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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여성

천하한량 2007. 1. 11. 20:46
제29대 태종대왕(太宗大王)의 이름은 춘추(春秋)요, 성은 김씨다. 용수(龍樹)-혹은 용춘(龍春)이라 고도 쓴다-각간(角干)으로서 추봉된 문흥대왕(文興大王)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진평대왕의 딸인 천명부인(天明夫人)이다. 왕비는 문명황후(文明皇后) 문희(文姬)니 곧 유신공의 누이동생이다.

문희가 용꿈을 사다

처음에 문희의 언니 보희(寶姬)가 꿈에 서악(西岳)에 올라가서 오줌을 누었더니 오줌이 서울에 가 득 찼었다. 이튿날 아침에 아우 문희에게 꿈 이야기를 했더니 문희는 듣고 청했다.
"내가 이 꿈을 사겠어요."
"무엇을 주겠느냐?"
"비단치마를 주면 되겠어요?"
"좋아."
문희가 옷깃을 벌리고 꿈을 받을 때 보희는 말했다. "어젯밤 꿈을 너에게 준다." 문희는 비단치마로써 꿈값을 치렀다.
그 후 열흘만에 유신은 춘추와 같이 정월 상오(上午) 기일(忌日)-위의 <거문고갑을 쏘다(射琴匣)>에 나 타났으니 최치원의 설이다-에 자기 집 앞에서 공을 차다가-신라 사람은 공차기를 농주(弄珠)의 희(戱)라고 한다-짐짓 춘추공의 옷을 밟아서 옷고름을 뜯어지게 하고는 말했다.
"내 집에 들어가 서 달기로 합시다."
춘추공은 그 말에 따랐다. 유신은 아해(阿海)에게 옷고름을 달아 드리도록 하 니 아해는 "어찌 사소한 일로써 귀공자에게 경속히 가까이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사양했다.-고 본에는 병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아지(阿之)에게 옷고름을 달아 드리도록 시켰다. 춘추 공은 유신의 뜻을 알아차리고 마침내 문희를 사랑했다 이후로부터 춘추공은 자주 내왕했다.
유신 은 문희가 아기를 밴 것을 알자 꾸짖었다.
"네가 부모에게 혼인할 것을 고하지도 않고 아이를 배 었으니 무슨 일이냐?"
이에 온 나라에 선언하고 그 누이 문화를 불태워 죽이려 했다.
어느 날 선 덕여왕이 남산에 놀러가심을 기다려, 유신은 뜰 가운데 나무를 쌓아놓고 불을 지르니, 연기가 일 어났다. 왕이 그것을 바라보고 무슨 연기냐고 물으니 시종하는 신하들이 아뢰었다.
"아마 유신이 자기 누이를 불태워 죽이려는 것 같습니다." 왕이 그 까닭을 물었다. "그의 누이가 남편도 없이 몰래 임신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누가 한 짓이냐?"
때마침 춘추공이 왕을 모시고 앞에 있다 가 얼굴빛이 아주 변했다. 왕은 말했다.
"그것은 네가 한 짓이니 빨리 가서 목숨을 구하라." 춘추 공은 임금의 명을 받고 말을 타고 달려가서 왕명을 전하여 죽이지 못하게 하고 그 후 공공연히 혼례를 행했다.

통일의 군주 태종대왕

진덕여왕이 세상을 떠나자 영휘(永徽)1 5년 갑인(654)에 춘추공은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린 지 8년만인 용삭(龍朔)2 원년 신유(661)에 세상을 떠나니 나이가 쉰아홉이었다. 애공사(哀公寺)3의 동 쪽에 장사지내고 비를 세웠다.
왕은 유신과 더불어 꾀와 힘을 다하여4 삼국(三國)을 통일하니 나 라5에 큰 공로를 세웠으므로 묘호(廟號)를 태종(太宗)이라 한다. 태자법민(法敏)과 각각 인문(仁問)`문왕(文王)`노단(老旦)`지경(智鏡)`개원(愷元)들은 모두 문희가 낳은 이다. 그 전에 꿈을 샀던 징조가 여기에 나타났던 것이다. 서자는 개지문(皆知文) 급간(級干)6과 차득(車得) 영공(令公)7, 마 득(馬得) 아간(阿干)8이라 한다. 딸까지 합하면 다섯 명이다. 왕은 하루에 쌀 서말과 꿩 아홉 마리 를 잡수셨는데, 경신년(660)에 백제를 멸망시킨 후로는 점심진지는 그만두고 다만 조석만 들 뿐이 었다. 그러나 하루를 계산해보면 쌀 여섯 말, 술 여섯 말, 꿩 열 마리였다.
성중의 물건값은 배 한 필에 벼가 30섬, 혹 50섬이었으니, 백성들은 성군(聖君)의 시대라고 불렀었다. 왕이 태자로 있을 때에 고구려를 치려고 군사를 청하러 당나라에 들어갔다. 당나라 황제가 그 풍채를 보고 칭찬하 여 신성한 사람이라 하고는 기어이 머물게 하여 시위(侍衛)로 삼으려 했으나, 굳이 청하여 본국에 돌아왔다.

백제의 의자왕

이때에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義慈)는 무왕(武王)의 맏아들이다. 용맹하고 담력이 있으며 부모에 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가 있으므로 사람들이 해동(海東)의 증자(曾子)9라고 일컬었다.
정관 15년 신축(641)에 왕위에 오르자, 왕은 주색에 빠져서 정사(政事)가 문란해지고 나라가 위태해졌 다. 좌평(佐平)-백제의 관작 이름-성충(成忠)이 극력으로 간하여도 듣지 않고 옥안에 가두니 그는 몸이 여위고 지쳐서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성충은 글을 올려 말했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 을 잊지 아니하옵나니, 한말씀 드리고 죽고 싶습니다. 신(臣)이 일찍이 시세의 변화를 살펴보니 반드시 병란이 있을 것 같습니다. 대개 군사를 부림에 있어서는 그 지세를 잘 가려야 될 것이오 니, 상류(上流)에 머물러서 적병을 맞이하면 능히 보전(保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적병이 오 거든 육로로는 탄현(炭峴)-혹은 침현(沈峴)이라고도 하니 백제의 요새지다-을 넘어오지 못하게 할 것이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10-곧 장암(長岩)이니 또는 손량(孫梁) 혹은 지화포(只火浦) 또 는 백강(白江)이라고 한다-에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이오며, 험한 곳에 웅거하여 적병을 막아야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왕은 그 말을 살피지 않았다.

흉조가 백제를 휩쓸다

현경(顯慶)11 4년 기미(659)에 백제의 오회사(烏會寺)12-또는 오합사(烏合寺)라고 한다-에 크고 붉은 말이 나타나 주야로 여섯 시간이나 절을 돌아다녔고, 2월에는 여러 여우가 의자왕의 궁안에 들어왔는데, 흰 여우 한 마리는 좌평의 책상 위에 올라앉았었다.
4월에는 태자궁(太子宮)의 암닭 이 작은 참새와 교미했으며, 5월에는 사비수(泗 水)-부여의 강 이름-언덕에 큰 고기가 나와 죽 었는데 길이가 서른 자나 되었으며, 그 고기를 먹은 사람은 다 죽었다. 9월에는 궁중의 홰나무가 사람이 우는 것처럼 울었고, 밤에는 귀신이 대궐 남쪽 길에서 울었다. 현경 5년 경신(660) 2월에 는 서울의 우물물이 핏빛이 되었고, 서쪽 바닷가에 작은 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백성들이 이것을 다 먹을 수 없었으며, 사비수의 물이 핏빛이 되었다. 4월에는 개구리 수만 마리가 나무 위에 모여 들었고, 서울의 시민이 까닭 없이 놀라 달아나니 마치 무엇이 잡으러 오는 것처럼 놀라 엎어져서 죽은 자가 백여 명이나 되었고, 재물을 잃은 사람은 이루 다 셀 수 없었다.
6월에는 왕흥사(王興寺)13의 모든 중들은 배가 큰 물결을 따라서 절 문으로 들어오는 것 같은 광경을 보았고, 들사슴 과 같은 큰 개가 서쪽에서 사비수 언덕까지 와서는 왕궁을 향해 짖더니 별안간 간 곳을 모르게 되었다. 성중의 여러 개들이 길 위에 모여서 혹은 짖고 혹은 울다가 한참 만에야 흩어졌다. 한 귀 신이 궁중에 들어와서 크게 부르짖었다.
"백제는 망한다, 백제는 망한다."
귀신은 땅속으로 들어갔 다. 왕은 이를 괴이히 여겨 사람을 시켜 땅을 파보니, 깊이 석 자 가량 내려가서 거북이 한 마리 가 나타났다. 거북의 등에 글이 씌어 있었는데 백제는 온달 같고 신라는 초승달 같다14했다. 무당 에게 물었더니 무당은 말했다.
"온달이란 꽉찬 것이오니 차면 이지러지는 법이오며, 초승달이라 함은 아직 차지 않은 것이오니 차지 않으면 점점 차게 되는 것입니다."
왕은 노해서 무당을 죽였 다. 어떤 이가 말했다.
"온달은 꽉찬 것이고, 초승달은 미약한 것이오니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성 해지고 신라는 점점 미약해진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왕은 기뻐했다.

신라`당나라 연합군이 백제를 치다

태종 무열왕은 백제국에 괴변이 많다는 말을 듣고 현경 5년 경신(660)에 김인문을 사신으로 당나 라에 보내어 군사를 청했다. 당나라 고종은 좌무위대장군 형국공(左武衛大將軍荊國公) 소정방(蘇定方)15으로 신구도 행군총관(神丘道行軍摠管)으로 삼아 좌위장군(左衛將軍)이며 자(字)가 인원(仁遠)인 유백영(劉伯英)과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 풍사귀(馮士貴)와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방효공 (龐孝公) 들을 거느리고 13만의 군대로써 와서 백제를 치게 했다.-신라기록에는 군졸이 12만 2천7 백11명이요, 병선이 1천9백 척이라 했으니 [당사]에는 이것을 자세히 말하지 아니하였다.
또 신라 왕 춘추를 우이도 행군총관( 夷道行軍摠管)을 삼아 신라 군사를 거느리고 그들과 합세하게 했 다.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城山)16에서 바다를 건너 신라국 서쪽 덕물도(德勿島)17에 이르 니 신라왕은 장군 김유신을 시켜 정병(精兵) 5만을 거느리고 가게 했다. 의자왕은 이 소식을 듣고 여러 신하를 모아서 싸우고 지킬 계책을 물으니, 좌평 의직(義直)이 진언했다.
"당나라 군사는 멀 리 바다를 건너왔으며 수전(水戰)에는 익숙하지 못하고, 신라 군사는 큰 나라의 원조만 믿고서 우 리를 가벼이보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만약 당군(唐軍)이 이기지 못함을 보면 반드시 두려워하여 감히 빨리 나아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당군과 결전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달솔 (達率)18 상영(常永)등은 반대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나라 군사는 먼 곳에서 왔으므로 속히 싸 우려 할 것이니 그 예봉(銳鋒)을 당해내지 못할 것이며, 신라군사는 우리 군사에게 여러 번 패전 했으므로 지금 우리의 군세(軍勢)를 바라보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의 계책으 로서는 마땅히 당군의 길을 막아서 그 군사가 피로할 때를 기다릴 것이며, 먼저 일부분의 군사19 로써 신라군을 쳐서 그 예기(銳氣)를 꺾은 후에 편의를 엿보아 싸운다면 군사를 한 사람도 죽이 지 않고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은 망설이며 따를 바를 몰랐다. 이때 좌평 흥수(興首)가 죄를 얻어 고마미지현(古馬 知縣)20에 귀양가 있었는데, 왕은 사람을 보내어 흥수에게 물 었다.
"사세가 위급하니 어찌하면 좋겠소?"
"대개 좌평 성충이 한 말과 같습니다."
대신들은 이 말을 믿지 않고 왕에게 아뢰었다.
"흥수는 죄를 지어 귀양 중에 있으므로21 임금을 원망하고 나 라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니, 그 말을 채용할 수 없습니다. 당군으로 하여금 백강(白江)-곧 기벌포 -에 들어와서 강류를 따라 내려오되 배를 나란히 타고22 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군으로 하여금 탄현에 올라와서 소로(小路)를 따라 내려오되, 말을 나란히 타고 오지 못하게 함이 좋을 것이며, 이때에 군사를 놓아서 적군을 친다면 닭장에 든 닭과 그물에 걸린 고기처럼 될 것입니다."
왕은 말했다.
"그것이 좋겠소."

계백장군이 결사대로 분전하다

또 당나라와 신라의 군사가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말을 듣고 왕은 장군 계백(階伯)을 보 내어 결사대 5천명을 거느리고 황산(黃山)23에 가서 신라 군사와 싸우게 했다. 네 번 접전하여 네 번 다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이 다 되어 마침내 패전하여 계백은 전사했다. 당군과 신라군이 합세 전진하여 진구(津口)에 닥쳐서 강가에 군사를 주둔시키자, 문득 새가 소정방의 진연 위에서 돌아다녔다. 정방이 사람을 시켜 점을 쳤다.
"반드시 원수가 상할 것입니다."
그래서 정방이 두려워하여 군사를 이끌고 가면서 싸움을 그만 두 려 하니 김유신이 소정방에게 말했다.
"어찌 나는 새의 괴이한 것으로써 천시(天時)를 어기겠소. 하늘의 뜻에 응하고 민심에 순종하여 지극히 불인(不仁)한 자를 치는데 무엇이 상서롭지 못한 일 이 있겠소."
이에 신검(神劍)을 뽑아 그 새를 겨누니 새가 찢어져서 자리 앞에 떨어졌다. 이에 정 방은 백강 왼쪽 언덕에 나와서 산을 등지고 진을 쳐서 함께 싸우니 백제군은 크게 패전했다.
당 군은 조수를 이용하여 전선(戰船)이 서로 잇달아 북을 치고 고함을 치면서 전진했다. 정방은 보병 과 기병을 거느리고 바로 도성(都城)으로 쳐들어가서 30리24쯤 되는 곳에서 머물렀다. 성중에서는 있는 군사를 다 내어 막았으나 또 패전하여 죽은 사람이 만여 명이나 되었다. 당군은 이긴 기세 를 타서 성에 들이닥치니 의자왕은 죽음을 면하지 못할 줄 알고 탄식하며 말했다.
"성충의 말을 듣지 않다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을 뉘우친다."
드디어 태자 융(隆)-혹은 효(孝)라고도 하나 잘못이 다-과 함께 북쪽변읍(邊邑)25으로 달아나니 소정방은 도성을 포위했다.
왕의 둘째 아들 태(泰)가 스스로 왕이 되어 무리를 거느리고 굳게 지키니 태자의 아들 문사(文思)가 태에게 말했다.
"의자 왕이 태자와 함께 달아났는데 숙부께서 자기 마음대로 왕이 되었으니, 만약 당군이 포위를 풀고 물러가면 그때는 우리들이 어찌 무사할 수 있겠습니까?"
문사가 측근자를 거느리고 성을 넘어서 나가니, 백성들이 모두 그를 따랐으나 태는 막을 수 없었다. 소정방이 군사를 시켜 성가퀴를 넘어 당나라 깃발을 세우니 태는 매우 급하여 이에 성문을 열고 항복하기를 청했다.26

백제가 망하다

이에 왕 및 태자 융, 왕자 태, 대신 정복(貞福)과 여러 성이 모두 항복했다. 소정방은 왕 의자와 태자 융, 왕자 태, 왕자 연(演)과 대신`장사(將士) 88명과 백성 1만 2천 8백 7명을 당나라 서울로 보냈다. 백제에는 본시 5부`37군`2백성`76만 호가 있었는데, 이때 당나라는 이곳에 웅진(熊津), 마 한(馬韓), 동명(東明), 금련(金連), 덕안(德安)등 다섯 도독부(都督府)를 나누어 두고 우두머리를 뽑 아서 도독(都督)과 자사(刺史)를 삼아 이곳을 다스리게 하였다. 낭장(郎將) 유인원에게 명하여 도 성인 사비성(泗 城)을 지키게 하고, 또 좌위낭장(左衛郎將) 왕문도(王文度)로 웅진도독(熊津都督) 을 삼아 백제의 남은 백성을 무마하게 했다. 소정방은 포로들을 이끌고 당나라 황제에게 뵈지 당 나라 황제는 그들을 꾸짖고는 죄를 용서했다.
의자왕은 그곳에서 병들어 죽으니 금자광록대부 위 위경(金紫光祿大夫衛尉卿)을 증직(贈職)하고, 그 옛 신하들이 가서 조상함을 허용하며, 손호(孫皓)27`진숙보(陳叔寶)28의 무덤 옆에 장사지내게 하고 또 비도 세워주었다.
7년 임술(662)29에 당 나라 황제는 소정방에게 명하여 요동도 행군대총관(療東道行軍大摠管)을 삼았다가, 다시 평양도 행군대총관(平壤道行軍大摠管)으로 개칭하여, 고구려군을 패강(浿江)에서 깨뜨리고 마읍산(馬邑山) 을 빼앗아 진영(陣營)을 세우고, 드디어 평양성을 포위했으나, 때마침 큰눈이 와서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당나라 황제는 소정방을 양주 안집대사(凉州安集大使)를 삼아 토번(吐蕃)30을 평정했다. 건봉(乾封)31 2년(667)에 소정방이 죽으나, 당나라 황제는 슬퍼하여 좌효기대장군 유주도독(左驍騎大將軍幽州都督)을 증직하고 시호를 장(莊)이라 했다.-이상은 [당사]의 글이다.
[신라별기(新羅別記)]에는 문무왕 즉위 5년 을축(665) 가을 8월 경자(庚子)에 왕은 친히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웅진성(熊津城)에 가서 가왕(假王)32 부여 융과 만나서 단을 만들고 흰말을 잡아서 맹세할 때 먼 저 천신과 산천의 영에게 제사 지낸 후에 말의 피를 입가에 바르고33 글을 지어 맹세했다.
"지난번에 백제의 선왕(先王)이 순종과 반역의 이치에 어두워서, 이웃과의 평화를 두텁게 하지 않 고 인친(姻親)34과 화목하지 않으며, 고구려와 결탁하고 왜국과 교통하여 함께 잔인 포악한 일을 했으며, 신라를 침략하여 성읍을 파괴하고 그 백성을 무찔러 죽임으로써 거의 편안한 때가 없었 다.
중국의 천자(天子)는 한 사람이라고 제 살 곳을 잃은 것을 민망히 여기고 백성이 해독 입는 것을 불쌍히 여겨, 자주 사신35을 보내어 사이좋게 지내도록 달랬으나, 백제는 지세가 험함과 거 리가 먼 것을 믿고 천도(天道)36를 모만(侮慢)했다. 황제는 이에 크게 노하여 삼가 정벌을 행하니 깃발이 향하는 곳에 한 번 싸워서 백제를 평정했다.37
마땅히 그 궁택(宮宅)을 무너뜨려 못을 만 들어 후손38들을 경계하고 폐단의 근원을 아주 뽑아버려 후손39에게 교훈을 보일 것이나, 귀순한 자를 편안하게 하고 배반한 자를 정벌함은 선왕의 영전(令典)40이요, 망한 나라를 흥하게 하고 끊 어진 후사를 잇게 함은 전철(前哲)의 통규(通規)며, 일은 반드시 옛것을 본받아야 함이 이전의 사 책(史冊)에 전해오므로 전 백제왕 사가정경(司稼正卿) 부여 융을 웅진 도독으로 삼아 그 선조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그 옛땅41을 보전하게 하노니, 신라에 의지하여 길이 우방42이 되어, 각기 묵 은 감정을 풀고 호의를 맺어 화친할 것이며, 삼가조명(詔命)을 받들어 영원히 번국(藩國)43이 될 것이다.
이에 사자(使者) 우위위장군노성현공(右衛威將軍魯城縣公) 유인원을 보내어, 친히 권유시 켜 내 뜻을 자세히 선포하노니, 혼인할 것을 약속하고 맹세를 거듭하여, 희생을 잡아 피를 입가에 바르고, 함께 시종을 두텁게 할 것이며, 재앙은 나누어 맡고 환란을 서로 구원하여 은의를 형제처 럼 할 일이다. 삼가 조칙44을 받들어 감히 버리지 말 것이며, 이미 맹세한 후에는 함께 변하지 않 는 지조45를 지킬 일이다. 만약 어기고 배반하여 그 덕을 변하여 군사를 일으켜서 변경을 침범하 는 일이 있으면, 신명이 이를 살펴 많은 재앙을 내리시어, 자손은 기르지 못하게 되고 사직(社稷) 은 지키지 못하게 되며, 제사도 끊어져서 남는 것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금서철권(金書鐵券)46을 만들어 종묘에 간직해두니, 자손들은 만대에 감히 어기지 말 일이다. 신은 이를 들으시고 흠향하고 복을 주소서."
맹세가 끝난 후에 폐백(幣帛)을 단위 북쪽에 묻고, 맹세한 글을 신라의 대묘(大廟)47에 간수해 두었다. 이 글은 대방도독(帶方都督) 유인궤(劉仁軌)48가 지은 것이다.-위 의 [당사]의글을 보면, 소정방이 의자왕과 태자 융 등을 당나라 서울에 보냈다고 했는데, 여기는 부여왕 융과 만났다고 하니 당나라 황제가 융의 죄를 용서하고 놓아 보내 웅진도 독을 삼았음을 알겠다. 그러므로 맹세한 글에 분명히 말했다. 이것으로써 증거가 된다.
또 [고기(古記)]에 이런 기록이 있다. 총장(總章) 원년 무진(668)-총장 원년 무진이라면 이적(李勣)의 일인데 아랫글에서 소정방이라고 함은 잘못이다. 만약 소정방의 일이라면 연호가 용삭 2년 임술에 해당되니 평양에 와서 포위했던 때일 것이다-에 신라에서 청한 당나라 구원병이 평양 교외에 주둔하면서 서신을 보내어 군수물자를 급히 보내달라고 했다. 왕은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물었다.
"적국인 고구려 에 들어가서 당군(唐軍)의 진영까지 이르기는 그 형세가 매우 위험하오. 그러나 우리가 청한 당군 이 양식이 다 떨어졌는데 그 군량을 보내주지 않는 것도 또한 옳지 못하니 어찌 하면 좋겠소?"
김유신이 아뢰었다.
"신들이 능히 그 군수물자를 수송하겠사오니 대왕께서는 염려하지 마시옵소 서."
이에 유신`인문들이 수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 국경 안에 들어가서 군량 2만 곡(斛)을 수송 해 주고 돌아오니 왕은 크게 기뻐하였다. 또 군사를 일으켜 당군과 합세하고자 유신이 먼저 연기 (然起)`병천(兵川) 두 사람을 보내어 그 합세할 기일을 물었다.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종이에 난 새와 송아지 두 동물을 그려서 보냈다. 신라 사람들이 그 뜻을 알지 못하여 사람을 시켜 원효법 사(元曉法師)에게 물으니 원효는 그림의 뜻을 풀어주었다.
"군사를 속히 돌이키라는 말이다. 송아 지와 난새를 그린 것49은 두 반절(反切)을 이른 것이다."
이에 유신이 군사를 돌이켜 패강을 건너 려 할 때 영을 내렸다.
"나중에 건너는 자는 목을 벤다."
군사가 서로 앞을 다투어 반쯤 건넜을 때 고구려 군사가 느닷없이 쳐들어와서 미처 건너지 못한 자를 죽였다. 그 이튿날 유신은 고구려 군사를 도리어 추격하여 수만 명을 잡아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