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페인자료 ▒

안토니 가우디 Antonio Gaudi y Cornet

천하한량 2011. 7. 4. 19:44

안토니 가우디 Antonio Gaudi y Cornet
1852-1926
Espana




























1852년 에스파냐(Espana) 남부 카탈루냐(Catalunya)에서 출생.
1863년 레우스 중등학교 입학.
1867년 어린이 잡지 El Arteguia 디자인.
1869년 바르셀로나 대학의 건축학과 예비과정 입학.
1871년 바르셀로나 건축학교 입학.
1872년 물탱크와 공동묘지 정문에 관한 학생프로젝트 참여.
1876년 시청사 직원과 레알 부두 건축 참가. 바르셀로나 종합병원, 대학강당 건축에 학부시절 마지막으로 참여. 건축사로 첫발을 내디딤. 모친사망.
1878년 건축사 자격 취득.
1879년 시인 비센떼 가르시아(Vicente garcia)에 기마대 디자인을 바침. 누이 사망. 조카 로시따 에헤야 입양.
1800년 호셉 세라 말레라 알레나와 함께 바르셀로나 해안도로 가로등 합작 프로젝트 추진.
1881년 그의 유일한 기고문을 La Renaixensa에 기고.
1882년 공업기술자인 Juan Martorell Montellas와 공동작업.
1883년 성가족 성당의 작품 방향 설정. 후안 마누엘 비센스 문따네르 저택 건설(1883-1888). 산딴데스 까미야스의 엘 카프리쵸 저택 건립.
1885년 성가족 성당 첫 프로젝트.
1886년 구엘 궁전, 북 람블라스 거리(1886-1888).
1887년 칼벳 저택(1898-1899).
1899년 베예스구아드트 탑 건립. 구엘공원 건설(1900-1914).
1904년 그라네르 살라 메르세 저택. 호세 바뜨요 저택(1904-1906).
1905년 아르띠가스 정원.
1906년 밀라 저택(1906-1911). 구엘공원 내의 저택 입주.
1907년 Jaime L. 하이메 기념비.
1910년 파리의 Grand paris에서 전시회 개최.
1911년 열병을 앓음.
1925년 성가족 성당 종각 완성.
1926년 6월 7일 Sagrada Familia 성당 앞에서 전차 사고. 6월 10일 산따 쿠르즈(Santa Cruzu) 병원에서 사망.
비센스 저택, 바르셀로나, (Casa Vicens), 1883-1888
사그라다 파밀리아, 바르셀로나, (Temple Expiatori de la Sagrada Familia), 1882-ongoing
구엘궁전, 바르셀로나, (Palau Guell, Guell Palace), 1886-1889
구엘성지, 성당/납골당, 바르셀로나, (Cripta de la Colonia Guell), 1898-1916
깔벳 저택, 바르셀로나, (Casa Calvet), 1899-1900
구엘공원, 바르셀로나, (Park Guell), 1900-1914
까사 바뜨요, 바르셀로나, (Casa Batllo), 1906-1908
카사 밀라, 바르셀로나, (Casa Mila "La Pedrera"), 1906-1910
- 20세기 최고의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 -
본명이 안토니 가우디 이 코르네트(Antoni Gaud i Cornet)인 그는 정열의 나라 스페인이 낳은 20세기 최고의 건축가이다.
가우디는 1852년 6월 25일 에스파냐(Espana) 남부 카탈루냐(Catalunya)의 레우스(Reus)에서 구리세공업을 하는 부친 프란시스코 가우디 세라(Francisco Gaudi Serra)와 안또니아 꼬르넷 베르뜨란(Antonia Cornet Bertran) 밑에서 태어났다.
그는 가난한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 가깝게 놀이하며 지낼만한 친구도 없었으며, 마땅한 놀이기구도 없었다. 따라서 그에게는 자연스럽게 모든 자연이 친구이자 놀이기구가 되었다. 가우디의 생가는 도시에서 좀 떨어진 시골이었다. 그곳은 지중해 연안으로 자연환경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우며 경이롭기까지 한 곳이다. 그는 이곳에서 자연과 벗이 되었으며 자연을 관찰할 기회가 많았다.
그가 자연에 대해 놀라우리만큼 뛰어난 관찰력을 갖게 된 것은 이때 형성된 것이다. 그는 자연의 모든 것을 존중하며 이해했다. 하늘과 구름, 물과 바람, 나무와 식물, 동물과 곤충, 산과 바위 등 여러 가지를 보며 이를 통해서 건축언어에 접목해 갔다. 특히 가우디는 몬세랏(Montserrat)산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으며 그 산을 매우 좋아했다.
또한 가우디는 레우스 지방에서 대장간을 운영하는 삼촌에게로 가서 대장간 일을 어린시절에 배웠다. 여기서 가우디는 철을 불에 넣고 꺼내 망치로 두들겨서 철을 단련시키는 단철과정은 물론이거니와 주조술과 석고로 본을 뜨는 방법까지 배우게 된다. 그리고 바르셀로나에 있는 에우달도 푼트(Eudaldo Punt)에서 건축설계와 시공에 관한 실무적인 일들을 수확한다. 그는 이곳에서 건축자재의 특성들도 함께 배웠으며 이것이 후에 가우디가 맡은 일들을 수행하는데 있어 필요한 목수, 주철공 등 건축 관련 인부들과의 관계설정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가우디는 한번 인연을 맺은 기술자들과는 끝까지 함께 일을 했으며, 그들이 나이가 들어 일을 못할 시에는 그 자제(도제제도에 의한 전수자)들과 일을 함께 했다. 따라서 모든 작업을 하는데 그들도 가우디의 감각과 뜻을 이해했고, 가우디는 작업을 수월하게 진행할 수가 있었다. 지금으로 보면 거래선을 한번도 바꾼 적이 없었던 것이다.
가우디는 17세 때부터 건축을 공부하기 시작하여 바르셀로나의 건축학교를 졸업하였으며, 학창시절에 비라르와 폰트스레 등의 조수로서 설계활동에 종사하였다.
1878년 학교 졸업 후부터는 독자적으로 일을 시작,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많은 독창적인 건축을 남겼다. 밀가루 반죽으로 빚어 놓은 듯 구불구불한 6층 아파트 '카사 밀라', 기묘하고 아름다운 창문장식이 보는 이를 매혹시키는 '카사 바트요', 환상적인 돌조각과 타일장식이 공원 전체를 구불구불 덮고 있는 '구엘 공원' 등의 걸작을 남겼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가 남긴 대표작 중의 대표작은 신이 머물 지상의 유일한 공간이라 말하는 '사그라다 파밀리아(성聖가족) 교회'이다. 하늘을 향해 치솟은 네 개의 탑과 생동감 넘치는 우아한 조각으로 장식된 이 교회는 착공한 지 115년이 지났고 완성되려면 앞으로도 200년이 더 걸린다고 한다.
세상이 가우디를 처음 주목하게 된 것은 1878년 파리 만국박람회 때, 가우디가 출품한 독특한 디자인의 진열장이 사람들 눈을 사로잡으면서 부터였다. 그의 천재성을 일찌감치 발견한 에우세비 구엘은 최대의 스폰서가 된다.
가우디는 바르셀로나 시민들이 피카소보다 더 영웅으로 추앙하는 인물이지만, 생전의 그는 국가에 헌신적인 타입의 사람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만들고 싶은 작품을 만들어 도시에 구현한 건축가이고 예술가였다. 평생 결혼도 하지 않았다.
1883년 31살 때 그 유명한 성가족(Sagrada Familia) 성당 공사의 총감독에 취임하게 된다. 이후, 생의 만년에 기독교도로 살면서 성당에서 먹고 자며 일에 빠져 살았다. 가끔 시내로 나갈 때면 그의 부랑자 같은 행색 때문에 행인들이 푼돈을 적선해 줬다는 일화도 있다.
그는 죽음도 비범했다. 1926년 6월 10일 그의 일터인 성가족 성당 바로 앞길에서 전차에 받혀 생을 마감했다. 느리디 느린 전차에 받힌 그의 마지막 순간은 뭔가 골똘히 생각을 하며 길을 걷는 노대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사고 현장엔 <가우디 등>이 지금도 불을 밝히고 있다. 죽은 뒤 가우디를 다룬 스페인 영화가 6편 나왔으며, 그를 다룬 언론보도가 3,000여 회가 넘는다.
- 자연을 사랑한 건축가 ‘가우디’ -
가우디를 이해하려면 건축분야에만 국한하여 평가해서는 안된다. 즉, 건축사가들은 건축사에 입각하여 다른 건축물과 그의 건축물을 동시대적 관점에서 일직선상으로 동일시하며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어느 스승에게 사사 받은 일도 없고, 특정집단에서 일을 한 적도 없으며, 가족 중에 누구도 건축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작품은 어느 시대의 건축양식 및 특정분야로 분류하는 데는 난해한 부분이 많다. 그의 작품은 그 시대의 양식과 형식을 초월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아무런 편견 없이 사물을 관찰하고 이를 작품화하는 능력을 그가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매우 소박했다. 그러나 대단히 명석했다. 가우디와 수년간 작업을 함께한 화가 후안 무네(Juan Munn)의 말에 의하면 "가우디는 확고하고 명석한 생각의 소유자"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가우디의 작품을 살펴보면 선은 곧은 것이 없으며, 입면은 들쑥날쑥 하고, 바로크양식으로 보이는 외관은 그렇게 보일 수도 있으나 불합리한 점이 더 많다. 이로 인해 그의 정신상태가 좀 괴팍한 면과 마음이 뒤틀려 있지 않았나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는 거리가 있는 판단이다. 이 시대의 건축가는 논리성을 갖는 미학과 추상화적인 과정을 거쳐 설계를 하며, 보조적인 수단으로 자와 콤파스를 사용했다. 건축자재를 자르거나 형태를 만들 때에도 이를 활용하여 2차원의 평면과 직선, 원과 다면체에서 5각형의 12면체인 3차원으로 바뀌어 갔다.
그러나 가우디의 작품은 기하학적인 형태에 얽매이기 보다는 자연적이며, 변형이 많고, 쉽게 인지되지 않는 곡선을 많이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플라톤이 주장하고 이론화 한 제5의 원과 같은 형태로 바뀌는 것이다. 따라서 가우디의 작품은 이론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형태이다. 이는 처음부터 기하학을 사용했다면 아주 단순한 기하학을 사용한 것에 불과하다. 그는 통제기하학(regulated geometry)을 응용하여 많은 부분 사용하였다. 가우디의 작품을 여러 건축가가 응용하여 모방하려고 했으나, 가우디의 작품과 같은 건축물이 완공된 것이 지금까지 없는 것으로 보아, 그가 설계한 건축물들은 가우디의 상상력이 어떠했는지를 잘 말해준다.
가우디는 말한다. "건축가는 균형에 대한 타고 난 감각이 있어야 한다. 건축가는 건물의 형태를 디자인하고, 그것을 구조전문가(구조기술사)에게 구조에 대한 수학적 안전성을 검토 받는다. 그 후 구조전문가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한다면 건축가로서의 자질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구조전문가가 이상이 있다고 한다면 건축에서 손을 떼는 것이 현명하다."
이러한 면에서 그는 자신에 대하여 엄격한 면이 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illa, 성가족 성당)의 종루는 포물선이면서 젖은 모래를 떨어뜨릴 때 나타나는 형태이다. 이를 시행할 때 가우디는 '중력의 법칙'을 엄격히 따랐다. 가우디는 설계도보다는 모형을 중요시 했다. 그 모형을 만들기 전 그는 실을 천장에 매달고 탑부분과 전체적인 모습을 모래 주머니 혹은 납을 중간 중간에 매달아 그 휨의 강도를 측정해 나갔다. 그리고 최상의 곡선과 아름다움이 나오면 이를 스케치했다. 여러 번에 걸친 반복 스케치와 모형작업을 했다. 그런 다음 건물의 형태와 구조를 결정하였다. 이렇게 한 건축구조형태에 대해 가우디는 자기 자신 스스로가 구조 계산을 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러나 현대의 첨단 장비를 동원한 구조계산에서도 오류가 발견된 것은 없다. 그가 말하는 것은 완벽한 균형감각이다. 가우디의 건축형태는 그 누구도 상상도 못할 상황에서 만들어 졌으며, 가히 독창적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그가 말했듯이 "자연에서 태어나고 자연이 베풀어 주는 매우 균형적인 자연적 구조"인 것이다.
가우디는 자연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으나 큰 동물에서는 얻은 것은 별로 없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용의 형상이 있으나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상상에서 나왔다. 그는 아주 조그마한 곤충(파리, 모기, 들벌레 따위)과 들에 많이 나는 잡초와 나무, 잎 등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또한 동양의 미에서도 많은 영감을 받았다. 그리고 심성에서 우러나오는 형태를 표현해 나갔다. 가우디의 건물구성을 보면 동물의 뼈, 야자수, 곤충, 사람의 해골 등의 모습이 자주 사용됐다. 그는 나무의 줄기와 해골만큼 아름답고 완벽한 구조는 없다고 할 정도였다. 아무리 아름다운 돔이라고 할지라도 해골의 내부에 비할 수 없으며, 산이 가지고 있는 완벽한 안정성에 어떠한 건물도 따라 갈 수 없다고 가우디는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건축가가 자신의 작품에서 가능성을 추구한다면 미를 잃게 될 것이다. 또한 아름다움만을 추구한다면 미학, 예술 이론 또는 철학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렇게 추상적인 이론들은 나에게는 사치이며 관심도 없는 분야이다."
가우디는 일찍이 바그너가 주창했던 종합예술론과 '자연에는 직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괴테의 자연론에 영향을 받아, 스페인 고유의 고딕 양식과 이슬람 양식(무데하르 Mudejar) 양식을 재창조하여 대담하고 환상적인 건축양식을 완성했다. 피카소, 미로, 카잘스 등 동시대의 위대한 예술가들도 바르셀로나 곳곳에 있는 가우디의 건축물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예술적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가우디는 건축을 자연의 여러 가지 형상을 기초로 하여 구조·형태·기능·상징의 종합으로서 제시한 위대한 건축가였다. 전형적인 그의 건축은 모든 면에서 곡선이 지배적이며, 벽과 천장이 굴곡을 이루고 섬세한 장식과 색채가 넘쳐 야릇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따라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엽에 걸쳐 유럽을 풍미하였던 아르누보(art nouveau)의 에스파냐판(版)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다.
그의 작품은 대체로 1890년대를 경계로 하여 2기로 나눌 수가 있다.
전반기의 작품은 건축 그 자체의 몸체는 비교적 중후하며 극단적인 변형은 보이지 않으나 세부의 장식에는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특히 철을 사용한 곡선적인 장식은 피레네 북쪽의 아르누보의 장식과 대응관계에 있다.
그러나 가우디의 진가는 어디까지나 후반기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이전의 그의 건축장식에서 보였던 미로(迷路)와 같은 구불구불한 공간(空間)의 이미지가 전체의 건축디자인으로 확장되어, 계획부터 구조의 형태 및 세부에 이르기까지 모든 디자인을 지배하고 있다.
이 시기의 대표작에는 코로니아 구엘교회의 제실(祭室:1898∼1914), 구엘공원(1900∼1914) 등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그의 중요한 후원자였던 구엘백작을 위한 것이었다.
주택건축으로 독특한 형태와 내부공간을 지닌 카사 바트요(1907년 완성)와 카사 밀라(1907년 완성), 1884년에 착수하여 결국 필생의 대작이 된 사그라다 파밀리아교회의 익랑(翼廊)의 정면(正面, 1908년 완성) 및 탑·조각(1903∼1926) 등은 가우디 건축의 가장 극적인 부분을 형성하고 있다.
그의 건축은 아르누보의 유행을 초월하여 근대에 살았던 인간의 근원적인 불안을 건축으로 표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센스 저택, 바르셀로나, (Casa Vicens), 1883-1888
가우디의 초창기 작품인 비센스 저택은 엘 카프리쵸 데 꼬미야스(El Capricho de Comillas)와 구엘 별장과 더불어 아시아풍으로 된 중요한 작품이다.
비센스 저택은 일반 가정집이며 지하층, 반지하층, 4층의 규모로 되어 있다.
분수대가 있는 정원과 함께 산 헤르바시오(San Gervasio) 거리와 면한 벽에는 폭포를 만들었다. 이 폭포는 돔 형태를 띤 아치로 되어 있는데 가우디의 독특한 신기하학적 공법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현재는 분수대와 폭포는 거의 없어졌다.
이 저택의 주인인 마누엘 비센스 이몬타네르는 그 당시 타일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때문에 이 저택에는 타일이 많이 사용되었다. 문양은 꽃문양이 많았으며, 동양풍으로 제작 되어진 것들이다.
짙은 황토색이 나는 돌과 타일, 그리고 붉은 벽돌을 조화롭게 꾸며 장식적 효과를 극대화하였다.
벽은 폐쇄적이며, 도리는 작은 나무로 되어 있고 천정의 도리는 곡선이 있는 바르셀로나의 전통 건축양식을 따르고 있다.
전체적으로는 이슬람풍으로 되어 있으나 기와는 아랍풍으로 되어있다.
외관부분인 창문은 나무로 만든 격자형 그물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가느다란 것으로 보아 동양의 창살모양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돌담은 깬 도자기 조각이 박혀 있으며, 그 모양은 그 지역에서 자연스럽게 볼 수 있는 카네이션 모양이다.
정원 앞의 담장은 철을 대장간에서 두들겨 만들었다. 대문은 종려나무 잎모양과 야자수 잎모양을 형상화하여 철로 만들어져 있으며, 매우 정교하게 제작되었다. 정원에 심어진 정원수와 매우 조화롭게 어울린다.
건물내부는 긴 복도가 있으며, 동양적으로 장식된 조그만 방이 있다. 회랑은 영국학파의 하나인 예술과 도예에서 볼 수 있는 세밀함이 배어 있다.
이 저택은 전통주의가 물씬 나는 가우디의 청년기 작품으로, 식당의 가구 같은 부문은 매우 정교하며 또레스카사나(J.Torrescasana)의 그림으로 구성하였다.
저택의 외부에는 건축이 가족적이라는 의미의 뜻으로 '따뜻한 가정에 사랑이 있다'('De la llar lo foc, visca el foc de i'a mor')라고 까딸루냐어로 새겨져있다.
이 저택은 바르셀로나 시에서 수여하는 건축상을 받았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바르셀로나, (Temple Expiatori de la Sagrada Familia), 1882-ongoing
바르셀로나 마요르까가 402번지에 신고딕 양식으로 세워지고 있는 이 성당은 1866년에 처음 계획되었다. 1875년 가우디는 이탈리아 로레토대성당에 있는 성 요셉의 '숭고한 마음의 전파자'라는 구절을 생각하며 디자인했다. 그러나 1877년 무료로 설계를 자원하겠다고 건축가 빌랴르가 나타나 그의 설계도에 의해 초석이 세워진다.
가우디가 본격적으로 이 성당에 참여한 것은 1883년 지하의 납골당 기둥이 반정도 건립될 무렵이었다. 가우디로 교체된 뒤 빌랴르가 디자인한 초기의 디자인이 가우디가 디자인 한 것으로 교체되었다. 그러나 디자인이 웅장하고 거대하기도 했지만 교구의 만성적인 적자로 인하여 공사가 중단되는 경우가 많았다. 공사의 느린 진행은 오히려 가우디에게 종교적 상징에 대해 완벽한 설계와 충분한 검토를 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완벽한 모형도를 제작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성가족 성당의 속죄의 사원은 가우디의 위대한 오페라 극장이다. 가우디는 1883년 말 이후부터 그의 죽음을 부른 사고를 당하기 전까지인 1926년 6월 7일까지 그는 이 건축물을 완성하기 위해 작업을 했다. 그는 이 건축물의 완성된 설계도를 남겨 두었고, 성당의 다른 부분의 상징을 분명하게 설명해 두었다. 그래서 이 건축은 가우디에 의한 디자인을 기본으로 계속 진행되고 있다.
한편, 가우디는 1906년 건물의 계획이 마무리되자 '탄생의 부본'인 정면 건축에 모든 것을 바쳤다. 이 때 비로소 정면도 도면이 공개되었다. 이 탄생의 부분은 포물선 형태의 측면에 4개의 첨탑이 있으며, 매우 역동적이면서 안정적이다.
또한 장식에 해당되는 3개의 문 '믿음의 문', '희망의 문'. '사랑의 문'은 복잡하면서도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다. 이 문들은 십자가로 된 입구를 비롯하여 예수의 일생(14처와 목주기도 로사리오의 신비에 관한 내용)이 둥그런 소상이나 부조로 표현되었다.
가우디는 이 성당을 다양한 디자인과 조각들, 적절한 조명과 뛰어난 음향조건으로 지으려 했다. 인공적인 조명, 창문의 상징성, 종각, 각종 문, 성기실聖器室, 수도원 안마당의 회랑, 기둥사이를 둥근 천정으로 배열하여 음향을 생각한 점 등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성당은 가우디가 살아서 완성지으려 한 건축물은 아니다. 다른 건축물은 가우디 자신이 설계하고 공사를 했지만 이성당은 자신도 알지 못할 먼 훗날을 기약하며 설계와 시공을 했다.
또한 1926년부터 지금까지 가우디의 작업을 계승하는 건축가들의 기술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25년 후 이 성당의 완성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구엘궁전, 바르셀로나, (Palau Guell, Guell Palace), 1886-1889
이 궁전은 지하에 마구간이 자리 잡고, 1층에는 마구간으로 향하는 현관과 사람이 통행할 수 있는 현관이 나란히 있으며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마구간은 벽돌로 쌓은 많은 기둥들로 이루어져 있고, 기둥 상부는 마치 버섯 모양을 하고 있으며, 천정은 비잔틴 양식의 매우 평범한 둥근모양의 연속이다.
2층에는 거실과 응접실이 있으며, 가족과 하인이 함께 미사를 드릴 수 있는 제대가 마련되어 있다. 이 제대는 미사 때만 개방할 수 있도록 2개의 큰 문을 달았다.
3층에는 조그마한 사무용방과 사과나무로 된 빠티오 테라스(terraza del patio) 위에 넓은 식당이 배치되어 있다.
이 궁전의 공간 구성은 매우 자유스러우면서도 기능적이고, 실내 인테리어는 궁전과 같다. 따라서 이 저택을 '구엘궁전'(Palau Guell)이라고 부른다.
이 궁전의 정면은 가라프산돌로 외부마감을 했다. 외부에서 보이는 것은 소박하고 옆 건물과의 조화도 좋다.
1층 중앙에 2층으로 오르는 긴 계단이 있으며 두 개의 큰 아치의 문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문들은 조각을 해 놓은 것처럼 기하학적인 격자무늬를 한 철재로 되어있다.
2층의 홀은 둥근 천정을 가지고 있다. 이 홀 위에는 환기구와 채광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옥상에 굴뚝모양으로 중앙에 제일 높게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건물의 둥근 천정에 별 모양이 생기며 이곳으로 홀까지 빛이 들어 올 수 있다. 홀은 오르간과 문이 있는 조그만 제대성당에서 미사 때 신부가 전례를 주관하는 곳이 있는 다용도 공간이다. 또한, 이곳은 시민들의 만남의 장소로도 사용되었으며, 음악가들이 작곡한 곡을 연주하는 데뷔 장소이기도 했다. 그리고 여러 귀족들의 사교의 장으로도 활용되었다.
응접실은 홀과 인접해 있으며, 벽으로 분리되어 정면의 복도 테라스를 통하여 출입할 수 있다.
삼나무와 유카리나무로 된 아름다운 격자형 천정이 있고, 여러 가지 장식 효과를 주기 위해 치장한 나선형 모양의 철과 조화를 잘 이룬다. 또한 구조적인 기능을 갖고 있어 위층의 포석을 지탱하고 있다. 그 부분에는 도리(기둥과 기둥 위에 걸쳐 얹는 나무)가 없다. 금속으로 만든 일종의 발코니 형태의 도리가 있을 뿐이다.
구엘 궁전은 건물의 목적이나 기능을 감안할 때, 아마도 바르셀로나에 마지막으로 건설된 특이한 건물에 해당 된다. 문예 부흥기의 팔라찌(Palazzi)의 특징이 그대로 남아 있지만 건물의 방 배치나 여백 공간 등의 활용은 이태리 건물과는 다르다.
알레조 깔페스(Alejo Clapes)가 제작한 그림이나 철 또는 나무로 된 여러 가지 건축 구조물과 가라프산 석재의 여러 색상을 조화롭게 사용한 점 등은 장식적인 측면에서 서로 보완관계를 이루며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궁전은 가우디의 상상력이 너무 지나친 건축 형태의 한 단면을 보여 주고 있으며 또한, 계속적으로 새로운 형태의 구조를 만들어 내는 것에 대한 그의 대단한 만족감이 나타나 있다. 이 궁전은 현재 바르셀로나 시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또한 유네스코(UNESCO)에서 198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구엘성지 성당/납골당, 바르셀로나, (Cripta de la Colonia Guell), 1898-1916
에우세비 구엘(Eusebi Guell)은 1891년 산따 꼴로마 데 세르벨(Santa Coloma de Cervllo)에 있는 깐솔(Cnasol)이라는 농가를 건축하였다. 그 농장에는 성당이 하나 있었는데 이 성당에서 모든 노동자들이 미사를 볼 수 있도록 하였다. 1989년 가우디는 소나무가 울창한 그 지역을 한 눈에 들여다 볼 수 있는 곳에 다시 성당을 세우는 계획의 책임을 맡게 되고 1908년에야 비로소 그 성당의 초석을 놓게 되었다. 하지만 1917년까지 본당 건석을 시작도 하지 않은 채 그 공사는 중지 되었다. 이때에는 납골실만이 완공된 상태였다. 따라서 별칭으로 '구엘성지 납골당'으로도 불리우고 있다.
이 성당은 각기 다른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아치 돔에는 두 개의 현관이 있다. 아치의 바로 뒤에 있는 현관은 소성당으로 통하는 문이고, 또 하나의 문은 성가 연습과 교리문답을 할 수 있는 교육장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성심회(Sagrado Corazon)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다.
소성당 하부 즉, 바닥은 유럽의 어느 성당과 마찬가지로 납골실로 이루어져 있다. 내부의 기둥들은 기울어져 있으며, 천정은 쌍포물선을 이루고 있다. 이는 가우디가 사용하는 통제기하학(regulated geometry)방식으로 되어 있다. 이 성당의 구조는 수학적 사고와는 관련이 없다. 다만 유기체적이고 지질학 형태이다. 자연 속에서 태동되었으며, 자연으로 만들어 진 것이다. 그 자체가 구조이며 수학인 것이다.
소성당에 이르는 계단과 그 밑의 아치들로 되어 있는 기둥군, 변색벽돌로 치장한 볓게 및 바닥 등엔 석회몰탈을 사용하고, 스테인드글라스의 창문과 현지에서 나는 현무암들을 적절히 조합하여 아주 조화롭게 만든 이 성당은 그 재료와 장식적 요소들을 통하여 가우디만이 가지는 인상주의적 특징을 볼 수 있다.
이 구엘성지 성당은 완성된 설계도에 의해 건축된 유일한 건물이다. 구조적인 면에서도 가우디 작품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 받기도 한다.
이 구조도를 작성하는데는 실을 길게 늘려 실의 마디마디에 모래자루를 달아 옆으로 당기어 그 견디는 힘에 의해서 구조계산을 하였고 그 모양을 건물 디자인에 그대로 적용했다.
그 모형을 10,000/1로 축소하여 만들고 그 하중상태를 검토해 나가면서 가장 이상적인 형태를 만들었다. 이는 가우디의 이론, 건물 전체의 균형을 정역학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모래자루의 무게에 의해 생기는 선의 늘어짐에 의해 결정된다. 즉 구조는 그 모형의 실험에서 결정되어지며 이는 기본적인 디자인 프로세스 과정이다. 이 과정들을 사진에 담아 그 형태에 대한 압력, 하중 등을 계산하여 기둥의 위치와 숫자를 정해 나갔다. 그리고 다시 사진을 찍고, 180도로 돌려보는 시험 등으로 그 건물의 완전한 모양을 구성하게 된다.
벽돌로 만들어진 쌍곡선을 이루는 포물선 모양의 현관은 둥근 지붕과 정리된 기형학적인 모습의 벽으로 만들어졌다. 경의로우면서도 순박하며 합리적인 그의 작품은 모든 건축가들에게 찬사를 받고 있다. 그래서 이 건축물은 가우디의 건축사상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 조그마한 성당건축에 14년이나 걸렸다.
이 작품에서 가우디는 인간이 자연에 현명하게 접근하는 방법을 보여 주고 있으며, 평범하면서도 즉흥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디자인함으로써 그가 가장 많이 사용한 통제기학학과의 결합을 통하여 아주 자연스러운 건축물을 만들어 낸다. 또한 이전에 절제된 장식적 요소에서 많이 벗어나 예전과는 다른 디자인 형태를 나타내기도 한다. 이 성당을 통하여 보여준 세밀한 관찰력과 상상력, 뛰어난 창의력은 가우디의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의 산물인 것이다. 그의 건축적 사고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위대한 것이다.
깔벳 저택, 바르셀로나, (Casa Calvet), 1899-1900
이 저택은 지하층과 창고, 각 층에 방이 2개인 4층으로 되어 있다.
지붕은 까딸루냐지방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평평하게 되어 있으며, 전체가 직선으로 나뉘어져 있다. 정면은 몬쥬익(Montjuic)에서 사암을 채석하여 사용하였다.
주변의 건물들과 조화를 잘 이루고 있으며, 튀는 디자인은 아니다. 다만 가우디의 개성을 볼 수 있는 것은 장식품이나 보조물 등에서 나타난다.
정면에 있는 창문틀 위의 장식은 로마 건축물의 장식을 참조하였다. 이는 파레라스(Farreras)에 있는 호수와 따라고나(Tarrgona)의 기념비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서로 맞대고 있는 기둥과 정문의 아치 조작은 그 충만함이 매우 인상적이다. 중앙에는 이니셜과 친절을 상징하는 삼나무가 있다. 발코니 반석은 갈라진 형태이며, 두꺼운 철대(鐵帶) 난간은 나사모양으로 꼬여있다. 조각적인 관점에서 볼 때 1층의 연단과 박공으로 만든 벽의 장식에 가장 많이 신경을 썼다. 연단에는 여러 유형의 버섯조각을 하였는데 이는 가우디가 저택의 주인인 깔벳(Calvet)이 버섯에 대한 취미가 있는 것을 기념하여 그 곳에 놓은 것이다. 정면 윗부분에는 성 베드로(San Pedro Martir)와 성 히네스(San Gines)의 흉상 조각이 있다. 성 베드로는 소유주의 수호성인이고, 성 히네스는 제 2 수호성인이다.
이 저택의 후면은 흰 벽돌과 인공석으로 되어 있다. 이곳에는 여백의 공간이 여러 곳이 있다. 테라스에 놓여 있는 화려한 화분은 인공석으로 제작되어진 것이다. 현관과 계단은 매우 특이하다. 발디딤돌은 푸른 타일로 깔아서 독특하게 보인다. 바로크 풍의 나무의자, 나무와 철 그리고 유리로 된 엘리베이터는 장식이 매우 복잡하게 되어 있어 기존 건물들과는 큰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깔벳 저택은 구조적인 면에서는 매우 간단하다. 그러나 그 건물의 장식이나 가구는 매우 뛰어난 면이 있다. 특히 사무실의 경우 가우디는 아주 조화로운 형태를 만들어 내고 있다. 사무실의 가구는 떡갈나무로 만들어진 매우 특이한 부분 중의 하나이다. 내부에는 벽장, 의자, 긴 책상, 소파와 스텐드가 있다.
이 건물의 특징 중의 하나로 천정을 들 수 있는데 재료는 나무로 되어 있으며, 식물들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깔벳부부의 침실에는 양탄자가 깔려 있는 응접실이 별도로 있다.(현재 이 양탄자는 가우디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계단실의 아치에는 믿음, 조국, 사랑('Fe, Patria, Amor')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이 저택이 준공된 1900년 바르셀로나 시는 올해의 최고 건축상을 주었으며, 가우디는 처음으로 상을 받았다.
구엘공원, 바르셀로나, (Park Guell), 1900-1914
에우세비 구엘 바시갈루피(Eusebi Guell Bacigalupi)는 1900년 바르셀로나에서 비교적 높은 지역인 뺄라다(Pelada) 산등성이를 구입하여 그리스 신화의 올림피아의 파르나소스 산처럼 만들 생각이었다. 아폴로신이 사악한 뱀과 용을 죽여 땅에 묻은 자리를 기념하여 그리스인들이 그 위에 도리아식 신전을 세운 것을 본 따 그는 가우디에게 아띠카식으로 아테네의 델포스처럼 전원도시를 만들기를 제안했다. 그리고 그는 삼각모양으로 뻗어있는 계단위에 하나님의 말씀을 교신하는 여사제의 형상과 델포에 있었던 델푸사(Delfusa), 까소띠스(Cassotis), 까스딸리아(Castalia)라는 이름을 가진 세 개의 분수를 만들고 싶어하였다.
그러나 이 지역은 첫인상이 돌멩이 투성이고, 물도 부족한 곳이며 경사가 상당히 진 지역인 까닭에 도시계획하기에는 너무 적절하지 않아 보였다. 가우디는 지형연구를 시작하였고 주요도로를 구성해 나갔다. 자연적인 도로의 기복을 평평하게 하기 위해 커브 길로 만들어야만 했다. 가우디는 자연을 소중히 여겼으므로 경관을 그대로 보존하기 위하여 그 주변에 있는 자연 경관 그대로를 살리며 도로, 다리, 수로 등의 토목공사를 진행했다. 이로 인해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경사진 도로를 건설할 수 있었다. 가우디는 환경을 중요시 했지만 아무리 환경을 해치지 않으려 해도 자연훼손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가우디는 이 단지 내에 상록수 교목, 소나무와 야자수를 더 심었다. 거기다가 백리향, 로즈메리, 금잔화와 같은 관목을 더 심었다.
공원 정문은 매우 독특하며, 입구 건물, 돌계단과 도리아식의 광장이 지어져 있다. 이곳은 구엘 공원에서 가장 노력이 기울여진 곳이며 색상도 다양하다. 그 도리아식 신전 위에는 넓은 광장이 있다. 이는 델포에 있는 그리스 극장의 이름과 똑같이 지었다. 가우디는 구엘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자신만의 해석으로 전원 도시를 꾸며갔다. 이 곳에는 86개의 도리아식 기둥이 있는 방이 있는데 그것은 순수 도리아식 양식과는 좀 다르게 표현되었다.
광장 밑에는 주택단지가 완성된 후 시장으로 사용될 공간이 있다. 그 방밑에는 그리스극장 광장 위에서 떨어지는 빗물과 도리아식 기둥 안에 설치해 둔 하수관을 통해 떨어지는 물을 모아 두는 물탱크가 있다.
이 모아진 물은 왕들이 지나다니는 계단이 있는 세 개의 분수 중에 세라믹 재질로 된 용의 조각상이 물을 입으로 토하듯이 나오게 된다. 이것은 아폴로 신에 의해 죽임을 당해 땅속에 매장된 뱀과 용이 땅속에서 물을 지키고 있다는 그리스 신화에서 착안한 것이다. 그리고 까딸루냐 지방의 르네상스는 굉장히 종교적이었기 때문에 이 영향으로 왕이 다니는 계단의 세 번째 분수에는 아라곤 왕의 휘장이 표현되어져 있기도 하다.
정문 측면의 두 건물은 돌벽으로 되어 있고 창문과 다양한 색깔의 잘게 깬 타일로 둘러 싸여 있다. 유약을 칠하여 구어 잘게 깬 세라믹 모자이크는 지붕의 폐쇄된 둥근 천정 때문에 항상 빛나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태양 광선이 항상 굴절되는 지점이 있다. 그리고 가우디는 입구 쪽 건축물 탑의 가장 높은 곳에 네 개의 가지가 있는 십자가를 설치하였고, 중세시대를 생각하여 깔바리오(Calvario)산처럼 그곳의 돌로 탑을 쌓아 가장 높은 곳에 새 개의 십자가를 놓았다.
구엘 고원의 중요성은 도시 계획의 성격이 강하다는 점, 자연 환경을 중요시 한 점, 건물 짓기에는 매우 부적절한 땅을 활용하여 공사를 했다는 점, 그리고 도시계획 역사상 바르셀로나의 당시에 대단위 임대 주택의 전례가 없었다는 점이다.
이 공원은 건축적으로 매우 독특한 공원으로 유네스코(UNESCO)에 198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까사 바뜨요, 바르셀로나, (Casa Batllo), 1906-1908
까사 바뜨요는 가우디의 대중 작품 중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셉 바뜨요 카사노바(Josep Batllo i Casanovas)는 가우디에게 이 저택을 완전 보수하는 것을 의뢰했고, 가우디는 수리를 하면서 저택의 마당 부분을 넓혔으며, 그라시아 도로에 있는 정면의 지하층과 1층을 철거하여 새로 하였고, 뒷면 공사도 새로 하였다. 또한 이중으로 된 다락방을 건물에 새로 설치하였다.
다락방과 붙은 지붕의 기복이 있는 선은 용의 척추를 연상케 할 정도이다. 중앙 정면은 부드러운 기복을 주기 위해 낮추어 여러 색깔의 조각 타일과 여러 색깔의 돌들로 덮여졌다. 건물 정면의 아리 부분은 몬쥬익의 돌로 만들어 졌고, 그 중의 일부는 매우 조각적이며 조화롭게 되어 있다. 발코니 부분은 들쑥날쑥하며, 철로 된 난간은 색상이 바랜 듯하다.
정면 거리 쪽 상부는 짙푸른 빛의 물고기 비닐과 같은 기와가 덮여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용의 모습을 형상화 한 것으로 용의 비닐이다. 그 색은 시간에 따라 항상 변하면서도 조화를 잘 유지하고 있다. 측면에는 원통형 탑이 있다. 나선식 계단으로 되어 있으며, 그 뾰족한 끝은 4개의 가로대가 있는 십자가로 장식되어 있다. 이것은 마요르카식 도자기 조각에 해당한다.
정면이나 지붕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빛이 나는 것이지만, 건물 내부에도 많은 장식이 있다. 그라시아 도로 쪽으로 나있는 위아래로 여닫게 만든 여닫이창들은 가운데 창살이 없으며 한꺼번에 올릴 수 있게 되어 있다. 따라서 채광이 건물 내부로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으며 저택 안에 있는 사람이 건물 중앙에 있는 듯한 착각을 느끼게 한다.
가우디는 이 건물에서 다른 건축물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색상, 무지갯빛 등의 보조방식을 사용했다. 가우디가 직접 컬러 유리를 설치하는 것을 감독을 했을 만큼 신경을 많이 쓴 부분이다. 바뜨요 저택에서 나타나는 상상력의 표현은 민간 건축에서 가우디가 가장 최전성기였음을 가리킨다. 또한 그의 환상적인 건축 양식에 시적인 감각이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바뜨요 저택은 기념비적인 것을 소유하고 있지는 않지만, 역동적으로 물결치는 듯 해 보이는 건물 외벽과 색의 가치는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반짝이는 연한 반사광은 보석 상자와 같이 돋보이게 하여 주옥과 같이 반짝인다. 유약 처리된 세라믹과 수정 같은 유리조각으로 덮인 건물 외벽의 물결은 빛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을 낼 뿐만 아니라 그 굴절 효과는 무지개 색으로 반사되어 물결처럼 흔들린다.
현재 가우디 박물관과 마드리드에 소장되어 있는 식당 가구 부속품은 예모나(Llimona)와 마니(Mani)가 조각하고, 루비오(Rubio), 후졸(Jujol), 마타마라(J.Matamala) 등이 장식한 작은 기도소 등이 있다.
카사 밀라, 바르셀로나, (Casa Mila "La Pedrera"), 1906-1910
까사 밀라는 가우디의 마지막 민간 건축물이다. 이 건물은 바요뜨 저택을 완성한 직후 1905년 가우디에게 주어진 행운이었다. 이 계획은 천 평방미터가 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굉장한 관심을 끌었다. 가우디가 건설한 민간 건축 중에 가장 중요한 공사이기도 했다.
이 계획에서 가우디는 나름대로 해석한 디자인적 방법에 의해 지하에는 창고를 두었고, 지상 5층의 건물에는 2개의 오픈 스페이스를 두었다. 이 주위에는 빛이 들어오는 방들을 배치했다. 건물의 기둥과 아치는 돌을 캐내는 '채석장(La Pedrera)'을 연상시킨다하여 바르셀로나에서는 이 건물을 까사 밀라라고 하기보다는 페드레라(La Pedrera)라고 하는 것을 훨씬 쉽게 알아듣는다. 이 돌들은 가라프(Garraf)와 빌라함까(Vilafranca)지방의 돌을 사용했으며 건축양식은 마요르까(Mallorca)와 페라데스(Prades)지방의 영향을 받았다.
구조적으로는 안정성을 지니고 있다. 건물 내부에는 계단용과 엘리베이터 벽만 있으며 버팀목은 철 도리와 압연한 작은 도리가 있다. 중근 천정은 까딸류냐 방식으로 돌기둥과 벽돌, 빛이 바랜 듯이 보이는 철 구조물이 지탱하고 있다. 상부 층에는 수직의 곡선 아치가 있는 넓은 방을 배치했다. 이 부분은 기복이 심한 두 면과 합쳐져 높이가 서로 다른 면이 생기면서 옥상에 큰 계단이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건물 장식(decoration)은 이보 파스꾸알(Lvo Pascual)과 협력하여 환관이나 앞마당에 벽화를 그렸다. 그리고 문의 격자창이나 지하 창고의 창문, 특히 발코니의 난간을 만들기 위해 바디아(Badia)지방의 우수한 철 주물 장인들에게 부탁하여 많은 도움을 받았다. 옥상에는 대리석과 타일, 깨진 병 조각 등으로 장식하였다. 밀라 부부가 살고 있던 2층 기둥과 맨 위층 돌출부에는 각종 디자인과 감동적인 비문과 성모 마리아의 기도문(Virgen del Rosario)이 적혀져 있다. 사단 면의 벽 위에는 소유주의 수호성인 로사리오의 동정녀 성모마리아상을 설계하였으며, 성 미카엘(San Migrel)과 성 가브리엘(San Gabriel) 대천사들의 동상을 계획했으나 실행되지는 못했다.
밀라 저택은 돌을 구조적으로 사용한 점과 정교한 가공법을 채택한 점에서 옛날 건물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사실상 이 건물은 자유로운 분위기의 현대건물로서 담이나 하중 벽이 없다. 옥상의 환기구와 굴뚝들은 전체적인 구조가 매우 화려한 면을 보이고 있으며, 실내의 칸막이벽으로 된 아치와 덮여져 있는 표면 구조 등은 벽돌 기법을 완벽하게 다루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당시 이것은 까딸루냐 지방에서 매우 보편적인 건축 방식이었다. 이 건물에서 가장 화려한 부분은 석고로 된 평평한 천정과 기복이 심한 부조형태의 건물 벽의 명각을 다이내믹한 느낌이 들게 한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가우디만의 독특한 디자인 기법이다.
밀라는 훗날 가우디의 건축에 관해 자세히 설명했던 호세 바요 폰트(Jose Bayo Font/1878~1970)의 청부업자로 드러났다. 유네스코(UNESCO)는 1984년 밀라 저택(Casa Mila)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출처  http://www.keonchook.com/service/board.php?bo_table=architect&wr_id=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