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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흥택의 ‘I LOVE TAEKWONDO’

천하한량 2011. 9. 9. 01:24

허흥택의 ‘I LOVE TAEKWONDO’
<무카스 = 미국 뉴욕 / 정대길 기자> (2010-08-02 오후 4:00) ㅣ 추천수:34 ㅣ 인쇄수:17

04시 30분. 그의 하루가 시작됐다. 90여 분의 개인 운동을 마치고, 아침 7시가 되면 어김없이 그는 도복을 입는다. 오전 개인지도가 끝이 나고, 저녁 7시에 마지막 수업은 시작됐다. 20여 명의 성인 수련생 앞에서 “Look at the eyes. Fast do it. Not slow. Focus!”를 연신 외쳐대며 굵은 땀방울을 쏟아낸다. “사범이란 모름지기 도장에서 직접 가르쳐야한다”는 소신의 그가 현 대뉴욕지구태권도협회의 허흥택(65) 회장이다. 동안인지라 실제 나이를 재차 물었을 정도로 그의 이미지는 젊고 하얗다. 하지만 아니다 싶으면 결코 인연의 끈을 엮지 않는 다는 그는 ‘면도칼’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뉴욕 리틀넥의 벤허 태권도장에서 만난 허 회장의 52년 태권도 인생의 비스토리를 엮어봤다.


허흥택 회장이 시연을 하고 있다
- 태권도인 허흥택으로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은?

“1958년 청도관에서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1961년 창무관으로 옮겨 수련을 했죠. 조금 특이할 수도 있는데요. 제가 한의학에도 관심이 많아서 한의대학교(미국의 매를랜드한의대학교)를 졸업했답니다. 물론 어려서부터 꿈이라고 누가 물으면 해외태권도 사범이라고 답했죠. 한국 보다 크고 넓은 땅을 밟고 싶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지도 경력이 필요했죠. 마장동의 한 태권도장에서 사범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허흥택 회장은 베트남 참전용사이다. 군대생활 36개월 중 거의 절반을 전쟁터에서 보냈다고 한다. 종전 이후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본격적으로 해외 사범의 꿈을 이루기 위해 준비했다. 사범생활 당시 가르쳤던 네델란드 출신의 한 수련생과의 만남은 그의 꿈을 가능케 한 징검다리가 되주었다. 그 후원자는 한국으로 직접 편지를 보내 다른 사범은 안되고 '반드시 허흥택'을 초청하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당시 맺은 그와의 인연으로 허 회장은 1973년에 네델란드행 비행기에 올랐다.

- 당신을 네델란드 태권도 역사의 산증인이라고 하는데

“먼저 네델란드 하니까, 고생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처음 6개월 동안은 빵만 먹어야했습니다. 고추장과 김치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잘 먹어야 햄버거와 치즈 정도였으니까요. 저의 활동 무대는 네델란드 암스테르담이었죠. 체격이 건장했던 현지 네델란드인들은 종주국에서 온 동양인 사범에게서 태권도를 배우고 싶어 했습니다. 주말이면 300여명이 모이는 곳에서 운동을 가르쳤습니다. 1975년 부터는 유럽 전역의 사범을 모아 네델란드에서 전국 대회를 개최하기도 했죠. 현지에서 굳이 한국문화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제가 네델란드에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던 이유가 그 나라의 문화를 존중하면서, 어울려 사는 자세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네델란드는 가라테의 세력이 엄청났습니다. 하지만 점차 현지인들이 태권도의 다양한 발차기를 접하면서 가라테보다 낫다는 평가를 하기 시작했죠. 태권도인의 예의바름 역시 긍정적 요인이었죠. 정착 초기에는 ITF 태권도장도 많았는데요, 제가 네델란드를 떠나올 때 즈음에 ITF는 거의 와해상태였습니다. 많은 ITF사범들과 수련생들의 WTF로의 이적에 엄청난 노력을 했습니다. 아, WTF에서 알면 저한테 상줘야 할겁니다(웃음)”

현지 네델란드 제자들 수만 해도 약 10,000여명. 1983년 84년, 85년에는 유럽 태권도 회장단을 이끌고 한국을 방문하기도 한 그는 네델란드 태권도 역사의 중심에 있는 ‘한국인 태권도 사범’이다. 프랑스의 이관용 사범과, 스페인의 이원일, 덴마크 최경환 사범. 노르웨이의 조원섭 사범 등과의 교류도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수련생의 동작을 잡아주고 있는 허흥택 회장
- 허흥택의 미국 입성기를 듣고 싶습니다.

“1987년, 미국에 도착했습니다. 저의 꿈과 자녀들의 장래를 위해서 미국에 가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죠. 유럽은 보수주의가 상당했습니다. 이방인이 와서 상위층에 낄 수 없는 사회적 구조였죠. 유럽은 오후 6시만 되면 거의 죽은 도시였습니다. 일요일에는 동네의 마켓도 문을 닫는 곳이었죠. 생활의 불편함이 많았습니다. 많은 것을 고려한 미국행이었습니다. 미국에 와보니 독립단체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제 성격이 아니다 싶은 것을 보면 꼭 말해야하는 성격이거든요. 오자마자 했던 일이 개인이 가지고 있는 단체장들을 만나 하나로 뭉치자는 설득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번번이 많은 이들로부터 ‘당신이 해줄 것은 무엇이냐’는 답을 들어야만했죠. 힘들었습니다.”

1978년, 뉴욕, 뉴저지, 코네티컷주를 아우르는 대뉴욕지구태권도협회가 창립됐다. 4대 회장 이문성 회장, 이후 박연환 회장 등의 순으로 뉴욕협회의 수장은 바뀌었다. 하지만 협회가 활성화 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2008년 2월 25일 ‘허흥택호’가 출범했다. 이어 2012년까지 허 회장은 재임에 성공했다. 이 과정 중에 허 회장은 뉴욕의 재력가 30명을 협회의 이사로 영입했다. 계파간의 갈등을 없애기 위한 전미태권도선수권대회도 부활시켰다.

- 어떤 대뉴욕지구태권도협회를 꿈꾸나?

“활성화된 협회입니다. 선후배간에 욕심을 버리고 물러서는 마음을 가진, 화합의 단체가 되었으면 합니다. 단체의 규모가 커지면 그만큼 태권도인들이 할 수 있는 일도 넓어집니다. 좀 구체적으로 해보고 싶은 것이 하나 있는데요, 태권도인의 밤을 개최하고 싶습니다. 또 협회의 웹사이트도 만들어 사범과 태권도인들간의 커뮤니티의 장을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 허흥택이 말하는 뉴욕 태권도의 현주소는?

“1961년에 조시학 사범이 맨하튼에 처음으로 도장을 개설했습니다. 1963년에는 손덕성 관장이 1965년에는 신현옥 관장이 도장을 개관했죠. 동부 지역에는 현재 5개 주에서 한국 사범들만 약 300명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태권도인으로는 35만명 내지 40만명 정도의 분포를 보입니다. 그런데 최근 뉴욕 지역의 태권도장들이 많은 타격을 입었습니다. 월스트리트 등지에서 금융업 등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은 것이죠. 그들은 물가가 비싼 뉴욕을 떠나 타 주로 이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경제 악화로 거주민들이 가장 먼저 하는 것이 태권도장부터 끊는 현상도 한몫했죠. 여기에 미국 내 많은 성인 수련생들이 태권도 이외의 무술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중에는 합기도를 알려달라고 직접 말을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발기술 위주였던 태권도는 이제 손기술에 신경써야하는 상황에 봉착했다고 봐도 무리없습니다. 지금 모습의 태권도로는 다소 부족합니다.”



호신술 시연 중인 허흥택 회장(아래는 허인욱 위원)
- 많은 이들이 당신을 두고 강성(强性)이라고 한다.

“한 번 아니면 죽을때까지 ‘노(NO)’를 외치는 성격 탓인지 제자들이 붙여준 별명입니다. 한 예로 전 김운용 세계태권도연맹 총재에게 아주 심하게 항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국기원 심사 때문이었죠. 기억을 거슬러 올라 1998년, 9단 승단 심사를 보는 날이었습니다. 3천불 정도의 비용이 들었죠. 그런데 심사 전날 어떤 지인이 저에게 심사를 보지 말라더군요. 고단자 심사를 보는 모 관장이 사전에 자신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며 저를 떨어뜨리라고 했다고 하더군요. 시험에 앞서 100% 합격이라는 다수 원로분들의 평가가 있었기에 저는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게 무서워서 못 보면 안된다는 생각에 평소 실력대로 심사를 끝냈습니다. 미국에 돌아온지 2개월이 지나, 불합격 통보를 받았습니다. 바로 이튿날 한국행 비행기를 탔죠. 그리고 당시 김운용 국기원장을 찾아갔습니다. 불합리한 심사였다, 어떻게 미국에서 온 나에게 이런 편파적인 심사를 진보게하느냐며 항의했습니다. 법적으로 진상을 밝히겠다는 진정까지 했습니다. 물론 결과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할 말은 꼭 해야 했습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9단 승단을 위해 사용된 돈만 당시 900여만 원 정도나 되더라구요. 아마 허흥택이라는 사람은 태권도인 중에 가장 비싼 9단 심사비용을 지불했을 것입니다(웃음)”

허 회장의 비스토리 하나 더. 1983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세계태권도선수대회에서 벌어진 일이다. 당시 허 회장은 태권도의 삼권 분립을 세계각국의 태권도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강하게 주창했다고 한다. 국기원, 대한태권도협회, 세계태권도연맹을 나누자는 제안을 했던 것이다. 당시 무소불위의 김운용 총재를 향한 일종의 반기였다고 한다.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이는 나중에 엄운규 전 국기원장이 대태협 총회에서 허 회장을 제명 처분 하는 결과를 낳게 했다. 이 사실은 세계연맹을 통해 네델란드 올림픽위원회로까지 통보됐다고 한다. 당시의 기억을 허 회장은 평생 가슴에서 지울 수 없는 억울함이라고 말한다.

- 태권도 사범 허흥택이 강조하는 지도철학은 무엇인가

“몇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성실해야합니다. 부지런해야합니다. 또 책임을 져야합니다. 무도의 선후배 관계 역시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앞으로 태권도장을 운영하려면 무도 태권도를 해야 합니다. 스포츠는 한계가 있습니다. 한국에 성인 수련층이 없는 것은 스포츠 태권도의 폐해가 단적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주먹과 손을 사용할 줄 아는 태권도가 되어야합니다.”

미국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할 때 즈음 한 가지 해보고 싶은 것이 있다는 허 회장. 종주국 태권도의 발전을 위해 어떤 형태로든 봉사를 하고 싶다는 그다. 이중 ‘무료 태권도장’을 개관하겠다는 그는 소외받은 노인들과 아이들을 위해 조국에서 당신이 직접 가르치고 싶다는 작은 꿈을 전했다. “내가 받은 모든 혜택을 다시 돌려줘야하지 않겠습니까?”라던 그는 무카스 원정대의 5일간의 뉴욕 취재가 진행되는 내내 이 말을 수차례 강조했다. “내 삶이 끝나는 그날까지 태권도를 떠나서 살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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