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남이상재 ▒

이상재 [李商在, 1850.10.26 ~ 1927.3.29] 1881년 조사시찰단원으로 일본 방문 당시 관복차림

천하한량 2016. 8. 20. 15:36




이상재 [李商在, 1850.10.26 ~ 1927.3.29] 

1881년 조사시찰단원으로 일본 방문 당시 관복차림의 월남 이상재 선생

1863년 12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한 고종을 대신한 대원군은 극도로 쇠약해진 왕권과 문란해진 법과 행정 규율, 그리고 걷잡을 수 없이 헝클어진 3정착취체제를 바로 잡아나갔다. 그의 개혁정치는 비록 봉건적 개혁이었지만 무너져가던 왕조를 재수습하고 국력을 강화함으로써 닥쳐올 민족적 위기를 일시적으로나마 막아낼 수 있는 힘을 조성하였다는 데 긍정적 의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866년 프랑스의 침략과 1871년 미국의 침략을 막아냈던 것이다.

1876년 일본의 강압 아래 불평등조약인 한일수호조약(강화도 조약)이 맺어진 이래 1882년 미국과의 조미수호통상조약, 1883년 영국과의 조영수호통상조약, 독일과의 조독수호통상조약, 1884년 러시아와의 조러수호통상조약, 이탈리아와의 조이수호통상조약, 1886년 프랑스와의 조불수호통상조약 등이 잇달아 맺어지며 조선은 구미 열강의 세력 각축장으로 변했다.

강화도조약의 체결에 격분한 애국적인 민중과 이를 기반으로 유생들의 위정척사운동이 적극적으로 일어났다. 정(正)은 주자학적인 질서를 말하는 것으로 이것을 지켜 나간다는 것이 ‘위정’이며 그리고 주자학 이외의 사상, 특히 서양의 사상이나 종교는 사악하고 나쁜 것이므로 이를 배척해야 한다는 것이 ‘척사’이다. 

1876년 1월 위정척사운동의 대표적 인물인 최익현이 50여명의 유생들과 함께 상소를 올려 정부의 투항정책을 규탄했다. 최익현의 상소는 보수적 세계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지만 자본주의 침략의 위험성으로부터 사람들을 각성시켰다는 데 의의가 잇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위정척사운동은 영남만인소에서 정점에 달했으며 1890년 이후 의병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같은 격동의 시기에 북학파의 전통을 이은 박규수와 오경석, 유홍기 등에 의에 19세기 중반에 싹튼 개화사상은 김옥균(안동김씨 부사 김병기의 양자)·박영효(판서 박원양의 아들이자 철종의 사위)·박영교(박영효의 동생)·서광범(참판 서상익의 아들)·서재필(서광범의 조카)·김윤식·김홍집·홍영식·유길준·어윤중 등으로 이어졌다.

여기에 또 하나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개화파 인물이 박정양이다. 그는 박규수와는 반남박씨 종친으로 1866년(고종 3) 별시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고종의 측근으로 개화 정책을 왕에게 채택하도록 한 인물이다. 월남 이상재 선생은 1867년 그를 만난 이래 그의 정치 문하생이자 참모로 1904년 그가 죽을 때까지 정치적 행보를 같이 하며 이 시기에 박정양을 통해 개화사상을 접하였다.

강화도 조약을 맺은 해인 1876년 5월 왕은 수신사(修信使) 김기수를 일본에 보내 발달된 모습을 둘러보도록 하였으며 그 뒤인 1880년 3월에 다시 김홍집을 수신사로 일본에 보냈다. 김홍집이 8월에 돌아와 일본 주재 청나라 대사관에 근무하는 황준헌이라는 사람한테서 얻은 국제 정세와 향후 조선이 어떻게 하는 게 좋겠다는 <조선책략>이라는 책자를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이듬해인 1881년 1월과 2월에 걸쳐 어윤중, 박정양, 홍영식 등 12명이 공식적으로는 암행어사의 직책을 띠고 부산에 모여 준비를 한 뒤, 수행원인 이상재, 유길준, 윤치호 등 27명을 합해 총 39명이 일본에 갔다. 그리고 약 6개월에 걸쳐 광업, 군사, 농업, 교육, 문화, 공업, 경제, 사회 분야 등에 걸쳐 자료를 수집하고, 현장을 방문하여 실제로 보고 관련자들에게 듣고 하여 8월에 귀국하였다. 

이때 일본의 신문에서 이들 일행의 움직임을 상세하게 보도하면서 ‘신사유람단’이라고 한 것이 정식 명칭인 양 지금도 역사책에 버젓이 자리 잡고 있다. 사실은 다 망해가는 조선왕조를 일으켜 세우고자 비교적 젊은이들을 선발하여 일본에 보내 일본이 부강해진 방법을 배워 오라는 고종 임금의 지시를 받고 일본에 갔다 온 것이며 조선 측에서 공식적으로 부여받은 임무는 암행어사이고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이라고 불렀다.

조사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온 월남 선생은 이때 홍영식, 어윤중, 김옥균 등과 깊이 사귀었다.

원문

http://www.newssc.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601

http://www.designersparty.com/

The process of making body and spirit of Korean Desig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