? 교육(敎育)이오 차생존경쟁(次生存競爭)에 익(益)이 무(無)? 학문(學文)은 유해(有害)? 학문(學問)이라.”

생존경쟁(生存競爭)을 위해 이익을 주지 못하는 학문은 해로운 학문이라는 극단적인 인식은, 국권이 침탈(侵奪)당한 원인을 근대적 힘의 문명을 제대로 수용치 못한 한국 내부에 있는 것으로 보고, 한국의 전통적(傳統的) 가치관은 낡은 것으로 치부하여 전적으로 부정하게 된다. 이들 자강단체들은 ‘자강의 정신‘이 곧 ‘국민의 사상’이라고까지 인식했고, 이들의 이러한 인식과 태도는 차후 실력양성을 목적으로 했던 민족운동으로 계속 이어진다. 사회나 국가간에 생존경쟁이라는 도식(圖式)이 성립된다는 사회진화론적(社會進化論的) 인식은 이들로 하여금 한국을 보호국으로 삼고 있는 일본이 가진 힘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갖게 한다. 이것은 사회진화론의 구조와 그 전개가 태생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증거는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가 외교 담당자로 일본인(日本人) 고문을 둘 것을 규정하고 있는데서 잘 나타난다.

대한자강회의 후신인 대한협회는 노골적으로 일본의 문명적 힘을 동경하고 생존경쟁의 원리를 도입하여 일본의 한국 피탈을 당연시한다. 1908년 남궁억의 후임으로 회장이 된 김가진(金嘉鎭)은 일본의 유식자(有識者)들은 상인(商人)이나 역부(役夫) 등과는 달리 천박하지 않으며, 상인이나 역부와 같은 하등동물의 행위로 인해 일본국 전체를 배척(排斥)하는 것이 불가(不可)하다고 역설한다. 그는 일본인의 기업행상(起業行商)이 나날이 성대함을 보고 민족의 멸망을 우려(憂慮)하고 국가의 전도(前途)를 비관하여 배일(排日)하는 것은 경쟁시대에 있어 편협한 우견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회 진화론적 인식으로 인해 김가진은 더욱더 매국적(賣國的) 논조를 주장하게 되는데,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동양(東洋) 형세상(形勢上) 일본(日本)이 아국(我國)을 타수(他手)에 위(委)치 아니함은 실(實)로 그 자위(自衛)의 필연(必然)에 출(出)함이오 아국(我國)도 역일본(亦日本)을 배척(排斥)하야 능(能)히 독립(獨立)을 유지(維持)치 못함은 자명(自明)한 도리(道理)인즉 양국(兩國)의 화의(和議)를 견고(堅固)케 함은 쌍방(雙方) 당연(當然)한 이세(理勢) …”

김가진은 아시아에서 일본의 지도자적 역할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며 한국의 자강의 문명화를 일본이 선도하는 것으로 인정하고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근대문명의 외형적 힘에 대한 긍정과 동경은 최대의 항일단체였던 신민회에서도 나타난다. 1907년 신민회의 이갑(李甲), 최석하(崔錫夏) 등은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신민회의 활동을 방해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이토오(伊藤)와 도산 안창호와의 면담을 주선하였다. 물론 안창호는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와의 면담을 통해 이토오(伊藤)의 한국의 식민지화에 대한 야심을 발견하고 보호제의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안창호는 일본이 명치유신(明治維新)이후 갖게 되는 근대문명의 외형적 힘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이상재는 1906년에 설립된 대한자강회에 평의원으로 등재되지만 명의(名義)만 빌려주었을 뿐 적극적인 가담이나 활동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한자강회가 해체되고 대한협회로 재편을 하였을 때는 관여하지 않고 있다. 또한, 대표적인 거국적 항일 운동단체인 신민회에도 가담하지 않는다. 그 뿐만 아니라, 자강단체에서의 활동은 물론 일본에 저항하여 직접적인 반일활동을 하지도 않는다. 이상재가 YMCA를 선택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한 것은 게일의 영향 때문이기도 했지만, 회심(回心) 후 그의 사상이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회심후의 사상과 YMCA의 활동의 성격이 자신의 사상과 부합(附合)이 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회심 후 이상재는 사회 진화론적 인식 하에 전개되는 자강운동이 자신의 사상과 더 이상 합치(合致)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에게 있어 교육이란 서구문명의 외형적 힘만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며 그 외형적인 힘을 키우는 것이 서구의 문명국이 된다는 인식을 거부한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54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그는 YMCA의 기독교 운동과 교육의 원리는 힘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청년들에게 역사의식(歷史意識)과 옳고 그름을 일깨워 청년들에게 올바른 심성을 함양시키는 데 있다고 보았다.
그러한 교육만이 진정한 교육방식이라 인식한 것이다. 인격적 가치를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적 심성교육은 자동적으로 근대적인 힘을 갖게 되는 것이지만 그것이 목표는 아니었다. 이상재는 청년들에게 기독교 정신 아래에서 행해지는 YMCA의 근대적 기독교의 교육방법과 YMCA를 통한 활동을 촉구하며 다음과 같은 의견을 피력한다.

“소이(所以)로 구미열강(歐美列强)에 문명박학지사(文明博學之士)가 강마연구(講磨硏究)하여 청년회(靑年會)를 설시(設始)하고 교육지방(敎育之方)을 규정(規定)하여 여파(餘波)가 동점(東漸)하매 아주지(亞州之) 일본지나(日本支那)도 역유시회(亦有是會)하며 현금(現今) 아한황성내(我韓皇城內)에도 비회(比會)를 창설(創設)하였도다. 제론기교육지방법(第論其敎育之方法)하건대 인애(仁愛)와 공의(公義)와 성신(誠信)으로 심성(心性)을 함양(涵養)하여 상천(上天)이 궐초부여(厥初賦予)하신 진애(眞哀)를 부양(不壤)하나니 시왈덕육(是曰德育)이요, 거처음식(居處飮食)의 적부(適否)와 언앙굴신(偃仰屈伸)의 의불의(宜不宜)와 범속위생방법(凡屬衛生方法)으로 신체(身體)를 조장(調將)하여 질병(疾病)을 방어(防禦)하며 근골(筋骨)을 강장(康壯)케 하나니 시왈(是曰) 체육(體育)이요, 천지만물(天地萬物)의 원질배분(元質配分)하는 이기(理氣)와 고금만국(古今萬國)의 정법흥망(政法興亡)하는 력사(歷史)와 외타사사물물(外他事事物物)의 소견소미견(所見所未見)과 소문소미문자(所聞所未聞者)로 지식(智識)을 개발(開發)하여 리용후생(利用厚生)도 하고 도리(道理)를 오명(悟明)케 하나니 시왈지육(是曰智育)이라. 비삼육(比三育)으로 교도(敎導)하되 혹(惑) 고명박학(高明博學)한 선진(先進)이 등단연설(登壇演說)도하며 혹(惑) 청년회(靑年會)에 호상(互相) 토론(討論)도 하여 심흉(心胸)을 개도(開導)하며 이목(耳目)을 청신(淸新)케 하고 서적(書籍)을 별저일실(別儲一室)하여 원람자(願覽者)에 수구수응(隨求隨應)하나니라”

이상재는 YMCA의 교육방법 중 한국사회에 만연되어있던 무질서와 위생에 대한 개선과 교육, 생활의 향상도 함께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지엽관계(枝葉關係)이고 이상재 인식의 중심은 정신적 가치의 고귀함이 먼저였다. 그것은 서구 근대문명의 근저를 이루고 있는 것이 기독교의 문명이라는 인식이요, 이러한 정신문명은 역사와 문명의 근거라는 확신이었다. YMCA의 교육방법은 서구문명의 외연적(外延的) 힘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독교 복음 아래에서 개인의 심성(心性)을 개발하여 근대적 의미의 책임 시민의식을 함양시키는 데 있다. 이러한 방법은 하나님께서 품부(稟賦)해 주신 것으로, 곧 사회에서의 인간화의 실현, 인간의 도덕적?정신적?사회적 향상을 목표로 한다. 그리고 서구 열강의 외형적인 힘은 이것을 바탕으로 나오는 것이라는 인식이다.

이상재가 볼 때, 근대시민의 함양을 목표로 하는 YMCA의 교육방법은 동력(動力)이 되어 역사의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안목을 갖게 한다. YMCA는 이를 위해 박학(博學)한 인사들의 강연과 상호간의 토론, 도서의 대출 등 가장 선진적인 방법으로 돕고 있다고 피력한다. 이상재는 역사의 징조(徵兆)를 보며 철저한 자의식(自意識)과 깊은 윤리적 감각, 정의감(正義感)에 불타는 인사(人士)들로 하여금 청년들에게 서구문명과 국가흥망(國家興亡)의 근본이치를 알게 하고 싶었다. 그것은 결국 국권회복의 결실로 나타나게 되어있다. 이상재는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 청년들이 이러한 역사에 동참(同參)해야한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고 믿었다.

이상재는 1907년 YMCA 1월 월례회에서 교육부 위원장 자격으로 연설을 하고, 새로 부임한 청년회학관 학감 겸 공업교사인 그레그(G. A. Gregg 具禮九)를 소개하면서 YMCA의 목적이 도덕, 체육, 지육(智育), 교제(交際)에 있음을 역설하고, “우리들은 잘 공부하여 한편으로는 나라를 위하고 한편으로는 학감의 마음에 보답한 것을 명심하여야 하며, 또 우리는 공부를 잘 하여서 우리나라 독립의 기초를 만드는 인물이 되어야 할 것”을 권면하였다.
YMCA도 1906년 1월 첫 월례 토론회에서 열띤 토론을 거쳐 나라의 최고의 발전은 법이나 다른 방법으로서가 아니라 교육에 의한다고 결의한 바 있었다. 이상재가 자강단체와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YMCA를 선택하고 그 활동을 활발히 하였던 것은 그가 회심이라는 현저한 종교적 각성을 통하여 기왕(旣往)의 사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변화된 그의 사상과 방법은 외형적 문명의 힘을 목표로 하는 사회진화론적 태도를 거부하고, 서구 문명의 근저(根底)에 흐르는 기독교의 정신적 가치와 그것을 우선(優先)으로 목표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복음 아래에서 근대시민을 육성하고자 하는 YMCA의 교육방법은 회심 후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이며, YMCA를 변화된 자신의 사상을 실현시켜줄 장소로 인식했다고 볼 수 있다.

4.1.3 이상재의 신분적 배경과 YMCA

이상재는 연동교회를 통해 신앙생활을 하였고 장로(長老)로 피택되었지만 이를 사양하고 YMCA를 통해서 보다 활발하게 활동한다. 장로를 사양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 그가 교회(敎會)보다는 YMCA라는 기독교 사회조직체에 집중적인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틀림이 없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55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이상재가 YMCA를 선택하고 교회보다 YMCA에 더 집중한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추론할 수 있다. 그것은 이상재가 개화정책의 중심부에 있던 관료출신으로 YMCA를 자신의 사회적 책무를 발휘하는 데 적당한 조직체로 여겼던 반면 한국교회를 부적당하다고 인식하였다는 것이다. 이상재는 유가(儒家)의 지식인으로 전통적 국난(國難)을 당할 때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주창함으로써 국가의 원기(元氣)를 보존하였던 사대부(士大夫)의 신분이었다. 그는 조선의 전통적인 가치체계인 도학(道學), 즉 동도(東道)가 관념적인 것에 치우쳤을 때 실학(實學)인 북학사상으로 백성들에게 보익(補益)하려 하였고, 미국의 사회체제 속에서 발견한 이상적(理想的)인 사회체제를 도입함으로 조선의 쇠망(衰亡)의 기운을 막아 사대부(士大夫)로서의 책무를 다하려 했던 인물이었다.

전통적으로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는 인의충신(仁義忠信)하며 선(善)을 즐겨 싫증내지 않고 독선기신(獨善其身)하여 연마한 도(道)를 통하여 백성에게 혜택이 미치도록 겸선천하(兼善天下)하는 유가(儒家)의 인격체(人格體)를 말한다. 사대부의 사회적 역할은 “도학(道學)을 숭상하고 인심을 바로잡으며 성현을 본받고 지치를 일으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사대부에게는 그러한 신분과 인격에 상응하는 충군(忠君) 애국(愛國)의 사회적 책무가 부여되어 있었다. 사대부의 사회적 존재 양태는 대체로 두 가지로 대별(大別)되는데, 그것은 관료로 등용되어 경세치인(經世治人)의 현장에 직접 뛰어드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후학들을 가르치거나 준엄한 비판정신으로 시대와 사회의 방향을 제시하는 철인(哲人)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능화가 한성감옥에서 기독교로 귀의한 인물들에 대해 한국의 ‘관신사회신교지시(官紳社會信敎之始)’라 하였을 때, 이것은 기독교에 입교한 이들이 관료이면서 사대부의 신분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해석이기도 했다.

이상재뿐만 아니라, 한성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던 인사들은 거의 전부 YMCA에 가입을 하여 활동을 하였는데, 이들은 민족의 현실을 직시하고 그 활로를 YMCA라는 장(場)을 통해 모색하였다. 기독교에 입교하였지만 이들에게 있어서 기독교적 신앙과 애국에 대한 사회적 책무는 결코 나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한성감옥에서 출감(出監)후 사림(士林)의 후예요 개화지식인이었던 이상재에게는 사회개혁과 함께 국권의 상실의 위기를 타개(打開)할 수 있는 효과적인 조직(組織)이 필요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은 당시 개화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인식이다. 독립협회의 활동이 좌절된 후, 개화 지식인들로서는 문명개화에 대한 사상적 목표를 이룰 수 있는 기관이 필요했다. 더구나 자신들의 활동을 정치적으로 보호해 줄 수 있는 사회 조직체에 대한 바램은 염원(念願)에 가까운 것이었다.

언더우드(H. G. Underwood)는 중국 YMCA의 총무였던 브로크만(F. S. Brock -man)에게 1899년에 “150명의 청년들이 진정서에 도장을 찍고 YMCA를 조직해 줄 것을 요청“했으며, “그 때 도장을 찍은 청년들 중 한 사람은 현재 한성부윤”이었다고 보고했다. 그는 계속된 보고에서 한국의 양반층을 기독교에 입교시키려면 YMCA밖에 없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언더우드는 서울에서 양반관료층의 입교를 위해 그들과 접촉하기도 어렵다며, 브로크만의 보고서를 빌려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언더우드 박사의 말을 통해 나는 상류 계층의 젊은이들에게 접근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내게 말하기를 어떤 고위 관료가 기독교에 접근하였는데, 그 양반은 ‘내가 기독교에 대해 알고 싶은데, 차마 교회에는 나갈 수 없으니 선교사들 중에서 한 사람이 내게 와서 기독교에 대해 잘 설명해 줄 수 없냐’고 요청해왔다는 것입니다.

드디어 그 양반은 변장을 하고 교회의 뒷문을 통해 몰래 들어와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언더우드 목사의 설교를 들었답니다. 그 때 그 양반은 바로 자기 옆에 자기 집 하인이 앉아있는 것을 발견하고 질겁을 하였답니다. 그가 만일 자기 하인에게 들켰더라면 자기는 큰 망신을 하는 것이고 위신은 크게 실추되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교회에 나갔다는 사실뿐만이 아니라 하인과 자리를 함께 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언더우드 박사는 이러한 일화를 실례로 들어 나에게 교회가 상류층 인사들에게 접근한다는 일이 무척 어렵다는 것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언더우드의 증언처럼 당시의 교회가 부서층이 나가는 조직체라는 인식은 이미 일반화되어 있었다. 선교사들로서는 전통적으로 신분질서에 대해 예민한 양반층들의 기독교 기관에 대한 요구에 대해 선교에 대한 확고한 발판을 만들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겼고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한 이유에서 YMCA의 설립은 양반층을 기독교도로 만들 수 있는 적극적인 노력이 절실하다는 것에 대한 선교사들의 공동 인식에 대한 산물(産物)이라고 볼 수 있다. 양반관료층을 기독교에 입교시키기 위한 기관이 필요했던 선교사들과, 자신들의 활동의 장(場)이 필요했던 개화지식인들의 이해가 부합되어 북미 YMCA 국제위원회는 중국 YMCA의 창설자인 라이언(D. Willard Lyon)으로 하여금 그 가능성 여부를 조사토록 하였다. 이후, 북미 국제위원회로부터 파송된 질레트(P. S. Gillett)는 1901년 배재학당 학생들로 학생YMCA를 조직하고, 1903년 10월 28일에 도시 YMCA로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의 창립총회를 개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재 및 개화 지식인들이 교회보다는 YMCA에 더욱 집중하였던 또 하나의 이유는, YMCA가 설립되는 1903년에 이미 한국 교회는 비정치적 기관일 뿐만 아니라 개인구령적(個人救靈的)인 신앙형태의 조직으로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 개화 지식인들은 사회적 책무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사회기관이 절실했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56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1901년 선교사들은 ‘그리스도 신문’을 통해 교회와 국가의 문제에 대해 다섯 가지의 원칙적인 견해를 발표했다.
이 원칙은 “목사들은 나라일과 정부 일에 간섭하지 않을 것, 교회는 나라 일을 보는 곳이 아니라는 것”과 함께 “교회는 성령의 집이요 나라 일을 보는 집이 아니므로 예배당이나 교회사택이나 교회학당에서 정치적 집회를 금지하며 특히 목사의 사택에서는 더욱 금지한다”는 내용이었다.

그것은 개인의 구원과 복음전도를 우선으로 보고 사회 운동을 부차적인 것이요 선교의 흔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는 데니스(James S. Dennis)의 선교신학이나, 성서적 개인 윤리와 종교적 규범을 통해 자립교회 형성에 초점을 두고 있는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채택했던 선교사들의 선교방법에 대한 확신이었다고 볼 수 있다. 1910년 ‘대한매일신보’는 확고한 정체성으로 자리 잡은 한국 교회의 교인들의 개인구령적 신앙형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기독교인(基督敎人)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오직 영혼(靈魂)의 구원(救援)만을 알 뿐이고, 육신(肉身)의 영욕(榮辱)과는 무관(無關)하다고 하고, 오직 천국주의(天國主義)만 알 뿐이고, 인간(人間)세상의 사업(事業)과는 무관(無關)하다고 한다. 오직 천당(天堂)과 지옥(地獄)의 화복(禍福)만을 알 뿐이고, 국가(國家)와 민족(民族)의 존망(存亡)과는 무관(無關)하다고 한다. 그런즉, 이것이 어찌 두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아아! 이 미경(迷境)에 빠진 동포(同胞)들이여! 공연히 헛되게 종교(宗敎)의 국경(國境)이 없는 편견(偏見)만을 믿지 말고, 오직 국가정신(國家精神)을 분발하여 일으켜서, 상제(上帝)의 진리(眞理)를 어기지 말고 생존(生存)의 복락(福樂)을 얻도록 힘쓸지어다.”

YMCA는 설립의 태생부터 “YMCA는 교회가 아니다”라는 선언을 분명히 함으로써 개화지식인들에게 자유로운 활동의 장(場)을 보장했다고 볼 수 있다. 헐버트(H. B. Hullbert)는 스크랜튼을 위시한 일부 선교사들이 YMCA의 사업이 “기성교회를 멀리하게 할 것이며 교회 세력을 약화시킬 우려가 있다”는 주장을 ‘큰 잘못’이라고 비판하면서 “YMCA는 교회에 유익이 되면 됐지 절대로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는 YMCA의 기능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를 하나의 역사적 사실 또는 하나의 원칙으로 받아들이게 하는데 있다”고 인식했다. 그렇지만, YMCA의 사업이 “다만 사회적, 지적, 도덕적 영향만을 끼쳐 사회개선에만 전력하고, 기독교를 순수한 생의 도리로 받아들이게 하는 데에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자기의 근본 목적을 상실한다고 할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아무런 선(善)도 이룰 수 없다”고 하여 YMCA의 목표는 반드시 기독교의 복음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이러한 헐버트의 주장은 그의 정치신학(政治神學)의 산물이었다. 그는 교회의 비정치화를 주장하는 선교사들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교회와 국가는 나눌 수 있소. 하지만 도덕과 청결, 정직과 정의, 그리고 애국심, 그 이외 기독교로 해서 생성되거나 앙양된 모든 자질들을 국가에서 떼어놓을 수는 없을 것이오. 겨울이 봄으로 옮겨가듯이, 기독교의 조용한 침묵의 발전은 세상을 바꾸어 놓을 것이오.”

헐버트에 있어 기독교는 언제 어디서나 도덕과 청결, 정직과 애국을 가르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는 더러운 위생 환경을 참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악덕의 환경을 묵과할 수 없다. 이러한 헐버트의 인식은 YMCA의 활동과 사업이 기독교의 도덕과 윤리를 기초로 한 사회계몽을 목표로 하게 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적 정체성을 지닌 YMCA야말로 사대부였던 이상재가 사회적 책무를 감당하기에 가장 적합한 조직이었고, 이는 그가 교회보다 YMCA에 보다 집중했던 이유가 되었다. 정치와 교화(敎化)의 기능을 주체적으로 담당해야 할 사대부(士大夫)의 신분적 성격과 YMCA의 성격이 서로 부합되어 이상재는 YMCA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고, 기독교 회심후의 자각한 사상을 자유롭게 발휘할 수 있었다.

4.2 YMCA에서의 이상재의 활동
4.2.1 교육부·종교부 위원장 이상재

1905년 이상재는 한국 YMCA 초대 이사 가운데 한 명이고, 영국 성서공회 대표였던 켄뮤어(A. Kenmure)의 뒤를 이어 2대 교육부 위원장이 되었다. 이때 한성감옥에서 함께 옥고를 치르고 연동교회에 함께 입적한 유성준(兪星濬)과 이원긍(李源兢)은 교육부 위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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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이상재와 이들의 교육부 활동은 결과적으로 1904년 6월에 설립되었던 ‘국민교육회’ 활동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YMCA의 교육사업은 당시의 열악한 교육환경을 개선하는 것에 대해 적극적일 수밖에 없는데, 헐버트는 1904년 현재 “서울에는 7, 8개의 초등학교가 있는데, 생도는 각 학교당 약 40명씩이었다.

그런데, 20만 서울 인구 중 적어도 6,000명은 되어야 하는데 500명도 되지 않고 있었다. 중등학교가 있지만 8명의 교사와 약 30명의 생도가 있을 뿐이며, 20명 내지 80명의 생도가 있는 외국어학교가 몇 개 있지만 이것은 국민 교육기관이라 할 수 없었다.”고 증언한다.
YMCA의 교육은 이러할 때 시작한 것이다. YMCA의 교육사업은 1904년 가을부터 시작되었지만 이상재가 교육부 위원장으로 취임하면서부터 본격화되었다. 이상재는 외국인 간사의 간섭 없이 독자적으로 교육사업을 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한때 외국인으로 구성된 자문 위원회(Advisory Committee)에 참석하는 것까지 거부하기도 하였다.이와 같은 이상재의 행동은 문명인으로서의 자부심과 그 자신이 교육전문가라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이상재는 교육전문가로서 풍부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1895년 2월2일 갑오경장 시 교육조칙을 발표하여 근대 교육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때, 이상재는 이러한 근대 교육개혁 법안에 실무자로 참여하였다. 그는 학무아문(學務衙門)의 참의(參議)로서 한글 교과서 편찬사업을 주도하였고, 한성사범학교, 소학교, 외국어학교 등 근대식 학교의 법적 토대를 마련하고 이를 설립하는 데에도 실무를 담당하였었다.

이상재는 이때의 경험을 살려 근대적인 교육방법을 택하였다. 다만 차이가 있는 것은 YMCA의 교육은 국가 주도로 이루어지는 개혁의 방식이 아니라, 기독교 조직체인 YMCA의 사회계몽의 형식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형상, 즉 이마고 데이(Imago Dei)의 형성의 목적 아래서 행해지는 근대시민 교육이다.
헐버트는 YMCA의 교육부가 청년들을 위해 이들이 한번도 접하지 못한 서구의 근대교육을 제공하게 될 것이라고 자신했지만, 초창기에는 교과서도 마련되지 않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재의 주도적인 노력으로 1907년에 가서는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된다. 이상재는 한국인과 일본인, 중국인, 미국인, 캐나다인 등 12명의 교사를 확보하여 청년들을 지도하게 하였고, YMCA 교육부의 학제와 학과정을 개편하여 2년제의 보통과와 일어 특별과, 3년제의 영어 특별과를 두어 초급과정부터 고급과정에 이르는 교육과정을 두었다. 또한, 실업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YMCA 국제위원회의 산업 교육부의 전문가로 일했던 그레그(George A. Gregg)를 초청하였다.

이 때 352명의 학생들이 등록하여 활기를 찾고 있었다.
그가 실업교육을 강화했던 것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전통적 신분관을 타파(打破)하려는 그의 의지였으며, 전통적으로 정신문명에만 치우친 것을 바로 잡아 전인교육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이상재는 교육 강연에도 역점을 두었다. 이상재의 활동에 대해 그레그는 “YMCA의 강연회와 토론회가 미국을 포함한 다른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 이라며 “토론회 37회, 강연회 83회에 매번 300 내지 400명의 시민들이 강당을 채웠다”고 보고하였다. 이 강연의 내용은 한국인들의 정신적 계몽을 위한 것들로서, 이상재는 기독교의 도덕력 아래에서 개인의 심성(心性)을 개발하여 한국인들에게 근대적 책임 시민의식을 함양시키고자 하였다.
이상재가 실업교육과 함께 시민들의 정신교육에 열의를 다했던 것은 미국의 사회체제를 통해 확인했던 시민사회의 힘을 한국 사회가 받아들여야 한다는 인식에서였다. 그것은 전인교육(全人敎育)을 통해서 인간화의 실현, 인간의 도덕적·정신적·사회적 향상을 꾀할 수 있다는 것과, 자신이 꿈꾸던, 장차 오게 될 객관적 도덕이 중심이 되는 유기체적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장차 보여 질 하나님 나라는 정신문명과 함께 물질문명이 어느 한 쪽의 치우침이 없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1908년 이상재는 종교부 총무에 취임하였다. YMCA의 종교활동은 대원군의 외손자인 조남복이 일주일에 두 차례씩 성경반을 인도하는 등 성경반을 운영하거나 종교 집회를 개최하는 방식이었는데, 1907년 12월 3일 YMCA회관이 건립되고 이상재가 종교부 총무로 취임하면서 조직적으로 더욱 강화되었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58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이상재는 성경 연구의 지도자로도 활약했는데, 그레그는 이때의 “이상재의 유일한 야심은 교회와 YMCA 안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예수를 섬기는데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레그의 증언처럼 YMCA의 종교부 활동은 활기를 띠어 1908년에만 성경공부에 628명의 학생이 등록을 하였고, 46회의 전도집회에 연인원 18,443명의 사람들이 참석하였다. 또한, 1910년에는 소년 사경반이 설립되어 주일 낮 소년 사경반에는 300명 내지 400명의 학생들이 성경을 공부하였고, 1911년에는 회관 밖에 설립되어 운영된 장년 사경반이 통산 1,144회 개최에 연 27,092명이 등록하여 공부를 하고 있었다. 1911년 9월에서 1912년 9월까지 97,724명이 사경반 활동을 하였는데, 어떤 날은 전도집회에서 54명이 입신(入信)하기도 하였다. 참고로 1909년 한해 동안의 종교부 활동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상재는 특히 성경 공부에 집중적인 열의를 보이고 있었으며, 이상재의 활약으로 1909년에 기독교 신자가 되고자 작정한 사람이 306명이고 성경반에 새롭게 가입한 사람은 337명이었다.
이상재가 YMCA를 통해 교육과 성서에 집중한 것은 한국 근대화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은 성서(聖書)에 기초한 기독교의 정의와 도덕의 함양, 합리성을 중시하는 의식화된 시민을 양성함으로써 일본의 ‘천황제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항할 수 있는 이념과 동력을 일본에 앞서서 배양(培養)했다는 것이다. 일본 근대 교육의 기본정신은 ‘천황은 신성해서 범할 수 없는 존재’라고 전제한, 1889년에 공포된 ‘대일본제국헌법(大日本帝國憲法)’의 정신과 1890년에 공포된 ‘교육칙어(敎育勅語)’로 천황을 중심으로 한 국가체제 형성과 나라에 충성함에 앞서 천황에 충성을 강조하는 교육정신이었다.
1910년 8월 22일 한국을 강제로 병합한 일본은 1911년 8월에 칙령(勅令)에 의해 ‘조선교육령’을 공포한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 1905년부터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칙령(勅令)에 의하면, 조선에 있어서 교육의 목적은 천황에 대한 ‘충성된 국민의 육성’이고, 이를 위해서는 ‘보통의 지식기능’을 ‘시세민도(時世民度)’에 맞추어 가르칠 것을 전제로 한다. 이것은 한국인들에게 ‘황도정신(皇道精神)’을 알게 하여 국가 체제 형성과 나라에 충성함에 앞서 천황에 충성을 강요하는 교육정신 바로 그것이었다.

사실 기독교는 하나님 앞에 인간이 갖는 모든 인습과 제도 그리고 인간관과 사회관을 검토하고 심판하며, 소속 교인들의 삶과 행동 지향성을 기독교적으로 규제·훈련시키는 구조를 갖고 있다. 종교적 신앙의 경건, 신실, 공평한 처리, 인내, 친절, 책임감, 이런 윤리적 근원의 가치는 기독교 밖에는 형성될 수 없었다.
YMCA의 교육은 바로 그러한 구조 아래서 인간의 삶과 행동이 기독교적 정의와 도덕의 내에서 행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YMCA의 교육과 활동은 그 자체가 황도정신(皇道精神)을 목적으로 하는 일본의 교육과 대립된다. 천황제 지배 이데올로기의 개념은 천황이 일본 민족의 가부장(家父長)인 동시에 군주(君主)이며 일본의 신민(臣民)은 이 가부장의 자식이라는 것에서 시작한다. 또한, 천황에 대한 무조건의 충효심(忠孝心)을 주장하고 천황의 절대적 권위를 정당화한다. 천황제 아래의 애국은 모든 사회 구성원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고 천황(天皇)에 대한 충군(忠君)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제도 하에서의 개인은 천황이라는 집합적인 개인의 안녕을 위한 것으로 인식되며 변치 않는 충성이 ‘최고의 선(善)’이 된다.

YMCA의 교육의 구조는 인간 사이에 초월적(超越的) 실재(實在)에 의한 범 수평적 관계가 있음을 일깨워주어 의식화한 ‘인간평등의 시민의식’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구조이다. 기독교적 전통 아래에 있던 YMCA의 교육은 다른 사람의 존엄성 자체를 제한하는 일본의 방식이 아니라, 자신에게 책임을 부여하는 역할로서 이해되었다.

다시 말해, 개인의 존엄성과 한계를 설정하고 그만큼 사회를 존중하는 성서적, 공화적 전통을 규정하고 있다. 자신 스스로 생각하며 판단하고 결정하는 권리, 자신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삶을 살 권리를 위협하는 것은 모두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일 뿐 아니라, 결국은 절대적인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성모독이 된다. 하나님의 초월성(超越性)이 기준이 될 때, 인간이 만든 모든 문화적 전통, 사회적 역할 구조, 신분관계, 관습과 제도, 그리고 그 어떤 것도 절대시 될 수 없다. 따라서 천황의 신성(神性)은 ‘야훼 하나님’에 대한 절대신앙에 상대화(相對化)되는 것으로 용납될 수 없었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59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이상재의 YMCA의 교육은 일본의 근대 교육방식에 앞서 성서(聖書)에 기초한 근대 교육으로 한국 사회를 선점(先占)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것은 민족에게 천부적 인권과 한국 사회에 기독교의 정의와 도덕, 합리성이 기초가 되는 공공선(公共善)을 제시함으로 자동적(自動的)으로 ‘천황제 지배이데올로기’가 추구하는 ‘최고의 선’과 대립되었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일본은 항상 YMCA의 교육과 활동을 통해 의식화되는 지식인들을 감독하고 탄압하지 않을 수 없었다.

4.2.2 유신회(維新會) 음모와 이상재

1913년 한국 YMCA는 가입회원이 1,500여 명, 유지회원(維持會員)이 3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렇게 한국 YMCA의 회원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그 활동을 확대해 나가자 YMCA를 치외법권(治外法權) 지역으로, 민족운동의 산실(産室)로 인식했던 일본정부는 친일단체인 유신회(維新會)로 하여금 한국 YMCA를 일본 YMCA에 예속시키려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음모의 배후에는 일본정부가 한국의 YMCA를 장악하려는 정치적 사주가 있었으며, 이는 일본의 기독교가 국수주의적 기독교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강제병합 초기 일본은 서울의 한복판에서 국권회복과 독립이라는 절대명제 하에서 활동하며 회원 수를 늘여가는 YMCA를 묵과 할 수 없었다.

당시 한국 YMCA는 강제병합 이후 한국인들의 정치·사회활동이 금지되어 있던 상황 아래서 유일하게 활동할 수 있는 장소였다. 더구나 YMCA는 이미 국제적인 기관으로 자리잡았고 선교사들의 치외법권(治外法權) 하에 자유롭게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으로서는 이를 장악하기 위한 획책(劃策)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은 한국 YMCA의 자립과 자치라는 명목 아래 중국과 홍콩 YMCA와 연대해 있던 한국 YMCA를 분리시켜 일본 YMCA의 산하로 들어가게 하고, 이사(理事)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외국인을 친일적인 한국인으로 교체하려 하였다.

한국 YMCA는 창립될 때부터 YMCA 세계연맹(The World Alliance of YMCAs)에는 가입되지 못하였지만, 중국과 홍콩의 YMCA와 함께 같은 전체위원회(General Committee of China, Korea and Hong Kong)에 속해 국제적으로 보호받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 자신의 의도대로 한국 YMCA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911년 일본은 먼저 모트(J. R. Mott)에게 종용하여 한국 YMCA가 중국과 홍콩 YMCA의 전체위원회로부터 분리하도록 한편 한국 YMCA가 일본의 산하로 들어가도록 하였다. 모트는 “한국 YMCA 이사회를 한국인, 서양인, 일본인 각각 3분의 1씩을 구성할 수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하며 중국 YMCA 총무를 하고 있던 브로크만(F. S. Brockman)으로 하여금 한국 YMCA를 중국, 홍콩 전체위원회에서 탈퇴시켜 독립시키고 일본 YMCA 산하에 두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회장인 제르딘(J. L. Gerdine)과 총무 질레트 등 한국 YMCA의 위원들이 이에 강력히 반대하자 일본은 1912년 말, 한국 YMCA의 회원 중 친일 한국인이었던 사일환(史一煥)과 부총무이며 이완용의 심복이었던 김인(金麟), 한국 조합교회(組合敎會)의 차학연을 중심으로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고 이들로 하여금 한국 YMCA를 장악하게 하려는 음모를 계획했다.

1913년 1월 20일 유신회 회장 사일환은 자신의 명의로 한국 YMCA가 일본 YMCA의 산하(傘下)에 들어가는 것과, 외국인 이사를 한국인들로 교체하는 것, ‘황성기독교청년회’를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의 개칭(改稱)을 골자로 하는 건의안(建議案)을 제출하였다. 이에 일본정부는 기관지인 ‘매일신보’를 통해 이들을 적극적(積極的)으로 지지하며 자신들의 입장을 드러내었다.

1913년 2월 21일 한국YMCA 이사회가 김인을 파면조치하고, 이상재의 주도 아래 2월 27일에 긴급회원대회를 열어 김인의 파면조치를 지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유신회(維新會) 회원들과 총독부 관리들은 한국 YMCA에 찾아와 노골적인 폭력행위와 위협을 가하며 회장 제르딘과 총무 질레트의 사임을 요구하는 한편, 교육부 위원장이었던 이상재를 4만원이라는 거액으로 매수하려 하였다.
김인(金麟)은 한국은 이미 “일본제국의 일부가 된 이상 일선인(日鮮人)의 융합과 친화(親和)를 위해 한국 YMCA가 일본 YMCA와 유대(紐帶)를 가져야 된다”며, 한국 YMCA는 유신회에서 건의한 것을 속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을 계속하였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60>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또한, 사일환은 모트에게 서신(書信)을 보내어 한국 YMCA를 일본 YMCA에 예속시킬 것을 요구하고 김인의 파면이 불법이라고 주장하였다. 일본의 집요한 요구를 수용하였던 모트의 중재에 따라 한국 YMCA는 이상재와 언더우드, 에비슨(O. R. Avison), 남궁억, 신흥우를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YMCA의 이부카(井深梶之助)를 비롯한 5인의 대표와 3일 동안 회집(會集)하여 4월 12일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를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朝鮮中央基督敎靑年會)’로 개칭하고, 일본 YMCA의 산하에 들어가는 6개 조항의 합의를 보았다. 그렇지만, “한국 YMCA는 일본 YMCA 동맹과 미국 기독교 청년회 연맹과 미국 학생 청년회(World's Student Christian Federation)로 더불어 연락(聯絡)케 한다”는 내용을 삽입함으로써 완전히 일본 YMCA에 예속(隸屬)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신회(維新會)는 헌장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하며 이사회 전원을 새로 선출해야한다는 것과, 이사(理事)는 국제위원회의 인준(認准)을 받아야 된다는 받아야 된다는 조항을 삭제할 것을 계속 주장하였다.

1913년 6월 2일의 정기총회에서는 계속된 유신회(維新會)의 요구를 투표로 결정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유신회(維新會)의 예상과는 달리 헌장은 한국 YMCA의 개정안이 채택되었고 이사(理事)들도 신흥우, 언더우드 등 기존의 이사 7명과 새로인 에비슨, 남궁억 등 5인의 이사가 선임되어 미국인과 한국인 12명의 이사가 선출되었다. 이로써 일본인과 한국인을 이사로 하자는 유신회안(維新會案)은 부결(否決)되었고, 모트가 주장한 서양인과 한국인, 일본인 각 4명씩으로 이사회(理事會)를 구성하자는 모트의 중재안도 무시되었다. 결국, 회장 제르딘과 총무인 질레트가 한국을 떠나게 되고, 한국 YMCA는 일본 YMCA의 산하(傘下)에 속하게 되었지만 이를 계기로 일본의 재정지원을 거절하는 등, 일본에 저항하는 민족 YMCA로서 한국인에 의해 경영(經營)되는 독자성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유신회(維新會)의 ‘한국 YMCA 장악 음모’에서 우리가 간과(看過)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기독교는 본래 강력한 세계주의가 특성임에도 불구하고, 왜 이상재나 한국 YMCA가 일본 YMCA 산하에 들어가는 것을 한사코 거부했을까 하는 문제이다. 또한, 왜 일본의 기독교는 한국 YMCA의 독립성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을까 하는 문제도 제기될 수 있다. 물론, 일본으로부터 독립성을 확보하려는 민족적 저항(抵抗)과 함께 일본기독교의 정체성(正體性)을 알아야 그 의문이 풀릴 수 있다.
1911년 8월 일본의 경성YMCA는 29명의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을 동경(東京)에 초청하였다. 일본을 돌아보고 돌아온 이상재는 감상을 묻는 경성 YMCA 임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일본을 비판하였다.

“나는 내지(內地, 일본)에 가서 물질문명(物質文明)이 진보(進步)한 데 대해 감탄했다. 이것은 내가 외국(外國, 미국)에 있을 때에도 느낀 것이지만, 외국에서는 이에 더하여 정신문명도 병행하고 있었으나 내지(內地)에서는 정신문명이 물질문명에 수반되지 않음을 느꼈다. 이것은 내가 깊은 사랑을 가지고 말하는 것인데, 일본인은 물질문명을 신(神)으로 생각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상재는 천황제 이데올로기 아래 전개된 일본의 근대문명에는 정신문명이 없다고 판단했다. 이것은 일본이 신격화하는 일본의 천황과 그 체제에는 도덕적인 가치체계가 없다는 것과, 일본의 근대문명이 외형적 힘의 문명만을 추구한다는 날카로운 분석이었다. 또한, 그것은 일본의 천황제의 중심체계는 힘의 논리를 중심으로 하는 비도덕적 체제라는 신랄한 비판이기도 했다. 도덕적 완성도를 가지고 일본을 바라볼 때, 일본은 하나님이 없는 사회였다. 일본은 1868년 명치유신(明治維新)을 단행하면서 국가 권력의 중앙집권화와 ‘부국강병(富國强兵)’을 모토로 하는 ‘문명개화’를 위한 정치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명치정부(明治政府)의 근대화 프로그램은 어떤 구체적인 이론적 기반이나 세밀한 계획이 없었고 단지 서구식 모델을 흉내 내는 피상적인 정책들이었다. 초기 명치정부는 서구의 문명화를 선택적으로 수용하였다. 이들은 주로 서구의 물질문명, 산업, 기술, 무기와 ‘노하우(know-how)’만을 수용하였고 서구의 정치적·사회적 사고(思考)나 이론적 체계는 최소한으로 줄여서 수용하였다. 이 때, 일본의 대표적인 사회진화론자이며 명치천황을 시독(侍讀)하였던 카토 히로유키(加藤弘之)는 자신의 독특한 이론으로 명치정부에 근대화 정책의 이론적 틀을 제공하였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61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그의 이론은 저서인 ‘인권신설(人勸新說)’과 ‘강자(强者)의 경쟁(競爭)과 권리(權利)’에 잘 나타나 있다. 카토(加藤)는 자연도태의 법칙은 인간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조물주에게서 동일한 자유, 자치, 평등한 권리를 갖고 있다는 천부인권론을 비판하였다. 인권이라는 것은 망상이며 천부인권론은 실리(實理)의 발전을 저해하고 사회의 진보를 방해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한, 강자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개인 간의 자유나 평등을 요구하는 것은 자연의 법칙을 거역하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 도덕과 법은 하나의 사회적 유기체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서는 필요하고 유용한 수단이지만, 사회적 유기체와 다른 사회적 유기체 사이에는 단지 강자의 권리만이 유효하기 때문에 도덕이나 법이 결코 필요치 않다고 보았다. 따라서 국가나 오로지 자신의 이익과 힘만을 생각하는 것은 비도덕적이거나 비합법적인 것이 아니고 자연스럽고 필수적인 것이라는 주장을 서슴지 않았다.

이상재는 1911년의 명치천황(明治天皇) 아래에서 이룩했던 근대문명의 정체(正體)를 정확하게 인식했다. 그런데, 일본 기독교의 주류는 1907년 ‘종교개조(宗敎個條)’를 채택하여 천황과 국가권력에 대한 충성을 확약(確約)하고 있었다. 1905년 4월 파리에서 열린 세계기독학생 청년연맹대회와 5월에 네덜란드에서 열린 세계 YMCA대회에 혼다(本多庸一)와 1913년 이상재 일행과 6개 조항의 합의를 보았을 때 일본 YMCA의 대표자이기도 하였던 이부카(井探梶之助)는 러일전쟁이 일본의 ‘의전(義戰)’이었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일본의 기독교 주류였던 조합교회는 1910년의 한일 강제병합에 대해 일본근대문명의 승리로 축하하며 한국을 문화적 열등국으로 보는 것을 당연시하였다. ‘신인(新人)’을 창간했던 조합교회의 목사 에비나단조(海老名彈正)는 다음과 같이 축하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조선은 원래 훌륭한 독립국으로서 세계의 표면에 나타난 적이 없다. 이 예속적 국민이 불기독립(不羈獨立)의 대국민(大國民)이 될 수 있음은 즉 일대(一大) 진화(進化)가 아니고 무엇인가. 더욱이 조선과 같은 국민은 여기서 일대(一大) 비극(悲劇)을 경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조선국(朝鮮國)이라는 존재를 잊어버려야 한다. 이것은 비극임에 틀림없으나 이 비극을 경과하지 않고서는 일국민(一國民)이 될 수 없다 .…(중략)… 만일 일인(日人)이 형(兄)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한인(韓人)이 동생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면 대일본제국의 장래는 아침해가 동천(東天)에 오르듯이 될 것이다. 그리고 한인(韓人)은 이 대광영(大光榮)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인도(人道)의 이름으로 하나님 나라의 이름으로 일한(日韓)의 합병을 구가하는 바이다.”

일본이 세계일등국으로 당연한 병합의 권리를 가졌다는 일본기독교의 이러한 오만과 독선은 일본의 주류였던 조합교회뿐만이 아닌 일본 YMCA의 일반적 태도였다. 일본의 YMCA가 반기독교적인 일본의 체제와 외형적인 힘의 문명을 오히려 애호(愛好)하는 것은 이상재로서는 용인할 수 없는 것이었다. 기독교의 중심이 하나님 나라이고 그 가시적 예표가 도덕이라고 인식하는 그로서는, 타국(他國)과의 전쟁을 정당화하고 하나님이 각개인과 각국(各國)마다 품부(稟賦)하신 타국(他國)의 국권(國權)을 침탈(侵奪)하고서도 자랑스러워하는 일본의 황도적(皇道的) 기독교는 진정한 기독교라 할 수 없었다. 기독교적인 도덕이라는 것은 인간의 존엄과 자율성에 분명한 한계를 두어 개인의 권리와 자율을 존중하는 것이며 개인뿐만이 아니라 각 국가에도 해당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상재가 일본의 YMCA를 거부했던 것은 일본에 저항하려는 민족의 본래적 사고(思考)와 함께 일본 YMCA의 이러한 반기독교적인 세계성의 태도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유신회 음모사건 이후 한국 YMCA의 총무가 되었을 때 총독부로부터 매년 1만원씩의 재정후원을 거절한 것도 한국 YMCA의 독립성을 과시하며 일본 YMCA와의 차별성을 강조하려는 그의 기독교적 정체성의 인식에서 이해될 수 있다.

4.2.3 한국 YMCA총무 이상재

1913년 총회 후 한국 YMCA는 이상재를 질레트의 후임으로 조선 중앙 기독교 청년회 2대 총무로 선임했다. 이는 한국 YMCA를 일본화하려 했던 일본의 계획이 좌절되었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한국 YMCA가 민족적 독자성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상재는 한국 YMCA가 법적으로는 일본 YCMA의 산하에 있었지만 그 활동에 보장을 받기 위해 두 가지 일을 실행하였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62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그것은 한국 YMCA가 재정적으로 독립하는 것이었으며, 일본 YMCA와의 협약 중 한국 YMCA의 운영의 통할권을 한국 YMCA가 선출한 ‘3년 대회(Triennial Convention)’의 대표들 중에서 구성된 연합위원회(General Committee)가 보유한다는 조건대로 ‘연합 위원회’를 구성하는 일이었다.
일단, 이상재는 매년 일본으로부터 받던 재정지원을 거절하였다. 그리고 한국 YMCA의 독자적 생존을 위한 재정자립의 기반과 구조를 확립하였다.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일본의 보조금 1만원은 전체 예산에 약 30%에 해당하는 금액이었기 때문이다.

이상재는 먼저 공업부 사업을 활성화하였다. 일본의 간섭을 받지 않기 위해 재정적으로 독립해야 한다는 이상재의 의지에 따라 청년회를 사수(死守)하려는 회원들의 열심은 더해갔다. 먼저 수입(收入)을 늘릴 수 있는 공업부의 사업이 강화되었는데, YMCA가 직접 주문을 받아서 학교·병원·회사·가정 등에 가구를 만들어다 팔았으며, 풍금·기계 등을 수선하고, 구두 배달이나 인쇄 출판, 사진 촬영과 현상, 환등과 슬라이드 제작 등을 하며 YMCA의 수입을 늘렸다.
또한, 신축 중이었던 공업부 건물과 건조기 속에 들어가서 직접 파이프 공사나 전기 공사도 하였다.

그리고 일본 총독부가 경평선(京平線) 건설을 위해 미쯔이(三井)에 발주할 때 그 설비를 담당하여 수입을 올렸고, 연희전문학교가 1915년 4월 YMCA회관을 빌어서 개교할 때, 피어선 기념 성경학교의 설비 시공, 협성신학교의 설비 시공을 하여 전기(轉記) 2개교에서만 4,000원의 수입을 올렸다. 1914년 12월에는 공업관이 완공되어 공업부는 YMCA의 자립에 중추가 되는 역할을 계속할 수 있게 된다.
이상재는 지출을 줄여 재정의 독립을 꾀하였다. 인건비를 60% 이상 줄였고, 기타 용품비나 잡비를 40% 이상 줄였다. 또한 체육활동도 70%나 줄여야 했다.
그런데, 종교부와 친접부의 예산은 오히려 늘어나고 있었다. 종교부 예산은 약 140% 늘어난 1,737원이었고 친접부 예산은 약 170% 늘어난 1,043원이었다.
이것은 한국 YMCA의 자립을 위해 긴축재정을 꾀하면서도 YMCA 본래의 기독교적인 목표와 자신의 기독교적 이상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그의 의지였다.

이상재의 자립 의지는 내외에 큰 호응을 일으켜 한국 YMCA는 재정적 위기를 극복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일본의 총독부 보조금 대신에 기부금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1914년의 기부금은 1912년에 비해 6배 가량 늘어난 9,112원에 달하였다. 이상재는 재정의 자립뿐만이 아니라, 한국 YMCA가 민족적인 독립성과 독자성을 갖도록 하는 데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국 YMCA가 독자성을 갖게 되는 증거는 1914년에 채택된 ‘한국기독교청년회연합회’ 헌장을 통해 알 수 있다.

1914년 4월 2일부터 3일 동안 개성의 한영서원에서는 중앙 YMCA, 동경 YMCA, 8개의 YMCA를 합한 10개의 YMCA가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를 조직하기 위하여 ‘3년 대회(Triennial Convention)’가 열렸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전체 8장 24절로 편성된 ‘한국 기독교청년회 연합회’ 헌장이 채택되었다.

이 헌장에서 특기할 만한 사항은 먼저, 15명으로 구성되는 연합 위원회가 각 청년회에 대하여 “사업구역(事業區域)의 한계(限界)를 정(定)”하는 일과 “충고양조(忠告襄助)?며 대체상(大體上) 감독(監督)”하는 권한을 행사할 수 있도록 천명함으로써 일본 YMCA의 관여를 원천적으로 봉쇄하였다.
둘째, 3조 2항에 의거하여 정회원의 자격을 “완전선미(完全善美)? 복음주의(福音主義)의 교회원(敎會員)에게만 적용(適用)하며 ?? 투표권(投票權)과 피선권(被選勸)은 정회원(正會員)에 한?. 복음주의(福音主義)의 교회(敎會)라 ?은 성경(聖經)을 신여행(信與行)의 완전(完全)? 표준(標準)으로 채용(採用)하여 야소기독(耶?基督)을 신성(神聖) 유일(唯一)의 구주(救主)로 신(信) 교회(敎會)를 지명(指命)함”으로써 YMCA의 활동이 복음주의(福音主義)를 중심으로 했던 당시의 교회의 사회적 연장선상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이것은 YMCA의 기독교적 정체성이 복음주의의 영역 내에 있음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셋째, 헌장의 1장 2조의 2항과 제 2조의 3항에 명시한 것처럼 “한국 YMCA는 도시인이나 지식인뿐만이 아니라, 한국 민족 전체 계급을 범위”로 설정함으로써 초기의 양반관료의 상류층이 중심이 되었던 YMCA의 계층적 특성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63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전술(前述)한 대로 이상재는 한국 YMCA가 ‘한국기독교청년회연합회’의 15인 위원회에게 한국 YMCA의 감독권을 부여하도록 함으로써 일본 YMCA의 실질적인 간섭을 원천 봉쇄하였다. 그것은 1923년에 일본 YMCA와 결별하고 세계 YMCA 연맹에 가맹할 때까지 독립성을 유지하도록 한 것이었다. 헌장(憲章)의 3조 2항은 회원을 복음주의자에 한정시킴으로서 한국 YMCA가 복음주의의 사회적 연장선상에 있음을 선포했다. 그러나, 이상재와 이상재 이후의 한국 YMCA를 주도했던, 후일 ‘흥업구락부’에 관여한 인물들을 복음주의자라 할 수 없으며, 이들이 한국 YMCA를 복음주의의 실현의 장(場)으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민경배는 한국교회의 신앙 유형을 한마디로 복음주의적 교회라고 단언한다. 이상재도 이미 당시의 교회가 사회참여보다는 개인구령(個人救靈)을 보다 강조하는 복음주의의 장(場)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이상재 자신에게서는 개인구령(個人救靈)을 우선하는 모습이 크게 엿보이지 않는다. 또한, 이상재 후임이었던 윤치호나 신흥우를 비롯한 YMCA의 주도세력에게서도 한국교회와 같은 형태의 신앙이 활동 중심에 선명히 나타나지 않는다.
이상재는 개인구령적인 초월성에 대한 관심보다는 한국이라는 현실과 역사를 변화시키는, 즉 일제하라는 현실과 역사를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큰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그는 기독교의 도덕적 중심이 병든 세계를 치유하고 약한 자나 약소국에 자유와 권리를 가져다주는 역사변혁의 에너지를 갖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다시 말해, 이상재는 하나님이 역사 전체에 대한 주권을 갖고 계시고 역사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전개된다고 보고 있다.
즉 이상재에 있어 하나님은 역사의 궁극적 주재자요 역사의 중심이며 역사를 변화시키시는 분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일제치하라는 현실적 절망과 시련, 고난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주재이신 하나님을 믿으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의의 승리와 그의 통치를 믿는다.

여기에서 이상재가 기대하는 것은 현재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장차 보여질 것이요, 지금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세계였다. 미래의 세계는 모든 인간들의 질시(嫉視)는 사랑으로 탐욕(貪慾)은 청심(淸心)으로, 강퍅(剛愎)은 온유(溫柔), 교만(驕慢)은 겸양(謙讓)으로 이기(利己)는 조타(助他)고, 사감(私憾)은 정의(正義)로 대응하여 변화하여 전란(戰亂)이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되어 평화를 누리고자 아니하여도 평화를 누리지 않을 수 없는 세계이다.
이상재의 이러한 기대감은 종말론적인 것으로서, 장차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는 세계는 궁극적으로 초월적인 것과 지상적인 것이 통합되어서 완성될 세계이며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충만한 완전한 세계이다. 이상재는 이러한 세계를 하나님 나라라고 인식했다. 이러한 인식은 그가 복음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준다.

이상재가 한국교회의 복음주의적 성격과 다른 신앙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1920년 9월에 감리교회의 양주삼과의 제사논쟁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1920년 9월 1일자 동아일보는 경북 영주군 문정리에 사는 권성화(權聖華)의 부인 박씨가 기독교인 남편이 돌아가신 어머니의 제사를 폐하자 이에 비관하여 자살한 사건을 크게 보도하였다. 동시에 동아일보는 이 사건의 기사 바로 옆에 이 사건을 강하게 비판하는 이상재의 글을 함께 실었다. 이상재의 글의 골자(骨子)는 신주(神主)앞에서 길흉화복(吉凶禍福)을 빌지 않는다면, 부모에게 드리는 제사가 우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자신도 기독교인으로 우상숭배는 반대한다고 피력하며 죽은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식은 효성의 표현으로 반대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또한 그것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가르침이기도 하다는 주장이었다.

종교교회의 양주삼 목사는 이상재를 비판하여 조상제사의 풍습은 미신적 풍속이요 의식적(意識的) 도덕이라고 주장하며 언젠가 사라질 풍습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이상재는 동아일보 9월 5일자에 “제사를 지내고 안 지내는 것은 각자의 신앙관에 맡기라”는 글을 실어 더 이상 논쟁할 뜻이 없음을 밝혔다. 이 사건은 1920년의 한국사회에 파문을 일으켰고 한국 교회와 선교사들 사이에 이상재에 대한 책벌 논의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상재는 기독교의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로 보았고 도덕과 윤리를 그 매체로 보았기 때문에 우상숭배의 의도(意圖)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제사문제는 지엽적인 문제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러한 이상재의 신앙적 태도는 분명히 복음주의 전통을 표방하는 한국교회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다.
헌장 3조 2항을 통해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선교사들이 한국 YMCA를 복음주의와 연계하여 인식했던 것과는 달리, 이상재와 이상재 이후의 한국 YMCA의 주도세력은 YMCA의 기독교적인 활동을 한국 교회의 것과 일정한 차이를 두고 전개하였다. 그것은 이상재의 YMCA가 선교사들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으로 활동을 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64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이상재 총무시절, 긴축재정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종교부 예산이 70% 이상 늘어난 것에서 암시되었듯이 이상재는 종교부의 활동을 오히려 강화시키고 있다.
이상재는 1914년 6월부터 1915년 5월까지 1년간 종교부 통계를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이 통계에 나타나듯이 이상재가 보다 중심을 두었던 것은 성경공부였다.
그러나, 그것은 부흥회적 경건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그 목적은 청년들로 하여금 기독교가 갖고 있는 도덕심과 생활의 변화를 유도하는 의식화(意識化) 작업이었다.
이상재는 한국 YMCA의 종교부 활동을 개인구원이 아닌 청년(靑年)의 도덕심(道德心)을 양성(養成) 목적에 두었다. 그리고 신앙은 믿는 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믿는 바를 사회에 실행해야 완전한 믿음에 이른다고 인식하였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는 방법이었다. 이상재의 그러한 인식은 한국 교회와 한국 YMCA의 신학과 활동의 영역이 다르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상재는 신민회나 기타 자강단체와 일정하게 거리를 유지하면서 한국 YMCA를 운영해 나가고 있었다.
그는 YMCA의 회원들이 직접적으로 정치활동을 할 때는 YMCA 밖에서 하도록 하여 한국 YMCA를 비정치화의 장(場)으로 고집하였다. 그렇지만, 그의 YMCA의 활동은 교회와도 일정하게 구별된다. 그는 당시의 한국교회와 달리 사회정의와 능동적인 도덕적 생활을 보다 많이 강조했다.
그것은 한국 YMCA를 통하여 기독교적인 도덕심으로 하는 공공선(公共善)을 제시하게 하여 ‘한국’이라는 민족 공동체를 기독화 하겠다는 의지 아래에서 이루어진 활동이다. 신앙의 외연(外延) 현상으로 사회적 도덕을 발휘했던 초기 한국 기독교의 신학과는 달리, 공공선(公共善)에 의한 도덕이 중심이 되는 신학(神學)은 사대부 양반관료 출신의 기독교인들이 갖게 되는 전형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대부의 전력(轉歷)을 갖고 있는 그들로서는 기독교의 외적(外的)인 사회적 책무가 기독교의 중심적 활동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미국으로부터 들어온 복음주의는 본래 개인윤리와 사회윤리가 나뉘어 있지 않았다.
미국은 종교와 개인적인 자유가 긴밀히 결합되어 개인의 자유가 사회적 평등으로 확대 발전한 특성을 갖고 있었다. 복음주의는 그러한 체제하에서 정교(政敎)를 분리하였지만 개인과 사회를 나누고 있지 않았다. 한국 교회는 1907년 평양 대각성을 계기로 비정치화를 선언하여 교회를 정치세력화 하려던 민족주의자들을 정화한 이후 개인구원을 보다 더 강조하게 되었다.

그런데, 개인구원에 역점을 둔 나머지 초기 선교 때의 사회 개혁의 동력으로 작용되었던 회심적 신앙이 갖고 있는 외연(外延)의 신앙을 소홀히 하고 있었다.
이상재의 YMCA가 갖는 중요한 민족적 독자성의 또 한가지는 한국 YMCA가 양반 관료층과 지식인들의 조직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전체 민족의 다양한 계층에게 그 장(場)을 열어놓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상재의 의도였다고 볼 수 있다.
1914년 이상재는 공업부 건물을 완성시키고 체육관 증축을 끝냈다. 목공 및 철공 등 실업교육을 강화하였고, 학관(學官)을 통한 외국어 교육을 활성화시켰으며, 담배공장 직공들과 상점의 사환들을 대상으로 노동 야학교를 신설하였다.
또한, 양반 사대부들이 천하게 여겼던 체육활동을 권장하여 이들도 연중무휴로 체육을 즐기도록 유도하였다. 나아가 1915년에는 연희전문학교가 개교(開校)하는 데 YMCA를 이용하도록 허락하였고, 당시 보성학교 교장인 천도교의 최린(崔麟)을 연사로 초빙하여 강연하도록 하였다.

게다가 조선은행 총재 이찌하라(市原)의 장례식장으로 YMCA를 이용하는 것도 허락했다.
이렇게 이상재가 한국의 모든 계층뿐만이 아니라 일본인들에게까지 YMCA의 문호(門戶)를 개방했던 것은 자신이 꿈꾸었던 이상사회를 실현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 사회는 한국민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 모든 인류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사회였다.
또한, 기독교의 도덕이 중심이 되는 이상사회이며 정의와 공평이 공공선을 이루는 공동체다. 이상재는 도덕이 중심이 되는 사회를 이룰 때 역사는 저절로 변화한다고 확신하였고 그 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는 역사 변혁(transformation)을 꿈꾸었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에서 한국이 기독교가 말하는 도덕 중심의 공동체적 유기체가 되기를 희망했다. 하나님의 정의와 도덕이 중심이 되는 평화의 세계를 기다렸던 이상재는 자신이 별세(別世)하게 되는 1927년을 맞이하며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심경을 토로한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65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우리 인류계(人類界)에 사상(思想)도 신(新)하고 정신(精神)도 신(新)하고 지식(智識)도 신(新)하고 사업(事業)도 신(新)하여 죄악(罪惡)으로 오염(汚染)한 전쟁(戰爭)의 구세계(舊世界)는 탈거(脫去)하고 인휼(仁恤)로 구조(構造)된 화평(和平)의 신세계(新世界)를 하겠다 하였으나 시대(時代)가 나의 축원(祝願)을 불청(不聽)하는지 나의 축원(祝願)이 시대(時代)에 불합(不合)함인지 축원(祝願)과 시대(時代)는 호상배치(互相背馳)되어 사상(思想)과 정신(精神)과 지식(智識)과 사업(事業)이 개선취신(改善就新)하기는 고사(姑捨)하고 거익악화(去益惡化)하여 죄악(罪惡)에 죄악(罪惡)을 가(加)하고 구염(舊染)에 구염(舊染)을 첨(添)하매 비세계(比世界)는 전쟁와(戰爭窩)를 작(作)하여 이와같이 전진불기(前進不己)하면 필경(畢竟) 전지구(全地球) 십칠조(十七兆) 인류(人類)의 생명(生命)은 독탄참봉하(毒彈慘鋒下)에 제공(提供)할 뿐이로다. …(중략)… 천지간(天地間)에 일로광명(一路光明)이 영조(永阻)할 듯하나 벽종일점(壁鍾一點)이 인보(忍報)하매 어언(於焉) 이삼종(二三鍾) 사오종(四五鍾)을 숙과(?過)하면 부상서광(扶桑曙光)이 암창(暗窓)을 타파(打破)하여 선명(鮮明)한 조휘(朝暉)와 신공기(新空氣)를 토출(吐出)하매 천하만국(天下萬國)이 일시(一時) 활로(活路)를 득(得)하는도다. 연칙(然則) 우리의 과거(過去) 기개(幾個) 신년(新年)을 축(祝)함은 심야(深夜)의 축(祝)이요 엄동(嚴冬)의 축(祝)이라 축(祝)하는대로 성취(成就)치 못하였다 할지나, 계급적(階級的)으로 질서적(秩序的)으로 금일(今日)까지 지(至)하였으니, 금일(今日) 세계(世界)는 랍호(臘?)의 궁음(窮陰)이요, 장야(長夜)의 극암(極暗)이라 양춘(陽春)도 재즉(在卽)하고 서광(曙光)도 사조(巳照)하니 금년 시월(是月)에는 시(是)로써 신년축(新年祝)을 하노라.”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이상재는 자신이 기다리는 하나님의 정의(正義)가 중심이 되는 이상적인 도덕사회의 실현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것은 한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역사 전체에 대한 희망이었다. 그러나, 세계는 점점 도덕에서 멀어지는 죄악 된 상황으로 가고 있다고 토로한다.
또한 역설적으로, 극단적으로 악화되는 현재의 상황이 오히려 곧 다가올 역사의 변혁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것은 ‘밤이 오면 곧 아침이 되는’ 성서적 원리와 맥을 같이한다.

이상재가 꿈꾸었던 이상사회는 하나님의 정의와 도덕이 중심이 되는 사회였다. 이러한 도덕적 사회는 누구에게나 공평한 사회이며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평화 속에서 더불어 함께 살아야 한다.
이러한 인식하에서 한국이라는 사회가 기독교의 도덕이 중심이 되는 공동체적 유기체가 되기를 희망하였다. 한국의 문명 속에 기독교의 도덕과 일치하는 도덕문명이 전통적으로 내려왔다고 믿고 있는 그로서는 한국인들은 하나님의 섭리 하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선민(選民)이었다.

따라서 이상재에게는 남/녀 뿐만이 아니라 모든 계층이 평등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도덕심과 함께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으며 경제적 생활을 영위할 권리를 주셨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인식하에 이상재는 공창(公娼)과 그 곳을 찾는 사람들을 맹렬하게 비판하면서도 창녀(娼女)들을 ‘평등한 동포자매’로 대우하여 이들에게 침을 뱉고 매도하고 모욕하고 업신여기는 것은 인간의 도리와 정의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주장까지 하였다. 이러한 이상재의 인식은 전통적인 유가(儒家) 사대부의 인식을 넘어서는 것이다.

이상재는 공업교육, 야학 등 실업교육을 활성화하여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전통적인 신분관을 극복하였을 뿐 아니라, 한국 YMCA로 하여금 한국 모든 계층의 사회·문화의 장(場)으로 공간을 제공하도록 하였다. 한국의 모든 계층의 사회·문화의 장(場)으로 YMCA를 탈바꿈한 것은 한국 YMCA를 하나님의 정의와 윤리가 중심이 되는 공동체적 유기체로서의 이상적(理想的) 세계, 즉 하나님 나라를 꿈꾸었던 이상재의 인식 때문이었다.
한국 YMCA의 총무였던 이상재는 일본 총독부로부터의 재정지원을 거절하여 YMCA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한국 YMCA를 일본 YMCA로부터 실질적으로 독립된 기관으로 자리 잡게 하였다.

또한, 선교사나 외국인 간사 중심의 YMCA를 한국인이 중심이 되는 민족 독자적인 YMCA로 거듭나게 하였다.
그는 한국 YMCA로 하여금 한국 교회와 구별되는 신학(神學)을 바탕으로 도덕이 중심이 되는 사회건설을 목표로 한 사회운동을 전개토록 하였다. 그는 기독교의 도덕이 중심이 되는 공동체적 유기체를 꿈꾸었으며, 장차 도래할 그러한 역사의 변혁을 기다렸다.
그러한 인식에서 그는 한국 YMCA를 상류의 양반 관료층이 중심이 되는 조직체에서 모든 계층과 계급이 평등하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장(場)으로 변화시켰다.
이러한 그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YMCA는 일본인들에게까지 그 문호를 개방하였던 것이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66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4.3 흥업구락부와 이상재

4.3.1 흥업구락부 태동의 배경
1921년 11월 11일부터 워싱턴에서 개최된 세계군축회의(일명, 태평양회의)에 상해 임시정부의 대표로 참석한 이승만은 한국 문제를 의제에 포함시켜줄 것을 간청하며 이상재가 대표로 작성한 ‘대한인민대표단 건의서(大韓人民代表團建議書)’ 임시정부의 ‘독립요구서’를 진정서와 함께 미국정부에 제출했다.

이때 이상재는 태평양회의(太平洋會議)가 정의인도(正義人道)에 기(基)하여 세계평화를 옹호(擁護)하고 민족공존의 계도(計圖)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이상재나 이승만의 기대와는 달리 워싱턴회의에서는 열강들의 이익을 위한 의제만이 다루어졌을 뿐 한국문제는 단 한번도 논의되지 않았다.

일제의 기록에 의하면, 이에 실망한 이승만은 과거 조선 독립운동의 실패는 타력의존(他力依存)과 조선인의 민족성의 결함에 있으므로, 민족의 총력을 동원하여 실력양성(實力養成)에 주력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하와이에 동지회(同志會)라는 단체를 조직한 것으로 돼있다. 전택부에 의하면, 한국에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의 계획시기는 1921년 신흥우가 하와이의 호놀룰루에서 열린 제 1회 ‘범태평양 교육대회’에 갔을 때 이승만과 접촉을 하면서부터라고
한다.

그런데, 일본측 자료에 의하면, 1924년 10월 한국 YMCA에서 총무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던 신흥우는 미국 메사츄세츠 스프링필드와 뉴욕에서 개최된 북감리회 총회 및 YMCA 간부협의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하와이에 들려 이승만을 만나는 자리에서 동지회(同志會)와 동일한 주의(主義)·목적을 갖는 연장단체(延長團體)를 비밀리에 조직, 기독교계와 각종 문화단체 내의 흥사단세력을 제압해 그 지도권을 획득하는 동시에, 시기를 보아 내외세력이 호응하여 조국 광복을 달성하자고 요청받은 것으로 돼있다.
언제부터 흥업구락부의 설립을 계획했는가에 대해 학자들은 견해를 달리하지만, 흥업구락부가 신흥우(申興雨)를 대리인으로 해 이승만의 동지회의 이념(理念)을 근간(根幹)으로 한 조직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한편, 이승만이 조직한 동지회(同志會)의 3대 정강(政綱)과 4대 진행(進行)방침에서 주목할 것은 독립달성의 구체적인 방법은 제시되지 않은 채 경제적 실력양성운동이 주요정책으로 부각되고 있는 점이다.
이승만은 시위(示威)나 배타주의(排他主義)를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경거망동을 경계하고 3·1운동에서 보여준 비폭력 저항운동을 준수토록 당부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승만은 경제적 실력을 착실히 쌓아 나가면서 국제정세를 살펴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승만은 흥업구락부를 자신의 정치활동과 자금을 지원하는 국내조직으로 구상(構想)하였으며, 흥업구락부에서 경제적 실력양성은 중요한 과제였다.
1925년 3월 23일에 조직된 흥업구락부는 이상재를 부장으로 하고 윤치호, 유성준, 신흥우, 이갑성, 박동완, 오화영, 홍종숙, 구자옥, 유억겸, 안재홍, 장두현 등 모두 12명을 창립회원으로 하여 조직됐다. 이들은 모두 YMCA와 직·간접으로 관련을 맺고 있던 인물들이었다.

흥업구락부의 운동방침은 다음과 같다.
1) 민족관념을 보급하고 조선독립을 도모할 것.
2) 단체행동을 실행할 경우에는 단체의 지도자에 복종토록 할 것.
3) 산업발전과 자급자족에 노력하도록 할 것.
4) 계급과 종교 및 지방적 파벌을 타파하여 민족적 대동단결을 기할 것.
5) 조직의 목적을 설명, 상대방을 선도, 혹은 설복시켜 동지를 확보할 것.
6) 교양사업-학교 또는 문화단체의 민족계몽 강연회 등 개최-에 진력할 것.

이상재의 흥업구락부 활동에서 논쟁(論爭)이 될 수 있는 것은 흥업구락부가 운동의 방향을 정함에 있어 ‘실력양성’을 채택(採擇)했다는 것과 안창호 계열의 흥사단계(興士團係) 수양동맹회(修養同盟會)의 지도를 배척함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상재 자신이 사회진화론에 입각한 운동이었던 ‘실력양성운동’에 일정부분 거리를 두었던 전력(轉歷) 때문이며, 공동체적 유기체에 대한 인식 아래 민족적 대동단결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안창호계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또한, 일본의 기록대로 이승만이 “조선인의 민족성에 결함이 있다”는 전제 아래 흥업구락부를 조직했다면, 한국의 민족성의 우수성과 역사적으로 도덕문명을 지니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이상재가 왜 흥업구락부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느냐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먼저, 안창호계에서 주장했던 실력양성운동과 이상재가 인식했던 실력양성운동은 그 사상적 출발점과 목표가 다르다.
안창호계의 실력양성운동은 한국의 전통적 사상과 문명이 열등하다는 데서 출발하며 이 운동의 목표는 나라의 독립이었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67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그러나, 이상재는 흥업구락부를 한국의 역사와 전통적 문명이 매우 우수하다는 인식 아래 설립하였으며 나라의 독립을 넘어 도덕이 중심이 되는 역사의 변혁까지를 그것의 이상적 목표로 삼았다. 한국 민족을 열등하다고 보았던 이승만과 절친했던 이상재의 태도에 대한 의문점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그것은 먼저 일본의 기록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전술(前述)한 대로 명치이후의 일본은 사회진화론적(社會進化論的)인 인식 아래 강자(强者)는 곧 정의이며 상등문명(上等文明)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일본은 한국이 지극히 열등한 민족성을 지니고 있다고 인식하였다. 한국 민족의 최대 조직이었던 신민회도 한국의 민족성이 열등하다고 보고 있었다. 한국인들에게 민족적 결함이 있다고 인식하고 있던 일본이 흥업구락부를 신민회와 같은 성격의 자강단체로 인식하여 “조선인의 민족성에 결함이 있다”는 내용을 당연한 것으로 적어 넣을 수 있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이승만은 이상재와 두터운 친밀감을 갖고 있는 사이였지만 두 사람은 한국의 전통적인 문명에 대해 일정한 견해차를 가지고 있었던 전력(前歷)이 있었다. 이승만은 1903년 한성감옥에서 “예수교는 본래 교회 속에 경장(更張)하는 주의를 포함한고로 예수교가 가는 곳마다 변혁하는 힘이 생기지 않는데 없고 예수교로 변혁하는 힘인즉 피를 많이 흘리지 아니하고 순평히 되며 한번 된 후에는 장진이 무궁하야 상등문명에 나아가니 이는 사람마다 마음으로 화하야 실상에서 나오는 연고”라며 기독교의 문명은 상등의 문명으로 한국의 기존의 가치체계가 목표로 삼아야할 대상이라고 주장한 바 있었다. 이승만에게 있어서 기독교의 문명은 상등의 문명으로 한국의 기존의 가치체계가 목표로 삼아야 할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상재는 동양이 말하는 도(道)를 거부하지 않는다. 그는 기독교 속에 동양이 말하는 도(道)가 포함되어 있으며, 한국은 이미 동도(東道)라는 도덕문명의 전통 속에 있었기 때문에 하등문명(下等文明)에 속하여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이상재는 한국은 본래 갖고 있었던 높은 정신문명을 망각하며 살고 있다고 보았다. 당시에 게으름과 시기와 나태 등 한국사회의 병폐가 한국사회를 망치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병폐에 대해 이상재는 한국의 도덕력이 쇠잔해 있기 때문이라고 인식했다. 따라서 이승만이 한국의 “민족성에 결함이 있다”한 표현에 대해 이상재는 한국의 전통적 도덕성을 재발견하겠다는 뜻으로 이해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분명한 것은 정치가였던 이승만은 정치적 자금 지원과 민족운동의 헤게모니를 잡기 위해 흥업구락부의 조직을 종용했다. 그에게 있어서는 흥업구락부의 목표가 한국의 독립이라는 절대명제였다.

그러나, 종교가인 이상재는 흥업구락부의 활동을 한국의 도덕문명을 회복하는 도구로 봤다. 그리고 YMCA운동의 실무자인 신흥우는 두 사람사이에서 흥업구락부를 이상재의 이상(理想)과 이승만의 야심을 조화시켜 구체적인 안(案)을 제시하여 실행하고자 하였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흥업구락부는 이승만과 이상재, 신흥우, 윤치호 등이 각기 다른 인식 하에 조직한 민족단체라 볼 수 있다.

4.3.2 흥업구락부장 이상재와 안창호계의
사상

장규식은 워싱턴 군축회의 이후, 기호지방(畿湖地方)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던 흥업구락부의 실력양성운동이 서북지방(西北地方)을 중심으로 했던 흥사단(興士團)의 사회진화론적인 실력양성운동과 같은 것으로 민족 개량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상재도 그러한 사상적 흐름 속에 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그러나, 장규식은 흥업구락부의 실력양성운동은 안창호계의 것과는 사상적 출발점이 다르며,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의 내(內)에서도 실력양성운동에 대한 이상재와 윤치호 등의 인식에도 일정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간과(看過)하고 있다. 신흥우는 1925년 7월 미국 하와이에서 개최된 태평양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한 후 그 성과를 알리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대전이후에 과학문명의 실패를 지적하여 온 세계는 새로운 생의 원리로 정의인도를 크게 제창하여 선전하여 왔다. 자기도 그 중에 한 사람이다. 그러나 정의인도는 실제세력을 산출키 하여야 할 정의인도이다. 그리하여 정의인도가 실현되려면 실제세력으로 더불어 나가야만 할 것이다. 정의인도는 예컨대 혼이요, 실제세력은 체이다. 그리고 지금은 세월이 지남을 따라 정의와 인도만 운운함은 갈수록 무기력한 것 같다.”

신흥우는 여기에서 그 동안 삶의 원리로 정의와 인도를 주장하여왔지만, 정의와 인도만 존재하고 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현실적으로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이상재가 그 동안 주장해 왔던 것이 이상에 불과하다는 주장이었다. 신흥우는 이상(理想)을 이루기 위해서는 힘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68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이러한 인식 아래 “정의와 인도는 혼(魂)이며 힘은 체(體)”라고 해 정의와 인도는 목적과 근본이요 힘은 그것을 이루고 지키기 위한 도구며 방패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신흥우의 이러한 인식은 이상재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상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혹자는 말하되 일변시경되는 신시대에 진진한 구학문의 부패할 도덕윤리라는 낙오한 췌론은 신진청년의 영예한 활기를 저상케 한다 하여 기평함도 유하고 혹자는 말하되 도덕윤리는 우리 조선민족의 반만년 역사적으로 고유한 양지양능인즉 금일에 새삼스럽게 중언부언할 필요가 없다하여 조소함도 유하니 양설의 기평과 조소를 무리라 하여 반박하자는 것이 아니라, 만일 현대의 과학이나 물질이나 무슨 주의든지 일절 거절하고 도덕과 윤리만 전무하라 하면 전자의 기평이 당연하거니와 현대의 생활하는 우리 인간과 어찌 현대의 풍조를 응치 아니하며 현대의 대운동을 순치 아니하리오. …(중략)… 대개 나침은 타정도 아니오 장즙도 아니라, 함구에 무관한 듯하나 나침을 일오한즉 전로를 미실하여 표탕전복의 환이 입지하리니, 우리 인류가 여비한 고해중에 생활함이 풍도에 함행함과 흡사한즉 도덕과 윤리는 즉 우리의 전로방향을 지시하는 나침인즉 비를 어찌 주의치 아니하리오.”
정의와 인도를 도덕과 윤리로 인식했던 이상재는 물질문명이 가져다주는 현실적인 힘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정의와 인도만을 고집하며 진취적인 과학문명이나 사상을 무시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자신이 정의와 인도를 보다 강조한 것은 현 세태가 현재의 상황 즉, 과학적이고 물질적인 힘만을 추구하고 현재 유행하는 새로운 사조(思潮)에 빠진 나머지 정의와 도덕을 등한히 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였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그러나, 물질문명은 도덕이 기초가 되고 목표가 되어야 한다. 정의와 인도, 즉 도덕은 마치 역사를 헤쳐나가는데 나침반과 같은 것이다.
그에게 있어 도덕은 역사의 가장 근본적인 동력이며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기본 원리와 목표이다. 이상재와 신흥우가 차이가 있다면, 이상재가 기독교의 도덕력에 보다 큰 비중을 두었다면, 신흥우는 워싱턴 군축회의 이후 냉혹한 국제현실 속에서 현실적인 힘으로 보완해야 한다는 데 집중하고 있다.

안창호계의 ‘실력양성’에 대한 사상적 기저는 이상재의 것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1922년에 동우구락부(同友俱樂部)에서 1926년에는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로, 1929년 동우회(同友會)로 명칭이 바뀌었던 안창호계의 수양동우회는 자강운동단체였던 신민회의 연장선에 있었고 회원들은 대부분 북장로교의 신자들이었다.

서북지역의 자립적 중산층 출신으로 장로교를 배경으로 했던 이들은 고위 관료출신들로 개화운동에 주도적 역할의 전력(轉歷)을 갖고 있던 흥업구락부원들과는 달리 전통적인 조선의 관습, 사상, 문명이나 문화에 대해 단절(斷切)된 인식(認識)을 갖고 있었다.
특히 도학(道學), 즉 유학(儒學)에 대해서도 거부를 했는데, 이러한 이해는 안창호의 인식 때문이기도 했고 동시에 이들의 출신지역의 특성이기도 했다.
<대한신민회통용장정(大韓新民會通用章程)>에 의하면, 신민회의 궁극적 목적은 한국 국민의 사상과 관습, 산업을 유신(維新)케해 “유신(維新)한 자유문명국(自由文明國)을 성립(成立)”하는 데 있었다.

물론, 여기에서 ‘자유문명국’이란 서구의 근대국가를 말하는 것으로 서구근대문명을 이루기 위해 한국이 전통적으로 갖고 있던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이것은 1910년 일본에 강제 병합을 당하기 전까지 자강단체의 사상적 이념이었던 ‘우승열패(優勝劣敗)’와 ‘적자생존(適者生存)’의 사회진화론의 개념이며 서기(西器)를 우선하였던 김옥균의 생각과 같다.

상해 임시정부시절, 안창호는 미국기자와의 회견에서 한국이 기독교와 민주주의를 기초한 문명국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국은 4천년의 고국이라. 불행히 서양문명에 촉함이 면하였으나, 한국의 문명은 기독교와 민주주의를 기초로한 문명이라. 30년래 한국에게 신문명을 준 자는 미국이라. 귀국민은 종교로 교육으로 아국민에게 지도의 은을 가하였고 독립운동이래 공정한 언론으로 아국민의 친우가 됨을 감사하노라.”

이 회견에서 보면, 안창호는 한국의 역사와 전통적인 문명과 사상을 거부하고 있다.
안창호는 한국이 근대의 외형적 힘으로 전통적 문명을 바꾸지 않는다면 독립할 자격도 없다고 극언에까지 이르게 된다.
“도산은 극언하였다. 이조 오백년의 역사는 공론의 역사였다고, 그러하기 때문에 이조 오백년에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위대한 유산이 적고, 오직 갑론을박과 그로하여서 온 참무(讒誣), 탄핵, 비방, 살육의 빈축산비할 기록이 있을 뿐이라고. 심지어 이렇다 할 건축물하나, 토목공사 하나 크게 자랑할 것이 없지 않느냐고, 공담공론(空談空論)에서 나올 필연의 산물이 쟁론(爭論)과 모해밖에 없을 것이 아니냐고.”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69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물론, 이것은 주요한을 통해 본 안창호에 관한 일화(逸話)이므로 어느 정도 과장이 있을 수 있겠지만, 안창호가 분명히 한국의 역사와 전통적인 사상, 하물며 민족성까지 비하하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다. 안창호는 근본적으로 힘을 길러야 독립이 가능하다며 실업의 진흥과 인격혁명, 민족개조까지 이룰 수 있는 실력양성운동을 주장하고 있다. 그것은 전통에 대한 단절을 전제로 한 것이다. 1921년 안창호는 김좌진의 청산리대첩과 홍범도의 봉오동전투에 대해 “참배나무에는 참배가 열리고 돌배나무에는 돌배가 열리는 것처럼, 독립할 자격이 있는 민족에게 독립국의 열매가 있고 노예될 만한 자격이 있는 민족에게는 망국의 열매가 있다”고 말하며 “한번 떠들기만 하면 독립이 될까, 혹은 한번 대포질이나 폭탄질이나 하면 될까” 하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국의 전통적인 역사와 문명에 대한 단절과 근대문명의 외형적인 힘에 대한 고무적(鼓舞的)인 인식하에 안창호는 계속 극단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 3·1운동이 끝난 후인 1919년의 5월에 안창호가 독립을 역설하며 “어떤 이는 대한이 강력한 일본에게 합병을 당한 것을 한탄하나 나는 오히려 이것을 다행으로 압니다”라고 말한 맥락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일본의 근대문명이 갖는 외형적인 힘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안창호의 사상적 연장선에 있던 수양동우회원들도 한국의 역사와 민족, 전통적인 문명에 대해 같은 견해를 갖고 있다. 수양동우회의 기관지인 <동광(東光)>에 나타난 이들의 사상을 보면 이들의 이러한 견해가 분명히 드러난다. 이들은 우리 민족이 ‘허위(虛僞)와 태타(怠惰), 겁유(怯濡)의 성격’을 갖고 있는 ‘도덕적으로 큰 결함’을 갖고 있는 민족으로, “무실(務實)·역행(力行)·신의(信義)·용기(勇氣)의 4대 정신으로 무장”하고 “덕육(德育)·체육(體育)·지육(智育)을 수련해 건전한 인격을 함양해서 민족을 재생(再生)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힘이 없이는 어떠한 운동도 전파되고 지속될 수 없는 것으로 인격의 함양도 힘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고 피력했다.
한국의 역사나 민족, 전통적 사상, 문명에 대한 안창호계의 이러한 비관적 태도는 이상재에 의해 강하게 비판받는다. 전술(前述)한 바, 이상재에게 있어서 기독교 사상의 중심은 하나님 나라였고 도덕은 가장 중요한 매체였다. 따라서 도덕을 숭상했던 한국의 전통 속에서 하나님 나라는 일정 부분 공유(公有)된다. 이상재에게 한국의 전통, 특히 동도적(東道的) 전통이 갖고 있는 도덕력은 보존되어야 하고 오히려 확산되어야 한다. 안창호계가 실력양성을 통해 역사적으로 저급했던 민족을 개량해야한다는 사상적 목표를 갖고 있는 것에 반해 이상재는 흥업구락부의 활동이 한국이 도덕적 전통을 환원(還元)하고 재발견하는 데 필요한 도구였다. 따라서 실력양성운동을 도덕문명을 유지(維持)·확산(擴散)하기 위한 도구(道具)와 방패(防牌)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안창호계의 그것과 구조적·사상적 갈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상재가 볼 때, 안창호계의 민족운동은 결국 근대문명의 외형적 힘을 얻겠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사상은 결국 강자도덕(强者道德)이 되는 논리이며 이기적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각 나라에 품부하신 권리를 빼앗는 서구 열강들과 같은 논리이다. 그들은 입으로는 정의와 인도를 부르짖으며 실제로는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하는, 사기꾼과 같은 자들이었다. 오히려 그들은 그것을 명예로 알고 자랑스러워한다.

그런데, 그런 자들을 좇아 한국을 문명국으로 만들겠다며 한국민족이 갖고 있던 전통적인 도덕력을 단절시키고, 그러한 힘의 문명을 목표로 하여 민족을 개량하겠다고 하는 것은 결국은 우리 민족에게 도덕력을 주신 하나님에게 맞서는 것이요, 정신병이나 다름이 없었다. 또한, 자신이 꿈꾸었던 하나님 나라는 그 가시적 예표가 도덕이었기 때문에, 이상재는 한국이 전통적으로 숭상했던 도덕문명을 단절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상재가 보기에 안창호계의 민족운동은 하나님이 주신 진리와 정의를 외면하고 민족을 멸망의 길로 인도할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사상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이상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 현금 세계를 환고하건대 개인이든지 방국이든지 육체로 유하는 리기적 정욕만 발휘하여 타를 강압하며 타를 침략하며 타를 살륙하는 등 잔인폭학함이 무소부지하고 또는 명칭에게 매수되어 문명이니 부강이니 사기적 가장적으로 허영만 도탐하여 상천이 주신 진리와 정의를 불고할 뿐 아니라 저적도 하며 구시도 하나니 현세계는 전부가 정신병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라 하노라. 청년이여, 육체가 아무리 곤고타 할지라도 인내하며 명예가 아무리 파손되었다 할지라도 저상치 말고 우리에게 상천이 주신 도덕적정신만 건전히 수양용진하면 육체의 곤고도 명예의 파손도 자연히 유왕필복하는 기일이 유할지니….”
하나님께서는 한국 민족에게 도덕을 주셨고, 한국은 역사적으로 도덕문명을 유지하여 왔다는 인식에서, 이상재는 한국의 역사성과 단절하고자 하는 안창호계와 사상적으로 갈등 할 수밖에 없었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70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제5장 이상재의 사회활동과 기독교 사상의 성격

5.1 민립대학(民立大學)설립운동
- 사상 실현을 위한 이상재의 첫 시도

5.1.1 전개과정

3·1운동 다음해인 1920년 6월 23일에 윤치소(尹致昭)의 집에서 이상재와 한규설을 비롯한 100여명의 인사(人士)들은 ‘재단법인 조선교육협회 설립 발기회’를 개최하고, 여기서 ‘조선 민립종합대학’의 설립을 결의했다. 이것은 3·1운동이 가져다준 자신감으로, 한국이 자유와 정의를 표방하는 독립국이 될 수 있다는 희망과 우리의 문화나 민력(民力)이 이것을 감당하기에 충분하다는 인식의 표출이었다.

또한, 민립대학 설립운동은 민족정신과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려는 바램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조선교육협회의 이러한 발상을 가장 지지했던 그룹은 김성수와 송진우를 중심으로 한 동아일보계로, 민족주의 우파라 할 수 있는 그룹이었다.
이들은 3·1운동이 실패하였다고 판단해 세계는 아직도 정의와 인도(人道)가 지배하는 세계가 아니라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라고 인식하면서, 타국에 의지하지 말고 우선은 스스로의 실력을 길러 독립할만한 준비를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는 실력양성운동을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워싱턴 군축 회의 시 보여줬던 미국의 태도에 대한 실망감으로 인해 그간의 외교론을 주장했던 이승만의 이론에 대한 회의(懷疑)에서 비롯됐다.
동아일보는 1922년 1월 5일자 사설을 통해 “오인(吾人)은 작년에 조선민중의 교육열이 왕성한 것을 보고 우리 민족의 부활을 신명에 감사하였으며 그 철저를 기도”했다고 하며 민립대학을 전체 민족의 역량으로 설립해야 함을 강조했고, 2월에 제 2차 조선교육령 발표를 계기로 총독부의 신교육령에 의거해 한국에서도 대학의 설립이 가능하게 됐다면서 민립대학의 설립을 다음과 같이 지원하고 나섰다.

“… 교육의 독립은 민족의 영예와 실지생활에 극중극대한 관계를 가지니 정치적 예속은 혹 시대의 변천과 대세의 추이에 의하여 면할 수 있으며 경제적 복종과 역(易) 동일한 관계를 가지되 정신적 예속의 굴복에 지(至)하여는 단(單)히 일시적 굴복에 지(至)하지 아니하며 일시적 굴복에 휴(休)하지 아니하고 영구히 기건(羈件)을 탈(脫)하기 난(難)하며 단(單)히 형식적·표면적 속박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핵심골수에까지 구속을 당하나니 …(중략)… 그 교육은 재(在)하여 독립을 득(得)치 못할 것 같으면 그 실(實)은 일정일동(一靜一動)과 일진일퇴(一進一退)에 자유가 무(無)하고 권위가 무(無)할 것이라. …(중략)… 연칙 대학교육에 대하여 특히 민립대학을 제창하는 소이(所以)는 무엇인가. 대개 관립대학과 민립대학에 재(在)하여는 그 정신에 자연히 차이가 살아있나니 관립에 재(在)하여 관료주의가 발호하고 민립에 재(在)하여 민주주의가 발생하는 것은 일본의 실례가 역력히 설명하는 바이며 저 진리의 연구는 자유를 절대의 생명으로 하는 것이라.”

동아일보는 진정한 자유는 정신적 자유에서 나오는 것이며 정신적으로 일본에 예속되면 한국의 장래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와 같은 이유에서 일본 총독부가 은밀히 추진 중인 관립대학(官立大學)을 경계하며 한국인들에 의해 세워지는 민립대학은 학문의 자유를 통해 정신적인 자유와 정신적 독립을 실현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호소했다. 민립대학 설립에 대한 일반의 기대는 점점 높아져 민족적 염원에 이르기 시작했다.
다른 민족운동에 대해 견해차를 보이던 청년운동 단체와 사회주의 세력에서도 이 사업에는 적극 협조했다. 특히, 1920년 12월 1일에 창립되었던 조선청년연합회는 130여 개의 청년단체를 흡수하여 개최한 1922년 4월의 3회 정기총회에서 전국 청년단체에 보낼 건의안(建議案)을 발표하면서 민립대학설립을 민족의 기대를 받고 있는 민족적 사업으로 인식하여 속히 설립할 것을 촉구하고 나섰다.
이와 같은 민립대학 설립에 대한 민족적 기대감에 자신감을 갖게 되자 1922년 11월 23일에 경성부 남대문통 식도원에서 이상재를 비롯해 현상윤, 최규동, 이종훈, 정대현, 고원훈, 한용운, 이승훈, 허헌, 김성수, 송진우, 유억겸, 최린, 유진태, 김병노, 박승봉, 이갑성, 권동진, 오세창 등 47명의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참석해 ‘조선사람의 대학’이라는 명제 아래 ‘조선민립대학 기성준비회’를 결성하고 발기인 모집활동을 전개했다.
민립대학 기성준비회는 민립대학 건립에 전 민족이 참여해야한다는 이상(理想)하에 각 군(郡)에 2명 이상 5명 이내의 유지(有志)들의 참여를 희망해 거족적(擧族的)인 합심(合心)으로 대학의 설립을 성취시키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했다.
이러한 이들의 바램대로 한국 각지의 유지들은 이 일에 열렬히 참여하겠다는 응답을 즉각 보냈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71>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민족적 성원 아래, 민립대학 기성회의 발기총회(發起總會)는 준비회가 조직된 지 6개월만인 1923년 3월 29일에 서울 YMCA(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회관에서 발기인 1,170명중 462명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되어 3일간 계속됐다. 총회에서는 이상재를 임시의장으로 하여 자금(資金)은 총 1천만 원으로 하고, 모금기간은 1년 내(內)에 할 것을 결정했다. 또한, 사업은 3기로 나누어 1기 사업은 자본금 400만원으로 대지 5만평의 구입과 건물을 신축해 법(法)·경(經)·문리(文理)의 문과와 상과(商科)를 설치하고, 2기는 300만원을 들여 공과(工科)와 이과(理科)를, 3기는 나머지 300만원을 들여 의과(醫科)와 농과(農科)를 설치하기로 의결(議決)했다. 특히, 여기에서는 민립대학 기성회의 조직을 구체화했는데, 이 때의 조직을 보면 다음과 같다.

<민립대학 기성회 중앙부 조직>
△중앙 집행위원(30명) : 이상재(李商在), 이승훈(李昇薰), 조병한(曺炳漢), 김탁(金鐸), 강인택(姜仁澤), 최린(崔麟), 한인봉(韓仁鳳), 김한승(金漢昇), 오달세(吳達世), 유인식(柳寅植), 조만식(曺晩植), 이춘세(李春世), 유성준(兪星濬), 고용환(高龍煥), 송진우(宋鎭禹), 정노식(鄭魯湜), 김우현(金佑鉉), 백남진(白南震), 유진태(兪鎭泰), 이갑성(李甲成), 남궁훈(南宮薰), 남홍윤(南洪尹), 강백순(姜栢淳), 주익(朱翼), 홍성설(洪性?), 현상윤(玄相允), 김정식(金貞植), 허헌(許憲). △감사위원(7명) : 이달원(李達元), 임치정(林蚩正), 염인혁(廉寅赫), 김윤환(金潤煥), 김완진(金完鎭), 이봉하(李鳳夏), 김교영(金敎英). △회금보관(會金保管)위원 : 장두현(張斗鉉), 이하용(李河用), 김일선(金一善), 김병로(金炳魯), 유양호(柳養浩), 김성수(金性洙), 김윤수(金潤秀).

또한, 실제 기성회사업을 운영할 상무위원 5인으로 하여 사무(事務)를 맡게 했는데 한용운(韓龍雲)과 강인택(姜仁澤)이 서무부(庶務部)를, 유성준(兪星濬)과 한인봉(韓仁鳳)이 회계부(會計部)를, 이승훈(李昇薰)이 사교부(社交部)를 맡았다.

이 총회에서 기금(基金)을 보관할 위원을 엄선(嚴選)하였던 것은 과거 국채보상 운동시 기부(寄附)되었던 600만원이라는 거금(巨金)의 행방이 묘연했던 일의 재발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총회는 회금 보관을 분명히 하고 지방부에서 수집되는 회금은 “그 지방 금융기관에 보관하되 달(月)마다 그 액수를 중앙부에 보고”하도록 했다. 또한 지방부를 속히 조직하기 위하여 지방순회 선전(宣傳)위원을 각지에 특파했는데, 평안도에는 조만식(曺晩植), 황해도에는 홍성설(洪性), 전라도에는 김형옥(金衡玉), 충청도에는 유성준(兪星濬), 경상도에는 유인식(柳寅植), 함경북도에는 주익(朱翼), 황해도에는 김탁(金鐸)이 파견됐다. 그러나, 이렇게 거족적인 계획과 민족적 관심을 갖고 시작했던 민립대학설립 운동은 1년이 채 안 되어 실패를 자인(自認)할 수밖에 없었다. 동아일보는 한국 민중들의 능동적 참여 태도가 없음을 비판하고 있었다. “… 예정액의 십분의 일이 되는 단 백만 원이나마 우리의 힘으로 모았는가 …(중략)… 우리는 촌분(寸分)의 책임전가(責任轉嫁)를 불허(不許)할 것이다. 조선 이천만 민중아 이 사업의 장래를 여하(如何)히 하려는가.” 동아일보는 한국 민중(民衆)들의 책임을 통탄했지만, 민립대학의 설립이 부진한 것은 한국 민중들의 무관심이라고 할 수만은 없었다.

1924년의 한발(旱魃)과 연이은 홍수(洪水), 1925년의 큰 수해(水害)가 발생하는 천재(天災)가 있었고 모금에 대한 일본의 방해가 있었다. 또한, 일본이 관립(官立)으로 경성제대를 설립하며 간접적인 방해공작을 펴는 바람에 민립대학의 설립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실패의 큰 요인 중 하나는 내부의 갈등 때문이었다. 1924년 1월 1일 동아일보는 정치적 자치론을 들고 나오면서 일본의 현실적 지배체제를 인정하는 사설을 게재하였다. 이들 동아일보계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우파진영이 자치론(自治論)을 들고 나오면서 일본의 체제의 현실성을 인정하는 바람에 강인택(姜仁澤), 김탁(金鐸), 정노식(鄭魯湜) 등 민족주의 좌파그룹이 민립대학 기성회를 탈퇴하고 일부는 사회주의로 전화(轉化)하며 이에 반발하였던 것이었다. 이렇게 전화(轉化)한 사회주의자들은 민립대학의 설립을 오히려 비판하며 노골적인 방해를 했다. 결국, 민립대학의 설립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5.1.2 실패원인과 이상재의 사상

5.1.2.1 일본의 방해와 이상재의 사상
1919년의 3·1운동은 일본의 조선통치(朝鮮統治)의 방침을 무단정치(武斷政治)에서 일명 문화정치로 전환하도록 했다. 1919년 8월에 부임한 사이토(齋藤實)는 ‘일시동인(一視同仁)’이라는 슬로건과 함께 소위 문화정치를 표방하는 내용의 요지를 훈시(訓示)했다.
그것은 위력(威力)을 동반하는 문화운동을 말하는 것으로, 일본의 문명과 정신으로 한국인들을 의식화해 일본의 체제를 수긍토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입장에 따라 일본 총독부는 1920년 초부터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겨 실력양성, 참정권 획득청원(자치청원), 민족성 개조라는 세 가지 슬로건을 내걸고 민족주의 우파에 대한 선전공작에 들어갔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72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일본은 이러한 슬로건 중 한국인의 민족성을 개조하겠다는 취지하에서 1922년 2월 6일 ‘제 2차 조선교육령 개정’을 실시해 “한국의 교육제도를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성지(聖旨)에 의거해 그간의 차별을 철폐하고 일본의 내지(內地) 학제에 맞춰 제정하겠다”고 공포했다. 명목은 한국 내의 교육에 인종적 차별을 없애겠다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일본화를 위한 구체적 방안이었다. 그 동안 일본은 한국의 문명과 한국인들을 저급(低級)한 것으로 보고 실용(實用) 위주의 초등(初等) 지식습득을 목표로 삼아왔다.

그러한 제1차 조선 교육령의 교육정책을 수정해 완전한 일본천황의 신민(臣民)으로의 동화주의(同化主義)를 지향하여 식민지정책을 강화한다는 교육방침으로 그 목표를 전환시키고 있었다. 그것은 초등교육에 치중해 저급한 노동자의 양적인 증가를 기도(企圖)하였던 것으로부터 한국인들을 철저히 일본인화시켜 독립운동의 사고(思考)자체를 말살하겠다는 정책의 변화일 뿐, 충량한 천황의 신민(臣民)을 만들겠다는 기본 근간(根幹)은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은 일본국내와 동일한 교육제도를 내세워 ‘국어(일본어)를 상용(常用)하는 자’와 ‘국어(일본어)를 상용하지 않는 자’를 엄격히 구별했다. 그래서 일본어를 국어로 사용하는 학교만이 일본 국내와 동일한 등급의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혜택을 받도록 해 한국의 학교들이 일본어를 사용하도록 유도(誘導)했다. 그리고 일본의 기준에 맞추어 한국에서도 대학을 설립할 수 있도록 법규를 제정했다. 그러나 일본의 기준은 너무 엄격하여 실제로 경성제국대학 이외의 다른 대학을 한국인들이 스스로 설립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1920년 6월부터 시작한 민립대학 설립이 점차 가시화(可視化)돼 가자 일본은 일본 내(內)에 있는 분교(分校)로 민립대학을 설치하자고 수정해 제안(提案)했다. 이러한 제안은 결국 무산되었는데 그것은 일본에는 대학 분교에 관한 법령이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일본은 9월 12일에 조선교육협회(朝鮮敎育協會) 임원들을 초치(招致)해 한국인들만을 위한 학교가 아니라 ‘일선(日鮮) 공학제(共學制)’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것은 물론 민립대학 설립을 막겠다는 의도였다. 이에 이상재를 중심으로 한 조선교육협회(朝鮮敎育協會)는 9월 26일에 회원 14명이 참가한 가운데 민립대학 설립의 강행을 결정했다.

이에 일본은 1922년 2월에 교육령을 개정해 관립(官立) 경성제국대학의 설립을 서두르는 한편, 민립대학 설립을 저지하기 위해 기금을 헌납치 못하도록 하는 등 대대적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일본 총독부는 민립대학 기성회 인사들을 감시하고 모금을 위한 위원들의 강연을 방해하는 한편, 설립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군수나 면장, 도위원에게도 압력을 가해 이에 협조하지 못하게 했다. 이러한 일본의 압력이 한 원인이 되어 민립대학의 설립이 실패로 돌아가자, 기성회의 상무위원이었던 강인택(姜仁澤)도 일본의 압력이 실패의 큰 요인이었다고 진술했다. 결국, 민립대학의 설립은 일본의 방해가 한 요인이 되어 실패했다.

교육전문가로서의 전력(前歷)을 갖고 있었던 이상재는 일본의 문화정치의 의도를 정확히 간파(看破)했다. 이상재는 일본화(日本化)를 목적으로 한 교화정책(敎化政策)을 용납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상적으로 볼 때 비도덕(非道德) 문명의 확산(擴散)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상재의 인식은 3·1운동 이후에 일본군 장성(將星) 우쓰노미야(宇都宮)가 초대한 자리에서 이상재가 우쓰노미야에게 일본이 도덕적이지 않아 한국인들의 환심을 살 수 없다고 한 말에서 확실해진다.

이상재는 한국인들의 저항심을 누그러뜨리려는 사이토(齋藤實)의 문화정치의 의도를 분명히 알고 있었고, 일본의 문명과 그 정책이 비문명의 비도덕적인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1911년에 이상재는 천황제이데올로기 아래 전개된 일본의 근대문명에 정신문명이 없다고 판단한 바 있다. 이것은 일본의 천황과 그 체제에는 도덕적인 가치체계가 없다는 것과 일본의 근대문명은 힘만을 앞세운 비도덕문명이라는 혹독한 비판이었다. 그러한 이상재의 인식은 일관(一貫)되게 지속되었던 것이다. 이상재에 있어서 일본이 획책하는 일본화(日本化)는 비도덕문명의 확산이요, 일본이 통치하고 있는 식민지 한국 땅 전체는 ‘비문명의 감옥’과 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한국인들에 의해 세워지는 민립대학은 정신적인 독립의 장(場)이 될 것이며, 일본의 비도덕문명의 확산을 막는 방편이 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정신적 독립은 기독교가 말하는 도덕중심의 정신문명으로 이어져 한국역사에 변혁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책동으로 결국 민립대학의 설립은 실패했고 이상재의 기대감도 무산(無産)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변혁에 대한 그의 확신은 변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그의 신학적(神學的) 사고가 주는 낙관적 태도 때문이었다.

1925년 6월 경성제국대학이 개교하는 날 여기에 초청을 받아 참석을 하려고 했을 때 의아해 하는 사람들에게 “오늘이 우리 민립대학 개교식 날이니 제군들도 같이 가지”라고 권유했다. 모든 사람이 의아해할 때 이상재는 “저 놈들의 관립 경성 제국대학은 곧 우리 민립대학의 발족물이요, 우리 대학의 후신인 줄을 모르는가? 그리고 경성제국대학은 장차 우리의 대학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73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이상재는 일본의 근대문명과 천황제를 정신문명이 없는 비도덕이라고 비판한다. 그러한 근대문명이란 정신문명을 도외시하고 물질문명만을 추구한 결과로 나타나는 것으로서, 하나님이 개인과 각 국가에 권리로써 부여하신 도덕적 가치관을 파괴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강포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公義)를 저버리는 행위로 결국 하나님의 징벌의 대상이 되며 공평하신 하나님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는 논리였다. 이상재는 이러한 사고가 역사의 자연스러운 이치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상적 인식에서 이상재는 일본은 망하고 경성제국대학은 당연히 한국의 것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5.1.2.2 참여 계파와 이상재의 사상

민립대학의 설립운동 초기에는 민족전체가 아주 적극적으로 참여해 모금도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러나, 1년이 채 되지 않아 민심이 점차 이반(離反)되고 중앙부와 지방부의 관계가 벌어지며 거의 유명무실한 상태에 이르게 됐다. 동아일보는 1924년 1월 1일에 “민족적(民族的) 제운동의 회의(懷疑)와 비판(批判)”이라는 기사를 통해 민립대학이 부진한 원인이 우리민족의 열등한 민족성 때문이라는 요지의 기사를 싣고 있다.
“이 사업을 위하여 일원금(一圓金)을 내는 유지(有志)가 그렇게 적지는 아니할 것이 언만은 우리 민족에게는 아직 그 만큼 절실한 민족감이 없다. 둘째, 우리는 필히 인색한 인간이다. 아마 극도의 빈궁이 우리를 이러한 악덕에 빠지게 한 것이려니와 우리는 금전욕을 희생하여서까지 지식욕을 만족할 만한 성의가 없다. … 셋째는 우리는 아직 다수의 력(力)의 집합이라는 단체생화의 근본원리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 넷째 우리 민족은 서로 신뢰하는 마음이 없다. … 그래서 대체 무슨 일을 한다는 사람이라면 거짓말쟁이로 알게 된 것이다.”
동아일보는 한국민족의 민족성 때문에 모금이 되지 않았다고 했지만, 민립대학 설립의 실패는 일본의 설립방해와 함께 동아일보계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우파들의 실력양성운동의 개념과 그 의도가 알려지면서 내부의 갈등이 야기된 것이 한 원인이 됐다.
민립대학의 설립운동은 송진우의 동아일보계와 천도교의 최린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우파와, 김탁(金鐸)과 강인택을 중심으로 한 조선청년 연합회의 민족주의 좌파가 독립이라는 민족적 절대명제를 이루기 위해 이상재를 대표로 하여 함께 이끌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1924년 전후로 강인택(姜仁澤), 고용환(高龍煥), 정노식(鄭魯湜), 김탁(金鐸), 이봉하(李鳳夏), 김교영(金敎英) 등은 조선청년당대회를 계기로 ‘민립대학 타도’를 결의하며 민립대학 설립 기성회를 탈퇴했다. 이들은 동아일보계들의 실력양성운동의 개념이 점차 드러나고 정치적 자치론을 주장하게 되는 즈음에 이르러 이를 비판하고 거부했던 것이다.
사실, 민립대학의 설립은 처음부터 계파 간의 갈등을 불러일으킬 사상적 괴리감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3·1운동이 실패했다는 인식 아래 아직 한국은 독립할 만한 능력을 갖추지 못해 우선 실력양성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민족주의 우파와 무조건 독립을 최우선해야 한다는 민족주의 좌파의 사상적 차별성 때문이었다. 민족주의 우파는 워싱턴 회의가 좌절된 현실 하에서 일본의 지배를 일시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 반면, 민족주의 좌파는 한시적이라도 일본의 지배를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설립운동의 초기에는 동아일보계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우파의 주장이 확연히 나타나지 않다가 운동이 구체적으로 진행되면서 드러났다. 동아일보는 ‘선실력(先實力), 후독립(後獨立)’을 주장하며 이러한 민족주의 좌파의 비타협적 주장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오인(吾人)이 오인의 생존을 유지하고 단(單)히 유지할 뿐 아니라 일층확충하고 향상하야 진실로 오인의 리상(理想)하는 바 신사회·신역사를 창작하랴 할진대 환언하면 오인이 또한 진실로 문명인이 되야 문명인의 행복을 추구할진대 그 문명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과 그 신이상(新理想)을 실현하는 요소를 산출할진대 그 문명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과 그 신이상을 실현하는 요소를 산출하여야 할지니 비방법과 요소를 작(作)치 아니하고 단(單)히 피안을 향하여 성(聲)을 대(大)히함이 결코 그 피안에 도달하는 도리가 아니로다. 전장에 임하는 자는 먼저 그 병(兵)을 연(練)하고 그 양(糧)을 저(貯)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민족주의 우파의 실력양성(實力養成)은 김옥균의 서기서도(西器西道) 주장 이후에 계속된 자강단체의 주장과 그 구조와 유형이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3·1운동이 실패했다는 인식하에 워싱턴 군축회담이 한국의 기대와 달리 끝나게 되자 현실적으로 일본의 체제를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확대되어 나갔던 것이다. 동아일보는 1924년 1월 1일부터 4일까지 연재한 사설 [민족적(民族的) 경륜(經綸)]을 통해 그간의 물산장려운동과 같은 산업적 결사(結社)와 민립대학과 같은 교육적 결사(結社)와 함께 “조선 내에서 허(許)하는 범위 내에서 일대 정치적 결사를 조직해 이 결사로 하여금 당면한 민족적 권리와 이익을 옹호하고 장래 구원한 정치운동의 기초를 만들게 할 것”이라며 정치적 결사(結社)를 주장하고 나섰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74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이는 일본의 체제 안에서 조선에 자치적인 의회를 만들겠다는 타협적인 자치운동을 말한다. 민립대학 설립의 지방부 조직의 근간을 이루고 있던 조선청년연합회의 민족주의 좌파그룹은 민족주의 우파의 이러한 인식을 비판했고, 결국 중앙부와 지방부의 결별과 갈등은 민심의 이반(離叛)으로 연결됐다. 사회주의노선으로 방향을 전환한 민족주의 좌파들은 민립대학 설립운동의 타도를 외쳤다. 이들은 대학보다는 차라리 대중교육의 보편화에 힘쓸 것을 주장하며 투쟁을 선언했지만, 그것은 일본의 지배체제를 인정해야한다는 민족주의 우파에 대한 반감과 실망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상재가 민립대학 설립 초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이유에 대해 몇 가지로 추론해 볼 수 있다. 그것은 먼저, 3·1운동을 통해 드러난 우리 민족의 저력(底力)에 대해 고무되었기 때문이라 짐작할 수 있다. 3·1운동이 내세웠던 정의와 평화의 슬로건은 자신의 사상적 주장과 부합되는 것이었다. 이상재에게 있어 한국은 도덕이 바탕이 된 나라였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는 사대부 출신으로서의 사회적 책임감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독립은 그에게 있어서도 절대명제였고 사대부 출신인 자신에게는 민족적 지도자의 위치에서 한국의 독립을 완수해야할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우파계의 주장은 이상재에게도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1924년 초에 발표한 동아일보의 사설 ‘민족적 경륜’은 안창호로부터 신임이 두터웠던 춘원 이광수가 집필한 것으로, 이 사설은 이광수 개인의 사상적 주장뿐만이 아니라 동아일보를 대표하며, 안창호계의 민족주의 사상과도 연계된다.
안창호계에 대해 사상적 거부감을 갖고 있던 이상재로서는 민족주의 우파계의 실력양성운동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안창호계의 실력양성운동은 민족 개량주의로 발전돼 전통적인 한국의 관습, 사상, 문명이나 문화를 바꾸려드는 저급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광수도 이상재의 이러한 사상적 거부감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조선일보 사장으로서의 이상재의 역할을 폄하(貶下)했다.

“… 옹(翁)은 현재 조선일보 사장의 직에 있다기로 아무도 조선일보가 옹(翁)의 사업이라고 할 사람은 없다. 조선일보 편으로 말하면 명망(名望)있는 명예사장을 가진 것이요, 옹(翁) 편으로 말하면 사장선생이라는 직함(職啣)과 시량(柴糧)을 얻으시는 심이다. …”

이광수는 조선일보는 이상재의 이름이 필요했고 이상재는 조선일보 사장이라는 직함과 먹을 것 때문에 조선일보에 있는 것이라며 비아냥거리고 있다. 이러한 이광수의 반응에서 민족주의 우파와 이상재 사이에 사상적 갈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민족주의 우파가 주장하는 한국인의 권리란 일본의 체제를 인정해 그 체제 안에서 일정하게 획득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이것은 사상적으로 일본이 주장하는 ‘우승열패(優勝劣敗)’의 사회 진화론적 인식에 동감하는 것으로 일본의 근대문명의 우수성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근대 문명의 외형적 힘을 가지지 못한 한국의 전통문명을 저급하다고 보고 역사적 단절(斷切)과 민족개량주의(民族改良主義)나 민족의 개조(改造)를 주장하게 된다.

한국의 전통문명과 역사적 단절을 시도하려는 동아일보의 의도는 민립대학의 설립이 구체화되면서 뚜렷이 드러난다.동아일보는 1922년 12월 16일자 사설인 ‘기성회위원 파유(期成會委員派遺)’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민립대학을 설립하는 것이 “조선인의 과학이 발달할지며 단(單)히 발달할 뿐 아니라”, “민립대학의 기성(期成)은 단(單)히 오인(吾人)에게 지식을 주고, 나아가 과학에 기본해 발전할 생명을 오인에게 부여하는 것이 된다”고 해 한국문명이 취약하다고 여기고 있던 과학문명을 갖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피력하고 있었다. 또한, 1923년 3월 29일 발기 총회에서 발표된 민립대학 발기 취지서에도 민족주의 우파의 주장이 그대로 반영돼 “대학은 인류의 진화(進化)에 실로 막대한 관계가 유(有)하니 문화(文化)의 발달과 생활의 향상은 대학(大學)을 대(待)하여 비로소 기도(企圖)할 수 있고 획득(獲得)할 수 있다”는 사회 진화론적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이와 같이 동아일보계가 주도권을 잡게 되자 민립대학 설립운동은 이상재의 의도와 사상적으로 다르게 진행됐다. 기독교를 통해 한국의 도덕문명을 다시 환원(還元)하고 재발견해야 한다고 믿고 있던 이상재는 이러한 동아일보계의 생각이 일본의 체제자체와 일본의 근대문명의 문명관을 답습하겠다는 논리라는 것을 분명히 분석하고 있었다. 이들의 주장은 한국문명과의 단절을 전제로 문명개화를 이루겠다는 친일파들의 논리와 일치하는 것이다.
이상재는 일본이 추구하는 힘은 결국 악(惡)한 것으로, 악(惡)으로 선(善)을 이루지는 못한다고 주장한다.

이상재가 볼 때, 동아일보계의 사상은 결국 강자도덕(强者道德)이 되는 논리이며 일본을 인정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각 나라에 품부하신 권리를 빼앗는 일본의 주장을 돕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75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도덕입국(道德立國)이 하나님의 뜻이요, 한국의 독립을 이룰 수 있다 믿고 있던 이상재는 도덕을 중심으로 하면 언젠가는 역사의 변혁이 일어난다고 봤다. 그것은 도덕문명을 내연(內燃)으로 할 때 자동적으로 에너지가 외연(外延)될 뿐만이 아니라, 그 에너지는 역사 변혁을 일으켜 그 공간까지도 변화시킨다는 인식이었다. 그래서 일본인들이 통치하고 있는 식민지의 한국 땅은 현재는 감옥과 같은 땅이지만, 한국이 정의와 인도, 윤리와 도덕, 사랑과 용서를 실행하면 역사에 외연(外延)되어 장차 이 땅은 변혁된 세계, 즉 하나님 나라를 맞이할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청년들이 중심이 되는 대학은 가장 높은 차원의 도덕문명을 이끌 방도(方道)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업은 하나님이 애초에 선택하신 한국이라는 도덕적 땅의 거민들이 유기체가 되어 이뤄야 하는 일이었다. 그것이 한국인들이 만들어 나가야할 하나님의 나라였다.

이상재는 한국에서 일본의 체재나 존재를 허락할 수 없었다. 민립대학 설립이 구체적으로 진행되는 단계에 이르자 이상재의 이상(理想)과 상당한 괴리를 보였고 이상재도 설립의 초기만큼 열성을 보이지 않게 된다. 민립대학 설립운동은 초기에 민족의 독립이라는 대명제(大命題) 위에 시작했지만, 민족주의 우파의 실력양성운동과 민족 개량주의적인 사고(思考)로 인해 각 계파 간에 갈등을 초래했고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상재에 있어서 민립대학 설립운동은 YMCA라는 기독교 영역을 떠나 사회(社會)라는 장(場)에서 하나님 나라라고 인식했던 도덕 중심의 공동체적 유기체를 이루기 위한 첫 번째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와 일본의 근대문명관(近代文明觀)에 편승한 민족주의 내부의 사상적 갈등으로 인해 결국 실패했다. 민립대학 설립운동의 실패 후, 이상재는 동아일보계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우파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사회활동과 운동을 펼치게 된다.

5.2 조선일보 사장 이상재- 이상재의 사상 실현을 위한 실험적 시도
5.2.1 사상 실현의 실험장 조선일보

친일 경제단체(經濟團體)인 대정실업친목회(大正實業親睦會)의 조진태를 사장으로 추대하고 1920년 3월 5일에 창간호를 발행한 조선일보의 판권이 경영난으로 인해 여러 명의 경영진과 친일파 송병준의 손을 거쳐 1924년 9월 12일 신석우에게로 넘어갔다. 이는 조선일보가 친일지에서 민족지로 넘어가는 사건이라 평(評)할 수도 있지만, 사상적으로는 일본의 외형적인 힘의 추구를 극복하고자 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때를 계기로 조선일보는 창립 시 내걸었던 ‘신문명(新文明) 진보주의(進步主義)’를 거부하고 ‘조선민중의 신문’을 표방하였기 때문이다. 신석우는 이상재를 사장으로 청빙(請聘)하고 지면을 늘리는 한편, 친일지(親日誌)로 각인(刻印)된 인식을 불식(不息)하고 민족지(民族誌)라는 인식을 정립(定立)하기 위해 동아일보계를 거부했던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을 입사시켰다. 따라서, 이상재가 사장으로 취임할 즈음의 조선일보에는 이상협, 김동성 등 조선일보에서 근무하고 있던 민족주의 우파의 일부, 신석우, 안재홍 등 민족주의 좌파, 홍증식, 박헌영, 서범석 등 민족주의 좌파가 있었다.

홍증식은 동아일보 영업국장 출신으로 화요회계열의 사회주의자였다. 그는 1921년 1월 27일에 창립된 좌익 지식인들의 사회주의 써클인 ‘서울청년회’에 가담했던 인물로서 1923년 7월에는 ‘신사상 연구회’에, 1924년 11월 19일에는 ‘신사상 연구회’가 개칭한 ‘화요회’에 가입했다. 홍증식은 사회주의계인 박헌영(朴憲永), 김단야(金丹冶), 임원근(林元根) 등을 입사시켰는데, 조선일보에는 이들 이외에도 북풍회(北風會)의 서범석(徐範錫), 손영극(孫永極), 화요회(火曜會)의 홍명희(洪命熹), 홍진유(洪眞裕), 조규수(趙奎洙), 조봉암(曺奉岩), 신인동맹회(新人同盟會)의 신일용(辛日鎔), 꼬르뷰로(高麗局) 국내부의 김재봉(金在鳳), 홍남표(洪南杓), 강달영(姜達永), 당의 푸락치 조직의 배성룡(裵成龍), 조선노동공제회의 서승효(徐承孝), 서울 콩그룹의 양명(梁明), 조선청년총동맹의 이길용(李吉用), 조선공산당 일본연락부의 이석(李奭), 북성회(北星會)의 이여성(李如星), 동우회(同友會)의 이익상(李益相), ML당 사건의 김준연(金俊淵) 등 사회주의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1920년대의 한국 사회주의 계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던 인물들이었다. 이들 사회주의자들로 인해 조선일보는 ‘사회주의 신문’이라는 말을 듣게 됐는데, 이는 조선일보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공존(共存)과 견제(牽制)를 모색하며 진보적인 사상으로의 변화를 시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상재 이전에도 조선일보는 사회주의계 수 명이 신문의 편집진으로 종사하고 있었다. 이들은 동아일보다 선명하게 항일(抗日)의 필치를 구사했다. 그것은 일본 총독부로부터 압수된 신문기사의 숫자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는데, 창간서부터 1924년 6월 30일까지 두 신문의 압수 기사는 조선일보가 훨씬 많았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여전히 친일지로 각인된 인식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것은 조선일보의 논조가 여전히 일본의 문명과 체제를 인정하는 범위 내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76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1924년 9월 이후, 조선일보는 동아일보계의 점진적 실력양성운동, 민족 개량주의와 자치론에 대한 비판을 강화하는 한편, 사회주의적인 색채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상재가 사장으로 취임한 이후부터 3번째 정간되는 1925년 9월 8일까지 조선일보는 총 88건의 기사를 압수당하는데, 그 중 13건이 사회주의 색채를 담고 있었다. 이는 이때의 조선일보가 사회주의 이념의 도입을 활발하게 전개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이상재가 사장이 된 후, 조선일보는 친일지라는 인식이 개선되며 독자수가 늘어났는데, 적어도 1925년에 경상북도에서는 조선일보가 동아일보를 앞지르는 등 동아일보에 버금가는 구독자수를 갖게 됐다.

이상재가 조선일보 사장직을 수락했던 것은 항일지(抗日誌)로 바뀌고 있는 조선일보의 성격이 자신의 사상과 부합됐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또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동거형태를 띤 조선일보가 그의 사상 실천의 새로운 실험장이 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상재는 민립대학의 설립운동의 실패를 통해 민족주의 우파와 사상적 이견(異見)이 있음을 확인했다.

이상재는 자신의 사상을 실현할 수 있는 새로운 활로를 모색할 수밖에 없던 상황에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사상적으로 공존하고 있는 조선일보라는 새로운 활동의 장(場)을 만났다. 이상재는 조선일보사장을 시작으로 민족주의 좌파라 할 수 있는 신석우를 비롯한 그룹과 조선일보에 근무하고 있던 기존의 민족주의 우파 그룹, 당시 새로운 사회적 세력으로 확대돼가고 있던 사회주의계와 조선일보라는 장(場)을 통해 함께 활동했다. 민족주의계와 사회주의계가 함께 활동하는 조선일보는 1920년대 사상운동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었다. 이상재에게 있어 조선일보는 당시의 한국 사회에 자신의 이상, 즉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운동이라 인식했던 도덕중심의 공동체적 유기체의 실현이 가능한 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이상적인 실험장이었다.

5.2.2 조선일보와 이상재의 사상

이상재가 조선일보 사장을 허락한 것 중 하나는 동아일보와 경쟁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그것은 경영을 위한 경쟁을 지양(止揚)해야 한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동아일보계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우파와 조선일보를 중심으로 새롭게 진용을 갖춘 민족주의 좌파와의 민족적 갈등을 막겠다는 의지였다. 민족운동그룹 내부의 갈등과 분화는 이상재의 사상적 인식 하에서는 용납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상재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사랑이 공동선(共同善)이 되는 인화(人和)의 공동체였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한국 민족이 공동체적 유기체의 존재로서 전통적으로 도덕을 중시했던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인식과 한국인은 그러한 공동체를 실현해야할 공동의 임무를 갖고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재는 자신이 사장이 된 이후, 조선일보가 사상적으로 분명한 변화를 보이고 있는 것에 대해 고무됐다. 이러한 이상재의 태도는 동아일보와는 달리 조선일보의 사상적 기조가 자신의 것과 부합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이상재의 이러한 태도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상재가 한국의 절대명제인 독립이라는 목표를 위해서는 민족이 통합되어야 한다고 인식했지만, 그것을 실행해 나가는 방법에 있어서나 사상적으로는 동아일보계의 실력양성운동과 자치론에 대해 일정하게 거리를 뒀다.

1925년 1월 21일 조선일보는 “조선인의 정치분야-기치를 선명히 하라”는 사설에서 동아일보의 자치론을 거세게 비판했다. 그것은 ‘일본의 주권 아래 법률이 금하는 범위 내에서 활동해야 한다’는 이른바 ‘자치론’에 대한 노골적인 거부였다.

“연내(年內)에 순수한 민족운동으로부터 통렬(痛烈)한 사회운동(社會運動)으로 방향을 전환(轉換)하여 오인(吾人) 해방전선(解放戰線)에 양대 진영의 병립(竝立)을 보게 된 것은 필연 또 당연(當然)한 형세(形勢)이라 그를 인위적(人爲的)으로 어찌할 바 아니요, 다만 정전(征戰)의 과정에 있어서 견고한 공동전선의 편성을 절규하는 바이어니와 여기에 다시 오인(吾人)의 명고(明告)하는 바가 있다. 그는 아직도 함호무위(含糊無爲)한 중에 자못 그 본색을 드러내지 않는 무수한 회색분자(灰色分子)들은 마땅히 단연한 출처(出處)로써 그 태도를 선명(鮮明)케 하라 하는 바이다.”

이 사설에서 조선일보는 동아일보의 민족개량주의나 실력양성운동을 친일운동으로 규정하고, 본색을 드러내라고 비난했다. 조선일보의 이와 같은 적대적인 비판은 1924년 6월 18일의 사설이었던 ‘능동(能動)과 타동(他動) - 소위 공직자대회의 참정권설에 대하여’에서 보여준 ‘정신상으로 노예’가 될 수 없다는 어조(語調)보다 훨씬 강도(强度)가 높았다. 1926년 12월 16일부터 4회 동안 연재되었던 사설 ‘조선(朝鮮), 금후(今後)의 정치적(政治的) 추세’에서는 동아일보의 소위 자치운동은 일본의 통치(統治)와 연락되고 호응이 되지 않고서는 용이하지 않다고 지적하며 그 출발부터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조선일보의 주장대로 실력양성운동은 구조상으로 일제 권력과 불가피하게 연관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이들 실력양성론자들은 솔선해서 일본과의 타협적 방도를 제기했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77>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동아일보의 타협운동이 시작부터 일본의 의도를 따르는 것이라는 조선일보의 강도 높은 비판은 조선일보가 친일지(親日誌)라는 지금까지의 인식을 불식(不息)하는 선언이었다.
1921년의 워싱턴 군축회담 후, 이상재는 국제사회가 한국인의 염원과는 달리 일본의 한반도 강점(强占)과 동북아의 패권(覇權)을 용인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 그것은 인도와 정의를 중시한다고 믿었던 미국과 서방 기독교국(基督敎國)에 대한 실망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아일보는 현실성을 인정하여 일본의 체제를 수긍(首肯)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이러한 동아일보의 태도를 비판하면서 일본과 타협할 수 없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조선일보의 이러한 태도는 이상재의 사상과 부합(附合)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상재의 사고(思考)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비록 미국이나 다른 서방 기독교 국가들이 자신의 사상적 염원을 받아들이지 않는 절망적 상황이었지만 도덕이 중심이 되는 세계공동체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강자도덕(强者道德)을 부르짖는 일본의 근대문명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따라서 일본의 체제의 정당성을 용인할 수 없었다. 이상재는 미국 등 서방의 부강(富强)한 기독교국이 정의와 인도를 부르짖지만 그것은 거짓과 사기(詐欺)라고 극언(極言)을 했다. 이상재는 현 국제사회는 자국(自國)의 이익을 위해 타국(他國)을 강압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기독교국이 하나님이 부여하신 진리와 정의를 외면한다고 비판했다. 이상재가 보기에 기독교국이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는 태도는 일본과 상통(相通)하는 것이었다.

이상재는 천하의 큰 죄악을 모두 용서하신 하나님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위선자들에게는 화(禍)가 있을 것이라고 폭언(暴言)을 했다. 이상재가 볼 때, 현실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주장 하에 동아일보가 벌이는 실력양성운동이나 자치론은 일본의 근대문명을 한국이 달성해야할 목표로 설정하는 것이요, 자신의 사상적 이상(理想)인 하나님의 정의와 윤리가 중심이 되는 공동체적 유기체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근대문명이 정신문명과 하나님이 없는 강자도덕(强者道德)을 주장하는 이기적 문명이라고 인식했던 이상재로서는 동아일보계의 이러한 태도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상재가 보기에 동아일보계의 민족 개량주의와 자치론은 안창호계와 마찬가지로 한국 민족에게 도덕력을 주신 하나님에게 맞서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이상재는 정의와 인도를 부르짖으면서도 실제로는 한국의 독립을 외면하는 국제상황, 즉 서구의 기독교국들이 한국을 포기하는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일본에 저항하며 그것을 명예로 아는 조선일보의 논조(論調)에 고무(鼓舞)될 수밖에 없었다. 1924년 9월 이후 조선일보의 항일성은 강자(强者)가 약자(弱者)를 억압(抑壓)하는 현실 속에서도 약할수록 정의(正義)를 지켜야하며 힘이 의(義)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의(義)가 힘이 된다는 이상재 자신의 평소의 신념과 상통(相通)하는 것이었다. 이상재는 이러한 사상적 신념 아래 동아일보계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조선일보계와 행동을 같이 했다.

5.3 신간회장 이상재 - 이상재의 사상 실현을 위한 재 시도
5.3.1 신간회의 태동과 그 배경

1927년 2월 15일 창립대회를 갖은 신간회는 이상재를 회장으로 천도교의 권동진(權東鎭)을 부회장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3개의 강령을 채택했다.
1. 우리는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2.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함.
3.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함.
이후, 민족 통합의 단일당(單一黨)으로서 신간회는 각 지방의 지회설립운동을 활발히 해 143개 지회에 2만 명 이상의 회원이 활동하였던 전국 규모의 운동단체로 확대됐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연합체인 신간회(新幹會)가 태동된 배경에는 3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먼저, 민족주의 우파의 타협적 자치론이 확대되려 하자 이를 반대한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이 연합할 수 있었다. 둘째, 전술적이라 할 수도 있지만, 혁명에 동참할 수 있다고 인식한 민족주의 좌파 그룹에 대한 사회주의계의 긍정적 인식이다. 셋째, 노동자, 수공업자, 인텔리겐챠, 중소부르주아가 참가하는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할 것을 요구하는 코민테른의 전략적 의도가 한 요인이었다. 1924년 1월 2일부터 연재되었던,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이 독립의 부정을 전제로 한 민족주의 우파의 자치론으로 가시화(可視化)되자 민족운동 그룹은 이를 반대하는 비타협적 좌파와 타협적 우파로 분화(分化)됐다. 민족 개량주의를 주장하던 민족주의 우파들은 일본체제를 인정하는 범위 안에서의 자치(自治)를 현실적 대안으로 봤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민족적 경륜’이 발표된 직후인 1월 중순에 천도교의 최 린(崔 麟)·이종린(李鍾麟), 동아일보의 김성수(金性洙)·송진우(宋鎭禹)·최원순(崔元淳), 후일 조선일보계의 중심이 되는 신석우(申錫雨), 안재홍(安在鴻), 변호사 박승빈(朴勝彬)과 이승훈(李昇薰), 서상일(徐相日), 조만식(曺晩植) 등 16-17명이 회합을 갖는 자리에서 자치운동을 구체화하기 위해 ‘연정회(硏政會)’의 결성을 협의했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78>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그러나, 신석우나 안재홍, 이종린 등은 민족의 협동을 위한 단체의 결성에 관심은 가졌지만 자치운동에는 반대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민족 개량주의자들과 마찰을 빚었고, 결국 연정회(硏政會)의 결성은 실패로 끝났다.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의 발표와 연정회(硏政會)결성 실패 이후 사회주의자들의 민족주의 우파에 대한 공격이 거세어졌다. 이들은 이 두 사건에 조선총독부가 관련되어 있다고 폭로하는 한편, 동아일보에 대한 불매운동과 ‘타협적 민족운동’ 반대에 대한 결의를 했다. 민족주의 우파의 자치론에 대해 반대를 하고 있던 민족주의 좌파들은 자치론에 대항해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던 사회주의자들과 연합을 하는 것이 민족개량주의에 대항하는데 효과적임을 인식했다. 그것은 사회주의의 비타협운동이 청년층을 중심으로 확대돼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자치론에 대항하기 위해 공동 투쟁의 필요성을 인식했던 민족주의 좌파의 움직임에 맞춰 사회주의 진영도 그 필요성을 공유했다.

1924년 4월 24일에 개최된 조선청년총동맹(朝鮮靑年總同盟) 임시대회(臨時大會)에서는 “타협적 민족운동에 대해서는 절대 배척하고 혁명적 민족운동에 찬성한다”는 결의를 했다. 사회주의의 공식적 제안(提案)이기도 했던 이와 같은 결의는 민족 협동전선이 보다 효과적인 민족해방운동이라는 이해에서 나온 것이었다. 1925년에 들어서면서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는 활발하게 민족해방의 일치점을 찾으려는 노력을 했다. 이들은 민족주의 우파들이 주장하는 민족개량주의와 자치론을 배격하며, 서로의 입장 차이를 인정하는 가운데 견고한 공동전선을 펼 것을 주장했다.

양 그룹의 노력은 결실을 거두어, 1926년 3월 10일에 제 2차 조선 공산당 책임비서가 되는 강달영(姜達永)과 천도교계의 이종린(李鍾麟)·오상준(吳尙俊)·권동진(權東鎭), 조선일보계의 신석우·안재홍, 기독교계의 박동완(朴東完)·유억겸(兪億兼) 등 8명이 회합해 일명 ‘국민당’ 조직을 계획했다. 또한 다른 한편에서는, ‘고려공산동맹’의 지도를 받고 있던 서울 청년회계의 김교영(金敎英)·이경호(李京鎬) 등과 물산장려회의 주도 인물 중 하나였던 민족주의 좌파인 명제세(明濟世)·김종협(金鍾協) 등이 1926년 7월에 ‘조선민흥회(朝鮮民興會)’를 발기(發起)했다. 이후 이 조직들은 모두 신간회로 통합된다. 이와 같이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계는 민족주의 우파의 자치론에 대항해 연합전선을 형성하려는 등 일련의 행동을 보였다.
이것은 민족주의 우파의 주장인 민족 개량주의와 자치론이 일본의 문명의 상위성(上位性)과 체제의 정당성을 인정해 식민통치의 당위성을 확보해준다는 공통된 인식 때문이었다. 이들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계의 민족주의 우파에 대한 저항은 신간회 태동의 한 요인이 됐다. 신간회 태동의 또 한 요인으로는 사회주의계들이 민족주의 좌파에 대해 사상적으로 긍정적 인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1923년 3월 24일부터 29일까지 열린 전조선청년당대회(全朝鮮靑年黨大會)는 조선청년연합회를 탈퇴한 사회주의자들이 이 연합회를 반대해 소집한 최초의 전국모임이었다. 여기에서 이들은 계급해방이 민족해방보다 우선의 과제이고 계급해방이 되면 민족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라는 전망을 했다. 사회주의자들의 이와 같은 결론은 외견상으로 볼 때, 민족주의계와는 협동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1924년 4월 21일부터 22일까지 종래의 청년회연합회를 포함해 227개의 사회주의 청년단체들이 조선청년총동맹을 창립하며 운동의 방향을 결정하는 자리에서 “타협적 민족운동은 절대로 배척하며 혁명적 민족운동을 찬성한다”고해 자신들의 이념적 목표와 공유되는 민족운동에 대해서는 협동할 수 있다고 천명했다.
그리고 종교문제에 있어서도 그 ‘원리는 부인하고 종교가 민중을 마취케 하야 그 참다운 각성을 방조하는 폐해’가 있다고 인식하지만 적극적으로는 배척하지 말라고 유연한 태도를 취했다. 이것은 사회주의자들이 민족주의 좌파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독립이라는 민족적 절대명제를 사회주의도 거스르기 어려웠던 상황이었기 때문이지만, 이들 사회주의자들은 민족주의 좌파의 사상적 목표를 자신들과 동일한 이념적인 혁명적 민족운동으로 인식하여 큰 괴리감을 느끼지 못했다.
더구나 1925년 6월에 일본의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이 실시되자 민족주의 좌파와의 협력은 더 한층 강하게 일어났다. 1925년 제 1차 조선공산당이 결성된 이후에도 이들은 ‘조선민족 해방’과 ‘조선인의 조선’ 등을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전술(戰術)로서 민족주의 단체와 제휴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또한, 6·10만세운동 3일전에 발표된 제 2차 조선공산당의 ‘조선공산당 선언서’에는 당면과제로서 “조선민족을 절대 해방하기 위해 조선의 제종(諸種)역량을 집합해 민족혁명유일전선(民族革命唯一戰線)을 작성”하고 “노농계급을 기초로 해 도회의 소자본가, 지식 내지 불만을 가진 부르주아까지 직접 동맹을 삼는다”는 부연 설명을 하고 있다. 사회주의자들은 민족주의 좌파를 일본의 체제에 불만을 가진 ‘도시의 소부르주아와 지식분자’들로 인식해 서로 동맹세력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79>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비록 이들 민족주의 좌파들은 혁명의 주력이 될 수는 없지만, 제국주의자들의 억압에 대한 불만을 갖고 있으며, 이들 자체 내에 혁명적 소질이 있기 때문에 직접 동맹할 수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신간회가 태동될 수 있던 세 번째 요인으로는 코민테른의 지시가 있었다는 것이다. 1920년 코민테른 제 2회 대회에서 레닌은 ‘민족·식민지 문제에 대한 소위원회 보고’를 통해 후진국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운동문제를 강조하면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운동 대신에 민족혁명운동이라는 표현을 씀으로서 개량주의 운동과 구별한다.

동시에 그는 “식민지 국가의 부르주아적 해방운동이 진정으로 혁명적인 경우에만, 또한 우리가 농민 및 광범위한 피착취 대중을 혁명적 정신으로 교육·조직하려고 하는 것을 운동의 대표자가 방해하지 않는 경우에는 부르주아적 해방운동을 지지해야 하며 지지할 것”이라고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물론 레닌은 “코민테른은 식민지나 후진국의 부르주아 민주주의파와 일시적 협정 또는 동맹도 맺어야 하지만, 그것과 융합해서는 안 되며 비록 맹아적 형태일지라도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자주성을 무조건 유지해야 함”을 전제로 했다.

민족주의 그룹과의 통일전선에 대한 레닌의 전략은 1922년 11월의 제 4차 코민테른 대회에서도 그대로 반영되는데 그는 “동양 식민지에서는 반제국주의 통일전선의 슬로건이 현재 강조돼야 한다”며, “과도기적 정세 하에 서양이 내 건 전술이 ‘노동자 연합전선’이었듯이 현재 식민지 동양에서 필요한 것은 반제연합전선(A Unitid Anti-Imperialist Front)이다. 반제투쟁(反帝鬪爭)이 장기화될 전망이므로 모든 혁명적 요소를 결집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중국의 국공합작의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한국 사회주의자들의 민족통일전선의 이론적 원천이 됐다

레닌은 1908년의 페르시아 혁명, 1911년의 중국의 신해혁명을 보고 나서부터 아시아의 민족운동에 관심을 가졌는데, 그는 민족운동 안에 혁명적 성격이 내포돼있다고 보았다. 그의 제국주의론에 따르면, 혁명이 제국주의국가에서 지체되는 것은 해외 식민지에서 착취한 막대한 잉여가치(剩餘價値)로 자국(自國) 노동계급의 상층부를 매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계 자본주의는 식민지에서 민족운동이 일어남으로서 붕괴될 것이다. 레닌은 서구열강의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동양 식민지의 민족운동이 필요불가결의 관련이 있다고 보고 전략적 차원에서 부르주아에 의해 주도(主導) 되고 있는 민족운동을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 4차 코민테른의 ‘동양테제’는 그러한 인식 가운데서 나왔다.

1925년 4월 17일 화요회(火曜會)를 중심으로 해서 17여명에 의해 결성된 제1차 조선 공산당과 그 다음날인 18일에 조직된 고려공산청년회의 대표로 조동우(趙東祐)와 조봉암(曺奉岩)이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기 위해 6월과 5월에 각각 모스크바에 갔을 때, 코민테른의 간부들과 이들은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 결의안에서는 “앞으로 한국의 공사주의 단체의 정치적·조직적 기본과제는 노동자, 농민, 지식인 및 중소 부르주아를 결합하여 민족해방투쟁을 전개하는 데 있다”는 반제민족운동의 필요성이 강조됐다. 이것은 코민테른이 한국 공산주의자들에게 민족혁명당의 건설보다는 기존의 민족주의 단체의 통합을 그 과제로 준 것이 된다. 따라서, 신간회는 코민테른의 전략적 의도가 한 요인으로 작용해 태동될 수 있었다.

5.3.2 신간회와 이상재의 사상

이상재가 신간회 태동에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는 불투명하다.
그러나, 이상재가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었을 때 기독교인으로 각인되어 있던 그에 대해 사회주의계의 반대나 거부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이상재에게는 민족 지도자로서 갖고 있는 상징성뿐만이 아니라 양 진영이 모두 인정할 수 있는 사상적 일치점이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먼저, 민족주의 좌파에 입장에서 보면, 이들은 민족주의 우파의 민족 개량주의에 대해 이상재가 확고하게 거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상재를 선호했다. 이념을 중시하는 사회주의의 입장에서 이념과 목표가 다른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무원칙으로 결합한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들 사회주의자들이 이상재가 기독교계의 거물임에도 최소한 자신들의 사상적 목표를 방해하지 않을 인물로는 보지 않았던 것은 이상재에게서 자신들과의 사상적 일치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에서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신간회의 창립식에도 참석하지 못할 정도로 기력이 쇠잔했던 이상재가 왜 신간회의 회장직을 수락하였을까 하는 문제이다. 이관구는 신석우의 기지(奇智)였다고 말하지만, 분명한 것은 신간회에 대한 이상재의 기대(期待)가 대단했다는 것이다. 장규식은 1920년 전후의 민족운동 내부에서 사회진화론적인 강권주의에 대한 이론적 극복의 시도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인물로 신채호와 안창호, 사회주의자들을 들고 있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80>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그에 따르면, 신채호는 ‘국수(國粹)’의 논리로 일본이 반침략 투쟁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였고, 안창호는 ‘정의(正義)·인도(人道)론’ 내지는 인도주의를 부르짖으며 약자 도덕을 통한 강권주의의 극복을 제안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진화론으로 포장된 제국주의의 침략논리를 자본주의 비판을 통해 그 근저에서부터 부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채호의 ‘국수주의(國粹主義)’나 안창호의 민족운동의 근저는 사회진화론으로부터 기인하였다는 점을 장규식은 간과했다.

다만, 민족·식민지문제의 본질이 자연법칙으로서 우승열패의 당연한 결과가 아니라 자본의 논리로 입각한 제국주의의 의도된 침략이라는 장규식의 사회주의에 대한 해석은 타당성이 있다.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혁명 이후, 사회주의는 약소민족의 자결권과 식민지 피압박민족의 민족해방운동을 중요한 목표로 삼았다. 이들은 민족의 정신상의 결함이 열악한 민족성이나 교육상태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에 의한 정복과 착취, 즉 일본에 의한 한국의 식민지 노예화와 지배계급에 의한 가혹한 착취와 억압에 있다고 인식하고 한국의 민중을 구원하는 길은 일본을 물리치고 현 사회제도를 혁명적으로 개조하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인식하에 한국의 사회주의자들도 계급평등이라는 목표를 통해 민족해방의 문제를 해결하고 민족운동을 함에 있어서 비타협적 운동을 주장했다. 그런데, 이상재가 주장하는 도덕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적 유기체에 대한 이상(理想)은 정의와 계급 평등을 부르짖던 사회주의자들에게도 일치점으로 인식됐다. 이들의 입장에서도 세계 피압박 민족의 해방을 위한 민족 투쟁은 이상재가 주장했던 각국마다 하나님이 부여하신 도덕을 가지고 있어 침범할 수 없다는 주장과 일정하게 부합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들의 민족해방에 대한 투쟁은 하나님께서 주신 권리를 빼앗은 일본은 장차 멸망하게 될 비도덕 국가라는 이상재의 주장과 함께 비타협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던 조선일보계의 민족주의 좌파의 사상적 성격과 일치점을 갖게 되어 이들은 함께 활동할 수 있었다. 한편,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반사회진화론적 태도도 이상재의 사상과 일정부분 일치한다.

이상재도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인류평등과 계급타파라는 정의의 기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이들 사회주의가 기독교회를 공격하며 반종교운동을 전개할 때 이상재도 한국 기독교의 일부가 거짓된 사랑과 거짓된 의(義)로 가득하여 세상에 굴복한다며 사회주의자들처럼 기독교인들의 정숙주의(靜肅主義)를 비판했다. 또한, 그는 개화운동 이래로 진취적인 민권의식(民權意識)을 일관되게 주장했었다. 북학파의 계보에 있던 그는 사민평등(四民平等)을 주장했고, 양반관료의 상류층이 중심이 되었던 YMCA를 계층적 특성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바 있었다. 그의 인식에서는 모든 계급이 평등했다. 또한, 개인이나 각 민족은 각기 권리에 있어 동일하며 그 권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간이든 민족 내에서든, 각 국가간에 천부(天賦)의 권리는 서로 보장이 돼야 했다.

이상재는 순수한 의도를 가지고 사회주의가 가진 보편적 가치는 인정하려 했다. 그리고 도덕이 중심인 사회를 지향하면 “어떠한 주의(主義)나 어떠한 사상으로 나아가든지 적(敵)이 있을 수 없다”고 확신했다. 이상재가 보기에 사회주의도 “전속력으로 용맹스럽고 급하게 달리다가 과격한 주의로 변질”되었지만, 극단으로 굽은 것을 바로잡으려고 시작된 사상이었다.

“···현대신행(現代新行)하는 인류평등과 계급철폐라는 정의하에 기치를 등립(登立)하고 전속력으로 용왕급주(勇往急走)하다가 과격한 주의로 전진하야 종전전래(從前傳來)하던 구의식구습관(舊儀式舊習慣)은 일절 부패물이라하여 심지어 상천(上天)이 부비하신 양심상 고유한 도덕윤리까지 등한시하고 극단에 침입하야 왕을 교(矯)하다가 직(直)에 과(過)하난 폐(弊)가 불무(不無)하도다…”

이상재는 “민족주의든 사회주의든 인류의 삶에 없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은 민족주의가 주장하는 한국 민족이나 사회주의가 말하는 세계민족과 모든 계층을 동일한 사랑으로 대하심을 믿었다. 그리고 민족운동을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서로 연락(連絡)하여 사랑이라는 한 말로 시작하고 마치게 되면, 세계의 평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피력했다. 그것은 장차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정의와 윤리가 중심이 되는 공동체적 유기체였다.

“민족주의는 곳 사회주의의 근원이오 사회주의는 곳 민족주의의 지류(支流)라 민족사회가 상호연락하야 애(愛)의 일자(一字)로 시시종종(始始終終)하면 세계의 평화서광(平和曙光)을 지일가도(指日可覩)할지니…”

그러나, 이상재는 전체적으로는 부정적인 시각에서 사회주의를 파악하고 있다. 사회주의가 너무 과격하게 발전해 간직해야할 역사적 전통을 단절시키고, 극단에 빠져 하나님이 부여하신 양심이라는 도덕 윤리까지 등한히 한다는 것이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81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또한, 사회주의는 사상적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남의 것을 억지로 빼앗아 나눠 가진다고 봤다. 그러한 행동을 보아도 사회주의는 분명히 반기독교적이었다. 이상재는 1923년 한국에 온 신임 미국 선교사들에게 행한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인(人)의 심리상태는 변(變)?야 공산주이니 과격주의이니 침략주의이니 군국주의이니 ?? 것이 ?겨 천국을 생각지 안케됨?다. 연(然)이나 여(余)도 이상주의를 반대?여 책망치아니?? 것은 이상에 말?? 주의가가 됨이외다. 세상 군국주의나 침략주의는 인명을 살상케?되 우리 주의는 인명을 구원코져?이며 ? 피공산주의자? 타인의 금전을 탈취?야 분식(分食)고져되 우리 주의? 빈자(貧者)에게 금전을 공급?여 주 것이외다. 세상사?은 모든 것을 다 자기의 소유로 지(知)며 이러케 된 것이 자기의 수단으로 된 것이라고 생각?으로 임의로 자아의 이익을 위주?나 오인(吾人)은 모든 것이 다 상제의 섭리하에 잇스며 ? 상제의 원조로 보전?여가며 ? 우리의게 재(在)? 것은 다 상제?서 위임?신줄 지(知)??고로 만사를 상제의 의지를 종(從)?야 수행??것이외다…”

이상재는 사회주의는 억지로 남의 것을 빼앗아 나눠어 가지지만 기독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줘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세상사람들과는 달리 자기의 소유는 자기의 것이 아니며 어려운 이웃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인식한다.
바로 그렇게 행함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이상재는 1920년대의 암울한 현실에서 일본의 침략과 군국주의, 이 틈을 헤집고 들어와 메시아로 군림하려는 공산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기독교의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생각은 1926년의 글에서도 계속 확대돼 나타난다.
이상재는 개인이 갖고 있는 부(富)나 물질을 공동체적 유기체로서의 상호부조의 정신으로 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것은 장차 사회복음을 표방하며 농촌운동을 벌였던 장로교 목사 배민수나, 보다 적극적인 분배를 주장했던 이대위 등의 기독교 사회주의자들보다 소극적인 것이었지만 매우 진보적인 생각이었다.

“… 사지가지(私智假智)는 상천(上天)의 조화와 권능을 망각하고 자기의 정욕과 사리만 시상(是尙)하여 인여인(人與人)에도 여시(如是)하고 국여국(國與國)에도 여시(如是)하여 상천이 인류계에 풍사(豊賜)하신 리용후생(利用厚生)의 물질을 자기의 사유로 오인하여 식탐과 사기가 일가시증(日加時增)한즉 비세계의 결국은 장래 여하(如何)한 참경(慘景)에 지(止)할까 …(중략)… 천지간 충충만만(充充滿滿)한 물질은 상천이 인류계에 리용후생(利用厚生)하도록 보시균비(普施均?)하심을 확인하여 호상간(互相間) 자비인애(慈悲仁愛)가 일진시취(日進時就)한즉 비세계의 결국은 장래에 여하(如何)한 낙원에 승(昇)할까”

이상재에게는 부(富)와 물질(物質)이 독립을 회복하는 힘을 목표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부(富)와 물질은 인류에게 상호부조의 도덕적인 도구가 돼야 한다. 만일 부와 물질을 사욕(私慾)을 위한 것으로 여긴다면 결국 인류는 자멸(自滅)하게 된다고 봤다. 그러나, 이것들을 가지고 개인뿐만이 아니라 각 민족 간에도 상호부조를 하면 지상낙원(地上樂園)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물질이란 민족간 서로 사랑으로 상부상조해야 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이 인류에게 애초부터 부여하신 도덕의 실행 도구라는 인식이었다.
이상재는 물질을 적극적으로 분배하는 것이 하나님에 속한 사람이 해야 할 도덕이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라고 봤다. 사회주의자들이 경제적 분배와 계급적 평등만을 주장했지만, 이상재는 그러한 것들을 포함한 통전적(統全的) 도덕을 주장했다. 이상재는 사회주의자들에게 “현 세계를 얼굴을 바꾸겠다고 하지 말고, 마음을 바꾸는 것”이 신세계(新世界)를 건설하는 진정한 혁명방법이라고 권유했다. 유가적(儒家的)인 설명으로 한다면, 먼저 기(器)을 바꾸려 하지 말고 도(道)을 바꿔야 신세계의 건설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상재에게는 그러한 방법이 오히려 적극적이었다.
사회주의계도 조선기자단 회의에서 이상재의 도덕적 권위를 인정했고, 신간회 수장으로서의 이상재를 거부하지 않았다. 또한, 김윤식의 사회장(社會葬)을 치르지 못하도록 강경한 입장을 보였던 이들이 이상재의 장례식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해 한국 최초의 사회장(社會葬)이 될 수 있게 했다.
이러한 일련의 현상들을 볼 때 도덕중심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어떠한 주의(主義)나 어떠한 사상으로 나아가든지 적(敵)이 있을 수 없다”는 이상재의 주장은 그대로 증명됐다. 여러 가지를 종합해 볼 때, 이상재가 신간회의 회장이 된 것은 민족주의 좌파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사상적으로 지원했던 이상재가 필요했고, 사회주의 입장에서는 이상재가 일정부분 계급 평등과 경제분배에 대한 사상적 일치점을 가진 인물로 최소한 자신들의 사상적 목표를 방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82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이상재는 전 세계가 사랑과 도덕이 공동선(共同善)이 되는 윤리적 공동체와 인화(人和)로 연결된 세계를 꿈꿨다. 동도(東道)의 세계관의 이상과 실천을 기독교에서 발견했던 이상재로서는 동도(東道)의 문명 아래 있던 한국 민족이 하나님의 선민(選民)으로 그와 같은 공동체를 만들 의무와 자격을 가졌다고 확신했다.
이상재는 비도덕 국가인 일본이 공동의 적이라는 인식 아래 협동해 연합할 수 있었던 신간회에 대해 장차 도덕중심의 민족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바탕이 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신간회 같은 민족 협동의 공간이 있어야만 객관적 규범과 사회 규범이 괴리감이 없는 사회, 즉 기독교의 공동선(共同善)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공동체로의 비약(飛躍)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제6장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사상과 구조 분석

6.1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사상

이상재의 사상의 구조는 대립되는 두 요소, 혹은 범주 사이의 논리적 관계를 변증법적으로 해석하는 구조이다. 즉 초월적인 것과 지상적인 것이 궁극적으로는 통합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하나님은 역사 전체에 대한 주권을 갖고 계시고 역사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전개된다고 본다.
즉 이상재는 하나님을 역사의 궁극적 주재자요 역사의 중심으로 이해한다. 일제치하라는 현실적 절망과 시련, 고난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는 역사의 주재이신 하나님을 믿는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의의 승리를 믿으며 그의 통치를 믿는다.

“… 죄악으로 오염한 전쟁의 구세계는 탈거(脫去)하고 인휼(仁恤)로 구조된 화평의 신세계를 ○하겠다 하였으나 시대가 나의 축원을 불청(不聽)하는지 나의 축원이 시대에 불합(不合)함인지 축원과 시대는 호상배치(互相背馳)되어 사상과 정신과 지식과 사업이 개선취신(改善就新)하기는 고사하고 거익악화(去益惡化)하여 죄악에 죄악을 가(加)하고 구염(舊染)에 구염(舊染)을 첨(添)하매 비세계는 전쟁와(戰爭窩)를 작(作)하여 이와 같이 전진불기(前進不己)하면 필경 전지구(全地球) 십칠조(十七兆) 인류의 생명은 독탄참봉하(毒彈慘鋒下)에 제공할 뿐이로다. …(중략)… 화옹(化翁)의를 비기(飛機)를 막위(莫違)하여 동설층빙(凍雪層氷)과 률열필발(?烈?發)이 인생의 축원을 불응불성(不應不成)할 뿐 아니라 지구상 동식만류(動植萬類)가 거개동사멸절(擧皆凍死滅絶)할 듯하나 복뢰(腹雷)가 일발(一發)하고 랍호극궁(臘?極窮)한즉 일조양선(一條陽線)이 종하이생(從何而生)하여 욕알불득(欲?不得)하여 태탕(?蕩)한 대운(大運)과 인온(??)한 화기(和氣)가 병자를 소(甦)하며 사자를 생(生)케 하는도다.”

이상재가 기대하는 것은 현재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장차 보여질 것이요, 지금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것이다. 현재는 절망과 질곡의 시대요 죄악으로 오염된 세계이지만, 이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일시에 변혁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미래의 그 세계는 모든 인간들의 “질시(嫉視)는 사랑으로 탐욕(貪慾)은 청심(淸心)으로, 강퍅(剛愎)은 온유(溫柔), 교만(驕慢)은 겸양(謙讓)으로 이기(利己)는 조타(助他)고, 사감(私憾)은 정의(正義)로” 대응하고 변화해 “전란(戰亂)이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되어 평화를 누리고자 아니하여도 평화를 누리지 않을 수 없는”세계이다. 이상재의 이러한 기대감은 종말론적 기대감이다. 장차 도래한 세계는 궁극적으로 초월적인 것과 지상적인 것이 통합돼 완성된 세계이며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충만한 완전한 세계이다. 이상재는 이러한 세계를 하나님 나라라고 인식했다. 이상재는 일제치하라는 절망의 시대에서도 하나님 나라가 장차 임할 것이라는 완성된 미래를 보며 청년들에게 낙관적 희망을 피력한다.
이렇게 궁극적으로 초월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가 융합이 될 완성된 미래를 기대하고 있는 이상재에게 있어서는 미국이나 한국, 동양과 서양의 문명이 나눠지지 않는다. 이상재는 미국 선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지금제군(只今諸君)께 말씀드리는 여(余)를 견(見)하실 시(時)에 조선인(朝鮮人)으로 지(知)하시고 제군(諸君)은 미국인(米國人)이라 하시면 쳣재 큰 오해(誤解)로 생각(生覺)하는바이외다. 아등(我等)은 본래제군(本來諸君)과 동국(同國)이이나 비세상(比世上)에 래(來)할 시(時)에 제군(諸君)은 미국(米國)이란 려관(旅館)에 유숙(留宿)하게 되엿고 여(余)는 조선(朝鮮)이란 려관(旅館)에 유(留)하게 된거시외다. 연고(然故)로 아등(我等)의 국가(國家)는 미국(米國)이나 조선(朝鮮)이 아니오 천국(天國)인 까닭에 아등(我等)의 사업도 천국(天國)을 위함이외다.”

완성된 새로운 세계를 기대하고 있을 때 자동적으로 지역(地域)은 극복된다. 또한 문명도 나뉠 수 없다. 동양과 서양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주권(主權) 아래 통합된 통일성을 갖게 된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83>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이상재는 한국이 전통적으로 도덕을 갖고 있다고 인식했다.
그리고 한국의 문명은 전통적으로 하나님을 알아보았다고 피력한다. 이것은 이상재가 도덕이라는 매체를 통해 완성된 세계를 그리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 이상재는 도덕의 완성도를 가지고 장차 이루어질 완성된 세계를 보았다. 이상재가 볼 때, 역사적으로 한국은 완성된 세계를 가졌던 적은 없었다.
역사적으로 한국은 미완성의 나라였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한국은 도덕을 숭상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중심이 되는 완성된 세계를 이룰 바탕을 가졌다고 보았다. 이상재는 선교사들에게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사상적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우리는 원래(元來) 상제(上帝)를 공경(恭敬)하엿습니다만은 중간(中間)에 나려와서 이젓삽니다.
고로 우리는 상제(上帝)를 부지(不知)하던 민족(民族)이 아니닛가 무신교자(無神敎者)와는 대단(大端)히 다르다할수 잇습니다. …(중략)…예수께셔도 당시(當時)에 현상(現狀)을 잘 이해(理解)하시고 전도(傳道)하엿삽니다. 기시(其時) 유태(猶太)의 현상(現狀)은 현금(現今) 조선현상(朝鮮現狀)과 여(如)하엿삽니다.
고(故)로 유태인(猶太人)은 육적(肉的) 국가관념(國家觀念)을 가스나 주(主)는 늘 령적관념(靈的觀念)으로 대답(對答)하셧나이다. 연칙(然則) 제군제군(諸君諸君)은 신국실현(神國實現)이 아직 미성(未成)한 조선인(朝鮮人)으로 하여곰 신국실현(神國實現)에 미저(微底)한 성공(成功)을 하게 인도(人道)하려면 주(主)와 또는 기(其)를 위하야 충성(忠誠)을 다한 제군(諸君)의 선배(先輩)들의 족적(足跡)을 밟아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이상재가 볼 때,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모든 인간들에게 충만하고 부족함이 없도록 진정한 평화의 세계를 주셨고, 모든 국가에 도덕을 권리로써 주셨다.
따라서 모든 나라는 완전한 세계를 완성할 바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들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하나님의 세계를 죄악의 세계로 만들었다. ‘노아 홍수 사건’이나 ‘소돔과 고모라 사건’은 인간의 세계가 본래의 모습대로 회복되도록 경고하신 하나님의 계시였다. 제1차 세계대전도 죄악된 세상을 본래의 모습대로 만들고자 하는 하나님의 경고와 계시이다.

“…금(今)에 상제(上帝)께셔 비세계(比世界)를 일차개조(一次改造)치 아니면 아니되겟다 하시고 석일(昔日)과 갓치 홍수(洪水)로 멸망(滅亡)을 하심이 아니라 인(人)을 택(擇)하시고 인(人)을 명(命)하샤 인(人)을 회오(悔悟)케 하시며 인(人)을 개조(改造)케하실때 비(比)와갓흔 상제(上帝)의 뜻이 구주전란(?洲戰亂)의 풍운(風雲)이 비로소 끝친 금일(今日)에 전세계(全世界)에 낫타나 보이지 아니하는가 비개조(比改造)를 뜻하신 하나님의 뜻이 우리압헤 당하야 밧을바 실적(實蹟)이 올시다.”

이상재는 일본이 외적인 힘을 믿고 하나님이 한국에 주신 권리를 침탈하였다고 인식했다.
일본은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중심이 되는 세계를 거부한 것이요, 하나님의 주권을 침탈한 것이다.
따라서 일본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에 의해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미래의 완성된 세계를 가지고 현 세계를 바라볼 때, 일본의 지배하에 있는 한국은 착취와 억압의 땅이었고 일본에 의해 강점당하고 있는 암울한 시대는 벗어나아야 할 시대였다.
이상재가 볼 때, 일본의 근대 문명은 정신적 도덕문명(道)이 없는 외형적인 힘만을 추구하는 문명이었다. 도덕의 완성도를 가지고 일본을 바라볼 때, 일본은 하나님이 없는 사회였다.
이상재의 항일의 논리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상재는 각 시대마다, 한국이라는 공간뿐만이 아닌 각 지역마다 어떤 형태의 독자적인 사명과 책임이 따로 있다고 본다. 이 사명과 책임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개인뿐만이 아니라 각 국가에도 애초부터 부여하셨다.
곧 사명과 책임의 본질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主權) 아래에 있다고 인식한 것이다.
그리고 그 매체를 도덕으로 보았다. 여기에서 이상재가 말하는 도덕은 통전적(統全的)인 것으로서, 기독교의 중심 원리이며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바탕으로 나타난다.
또한, 하나님의 정의와 인도가 한국이라는 공간과 한국 민족, 교회나 기독교 안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국가와 민족, 교회를 포함한 사회에서도 그대로 나타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도덕이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 개인과 세계라는 공간(空間)과 역사 전체라는 시간(時間) 안에 내재(內在)해 있다고 보고 있다.
즉 도덕을 매체로 하여 역사를 보고 있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84>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이상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자국인(自國人)을 존숭(尊崇)치 아니하고 타국인(他國人)을 존숭(尊崇)함이 불가(不可)하다는 주견(主見)으로 곡출(曲出)함이나, 도덕(道德)이라 하는 것은 천하(天下)에 공공(公共)한 것인 고(故)로 하국하방(何國何邦)이든지 진역(畛域)을 불분(不分)하고 도덕구존(道德俱存)한즉 존존경경(尊尊敬敬)하나니, 시(是)는 기도기덕(其道其德)을 존경(尊敬)하므로 기인(其人)을 존경(尊敬)함이라. …윤리(倫理)와 도덕(道德)은 상제(上帝)께서 우리 인류(人類)에게 부여(賦與)하신 원칙(原則)이요 요소(要素)이거늘, 만일 비(比)에 일이(一離)하면 야만(野蠻)이요 금수(禽獸)니라. 우리 조선민족(朝鮮民族)의 금일(今日)의 현상(現狀)을 묵상(?想)하라 소유자(所有者)가 무엇인가. 형식(形式)이나마 피부(皮膚)나마 윤리(倫理)이니 도덕(道德)이니 근근잔여(僅僅殘餘)한 것뿐이 아닌가.”

이렇게 도덕이 중심이 되는 변혁된 사회를 꿈꾸었던 이상재는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실천되는 세계를 하나님의 나라라고 인식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재하시기 때문에 반드시 이러한 세계가 올 것이라고 낙관했다. 이상재는 역사의 변혁을 기대하며 청년들에게 다음과 같이 자신의 희망을 피력하고 있다.

“우리 신청년(新靑年)이여 심(心)을 신(新)하며 언(言)을 신(新)하며 행(行)을 신(新)하며 풍조(風潮)를 신(新)하며 정신(精神)을 신(新)하며 용감(勇敢)을 신(新)하며 신갑자(新甲子) 신세계(新世界)를 어서 조성(造成)할지어아. 경(更)히 일언(一言)으로 권(勸)하노니 신약(新約) 묵시록(?示錄) 제 21장 1절로 8절까지 일독(一讀)할진저.”

이상재는 장차 이루어질 새로운 세계를 위해 청년들에게 사명과 책임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와 자비와 평화 가운데서 살게 될 새로운 사회를 위해 적극적인 도덕적 개조(改造)를 이루는 것이다. 그는 역사의 변혁을 꿈꾸며 일제치하라는 질곡과 절망의 시대를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극복하기를 주장한다.
여기에서 모든 인간과 사회, 국가가 하나님의 정의와 인도 속에 살아야 한다고 인식했을 때, 착취와 억압을 거부하게 된다. 그리고 평등과 사랑을 주장하게 된다. 이러한 인식 아래 그는 “인류평등과 계급타파라는 정의의 기치”를 내걸었던 사회주의자들에게 일정 부분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이들 사회주의가 반기독교 운동을 벌일 때, 한국 기독교의 일부가 거짓된 사랑과 거짓된 의(義)로 가득하여 세상에 굴복한다며 기독교인들의 정숙주의(靜肅主義)를 비판한다. 이상재가 비판하는 것은 기독교인들도 이기심을 가지고 질곡의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상재에게 있어 경제적인 욕심을 갖고 사욕을 채우는 것은 죄악이다. 그러나 이상재는 강하게 사회주의자들을 비판한다. 사회주의자들의 평등관이 강제적이기 때문이다. 이상재는 일본의 문제뿐만이 아닌 한국 안의 차별적 계층의식을 거부한다.
장차 이루어질 완성된 세계에 살아가야 할 한국 민족, 즉 공동체적 유기체로서의 민족관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누구에게나 도덕과 함께 이것을 유지하고 확보할 권리를 주셨다는 전제에서 평등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이 말하는 평등은 다른 사람의 금전(金錢)을 탈취하여 강제적으로 똑같이 나누겠다는 발상이다. 그는 한국 YMCA에 하류층의 인사들이 입회할 수 있도록 하였지만 특정한 계층만을 선호하지 않았다. 오히려 혁명과 힘에 의한 사회변혁의 방법도 거부한다. 따라서 안창호계의 사회진화론적 태도를 거부하고 있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85>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한편, 이상재에게는 정신세계와 물질세계가 동일했다. 이상재는 정신세계‘道’는 형이상자(形而上者)요, 물질세계는 형이하자(形而下者)라는 주자학적 세계관을 극복하였다. 그러나, 순서에 있어서는 정신세계가 먼저였다.
이상재가 말하는 정신세계는 도덕을 우선하는 세계를 말한다. 도덕을 중심으로 할 때,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태도가 발휘되어 물질의 세계로 외연(外延)된다고 본다. 정신세계를 바탕으로 하여 외연된 세계가 바로 공동체적 유기체요 하나님의 나라라는 인식이었다. 이상재는 인간의 존엄성과 생존권이 보장받는 사회를 주장한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물질을 나누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와 같은 것을 도덕으로 보았다.

기독교의 중심과 핵심을 ‘하나님 나라’로 보았고 그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 실현의 가능성 또는 가시적 예표를 ‘도덕’이라고 보았던 이상재는 전통적으로 도덕문명을 지녔던 한국 민족공동체는 기독화(基督化)를 이룰 수 있는 바탕을 가진 민족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한국 민족이 하나님이 품부하신 도덕을 지키고 우선으로 할 때, 역사의 변혁이 일어나 독립은 물론 미래의 완성된 하나님 나라가 실현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도덕우선’을 부르짖었던 그의 사회운동은 결국 한국의 민족공동체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를 실현시키려고 했던 그의 사상적 주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사회운동은 민족공동체의 기독화를 위한 운동이다.

6. 3 이상재 기독교 사회사상의 논리적 틀

이상재의 행동은 일관되게 그의 사상적 사고에서부터 출발을 한다. 이상재의 사고(思考)를 분석하여 보면 일관되게 지속되는 논법을 발견한다. 그것은 우선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두 가지 요소는 구별은 되지만 분리가 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원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으나 그것은 이분법적으로 분리되지 않고 통합되어 나타난다.

먼저, 그는 유가(儒家)의 지식인 출신답게 도(道)와 기(器)를 분석하고 있다. 그는 이 두 요소를 분리시키지 않는다. 도(道)와 기(器)는 서로 떨어져 별개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서로 섞이어 혼합되지 않는다. 곧 도(道)와 기(器)는 서로 엄격히 구분되는 것(相分)이지만 도(道)는 기(器)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相須). 그런데 이상재는 도(道)와 기(器)를 상수(相須)하고 상분(相分)할 수 있다는 동도서기(東道西器)의 논리에 근거해서 미국을 모델로 하여 동기(東器)를 단절하고 서기(西器)를 접목시키려 하였다. 기독교에 입교 후에 그는 동도(東道)에는 동기(東器)가, 서도(西道)에는 서기(西器)가 나오게 된다는 사상적 자각을 하였다.
이상재는 한국의 전통 문명 속에 서도(西道)와 공유되는 도덕문명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서도(西道)의 가시적 예표를 동양과 마찬가지로 도덕으로 보았다.
서도(西道), 즉 기독교의 중심을 ‘하나님 나라’로 보고 하나님 나라의 실현의 가능성 또는 가시적 예표를 도덕(道德)이라고 할 때 한국이 전통적으로 지켜오려 했던 도덕중심의 정신적 가치체계는 서도(西道)안에서 통합될 수 있다.

그래서 이상재의 사고(思考)에서는 동양문명과 서양문명이 도덕을 매체로 하여 통합을 이룬다.
‘도덕’을 매체로 하여 이질적인 두 요소를 통합시키려는 이상재의 사고(思考)는 일관성을 갖는데, ‘백목강연(百牧講演)’을 보면, 그는 하나님의 역사 경륜과 계시를 도덕을 매체로 하여
인식(認識)하고 있다.

이상재는 1차 세계대전의 참혹성을 바라보면서 이 전쟁이 하나님께서 죄악세상을 본래의 모습대로 회복시키시기 위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이 세상이 “불망본(不忘本), 자비(慈悲), 청결(淸潔), 공평(公平), 진실(眞實), 청렴”의 6가지를 행해야 하는 하나님의 뜻을 어길 때마다 하나님은 세상을 멸망시키시고 다시 복건(復健)하셨다. 노아의 홍수사건과 소돔과 고모라의 사건이 그러한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라고 보고 있다.

또한 예수께서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중보자가 되시는 본(本)을 보이셨는데 인류는 다시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강(强)한 힘과 물질을 앞세워 타인(他人)과 타국(他國)을 침탈하는 죄악의 세계를 추구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세계 1차 대전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사랑하셔서 멸망시키시기 전에 도덕(道德)으로 개조(改造)된 세계를 이루라는 하나님의 뜻이요 계시라고 주장하고 있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86>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이상재에게는 이렇게 구별되는 두 요소가 구별은 되지만 분리되지 않고 있다. 그의 사고(思考)의 틀 안에서는 도(道)와 기(器)가 구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 것처럼 세상의 영역과 기독교의 영역, 개인 윤리와 사회윤리, 한국과 세계가 도덕을 매체로 하여 통합된다. 이 둘은 구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다.

이상재는 그 사회가 도덕을 지향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초월성의 여부를 감지했다. 일본의 근대문명을 경험한 이상재는 일본의 사회에서 도덕문명과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주장한 반면 미국사회에서는 도덕문명과 하나님을 발견하였다고 확신한다.
이상재는 일본이 외형적인 힘만을 지향하는 사회로 도덕문명이 없고, 미국은 내적인 도덕적인 힘으로부터 외연되는 사회로 이상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한다고 인식하였다. 이상재는 현실세계를 통하여 초월적인 하나님의 세계의 여부를 판단하고 있어 초월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도덕을 매체로 하여 통합시키고 있다.
사회운동에 있어서도 이상재는 YMCA가 기독교인만의 영역이라는 인식이 없으며, 또한 한국 사회가 비기독교인들의 영역이라는 인식이 없다. 이상재에 있어서 한국 사회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할 영역이었다.

따라서 이상재에게는 기독교의 영역과 세상의 영역이 구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다. 또한 이상재는 한국과 세계, 한국문명과 서양문명, 개인윤리와 사회윤리를 구분하지만 분리시키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이 각 개인과 각 국가에 애초부터 도덕을 품부하셨다고 믿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각 개인과 사회는 도덕을 실행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인식에서 한국과 세계는 분리되지 않고 있으며, 서양문명과 한국문명도 우열(優劣)을 가리지 않는다.
한편, 이상재는 한국 민족은 전통적인 도덕문명을 지켜왔던 민족으로서 유기체적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상재가 주장하는 유기체적 공동체는 개인은 사회와 국가가, 국가와 사회는 개인이 도덕을 실행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는 사회를 말한다. 따라서 이상재는 사회주의가 개인의 사유재산의 권리를 침범하는 것을 비판한다.
이상과 같이 이상재의 사고는 일정하게 구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 ‘통합’의 구조를 갖고 있다.

이상재는 각 시대마다 또는 지역마다 어떤 형태의 독자적인 사명과 책임이 따로 있다고 주장하지만, 도덕은 불변자(不變者)로서 사명과 책임의 본질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이상재에게 있어서 사상의 두 요소는 서로 구분이 되지만 분리를 지향하고 있지 않다. 도덕은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위한 매체로서, 구분되는 두 요소를 하나로 통합시키고 있다.

제7장 결론
7.1 요약

본 연구는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회사상을 고찰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상재의 기독교 입교 전과 입교 후의 활동과 사상을 비교하면서 그의 활동과 사상을 알아보려 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먼저,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는 고종(高宗)의 절대적 신임 하에 개화정책(開化定策)을 수행하였던 박정양의 문하생으로 박정양으로부터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
박정양은 박규수와의 접촉을 통해 그의 사상을 이어받았고 이러한 사상은 이상재에게도 이어졌다. 미국에서 돌아온 이상재는 박정양과 함께 근대 교육제도 개혁을 주도하였는데 이상재의 가장 큰 공헌은 실업(實業)을 학문적 위치로 부각시키고 신분철폐와 기회균등이라는 민권(民權)의식을 심어주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러한 실업관은 북학사상의 가장 중요한 핵심중의 하나였다.

다시 말해, 이상재에게 있어 기(器)로서의 실업(實業)은 도(道)와 비교할 때 더 이상 하위개념(下位槪念)에 속하지 않았다.
북학파의 사상적 계보하에 있던 박규수의 사상은 다시 서구의 근대문명을 받아들이되, 전통적인 세계관을 서구문명을 기존의 체제를 유지·발전시키는데 한 도구로 생각했던 그룹과 서구문명을 절대적으로 우위의 문명으로 인식하여 동도(東道)를 서도(西道)로 동기(東器)를 서기(西器)로 대체하려는 그룹으로 분화된다.
기존 체제 아래서 서구문명을 받아들이려던 개화그룹은 다시 서구문명을 사학(邪學)으로 보았던 김윤식이 주도하였던 동도서기파와 서구문명이 정신문명을 갖고 있다고 보았던 이상재, 박정양이 주도하였던 정동개화파로 나뉘어진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87>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전통적 동도(東道)의 세계관과의 완전한 단절을 주장했던 개화그룹의 사상은 김옥균과 박영효가 주도했는데, 이들에게는 서기(西器)가 중심이고 서도(西道)는 서기(西器)를 위한 부차적인 것으로 이들의 사상은 정확히 말하면 서기서도(西器西道)의 사상이다. 이상재에게 있어 동도(東道)는 불변자(不變者)였다. 이러한 이상재의 개화인식은 동도(東道)를 불변자(不變者)로 인식하여 유지하려한 점에서 김옥균의 개화인식과 차별이 되며 미국문명도 정신문명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김윤식의 개화인식과 구별이 된다.

다음 장에서는 기독교의 입교 후 이상재의 사상의 전환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보았는데, 1902년까지만 해도 이상재는 미국의 사회체제가 서도(西道)인 기독교에 의해 움직여진다고 인식은 했지만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거부했다. 왜냐하면 조선의 전통문명인 동도(東道)가 불변자(不變者)라는 강한 집착 때문이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활동도 동도적(東道的) 세계의 실현을 위한 것이었다.

1902년, 한성감옥에 투옥된 이상재는 선교사들의 정기적인 방문과 사역(使役), 한성감옥에 비치된 기독교 서적과 신비한 체험을 통해 기독교에 입교(入敎)하였다. 이를 계기로 서도(西道)가 진정한 불변자라는 인식으로 전환된다. 그러나 기존에 가졌던 동도적(東道的) 이상(理想), 즉 도덕적(道德的)인 가치체계(價値體系)가 기준이 되는 유기체적(有機體的)인 공동체를 포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개신교에 입교(入敎)하면서 더욱 강화(强化)된다.

이상재는 기독교의 중심을 ‘하나님 나라’로 보았고 ‘하나님 나라’는 객관적인 도덕이 중심이 되는 유기체적 공동체이다. 그러한 인식 하에 한국이 전통적으로 지켜오려 했던 도덕중심의 정신적 가치체계는 기독교 안에서 통합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을사늑약(乙巳勒約)후, 일본의 보호국(保護國) 아래에서 국권회복운동(國權回復運動)은 의병에 의한 무장투쟁과 실력양성운동인 자강운동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상재는 이러한 의병에 의한 무장투쟁운동이나 자강운동단체(自强運動團體)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있다. 그것은 이상재의 사상이 기독교에 입교(入敎)한 후 변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상재의 활동방식은 더 이상 문명개화를 목적으로 하여 직접적인 힘에 의해 사회체제를 바꾸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개개인에게 기독교가 갖고 있는 도덕력이 성취되면 자동적으로 에너지로 외연(外延)이 되어 나라와 사회의 정돈, 세계의 자유와 평화가 실현된다는 논리를 펼쳤다.

이상재는 근대적 힘의 문명을 우선 하는 것을 비판하였던 것이다.
이상재는 하나님이 개인이나 국가에게 도덕적 권리를 주셨고 이것을 힘으로 빼앗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한국을 침탈한 일본은 하나님께 도전한 것이요 결국 멸망한다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그는 서구 근대국가들도 용(用)과 기(器)를 내세워 불변자인 도(道)를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 도덕은 피조세계의 불변자요 하나님이 태초에 만들고 부여한 권리였기 때문이다.

이상재가 볼 때,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모든 인간들에게 충만하고 부족함이 없도록 진정한 평화의 세계를 주셨고, 모든 국가에 도덕을 권리로 주셨다. 따라서 도덕을 갖고 있는 모든 국가는 도덕이 중심이 되는 완전한 세계를 만들기 위한 바탕을 갖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의 중심을 하나님 나라, 가시적 예표를 도덕이라 하였을 때 도덕문명을 전통적으로 중시하였던 한국은 진정한 문명국이요, 하나님의 나라(도덕이 중심이 되는 유기체적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바탕을 가진 나라요, 진정한 문명국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상재에게는 윤치호나 이승만에서처럼 전통파괴에 대한 인식이 나타나지 않는다.
다음 장에서는 이상재의 활동의 중심부였던 Y.M.C.A에서의 활동과 그 사상을 살펴보려 하였다.

이상재는 1904년 2월에 출감(出監)하자, 게일(James Scarth Gale)을 따라 연동교회와 YMCA에 입적(入籍)하였다. 그것은 한국의 전통적 도덕문명을 높이 평가하여, 서구 세계와 문명의 척도를 같이하는 게일과 이상재 사이에 사상적 공유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상재는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후에 나타난 자강단체(自强團體)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실질적인 참여를 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들 자강단체들이 한국의 전통적(傳統的) 가치관을 모두 부정했을 뿐만 아니라 국권이 침탈(侵奪)당한 원인이 근대적 힘의 문명을 제대로 수용치 못한 한국 내부에 있다고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민회의 안창호도 이러한 인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YMCA에서 교육부 위원장, 종교부 총무, 총무를 역임한 이상재는 기독교 복음으로 근대 시민을 육성하기 위해 실업교육과 성서교육에 힘썼다. 그가 실업교육과 성서교육을 강조한 이유는 전인교육을 통해 인간화를 실현시키고 인간의 도덕적·정신적·사회적 능력을 향상시켜 자신이 꿈꾸던 장차 도래하게 될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고 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장차 보여질 하나님 나라는 정신문명과 함께 물질문명이 어느 한 쪽의 치우침이 없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88>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이상재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전통적인 신분관을 극복하고 한국의 모든 계층의 사회·문화의 장(場)으로 YMCA를 탈바꿈시킨 것은 한국 YMCA를 하나님의 정의와 윤리가 중심이 되는 공동체적 유기체로서의 이상적(理想的) 세계, 즉 하나님 나라의 상징적 공간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이상재는 천황제 이데올로기 하에 전개된 일본의 근대문명에 정신문명이 없다고 판단했다. 도덕의 완성도를 가지고 일본을 바라볼 때, 일본은 하나님이 없는 사회였다. 일본의 대표적인 사회진화론자이며 명치천황을 시독(侍讀)하였던 카토 히로유키(加藤弘之)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조물주에게서 동일한 자유, 자치, 평등한 권리를 갖고 있다는 천부 인권론을 비판하였다. 사회적 유기체와 다른 사회적 유기체 사이에는 단지 강자의 권리만이 유효하기 때문에 도덕이나 법이 결코 필요치 않다고 보았다.
일본의 기독교 주류였던 조합교회와 일본 YMCA는 1910년의 한일 강제병합을 일본 근대문명의 승리로 축하하며 한국을 문화적 열등국으로 보았다. 일본의 YMCA가 반기독교적인 일본의 체제와 외형적인 힘의문명을 오히려 애호(愛好)하는 것을 이상재는 용인할 수 없었다. 기독교적인 도덕이라는 것은 개인뿐만이 아니라 각 국가에도 해당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상재가 한국 YMCA를 일본 YCMA산하에 두려는 유신회 음모를 강하게 거부하였던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1913년, 이상재가 YMCA의 총무가 되었다는 것은 한국 YMCA가 민족적 독자성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국 기독교청년회 연합회’ 헌장(憲章)의 3조 2항은 회원을 복음주의자에 한정시킴으로서 한국 YMCA가 복음주의의 사회적 연장선상에 있음을 선포했다. 그러나 이상재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상재가 기대하는 것은 개인 구령적 신앙이 아니라 장차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였던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1920년 9월에 감리교회의 양주삼과 벌인 제사논쟁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이상재는 기독교의 중심을 하나님 나라로 보았고 도덕과 윤리를 그 예표로 보았기 때문에 우상숭배의 의도(意圖)를 가지지만 않는다면 제사문제는 그에게 있어 지엽적 문제에 불과했다.

한편, 1925년 3월 23일에 조직된 흥업구락부에 대해서도 이를 주도한, 이승만과 이상재 사이에 일정한 인식의 차이가 존재하고 있었다. 정치가였던 이승만은 정치적 자금 지원과 민족운동의 헤게모니를 잡기 위해 흥업구락부의 조직을 종용했다.
그러나 종교가인 이상재는 이승만과 달리 흥업구락부를 한국의 도덕문명을 회복하는 도구로 보았다.

이상재가 서북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났던 안창호계의 민족운동지침을 거부하였던 것도 지역적 갈등이 아니라 사상적 갈등이었다. 안창호가 주도하였던 신민회의 궁극적 목적은 한국이 서구 근대문명의 외적인 힘을 갖추는 것이고, 안창호계도 이것을 위해 한국이 전통적으로 갖고 있던 모든 것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안창호와 안창호계의 인식은 이상재에 의해 강한 비판을 받는다. 이상재는 하나님 나라를 꿈꾸었고 그 가시적 예표를 도덕으로 보았기 때문에 한국이 전통적으로 숭상했던 도덕문명을 단절시키지 않았다.

다음 장에서는 기독교 민간단체인 Y.M.C.A 뿐만이 아니라 일반 사회에서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이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살펴보았는데, 이상재는 1923년 3월 29일 민립대학 기성회의 발기총회(發起總會)에서 ‘조선민립대학 기성준비회’ 위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민립대학설립운동은 1년이 채 안되어 실패를 자인(自認)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당시의 천재지변, 모금에 대한 일본 방해와 더불어 동아일보계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우파진영이 1924년 초에 발표한 동아일보의 사설 ‘민족적 경륜’을 통해 일본의 체제의 현실성을 인정해야한다는 자치론을 들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민족주의 우파계의 주장은 이상재에게도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민립대학은 설립이 구체적으로 진행되는 단계에 이르자 이상재의 이상(理想)과 상당한 괴리점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것은 민립대학의 취지가 일본의 정책이 근간이 되는 ‘우승열패(優勝劣敗)’의 사회진화론적 이론에 근거하여 변질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상재는 설립의 초기만큼 열성을 보이지 않는다. 민립대학 설립운동의 실패 후, 이상재는 동아일보계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우파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사회활동과 운동을 펼친다.

1920년 3월 5일에 창간호를 냈던 조선일보는 1924년 9월 12일에 경영난을 이유로 판권이 신석우에게 넘어갔다. 이것은 사상적으로는 조선일보가 일본의 외형적인 힘의 추구를 극복하고자 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때를 계기로 조선일보는 창립시 내걸었던 ‘신문명(新文明) 진보주의(進步主義)’를 거부하고 ‘조선민중의 신문’을 표방했기 때문이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89>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신석우는 이상재를 사장으로 청빙(請聘)하고 동아일보계를 거부하였던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을 입사시켰다. 이상재가 조선일보 사장직을 수락했던 것은 항일지(抗日誌)로 새롭게 자리매김하는 조선일보의 성격이 자신의 사상과 부합되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조선일보가 도덕 중심의 공동체적 유기체, 즉 하나님 나라를 염원하는 자신의 사상 실천의 실험장이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921년의 워싱턴 군축회담 후, 이상재는 국제사회가 한국인의 염원과는 달리 일본의 한반도 강점(强占)과 동북아의 패권(覇權)을 용인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 그것은 인도와 정의를 중시한다고 믿었던 미국과 서방 기독교국(基督敎國)에 대한 실망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일보는 일본과 타협할 수 없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조선일보의 이러한 태도는 이상재의 사상과 부합(附合)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계의 민족주의 우파에 대한 저항은 신간회 태동의 한 요인이 되었다.

이상재가 신간회 태동에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는 불투명하다. 그러나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이상재에게 민족 지도자로서의 상징성뿐만이 아니라 양 진영이 모두 인정할 수 있는 사상적 합치점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먼저, 민족주의 좌파에 입장에서 보면, 이들은 민족주의 우파의 민족개량주의에 대해 이상재가 확고하게 거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상재를 선호하였다. 그리고 이상재가 주장하는 도덕이 중심되는 공동체적 유기체,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상은 정의와 계급 평등을 부르짖던 사회주의자들에게도 공유점으로 인식되었다.

이상재도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인류평등과 계급타파라는 정의의 기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이들 사회주의가 기독교회를 공격하며 반종교운동을 전개할 때, 이상재도 기독교인들의 정숙주의(靜肅主義)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이상재는 전체적으로는 부정적인 시각에서 사회주의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회주의가 극단에 빠져 하나님이 부여하신 양심이라는 도덕과 윤리을 등한히 하고 강제로 남의 것을 빼앗아 나누어 가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상재에게 부(富)와 물질은 인류에게 상호부조의 도덕적인 도구가 되어야 했다. 사회주의자들은 경제적 분배와 계급적 평등만을 주장하였지만 이상재는 그러한 것들을 포함한 통전적(統全的) 도덕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상재가 신간회의 회장이 된 것은 민족주의 좌파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사상적으로 지원하였던 이상재가 필요하였고, 사회주의 입장에서는 이상재가 일정부분 계급 평등과 경제분배에 대한 사상적 합치점을 가진 인물로 최소한 자신들의 사상적 목표를 방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90>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이상재의 입장에서도, 비도덕 국가인 일본이 공동의 적이라는 인식아래 협동하여 연합할 수 있었던 신간회가 장차 도덕중심의 민족공동체를 이룰 바탕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다음 장에서는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사상을 구조적으로 분석해 보았다.
이상재는 각 시대마다 또는 지역마다 어떤 형태의 독자적인 사명과 책임이 따로 있다고 본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公義)와 사랑은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역사 속에 불변(不變)의 형태로 나타난다. 곧 사명과 책임의 본질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主權) 아래에 있다고 인식했다.
이 사명과 책임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하나님의 정의와 윤리가 중심이 되는 세계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그러한 세계를 하나님 나라라고 보았고 가시적 예표를 도덕이라고 보았다. 여기에서 이상재가 말하는 도덕은 통전적(統全的)인 것으로서, 기독교의 중심 원리이며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바탕으로 나타나고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 개인과 세계라는 공간(空間)과 역사 전체라는 시간(時間) 안에 내재(內在)해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도덕문명을 지녔던 한국 민족공동체는 기독화(基督化)를 이룰 수 있는 바탕을 가진 민족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한국 민족이 하나님이 품부하신 도덕을 지키고 우선으로 할 때, 역사의 변혁이 일어나 독립은 물론 미래의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실현에 이바지 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도(道)를 우선으로 할 때 기(器)가 자동적으로 외연(外延)된다는 그의 유가적(儒家的) 인식은 기독교 입교 후에도 그 유형이 그대로 계승되어 한국 민족이 기독교의 도덕을 우선으로 할 때, 일제 하에 있는 한국에 역사의 변혁이 일어나 독립은 물론 세계 평화에까지 이바지 할 것이라는 확신으로 발전케 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도덕이 중심이 되는 변혁된 사회가 하나님의 나라요,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고 확신하였다.
‘도덕’의 우선을 부르짖었던 그의 사회운동은 결국 한국의 민족공동체를 기독화하기 위한 그의 사상적 확신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사회운동은 민족공동체의 기독화를 위한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이상재는 하나님의 나라가 도덕을 중심으로 할 때,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태도가 발휘되어 물질의 세계로 외연(外延)된다고 본다. 따라서 그는 다른 민족주의계들이 주장하는 실력양성운동을 통한 직접적인 민족 개량주의적인 방법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인식 하에 전개되었던 일본에 대한 저항은 외형적인 힘을 강조했던 민족주의 우파보다 오히려 선명했다. 따라서 한국의 민족운동을 가시적 힘의 척도를 가지고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7.2 평가
본 연구를 통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첫째, 기독교 입교(入敎) 전, 이상재의 사상적 계보는 실학(實學)의 북학파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북학파는 박지원과 그의 손자 박규수, 그리고 한 지류(支流)로서 박정양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상재는 30여 년 동안 박정양의 정치 문하생으로 밀접하게 행동을 같이했기 때문에, 그의 사상과 활동 역시 박정양과 북학파를 빼놓고는 설명될 수 없다.
둘째, 지금까지는 개화파를 동도서기(東道西器)와 서도서기(西道西器)의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왔다. 그러나, 본 연구 결과 개화파는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동도서기(東道西器) 유형을 김윤식의 동도서기파(東道西器派)와 박정양과 이상재를 중심으로 한 정동개화파로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전자(前者)는 서도(西道)를 도덕문명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후자(後者)는 도덕문명으로 인정하였다는 점에서 구별된다고 할 수 있다.
셋째, 기독교에 입교한 이후에 이상재의 문명관은 동도서기적(東道西器的) 유형에서 서도서기적(西道西器的) 유형으로 바뀐다. 그러나 김옥균의 그것과는 분명한 차별을 갖고 있다. 김옥균의 서도서기(西道西器)는 서기(西器)가 중심이고 서도(西道)는 서기(西器)를 위한 부차적인 것인 반면에, 이상재가 받아들인 서도서기(西道西器)는 서도(西道)를 중심으로 하면 서기(西器)는 자동적으로 외연(外延)이 된다는 구조를 갖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에 김옥균의 개화사상은 서기서도(西器西道)로 표현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회심 후, 이상재는 서로 다른 도(道)와 기(器)를 접합시킬 수 있다는 동도서기(東道西器)의 유형을 버리고, 서도(西道)에서 출발하면 서기(西器)가 외연된다는 서도서기(西道西器)를 선택하는 변화를 겪게 된 것이다.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 <91·끝>

 


기독교 입교 전 이상재의 활동과 사상

 

 

넷째, 이상재는 기독교로의 회심 후, 변화된 사상에 따라 자강(自强)에 의한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한 사회활동에 참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1905년의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 대한자강회 등 애국계몽단체와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다섯째, 이상재는 기독교의 중심과 핵심이 하나님 나라라고 보았고 [도덕]을 가시적 예표라고 인식하였다.

그리고 동도(東道)의 도덕적 이상과 실천이 기독교 안에 있다고 믿었다. 그는 전통적으로 도덕문명을 숭상했던 한국은 문명적 바탕을 가진 나라라는 인식을 가졌다.
따라서 한국의 전통문명을 하등(下等)의 것으로 인식하여 단절을 주장하였던 안창호계와는 차별된 한국관(韓國觀)을 보인다. 따라서 서북을 중심으로 한 안창호계의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이상재의 반감은 헤게모니를 쥐기 위한 지역적 갈등에서 온 것이 아니라, 사상적 차별에서 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섯째, 이상재가 단순히 일본이 한국을 침략한 것에 대한 무조건의 항일이나 거부가 아닌, 일본의 문명관에 대한 사상적 대립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가 조선일보 사장직과 신간회장직을 수락하였던 것은, 일본의 현실적 체제를 인정하여 일명 [자치론]을 주장하였던 동아일보계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우파에 대한 반발이었다.
이상재는 1927년 3월 27일, 7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고 그의 곁에 있었지만 당장의 현실적인 틀, 곧 민족이라는 범주 안에서만 그를 인식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기독사상 가운데 승화되어 있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이상 세계를 알지 못하였고 그의 기독교적 사상의 이상(理想)을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의 이상은 정의의 궁극적인 승리에 대한 역사의식, 신앙을 통한 행위규범과 도덕적 성실, 국권의 회복과 민강(民强)에 대한 성취가 결국은 역사를 주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다는 신념이었으며, 역사가운데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대감이었다.
그러나, 신앙생활이 교회라는 통로를 거치지 않을 때 나타나는 신앙적 한계점과 현상이 그의 기독교 사상 가운데 나타났다. 즉 기독교 신앙이 요구하는 인간의 죄에 대한 심각성과 속죄의 은총이라는 교리를 사상에 연결시키지 못했다.

또한 그의 사상은 상징성은 강했지만 교회나 실질적 운동과는 간극(間隙)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사상적 가치가 폄하(貶下)될 수 없다.
이상재는 자신의 사상을 통해 기독교가 갖고 있는 도덕적 품격의 숭고함과 사회적 의무를 우리에게 말해주었다.

본 논문을 연구할 때, 자료의 제한으로 인해서 각 시기마다 변화되는 이상재의 사상적 변화를 상세하게 추적하기가 힘들었다. 현재 이상재에 관한 자료는 그가 기독교에 입교하기 전인 1904년 이전의 자료와 1920년대에 집중되어 있다.
본 논문도 사상의 변화를 살펴보는 데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상재의 사상이 시기별로 어떠한 구체적 변화를 거쳤는지에 대한 상세한 연구가 아쉬움으로 남는다.
앞으로의 남은 연구 과제는 한국 Y.M.C.A 안에서의 이상재와 윤치호의 지도력이 한국 Y.M.C.A의 이념적 성격에 어떻게 구체적으로 연결되고 관련이 되는지 하는 문제이다. 그것은 출신과 사상적 성격이 구별되는 두 사람이 시기를 달리하면서 Y.M.C.A를 지도하였고 Y.M.C.A를 중심으로 함께 협력하며 활동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연구는 한국 기독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Y.M.C.A의 신학적 정체성을 밝히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 2003-11-03  ~  2005-1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