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남이상재 ▒

이상재 Lee Sang-jae [李商在, 1850.10.26 ~ 1927.3.29] 사회운동가, 독립운동가

천하한량 2016. 8. 20. 15:34






이상재 Lee Sang-jae [李商在, 1850.10.26 ~ 1927.3.29] 사회운동가, 독립운동가

우리 인생이 
인생다운 인생 노릇을 하려면 
먼저 저 스스로의 ‘나’를 
잃지 말아야 한다. 

나를 잃지 않으려면 
나를 찾아야 하고 
나를 찾으려면
무엇이 나인지를 알아야 한다.

진정한 나를 어디서 찾을까?
인생의 목숨 되는 ‘정신’이 그것이니
어떠한 일에 임하던지
어떠한 물을 대하던지
내가 거기에 있느냐, 
없느냐 하고
항상 스스로를
보살펴야 한다.

월남 이상재 ‘청년이여!’ 

한말의 정치가·사회운동가. 서재필과 독립협회를 조직, 부회장으로 만민공동회를 개최했다. 개혁당 사건으로 복역했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파견을 준비했다. 소년연합척후대 초대 총재, 조선일보사 사장 등을 지냈다.

본관 한산(韓山). 호 월남(月南). 본명 계호(季皓). 충청남도 서천(舒川)에서 출생하였다. 1867년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서울에서 박정양(朴定陽)과 사귀어 l0여 년 간 그의 집에서 식객 노릇을 하다가, 1881년 그가 조사 시찰단(朝士視察團)의 한 사람으로 일본에 갈 때 그의 수행원이 되어 도일(渡日), 동행하였던 홍영식(洪英植)·김옥균(金玉均) 등과 깊이 사귀었다. 1884년 우정국 총판(郵政局總辦) 홍영식의 권유로 우정국 주사(主事)가 되어 인천에서 근무하다가, 갑신정변(甲申政變) 후 낙향하였다. 

1887년 박정양이 초대 주미공사(駐美公使)에 임명되자 그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1등서기관으로 근무하였으나, 청나라의 압력으로 이듬해 사신 일행과 함께 귀국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후 박정양이 내무독판(內務督辦)이 되자 우부승지(右副承旨) 겸 경연참찬(經筵參贊)이 되었고, 이어 학무아문참의(學務衙門參議)로 학무국장(學務局長)을 겸임하면서 신교육령(新敎育令)을 반포하여 실시하게 하였다. 

1895년 학부참사관(學部參事官)·법부참사관(法部參事官)을 지내고, 1896년 국어학교 교장·내각총서(內閣總書) 및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을 거쳐 의정부(議政府) 총무국장이 되었다. 서재필(徐載弼)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 부회장이 되어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하고, 1898년 독립협회사건으로 구금되었다가 10일 후 석방되어 의정부 총무국장을 사임하였다. 1902년 개혁당(改革黨)사건으로 3년간 복역하는 동안 그리스도교도가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자 특사로 출옥, 1905년 의정부참찬(參贊)에 임명되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파견 준비차 내밀히 한규설(韓圭卨)·이상설(李相卨)의 집을 왕래하던 중 체포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2개월 후 석방되었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듬해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종교부 총무 및 교육부장을 겸임하던 중 3·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교섭을 받았으나 참가를 거부하였다. 

1921년 조선교육협회(朝鮮敎育協會) 회장이 되어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만국기독교청년연합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석 후 1923년 소년연합척후대(少年聯合斥候隊:보이스카우트) 초대 총재가 되고, 이듬해 조선일보사(朝鮮日報社) 사장에 취임하였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 초대 회장에 추대되었으나 곧 병사하였다. 장례는 한국 최초의 사회장(社會葬)으로 집행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해학

* 통감정치시대 이완용, 송병준에게 

“대감네는 동경으로 이사 가시지요.” 라고 했다.

“그건 무슨 소리요?” 라고 되묻자,

“대감네는 망하게 하는 데는 천재들이니까 동경에 가면 일본도 망할게 아니요?” 라고 대답하셨다.

* 젊은 사람과 허물없이 농담하고 장기도 두는 것을 보고...



젊은 사람과 허물없이 농담하고 장기도 두는 것을 보고 아이들이 버릇이 없어진다고 충고하는 친구가 있었다. 

“내가 젊어져야지 젊은이더러 노인이 되라면 어떻게 하겠소?” 

* 1922년 민립대학 설립 운동 시 

어느 미국인 선교사가 귀국길에 하와이에 같이 가서 기금을 모집하자고 제의했으나 월남 이상재선생은 거절했다.
“나는 일본 여권으로는 천당에서 오라고 해도 가지 않겠소” 

* ‘시국강연회’ 유머 

“방금 보고 온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내가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호떡 한 개를 가지고 두 아이가 서로 싸우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아이는 중학생이고, 한 아이는 소학생. 그런데 소학생이 가진 호떡을 중학생이 빼앗아서 처음에 별떡을 만들어 준다고 하면서 조금씩 먹기 시작하다가 소학생이 울면서 앙탈을 하니까 이번에는 달떡을 만들어 준다고 모난 데를 돌려가면서 뜯어 먹었습니다. 결국 중학생이 꾀를 부려서 소학생의 호떡을 다 먹어 버리니까 소학생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자꾸 울고만 있더니 ……” 

청중들은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고 크게 박수를 쳤다. 일본 경찰이 강연을 마치게 하고 사람들을 해산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