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번의 태권도의 날을 맞이하여
- ▲ 1994년 9월 4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IOC 총회. 이 회의에서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다.
며칠 후면 태권도의 날이다. 17년 전 IOC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파리(Paris)에서 올림픽 콩그레스(Olympic Congress)가 개최됐다. 그 기간에 열린 103차 IOC 총회에서 태권도가 만장일치(85대0)로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됐다. 그날이 바로 9월 4일(1994년)이다.
태권도의 올림픽 종목 채택은 우리 문화가 세계문화 속에 심어지는 역사적 사건이다. 단순히 올림픽에서 금메달 4개(한국이 출전 가능한 태권도 체급 숫자) 따는 것 이상의 의의를 가지고 있다. 최근에 수백 억씩을 투입하여 유치한 일과성 이벤트(Event)와는 비교할 수 없는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태권도가 전 세계인의 스포츠가 되는 데에는 국민의 성원과 태권도인들의 노력은 있었지만, 정부의 재정지원이나 특히 수해 복구 등 급한 곳에 쓰일 국민세금을 거출하는 일은 없었다. 더구나 쾌거를 달성하고도 '믿거나 말거나' 식으로 부풀려진, 몇 십 조 운운하는(?) 경제 효과를 내세우지도 않았다. 어디까지나 자력으로 이루어낸 국민 저력의 돌출이었고 대한민국에 있어 큰 행운이었다.
스포츠는 원래 서양에서 동양으로 수출하던 것이다. 태권도의 올림픽 종목 채택은 거꾸로 스포츠를 동양에서 서양으로 수출하는 의미가 있다. 이 의미 있는 역행의 첫 번째는 유도이고, 두 번째로 성공한 것이 바로 태권도다. 더욱이 태권도는 다른 종목이 100년 걸려 이룩한 것을 20년 만에 이뤘다. 이렇게 뜻 깊은 날을 연기자 출신의 문화관광부 장관이 도복을 입고 요식행위를 한다든가 콘서트 정도를 개최하는 기념행사 가지고 끝내서는 안 된다.
자랑스러운 태권도의 날을 맞이하여 세계태권도연맹(WTF)을 창설하고, 국기원을 건립한 사람으로, 또 종주국 태권도협회(회장 홍준표[洪準杓])의 종신명예회장으로서 근대 태권도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가고 있는 길을 짚어본다.
- ▲ 1972년 현재의 강남구 역삼동에 건립 중인 국기원의 모습.
태권도의 비전(Vision)은 1971년 태권도의 국기화, 세계화, 국위 선양의 기수, 호국의 기수 등을 내걸면서 시작되었다. 1972년 12월 9일, 1년 만에 자력(自力)으로 태권도인의 염원인 대한태권도협회 중앙도장(국기원)을 완공했고, 이를 원동력으로 태권도가 국기화의 길을 걷는 초석을 마련했다. 국기원의 재단법인 등록 후 30여 개로 난립하던 태권도관을 통합하고 연수원 개설, 승단 심사통일, 품세 통합, 해외사범 파견과 지원, 역사 정립, 교본과 <태권도> 지 발간 등을 진행하여 태권도의 역사와 전통을 만들어 나갔다. 또 가라테나 쿵푸와 차별화된 경기 규칙을 만들어 세계에 내놓았다.
그렇게 현대태권도의 모습을 정립됐다. 특히 석유파동으로 어려웠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국기원 건립에는 개인적으로 많은 지인들이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40년이 넘게 세월이 흘렀지만 감사한 마음은 여전하다.
1973년 태권도인의 염원을 품고 신축된 국기원에서 20개 국을 모아 5월 25일부터 27일까지 3일간 재1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를 개최하고 28일에는 19개국이 참가하여 세계태권도연맹(WTF)을 창설했다. 초대 총재에 김운용, 사무총장에 이종우를 선출하고 태권도의 전국조직 확장 및 강화 그리고 세계화를 향해 장도를 떠나게 되었다.
대한태권도협회는 종주국으로서 기둥이 되고, 세계태권도연맹은 전 세계 보급과 그 관리에, 국기원은 무도정신과 전통을 유지하면서 양대기구를 지원하는 삼위일체(三位一體)로 움직이게 만든 것이다. 3개 기구로 나눈 것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니다. 역사의 사명이고, 시대정신이 깃든 일이었다.
이때부터 WTF는 국제 실적 쌓기와 국제적 우산을 쓰는 것을 최대 목표로 삼았다. 먼저 국제적인 우산(승인)부터 쓰기 시작했다. 그러지 않으면 강대한 가라테에 밀려 임의단체로 끝날 판이었다. 또 1974년 10월, 국기원에서 제1회 아시아태권도선수권대회를 개최하고 아시아연맹을 창설했다. 곧 이어 1975년에는 장충체육관에서 35개국이 참가하는 제2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를 열고 이때 참석했던 GAISF의 오스카 스테이트(Oscar State) 사무총장의 권고로 1975년 10월 5일 몬트리올(Montreal) GAISF 총회(회장 토마스 켈러)에서 유도, 가라테, ITF(국제태권도연맹-간접), 수영 등의 반대를 물리치고 만장일치로 가입하였다.
이때는 태권도는 가라테의 일파며 한 스타일이라는 것이 상식이었고, 실제로 해외도장들이 '코리안 가라테(Korean Karate)'라고 간판을 내걸곤 했다. 이는 참 중요한 사건이다. GAISF 가입을 통해 태권도는 공인 국제연맹이 되어 다른 올림픽 및 비올림픽 국제스포츠연맹과 경쟁하고 공존하는 단체가 됐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국제무대에 첫 걸음을 내딛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태권도는 위로는 국제공인이라는 우산을 쓰고, 아래로는 산재되어 있는 각국 협회조직을 각국 NOC 산하에서 공인 및 예산 지원을 받는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이렇게 태권도는 밑에서 위로 발전한 것보다는 외교력으로 우산을 빨리 많이 쓰면서 위에서 밑으로 확산해 나가는 식으로 발전해 나갔다. 상향식이 아닌 하향식이었던 것이다. 이런 과정과 그로 인한 성과를 도외시하고 지금의 잣대로 태권도를 재단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워낙 발전속도가 빠르다 보니 총재를 무조건 따르고 보좌하던 엄운규, 이종우, 홍종수, 이남석, 이교윤, 이금홍, 김순배 등의 관장들도 어리벙벙했을 것이다.
1976년에는 CISM(국제군인체육회, Raul Mollet)에도 가입했고, 바르셀로나에서 제1회 유럽태권도대회를 개최하여 유럽태권도연맹(Mario Saila)을 창설하였다. 또 1978년 9월 멕시코에서 지금의 ANOC회장 마리오 바스케스 라냐(Mario Vasquez Rana)와 같이 제1회 팬암(Panam) 태권도대회를 열었고, 1979년 4월에는 아이보리 코스트(Ivory Coast)의 아비장(Abidjan)에서 제1회 아프리카 태권도선수권대회(경기위원장 김영태)를 개최하고 아프리카태권도연맹(Wasanan Kone)을 창립했다. 이때 5만 달러를 지원했는데 당시에는 적지 않은 액수였다.
1980년 4월 IOC 프로그램위원회(Arpad Csanadi)가 WTF를 승인하였으나 ITF(국제태권도연맹, 총재 최홍희)의 항의로 ITF, WTF에 대해 세계 각국 NOC의 승인 상황을 IOC가 조사했다. 당시 WTF를 이끌고 있던 필자는 KOC 부위원장 겸 명예총무였고 서울올림픽의 주역이었기 때문에 전 세계 NOC에 로비하여 이 문제는 어렵지 않게 1984년 로스앤젤레스 IOC 총회에서 정리됐다. 그러나 IOC는 장기적 과제로 WTF와 ITF의 통합을 지시한 바 있다.
1982년 4월 8일, 서울올림픽 준비사항 점검 차 내한한 사마란치 IOC위원장을 국기원으로 초청해 태권도시범을 관람케 하고 현황을 브리핑했다. 태권도를 IOC 승인에 이어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시키기 위한 노력의 첫발을 내딛은 것이다. 이때 WTF집행위원들을 소집했고 김용식 SLOOC(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위원장, 키요카와(Kiyokawa) 일본 IOC위원, 한국의 김택수 IOC위원이 사마란치를 수행했다.
그후 IOC위원 국제연맹회장, NOC위원장들의 초청방문이 줄을 이었다. 1983년 8월 12~13일 베네수엘라 카라카스(Caracas)에서 개최된 팬암게임총회(ODEPA)에서 태권도의 정식종목 채택을 요청했다. 세계 각국에 사범 위주로 산재되어 있는 태권도를 각국 NOC가 인정하는 공인협회로 승격시키고, 올림픽을 향한 하나의 중요한 과정으로 대륙 경기에 넣기 위해서는 이 채택이 선결과제였다.
당시 마리오 바스케스 라냐 ANOC 겸 팬암게임(PanAm Game) 회장은 태권도가 좋은 스포츠지만 팬암게임 종목이 너무 많아서 곤란하니 2년 후 쿠바(Cuba)총회에서 다시 검토하자고 제안을 했다. 말이 연기지 한 마디로 ‘안 넣겠다.’는 이야기였다. 이에 미국, 벨리즈, 코스타리카 등이 표결을 요청하여 22대 2(기권 2표)로 태권도는 채택됐다. 이때부터 중남미 각국에서 NOC가 인정하는 태권도협회가 창설되고 예산지원이 가능해졌다. 미국태권도협회(USTU)도 미국올림픽위원회(USOC)의 일원이 되어 대의원과 집행위원을 차출하고, 연간 예산지원은 물론 LA올림픽 잉여금에서 100만 달러도 지원 받았다. 이어 태권도는 1983년 11월 28일~12월 1일 열린 아프리카 게임에서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고, 1984년 9월 28일에는 86서울아시안게임 정식종목으로 결정됐다.
이 무렵 필자는 LA올림픽에서 귀국한 즉시 복싱의 선례를 보고 올림픽 경기의 절대요건인 안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헤드기어(Headgear) 사용을 지시했다. 이것도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을 위한 하나의 준비였다. 1985년 6월 2일~6일, 동독의 동베를린(East Berlin)에서 열린 90차 IOC총회에서 태권도가 88서울올림픽경기대회 시범종목으로 채택되었다.
원래 야구와 배드민턴이 시범종목으로 선정되었고 태권도와 씨름은 문화전시종목으로 결정된 상태였다. 하지만 사마란치 IOC위원장이 SLOOC 수석부위원장이었던 필자의 강력한 건의를 받아들여 태권도와 야구가 시범종목이 되고 배드민턴이 전시(Exhibition)종목이 되었다. 사마란치는 SLOOC가 개회식에서 태권도 시범을 하는 것에 부정적이라는 얘기를 듣고, 꼭 하라는 주문을 넣기도 했다.
1986년 5월 8~10일, 크로아티아(Croatia) 자그레브(Zagrev)에서 열린 FISU(국제대학스포츠연맹, 회장 Primo Nebiolo) 집행위원회는 태권도를 FISU 종목으로 채택했다. WTF는 모든 국제기구에 들어가는 전략을 쓴 것이다. 그에 앞서 1981년에는 산타클라라(SantaClara)에서는 월드게임에, 1986년에는 파리(Paris)에서는 국제 페어플레이(Fairplay) 위원회에 각각 가입했다. 1986년 9월 17개국 84명의 선수와 40명의 임원이 참가한 가운데 아시안게임(위원장 박세직, 부위원장 김운용) 최초로 태권도경기를 개최했다.
1986년 10월 17일, 필자(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수석부위원장, WTF 총재)가 IOC 위원으로 선출(스위스 로잔)되면서 태권도 세계화와 올림픽 종목 채택은 더욱 힘을 받게 되었다. 이어 필자는 1986년 10월 25일 모나코에서 토마스 켈러(Thomas Keller) 회장에 이어 120개 국제연맹의 총집합체인 국제경기연맹총연합회(GAISF) 회장으로 선출됐다. 따라서 태권도의 법통은 물론 소위 요새 말하는 부가가치까지 붙기 시작했다.
1987년 8월 1~4일, 케냐 나이로비(Nairobi)에서 11개국이 참가한 제4회 아프리카 게임에서 태권도 경기가 개최됐고, 1987년 8월 14~16일, 미국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열린 제10회 팬암게임에는 26개국 128명이 참가한 태권도 경기가 열렸다. 이때부터 미주대륙에서는 IOC와 GAISF라는 큰 우산 아래 각국 NOC의 승인과 예산지원을 받게 되었으며 가라테와 우슈 그리고 ITF를 앞질러 급속히 보급됐다. 이 과정에서 물론 한국사범들의 지위도 격상되었다. 1987년 9월 16~19일, 자카르타에서 열린 14회 동남아게임에 5개국 58명의 선수가 참가한 태권도경기를 개최됐고, 같은 해 10월 1일 IOC 초청으로 스위스 로잔에 국기원 시범단(단장 홍종수)을 파견해 올림픽주간행사에서 시범을 보였다. 이는 태권도가 스포츠 경기로 우수함을 홍보하고, 태권도를 확실하게 인식시키기 위한 계획이었다.
1988년 9월, 88서울올림픽 태권도 시범경기가 실시됐다(장충체육관). 사마란치 위원장을 비롯한 많은 IOC 위원이 직접 시상을 하기도 했고, 9월 17일 올림픽 개회식에는 식전행사로 공수특전단의 멋진 태권도 시범이 전 세계에 중계돼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1992년 4월 22일, OCA(아시아올림픽평의회) 집행위는 1994년 12회 히로시마(Hiroshima) 아시안게임에 태권도를 정식종목으로 채택했다. 원래 가라테만 15체급이 들어가고 태권도는 제외됐으나 JOC 회장(Furuhashi) 및 일본 정부와 끈질긴 교섭을 벌여 특별히 정식종목으로 채택됐다. 일본체육회로서는 크게 양보한 셈이다.
1992년 7월 23일, 바로셀로나(Barcelona) IOC 총회에서 필자가 일본의 이가야 치하루 위원을 54대28로 물리치고 IOC 부위원장에 당선됐다. 그리고 1992년 8월 3~5일, 바로셀로나 올림픽에서 태권도가 시범경기로 시행됐다. 27개국 128명의 선수와 116명의 임원과 심판이 참가했는데 이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당시 IOC 헌장은 시범종목은 2개로 제한돼 있었고, 이미 페로타바스카와 롤러스케이트 두 개 종목이 확정돼 있었으나, 필자가 사마란치 위원장에게 건의하여 일차로 태권도를 1일간 전시종목으로 선정해 놓고, 다시 4일간 시범종목으로 격상한 특례를 만들었다.
이렇게 IOC 규정까지 넘어서며 2회 연속 태권도의 시범종목 채택을 관철시킨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이런 것이 모두 향후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 때 실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스페인 카를로스 국왕, 사마란치 위원장을 비롯한 많은 IOC 위원들이 참관하고 시상했다. 사마란치 위원장은 태권도 경기도 TV 방영에 맞춰 유도처럼 도복색깔을 청·홍으로 바꾸기를 제안했지만 흰 도복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 호구와 헤드기어를 청·홍으로 사용한다는 역발상을 다시 제안해 사마란치가 이를 받아 들였다. 귀국 후 헤드기어가 흰색으로 돼 있는 것을 청·홍으로 바꾸도록 지시했다.
1993년 2월 24일, 필자가 대한체육회장(KSC) 겸 대한올림픽위원회(KOC)위원장으로 피선됐다. 이를 계기로 태권도는 국내에서도 스포츠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1993년 8월, 뉴욕 메디슨스퀘어가든에서 제11회 세계선수권과 제4회 여자태권도 세계선수권대회를 개최했다. 82개국 443명의 남자선수와 54개국 226명의 여자선수가 참가했고 국제심판도 100명이나 됐다. 이때 IOC위원(Ganga, Anita de Frantz, Santander, Mendoza, Rodriguez, Arroyo), Huba 스포츠인테른 사장, Togay AIPS 회장, 미국올림픽위원장, 애틀랜타올림픽 조직위원장(Bill Payne), IOC 스포츠국장(Felli) 등을 초청해 태권도를 각인시켰다.
미국의 심장으로 불리는 메디슨스퀘어가든(Madison Square Garden)이라는 상징적인 장소에서, ABC 방송사에 의한 TV생중계와 IOC위원 및 VIP 초빙 등 그야말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지금 생각해도 어마어마한 대회를 치러낸 것이다. 이 또한 올림픽 채택을 위한 마지막 포석이었다.
이때는 지금처럼 4년에 800만 달러씩 IOC에서 분담금이 나오기 전이었던 까닭에 자체 마케팅으로 행사를 추진했다. 지금처럼 엄청난 액수의 IOC 예산지원이 있었으면 더 멋있는 대회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때 경기위원장은 박연희 사범, 부위원장은 박연환 사범이었다. 뉴욕에서 태권도 사범으로 크게 성공한 사람들이다.
1994년 5월 첫 번째 도전이었던 IOC 프로그램위원회(위원장 Franco Carraro)에서 태권도 채택은 총11명 중 9명이 반대해 부결되었다. 그러나 1994년 9월 4일, 103차 IOC 총회에서 85대0의 만장일치로 태권도가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 부결된 상황을 불과 4개월 만에 뒤집은 것이다.
이는 세계인을 놀라게 한 사건이었으며 IOC 내에서도 믿기 힘들 일이라고 평가했다. 필자는 프로그램 위원회 부결 이후 사마란치를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그러자 사마란치는 태권도를 트라이애슬론(Triathlon)과 같이 남녀 1체급씩 2개의 금메달로 하자고 제안했다. 한 체급씩이면 아예 안하는 것이 낫겠다고 했고 나의 강경한 건의에 사마란치는 남녀 2체급씩 4개에 동의했다. 이어 사마란치의 권고에 따라 집행위원 전원을 밤새도록 찾아다니며 설득을 했고 9월 3일 집행위에서 남녀 3체급씩 6체급을 독단적으로 상정, 통과하게 됐다.
마지막으로 9월 4일 총회에서는 또 독단적으로 다시 한 체급씩을 늘려 남녀 4체급씩 8체급을 최종 제안했다. 사마란치는 집행위원회 후에도 총회에 상정하기를 꺼렸으나 나의 간청으로 마침내 상정에 동의했다. 총회에서 WTF의 현황, 실적은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ITF 문제 즉 ‘1개 스포츠에 2개의 연맹’이 문제로 제기됐다. 필자는 타 단체를 흠집 내는 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해 "ITF는 잘 모르겠고 WTF의 보급현황과 실적만 설명하겠다."며 반박했다. GAISF, 월드게임, CISM, FISU, 팬암(Panam), OCA, 아프리카(Africa) 등 각 대륙게임 채택 현황, 올림픽 시범경기 2회, 경기룰, 헤드기어·호구 등 장비안전 강화 등의 실적을 설명하며 ITF와의 차별화를 강조했다. 이것이 적중했고, 또 서울올림픽을 전후해서 국기원에 초청된 40여 명의 IOC위원들의 도움으로 85대0의 만장일치 채택이 가능했다.
당시 필자는 IOC 부위원장 겸 IOC TV위원장으로 태권도 정식종목 채택을 역설했고 한국, 미국, 스페인, 독일, 이태리, 프랑스 등 전 세계 태권도 사범들이 IOC 총회장 밖에서 나를 응원하고 경호했다. 돈이 없어 그 사범들을 지원해 주지도 못해 미안하게 생각했다. 이때 ITF와 가라테 관계자들이 WTF 반대문서를 각 IOC위원들 방과 총회장에 돌리고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위협을 했다.
태권도의 정식종목 채택 직후 사마란치는 자신과 나의 테러 위험을 감지하여 특별경계를 지시까지 했다. 가라테는 소송을 걸겠다고 위협하기까지 했다. 한국의 메달 독식을 막기 위해 1개국 최대 4체급으로 출전을 제한하는 약속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무마했다. 사마란치는 우선 시드니올림픽경기를 잘 치르고 점차 체급을 늘리자고 제안하며 한국의 독식이 안 되도록 평준화에 노력하라는 조언을 했다. 그런데 올림픽을 3번이나 치른 지금까지도 체급이 늘기는커녕 오히려 퇴출되지 않을까 불안한 앞날을 모두가 걱정하고 있다.
태권도 올림픽 종목 채택 후 김영삼 대통령에게서 '민족의 쾌거'라고 축하전화가 왔고 파리에서 귀국하니 문화체육부에서 WTF에 3000만 원 여비를 주겠다고 WTF의 이금홍 총장을 통해 제안이 왔으나, 이미 끝난 일이라며 거절시켰다. 어디까지나 누구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성공한 일로 역사에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1994년 10월 8~9일, 제12회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조직위원장 후루하시 히로노신)에 21개국 76명의 선수가 참가한 태권도 경기 개최했다. 1996년 11월 17일, IOC 집행위에 건의하여 경기 운영의 어려움을 들고 시드니올림픽 태권도경기 쿼터(Quota)를 64명에서 100명으로 증가시켜 더 많은 태권도 선수가 영광을 갖게 했다. 1997년 5월 17~18일, 제2회 부산 동아시아게임 태권도 경기가 6개국 40명의 선수와 15명의 심판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태권도는 이제 모든 주요종합경기의 얼굴이 됐다. 1998년 12월 7~10일, 제13회 방콕 아시아게임 태권도경기에 26개국 173명(남110, 여63) 선수와 국제심판 26명이 참가했다. 2000년 9월 27일~30일, 시드니올림픽에서 남녀 8체급에서 선수 102명과 국제심판 36명(1개국 1명씩)이 참가, 올림픽 사상 최초로 태권도 경기가 열렸다. 한국이 금메달 3개를 땄다. 싹쓸이는 못한 것이다. 사마란치 위원장, 키신저(Kissinger) 전 미국국무장관, 카를로스(Carlos)스페인 국왕 및 IOC 위원들이 참관 및 시상했다.
- ▲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김운용 전 IOC 수석부위원장이 키신저 미 국무장관, 사마란치 IOC 위원장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
태권도는 무에서 유로 발전해 왔다. 태권도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을 위해 맨주먹으로 그리고 ‘안 되면 되게 하라.’는 의지 하나로 밀어 붙였던 것 같다. 나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빨리 역사를 찾고 만들고, 세계에 태권도를 내놓아야했다.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졌다. 1980년 IOC가 WTF를 국제경기단체로 승인한 지 20년 만의 일이다. 태권도가 골프, 럭비, 야구 등의 기라성 같은 종목은 물론 가라테, 우슈 등의 경쟁 유사종목을 제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지금처럼 대한민국의 국력이 세지도 않았던 시절에 말이다. 필자는 IOC 수석부위원장, IOC TV위원장, GAISF 회장, 대한체육회 회장, KOC 위원장 등의 직책을 가지고 태권도의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을 위해 국제적으로 전방위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사실 당시 태권도는 조직과 규모 면에서 올림픽 정식종목이 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가라테나 우슈가 정식종목으로 채택이 되면 ‘유사종목은 올림픽 정식종목이 될 수 없다’는 IOC 규정으로 인해 태권도의 올림픽 종목채택은 영원히 불가능해지기에 총력을 기울여 서두른 것이다. 우선 가라테나 ITF보다 먼저 올림픽부터 들어갈 수 있을 때 들어가고, WTF의 내부정비는 차차 해나갈 생각이었다. 물론 그후 확실하게 WTF의 내실을 다지기도 전에 참여정부에 의해 영어의 몸이 됐지만 말이다. 참고로 2005년 유엔인권위원회 보고(United Nation's Human Rights Features-Genera 11-17 April 2005)는 필자에 대해 ‘정치적 권력에 의한 희생양’이 되어 물러났다고 적시했다.
태권도의 날은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날이다. 우리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낸 열정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태권도가 올림픽에 들어가서 표창 받은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태권도의 위상은 세계정상급으로 올라갔고 3만 명의 태권도 사범이 세계 곳곳에서 국위선양을 하고, WTF는 IOC에서 1000만 달러, 각국협회는 각국 NOC에서 재정지원을, 올림픽 메달리스트는 연금도 받게 됐다. 또 대학에도 태권도학과가 생겨났다. 우리는 온 힘을 모아 태권도를 무도정신과 전통을 유지하면서 무도스포츠 그리고 올림픽 스포츠로서 계속 발전시켜야 한다. 그만큼 태권도 종주국의 책임은 중차대하다.
그런데 지금 태권도 위기론이 심심치 않게 들린다. 베이징올림픽에서 코트에서의 심판 구타사건,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의 판정 문제로 일어난 파동, 인드라파나(Indrapana) IOC위원에 연관된 WTF 돈봉투 사건에 대한 IOC 윤리위원회 조사 등 IOC 내에서의 평판도 좋지 않다고 한다. 최근에는 '라저스트'사와의 전자호구 계약관계로 법원이 WTF의 금융재산을 가압류하는 일이 일어났다. 얼마 전에는 한국어를 보조언어로 격하시키고 영어를 주언어로 지정하는 즉, 태권도의 뿌리를 흔드는 일도 일어났다. 무도는 뿌리와 정신이 제일 중요한데 말이다.
이 모든 것이 상식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들이다. 태권도의 경쟁자들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며 엄청난 연구개발과 로비를 하고 있다. 필자가 파리(Paris) IOC총회에서 올림픽에 채택시킬 때처럼 쉽게 생각하고 '설마 태권도가…'라는 안이한 생각은 버려야한다. 재도권에 있는 사람들의 분발이 필요해 보인다. 태권도는 우리나라에서 드물게 자력으로 성장한 우리문화다. 너무 쉽게 큰일을 이루어 놓아서 알아주지 않는 것일까?
최근에 문화관광부가 개인이 건립하고 설립한 재단법인 국기원을 특정법인화고 임원을 임면하는 것은 과연 민주주의 국가에서 옳은 일인지 의문이 간다. 창설자에게 상의 한 번 없이 말이다. 그전처럼 정부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길을 열어주고 실질적인 지원을 하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낫지 않을까 생각하게 한다. 그것이 국제적인 룰과 관행이다.
2013년 IOC총회에서는 26개 종목에서 투표에 의해 한 종목을 빼고 후보종목들 야구, 소프트볼, 가라테, 우슈 등에서 하나를 넣는다. TV 시청률도 고려한다. 지금 태권도는 TV시청률에서 너무 취약하다. ITF와 관련해 1개 스포츠 2개 국제연맹 문제도 해결할 과제다. 쉽게 내뱉는 말같이 꼭 살아남기를 모두들 바라고 있다.
태권도의 날을 맞이하여 태권도의 기적과도 같은 발전의 초석이 된 자랑스러운 국내외 태권도 사범들의 노고를 진심으로 치하한다. 또 고 사마란치 IOC 위원장의 공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사마란치 위원장이 아니었다면 태권도는 아직도 올림픽에 들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끝으로 태권도를 아끼고 후원해준 정부와 국민에게 진심으로 고개 숙이는 바다.
<출처=김운용닷컴(www.kimunyo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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