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의사 처형 직전과 직후 사진 1932년 12월 19일
photographer Unidentified
일본 이시카와현 미고우시 육군공병작업장
일본 방위청 자료실에서 ‘만밀대일기(滿密大日記)’에 실린 이 사진을 발견한 ‘더 채널’의 김광만(金光萬) 대표나 신운용 근현대사 팀장, 이 사진 사본을 전해 받은 유족이나 윤병석(尹炳奭) 인하대 명예교수의 첫 반응은 한마디로 ‘충격’ 그 자체였다. 윤 의사 처형 장면을 담은 사진이 처음 발견된 데다 그 모습이 너무나 끔찍하고 생생하기 때문이었다. 2002년 4월
윤봉길 [尹奉吉, 1908.6.21 ~ 1932.12.19]
윤봉길은 현장에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상하이 군법 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오사카로 호송되었다. 다시 가나자와 형무소로 옮겨져 그 이튿날인 1932년 12월 19일 총살되었다.
당시 25세의 나이었지만 그 누구보다도 의로웠다.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 모진 고민을 받으면서도 김구를 보호하기 위해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거사를 이틀 남긴 4월 27일, 두 아들에게 남긴 글은 우리의 마음을 뭉클하게 한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1932년 5월 28일 상해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1932년 11월 18일 일제 대양환으로 일본 오사카로 후송되어 20일 오사카 육군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2년 12월 18일 가나자와 육군구금소로 이감되었다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에서 총살당했다. 1932년 12월 19일 새벽 7시 27분 일본 이시카와 현 가나자와 시 미쓰코지야마 서북골짜기에서 형틀에 묶인 사형수(윤봉길)는 미간에 총알을 맞고 13분 뒤에 숨졌다.
시신은 아무렇게나 수습돼 가나자와 노다산 공동묘지 관리소로 가는 길 밑에 표식도 없이 매장되었다. 사형 집행 전에 미리 파 놓은 2미터 깊이의 구덩이에 시신을 봉분(封墳)도 없이 평평하게 묻어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도록 했다.
윤봉길 의사가 수뇌부를 섬멸시킨 데 대한 일제 군부의 복수와 대우였다.
국민회의 부주석 김구는 일본에 있던 박열에게 3의사(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유해 발굴을 부탁하였다. 유해봉안 추진위원장을 맡은 박열은 재일동포들과 헌신적인 노력으로 1946년 3월 6일 사형장에서 남쪽으로 3㎞ 떨어진 가나자와(金澤)시 노다(野田)산 시영공동묘지 북측 통행로에서 윤봉길의 유해를 발굴하였다.
같은해 6월 16일 서울에 도착하여 6월 30일 국민장으로 안장되었으며 장지는 효창공원이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윤봉길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USA, 1925
photographer Unidentified
미국 맨해튼 대학 유학시절 동생들과 함게한 장면 뒷줄 오른쪽
뒷줄 왼쪽부터 장발, 장면, 장정온 앙네다 수녀, 처조카 김교임 마르가리타 수녀
장정온은 숙명고녀와 일본 성심여전을 나왔고, 첫 한국인 수녀회인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 초대원장을 역임했으며, 한국 전쟁시 평남에서 북한군에 피랍된 후 행방불명되었다.
이 밖에 장극은 독일 베를린 국립공과대학 항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워싱턴 카톨릭대학 교수를 역임한 항공학자이다.
장정혜도 숙명고녀를 나온 후 미국 유학을 하였고, 장정순도 일본 성심여전에 유학한바 있으나 졸업직후 요절하였다.
여운형 [呂運亨, 1886.5.25 ~ 1947.7.19]
1939년 가족사진. 왼쪽부터 원구(3녀), 부인 진씨, 난구(장녀), 붕구(4남), 홍구(2남), 몽양, 연구(2녀), 영구(3남)
여운형의 정치적 위상과 당시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암살에는 “경찰고위층에 영향력이 큰 극우 지도자가 관련된 것으로 추측된다.” (주석 25)
하지만 미군정경찰은 사건배후를 밝히지 않고 한지근의 단독범행으로 처리했다. 사건의 수사는 노덕술이고 담당 검사는 뒷날 이승만 정권에서 법무장관을 맡은 조재천 이었다.
증언과 회고록 그리고 당시의 상황 등을 통해서 보면 여운형의 암살범은 한지근(본명:이필형)이고 그 외 4~5명이 여운형의 암살을 위해 치밀하게 계획하였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김두한, 그리고 그 위에 장택상이 자리잡고 있다.
암살 당시 파출소 앞에서 트럭이 튀어나왔고 여운형이 암살당한 장소가 파출소 바로 앞이었다는 점, 그리고 암살범을 쫒아가던 여운형의 경호원이 경찰에게 오히려 체포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들 암살범들의 배후에 경찰이 있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따라서 당시 경찰의 총수였던 장택상이 어느 정도 관여되어 있으리라는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증거가 없는 이상 쉽게 예단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주석 26)
여운형이 암살당하기 일주일 전에 미군정 산하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 친일민족반역자 처리에 관한 특별법의 제정이 논의되고 있었다. 여운형은 이 법의 제정을 강력하게 주장해왔었다. 과도입법의원은 수백 개의 법안을 통과시켰지만 유일하게 친일파 처리 관련 법안은 미군정에 의해 공포되지 않았다.
이런 과정에서 여운형은 하지에게 신변 보호를 요청했으나 미군정은 듣지 않았다. 그리고 여운형은 암살되고 말았다. 미군정경찰 총수는 한민당 출신인 조병옥과 장택상이었다.
장택상의 당시 상황 증언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장택상의 배후에는 이승만이 있었을 것이며 결국 여운형 암살 뒤에는 이승만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이승만의 의도를 장택상이, 또는 장택상의 의도를 장택상 수하의 경찰이 적극적으로 수행한 형태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한다. 당시의 정황을 미루어 보아도 이승만이 여운형 암살의 배후에 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주석 27)
여운형의 시신이 안치된 서울대병원에 장택상이 총감의 정복을 입고 병실에 들어왔다. 아버지의 시체를 부등켜안고 울던 장녀 난구가 장택상을 보고 마구 소리를 지르며 몇 분간 욕설을 퍼부었다.
“우리 아버지를 죽인 자가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나타났느냐?”
장택상 총감은 아무 말도 안하고 묵묵히 듣고만 섰다가 그냥 나가버렸다. (주석 28)
이승만이 ‘배후’로 찍힌 데는 까닭이 있었다. 그는 정읍발언을 통해 단독정부 수립론을 주창하고, 이를 실현하고자 1946년 말부터 이듬해 4월 하순까지 4개월여 동안 미국을 방문하여 국무성ㆍ육군성 등 고위 인사들을 만나 막후접촉을 벌였다.
그런데 귀국했을 때 국내정세는 그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좌우합작운동이 진행되고 국민의 관심도 높았다.
결국 이승만은 여운형의 정치적 힘이 존재하는 한 정권을 잡는 것은 고사하고 단독정부 수립마저도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의 상황에서 단독정부가 수립되지 않고 미국과 소련의 합의에 의한 통일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면 이승만이 정권을 잡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소련은 이승만을 너무나 싫어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무성에서도 이승만을 독단적이고 독선적인 인사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정권을 맡긴다면 정권이 불안할 것으로 판단했다. (주석 29)
여운형이 암살된 직후인 1947년 8월 이승만은 미군정 관계자에게 테러리스트들의 좌익 공격을 금지할 수도 없고, 금지하는 것을 원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주석 30) 이런 발언이 말해 주듯이, 우익 청년단체는 이승만이 행사하는 권력의 주요 기반이었다. (주석 31)
여운형 암살이 미궁에 빠진 지 45년이 지난 1992년 5월, <월간 말>이 “몽양 살해범 4인의 최초 고백 - 여운형 암살 배후에 노덕술이 있었다”고 폭로했다.
일제시대 고등계 형사출신이었던 수도경찰청 수사과장 노덕술은 “이들의 암살계획을 미리 알고서도 이를 방조 내지 교사하였고, 사건 이후에도 축소조작수사로서 이들의 범죄사실을 은폐해주었다”고 보도했다.
여운형 암살자라는 4인은 사건 당일 제2저격수로 일제 99식 권총을 겨눴던 김훈(66), 사후확인조로 현장에서 저격성공여부를 확인했다는 김영성(65), 유봉호(66) 그리고 행동총책이었던 김홍성(74)이다. (나이는 고백 당시)
이들의 증언대로라면 암살범 한지근 외에 제2의 저격수가 있었음이 드러난다. 단독범이 아니라 조직적인 집단테러였다. 이들은 사건이 터진 후 노덕술을 만나 사건의 축소조작 각본을 짰다고도 털어 놨다.
이들의 때늦은 폭로는 공소시효가 훨씬 지나서 사법처리도, 더 이상의 진상규명도 없이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들이 지목한 노덕술은 정부수립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법정에 세워질 뻔 했으나 이승만이 반민특위를 짓밟으면서 풀려났다. 이승만은 노덕술의 체포에 대노하면서 결국 반민특위의 해체까지 몰아갔다. 여운형 암살에 대한 보은이라는 평가도 따른다.
주석
25> 강준식, <민족통일투쟁과 조선혁명>, 111쪽, 힘, 1984.
26> 박태균, <현대사를 베고 쓰러진 거인들> 79쪽, 지성사, 1996.
27> 앞의 책, 89쪽.
28> 이기형, 앞의 책, 483쪽.
29> 앞의 책, 89~90쪽.
30> 서중석, 앞의 책, 563쪽.
31> 강준만, 앞의 책, 54쪽.
장준하 [張俊河, 1918.8.27 ~ 1975.8.17]
광복군 장교 1945년 국내진공작전을 위해 중국 시안에서 미국 정보기관(OSS) 특수 훈련 당시 모습
왼편부터 노능서,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 장준하
격동의 현대사에서 우리가 겪은 두 가지 시련을 든다면 제국주의의 침략과 군부독재의 폭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장준하...와 김준엽은 이 두 참혹한 시련을 모두 회피하지 않고 살았다. 동시에 두 사람은 어지러운 시대가 안기는 온갖 수난과 역경에서도 마치 평생 반려자와 같이 돈독한 우정을 유지했다.
일제 말기 장준하는 목사 지망생으로 니혼신학교에, 김준엽은 게이오(慶應)대학 동양사학과에 재학 중이었다. 그들은 똑같이 도쿄 유학생이었지만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일제의 학병 요구에 가장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방식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같았다. 두 사람은 마치 합의라도 한 듯이 '숨거나 피하지 않고 학병에 응하되 곧 탈영하여 광복군에 합류한다'는 방침을 미리 굳히고 떠났던 것이다.
탈영에 먼저 성공한 측은 김준엽이었다. 그는 중국 동부 쉬저우(徐洲) 교외에 주둔 중인 일본군 츠카다부대 간부후보생 학병이었다. 1944년 3월 29일 새벽 2시, 그는 내무반 침상에서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한다. 잠시 밖의 동정을 살핀 그는 어두운 목욕실 벽에 밀착해 있다가 도둑고양이처럼 몸을 움직여 병영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을 넘는다. 그의 배낭에는 실패했을 때 자결하기 위한 수류탄이 들어 있었다.
"환영, 한국혁명지사!(歡迎韓國革命志士!)"
강변에서 서성이던 그를 붙잡아 조사한 중국 군인은 붓과 벼루를 가져다 이렇게 썼다. 운 좋게도 그는 불과 탈출 4시간 만에 중국 국부군계의 유격대원을 만남으로써 영광스러운 '탈영 학병 제1호'가 될 수 있었다.
김준엽보다 5개월 뒤에 있었던 장준하의 탈영은 훨씬 어려운 과정을 겪는다. 세 명의 동료(김영록·홍석훈·윤경빈)와 함께 집단 탈영을 감행한 것도 어려움을 겪은 한 이유였다. 장준하가 배속된 곳 역시 쉬저우의 일본군 츠카다부대였다. 그는 거사 직전에 고향 집으로 성경구절이 담긴 편지를 부쳤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로마서 9:3)
그는 학병 출정 전 신혼의 아내 김희숙에게 일러둔 말이 있었다. 그것은 '집으로 보내는 내 편지 끝에 성경 구절이 적혀 있거든 내가 일군에서 탈출한 것으로 알라'는 말이었다.
1944년 7월 7일 일석점호가 끝난 9시 15분, 장준하를 비롯한 네 명의 학도병은 각자 츠카다부대의 철조망을 넘는다. 인근 느티나무 아래에서 만난 그들은 산속을 향해 무작정 줄달음을 쳤다. 어렵사리 산정을 넘은 그들 앞에는 난데없이 운하가 가로놓여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운하의 깊이는 사람 키 정도 밖에는 되지 않았다.
운하를 건넌 그들은 젖은 몸으로 허허벌판을 달렸다. 나침반을 보려 해도 성냥이 젖어서 켜지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엷은 구름이 끼어서인지 북극성마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쫓기는 노루처럼 공포 속에서 헐떡거렸다. 그들은 도로와 인가를 피해 가며 조밭, 수수밭, 낙화생밭, 고구마밭 등을 고랑이며 두둑이며 가리지 않고 달렸다. 탈진과 허기는 그래도 견딜 만했다. 정말 무서운 것은 갈증이었다. 그들은 여명이 틀 때까지 걷거나 뛰었다. 그들이 다음날 오후 수수밭에서 중국 공산군 계열의 팔로군을 만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후 중국군의 선처로 김준엽과 장준하 일행의 역사적인 첫 만남이 이루어진다. 김준엽은 회고록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갑자기 마을 사람들이 왁자지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당으로 뛰어나가 보니 일본군복 차림의 청년들이 있었는데, 그 지성적인 얼굴과 느낌으로 대번 나는 나와 같은 한국의 학병일 것으로 단정했다. "한국분들이시죠?" 그렇다는 대답을 듣자마자 와락 달려들어 그들을 차례로 꽉 끌어안았다. 나는 이때처럼 감격에 차고 희열에 넘친 일은 없었다. (중략) 나와 장준하 형과의 만남은 이때가 처음인데 이로부터 그와 나는 친형제 이상으로 가깝게 지냈으며, 그가 1975년 8월에 별세할 때까지 연인처럼 일생고락을 함께 하게 된다. - 김준엽 회고록, <장정> 1권, 249쪽
이번에는 장준하의 회고를 읽어 보자.
이윽고 한 사람이 나타났다. 중국 군복을 입은 홍안의 미청년이었다. 어쩐지 말도 내기 전인데 호감이 가는 인상이었다. 이상하게도 그는 우리를 보자마자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는 와락 달려들 듯이 "한국분들이시죠?" 하고 분명한 우리말로 이렇게 물으면서 바로 우리 앞에 섰다. "탈출이시죠?" "그렇습니다." 그는 더욱 힘차게 우리를 끌어안았다. (중략) 그 이름은 김준엽이라고 했다. 그는 곧 우리에게 친숙해졌다. 나는 10년 지기의 친구와 같은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었다. - 장준하 회고록, <돌베개> 64, 65쪽
1944년 7월 28일 장준하와 김준엽 일행은 망한 조국의 임시정부를 향해 6000리 대장정에 오른다. 그들은 걷고 또 걸었다. 그들은 다시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으며 걸었다. 그들은 중국 유격대의 안내를 받아 장사꾼으로 변장하기도 하고 벙어리 시늉까지 해가며 온갖 기지와 담력으로 일본군 점령지를 여러 차례 돌파한 후 9월 10일 광복군 훈련반이 있던 린취안(臨泉)에 도달한다.
이곳에서 장준하와 김준엽 등은 잡지 <등불>을 간행했다. 그들은 거친 마분지 위에 일일이 붓으로 쓴 원고를 묶었는데 마지막으로 표지를 만들 종이가 전혀 없었다. 고심 끝에 김준엽은 표지용 헝겊을 희사했는데 그것은 그가 입고 있던 무명팬티였다. 덕분에 그는 한동안 팬티 없이 허전하게 지내야 했다.
린취안을 떠난 그들은 마지막 목적지인 충칭임시정부를 향했다. 그들은 매일 100리 길을 걸어서 꼬박 2주나 걸린다는 파촉령을 넘기도 했다. 심지어는 숲속에서 진짜 호랑이를 만난 적도 있었다. 그들은 한없이 양쯔강(楊子江)을 거슬러 올라갔다.
마침내 1945년 1월, 쉬저우 출발 7개월 만에 그들은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에 이르렀다. 멀리 높은 계단 위에서 청색 중국 두루마기를 입은 노인이 수행 인사들과 함께 내려오고 있었다. 인자한 눈빛을 검은 테 안경 속에 담고 있는 그 노인은 바로 김구 주석이었다. 이곳에서도 장준하와 김준엽은 주석판공실장 민필호(임정 창업 공로자 신규식의 사위)의 지원으로 잡지 <등불>을 속간한다.
1945년 4월, 장준하·김준엽 일행은 시안(西安)으로 파견된다. 그들은 이곳에서 광복군 제2지대장 이범석의 지휘로 미군전략첩보대(OSS)와 합작하여 벌이는 국내진공작전 공작원으로 선발되어 특수훈련을 받았다. 장준하는 '신철', 김준엽은 '신일'이라는 가명을 썼는데, 돌림자가 같은 것은 두 사람이 형제임을 의미했다.
한편 이범석의 부관으로 근무하던 김준엽은 함께 근무하던 이범석의 여비서 민영주(주석판공실장 민필호의 딸)와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이렇게 되자 동료들의 질시와 눈총이 따르게 되어 김준엽은 괴로워한다. 이를 일거에 해결해 준 것이 장준하였다. 장준하는 동료들의 이해를 구한 후, 두 사람의 결혼을 적극 주선했고 아예 자청하여 주례를 맡아 결혼식을 일사천리로 진행시켰다.
<말년의 삶, 장준하는 불꽃같이 김준엽은 대쪽처럼>
해방 3일 후인 1945년 8월 18일, 장준하와 김준엽은 이범석 등과 함께 광복군 선발대로 고국에 와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했지만 일본군의 방해로 기수를 중국으로 돌려야 했다. 이후 임정요인들과 함께 귀국한 장준하는 민주민권운동을 벌이면서, 한 시대를 풍미한 고급 시사지 <사상계>를 주관한다. 중국에서 학업을 마치고 귀국한 김준엽은 <사상계>의 편집위원과 주간 등을 맡으며 적극 가담했다.
박정희의 5·16 쿠데타 이후 두 사람의 인생 여정은 조금 달라진다. 장준하는 박정희의 독재에 정면으로 맞서는 민주투사로 변신한 반면, 김준엽은 고려대 교수와 총장을 역임하면서 학자로서의 길을 걷는다. 하지만 두 사람의 민주·자유정신만큼은 단 한시도 굴절된 일이 없었다.
격정적인 성격의 장준하는 독재자 박정희와 유달리 날카로운 각을 세우며 대립했다.
"박정희라는 사람은 우리나라의 밀수왕초다."
"존슨 대통령이 방한하는 것은 박정희씨가 잘났다고 해서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한국 청년의 피가 더 필요해서 오는 것이다."
"박정희씨는 우리 국민을 월남에 팔아먹었고 박씨는 과거 공산주의 조직책으로 임명되어 조직활동을 한 사람이다."
장준하는 1974년 1월 박정희에 의해 네 번째로 구속된다.(긴급조치 1호 위반) 그는 '헌법개정을 빙자하여 국론을 분열시키고 사회의 불안을 조성한다'는 죄목으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 받았다. 이때부터 국민들은 그를 가리켜 '재야 대통령'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고려대 교수 김준엽은 1957년 아세아문제연구소를 발기하여 부소장·소장을 맡았고 '중국학회'를 조직하여 중국학 연구와 독립운동사 연구의 기반을 다진다. 그가 펴낸 <중국공산당사> <한국공산주의운동사> 등은 일관되게 '세계 속 한국의 진로'를 모색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82년 고려대 총장에 취임한 김준엽은 학원 내에 상주해 오던 기관원을 축출했다. 그는 해직교수 구제에도 앞장서 전원 복직시켰다. 어용 학도호국단을 해체하고 직선제 총학생회 부활도 관철시켰다. 급기야 그는 전두환 정권의 압박으로 강제 사퇴하게 된다. 학생들은 한 달 남짓이나 '총장사퇴 결사반대' 시위를 벌였다. 그는 "그때 학생들의 시위를 인생의 최고 훈장으로 여긴다"고 했다.
김준엽은 1960년 이래 장면 내각의 주일대사 제의, 5·16 실세 김종필의 공화당 사무총장직 제의, 박정희의 통일원장관직 제의, 노태우의 국무총리직 제의 등을 모두 물리쳤다. 그의 대쪽 같은 선비적 삶은 관직에 관심을 갖는 오늘의 학자들을 부끄럽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그는 국무총리에 응하지 않는 이유를 노태우에게 설명해 주었다고 한다.
"노 당선자를 그동안 두 번 만났으나 잘 모르고, 새 헌법에 따라 전두환씨가 국정자문회의 의장을 맡게 되는데 총칼로 정권을 장악하고 많은 사람을 괴롭힌 그에게 내 머리가 100개 있어도 숙일 수 없고, 지난 대선에서 야당 후보자에게 투표한 내가 총리가 되면 야당을 지지한 66% 국민의 뜻에 어긋나게 되며, 민주주의를 외치다 투옥된 많은 학생들이 아직도 감옥에 있는데 그 스승이라는 자가 총리가 될 수 없으며, 지식인들이 벼슬이라면 굽실거리는 풍토를 고치기 위해 나 하나만이라도 그렇지 않다는 증명을 보여야 한다."
한편 1974년 12월 병세가 악화되어 형집행정지로 출감했던 장준하는 이듬해인 1975년 경기도 포천의 약사봉에 등반을 갔다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 일본군 간부후보생 훈련과 광복군 훈련, 그리고 미군 특수공작훈련까지 이수한 그가 야산에서 실족사했다는 당국의 발표를 믿는 국민은 많지 않았다. 아무튼 그는 이렇게 불꽃처럼 살다가 먼저 갔다. 그리고 김준엽마저 지난 2011년 우리 곁을 영영 떠났다.
이 글의 서두에서 별을 이야기한 루카치는 '길이 나타나면 그들의 여행은 끝난다'고 선언했다. 이것은 '시대의 문제적 인물'을 두고 한 말이다. 장준하와 김준엽 두 사람은 길이 나타나지도 않았는데 여행을 그만 끝내고 말았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안타까워하는 것은 이 두 사람처럼 '창공에 빛나는 별을 보며 시대의 지도'를 읽는 인물을 앞으로는 여간해서 만나게 될 성싶지 않다는 예감 때문이다.
Seoul, Korea, 1941
photographer Unidentified
1941년 죽산 조봉암의 가족사진. 뒷줄 맨 오른쪽이 조봉암이다.
조봉암(曺奉岩, 1898년 9월 25일 ~ 1959년 7월 31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일제 강점기에 소련으로 건너가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2년 수료하고, 1925년 조선공산당이 조직되었을 때, 조직중앙위원장을 지냈으며 고려공산청년회의 간부가 되었다. 그해 공산청년회 대표로 중국 상하이(上海)를 경유하여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총회에 참석하고,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東方勞力者共産大學)에서 2년간 수학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소련, 중국, 만주 등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며[1] 공산주의 운동을 하였다. 상하이와 국내를 오갔으며 1927년에는 임정 요인들을 상대로 민족유일당 운동을 추진하기도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노농총연맹조선총동맹(勞農總聯盟朝鮮總同盟)을 조직하고 문화부책에 선출, 상하이에 가서 코민테른 원동부 한국인 대표에 임명되고 ML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1932년 9월 상하이 프랑스 불조계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 국내로 송환되어 신의주 형무소에서 7년간 복역하고 출옥하였고, 출옥 후 인천에서 지하 노동단체를 조직, 비밀리에 활동하다가 1945년 1월 다시 검거되었다.
해방과 동시에 석방되어 조선공산당, 건국준비위원회 인천부지부, 민족주의 민주전선 인천부지부 등에서 활동하였으나 1946년 5월 박헌영(朴憲永)과의 갈등을 계기로 사상전향하여 좌우합작 운동에 참여하였고 남북협상 노선을 걷다가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48년 7월 국회 헌법기초위원장으로 헌법 제정에 참여한 뒤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였으며 대한민국 제1대 농림부장관과 제2대 국회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농림부 장관 재직 당시 지주에게 예속된 농지들을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농지개혁을 주관하여 성사시켰다.
1948년 이후 윤치영(尹致暎) 등과 이정회, 대한국민당 등에서 활동하였고, 제2대 대통령 선거에는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했고,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30%라는 지지율을 얻어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1958년 상인 양명산을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자금을 건네 받았다는 혐의로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재심결과 사형선고를 받고, 교수형을 당하였다. 그의 사형집행은 당대에도 사법살인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2011년 1월 20일 대한민국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내려 복권되었다.
2011년 국가보훈처는 조봉암이 1941년 일제에 150원의 국방헌금을 냈다는 당시 매일신보의 신문기사가 나왔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 심사를 보류하였다.
Seoul, Korea, 1931
photographer Unidentified
왼쪽부터 당대를 풍미했던 여성 사회주의자 고명자 주세죽 허정숙(동아일보 최초의 여기자)이 서울 청계천에서 망중한을 보내고 있다.
잡지 ‘삼천리’는 1931년 7월호에 이들의 사생활을 소개했다.
“이 많은 투사의 신변에는 묘령의 꽃과 같이 아름다운 ‘맑스 걸’ ‘엥겔스 레이디’들이 마치 그림자처럼 그 뒤를 따르며 살풍경한 사상운동 선상에 한 떨기 꽃수를 놓아줬다.”
(‘삼천리’ 1931년 7월 1일, ‘붉은 연애의 주인공들’)
Seoul, Korea, 1939
photographer Unidentified
안중근의 아들과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1939년 10월 16일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다.
1939년 10월 16일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이토 분키치에게 사죄한다.
이날 안준생의 박분사 방문에 대해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는 "망부의 사죄는 보국의 정성으로/ 이토공 영전에 고개 숙이다/ 운명의 아들 안중생' 이라는 제목의 7면 톱기사를 사진과 함께 내보냈다.
사진 조선호텔에서 안중근의 둘째아들 안중생과 이토 히로부미의 둘때아들 이토 분키치를 만나 아버지를 대신해 사죄한다고 말했다. 뒤에 선 사람은 조선 총독부 외사부장 마쓰자와다쓰오(중앙) 아리바 기요시(오른쪽) 및 통역 총탁이다.
안중근의 둘째아들 안준생(安俊生, 마태오 1907~1952)는 상하이에서 수학했고, 샹하이의 가톨릭스쿨(진단대학?)에서 영어를 공부하며 바이올린 연주를 하면서 어렵게 생활했다.
그는 정옥녀(鄭玉女)와 결혼하여 2남1녀를 두었다. 중일전쟁 시 안준생은 중경으로 가지 못하고 샹하이에 남아 있었다.
그는 처가의 권유에 따라 헤로인 장사를 시작하여 일약 치부했고, 1939년 10월 조선총독부의 초청을 받아 고국을 방문했다 한다.
그런데 당시 서울의 장충단에는 친일파 인사들에 의해서 이등박문을 추모하는 박문사(博文祠)가 세워져 있었다.
이때 안준생은 총독부의 계획대로 서울 장충단에 있던 박문사를 찾았고 ‘이등박문의 아들과 눈물의 악수 일 장면’을 연출했다.
이렇게 그는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의 길을 향해 가고 있던 일제의 침략정책에 동원되었고, 안중근을 아끼던 모든 사람들은 그 아들의 행위에 가슴을 쳤다.
안준생은 일본 경찰에 의해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와 이토 분키치(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앞에 끌려오고 거기서 변절과 사죄를 요구받게 된다. 그리고 일본 곳곳에서도 이 공개사죄를 계속한다.
미나미 지로 조선총독의 양아들이 되어 용돈을 받으며 살게된다. 나중에 그 돈으로 약국을 차렸다고 한다.
당시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은 "조선통치의 위대한 전환사" "부처의 은혜로 맺은 내선일체"라며 대서특필했다.
언론은 준생이 "죽은 아버지의 죄를 내가 속죄하고 전력으로 보국의 정성을 다하고 싶다"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후에 일본은 영국인 세관장이 살던 고급 주택을 사주는 등 준생을 특별 관리했다.
1945년 장제스와의 회담에서 김구 주석은 "안중근 자식이 일본에 항복하여 상하이에서 여러 가지 불법행위를 하며 아편을 매매하므로 실로 유감이다. 직접 명령을 내려 안준생을 구금해주기 바란다"라고 말했다.
1945년 11월 귀국길에 김구 주석은 "민족반역자로 변절한 안준생을 체포하여 교수형에 처하라"고 중국 관리에게 말하기도 했다.
백석 [白石, 1912∼1996]
photographer Unidentified
영생고보 영어 교사 백석의 1936년 강의 모습
평안북도 정주(定州) 출신. 본명은 백기행(白夔行). ‘白石(백석)’과 ‘白奭(백석)’이라는 아호(雅號)가 있었으나, 작품에서는 거의 ‘白石(백석)’을 쓰고 있다.
1929년 정주에 있는 오산고등보통학교를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34년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전문부 영어사범과를 졸업하였다. 그 뒤 8·15광복이 될 때까지 조선일보사·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함흥 소재)·여성사·왕문사(旺文社, 일본 도쿄) 등에 근무하면서 시작 활동을 하였다. 한때 북한에 남아 김일성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고 전하지만, 확실치가 않다. 백석은 그 시대 어느 문학동인이나 유파에도 소속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작품활동을 하였다.
Seung-Hee Cho, Kee-Chung Sohn 1936
Photographer Unidentified
손기정과 최승희 1936년 손기정 선수 마라통 우승 환영회에서
손기정은 명월관에서 처음으로 최승희를 만났다. 얼핏 보아도 큰 키에 늘씬한 몸매하며, 세련된 모습은 도저히 조선여인이라 하기에는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웠다.민족의 두 영웅을 만나 참석자들의 반가운 인사와 들뜬 찬사가 분주히 오가는 가운데 함께 자리에 앉게 되었다.
손기정은 당당히 인사를 건네는 최승희의 말투와 몸짓에서 춤을 추는 사람은 이렇구나. 세계적인 무용수란 이런 거구나 하는 것을 왠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감사합니다.”
“3년 전, 경성공회당에서 봤습니다.”
“제 무용을 보러오셨나요?”
“전 예술은 잘 모릅니다. 친구 녀석이 하도 졸라 가보았는데,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반도의 무희라는 영화도 아주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예술을 모르신다더니? 관심이 많으시네요.”
“춤을 계속 추세요. 춤추는 모습이 더 좋아 보이십니다.”
좌중이 한참 무르익고 저마다 찬사를 쏟아내고 있는데 테이블 끄트머리에서 귀에 거슬리는 몇 마디가 섞여들어 온다. ‘친일파’어쩌고 하는 등의 소리였다.
“황국위문공연이다 뭐다 해서 벌은 돈은 다 갖다 바치고, 일본에서 계속 활동해온 최승희가 친일이라는데 뭐가 잘못된 말이야! 뭐 입이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랬······.”
갑자기 축하의 자리는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식어버렸다. 술에 거나하게 취한 인사는 분위기 파악 못하고 계속 술을 부어대며 중얼거리고 있었다.최승희는 언짢기도 하고 괜히 분위기를 망쳤다 싶어 자리를 뜨려하는데, 조용히 미소짓고 있던 손기정이 폭발하듯이 한마디 내뱉는다.
“그렇다면 내가 그때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뛴 것도 친일행위로 볼 것이오?”
출처
http://terms.naver.com/
종로 대각사에서 열린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영회 기념식, Seoul, Korea, 1945. 12. 12
Photographer Unidentified
중앙 검은 양복 김구선생
*
Korea, 1936
photographer Unidentified
미몽 양주남 감독 1936 영화의 배경은 1930년대 서울이다.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한국영화이자 6번째 발성영화로
문예봉 [文藝峰,1917~1999]
문예봉은 1917년 1월 3일에 태어나, 1932년 16세의 나이로 이규환 감독의 「임자 없는 나룻배」로 데뷔하였고, 그 후 많은 작품의 주연을 독차지하면서 ‘3천만의 연인’이란 애칭으로 불릴 정도로 일제 강점기에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연극배우이자 영화배우이다.
일제 강점기 말[1937년 무렵]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쌍문리 40-12번지[현 서울특별시 도봉구 쌍문동]에 거주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해방 후 남편 임선규와 월북하여 1952년에 북한 최초로 ‘공훈 배우’ 칭호를 받았다.
문예봉은 1930년경부터 무대에 섰으며, 1931년 아버지 문수일이 창단한 ‘연극 시장’을 통해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1932년 16세의 나이로 이규환 감독의 「임자 없는 나룻배」로 영화에 첫 출연하였다.
1933년 4월 극작가 임선규와 결혼하였다. 1935년에 한국 최초의 토키 영화[무성 영화] 「춘향전」에서 성춘향 역을 맡았고, 1936년에는 「장화홍련전」[아버지 문수일과 함께 출연], 「무지개」 등에서 주연배우로 이름을 날렸다. 1
930년대 말부터 친일 영화에도 다수 출연하였다. 해방 후에는 조선 영화 건설 본부와 조선 영화 동맹에서 활동하였다.
1948년 초에 월북하여 그 이듬해 북한의 첫 예술극 영화 「내 고향」에서 혁명가의 아내 역으로 출연하였다. 1952년에 북한 최초로 ‘공훈 배우’ 칭호를 받았다.
1965년 『조선 영화』 4월호에서 나운규를 ‘천재적인 예술가이며 정열적인 인간’으로 묘사한 수필이 화근이 되어, 문예봉은 반혁명 반동으로 몰려 안주 협동 농장으로 추방당하였다가, 1980년 「춘향전」의 월매 역으로 복귀하면서 복권되었다.
4남매와 13명의 손자 손녀를 두었던 문예봉은 북한에서 비교적 안정적인 삶을 누리다 1999년 3월 26일에 세상을 떠났다.
「임자 없는 나룻배」[이규환 연출, 1932], 「춘향전」[이명우 연출, 1935], 「아리랑 고개」[홍개명 연출, 1935], 「춘풍」[박기채 연출, 1936], 「그 후의 이도령」[이규환 연출, 1936], 「장화홍련전」[이명우 연출, 1936], 「무지개」[이규환 연출, 1936], 「미몽」[양주남 연출, 1936], 「인생 항로」[안종화 연출, 1937], 「나그네」[이규환 연출, 1937], 「군용 열차」[서광제 연출, 1938], 「애련송」[김유영 연출, 1938], 「새출발」[이규환 연출, 1939], 「수선화」[김유영·방한준 연출, 1940], 「수업료」[최인규 연출, 1940], 「내 고향」[강홍식 연출, 1949]에 출연하였다.
또 「용광로」[민정식 연출, 1950], 「소년 빨치산」[윤용규 연출, 1951], 「빨치산 처녀」[윤용규 연출, 1952], 「신혼부부」[윤용규 연출, 1955], 「춘향전」[윤용규 연출, 1980], 「봄날의 눈석이」[조선 예술 영화 촬영소, 1985], 「생명수」[조선 예술 영화 촬영소, 1985], 「은비녀」[조선 예술 영화 촬영소·총련 영화 제작소, 1985], 「위대한 품」[조선 예술 영화 촬영소, 1986] 등에 출연하였다.
박정희(朴正熙), Korea, 1930's
photographer Unidentified
구미 본가 대구사범 재학시 어머니 백남의와 박정희 1937년 졸업이니 그 이전
1932년 4월 1일 박정희는 15세의 나이로 대구사범학교 제 4기로 입학했다. 입학정원 100명, 그 중 한국인은 90명, 일본인은 10명이었다.
당시 조선에는 초등교원 양성을 위해 3개의 관립 사범학교가 있었고, 이들은 경성사범. 대구사범, 평양사범이었다. 경성사범은 조선인과 일본인을 5:5로 뽑았지만 나머지 2개 사범학교는 조선인 9에 일본인 1을 뽑았다.
3학년 때에는 꼴찌(73명 중에서 73등)를 기록하기도 했다. 또한 그가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도 3,4,5학년 때 매년 40일 이상씩이나 결석을 했던 것을 감안하면 퇴학을 면한 것이 이상할 정도이다.
5년제 사범학교 졸업반인 19세였을때 박정희는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강제에 못이겨 16세의 김호남과 결혼했다.
박정희(朴正熙)
경북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 1917년 11월 14일 출생
아버지 박성빈(朴成彬)과 어머니 백남의(白南儀) 사이에서 5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1924년 4월 : 구미보통학교 입학
1937년 3월 : 대구사범학교 졸업, 문경 보통학교 교사 발령 취임
1940년 4월 : 만주군관학교 2기생 입학
1942년 3월 : 만주군관학교 예과 수석 졸업
1942년 4월 : 일본 육사 본과 특전 입학
1944년 3월 : 일본 육사 본과 졸업
1945년 8월 : 만주군 중위시절 조국 해방
1946년 9월 :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전신) 2기생으로 입학
1946년 12월 : 조선경비사관학교 졸업, 대위임관
1950년 7월 14일 : 한국전쟁발발 후 육군 소령으로 군대복귀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 과장
1948 ~ 1949 여순사건 계기로 무기징역 불명예전역(남로당 총책 혐의 소령)
1950년 12월 12일 : 육영수 여사와 결혼
1955년 7월 14일 : 제 5사단장
1957년 : 제 7사단장
1959년 7월 1일 : 제 6관구 사령관
1960년 1월 21일 : 부산군수기지사령관
1960년 12월 15일 : 제 2군 부사령관
1961년 5월 16일 : 군사쿠데타
1961년 7월 3일 :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취임
1961년 11월 12일 : 일본방문 이케다 수상과 국교 정상화 회담
1961년 11월 15일 : 미국방문 케네디 대통령과 정상회담
1962년 1월 13일 : 제1차 경제 5개년 계획 실시
1962년 2월 3일 : 울산공업단지 건설 기공식
1963년 8월 30일 :육군대장으로 전역식
Korea, 1935
Photographer Unidentified
1935년 8월 용정 북부교회(감리교)의 여름성경학교를 마친 교사들. 뒷줄 오른쪽 끝 안경 쓴 이가 문익환 목사, 왼쪽 끝이 윤동주 시인이다.
대학 진학 준비를 위해 은진중 3년을 마치고 평양의 숭실학교로 전학하기 직전 모습이다.
한인 애국단 입단 선서식 후 백범 김구와 매헌 윤봉길. 1932년 4월 26일
Photographer Unidentified
윤봉길 의사가 거사 직전 백범과 함께 찍은 출정 기념사진
사진촬영 장소는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의 집.
김구 [金九, 1876.7.11(음) ~ 1949.6.26]
윤봉길 [尹奉吉, 1908.6.21 ~ 1932.12.19]
윤봉길(尹奉吉·1908∼1932)의사와 이봉창(李奉昌·1900∼1932) 의사 관련 사진 중 우리에게 낯익은 것이 있다. 윤의사와 이의사가 거사 직전, 출정 선서를 하면서 항일투쟁의 결의를 다지던 모습의 사진. 그 두 사진 속에서 윤의사 이의사 뒤엔 태극기가 걸려있다.
윤의사와 백범 김구(白凡 金九·1876∼1949)와 함께 찍은 사진 속에도 태극기가 걸려있다. 그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태극기였다.
한국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나는 그 태극기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현재 이화여대 박물관에 잘 보관돼있다. 일부 전문가들만 알고 있을뿐 많은 사람들은 전혀 모르고 있는 사실.
이 태극기는 장준하(張俊河·1915∼75)가 타계 한달여 전인 1975년7월8일 이화여대 박물관에 기증한 것이다. 이대 박물관의 유물 관련 기록에 따르면,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비서였던 장준하는 1944년 4월 29일 백범으로부터 이 태극기를 전해받았다.
이후 광복 3일 뒤인 1945년 8월18일 조국으로 돌아오면서 광복군 참모장이었던 이범석(李範奭·1900∼1972)과 함께 이 태극기를 갖고 들어왔다.
이후 줄곧 장준하가 보관해오다 1975년7월8일 이대 박물관에 기증했다. 크기는 가로 257.5cm, 세로 128cm. 천으로 만들었고 태극과 8괘는 헝겊을 오려서 붙였다.
China, 1934
photographer Unidentified
중국 남경에 모인 김구 선생의 가족들. 앉아있는 분이 어머니 곽낙원. 뒷줄 왼쪽부터 큰 아들 인, 백범 김구, 둘째 아들 신.
1939년 4월 24일 중국의 중경.
왼편부터 아들 인, 김구, 모친 곽낙원, 아들 신
상해 홍구 공원 윤봉길 의사 폭탄사건 이후 본국에 머무시던 어머님이 맏아들 인과 둘째아들 신을 데리고 중국으로 건너오셔서 9년만에 가족이 재회했다.
'어머님이 남경에 게실 때 일이다. 청년단과 늙은 동지들이 어머님의 생신 축하연을 베풀려 함을 눈치 채시고 어머님은 그들에게 그 돈을 돈으로 돌려달라. 그러시면서 당신이 자시고 싶은 음식을 만들겠다 하시므로, 발기하던 사람들은 어머님의 청구대로 그 돈은 드렸더니, 어머님은 그 그것으로 단총을 사서 일본 놈 죽이라고, 도리어 보태어 청년단에 하사하셨다.' 백범일지 중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자신이 살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아들을 불러 일렀다.
"창수야~(김구의 본명) 네가 열심히 노력해서 하루라도 빨리 나라의 독립을 실현해다오. 에미는 그날을 볼 수 없겠지만 네가 성공해서 돌아가는 날 나와 아이들 에미의 유골을 갖고 돌아가 고국 땅에 묻어다오"
이어 두 손자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창수야~ 난 내 병을 알고 있어. 또 너희들이 힘들다는 것도 알고 있어. 내가 죽은 뒤에도 꼭 인이와 신이에게 국가를 위해 독립운동을 하도록 해야 한다"
유언을 남긴 곽 여사는 아들과 함께 한 파란만장한 50년 세월이 떠올랐다.
나라를 잃고 그 다음해인 1911년 독립운동 하던 아들이 17년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할 때 면회를 와서 태연하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당시 곽 여사는 황해도 안악의 가산을 팔아 천리 먼길 한성으로 와 그에게 밥을 넣어주고 있었다.
"나는 네가 경기 감사 하는 것보다 더 기쁘게 생각한다. 나랑 네 아내와 딸 세 사람은 아주 잘 지내고 있으니 괘념치 말아라. 감옥에서 몸 잘 간수하거라. 만일 밥이 모자라면 우리가 매일 두 차례씩 올 수 있단다"
그러나 감옥 문을 나올 때는 얼굴이 온통 눈물투성이였다.
김구 선생이 감형이 되어 5년만에 출옥했을 때의 일이다.
친구들이 위로잔치를 베풀고 기생을 불러 가무를 시켰는데, 도중에 어머니에게 불려 나왔다.
곽 여사는 "내가 여러 해 동안 고생을 한 것이 오늘 네가 기생을 데리고 술 먹는 것을 보려고 한 것이냐?"
알고 보니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알린 것이었다.
곽 여사는 언제나 고생하는 며느리를 감쌌다.
백범 김구는 "나는 집안 일에 한번도 내 마음대로 해본 일이 없었다. 내외 싸움에도 한번도 이겨본 적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아들을 따라 상해에 갔다가 둘째 손자 신을 데리고 다시 고향 안악에 돌아왔을 때의 일이다.
곽 여사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손자를 데리고 열심히 교회에 다녔다.
어느 날 손자가 물었다.
"할머니는 어떤 기도를 하세요?"
"일본놈들이 빨리 망해서 우리나라가 독립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한단다"
China, 1935
Photographer Unidentified
치장에 머무를 당시 이동녕을 비롯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1935년 11월에 새로 구성된 臨時政府 國務委員들. 앞줄 오른쪽부터 李始榮·李東寧·趙琬九, 뒷줄 왼쪽부터 安秉祚·金九·曺成煥·車利錫(白凡紀念館 제공).
10월19일 오후 2시에 항주의 이전 한국독립당 사무소에서 제28회 임시의정원 개원식이 거행되었다. 재적의원 14명 가운데에서 8명이 참석했다.
10월22일에 속개된 회의에서는 국무위원 다섯사람의 사직안을 처리했다는 상임위원회의 보고와 1935년도(1934.10.1~ 1935.8.31) 재정상황 보고가 있었는데, 재정상황 보고는 이때의 임시정부의 궁핍상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었다.
수입총액은 1,547元(원)이었는데, 부채 1,505원 6角 9分 가운데에서 550원 5각 1푼을 갚고, 남은 부채가 590원 1각 8분이었다.
의원 7명이 참석한 이튿날의 회의는 비공식 간담회로 진행되었다.78) 간담회의 내용은 공식회의록에는 누락되어 있으나, 일본 경찰의 정보보고에 따르면 다음과 같았다.
송병조는 재정상황보고에서 본 바와 같은 임시정부의 재정 궁핍상을 설명하고, 金九파의 협조를 얻어야 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조소앙·박창세 등 한국독립당 재건파는 극력 반대했다. 항주의 임시정부 판공처 습격사건 때에 金九 측근들에게 봉변을 당한 이래로 金九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던 조소앙은 金九가 임시정부에 복귀하는 것은 곧 임시정부의 주도권을 金九 일파에 빼앗기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때에 같이 봉변을 당했던 金澈은 1934년 6월29일에 사망하고 없었다.79)
임시의정원은 조소앙 등의 불참으로 성원이 되지 못하여 11월까지 유회를 거듭했다. 그러자 일부에서는 조소앙 일파는 민족혁명당 탈당을 가장하여 그 당의 밀명을 받고 임시정부를 허물기 위하여 합류한 것이 아니냐고 의심하면서 그들의 행동에 대해 다시 심의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송병조는 김붕준과 양명진과 함께 조완구와 이시영을 만나서 대책을 협의한 결과, 조소앙 등은 나중에 설득하기로 하고 이동녕을 통하여 金九의 임시정부 복귀를 교섭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11월2일에 열린 의정원 회의에서 윤기섭 등 장기 결석의원 5명을 임시약헌 제23조 규정에 따라 제명함으로써 법정 정족수를 만든 다음 국무위원 보선을 실시하여 金九·이동녕·이시영·조완구, 조성환 5명을 국무원으로 선출했다.
국무위원의 임기는 1년이 남아 있었다. 조소앙은 김붕준과 양명진과 함께 임시의정원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80)
상하이 [Shanghai] , 1940's
photographer Unidentified
안중근의 직계유족 상해시절 사진
오른쪽부터 안중근의 부인 김아려, 손자 웅호, 아들 준생, 손녀 연호와 선호, 안준생의 부인 정옥녀.
큰아들 분도는 12세 때 이국(異國)에서 세상을 떠났고, 김 여사는 이후 자녀들과 함께 상해로 옮겨 살다가 광복 후 귀국합니다.
안 의사의 둘째아들 준생은 1953년 무렵 세상을 떠났다. 준생은 부인 정옥녀 여사와 슬하에 1남2녀.
아들 웅호(雄浩·1932년생)씨, 딸 선호(善浩)·연호(蓮浩)씨입니다. 정옥녀 여사는 남편이 타계한 뒤 아들과 딸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납니다. 안 의사의 유일한 손자인 웅호씨는 미국에서 심장병 의학박사가 되었고, 현재 샌프란시스코 인근 도시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현재 안중근의 직계후손은 미국에, 동생 정근의 직계는 남한과 미국에, 공근의 직계는 북한과 파나마에 흩어져 있다. 남과 북, 해외로 흩어진 그의 후손들을 만날 수 있게 하는 것은 안중근의 유해 발굴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다.
⊙ 장남 분도는 日帝 밀정에 의해 독살당해
⊙ 차남 준생은 日帝의 연출에 의해 1939년 박문사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에게 아버지의 잘못 사죄
⊙ 동생 정근·공근은 독립운동 투신, 공근은 2차 대전 중 충칭(重慶)에서 의문死
⊙ 조카딸 안미생은 金九의 며느리 돼, 金九 암살 후 미국으로 건너가 소식 끊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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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
안중근은 일찍이 16세의 나이로 아버지 安泰勳(안태훈)과 같이 동학군에 맞서고 난 이후, 중요한 家事(가사)와 國事(국사)를 아버지와 더불어 도모했다. 즉 그는 안태훈의 단순한 아들이 아니라, 동지적 후계자와 비슷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난 이후 안중근 가문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분이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다. 여사는 의거 후 뤼순(旅順) 감옥에 있는 아들에게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말라”고 했으며, 안중근은 어머니가 보낸 한복을 입고 순국했다. <대한매일신보>(1910년 1월 29일)에서 “그 어머니에 그 아들(是母是子)”이라는 기사를 실을 정도로 조마리아 여사에 대한 존경의 평판은 안중근의 순국 이전부터 있어 왔다.
광복 직후 기자가 안중근의 조카딸 安美生(안미생)에게 “(안중근이) 어디서 그처럼 끓어오르는 애국심과 놀라운 희생 정신을 받으셨을까요?”라고 묻자, 그녀는 즉각 “우리 할머니가 조마리아신데 女中君子(여중군자)라는 평을 들었던 분으로서 그 사상이 퍽 훌륭하셨답니다. 그 교육의 영향이 크리라고 믿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조마리아에 대한 이런 평가는 일제시대 독립운동 진영에 두루 알려진 것이었다.
안중근의 의거와 순국 이후 가문과 독립운동가들이 북만주, 연해주, 상하이(上海)를 전전할 때, 조마리아는 독립운동 진영의 상징적 어머니였으며, 안중근 가문이 독립운동의 전선에 계속 나서게 하는 정신적 지주였다.
1927년 7월 안중근의 모친 조마리아가 상하이에서 세상을 떠나자, <조선일보> <중외일보>(1927년 7월 19일) 등 국내의 신문들도 그 소식을 전하며 애도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조마리아 여사의 묘를 찾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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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유일한 여동생 안성녀]
2005년 <국제신문> 취재진은 부산 남구 용호동 천주교 교회묘지에 있는 한 묘지를 특종 발굴 보도했다.
“안누시아성여지묘”란 이름 이외에 출생과 사망연도도 기록되지 않은, 마치 白碑(백비) 같은 비석은 금방이라도 시멘트 부스러기가 떨어져 나갈 듯 훼손된 상태였고, 봉분도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을 받지 못한 듯 곳곳이 파인 채 흙이 흘러내리고 있었다고 한다.
지난 10월 17일 필자가 찾아갔을 때 묘지는 어느 정도 정비되어 있었지만, 2평이나 될까 좁은 묘지에는 절을 올릴 공간마저 없었다.
이 비의 주인공은 안중근 의사의 유일한 여동생 安姓女(안성녀, 누시아)다. 그녀의 묘가 국내에 있는 것은 시댁 權(권)씨 후손 극소수만 알고 있을 뿐 안중근 가문의 유족 대부분이나 국가보훈처에서도 알지 못했다.
<국제신문>이 발굴한 안 여사의 외아들 權憲(권헌·1980년 사망)의 제적등본과 안 여사 후손들의 편지와 증언 등을 기초로 안성녀의 일생을 대강이나마 추적할 수 있다.
안성녀에 대해 가장 많은 증언을 남긴 사람은 여성 항일애국지사로 동지들과 함께 하얼빈 주재 일본영사관을 습격한 바 있는 며느리 吳恒善(오항선·1910~ 2006) 여사다.
그녀는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소속 독립군 兪昌德(유창덕)과 결혼했으나, 남편 유창덕이 일본군에게 사살되고 난 이후 1935년 안성녀의 아들 권헌과 재혼했다. 오항선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으며, 2006년 사망했다.
그간 안중근 가문에 밝은 이들이나 인근 유족들에게도 안중근 의사에게 定根(정근)·恭根(공근)의 두 남동생 아래 누이동생이 하나 있었다는 정도만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며느리 오 여사의 증언에 의하면 안 여사는 1954년 4월 8일 향년 74세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이것을 역산하면 안 여사의 출생연도는 1881년이 되는데, 이것은 “안 의사보다 두 살 어리다”는 평소 안 여사의 발언과도 일치한다. 즉 안성녀는 그간 알려진 것과는 달리 안중근 의사의 바로 다음, 즉 정근·공근의 누님인 것이다.
안성녀는 부친 안태훈이 사망하는 1905년 이전 청계동 시절에 결혼했다. 남편은 權承福(권승복)인데, 안 여사가 “같은 고을(황해도 신천)에서 진사 집안끼리 자연스럽게 혼담이 오가 시집갔다”고 말했다고 한다. 1910년 오빠 안중근이 순국하고 난 뒤, 안성녀 집안은 어머니 조마리아와 동생 정근·공근 등 친정 일가와 같이 망명했다.
China, 1942. 3. 6
photographer Unidentified
광복군 징모제3분처 환송기념사진
맨 앞줄 좌로부터 (박찬익, 조완구, 김구, 이시영, 차이석 두 번째 줄 맨 왼쪽 성주식, 오른쪽 김붕준 맨 뒷줄 왼쪽부터 조성환, 조소앙, 이청천, 이범석, 이름 미상
광복 당시 임시정부요인들의 환국기념사진 1945
Photographer Unidentified
중국 충칭(重慶)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광복을 맞이한 김구 선생(맨 앞줄 좌에서 5번째)을 비롯한 임정요인들이 환국에 앞서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1945년 11월 5일 귀국길에 오른 임정 요인들은 11월 23일과 12월 1일 두 차례에 걸쳐 조국에 돌아왔지만, 그들의 환국을 기록한 사진은 찾아볼 수 없다.
“나는 이 소식을 들었을 때 희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다음 날인 1945년 8월 10일 저녁 일제가 연합군에게 항복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서도 기뻐할 수 없었다. 광복군이 국내 진입 작전을 감행하기 직전 갑작스레 찾아온 일제 패망이 김구는 안타까웠다.
“선생이여. 우리 조국이 해방된 것을 10으로 보면, 7은 우리의 애국적 선열들의 피와 땀일 것이오. 그러나 불행히도 최후의 3이 우리의 힘으로 되지 못한 까닭에 우리의 해방은 백과사전에 새 해석을 올리지 아니하면 아니 될 기괴한 내용을 포함하고 말았습니다.” 백범의 말마따나 자력으로 싸워서 얻지 못한 광복은 달콤하기보다 쓰디쓴 고통으로 다가왔다.
“귀국해서 정권을 국민에게 봉환한다.” 일제의 항복 소식을 접한 임시정부 국무회의는 다음 날 환국을 결정했다. “한국 점령 과정에서 미군과 협조를 원하며, 일본군의 무장해제 및 재편성에 미군을 지원하고자 하며, 한국의 독립운동자들이 한국문제에 발언권을 갖게 되길 바란다.”
8월 14일 외무부장 조소앙은 주중 미국대사를 통해 임정이 귀국해 실질적 정부 역할을 하겠다는 의사를 미국에 밝혔다. 그러나 10월 17일 미 국무부·육군성·해군성 3성조정위원회(SWNCC)는 맥아더에게 “개인 자격의 귀국이라면 반대하지 않는다”는 지침을 주었다.
“이에 본인은 본인 및 동료들이 어떠한 공적 위치로서가 아닌 완전한 개인의 자격으로서 귀국을 허락받은 것임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음을 귀하에게 확신시키고자 합니다. 한국에 들어가면 우리들이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정부로서 혹은 민간 및 정치적 능력을 발휘하는 기구로서 활동할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점을 기꺼이 진술합니다. 우리의 목적은 한국인에게 유리하게 될 질서를 수립하는 데 있어 미군정과 협력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11월 19일 김구는 중국전구 미군사령관 웨드마이어에게 ‘개인 자격의 귀국’을 다짐하는 서약서를 제출하였다. 미군정은 다음 날 귀국길에 오른 29명의 국무위원 모두가 탈 수 없는 15인승 C-47 경비행기 한 대를 상하이로 보냈다.
11월 23일 김구 주석을 비롯한 제1진이 김포비행장에 내렸다. 그러나 그들과 태극기를 함께 흔들 환영인파는 비행장 어디에도 없었다. 그날 이 땅의 사람들은 임정 요인들의 귀국을 누구도 알지 못했다. 광복은 축복이 아니라 분단과 동족상잔의 재앙을 알리는 전주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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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올림픽 [Berlin Olympic] 1936
photographer Unidentified
손기정 [孫基禎, 1912 ~ 2002.11.15], 남승룡 [南昇龍, 1912.11.23 ~ 2001.2.20]
손기정선수는 월계수로 일장기를 가리고 있어 경기 후 일본으로부터 마라톤 금지조치를 당했다.당시 손기정의 목에 금메달을 걸어주고 악수를 한 사람이 나치 독일의 총통 아돌프 히틀러였다.
우승자 접견시 히츨러가 어디서 왔냐고 묻자 손기정은 코리아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히틀러가 "우승을 축하하네 젊은이 그대 조국의 영광을 위해 앞으로도 열심히 노력해 주기 바라네"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들은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뛰어야만 했고 누구보다 감격스런 그 자리에 그들은 고개를 들수가 없었다. 마치 죄를 지은 죄인마냥 고개를 떨구며 그냥 그렇게 서 있어야 했다.
당시시 올림픽 공식기록영화 제작자인 베르타 리펜슈탈은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진짜 묘한 느낌이었다. 그토록 영광스러운 순간에 승자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을 이을수 있는지..."
손기정 선수는 우승을 해서 받은 월계수로 치욕스런 일장기를 가릴수 있었지만 '남승룡'선수는 그럴수도 없었다. 치욕스런 일장기를 가리기 위해 바지를 올리고 또 올렸지만 일장기는 가리지 못했다.
그들에 얼굴에는 메달에 기쁨은 없었고 미안함과 슬픔이 가득했다.나라를 잃어 내 조국에 국기를 달지 못하고 뛰어야 했던 그들은 그렇게 아픔을 숨기며 일장기를 가리려 애썻다."남승룡은 손기정이 금메달을 딴 것보다 월계수로 일장기를 가릴 수 있다는 것이 더욱 부러웠다고 했다"
식민지인으로 산다는 것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영역에서 예속된 삶을 의미했다. 1936년 8월 9일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과 동메달리스트 남승룡은 은메달을 딴 영국의 하퍼처럼 승리를 만끽할 수 없었다.
시상대에 올라 주최국 독일의 히틀러 총통이 월계관을 씌워줄 때에도,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시상대를 내려올 때도 손기정과 남승룡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일본의 국가대표로서 세계챔피언이 되었던 이들이다. 당시 일본 방송은 이들의 승리를 ‘조국 일본’의 영광으로 돌렸다.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는 일장기를 말소한 사진을 게재했다. 일장기 말소사건에 대한 총독부의 제재조치는 식민지시대 조국의 의미를 둘러싼 싸움이었다.
일제는 한국을 영원히 일본의 식민지로 삼으려고 했다. 일본의 법률과 제도를 한국에 형식적으로 도입하면서 한국인을 일본제국의 충실한 신민으로 만드는 교육을 실시했다. 서울 도심에는 서양식 건물이 들어서고 ‘모던 보이’ ‘모던 걸’ 같은 새로운 인간 군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Berlin, Germany. 1936
photographer Unidentified
제11회 올림픽경기대회 [The 11th Olympic Games]
베를린 올림픽 경기장에 골인하는 손기정 [孫基禎, 1912 ~ 2002.11.15]
1936년 제11회 베를린올림픽대회 마라톤 금메달
China, 1930's
photographer Unidentified
사진은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 지청천. 오른쪽은 김구 선생.
이범석 장군과 더불어 한국 무장독립전쟁사의 양거두
지청천 [池靑天, 1888.2.15 ~ 1957.1.15]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군인. 본명은 지대형(池大亨)이고 아명은 수봉(壽鳳), 호는 백산(白山), 자는 석규(錫奎)이다. 독립운동 때문에 도망을 다니다 보니 아무래도 이름을 자주 고칠 수 밖에 없었다. 지청천이라는 이름 이외에도 호나 자, 외가의 성인 이(李)를 이용하여 지수봉(池壽鳳), 지을규(池乙奎), 지석규(池錫奎) 이청천(李靑天), 이대형(李大亨) 등 여러 이름을 사용하였다.
188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08년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는데 당시에는 대한제국 군대해산이 이뤄진 뒤라 조선보병대 정도만이 유일하게 남은 군사조직이어서 사관학교에 들어가는 일이 쉽지 않았다. 1909년에는 육군무관학교마저 폐쇄되면서 1, 2학년 사관생도들은 일본 도쿄의 육군중앙유년학교[2]로 유학을 선택하거나 자퇴하게 되었다. 지청천은 일본으로 갔고 1914년에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이때 일본행을 택한 각오가 흠좀무한데,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마음으로 일본에 맞설 능력을 키우기 위해 갔다고 한다. 실제로도 졸업과 동시에 탈영, 만주로 넘어가 한평생을 독립군으로서 활동한다. 26기로 동기는 쿠리바야시 타다미치(1891년생), 이응준(1891년생), 홍사익(1889년생), 김경천(1888년)이 있다. 병과는 보병이었고 일본군 육군 장교로 근무하던 중에 동기 김경천과 함께 1919년에 남만주 삼원보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이 되었다. 망명 당시에 일본군 교범 등을 들고 갔다.
서로군정서 등에서 근무하면서 1920년 북만주에서 청산리 대첩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신흥무관학교를 폐쇄, 북만주로 이동하였다. 1930년대 중국의 호로군과 함께 한중연합작전을 펼쳐 쌍성보 전투, 대전자령 전투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일본의 만주사변으로 만주 전역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확대되어 감에 따라 만주에서 더이상 활동하기가 어렵게되자 지청천 장군은 중국본토로 이동, 1934년에 김구가 설립한 뤄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의 교관으로 활동하였으나, 김구와 갈등으로 결별, 1935년에 김규식, 김원봉과 접촉하여 조선민족혁명당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좌익 성향의 김원봉과 우익 성향의 그는 잘 맞지 않아 탈당하였고, 다시 김구의 한국독립당에 들어가게 된다.
Korea, 1936
photographer Unidentified
손기정이 나치 독일로부터 받은 미국의 참나무(pin oak) 묘목(좌)은 그의 모교 양정고보에 식재됐고, 학교가 양천구 목동으로 이전하면서 현재 손기정 기념공원으로 바뀌어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손기정 선수는 모교인 양정고보에 아돌프 히틀러가 총통이었던 나치 독일로부터 받은 월계관 기념수를 심었다. 손기정기념재단 이준승 사무총장은 "시상식 당시 히틀러가 손기정 선수에게 직접 메달과 월계수 묘목을 수여하지는 않았지만, 히틀러가 손기정 선수를 불러 악수를 했다"라고 전한다.
원래 그리스에서는 지중해 부근에서 자라는 월계수의 잎이 달린 가지로 월계관을 만들었으나 독일 베를린 올림픽에서는 북미 원산인 참나무의 잎이 달린 가지를 대신 사용했다.
독일인은 참나무를 신성시하며 독일서 발행하는 유로화 동전 1, 2, 5센트 뒷면에 독일산 참나무(robur) 잎을 새겨 넣을 정도로 게르만 민족의 상징으로 여겨왔다.
히틀러가 올림픽을 통해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과시하고 독일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계기로 삼았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니 독일산 참나무 잎으로 월계관을 만든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손기정에게 수여한 참나무는 역설적이게도 훗날 독일의 적국인 미국의 참나무(pin oak)다. 이준승 사무총장에 따르면 "당시 독일이 여러 국가로부터 참나무 수입을 하던 터라 이런 일이 생긴 것 같다"고 한다. 이 묘목이 크고 보니 미국산 참나무였다는 것이 확인됐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에피소드다.
어쨌든 손기정이 받아 온 월계수는 그리스의 월계수가 아니며, 그것을 수여한 주체가 나치 독일이었을지라도 손기정이 올림픽에서 받아안은 영광의 금메달과 월계관은 식민지 백성인 조선인들에게는 더 없는 희망이었으리라 상상해본다.
현재 양정중·고등학교는 1991년 양천구 목동으로 이전했고, 월계수가 심어진 옛 교정은 현재 손기정 공원으로 조성돼 있다(서울 중구 소재).
Seoul, Korea, 1933
photographer Unidentified
1933년 경영마라톤 대회 당시 역주하는 손기정 우승 - 경영마라톤 경주 3회
1912년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태어난 손기정은 집에서 2km 떨어진 약죽 보통학교에 다녔다. 또래들은 걸어가기도 힘들어하는 거리를 손기정은 항상 뛰어다녔다. 그가 자주 달리던 곳은 압록강을 가로지른 철교 위였다. 어린 손기정은 배고픔을 잊기 위해서 달렸다. 숨이 차고 심장이 뛰면 배가 고픈 걸 잠시 잊을 수 있으니까. 물마시고 달리고, 물마시고 또 달리면서 허기를 잊었다.
어머니는 매일같이 땀에 흠뻑 젖어 들어오는 아들을 걱정했다. 그래서 손기정에게 잘 벗겨지는 여자 고무신을 사주었다. "공부를 소홀히 하고 달리기만 할 거라면 학교에 가지 말라"는 엄포와 함께였다. 몇 걸음 뛰면 벗겨지는 고무신을 신고도 꼬마는 계속 달렸다. 짚으로 엮은 새끼줄로 신을 싸매고, 새끼줄에 발이 쓸려 피가 나는데도 뜀박질을 멈추지 않았다.
손기정에게 달리기는 놀이였고, 희망이었다. 손기정의 마라톤은 이때 이미 시작됐다. 결국 어머니가 포기했다. 교내 운동회에서 달리기 1등을 휩쓰는 아들에게 '다비'라는 신발을 구해줬다. 엄지발가락이 따로 갈라진, 일본 사람들이 신었던 실내운동화였다. 소년은 '다비'가 닳도록 철교 위를 또 뛰어다녔다.
손기정이 달리기를 잠시 멈출 때가 있었다. 겨울철 철교 밑 빙판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또래들을 봤을 때다. 얼음을 지치는 동작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 있었다. 그때는 허기보다 부러움이 더 컸다. 훗날 손기정은 "사실 스케이트 선수가 되고 싶었다. 스케이트를 살 돈이 있었다면 마라토너 손기정은 없었을 지 모른다. 달리는 데는 돈이 안 든다. 가난이 나를 뛰게 했다"고 회상했다.
손기정은 열다섯 살 때 신의주 대표 선수가 됐다. 신의주와 만주 안동이 대결하는 '안의육상경기대회'에 참가할 기회를 얻었다. 안동 대표 선수들은 스무 살이 넘은 어른들이었다. 코스는 손기정에게 절대 유리했다. 어려서부터 수천 번 넘게 뛰었던 압록강철교에서 시작해 안동으로 가는 길이었다. 손기정은 처음부터 선두에 서더니 여유 있게 1등을 차지했다. 이때부터 손기정의 이름이 신의주에서 유명해졌다.
손기정은 가난 탓에 상급학교로 진학하지 못했다. 생계를 위해 인쇄소와 상회에서 일했다. 보통학교 졸업 후 열여섯 살이 된 1928년 그는 일본 나가노켄으로 떠난다. 신의주에서는 벌이가 신통치 않아 일본으로 건너가 돈을 벌고 달리기도 할 생각이었다. 손기정은 포목점의 점원으로 취직해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일했다. 그러나 달리기 연습을 할 시간을 내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일본 사람들로부터 무시와 천대를 받긴 했지만 일본에 오니 더 형편없는 대접을 받았다. '조센진 손기정'은 '노''예'와 다름없었다. 결국 그는 몇 달 만에 빈손으로 돌아왔다. 아무것도 얻지 못한 건 아니었다. 손기정 마음속엔 반일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꼭 성공해서 일본인들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었다.
신의주로 돌아온 손기정은 곡물상회에 취직했다. 벌이도 일본에서보다 나았고, 달리기 대회에 나갈 시간을 낼 수도 있었다. 손기정은 경주대회에 나가서 쌀 가마니를 1등 상품으로 들고 오기도 했다. 신의주 스타는 평안북도 스타로 발돋움했다. 1931년 평안북도 대표로 조선신궁 대회에 나서 5000m 2위를 차지했다. 체계적인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는 손기정으로서는 대단한 성과를 낸 것이다.
덕분에 그는 1932년 육상 명문 양정고보에 입학했다. 손기정은 권태하, 김은배 등 선배들과 함께 5000m와 1만m, 그리고 마라톤에서 조선을 대표하는 선수로 성장했다. 경험 부족으로 1932년 로스엔젤레스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서 떨어졌지만 4년 후 베를린 올림픽에는 충분히 나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받았다.
손기정 기념관에는 당시 양정고보 교실이 재현됐다. 그리고 그 옆에는 진짜 육상선수가 된 손기정의 뛰는 모습을 재현한 인형이 있다. 손기정은 독립군이 모래주머니를 다리에 달고 군사훈련을 했다는 얘기를 듣고 마라톤 훈련에 적용했다. 다리 근력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또 신발 밑창을 깎거나, 유니폼을 가위로 잘라 조금이라도 무게를 줄이려는 노력도 했다. 그때는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방법이었다.
원문
http://corearoadb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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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3월 21일 동아마라톤의 모태가 된 경영(京永) 마라톤 경주가 열린다.
고려육상경기회 주최, 동아일보·조선체육회 공동후원으로 열렸다.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을 떠나 태평통, 남대문, 한강철교, 노량진, 영등포역전을 거쳐 같은 코스로 되돌아오는 총 50리(14.5마일)를 달리는 코스였다.
첫 대회에 출전한 선수는 당시 국내 마라톤 왕으로 정평이 나있는 기록 보유자 이성근(李成根), 장거리 최강자 변용환(邊龍煥) 외에 김은배를 위시한 양정고보의 주전 6명 등 총 14명이었다. 조선체육회는 유억겸(兪億兼) 회장 지휘하에 임원들이 모두 나서서 이 행사를 준비하였으며, 각계의 지원 속에 비상한 관심을 모을 만큼 성대한 대회였다.
첫 우승자는 1시간 22분 05초를 기록한 양정고보의 간판 김은배에게 돌아갔다. 2위도 양정고보의 유해붕(柳海鵬)으로 1시간 26분 22초, 최강으로 알려졌던 이성근은 1시간 27분 22초로 3위에 그쳤다. 그 다음으로는 변용환·최경락(崔慶洛)·조인상(趙寅相)이 순위를 이었다.
제2회 대회는 1932년 3월 21일 첫 대회와 같은 코스에서 열렸다. 첫 대회 우승자인 김은배가 신병으로 당일 기권한 대신 신의주에서 온 손기정이 참가하는 등 총 29명이었다. 경기 결과 경험이 많은 변용환이 1시간 21분 54초로 대회 신기록을 수립하였으며, 20세의 신예 손기정은 1시간 25분 25초로 2위, 백규복(白圭福)이 3위를 하였다.
제3회 대회는 경인가도의 보수공사로 종래의 코스를 바꾸어 광화문을 출발, 청량리를 지나 망우리에서 돌아오는 경춘가도 15마일 경기로 치러졌다. 3월 21일 완연한 봄 날씨 속에 동아일보사 앞을 출발한 선수 35명 가운데 손기정이 유해붕과 끝까지 접전하다 마지막 스퍼트에서 그를 따돌리고 1시간 24분 03초로 구간 신기록을 세우며 대망의 첫 우승을 차지하였다.
China, 1945
photographer Unidentified
1945년 西安 광복군 제2지대 간부 사진. 앞줄 중앙이 李範奭 제2지대장,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韓悠韓, 그 앞의 양장 차림의 젊은 여성이 韓悠韓의 부인인 中國여성 강엽, 西安 애국부인회원들이 광복군 제 2지지대를 위문차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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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na, 1943
photographer Unidentified
김구 3부자. 왼쪽이 첫째 인(仁), 오른쪽이 신(信).
임정 요인 백범 김구의 맏아들로 태어나 열일곱 어린 나이에 독립운동을 시작해야 했던 김인은 폐병을 앓다가 쓰촨성(四川省) 충칭(重慶)에서 병사했다. 1945년 3월 29일, 해방 다섯 달 전이었다.
백범은 상하이 영경방(永慶坊) 10호에 살던 1922년, 둘째 아들 신(信)을 얻었지만 이태 후 아내를 잃었다. 아내 최준례(1889~1924)는 산후 조리 중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다.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다 뒤늦게 외국인 무료진료소로 옮겨졌지만 결국 숨을 거두고 만다. 병원이 프랑스 조계지를 벗어나 있어 백범은 아내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했다.
둘째 아들 신이 태어났을 때 첫째 아들 인(仁)은 다섯 살이었다. 1918년, 아버지의 고향인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인은 1920년 할머니와 어머니를 따라 상하이로 건너가 거기서 자랐다. 어머니 최준례가 세상을 떠나자, 젖먹이 신을 기르는 것은 할머니 곽낙원의 몫이었다.
할머니는 젖먹이에게 끊인 물에 설탕을 타 먹이고 자신의 빈 젖을 물려야 했다. 가난은 매 끼니를 걱정하게 할 만큼 끈질겼다. 인은 중국인들이 버린 채소더미에서 먹을 만한 푸성귀를 골라내는 할머니를 거들며 자랐다. 그런 장면을 목격한 백범은 모친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원했고 결국 할머니는 신을 데리고 고향인 해주로 돌아갔다.
고향이라고 해서 가난을 넘어설 방도가 달리 있는 것은 아니었다. 허드렛일로 끼니를 벌면서도 할머니는 "오늘은 두 부자가 어느 집 처마 밑을 기웃거리며 밥이나 먹었는지 모르겠다"며 눈물을 흘렸다. 결국 곽낙원은 장손인 인마저 고향으로 보내라며 힘들여 모은 돈을 백범에게 보냈다. 그래서 인도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조손(祖孫) 세 식구는 이국땅의 자식과 부친을 그리며 가난하게 살았다. 1932년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백범이 일제에게 수배되면서 조국의 가족들에게는 일경의 끊임없는 감시와 협박이 이어졌다. 결국 백범은 다시 가족을 중국으로 부를 수밖에 없었다.
중국에 도착한 김인은 백범과 장제스의 합의로 설치된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특별반에 들어갔다가 난징의 중앙군관학교로 옮겼다. 일제의 항의로 과정이 마무리되지 못하긴 했지만, 이들 학교에서 공부한 한인 청년들은 뒤에 조선의용대와 광복군의 핵심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김인은 1935년 11월, 백범이 이동녕·이시영과 함께 항저우(杭州)에서 애국단을 중심으로 한국국민당을 조직할 때 실무진으로 참여하게 된다. 이때 그는 우리 나이로 열여덟 살이었다. '소년'을 '청년'으로 자라게 하고 살게 하던 시대였다. 이듬해에는 한국독립군 특무대예비훈련소의 감독관으로 나가 군사훈련에 전념하였다.
이후, 그는 백범의 지시에 따라 사지를 넘나드는 활동을 계속했다. 1938년 5월 창사(長沙)에서 상하이에 다시 잠입하여 당의 재건을 기도하고 일본의 중요 관공서를 폭파할 것과 일본의 현관(顯官)들을 총살할 계획을 지휘·감독하였다.
또한 일본 전투함 이즈모(出雲)를 폭파, 격침할 준비를 진행하였지만 사전의 정보 누설로 실패하였다. 1939년 10월, 광시성(廣西省) 류저우(柳州)에서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에 입대하여 첩보활동에 참가하였다. 그의 첩보활동은 주로 일본군 점령지역에서 이루어졌다.
김인은 안중근 의사의 동생인 안정근의 장녀 안미생(安美生, 1914~ )과 연애 끝에 결혼했다. 베이징에서 나서 상하이에서 자랐고 홍콩에서 중등학교를 나온 뒤 쿤밍(昆明)의 서남연합대학(칭화대·베이징대·난카이대의 전시연합 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이 재원은 영어, 러시아어 등 외국어에 능통해 충칭의 영국대사관에서 근무하다가 김인을 만났다. 둘 사이에서는 딸 효자(孝子, 1941~ )도 태어났다.
1940년 9월에 임시정부는 치장(綦江)에서 충칭으로 옮겼다. 충칭은 중국 서부의 분지도시로 그 여름은 난징·우한과 함께 양쯔 강 연안의 '3대 화로(火爐)' 중 한 곳으로 알려질 만큼 무덥기로 유명했다. 1937년 중일전쟁으로 일본에 밀린 중국이 수도를 충칭으로 옮기자 갑자기 도시 규모가 열 배 이상 커지면서 충칭의 공기는 더 나빠졌다. 고령의 독립운동가들이 폐병을 앓다가 세상을 뜨는 일도 잦았다.
China, 1940-1941
photographer Unidentified
88여단 시절 사진. 좌로부터 김일성(金日成), 계청(季青, 중국인), 최현(崔贤), 안길(安吉)
(사진 원 판본) 왼쪽으로부터 김일성, 동북항일연군 교도려 제1영 영장 (조선인), 계청,동북항일연군 교도려 제4영 정치부영장 (중국인), 최현,동북항일연군 교도려 제1영 제1련 련장 (조선인), 안길,동북항일연군 제1영 정치부영장 (조선인).
1940-1941년, 전 소련 하바로프스크 밀영에서, 동북 항일연군의 생존자들이었던 김일성과 안길, 최현 세 사람이 함께 찍은 것으로 알려진 역사 사진 원판(原版)을, 당시 세 사람과 함께 사진을 찍었던 중국인 항일장령 계청(季青)의 유가족이 세상에 공개하면서, 지금까지 알려져 왔던 사진은 북한의 역사관계자들에 의해 위조된 것임이 밝혀졌다.
1940-1941년, 전 소련 하바로프스크 밀영에서, 동북 항일연군의 생존자들이었던 김일성과 안길, 최현 세 사람이 함께 찍은 것으로 알려진 역사 사진 원판(原版)을, 당시 세 사람과 함께 사진을 찍었던 중국인 항일장령 계청(季青)의 유가족이 세상에 공개하면서, 지금까지 알려져 왔던 사진은 북한의 역사관계자들에 의해 위조된 것임이 밝혀졌다.
계청은 일찍 흑룡강성 의란현위 선전부장과 동북항일연군 제5군 2, 3사 정치부 주임과 하강임시당위원회 서기 및 제 5군 정치위원과 중국공산당 도남특위 서기를 역임하였던 중국인 출신 항일장령으로, 1940년이후 항일연군이 소련경내로 이동한 뒤 국제교도려로 편성될 때 제3영의 정치부영장(政治副营长, 영장은 시세영, 후임 영장은 조선족 강신태)을 담임하였다. 이때 제1영 영장을 담임하고 있었던 김일성과는 친하게 지낸 사이였으며, 김일성, 계청과 함께 사진을 찍었던 최현과 안길은 각기 김일성의 제1영에서 제1련 련장(최현)과 정치부영장(안길)을 담임하고 있었다.
이 네 사람이 함께 찍었던 사진 원판은 왼쪽으로부터 김일성, 계청, 최현, 안길 순서로 되어있었으나, 1944년 9월 계청이 시세영과 함께 일본군 간첩으로 오해받고 소련군 내무부에 체포되어 1955년까지 줄곧 놓여나오지 못하였기 때문에 북한의 역사관계자들이 이 사진속에서 중국인 계청을 지워버리고 왼쪽으로부터 김일성, 최현, 안길로 순서를 조절하였는데,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출판할 당시 사진 순서를 다시 조절하여 김일성이 중간에 서게끔 하고 왼쪽으로부터 안길, 김일성, 최현으로 재차 다시 위조한 것으로 드러났다.
계청은 1955년에야 소련의 시베리아에서 유배생활을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왔는데, 문화대혁명기간에는 다시 소련특무로 몰려 또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계청이 김일성, 안길, 최현 등과 함께 찍었던 이 사진 원판은, 1970년대에 중공흑룡강성위 조직부와 중공중앙 조직부에 제출하였던 계청의 신소자료에 함께 첨부되었던 것이다. 계청은 1984년에야 비로소 중공중앙 조직부로터 억울한 루명을 철저히 벗고 부성장급 대우를 받게되었으나, 몇해를 더 살지 못하고 1988년 12월에 77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계청의 유가족이 대외에 공개한 것으로 알려진 이 사진을 제일 처음 공식 싸이트에 올렸던 중국 관방의 해외창구인 '봉황위성'이 북한정부의 항의를 받고 급히 삭제하였으나, 현재 이 사진은 급속도로 퍼져 관방의 공식, 비공식 싸이트들이 모조리 게재하는 바람에 전세계에 알려지고 말았다. 현재 중국 국내 합법적인 검색 싸이트 제1위인 '바이두'에서도 검색어 '同一张金日成照片的三个不同版本'을 넣으면 관련 기사와 사진들이 뜨고있다.
이와 유사한 사진 위조작업은 문화대혁명기간 중국에서도 허다하게 발생하였는바,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정강산에서 모택동과 만나 악수하는 홍군 총사령 주덕의 그림이 한때는 임표로 바뀌었던 것이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이 그림은 다시 바로 잡혔다. (청설)
이봉창 [李奉昌, 1900.8.10 ~ 1932.10.10]
photographer Unidentified
태극기 앞에선 이봉창
일본에서 노동자로 일하던 이봉창은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맹세하고 1930년 12월 중국 상하이로 갔다. 한인 애국단의 단원이 된 그는 1931년 12월 13일 상하이에 있던 안중근의 막내 동생인 안공근의 집에서 선서식을 하고 사흘 뒤 도쿄를 향해 떠났다.
이봉창 선생은 1932년 1월 8일 일본 도쿄에서 삼엄한 경호를 받으며 궁성으로 돌아가던 일왕(日王)에게 수류탄을 투척하여 일인(日人)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전세계 피압박 민족에게 큰 충격과 가능성을 안겨줬다.
이 선생이 터뜨린 한 발의 수류탄은 당시 침체일로에 있던 상하이 임시정부에 새로운 전기(轉機)를 마련해 주었다.
본관은 전주(全州). 아버지는 이진구(李鎭球)이다. 서울 출신이다.
천도교가 세운 서울 용산문창보통학교(文昌普通學校)를 졸업한 뒤 상급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한학 공부를 하다 1913년 일본인 과자점의 점원으로 들어갔다.
1917년 용산 원효로에 있는 일본인 경영의 화전(和田) 상점 점원으로 일하다가 1919년 해고당하였다. 1920년에는 용산역 만선철도(滿鮮鐵道)의 기차운전견습소의 역부(驛夫)를 지냈다. 이어 같은 해 전철수(轉轍手)와 연결수(連結手)가 되었다. 1921경 한·일 간의 임금 격차 문제에 눈을 뜨고 항일의식이 싹텄다. 1924년 4월 위의 직책에서 해고당하였다.
1924년 9월 자택에 항일 단체인 금정청년회(錦町靑年會)를 조직, 동 총무가 되었다. 다음 해 형 이범태(李範泰)와 같이 조카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오사카[大阪]에서 철공소직원으로 근무하다 일본인의 양자가 되어 이름을 기노시타[木下昌藏]로 바꾸었다. 이후 동경과 대판 등지를 전전하며 가스회사에서 노동을 하는 등 막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1926년에는 병고(兵庫)에서 1년간 일본인 표구사의 보조원으로 생계를 꾸렸다.
일제의 침략으로 한민족의 생계가 위협받는다는 생각에 방랑 생활보다는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맹세, 1930년 12월 중국 상해로 갔다. 1931년 1월 한국인 거류민단 사무실을 찾아가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호소했으나 민단 간부들이 그의 거동을 수상하게 여겨 받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뒤 김구(金九)가 그의 진의를 알고 자신이 조직한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시켜, 이봉창의 소신대로 일본천황폭살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거사 자금이 여의치 못해, 월급 80원을 받고 일본인이 운영하는 인쇄소와 악기점에서 일하며 확실하게 준비를 하였다. 원로 이동녕의 승인하에 김구도 군자금모집을 펴던 중 재미 동포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고 거사를 촉진시켰다.
당시 중국군 대령으로 복무하던 왕웅(王雄), 즉 김홍일(金弘壹)에게 부탁해 상해공병창에서 수류탄 1개를 구입하고 김현(金鉉)으로부터 또다시 수류탄 1개를 입수하였다. 이 수류탄을 받은 즉시 거사자금 300원을 가지고 1931년 12월 13일 안중근(安重根)의 막내동생인 안공근(安恭根)의 집에서, 양손에 수류탄을 들고 선서식을 마친 뒤 17일 일본 동경으로 향하였다.
1932년 1월 8일, 동경 요요키[代代木] 연병장에서 만주국 괴뢰황제 부의(溥儀)와 관병식을 끝내고 경시청 앞을 지나가는 히로히토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그러나 명중을 시키지는 못하고 체포되어 토요다마[豊多摩]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 사건으로 이누가에[犬養] 내각이 총사퇴하고 다수의 경호 관련자가 문책당하였다. 그 해 10월 비공개재판에서 전격적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10일 이치가야형무소[市谷刑務所]에서 사형에 처해졌다.
이봉창의 거사가 알려지자 중국의 각 신문들은 이 사실을 대서특필하였다. 특히, 중국 국민당 기관지인 『국민일보』는 “한국인 이봉창이 일황을 저격했으나 불행히도 명중시키지 못하였다.”고 보도하여 모든 중국인의 간절한 의사를 대변하여 주었다.
그러나 이 보도가 나간 후 푸저우[福州]에 주둔하던 일본 군대와 경찰이 국민일보사를 습격, 파괴함과 동시에 중국 정부에 엄중 항의하는 등 중·일 관계가 매우 악화되었다. 또한 일본군은 중국인 자객을 산 뒤 일본 일련종(一蓮宗)의 승려 한 명을 암살하게 하여, 이를 빌미로 제1차상해사변(第一次上海事變)을 일으키는 등 그 파급 양상이 심각하였다.
Japan, 1932
photographer Unidentified
얼굴이 가려진 채 일본 경찰과 함께 일본 재판장으로 들어가는 이봉창 의사
이봉창 [李奉昌, 1900.8.10 ~ 1932.10.10]
日王을 직접 해하려 시도한 독립운동가
1901년 8월 10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용산 문창(文昌)보통학교를 졸업, 일본인이 경영하는 과자점 점원으로 있다가, 1918년 남만주철도주식회사(南滿洲鐵道株式會社) 기차운전견습생으로 들어갔으나, 1924년 9월 용산 일대에서 금정청년회(錦町靑年會)를 조직하여 간사로 있으면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듬해 형 범태(範泰)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大阪]에서 철공소 직공으로 일하다가 일본인의 양자가 되어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라는 이름으로 도쿄[東京]·오사카 등지를 전전하였다.
1931년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 임시정부 국무위원 김구(金九)의 지시를 받고 일본 왕 히로히토[裕仁]를 암살하기로 결심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여기에는 양이섭(梁履涉)과 이춘태(李春泰)도 연루되어 있었다.
1932년 1월 8일 일본 왕이 만주국 푸이[溥儀]와 도쿄 교외에 있는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에서 관병식(觀兵式)을 마치고 돌아갈 때 사쿠라다문[櫻田門]에서 히로히토를 향하여 수류탄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체포된 그는 조사과정에서 배후인물인 김구의 신원을 끝까지 밝히지 않고 가공의 인물 백정선(白貞善)으로 둘러댔다.
그 해 10월 비공개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이치가야[市谷]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Seoul, Korea, 1946
photographer Unidentified
윤봉길 의사의 구두와 애국지사 이강훈
윤봉길 의사 유해 발굴에 앞장섰던 독립투사 이강훈씨와 그가 공개한 윤 의사의 구두.
1946년 3월 6일 일본에서 윤 의사 유해를 발굴한 후 4월 25일 유품을 갖고 먼저 귀국해 찍은 사진이다.
윤 의사 시신과 함께 발굴된 구두는 윤 의사가 의거 당시부터 사형 집행 때까지 신고 있었던 것으로, 서울운동장(현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윤봉길의사 거의기념대회(擧義記念大會)’ 중 분실돼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강훈씨 손에 들린 신문은 1932년 12월 19일자 일본 기타쿠니(北國)신문으로 1면에 윤봉길 의사 사형 집행 소식을 담고 있다. 신문 좌측 상단 사진이 수감 당시 윤 의사의 모습이며, 우측 사진은 사형집행 장소를 촬영한 것이다.
2003년 타계한 이강훈씨는 주중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를 폭사시키려다 체포돼 일본에서 12년간 옥살이를 했는데, 당시 백범 김구의 요청으로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세 의사의 유해 발굴을 주도했다.
이 사진은 윤봉길 의사 순국 제77주기를 맞아 윤 의사의 친조카인 윤주(62)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지도위원이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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