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지역사회운동 40대 책임론
우리 고장 서천 사람들의 사회 참여지수는 그렇게 높다고 할 수 없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와 해방이후 진보지수가 제로이다. 당시 노동자들의 임금투쟁을 위한 노동운동도, 소작권 보호를 위한 소작쟁의와 적색노동조합운동도 거의 없었던 지역으로 알려지고 있다. 해방이후 전국농민조합총연맹 서천군농민조합대표로 전완석, 지창순이 참여하고, 1945년 9월 6일에는 전국인민 대표자회의 서천군대표로 구병정, 장영근, 송재옥 등이 참여하였다. 당시 이들은 서천을 대표할 정도로 지역내 조직과 역량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판단이 되지만 이들에 대한 구체적인 행적을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해방이후 서천지역의 진보적인 개혁 세력에 대한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단서를 가지고 있지 못한 상태이다. 아마도 이승만정권 시절부터 좌익 또는 빨갱이라는 사상적인 억압을 피해 그 문서나 관련자료들이 없어 졌기 때문이다. 또한 동족 상쟁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는 6·25전쟁은 일제강점기부터 친일행각을 일삼던 친일파의 행적과 친미적인 성향을 가진 지식인층의 문서들을 가족들이 불태워 위기를 모면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 실상이 파악되지 않고 있다. 그 이후 1960년대 4·19혁명에 참여하여 목숨을 잊은 노희두씨의 반독재투쟁에서 서천의 민주화 운동가를 우리는 만날 수 있다. 그 이후 우리는 좀처럼 민주화 운동세력을 서천에서 만나기 어렵다. 그러나 1970년대는 청바지 문화와 장발 문화를 경험한 소위 유신 세대가 급성장하여 확대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암울했던 시절, 키타를 매고 야간 열차를 타고 여행을 떠나며 밤새 토론하던 그 시절 문화를 접한 세대들이 서천에서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 서천에는 각종 교회, 노동조합, 농민회 등 자생적인 진보 세력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급기야는 1990년대 구체적으로 문화공간 얼을 중심으로 여러 사회 계층의 사람들이 모이고 흩어짐을 반복하였다.
그 후 각종 전문 단체들이 결집하면서 서천의 정체성을 찾아 나서거나 자신들의 전문성을 구체화하면서 전국적인 운동주체와 축을 같이하여 왔다. 1990년대를 소위 서천의 시민운동 세력의 태동기라고할 수 있다. 당시 이들은 각자 직업전선에서 자생력을 가지고 해오던 소위 민주화운동, 임금투쟁, 통일운동, 환경운동, 교육투쟁, 농민운동, 문화운동 등 다양한 직능 단체의 회원들의 일부가 서천 지역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거나 더 심화하기 위해 모이기 시작하였다.
이제 이들 단체들이 10여년간 자생적으로 성장하면서 자신들의 문제에 몰두하지 않고 낙후된 지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역량을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서천의 낙후성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지역 사회 자체의 모순으로 규정하였다. 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 끊임없는 토론과 각 개인의 전문성을 양성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그 결과 지역문제를 바르게 보도하고 비판하는 언론이 만들어지고, 서천에서 활동하는 문화 단체들이 결집하여 지역문화 축제가 전개되기도 하였다. 또한 금강을 중심으로 지역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모임과 행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최근 군사 도로 문제를 성토하며 각종 단체들이 결집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보이지 않게 시민운동을 바탕으로 정치 세력화한 면도 없지 않아 있다. 또 서천문화원을 서천 문화의 산실로 만들겠다는 각오로 문화원 세대 교체론을 들고 나왔다. 바른 시민 사회를 만들기 위한 서천사랑시민모임도 결성되어 최근 군정, 의정 등 사회 참여 운동을 하고 있다.
이렇게 서천은 1990년대를 기점으로 급 물살을 타면서 변화와 변혁을 추구하고 있다. 참보기 좋은 모습이요 미래의 서천 역사를 새롭게 써야 하는 기폭제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민운동의 주체를 어떤 특정 단체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각 분야마다 열심히 서천 지역 사회의 역량을 키워오고 있다. 바로 그들이 서천의 40대들이다. 이 40대들이 완전한 문화운동, 시민운동, 자치운동으로 결집되거나 성숙하지는 못했지만 서천 지역사회 문제에 대한 시민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어쩌면 서천 사람의 목소리 중 가장 큰 목소리가 40대라고 단정지어도 될 것이다. 지금까지 언급한 단체들의 대표나 회원들이 40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제 40대가 서천을 짊어지고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40대가 서천 사회를 책임져야한다. 여기에 서천 40대 책임론이 필요하다. 기성세대를 예우하며 신세대에게 모범을 보이며 서천을 책임지고 발전시켜야한다. 요즈음 이제 막 변화와 변혁을 위해서 출발한 서천의 40대가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정체된 느낌을 받는다. 1990년대 태동기처럼 서천 지역사회를 걱정하는 모습보다는 권력과 명예, 분열과 질투, 이해타산적인 모습이 고개를 들고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실망할 것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서천 40대가 서천 지역사회 운동에 대한 궁극적인 방향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이다. 다시 한번 서천 40대가 한자리에 모여 초심으로 돌아가 지역사회운동에 대한 회고와 전망을 논의하는 자성의 기회가 마련되었으면 한다. 역사이래 멋처럼 성장한 서천 40대가 서천의 변화와 변혁의 주체로 남길 기대한다.
우리 고장 서천 사람들의 사회 참여지수는 그렇게 높다고 할 수 없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와 해방이후 진보지수가 제로이다. 당시 노동자들의 임금투쟁을 위한 노동운동도, 소작권 보호를 위한 소작쟁의와 적색노동조합운동도 거의 없었던 지역으로 알려지고 있다. 해방이후 전국농민조합총연맹 서천군농민조합대표로 전완석, 지창순이 참여하고, 1945년 9월 6일에는 전국인민 대표자회의 서천군대표로 구병정, 장영근, 송재옥 등이 참여하였다. 당시 이들은 서천을 대표할 정도로 지역내 조직과 역량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판단이 되지만 이들에 대한 구체적인 행적을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해방이후 서천지역의 진보적인 개혁 세력에 대한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단서를 가지고 있지 못한 상태이다. 아마도 이승만정권 시절부터 좌익 또는 빨갱이라는 사상적인 억압을 피해 그 문서나 관련자료들이 없어 졌기 때문이다. 또한 동족 상쟁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는 6·25전쟁은 일제강점기부터 친일행각을 일삼던 친일파의 행적과 친미적인 성향을 가진 지식인층의 문서들을 가족들이 불태워 위기를 모면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 실상이 파악되지 않고 있다. 그 이후 1960년대 4·19혁명에 참여하여 목숨을 잊은 노희두씨의 반독재투쟁에서 서천의 민주화 운동가를 우리는 만날 수 있다. 그 이후 우리는 좀처럼 민주화 운동세력을 서천에서 만나기 어렵다. 그러나 1970년대는 청바지 문화와 장발 문화를 경험한 소위 유신 세대가 급성장하여 확대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암울했던 시절, 키타를 매고 야간 열차를 타고 여행을 떠나며 밤새 토론하던 그 시절 문화를 접한 세대들이 서천에서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 서천에는 각종 교회, 노동조합, 농민회 등 자생적인 진보 세력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급기야는 1990년대 구체적으로 문화공간 얼을 중심으로 여러 사회 계층의 사람들이 모이고 흩어짐을 반복하였다.
그 후 각종 전문 단체들이 결집하면서 서천의 정체성을 찾아 나서거나 자신들의 전문성을 구체화하면서 전국적인 운동주체와 축을 같이하여 왔다. 1990년대를 소위 서천의 시민운동 세력의 태동기라고할 수 있다. 당시 이들은 각자 직업전선에서 자생력을 가지고 해오던 소위 민주화운동, 임금투쟁, 통일운동, 환경운동, 교육투쟁, 농민운동, 문화운동 등 다양한 직능 단체의 회원들의 일부가 서천 지역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거나 더 심화하기 위해 모이기 시작하였다.
이제 이들 단체들이 10여년간 자생적으로 성장하면서 자신들의 문제에 몰두하지 않고 낙후된 지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역량을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서천의 낙후성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지역 사회 자체의 모순으로 규정하였다. 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 끊임없는 토론과 각 개인의 전문성을 양성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그 결과 지역문제를 바르게 보도하고 비판하는 언론이 만들어지고, 서천에서 활동하는 문화 단체들이 결집하여 지역문화 축제가 전개되기도 하였다. 또한 금강을 중심으로 지역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모임과 행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최근 군사 도로 문제를 성토하며 각종 단체들이 결집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보이지 않게 시민운동을 바탕으로 정치 세력화한 면도 없지 않아 있다. 또 서천문화원을 서천 문화의 산실로 만들겠다는 각오로 문화원 세대 교체론을 들고 나왔다. 바른 시민 사회를 만들기 위한 서천사랑시민모임도 결성되어 최근 군정, 의정 등 사회 참여 운동을 하고 있다.
이렇게 서천은 1990년대를 기점으로 급 물살을 타면서 변화와 변혁을 추구하고 있다. 참보기 좋은 모습이요 미래의 서천 역사를 새롭게 써야 하는 기폭제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민운동의 주체를 어떤 특정 단체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각 분야마다 열심히 서천 지역 사회의 역량을 키워오고 있다. 바로 그들이 서천의 40대들이다. 이 40대들이 완전한 문화운동, 시민운동, 자치운동으로 결집되거나 성숙하지는 못했지만 서천 지역사회 문제에 대한 시민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어쩌면 서천 사람의 목소리 중 가장 큰 목소리가 40대라고 단정지어도 될 것이다. 지금까지 언급한 단체들의 대표나 회원들이 40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제 40대가 서천을 짊어지고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40대가 서천 사회를 책임져야한다. 여기에 서천 40대 책임론이 필요하다. 기성세대를 예우하며 신세대에게 모범을 보이며 서천을 책임지고 발전시켜야한다. 요즈음 이제 막 변화와 변혁을 위해서 출발한 서천의 40대가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정체된 느낌을 받는다. 1990년대 태동기처럼 서천 지역사회를 걱정하는 모습보다는 권력과 명예, 분열과 질투, 이해타산적인 모습이 고개를 들고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실망할 것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서천 40대가 서천 지역사회 운동에 대한 궁극적인 방향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이다. 다시 한번 서천 40대가 한자리에 모여 초심으로 돌아가 지역사회운동에 대한 회고와 전망을 논의하는 자성의 기회가 마련되었으면 한다. 역사이래 멋처럼 성장한 서천 40대가 서천의 변화와 변혁의 주체로 남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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