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감영의 역사와 만남 유승광 오늘도 봄볕이 내려 쪼이는 교정은 파란 새싹으로 덮여 봄의 향연이 완연하다. 입학당시만 해도 굵직한 나무들이 교정을 가득 메워 숲 속의 요정으로 사는 기쁨을 더해주었다. 지금도 여전히 고목으로 남은 회화나무, 팽나무, 도서관 옆자리의 느티나무는 모교를 지키고 있어 항상 든든하다. 그러나 모교의 역사보다 나이를 더 먹은 고목의 봄맞이는 마냥 마음을 조이게 한다. 올해도 새싹은 여전하지만 한쪽에는 아직도 겨울잠에서 덜 깨어난 모습이다. 이 고목들의 패인 엉덩이와 제법 두꺼운 삭정이는 교정의 긴 역사를 대신하고 있다. 그 고목 나무 밑으로 둘러선 둘레 돌을 보고 있노라면 하나 둘 정도는 예사롭지 않은 돌들이다. 네모지고 둥근 저 돌은 예전에 큰 건물을 떠받치고 있던 주춧돌들이다. 아니 운동장과 강당 작은 휴식공간에 질펀하게 나딩굴고 있는 네모지고 긴 돌들도 어느 건물을 받치고 있던 돌들이다. 이 돌들이 모교의 역사와 함께 모교 이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1706년, 공산성과 공주시내 어딘가를 오고가며 자리했던 충청도 감영이 모교에 자리 잡던 해이다. 그 후 충청도 감영은 한말 충청남도 도청이 자리하다 1932년 대전으로 옮겨질 때까지 격동기 역사의 현장이었다. 이제부터 모교가 세워지기 전 역사의 현장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1706년 9월 충청도 감사 이언경은 부임 즉시 돈을 모아 감사가 근무할 수 있는 공간인 선화당을 지금의 본관 자리에 건축한다. 선화당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의 교장실로 추정이 된다. 선화당 좌우에는 호적고를 건설하고 정면에는 지금의 정문 자리에 포정사라는 문루를 건축한다. 모교에 나딩구는 초석은 선화당과 호적고 그 외 건물의 초석들이다. 모교에 자리해야 할 선화당과 포정사는 초석을 저버리고 우리의 궁금증을 더하게 저 멀리 웅진동에 최근 복원되어 있다. 그럼 선화당의 주인인 감사들은 이 땅에 무슨 역사를 남겨 놓았을까? 먼저 현재 남아 있는 유일한 조선 시대 측우기는 공주 감영(금영)에서 사용되던 것이다. 세종 때와 영조 때의 측우기는 현재 하나도 발견된 것이 없다. 지금까지 확인된 측우기는 1837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공주 감영(監營)에 설치했었던 금영측우기(錦營測雨器)뿐이다. 이것은 일본 기상청에 보관되어 있다가 1971년 3월 한국에 반환되어 지금은 기상청에 보존되어 있다. 보물 561호로 높이가 32cm, 무게가 약 6.2kg이며, 원통에는 錦營測雨器 高一尺五寸徑七寸 道光丁酉製 重十一斤 이라고 쓰여 있다. 모형이라도 만들어 모교 현관에 전시하여 후배들의 호기심과 얼을 자극하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다음으로는 1797년 충청관찰사(감사) 한용화는 도내의 모든 수령들에게 천주교인들을 체포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천주교를 없애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난폭한 조치로 많은 천주교인들이 체포되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때의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선화당 앞의 처절한 재판 광경은 눈뜨고 볼 수 없는 천주 박해의 먹구름 서서히 드리우기 시작한다. 공주 황새바위는 한국 천주교 역사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증언지 중 하나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모교에는 충청도를 관할하는 감영이 있었다. 이곳 공주 감영에서는 각 지방에서 잡혀온 천주교인들에게 심문과 무서운 고문으로 배교를 강요하였다. 고문은 화상, 구타, 채찍질, 질식, 물 고문, 잠 안 재우기 등 다양한 방법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때마다 자기가 믿는 신앙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토해내는 비명은 모교의 운동장에 잔잔하게 배어 있을 것이다. 끝까지 거절하였을 때에는 감사의 명에 의해 황새바위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는데, 충청도 뿐만이 아니라 타 지역으로부터 끌려와 이곳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홍주, 예산, 해미, 덕산, 신창, 홍산, 연산, 청양, 공주, 이인, 탄천과 충북의 청주, 진천, 연풍, 옥천 등에서 끌려와 순교를 했던 것이다. 순교자들은 참수, 교수, 돌로 맞아 죽음, 옥사, 아사, 매질 등으로 죽어 갔는데, 공주 옥에서 있었던 교수형에 대해 "옥의 벽에는 위에서부터 한 자 높이 되는 곳에 구멍이 뚫려 있다. 매듭으로 된 밧줄 고리를 죄수 목에 씌우고 밧줄 끝을 벽의 구멍으로 내려보낸다. 그리고 옥 안에서 신호를 하면 밖에서 사형 집행인이 밧줄을 힘껏 잡아당긴다. 황새바위 앞을 흐르는 제민천은 지금처럼 둑이 쌓여 있기 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넓었는데, 홍수로 범람할 때에는 순교자들의 피로 빨갛게 물들어 금강으로 흘렀다고 한다. 공주 감영록이 세상에 공개되기 전까지는 순교자들의 이름을 알 수 없었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루도비꼬)과 비롯해 300여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특히 어린이와 부녀자들까지도 온갖 고문과 회유, 공포속에서 배교하지 않고 순교로써 신앙을 굳게 지켰다. 이들은 선화당이 있던 모교에서 고문과 심문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진리이며 신념을 끝까지 지키는 의연함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은 탐관오리의 학정에 반발한 전봉준의 봉기로부터 시작되어 전주성 함락과 집강소 시기와 일본을 비롯한 외세로부터 민족의 자주독립을 지키고자 하는 항일 전쟁시기로 정리되고 있다. 동학농민운동은 안으로 조선의 부패와 모순을 시정하여 새 사회를 이루기 위한 반봉건적 성격을, 밖으로는 제국주의의 침략 정책을 경계하고 나선 반침략적 성격을 가진 농민운동이었다. 이때 11월 8일부터 11일까지 전봉준은 충청도 감영(지금의 모교)을 점령하기 위해, 공주 우금치에서 방어하고 있던 경군 및 일본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지만 패배하였다. 전봉준은 우금치 일대를 중심으로 4-50여 차례의 공격을 거듭하면서 치열한 접전을 벌였지만 희생자만 늘어갈 뿐이었다. 그때마다 전봉준은 코앞에 다가선 충청도 감영을 끝내 점령하지 못한다며 한탄을 자아냈다. 우금치에서 동학농민군의 패배는 회복하기 어려운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으며 전봉준의 체포로 농민군은 사실상 1년여 동안 전국을 뒤흔든 동학혁명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 셈이다. 전봉준과 농민군들의 점령 목표였던 충청도 감영이 바로 모교인 것이다. 당시 감사인 박제순은 감영을 지키기 위해서 일본군과 민보군을 끌어 들여 역사적인 흐름을 외면한 채 전봉준의 반봉건 반침략의 기치를 좌절시킨 것이다. 전봉준이 그렇게도 와보고 싶었던 충청도 감영 즉 공주사대부고! 우금치의 동학혁명군위령탑의 전봉준과 농민들이 오늘도 부고인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을까? 잔잔한 모교의 운동장에서 역사의 물결이 일고 있다. 과학도를 꿈꾸는 재문이와 영웅이는 금영 측우기를 거울삼아 천체를 연구하여 세계의 제일의 천문학도가 되겠다고 하며, 보미와 진선이는 인류 평화를 위하여 올바른 신념은 소수의 의견이라도 존중되어야 한다며 국제변호사를 꿈꾸고 있다. 부정과 부패가 나라의 존망을 좌우한다며 깨끗한 정치와 도덕적 지도자상을 구현하겠다며 정치가를 꿈꾸는 재영이의 주장은 오늘도 부고인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2002. 4. 17 승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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