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변(安邊) 관아에 누정이 있었다. 이름은 향설헌(香雪軒)으로,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이 부사(府使)로 재직할 당시에 관아 건물을 지었는데, 그 뜰에 배나무를 심고 누정을 지은 후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고 했다. 이백여 년 후 부사가 된 홍경모가 배꽃이 만발한 어느 봄날 이곳에서 노닐었는데, 그때 지은 시의 주석에 이런 내력이 적혀 있다. 그리고 그 봄이 끝나가는 3월 어느 날 안변 관아의 창고에서 홍경모는 선조부(先祖父)인 홍양호(洪良浩, 1724~1802)가 직접 쓴 편액을 발견하게 된다. 그때는 한창 만발해 있던 꽃잎이 져가고 있던 차였다. 꽃잎이 한 장씩 땅에 떨어질 때마다 그의 마음속에서 봄이 한 걸음씩 떠나가고 있었다. 그에게 꽃은 곧 봄이었다. 변심한 정인이라면 소매라도 붙들고 잡아보련만 꽃은, 봄은 쉽사리 잡히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나타난 것이 바로 선조부의 친필 편액이었으니, 어쩌면 하늘이 그를 기다려 편액이 나타나게 한 뜻이 있었을까. 편액을 보니, 같은 피를 가진 분이라 그의 마음을 먼저 알았던 것일까. 봄이 떠나가는 것을 만류하고 싶어 하는 그의 마음과 꼭 같은 뜻의 글귀였다. 하긴 그와 선조부는 여느 다른 조손(祖孫) 사이와는 달랐다. 겨우 세 살 때 부친을 여읜 그에게 선조부는 때론 엄한 아버지요, 때론 자애로운 할아버지였으리라. 문형(文衡)을 지낸 선조부는 자칫 고아라고 괄시당할 수 있었을 그의 든든한 뒷배였을 터였다. 그런 분을 이십 대 후반에 잃고 또 십여 년이 흘러 그도 어느덧 중년의 나이가 되었다. 이젠 무감각해질 만도 하건만 꽃이, 봄이, 그리고 세월이 떠나가는 것이 아쉽고 서글프다. 아니, 그런 마음은 오히려 더해만 간다. 선조부가 저 편액을 몇 세 때 썼는지 모르겠지만, 선조부가 세상을 떠날 당시 홍안의 청년이었던 그도 어느덧 손주를 볼 나이가 되었다. 선조부의 마음을 알 것 같다. 편액을 새로 칠하고 이화우(梨花雨) 흩날리는 향설헌에 높이 건다. 배꽃이 비 오듯 떨어지는 그 슬프도록 눈부신 광경 앞에 눈앞이 아득해진다. 시간이 느릿느릿 흘러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 서글프기도 하지만 든든하기도 했으리라. 이제 사람은 가고 향설헌은 북녘 땅에 있어 존재유무조차도 알 길이 없다. 그저 시 몇 줄만이 남아 그들의 봄을 증거 해 줄 뿐이다. 그렇다면 오늘 나의 이 봄은 무엇이 증거 해 줄 것인가. 내 마음인 듯 활짝 피었다 진 꽃잎을 바라보며 쓸쓸히 몇 줄 끄적여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