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선리 환두대도의 비밀
서천 시초면 봉선리에서 환두대도가 발견되었다. 이 지역은 서천 공주간 고속도로 건설 예정부지로 충남발전연구원에서 문화 유적 발굴조사를 실시한 곳이다. 환두대도는 손잡이 부분을 둥그렇게 만든 큰 칼을 일컫는 말이다. 대개 환두대도는 왕이나 귀족의 무덤에서 주로 발견이 되고 있다. 금번 봉선리에서 발견된 환두 대도는 철로 만든 것으로 총 14개가 발견되었다. 환두대도 14개가 갖는 역사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 고장 서천은 금강이북에 자리하고 있어 일찍이 근초고왕 때부터 백제 영역에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곳이다. 또한 후에는 백제시대 수도였던 부여와도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아울러 금강을 통하여 웅진 혹은 사비를 해상과 연결하는 입구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우리 고장이 군사적 혹은 경제·교통의 요충지였다.
이를 반영하듯 우리 고장에는 서천에는 백제 관련 유적이 다수 분포되어 있다. 먼저 삼국시대 서천군 지역은 설림, 마산, 비중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백제 시대 이 지역의 중심지로 볼 수 있는 행정적 군사적인 중심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를 치소라고 하는데 현재까지 치소가 어디에 있었다고 단정할 만한 자료가 발견되지 않다. 그렇지만 산성과 고분, 매장문화재의 분포로 보아서 추정을 하고 있다. 비인 경우는 성북리 테뫼 산성을 중심으로 비중현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이 되며, 한산의 경우는 벽오리 산성을 중심으로 하여 마산현이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서천의 경우는 백제의 중심지가 이동한 것으로 본다. 즉 문산면 신농리에 행정적 군사적인 중심지가 자리잡고 있다 후에 서천 남산성으로 옮긴 것으로 보고 있다.
문산면 신농리를 중심으로 주변에는 백제 산성을 비롯한 백제 고분이 다수 분포하고 있다. 즉 신농리와 가장 가까운 산성으로는 최근 고속도로 예정 부지는 봉선리와 인접한 풍정리 산성이 있다. 풍정리 산성과 약간 떨어진 지원리 산성이 있다. 그리고 수암리에도 크기가 작은 토루가 있다. 이 산성들을 중심으로 백제 고분이 다수 분포한 것이 이 지역의 특징이다. 먼저 풍정리 산성과 가까운 곳에서는 이미 1994년 봉선리 폐고분에서 환두대도가 발견된 바가 있다. 또한 풍정리에는 단면 6각의 백제 고분 수기가 노출되어 있다. 또 신농리 고분, 수암리 애미정골 고분, 수암리 절골 고분 등이 다수가 분포하고 있다. 풍정리를 중심으로 한 이 지역 일대에서는 철기 무기류 조각들이 지표면에서 다수 발견되고 있어 항상 고고학적인 입장에서 주목을 받아 왔다.
예전부터 서천의 중심지는 문산 신농리라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신농리 저수지가 일제 강점기에 축조되면서 크고 작은 마을이름이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도 몇 개의 이름이 남아 있는데 그 이름이 성안 마을, 성밖기, 강당 등 이름이 남아 있다. 이 지역을 중심으로 백제 시대 서천의 행정적 군사적인 중심지를 이루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당시 살던 사람들이 사용한 무기류가 주로 환두대도이다. 이 환두대도를 껴묻거리로 사용한 것을 보면 이 집단의 성격은 군사적인 임무를 수행한 집단이라고 볼 수 있다. 금번 서천 공주간 고속도로 예정 부지에서 발견된 철도끼, 철낫, 철창 기타 유물로 보아도 군사적인 성격이 강한 집단이다. 그렇다면 환두대도는 어떤 비밀을 갖고 있을까? 한 지역에서 14개의 환두대도가 집중적으로 발견된 것은 우리 고장 서천이 군사적인 요충지였다고 볼 수 있다. 즉 근초고왕 시절 마한을 정복하기 전에 우리 고장이 금강을 중심으로 백제의 국경선일 가능이 있다. 이는 지금까지 발굴된 유적 유물의 연대가 5세기로 추정이 되고 있어 한성백제 시대 말기와 웅진시대 초기까지 상황을 살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봉선리 환두대도는 당시 서천의 토착세력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그 비밀을 이제 우리가 풀어야 한다. 오늘 7월21일 기벌포문화마당에서는 그 비밀을 풀기 위해서 봉선리 유적을 답사한다.
서천 시초면 봉선리에서 환두대도가 발견되었다. 이 지역은 서천 공주간 고속도로 건설 예정부지로 충남발전연구원에서 문화 유적 발굴조사를 실시한 곳이다. 환두대도는 손잡이 부분을 둥그렇게 만든 큰 칼을 일컫는 말이다. 대개 환두대도는 왕이나 귀족의 무덤에서 주로 발견이 되고 있다. 금번 봉선리에서 발견된 환두 대도는 철로 만든 것으로 총 14개가 발견되었다. 환두대도 14개가 갖는 역사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 고장 서천은 금강이북에 자리하고 있어 일찍이 근초고왕 때부터 백제 영역에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곳이다. 또한 후에는 백제시대 수도였던 부여와도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아울러 금강을 통하여 웅진 혹은 사비를 해상과 연결하는 입구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우리 고장이 군사적 혹은 경제·교통의 요충지였다.
이를 반영하듯 우리 고장에는 서천에는 백제 관련 유적이 다수 분포되어 있다. 먼저 삼국시대 서천군 지역은 설림, 마산, 비중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백제 시대 이 지역의 중심지로 볼 수 있는 행정적 군사적인 중심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를 치소라고 하는데 현재까지 치소가 어디에 있었다고 단정할 만한 자료가 발견되지 않다. 그렇지만 산성과 고분, 매장문화재의 분포로 보아서 추정을 하고 있다. 비인 경우는 성북리 테뫼 산성을 중심으로 비중현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이 되며, 한산의 경우는 벽오리 산성을 중심으로 하여 마산현이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서천의 경우는 백제의 중심지가 이동한 것으로 본다. 즉 문산면 신농리에 행정적 군사적인 중심지가 자리잡고 있다 후에 서천 남산성으로 옮긴 것으로 보고 있다.
문산면 신농리를 중심으로 주변에는 백제 산성을 비롯한 백제 고분이 다수 분포하고 있다. 즉 신농리와 가장 가까운 산성으로는 최근 고속도로 예정 부지는 봉선리와 인접한 풍정리 산성이 있다. 풍정리 산성과 약간 떨어진 지원리 산성이 있다. 그리고 수암리에도 크기가 작은 토루가 있다. 이 산성들을 중심으로 백제 고분이 다수 분포한 것이 이 지역의 특징이다. 먼저 풍정리 산성과 가까운 곳에서는 이미 1994년 봉선리 폐고분에서 환두대도가 발견된 바가 있다. 또한 풍정리에는 단면 6각의 백제 고분 수기가 노출되어 있다. 또 신농리 고분, 수암리 애미정골 고분, 수암리 절골 고분 등이 다수가 분포하고 있다. 풍정리를 중심으로 한 이 지역 일대에서는 철기 무기류 조각들이 지표면에서 다수 발견되고 있어 항상 고고학적인 입장에서 주목을 받아 왔다.
예전부터 서천의 중심지는 문산 신농리라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신농리 저수지가 일제 강점기에 축조되면서 크고 작은 마을이름이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도 몇 개의 이름이 남아 있는데 그 이름이 성안 마을, 성밖기, 강당 등 이름이 남아 있다. 이 지역을 중심으로 백제 시대 서천의 행정적 군사적인 중심지를 이루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당시 살던 사람들이 사용한 무기류가 주로 환두대도이다. 이 환두대도를 껴묻거리로 사용한 것을 보면 이 집단의 성격은 군사적인 임무를 수행한 집단이라고 볼 수 있다. 금번 서천 공주간 고속도로 예정 부지에서 발견된 철도끼, 철낫, 철창 기타 유물로 보아도 군사적인 성격이 강한 집단이다. 그렇다면 환두대도는 어떤 비밀을 갖고 있을까? 한 지역에서 14개의 환두대도가 집중적으로 발견된 것은 우리 고장 서천이 군사적인 요충지였다고 볼 수 있다. 즉 근초고왕 시절 마한을 정복하기 전에 우리 고장이 금강을 중심으로 백제의 국경선일 가능이 있다. 이는 지금까지 발굴된 유적 유물의 연대가 5세기로 추정이 되고 있어 한성백제 시대 말기와 웅진시대 초기까지 상황을 살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봉선리 환두대도는 당시 서천의 토착세력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그 비밀을 이제 우리가 풀어야 한다. 오늘 7월21일 기벌포문화마당에서는 그 비밀을 풀기 위해서 봉선리 유적을 답사한다.
'▒ 한산자료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시처럼 질긴 여인 김정녀 (0) | 2007.01.10 |
---|---|
훼손되는 문화재를 누가 지킬 것인가? (0) | 2007.01.10 |
한산 관아 건물이 지금의 동백정으로 오게된 연유 (0) | 2007.01.10 |
한산 읍성의 시련 (0) | 2007.01.10 |
민초의 입담에 남은 구봉서 군수 (0) | 2007.0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