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서천수리조합 설치 반대 운동
판교의 흥림지와 시초의 봉선지는 우리 고장 논농사의 귀중한 보고이다. 이 보고들은 서천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길산천을 서쪽으로는 판교천을 젖줄로 가지고 있다. 하지만 천방산에서 내려다본 서천 들판은 두 젖줄을 구분하지 않고 기름진 하나의 평야이다. 이 평야에서는 단위 면적당 쌀 생산이 전국 1위이다. 이렇게 많은 쌀 생산을 가능하게 한 것은 흥림지와 봉선지의 역할이 지대하다. 그래서 이번 호에서는 두 저수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발생한 1923년 서천수리조합 설치 반대 운동의 역사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일제는 산미증식 계획의 일환으로 1923년 4월 서천 수리 조합 설치를 허가한다. 서천 수리 조합의 설치 목적은 당시 서부 저수지(흥림지)와 동부 저수지(봉선지)를 설치하여 3,500정보의 논에 물을 공급하여 쌀 생산량을 증대시키는데 있었다. 이때 수리 조합 설치에 적극적으로 앞장선 사람들은 대개가 일본인 대지주와 일부 조선인 지주였다. 당시 수리 조합 설치에 적극적으로 찬성한 일본인으로는 가타끼리, 미야지마, 겸평호일 등이며 조선인으로는 서천의 지주 두왕리 김참봉(김영두), 솔리 추교영, 공주 김윤환 등이 찬성하였다. 하지만 수리조합 설치는 조합원 1/2이상 조합 토지 면적 2/3이상의 소유주의 동의를 얻어야 하나 당시 서천 수리조합은 구역내 토지 소유자 1,832명 가운데 1,016명의 동의하여 54%의 지지를 얻고, 동의자의 소유 면적이 구역내 총면적 3,262정보로 70.6%의 동의를 얻고 있다. 이 동의율은 설립 조건은 충족되지만 법정 기준을 약간 넘어 서천 수리 조합 설치 반대운동의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
다음은 동아일보 1923년 5월 6일자 사설의 일부이다. <그리하여 민간의 불평은 날로 높아 가나 한편으로 조합 당국자 들은 군청의 협력과 도청의 양해를 얻어...... 교묘히 인가를 얻었으므로 태연 자약히 지난달 26일 (1923년 4월 26일)에 군청에서 (조합원 ) 총회를 열개 되었는데 총회에 출석하라는 통지장은 몽리구역이나 피해구역이나 기타 반대자에게까지 모두 발부하여 놓고 (조합원총회) 식장에서는 일일히 감시를 하여 조합사업에 찬성할 듯한 사람 외에는 통지장을 가진사람이라도 도무지 입장을 시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일반 (조합원)은 크게 분개하야 식장으로 돌입한 일까지 있었다.> 이런 사실은 서천 수리 조합 설치 총회가 일부 일본인 대지주나 조선인 지주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한 편법 총회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후부터 일반 반대자들은 각 面에서 두 명씩의 대표자를 선발하야 대표회의를 열고 총독부에 진정서를 제출하여 필요치 아니한 수리조합의 불법태도를 들어 조합인가를 취소하도록 수리 조합 설치 반대 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그 후 1923년 5월 22일자 동아일보에 <서천 지역 126洞 인민 2,230여명이 연명 날인한 탄원서를 관계 당국에 제출고자 하여 대표의원으로 나석주, 조남천, 고광규씨 등이 5월 16일에 도당국을 방문하였는데, 지사는 마침 상경하여 내무부장과 면담한 결과“이미 허가 된 것을 다시 취소 할 수는 없으나 조직· 방법에 대하여 부정한 사건이 있으면 조사하여 본 뒤에 ‘상당하게’처치하겠다.”는 뜻으로 간담이 있었는데, 지사는 “왜 나에게는 아무 말도 없이 떠드느냐. 이미 허가된 것을 취소하는 법이 없다. 나는 아무관계가 없다.”는 등 무지한 말로 압박하려함으로 교섭위원들은 매우 분개하야 설혹 수리조합을 설치한다 하더라도 이왕의 조직 방법은 당연히 깨뜨려 버리고 새로 조직할 작정이라고 한다> 라는 기사로 보아 많은 소지주들의 지지를 받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그 후 조선일보 11월 14일자에 조합비 경감과 일본인 간부들의 횡포에 대한 비판이 강하게 제기되며, 재차 2천 3백명의 탄원서를 제출하였다는 보도가 있다. 이와 같은 노력은 서천 수리 조합장 일본인 겸평호일이 부임 6개월만에 전격 해임되고, 임익수리조합장 출신 편동화삼이 2대 조합장으로 부임한다. 또한 조합 평의원으로 창설 당시 조선 6명, 일본인 10명이었던 것이 2기 평의회에서는 조선인 10명, 일본인 8명으로 민족별 안배가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서천수리조합 설치 반대운동을 전개한 나석주와 조남천이 그들의 요구를 관철시킨 뒤 평의원 1번으로 활동하고 있어 조합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이에 우리는 나석주와 조남천의 움직임에 예의 주시할 필요성이 있다. 나석주는 군사리 군청 아래에서 살며 일본어를 못해 관직에 나가지는 못했을 뿐 서천의 유지로 행세하였다고 한다. 그가 소유한 토지는 11.8정보(35,402평)로 서천의 12대 지주였다. 결국 그는 한국전쟁 당시 담배 가게 아저씨의 신고로 대전에서 죽었다고 한다. 또한 조남천은 1899년 태어나 1950년 6·25전쟁 중 행방불명이 되어 버린 인물이다. 당시 4정보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1937년도에는 새로운 장항 개발에 조선인으로서는 유일하게 고문을 맡고 있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도평의원을 지낸바 있다. 그의 묘소는 지석리 괸돌에 있다. 송덕비에는 대농협동조합장이라는 쓰여져 있다.
궁극적으로 나석주와 조남천이 서천수리조합 반대 운동을 전개한 이유가 무엇일까? 암울한 일제 강점기에 서천 민중의 삶을 담보로 결국 자기들의 재산과 명예를 보존하는 삶을 살아 왔던 것이다. 담배 가게 아저씨의 민중 해방 염원을 저버린 그들은 죽었지만 역사는 그들을 기억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6·13 지방 선거를 얼마 남겨 놓지 않고 있다. 우리의 염원을 담보로 자신들의 영화를 꿈꾸는 모리배를 가릴 줄 아는 현명한 서천 사람이 되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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