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 1935
photographer Unidentified
안창호 대전교도소에서 출감 후 기념촬영한 것으로 왼쪽부터 여운형, 안창호, 조만식.
여운형과 조만식은 안창호(1878 ~ 1938)의 말년생활을 끝까지 곁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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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윤봉길(尹奉吉)의 훙커우공원[虹口公園] 폭탄사건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2년 6개월을 복역한 뒤 가출옥하여 휴양 중 동우회(同友會)사건으로 재투옥되고, 1938년 병으로 보석되어 휴양 중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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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1942
photographer Unidentified
일본 도쿄 릿쿄대학 유학 첫해인 1942년 여름방학때 귀국해 친지들과 사진을 남겼다.
윤길현(뒤좌, 윤동주 조부의 육촌동생), 윤동주(뒤우)
윤영선(앞좌1, 윤동주 당숙 윤영춘의 동생), 송몽규(앞중)김추형(앞우,윤영선의 조카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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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몽규 [宋夢奎, 1917. 9. 28 ~ 1945. 3. 07]
일제 강점기에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로 일본 유학 중에 윤동주와 함께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獄死)하였다.
본적(本籍)은 함경북도 경흥(慶興)이며, 중국 지린성[吉林省] 룽징시[龍井市] 지신진[智新鎭]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났다. 이명(異名)은 송한범(宋韓範), 왕위지(王偉志), 고문해(高文海)이다.
1931년 3월 명동소학교(明東小學校)를 졸업하여 다라쯔[大拉子]의 중국인 소학교 6학년에 편입해 1년을 더 다닌 뒤, 1932년 4월 룽징의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에 입학하였다.
은진중학교 에 재학중이던 1935년 4월 중국 난징[南京]으로 건너가 김구(金九)가 광복군(光復軍)의 무관을 양성하기 위해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中國中央陸軍軍官學校)에 설치한 한인특별반(韓人特別班)에 2기생으로 입학하여 군사 훈련을 받았다.
그 뒤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가, 1936년 3월 산둥성[山東省] 지난[濟南]의 일본 영사관 경찰에 사로잡혀 본적지인 함경북도(咸鏡北道) 웅기(雄基) 경찰서로 강제 송환되었다. 8월까지 치안유지법 위반과 살인 등의 혐의로 조사를 받다가 석방되었다.
1937년 4월 룽징의 대성중학교(大成中學校) 4학년으로 편입한 뒤, 1938년 4월에는 외사촌 동생인 윤동주(尹東柱)와 함께 서울 연희전문학교(延喜專門學校) 문과에 입학하였다.
대학 입학 후 송몽규(宋夢奎)는 윤동주(尹東柱), 백인준(白仁俊), 강처중(姜處重) 등과 한국 문학 동인지의 간행과 문학작품 품평회 등을 열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하였다. 함께 유학을 떠난 윤동주는 도쿄[東京]의 릿쿄대학[立敎大學]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 그 해 10월 교토[京都]의 도지샤대학[同志社大學]으로 옮겼다.
송몽규(宋夢奎)는 교토[京都]에서 윤동주, 제3고등학교생 고희욱(高熙旭) 등과 자주 모임을 가졌는데, 1943년 7월 14일 한국인 유학생을 모아놓고 조선의 독립과 민족문화의 수호를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일본 특별고등경찰에 체포되었다.
송몽규는 ‘재쿄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사건’으로 기소되어, 1944년 4월 13일 교토 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선고 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함께 수감되었던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옥사(獄死)하였고, 송몽규도 3월 7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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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尹東柱, 1917.12.30 ~ 1945.2.16]
만주 북간도의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났으며, 기독교인인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아버지는 윤영석(尹永錫), 어머니는 김룡(金龍)이다.
1931년(14세)에 명동(明東)소학교를 졸업하고, 한 때 중국인 관립학교인 대랍자(大拉子) 학교를 다니다 가족이 용정으로 이사하자 용정에 있는 은진(恩眞)중학교에 입학하였다(1933).
1935년에 평양의 숭실(崇實)중학교로 전학하였으나, 학교에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하여 폐쇄당하고 말았다. 다시 용정에 있는 광명(光明)학원의 중학부로 편입하여 거기서 졸업하였다.
1941년에는 서울의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문과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 있는 릿쿄[立敎]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1942), 다시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로 옮겼다(1942).
학업 도중 귀향하려던 시점에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1943. 7),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그러나 복역중 건강이 악화되어 1945년 2월에 생을 마치고 말았다.
유해는 그의 고향 용정(龍井)에 묻혔다. 한편,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옥중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정기적으로 맞은 결과이며, 이는 일제의 생체실험의 일환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타계하고 말았으나, 그의 생은 인생과 조국의 아픔에 고뇌하는 심오한 시인이었다. 그의 동생 윤일주(尹一柱)와 당숙인 윤영춘(尹永春)도 시인이었다.
그의 시집은 본인이 직접 발간하지 못하고, 그의 사후 동료나 후배들에 의해 간행되었다. 그의 초간 시집은 하숙집 친구로 함께 지냈던 정병욱(鄭炳昱)이 자필본을 보관하고 있다가 발간하였고, 초간 시집에는 그의 친구 시인인 유령(柳玲)이 추모시를 선사하였다.
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첫 작품으로 <삶과 죽음> , <초한대>를 썼다. 발표 작품으로는 만주의 연길(延吉)에서 발간된 《가톨릭 소년(少年)》지에 실린 동시 <병아리>(1936. 11), <빗자루>(1936. 12), <오줌싸개 지도>(1937. 1), <무얼 먹구사나>(1937. 3), <거짓부리>(1937. 10) 등이 있다.
연희전문학교에 다닐 때에는 《조선일보》에 발표한 산문 <달을 쏘다>, 교지 《문우(文友)》지에 게재된 <자화상>, <새로운 길>이 있다. 그리고 그의 유작(遺作)인 <쉽게 쓰여진 시>가 사후에 《경향신문》에 게재되기도 하였다(1946).
그의 절정기에 쓰여진 작품들이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발간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의 자필 유작 3부와 다른 작품들을 모아 친구 정병욱과 동생 윤일주에 의해 사후에 그의 뜻대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정음사(正音社)에서 출간되었다(1948).
그의 짧은 생애에 쓰인 시는 어린 청소년기의 시와 성년이 된 후의 후기 시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청소년기에 쓴 시는 암울한 분위기를 담고 있으면서 대체로 유년기적 평화를 지향하는 현실 분위기의 시가 많다.
<겨울> <버선본> <조개껍질> <햇빛 바람> 등이 이에 속한다. 후기인 연희전문학교 시절에 쓴 시는 성인으로서 자아성찰의 철학적 감각이 강하고, 한편 일제 강점기의 민족의 암울한 역사성을 담은 깊이 있는 시가 대종을 이룬다.
<서시>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쉽게 쓰여진 시> 등이 대표적인 그의 후기 작품이다. 그의 시비가 연세대학교 교정에 세워졌다(1968).
Seoul, Korea, 1930's
photographer Unidentified
창문사 사무실에서 시인 이상, 구보 박태원, 일본에서 돌아온 김소운
박상희(朴相熙, 1906년 9월 10일 ~ 1946년 10월 6일)
photographer Unidentified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이다. 대한민국 대통령을 역임했던 박정희는 그의 동생이고, 정치인 김종필은 그의 사위이다.
일제 강점기에 신간회, 1934년 조선중앙일보의 지국장, 1935년 동아일보 기자 등 언론인으로 활동하였다.
일제강점기 1940년대 여운형이 결성한 건국동맹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구미지부를 창설 하였고, 1946년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 선산군지부 사무국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대구 10.1사건 중 경찰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 출신이며,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박상희는 1905년 9월 10일(음력 8월 12일) 경북 칠곡군 약목면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박성빈, 어머니는 백남의이다. 박상희가 9살 때인 1914년 가족과 함께 선산 구미면 상모리(현.경북 구미시 상모사곡동)로 이사갔고, 그로부터 3년 뒤에 박정희가 태어난다.
1920년 구미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박상희는 구미보통학교의 초기 학생이었다. 박정희의 증언에 의하면 처음 3년간은 4년제로 운영하면서 학무관들이 구미면 내의 가정을 방문해 가며 아이들의 취학을 유도했다 하며, 박상희도 이 무렵 학교를 다니게 된다. 박정희는 대통령 시절의 수기 '나의 소년시절'에서 '어려운 생활속에서도 어머니께서는 상희 형을 학교에 보냈다'고 회상하였다.
1923년 4년제였던 구미보통학교 졸업을 했다가 학제 개편에 맞춰 5학년에 편입을 하고, 1925년 최종졸업을 한다. 그는 향학열을 가슴에 묻고 있다가 1929년 다시 대구사범고등학교 시험에 응시하여 낙방하였다.
1970년 무렵에 당시 청와대 공보비서관이던 김종신이 박정희에게 '박상희씨가 대단한 수재였다던데요'라고 하자 박정희는 형은 대구사범 1회에 입학시험을 쳤다가 떨어졌다며 다소 퉁명스럽게 대답하기도 했다.
1920년대 말 박상희는 선산청년동맹의 준비위원과 상무위원을 겸직하고, 1928년 집행위원직으로 올라간다. 1927년 2월에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결집해 결성한 신간회 창립 후에는 신간회 간부로 항일활동에 앞장섰다.
1931년 신간회가 해소되자, 1934년 항일민족지 ‘조선중앙일보’에 입사하여 대구지국장을 맡는다. 이듬해 1935년 동아일보의 구미지국장 겸 주재기자로 옮겨 활동했다.
1944년에는 황태성과 같이 건국동맹의 일원으로 가담해 활동하다가 경찰에 체포된 상태에서 해방을 맞았다. 한편 박정희의 만주행을 반대하였다 하며, 박정희가 본처 김호남과 이혼하는 것을 반대하여 박정희를 설득, 훈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한다.
8·15광복 이후 박상희의 영향력은 대단하였다.
이는 일제강점기때 조선중앙일보, 동아일보 등 언론인으로 구미지국장 겸 주재기자로 일했고 신간회 간부로서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경력이 작용한 것이었다.
건국준비위원회의 구미지부를 창설하였고, 이어 인민위원회 지부의 내정부장을 역임하였다. 1945년 11월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회의에 선산대표로 참가하게 된다.
1946년 민주주의민족전선 선산군지부 사무국장을 맡는다.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박상희는 신탁통치 반대운동도 지도하였다. 그러나 김일성, 박헌영 등 공산주의자들이 모스크바 삼상회의 지지의 입장으로 돌아서버리자 그는 침묵을 선택했다.
1946년 10월 대구 항쟁 사건이 발생하였고 박상희는 10월 3일 구미경찰서를 공격하였으나 이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우익청년단체와 경찰이 발포한 총을 맞고 살해되었다. 시신은 대구에 살던 매제 한정봉의 집으로 옮겨져 수습되었다.
장준하, 문익환, 윤동주, 정일권 은진 중학교 동창 1930's
photographer Unidentified
뒷줄 왼쪽 장준하, 문익환, 윤동주 앞줄 정일권
장준하 선생의 장남인 장호권씨에게 확인결과 뒷줄 왼쪽에 계신 분은 장준하 선생과는 관련 없다고 하셨습니다 - 백찬홍 (장준하 선생 암살의혹규명 범국민대책위 공동대표)
장준하는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정치인으로 활동했.
유신정권 시절, 계속해서 박정희를 비판하던 장준하는 1975년 의문사를 당한다.
문익환은 통일운동가이자 목사의 삶을 살았다.
문익환은 자신의 친구인 장준하의 의문사를 계기로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윤동주는 ‘서시’, 별 헤는 밤’ 등의 시로 우리에게 익숙하다.
그는 일본 유학 중, 1943년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형무소에서 100여 편의 시를 남기고 27세의 나이에 옥중에서 요절하다.
정일권은 일제강점기 때 만주국군 장교로 지낸 친일파이다.
해방하고 나선 대한민국의 군인이 되었고, 이후 박정희의 군사쿠테타를 도와 외교관과 정치가의 삶을 산다.
문익환 [1917-1994]과 정일권[1917-1994]의 공통점
1. 1917년생 2. 함경도 태생 3. 만주 광명중학교 졸업 4. 1994 사망 정일권은 1월 17일, 문익환은 1월 18일
Seoul, Korea, 1929
photographer Unidentified
1929년 경성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한 이상이 조선인 졸업 동기 16명과 함께 찍은 졸업 기념사진.
얼굴은 굳어 있지만 정성스레 준비한 다양한 옷차림이 익살스럽다.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여자 한복을 입고 앉아 있는 사람이 이상이다
김신(金信, 1922년 9월 21일 ~ )
photographer Unidentified
사진 1948년경 손녀 효자를 안고 경교장 앞마당에서 환히 웃고 있는 백범. 오른쪽에 선 사람은 차남 신.
독립운동가, 군인, 정치인이며 공군중장, 제21대 교통부 장관, 유신정우회 소속 제9대 국회의원, 중화민국 대사 등을 역임하였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대한민국 공군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백범 김구와 최준례의 둘째 아들이다. 기업인 김진, 외교관 김양의 아버지이다.
호는 서언(瑞言),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중국 상하이에서 백범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김신의 삶은 출발점부터 고난의 연속이었다. 두 돌도 되기 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고아원에 가야 했다. 가족을 챙기기보다는 나라를 되찾는 일을 우선해야 했던 독립 운동가 집안의 비애였다.
할머니 덕에 고아 신세는 면했지만 고난은 김신을 떠나지 않았다. 세 돌이 조금 지났을 때 할머니와 함께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식민지 조선에 백범의 아들이 편히 살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일제의 감시와 회유에 시달리고 매일 가난과 싸워야 했다.
어린 나이임에도 삶의 신산함을 감당해야 했던 소년 김신은 수학여행지이던 평양에서 영혼을 뒤흔드는 만남을 한다. 일본 항공대의 비행 모습은 소년을 사로잡았다.
비행사의 꿈이 움트는 순간이었다. 백범의 아들이라는 것과 함께 김신의 삶을 지탱한 또 다른 축인 '하늘을 향한 꿈'은 그렇게 닻을 올렸다.
닻을 올린 꿈이 순항하기엔 현실이 너무도 엄혹했다. 12세에 중국으로 탈출해 9년 만에 다시 만난 아버지 김구의 목엔 거액의 현상금이 걸려 있었다.
아주 가끔, 그것도 밤도둑처럼 몰래 집에 들러야 하는 처지였다. 얼마 후 중일전쟁이 터졌고, 일본군을 피해 정처 없이 이동해야 했던 임시정부를 따라 소년 김신도 이곳저곳을 전전해야 했다. 그 와중에도 하늘을 향한 꿈은 커져만 갔다.
1944년, 청년 김신은 쿤밍에 있던 중국 공군군관학교에 입학하며 조종사를 향한 첫발을 내디뎠다. 그 후 인도에서 비행 훈련을 받던 중 형의 죽음과 일본 패망 소식을 연이어 접했다.
형을 대신해 아버지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가려던 김신을 막은 건 백범이었다. "공부를 계속해라." 그 뜻에 따라 미국으로 건너간 김신은 비행 학교를 졸업하고 꿈에 그리던 조종사가 돼 1947년 귀국했다.
한국은 요동치고 있었다. 친일파가 판치고 좌우 대립이 극심했다. 해방의 감격은 뒤로 밀리고,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분단의 먹구름이 한반도를 뒤덮었다.
1948년, 김구는 분단을 막고자 평양으로 향했다. 그 곁엔 김신이 있었다. 그러나 남북 협상 시도가 즉시 열매를 맺기엔, 분단으로 치달은 현실의 벽이 너무도 높았다.
서울에 돌아온 후 김신은 군에 입대한다. 태극 마크를 단 비행기를 몰고 하늘을 누비는 기쁨도 잠시, 운명의 그날이 찾아왔다.
1949년 6월 26일 백범이 암살된 것. 충격에 빠진 김신이 충분히 슬퍼할 겨를도 없이 후폭풍이 몰려왔다. 이승만 충성파들의 끝없는 견제, 감시, 압력, 모략이 김신을 괴롭혔다.
백범의 묘소를 참배하는 것조차 자유롭지 않았다. "아저씨"라 부르던 이승만 대통령에게 부당함을 호소했지만 소용없었다. 백범의 아들을 함정으로 밀어 넣으려는 정치적 음모에 당하지 않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나날이었다.
김일성이 밀파해 이승만을 죽이러 왔으니 돈과 총을 준비해달라며 김신을 찾아온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자신을 옭아매려 정보 기관에서 꾸민 일이었다고 김신은 회고했다.
하마터면 '김구 아들이 이승만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다'는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릴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김신은 이런 상황을 견디다 못해 한국을 떠날 생각마저 했다. 군에서도 조종간을 잡을 수 없는 한직으로 밀려났다. 그런 김신에게 다시 기회를 준 건 한국전쟁이었다.
1929년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재학 중이었던 박헌영
Photographer Unidentified
앞줄 왼편 세번째, 아시아 각국에서 온 청년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촬영.
뒷줄 오른편 끝이 베트남의 호치민, 박헌영의 왼편은 동지였던 김단아, 부인 주세죽은 가운데 줄 오른편에서 세번째.
사진 딸 박비엔나 소장
박헌영 [朴憲永, 1900 ~ 1955.12.5]
공산주의 운동가. 조선공산당 창립에 참가했고 남조선노동당을 조직했으며 그 당수의 자격을 지니고 북한의 내각 부총리 겸 외무장관이 되었다. 조선노동당이 발족하자 부위원장이 되었고 김일성에 의한 남로당계 숙청작업으로 체포되어 사형당했다.
장준하 [張俊河, 1918.8.27 ~ 1975.8.17]
동경유학시절 왼편부터 김용묵, 김익준, 장준하 1941
1941년 2월 장준하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신성학교 시절의 가까운 동기생이었던 김익준의 초청을 받은 것이다. 신성시절부터 마라톤선수였던 김익준은 신성중학을 졸업한 뒤 곧 도일하여 동양대학에서 자리를 잡았다.
뒷날 한국에서 7ㆍ8대 국회의원과 육상연맹 이사장을 지내기도 한 김익준은 활달한 성품과 천부적인 마라톤선수로서 일본스포츠계에서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는 당시 동양대학의 마라톤 선수 겸 육상 코치로서 선수합숙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김익준은 아버지 장석인의 제자이기도 하여 장준하와는 각별한 학우였던 관계로 그를 초청하고 숙식을 함께하게 되었다. 학우의 이런 배려가 아니었다면 장준하는 가정 형편상 일본 유학은 엄두도 내기 어려운 일이었다.
일본에 도착한 장준하는 동양대학 철학과에 들어갔다. 당장 일본신학교에 입학하기에는 실력이 모자랐던 것 같다. 그래서 1년 뒤에 일본신학교에 들어간 것이다.
장로교 계통의 이 학교는 150명 정도의 학생을 수용하면서 다른 대학들에 비해 신학적 분위기가 안정된 곳이었다. 장준하는 여기서 생애를 두고 뜻을 같이 하는 좋은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다.
전택부, 박영출, 문익환ㆍ문동환 형제, 전경연, 김관석, 박봉랑 등을 만나고, 이들과는 해방 뒤 <사상계> 등을 통해 동지가 되었다.
1942년 장준하가 일본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그곳 3년 과정의 본과에는 박영출ㆍ김형도ㆍ지동식ㆍ황재경ㆍ오택환 등이 있고 2년 과정의 예과에는 전택부ㆍ문익환ㆍ문동환ㆍ전경연ㆍ김관석ㆍ장병길ㆍ박봉
이들 가운데 전택부는 후에 장준하가 하던 <사상계>에 직접 참여했다가 YMCA 총무가 되고, 박봉랑은 후일 한국신학대 교수로 있으면서 <사상계>의 주요 필자가 되었다.
문익환은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까지 장준하와 같은 대열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75년 8월 장준하 사후에는 스스로 “나는 장준하의 대타다” 라고 하면서 그 뒤를 이었고 그의 아우인 문동환은 장준하가 이 학교에서 못 끝낸 신학 공부를 뒤에 한신대에서 마치도록 주선하였다.
장준하의 일본유학시절은 태평양전쟁이 막 시작되고 있어서 시국은 더욱 어려워졌다. 일본은 1941년 12월 8일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공격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만주침략과 중ㆍ일전쟁을 일으켜 중국과 전쟁중이던 일제는 전쟁의 교착상태를 타개하고 동남아 일대의 자원을 손에 넣고자 남방진출을 기도하면서 독일ㆍ이탈리아와 3국 동맹을 맺고 마침내 미국을 침략하기에 이르렀다.
개전 초기에는 필리핀ㆍ말레이반도ㆍ싱가포르ㆍ버마 등을 점령하고, 이어 뉴기니ㆍ과달카날섬에 진출, 오스트레일리아까지 위협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1942년 6월 반격에 나서 미드웨이 해전에서 항공모함 4척을 격침시킨 데 이어 제해권과 제공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장준하의 일본신학교 시절의 편린을 박봉랑의 증언으로 들어보자.
일본신학교는 예과 2년, 본과 3년, 합 5년제 전문학교로서 100명에서 150명까지의 학생수를 가진 작은 규모의, 그러나 안정되고 경건한 그러면서 신학적 분위기가 짙은 신학교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한국교회의 신학교가 폐쇄된 탓이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한국학생들을 적지 않게 받아들였다.
내가 일본 신학교 예과에 들어갔을 때 그때 박영출ㆍ김형도ㆍ지동식ㆍ황재경ㆍ오태환 목사 등이 본과에 계셨고, 전택부형, 문익환 목사가 예과에, 그리고 역시 예과에는 전경연, 이영헌 목사, 김관석ㆍ김철손ㆍ백니언 목사, 장병길 교수 등이 들어오셨다.
내일의 한국의 신학의 꿈을 안으며 우리는 일본말 사전을 뒤져 독일어ㆍ영어ㆍ희랍어와 싸웠다.
장준하 형을 만난 것은 이러한 신학도의 공동체 생활속에서였다. 그때도 얼굴은 희고 안경을 썼었다. 알고보니 그는 내가 다닌 평양의 숭실학교의 기숙사에서 사감 선생님으로 수고하시던 장석인 선생님의 자제라는 것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장석인 목사님을 잘 몰랐지만 장목사님께서 그 때에 학생들에게 존경을 받고 계셨기 때문에 적어도 그 이름은 잘 알고 그의 인격을 존경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아들도 아버지의 모습과 비슷하구나 생각을 했다.
일본에서 유학하는 동안 장준하는 박영출 목사가 조선인 학생들을 위해 동경에 세운 숭덕학사(崇德學舍)에 다니면서 신앙생활과 교포 어린이들을 가르쳤다. 숭덕학사는 목회와 배일 민족의식을 가르치는 조선 기독교인들의 활동무대가 되고 있었다.
그 무렵 김익준의 초청으로 신안소학교의 벗 김용묵도 일본으로 건너와 동양대에 입학하여 숭덕학사에 다니게 되었다. 뒷날 중국 전선에서 항일투쟁의 동지가 되고 고대총장을 지낸 김준엽과 <사상계>의 신학 관련 많은 글을 쓴 박봉랑 등도 숭덕학사에서 만나게 된 사람들이다.
장준하와 박봉랑은 주일이면 동경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의 교포 어린이들을 데려다가 하루 종일 찬송가와 성경, 조선역사 등을 가르쳤다. 100리 길이 넘는 촌락에서 아침저녁으로 아이들을 데려오고 데려다주면서 가르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장준하는 이 일을 일본을 떠날 때까지 계속하였다. 헌신적인 교육열, 교포 어린이들에게 조선역사를 가르치려는 나라사랑의 정신을 찾게 된다.
숭덕학사의 일을 김용묵과 박봉랑은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그의 활동은 유별나기도 하였다. 도심에서 80km나 떨어진 다마찌 항구의 판자집 부락의 교포 어린이들을 매주 일요일마다 데려와 하루 종일 찬송가와 동요 가르치기에 열을 올렸다.
20여 명의 어린이들은 성경과 한국역사에도 눈을 뜨기 2년 여, 학병으로 가기 전 그의 신앙 전도활동은 실로 기상천외하고 놀랍기만 하였다.
그 후에 나는 장형과 같이 지금은 세상을 떠나고 계시지 않은 박영출 목사님께서 동경에서 숭덕학사를 경영하시며 목회를 하시던 숭덕교회에서 만나게 되었다.
우리들이 그의 후배가 됐던 관계였는지 장형과 우리는 숭덕교회에서 교회위원(지금의 집사)을 하며, 박목사님을 도와서 예배와 가르치는 일을 돕고, 같이 주일학교 일을 맡아 했다.
주일학교 학생이라야 동경 안에 있는 한국 교포들의 애들이었기 때문에 주일학교 학생을 얻기 위해서는 여러 지역에 가서 애들을 모집해 오는 수밖에 없었다.
장형과 나는 매주일 아침 일찍이 동경시 시나가와구에 가서 애들을 데리고 와서 가르치고 또 시나가와까지 애들의 손목을 잡고 데려다 주는 그런 일을 얼마 동안 계속했다.
아마도 이런 극성스러운 생각은 장형의 머리에서 나왔던 것 같다. 일이 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주일마다 주일학교를 하는 일은 참 즐거운 일이 되었다.
김수환 [金壽煥, 1922.5.8~ 2009.2.16] 1944
Photographer Unidentified
일제강점기 당시의 사진. 왼쪽에 있는 분은 훗날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 총장을 역임한 故 전석재 신부
김수환(金壽煥)은 한국 최초의 가톨릭 추기경이다. 세례명은 스테파노(Stephen Kim Sou-Hwan)다.
선종 당시 역대 추기경 가운데서 가장 오랫동안 재임한 추기경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학병으로 강제징집됐을 뿐" - 민족문제연구소
"김수환 추기경은 1941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도쿄의 상지대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했다."
"1944년 초 졸업을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시점에 학병으로 징집되어동부 22부대에 입대하였다"
"1944년 1월 시행된 학병제는, 명색은 지원이라고 하였지만 사실상의 강제징집이었다."며 "사관후보생도 장교 부족 사태에 직면한 일제가 차출한 경우가 많았다."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는 군인의 경우 '위관급 이상 장교'를 사전 수록 대상자로 한다는 선정기준을 정한 바 있다."
한편, 김수환 추기경은 이른바 '친일 등 과거사 청산을 통한 역사 바로 세우기'가 시작된 2003년부터 친일파라고 비난하는 네티즌들의 악플로 심적 고통을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수환 추기경은 자신에 대한 오해도 힘들었지만 자신의 은사이자 동성상업학교(현 동성고) 교장 출신 장면 전 총리에 대한 '친일 시비'에 더욱 괴로워했다고 한다.
김수환 추기경은 특히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 후보 명단에 장 전 총리를 올리자 "각 종교단체 대표를 내세웠던 일제 말기 정책에 따라 대표적 가톨릭 신자였던 장 전 총리는 어쩔 수 없이 대표가 됐는데 이를 두고 친일로 매도하는 것은 너무 가볍다."며 유감을 표시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박정희 [朴正熙, 1917.11.14 ~ 1979.10.26]
photographer Unidentified
박정희는 20세 되던 해인 1937년 3월 문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 꼭 3년간 교사로 근무했다.
사진은 1939년 봄 학교 맞은 편 신사 자리에서 여제자들과 함께 찍은 모습으로, 뒷줄 왼쪽 끝이 군관학교 시절 편지를 주고 받았던 정순옥씨.
Seoul, Korea, 1920's
photographer Unidentified
양정고보 당시 손기정 (뒷줄 오른편 첫번째)
1912년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태어난 손기정은 집에서 2km 떨어진 약죽 보통학교에 다녔다. 또래들은 걸어가기도 힘들어하는 거리를 손기정은 항상 뛰어다녔다. 그가 자주 달리던 곳은 압록강을 가로지른 철교 위였다. 어린 손기정은 배고픔을 잊기 위해서 달렸다. 숨이 차고 심장이 뛰면 배가 고픈 걸 잠시 잊을 수 있으니까. 물마시고 달리고, 물마시고 또 달리면서 허기를 잊었다.
어머니는 매일같이 땀에 흠뻑 젖어 들어오는 아들을 걱정했다. 그래서 손기정에게 잘 벗겨지는 여자 고무신을 사주었다. "공부를 소홀히 하고 달리기만 할 거라면 학교에 가지 말라"는 엄포와 함께였다. 몇 걸음 뛰면 벗겨지는 고무신을 신고도 꼬마는 계속 달렸다. 짚으로 엮은 새끼줄로 신을 싸매고, 새끼줄에 발이 쓸려 피가 나는데도 뜀박질을 멈추지 않았다.
손기정에게 달리기는 놀이였고, 희망이었다. 손기정의 마라톤은 이때 이미 시작됐다. 결국 어머니가 포기했다. 교내 운동회에서 달리기 1등을 휩쓰는 아들에게 '다비'라는 신발을 구해줬다. 엄지발가락이 따로 갈라진, 일본 사람들이 신었던 실내운동화였다. 소년은 '다비'가 닳도록 철교 위를 또 뛰어다녔다.
손기정이 달리기를 잠시 멈출 때가 있었다. 겨울철 철교 밑 빙판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또래들을 봤을 때다. 얼음을 지치는 동작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 있었다. 그때는 허기보다 부러움이 더 컸다. 훗날 손기정은 "사실 스케이트 선수가 되고 싶었다. 스케이트를 살 돈이 있었다면 마라토너 손기정은 없었을 지 모른다. 달리는 데는 돈이 안 든다. 가난이 나를 뛰게 했다"고 회상했다.
손기정은 열다섯 살 때 신의주 대표 선수가 됐다. 신의주와 만주 안동이 대결하는 '안의육상경기대회'에 참가할 기회를 얻었다. 안동 대표 선수들은 스무 살이 넘은 어른들이었다. 코스는 손기정에게 절대 유리했다. 어려서부터 수천 번 넘게 뛰었던 압록강철교에서 시작해 안동으로 가는 길이었다. 손기정은 처음부터 선두에 서더니 여유 있게 1등을 차지했다. 이때부터 손기정의 이름이 신의주에서 유명해졌다.
손기정은 가난 탓에 상급학교로 진학하지 못했다. 생계를 위해 인쇄소와 상회에서 일했다. 보통학교 졸업 후 열여섯 살이 된 1928년 그는 일본 나가노켄으로 떠난다. 신의주에서는 벌이가 신통치 않아 일본으로 건너가 돈을 벌고 달리기도 할 생각이었다. 손기정은 포목점의 점원으로 취직해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일했다. 그러나 달리기 연습을 할 시간을 내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일본 사람들로부터 무시와 천대를 받긴 했지만 일본에 오니 더 형편없는 대접을 받았다. '조센진 손기정'은 '노''예'와 다름없었다. 결국 그는 몇 달 만에 빈손으로 돌아왔다. 아무것도 얻지 못한 건 아니었다. 손기정 마음속엔 반일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꼭 성공해서 일본인들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었다.
신의주로 돌아온 손기정은 곡물상회에 취직했다. 벌이도 일본에서보다 나았고, 달리기 대회에 나갈 시간을 낼 수도 있었다. 손기정은 경주대회에 나가서 쌀 가마니를 1등 상품으로 들고 오기도 했다. 신의주 스타는 평안북도 스타로 발돋움했다. 1931년 평안북도 대표로 조선신궁 대회에 나서 5000m 2위를 차지했다. 체계적인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는 손기정으로서는 대단한 성과를 낸 것이다.
덕분에 그는 1932년 육상 명문 양정고보에 입학했다. 손기정은 권태하, 김은배 등 선배들과 함께 5000m와 1만m, 그리고 마라톤에서 조선을 대표하는 선수로 성장했다. 경험 부족으로 1932년 로스엔젤레스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서 떨어졌지만 4년 후 베를린 올림픽에는 충분히 나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받았다.
손기정 기념관에는 당시 양정고보 교실이 재현됐다. 그리고 그 옆에는 진짜 육상선수가 된 손기정의 뛰는 모습을 재현한 인형이 있다. 손기정은 독립군이 모래주머니를 다리에 달고 군사훈련을 했다는 얘기를 듣고 마라톤 훈련에 적용했다. 다리 근력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또 신발 밑창을 깎거나, 유니폼을 가위로 잘라 조금이라도 무게를 줄이려는 노력도 했다. 그때는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방법이었다.
Seoul, Korea, 1925
photographer Unidentified
1925년 몽양 선생이 코치로 활약했던 야구팀과 (상하이 공설운동장)
여운형은 이 무렵 종로에 세워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에 출입하면서 운동부장이 되었다. 족속 여병현이 YMCA의 창설에 관여하면서 그가 소개했던 것 같다. 어려서부터 수영ㆍ축구ㆍ철봉 등 스포츠에 남달리 관심이 많았던 터였다. 이때 수련한 각종 스포츠는 그를 ‘스포츠맨 여운형’으로 불리게 하고, 실제 뒷날 체육인으로 활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1912년 11월 YMCA의 야구팀을 이끌고 일본 도쿄의 원정에 나섰다. 이것이 한국 스포츠의 ‘해외원정’의 효시라고 한다. 당시 일본 유학생이던 안재홍의 증언이다.
내가 몽양을 처음 만나기는 1912년 늦은 가을, 그가 당시 아직 구 한(韓) 제국시대 이래 명칭을 지니고 있던 황성기독교청년회 베이스볼팀을 거느리고 일본 도쿄 와세다대학 야구부의 초청을 받아 왔을 때이다.
그 때는 조국이 망한 지 2년 만이어서 우리네 청년학도들은 가슴 속이 까닭없이 울근불근 걷잡기 어려운 때이었다. 몽양은 26, 27세 되는 한창 때 청년이었는데, 허울 좋은 동채에 카이제르 수염을 뻗히고, 검은 수목 두르마기에 흰 동정 달아 입고, 수만의 일본인 관중이 둘러보는 토야마바라(戶山原) 조대(早大) 야구장에서 테이블을 지키면서 유유히 야구의 스코아를 보던 것이다.
Seoul, Korea, 1924
photographer Unidentified
김구 선생이 어머니 곽낙원 여사와 오른쪽이 맏아들 김인, 둘째 아들 김신(왼쪽)과 함께 아내 최준례 여사 무덤을 찾았다.
한글학자 김두봉이 한글로 묘비명을 썼다./백범기념관 제공)
ㄹㄴㄴㄴ해 ㄷ달 ㅊㅈ날 남
대한민국 ㅂ해 ㄱ달 ㄱ날 죽음
최준례 묻엄
남편 김구 세움
내용을 풀이하려면 자음 순서를 아라비아 숫자로 환원해서 이해하면 된다. 즉, 'ㄹ'은 아라비아 숫자로 하면 ㄱ-ㄴ-ㄷ에 이어 네 번째이니 '4'를 말한다.
최 여사의 출생일은 단기 4222년(서기 1889년) 3월 19일이며, 사망일은 '대한민국 6년', 즉 1924년 1월 1일이다
China, 1921
photographer Unidentified
상해임시정부 경무국장 시절의 김구가족
왼쪽부터 백범, 장남 인, 아내 최준례 여사. 최 여사의 모습이 담긴 유일한 사진이다
백범과 그간 세 차례에 걸친 여성들과의 인연을 돌이켜보면 그 자신이 나서서 인연을 만들기보다는 모두 집안어른이나 주변에서 소개로 만난 경우였습니다. 네 번째 인연도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하루는 신천 사평동(謝平洞) 예수교회의 우두머리인 양성칙(梁聖則)이 그 교회 여학생 최준례(崔遵禮)를 소개하면서 그녀와 결혼할 것을 권유하였습니다.
최준례는 그 동네에 거주하는 의사 신창희(申昌熙)의 처제였으며, 준례의 모친 김(金)씨는 경성에서 나서 자랐는데 젊어서 과부가 되어 두 딸을 기르며 예수교를 믿고 있었습니다. 신창희는 제중원(濟衆院) 의과생으로 있다가 준례 언니와 결혼한 후 생업을 위해 처가식구들을 데리고 신천 사평동으로 이사와 살고 있었습니다.
교회 다니던 18세 최준례를 소개받다
준례의 모친 김씨는 작은딸 준례를 이웃 동네 청년 강성모(姜聖謨)에게 결혼을 약속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준례가 장성한 후 모친의 명을 따르지 않은 채 강성모와의 결혼을 거부하면서 이 일이 교회에서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사태가 커지자 선교사 헌트, 쿤스 등이 나서서 준례에게 강성모와 결혼할 것을 권하였으나 준례는 자신의 뜻에 맞는 남자를 골라서 결혼하겟다고 버텼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양성칙이 백범에게 준례와의 결혼을 권유한 것입니다. 그런데 백범은 이런 준례에 대해 지극한 동정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당시 준례의 나이 18세 였는데, 백범은 조혼(早婚)으로 인한 폐해를 절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그는 즉시 사평동으로 달려갔습니다. 이후 상황을 <백범일지>를 통해 살펴보면,
“사평동에 가서 준례를 만나본 후 혼약이 성립되게 되자 강성모 측에서 선교사에게 고발했다. 교회에서 나에게 그만두도록 권고하였고 친구 중에서 만류하는 자가 많았다. 그때 준례는 은율읍에 살고 있었는데, 나는 준례를 사직동 내 집으로 데려가 굳게 약혼하고 난 뒤, 경성 경신학교(敬信學校)에 유학 보냈다.
처음에는 교회의 금지 권고를 듣지 않는다 하여 교회가 책벌(責罰)을 선언하였으나, 끝내 불복할 뿐 아니라 구식 조혼을 인정하고 개인의 자유를 무시하는 것은 교회로서 잘못이고 사회악풍을 조장하는 것이라고 항의하였더니, 선교사 쿤스가 혼례서를 작성하여 주고 책벌도 해제하였다.”
네 번만에 겨우 결혼에 골인하였습니다. 그의 나이 31세 때였고, 준례는 그보다 13세 연하인 18세였습니다. 결혼식은 그해(1906년) 12월에 치렀습니다. 장남 인(仁)이 태어난 것은 그로부터 12년 뒤인 1918년 11월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을까요? 그건 아닙니다. 그 사이에 세 딸아이가 태어났다가 모두 어린나이에 죽었습니다.
이름과 출생일자조차 알려지지 않은 첫째딸은 태어나자마자 죽었고, 둘째딸(화경)은 다섯 살 때, 그리고 1916년에 태어난 셋째딸(은경)은 이듬해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둘째딸 화경은 그가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나기 직전에 죽었는데, 죽기 전에 ‘나 죽었다고 감옥에 계신 아버님께 기별하지 마십시오. 아버님이 들으시면 오죽이나 마음 상하시겠소’라고 했다는 겁니다.
노모와 아내의 힘든 나날...세 딸도 모두 잃어
세 딸아이를 어린 나이에 잃은 것 말고도 이 시기 그들 내외는 힘든 세월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우선 가장인 그가 이른바 ‘안악사건’에 연루돼 징역 15년형(이후 7년->5년형으로 감형됨)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습니다. 1915년 8월 가출옥으로 풀려나기까지 4년반 가량을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도 그지만 이 기간 밖에서 옥바라지를 한 모친과 집안일을 챙긴 아내의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아내는 먹고살기 위해 둘째 화경이를 모친에게 맡기고 매일 일제 총독부 토지국(土地局) 산하 책 만드는 공장에 나가 노동을 했으며, 어느 서양여자가 아내에게 학비도 대주고 공부를 시켜주겠다고 했지만 아이 때문에 그런 좋은 제안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힘든 세월을 보내면서 서로 의지하다보니 고부간에 갈등은커녕 ‘동지’가 돼버렸습니다. <백범일지>에 이런 대목이 나오는데요, 그들 부부간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다른 가정에서는 보통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말다툼이 생기면 주로 모친이 아들 편을 들건만, 우리집에서는 아내가 내 의견에 반대할 때 어머님이 열백 배의 권위로 나만 몰아세우신다. 가만 경험하여 보면 고부간에 귓속말이 있은 후에는 반드시 내게 불리한 문제가 발생된다. 그러므로 한 번도 내 마음대로 집안일을 처리한 적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아내의 말에 반대하면, 어머님이 만장의 기염으로 호령하신다.
“네가 감옥에 들어간 후 네 동지들 중에 젊은 처자가 남편이 죽을 곳에 있음에도 돌아보지 않고 이혼을 하느니 추행을 하느니 하는 판에 네 처의 절행은, 나는 고사하고 너의 친구들이 감동하였다. 네 처를 결코 박대해서는 못쓴다.”
이런 말씀을 하시기 때문에 내외 싸움에서 나는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늘 지기만 하였다.”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새 생명은 또 태어났습니다. 3.1만세의거가 일어나기 불과 4개월 전인 1918년 11월 장남 인(仁)이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핏덩이 아들을 뒤로한 채 중국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그 해 9월 상해임시정부 경무국장에 취임한 그는 이듬해(1920년) 8월 아내가 아들을 데리고 상해로 건너오면서 부자 상봉이 이뤄졌습니다.
다시 2년 뒤인 1922년 모친 곽낙원 여사도 상해로 건너와 모처럼 네 가족이 한 지붕 밑에 모였습니다. 그해 둘째 신(信)이 태어났고, 9월에는 도산 안창호의 뒤를 이어 그가 임정 내무총장에 올랐습니다. 그의 전 생애를 돌이켜볼 때 이 시기가 그에게는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는데, 그 역시 “재미있는 가정을 이루었다”고 <백범일지>에 쓴 바 있습니다.
계단에서 구른 아내, 폐렴까지 겹쳐 끝내 사망
그러나 그의 이런 행복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고락을 같이해온 아내에게 큰 변고가 생긴 것입니다. 당시 그들의 숙소는 영경방(永慶方) 10호 2층였는데, 둘째 신(信)을 해산하고 몸조리를 하던 아내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크게 다친 것입니다. 아내가 계단에서 구른 것은 시어머니인 곽 여사가 해산한 며느리 산후조리를 위해 세숫물을 떠다놓는 것을 황송하게 생각하여 손수 물을 길러 가다가 계단에서 실족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엎친데 덮친격으로 폐렴까지 겹쳐 1년 넘게 고생하다가 상해 보륭의원(寶隆醫院)에서 진찰을 받고 서양 시설을 갖춘 홍구(虹口) 폐병원에 격리,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보륭병원에서 아내와 작별해야만 했습니다. 당시 홍구 폐병원은 프랑스 조계(租界) 밖에 있었고, 일경들이 그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내의 임종을 지켜본 사람은 상해임시정부 인사들에게 ‘자동이 엄마’로 불리던 여성 독립투사 정정화(1900∼1991) 여사였습니다. 정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임종하기 전에 남편인 백범을 부르려고 하자 아내는 고개를 저었다고 합니다. 남편이 올 수 없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 여사의 연락을 받고 시어머니 곽 여사가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는 이미 영안실로 옮겨진 뒤였습니다.
차로 불과 10분 거리에 있었음에도 백범은 아내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아내의 유해는 동지들이 의연금을 추렴해 성대히 장례를 치르고 묘비까지 세워주었습니다. 장례식은 1924년 1월4일 오후 2시 프랑스 조계 내 숭산로 경찰서 뒤 공동묘지에서 기독교식으로 치러졌습니다. 아내 최준례의 나이 그 때 서른 여섯, 그와 혼인한 지 18년째였습니다.
USA, 1921
photographer Unidentified
1921년 워싱턴에서 열린 군축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구미위원부 청사를 나서는 한국대표단의 이승만 단장과 서재필 부단장.
각국 대표단을 만나 한국의 독립을 설득시키기 위해 외교관의 예복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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