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 맹사성의 조부와 부친
맹씨행단에는 맹희도가 살았을 무렵부터 심어져 있던 것으로 보이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다. 공자가 은행나무 그늘 아래에서 가르침을 베푼 것처럼, 이 행단에서도 맹희도가 가르침을 베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맹씨 문중에서는 맹유는 서두문동으로 들어갔고, 맹희도는 동두문동으로 들어갔다는 말이 전한다. 그러다가 맹유는 조선 개국 세력이 두문동을 불지를 때에 순절(殉節)하고, 맹희도는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에 은거하게 됐다고 한다.
어찌하여 맹희도는 한산까지 내려가게 되었을까? 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한산은 목은 이색의 고향인데, 혹시 그와 인연이 있어서 그런가 싶지만 딱히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목은 이색은 맹사성이 문과 초시와 복시에 장원급제할 때 심사관이었다. 그 당시에는 과거 심사관과 합격자 사이는 사제의 인연이 맺어졌기에 둘 사이는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맹사성(孟思誠)
맹희도(孟希道)의 아들로 호가 일명(日明) 또는 고불(古佛)이다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성품이 효성 스러워 부모의 상에 무덤 옆에 여막을 짓고 살았다.
묘 앞에 잣 나무가 있었는데, 어느날 산돼지가 나무를 부딪쳐 나무가 말라죽게 되자 맹사성이
나무를 안고 울었다.
그러자 그날 밤 산돼지가 호랑이에게 먹혀 죽어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고 한다.
세종때에 살아서 정려(旌閭)를 받아 양세정려비가 한산 맹씨 3세묘단 아래에 있었다.
태종때 부마인 도위(都尉) 조태임(趙太臨)의 사나운 횡포가 뜻이 없을 정도였는데,
공이 대사헌이 되어 집의 박안신(朴安身)과 함께 조태임을 좌부장살(坐府杖殺)시켰다.
태종은 죄가 아니라 하고 권면하였으며, 세종때에는 정승으로 있으면서 항상 검은 소를 몰고 다녔으니, 호가 흑우(黑牛)였다. 지금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모두 그렇게 칭한다.
성품이 음율(音律)에 능하여 항상 옥적(玉笛)을 불어 마을에 보랏빛 이슬을 내리게 하였으니,
훗날 사람들이 그 동네를 자로동(紫露洞)이라 불렀다.
맹사성 효자비
소 재 지 : 한산면 축동리
시 대 : 1392-1399년
유적현황 : 맹씨들의 효행사실을 기리는 비로, 맹희도의 효자비는 1392년(태조 원년)에 건립된 것이고, 맹사성 효자비는 1399년(정종 1)에 건립되었다.
맹희도의 효자비는 자연석을 약간 다듬은 사면석 전면에 효자리라는 기명이 있으며, 뒷면에 [전 전교부령맹희도 홍무이십오년 임신이월 일 지한주사 송자(신)기 호장 김경○, 석수 막심]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비의 크기는 가로 36㎝, 세로 80㎝, 두께 28㎝이다.
같은 형태의 맹사성(1360∼1438)효자비는 1399년(정종 1)에 건립되었고, 전면에는 [효자리] 뒷면 [우간의 건문원년 기묘십일월 일 입석 맹사성]이라고 새겨져 있다.
크기는 높이 120㎝, 폭 36㎝, 두께 29㎝이다. 이 마을에 전해지는 구전에 의하면 빗독거리라는 곳에 맹씨들의 묘가 많았었는데 후래 성씨들이 이를 묻었다고 하며, 맹씨들의 세거를 알려주듯 이 비의 전면 좌측에는 맹의, 맹유, 맹리 등 맹씨 선대 3대의 단묘가 있다.
맹사성은 조선시대 3대 정승의 한사람이다. 호는 일명 또는 고불이라 하였으며 맹희도의 아들이다. 벼슬은 우의정에 그치고 시호는 문정이다.
지극한 효심이 있어 부모 삼년상에 무덤에 시막을 짓고 시묘살이하니 묘앞에 잣나무가 산돼지에 부딛쳐 말라 죽음으로 그가 그 나무를 껴안고 우니 이날 밤 산돼지는 범의 먹이가 되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했다는 일화가 있다. 세종 때에 정문을 지었으니 양대의 정문의 비석은 한산 유산의 맹씨 삼대의 묘 앞에 있다.
태종(太宗)의 사위 도위(都慰) 조대임(趙大臨)이 거칠고 방종하여 법에 어긋난 행동을 함으로 그가 대사헌(大司憲)으로 있을 때 집의(執義) 박안신(朴安身)과 더불어 사헌부(司憲附)에 자리하여 곤장을 때려 죽였다. 그러나 태종은 그에게 벌을 주지 않고 정승벼슬을 주었고 세종 때에도 정승으로 있으면서 항시 흑우(黑牛)를 타고 다니므로 사람들이 흑우정승(黑牛政丞)이라 하였다.
맹사성(孟思誠) |
○ 본관은 신창(新昌)으로 한성 판윤(漢城判尹)의 아들이다. 신우(辛禑)조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세종 때 와서 좌의정을 배수하였다. 평생에 가산을 이루지 아니하였고 청백을 한결같이 하여 승상부에 있어서도 대체를 지켰다. 시호를 문정(文貞)이라 하였다. 문정은 대사헌이 되고 박안세(朴安世)는 지평이 되어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을 임금께 아뢰지 않고 고문하였다. 임금께서 크게 노하여 두 사람을 달구지에 싣고서 죽이려 하니 맹사성은 실색(失色)하여 말이 없었는데 박안세는 의기(意氣)가 태연하며 두려운 기색이 하나도 없이 소리를 높여 맹사성을 불러 말하기를, “너는 상관(上官)이요, 나는 하관(下官)이다. 그러나 지금은 같이 죽을 죄수이니 어찌 높고 낮음이 있겠는가. 나는 항상 너를 지조가 있는 선비라 일렀는데 어찌 겁내는 것이 이와 같은고. 너는 저달구지의 삐걱삐걱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하며, 드디어 시를 지어 기와 조각을 가지고 땅에 그려서 글로써 아뢰었던 바 임금께서 용서하여 죽이지 않았다. 《수어(粹語)》
○ 성품은 청백 간결하여 치산에 힘쓰지 않고 음식물은 항상 녹으로 받은 쌀로써 유지했다. 하루는 집사람이 햅쌀밥을 바치니, 공은, “어디서 얻은 햅쌀이냐?” 하니, 집사람이 말하기를, “녹으로 받은 쌀은 너무 묵어서 먹지 못하겠기에 이웃집에서 빌려온 것입니다.” 하였더니, 공은 성내며, “이미 녹미를 받았으면 마땅히 그 녹미를 먹을 것이지 왜 빌려왔느냐?” 하였다. 동상
○ 정승이 되어서는 항상 문을 닫고서 손을 만나지 않았는데, 여름에는 소나무 그늘에 앉아 쉬고 겨울에는 창포 방석에 앉았으나 좌우에 다른 물건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청백 간결하고 단아 정중하게 지냈다. 《필원잡기》
○ 선천적으로 음률을 잘 알아 언제나 피리를 쥐고 있었으며 하루에 3ㆍ4곡씩 부니, 사람들은 동구에 들어서서 피리소리가 들리면 공이 반드시 있음을 알았다. 동상
○ 공은 경자생(庚子生)이었다. 일찍이 장난삼아 계묘계(癸卯契 계묘생끼리 맺은 계(契))에 들었는데, 하루는 임금 앞에 있노라니 임금이, “공의 나이 몇이냐?” 물으니, 문정(文貞)은 경자생이라 대답하였다. 조회가 파하고 물러나가 계묘계에서는 같은 동갑이 아니라 하여 공을 계에서 쫓아 내어서 한때 웃음거리로 전해졌었다. 동상
○ 양녕대군(讓寧大君) 제(禔)가 죄로써 이천(利川)에 귀양갔는데 세종은 서울 동쪽 관외에까지 납시어 형인 양녕을 맞아들여서 연회를 배설하여 이를 위로하였다. 이튿날 양시에서는 그 접견한 일이 불가하다고 논핵하고, 좌의정 맹사성(孟思誠)과 형조 참의 신개(申槩)가 들어가 모시면서 묵묵히 한 말도 하지 않았으니 법에 의하여 죄주기를 청했다. 임금은 그대로 두고 바로 사성에게 관직에 나아갈 것을 명령하였다. 사성이 아뢰기를, “정승은 백관의 우두머리이니, 사람들이 이것을 간섭하지 못할 정도가 된 연후에야 그 직책을 다한다 할 것인데 지금 대간의 탄핵을 받고 있는 처지이니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겠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은 허락하지 않았다. 《잡기(雜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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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사성(孟思誠)
맹사성은 자는 성지(誠之)이며, 본관은 신창(新昌)이다. 한성윤(漢城尹) 맹희도(孟希道)의 아들이고, 최영(崔瑩)의 손자 사위이다. 고려 병인년(1386) 문과에서 장원하였고, 정미년(1427)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다. 치사하여 신해년(1431)에 죽으니, 나이가 72세였다. 세종이 백관을 거느리고 곡하였다.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 공의 아버지 희도는 전교부령(典校副令)인데 공양왕 때에 효행으로 정려(旌閭)하였다. 정계가 어지러움을 보고는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온양 오봉산(五峯山) 밑에 살면서 호를 동포(東浦)라 하였다. 태조 때에도 역시 정려하였다.
○ 공의 천성이 지극히 효도하고 청백하였다. 그가 살고 거처하는 집은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였으며 매양 출입할 때에 소타기를 좋아했으므로,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 공은 청결하고 검소하며 고아하여 살림살이를 일삼지 않고, 식량은 늘 녹미(祿米)로 하였다. 어느날 햅쌀로 밥을 지어 드렸더니, 공이 “어디에서 쌀을 얻어왔소.” 하고 물었다. 그 부인이 답하기를, “녹미가 오래 묵어서 먹을 수 없기에 이웃 집에서 빌렸습니다.” 하니, 공은 싫어하며 말하기를, “이미 녹을 받았으니, 그 녹미를 먹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무엇 때문에 빌렸소.” 하였다. 《무인기문(戊寅記聞)》
○ 공은 청결하고 검소하며 단정하고 후중해서 상부(相府)에 있을 때에 대체를 지녔었다. 공은 경자생이면서 장난삼아 계묘계에 들었다. 어느날 세종을 모시고 있었는데 세종이, “공은 나이가 몇이요.” 하여, 공이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물러나온 뒤 계묘계 중에서 동갑이 아니라 하여 제명되어 한때에 웃음거리가 되었었다.
공은 음률을 잘 알아서 항상 피리를 갖고 다니며 날마다 서너 곡조를 불었다. 문을 닫은 채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하지 않다가 공무에 관한 일을 여쭈러 오는 자가 있으면 문을 열고 맞이하였는데, 여름이면 소나무 그늘에 앉고 겨울이면 방 안 포단(蒲團)에 앉되,좌우에는 다른 물건이 없었으며 일을 여쭌 자가 가고 나면 곧 문을 닫았다. 일을 여쭈러 오는 자는 동구에 이르러서 피리 소리가 들리면 공이 반드시 있음을 알았다. 《필원잡기》
○ 공은 온양에 근친(覲親)하러 오갈 때에 각 고을의 관가에 들리지 않고 늘 간소하게 행차를 차렸으며, 더러는 소를 타기도 하였다. 양성(陽城)과 진위(振威) 두 고을 원이 그가 내려온다는 말을 듣고 장호원(長好院)에서 기다렸는데, 수령들이 있는 앞으로 소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므로 하인으로 하여금 불러 꾸짖게 하니,공이 하인더러 이르기를 “너는 가서 온양에 사는 맹고불(孟古佛)이라 일러라.” 하였다. 그 사람이 돌아와 고했더니, 두 고을 원이 놀라서 달아나다가 언덕 밑 깊은 못에 인(印)을 떨어뜨렸다. 후대의 사람들이 그곳을 인침연(印沈淵)이라 이름하였다.
○ 공의 집이 매우 협착하였기 때문에, 병조 판서가 일을 여쭈러 찾아 갔다가 마침 소낙비가 내리는 바람에 곳곳에서 비가 새어 의관이 모두 젖었다. 병조 판서가 집에 돌아와 탄식하기를, “정승의 집이 그러한데, 내 어찌 바깥 행랑채가 필요하리요.” 하고는, 마침내 짓던 바깥 행랑채를 철거하였다.
○ 공이 온양으로부터 조정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비를 만나서 용인(龍仁) 여원(旅院)에 들렀는데, 행차를 성대하게 꾸민 어떤 이가 먼저 누상에 앉았으므로 공은 한쪽 모퉁이에 앉았었다. 누상에 오른 자는 영남에 사는 사람으로 의정부 녹사(錄事) 취재(取才)에 응하러 상경하는 자였다.공을 보고 불러서 위층에 올라오게 하여 함께 이야기하며 장기도 두었다. 또 농으로 문답하는 말 끝에 반드시 ‘공’ ‘당’하는 토를 넣기로 하였다. 공이 먼저 묻기를, “무엇하러 서울로 올라가는공.” 하였더니, 그가 “벼슬을 구하러 올라간당.” 하였다. 공이 묻기를 “무슨 벼슬인공.” 하니, 그가 “녹사 취재란당.” 하였다. 공이 또, “내가 마땅히 시켜주겠공.” 하니, 그 사람은 또, “에이, 그러지 못할 거당.” 하였다.뒷날 공이 정부에 앉았는데, 그 사람이 취재차 들어와 뵈었다. 공이 이르기를, “어떠한공.” 하니, 그 사람이 비로소 깨닫고는 갑자기 말하기를, “죽었지당” 하니,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괴이하게 여겼다. 공이 그 까닭을 얘기하니, 모든 재상이 크게 웃었다. 드디어 그 사람을 녹사로 삼았는데, 그는 공의 추천을 입어서 여러 차례 고을 원을 지내게 되었다. 후인들이 이를 일러, ‘공당 문답’ 이라 하였다. <<연려실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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