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 읍성의 시련
한산 읍성’은 조선 초기,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비인읍성’이나 ‘서천읍성’과 달리 조선 중종 때 쌓았다. 한산 읍성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축성한 내륙에서 보기 드문 읍성이다. 한산 읍성은 현재 파괴가 심하여 그 윤곽을 부분적으로 밖에 확인할 수 없다.
한산 읍성의 윤곽은 한산 면사무소 뒤에서 출발하여 향교로 가는 길 옆 연립주택까지 이어지며 여기에서 다시 논길을 따라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다음 한산 시내로 진입 할 때 현수막 설치대가 있는 곳을 횡단하여 쭉 내려가면 한산소방서 진입로에 이르며 이곳에서 한산 교회로 이어지며, 다시 한산초등학교를 뒤로하여 한산 우체국을 경유하고 그 위로 올라가면 호장공 이윤경의 묘 뒤에 이르게 된다.
이와 같은 한산 읍성을 돌아본다면 읍성이 얼마나 무참히 파괴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한산 읍성의 훼손은 멀리 1894년 11월 12일 동학농민군이 읍성 점령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그 이후 한산, 서천, 비인을 1914년 서천군으로 통합되어 군청 기능을 상실하면서 일본 제국주의에 의하여 대부분 파괴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당시 한산 관아가 한산면사무소로 사용되었던 모습을 1963년 서천 사진첩에서 볼 수 있어 고풍스러움을 느낄 수 있다.
지금까지 한산 읍성은 한산 사람으로부터 외면당하여 왔다. 자존심 강한 한산사람들이 한산 읍성을 방관하는 것은 무엇 때문 인지 알 수가 없다. 서천, 한산, 비인 고을 중 아직도 논어 맹자 대학을 공부하고 배우려는 사람들이 많은 지역이 한산이다.
전통을 지키고 역사와 문화를 중요시하는 한산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부럽기까지 하다. 한산모시 문화제가 벌써 14회를 맞이하였으며, 조선 시대 생원, 진사 시험에 합격한 사람을 본다면 단연 한산 이씨가 전국에서 12번째이다.
우수한 사림 문화를 보유한 지역이 한산이다. 주변에는 문헌서원, 화산서원, 맹사성 효자비 등 다양한 유교 문화재가 산재하여 있는 고을이다.
한산 사람들은 감히 지칭한다면 한산 문화를 만들어 온 사람들이다. 한산모시, 한산 소곡주, 한산이씨 문중 문화 등 독특한 지역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산 사람들은 한산 문화 중 하나인 한산 읍성의 훼손을 방치하여 오고 있다.
1965년 한산 읍성에 있던 지금의 동백정 건물을 서면으로 보내버렸다. 그 건물을 옮겨가는 것을 반대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문화재는 있었던 곳에 있어야 그 가치가 빛나는 법이다.
또한 한산 읍성 내에 있었던 연정을 매몰하여 버렸다. 한산 시장과 노인회관 주변에 조그마한 저수지가 있었던 것이 읍성안에 있던 연정이다. 지금도 군수나 풍류객들이 그곳을 거닐며 읊은 한시가 전해오고 있다. 글 속의 연정을 이제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2003년 한산 읍성을 통과하는 외곽도로가 만들어진다고 해도 아무소리가 없다. 한산은 문화의 자존심이 강한 지역이다. 한산 모시, 소곡주, 문헌서원, 건지산성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한산모시 문화가 발전하고 좀더 우리가 잘살게 되면 우리는 틀림없이 한산 읍성을 복원할 것이다.
그때 후손들이 조상의 무능을 탓하지 않도록 한산 읍성 외곽도로 통과를 저지해야한다. 한산 사람들이 한산 문화의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다.
유승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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