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우리 집이다]
남녀노소 불문 나체로 다니는 공동체에 나체당까지 있는 스페인에서 자유를 느끼다
처음 스페인에 왔을 때는 여름이었다. 스페인 남부 알메리아에 도착해 우리는 가까운 공원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다리오는 그 늦은 밤에 나를 공원 벤치에 혼자 남겨두고 동네를 한 바퀴 돌더니 어디서 신발 한 켤레를 주워왔다. 호피 무늬의 예쁜 새 신발인데, 누군가 버린 것을 내 발에 맞겠다 싶어 주워온 것이었다. 스페인에 도착하자마자 얻은 새(?) 신발은 새로운 삶이 나를 기다린다는 것을 말해주는 듯했다. 신발에 '인연'이라는 속뜻이 있음을 알고 나서 나는 그것이 우연이 아님을 알았다.
알메리아에서 버스를 타고 '라스네그라스'라는 아름다운 마을에 도착한 것은 오후 5시 넘어서였다. 아무리 해가 긴 스페인의 여름날이라도 절벽을 따라 한참을 걸어서 도착할 수 있는 '산페드로' 해변으로 가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하고, 작은 마을에 어울리는 소박한 동네 선술집에 들어가 시원한 맥주를 한 잔씩 들이켰다.
동네 아저씨들은 등장한 이방인들을 탐색하느라 말을 뚝 멈췄다가 잠시 뒤 호기심이 좀 풀렸는지 다시 시끄럽게 떠들었다. 그제야 드디어 스페인에 도착했다는 것을 실감했다. 말이 그렇게 빠르고 성격 급한 스페인 사람들이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게으른 이들이라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했다.
구석에 걸려 있는 오래된 텔레비전으로 축구 경기를 보면서도 말은 또 얼마나 많은지 나는 한참 동안 멍하니 사람들을 구경했다. 그 누구도 상대방이 말을 마칠 때까지 듣고 기다리는 법이 없었다. 다리오는 스페인에서 남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자기 차례에 말을 했다가는 평생 한마디도 못할 거라며 농담 아닌 농담을 했다.
맥주를 몇 잔 마셨더니 작은 접시에 음식이 나왔다. 그 유명한 '타파스'였다. 술을 마시면 음식이 공짜로 나오는 스페인의 바에서는 배고픈 사람들도 밥 대신 술을 주문했다. 맥주 한 잔 가격도 고작 1유로였다. 밥은 굶어도 술은 절대 굶지 않는다는 것이 이들의 철학이었다. 그날 밤이 깊어서야 바에서 나왔다. 텐트를 펼치기만 하면 되니 잘 곳은 문제가 없었다. 동네의 외딴 골목으로 빠지자 공사를 하다 만 집이 하나 보였다. 우리는 건물 안에 텐트를 치고 안전하게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전날 미처 이르지 못했던 산페드로를 향해 출발했다. 1시간을 꼬박 작열하는 태양을 머리로 맞으며 도착한 산페드로에서 처음 본 광경은 나에게 적잖은 문화적 충격을 주었다. 사람들이 옷을 다 벗고 있었다. 다름 아닌 '나체 공동체'였다. 하지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벗고 있는 모습이 민망하기는커녕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개중에는 벗는 것이 더 잘 어울리는 골수 히피들도 있었고, 도시에서 잠시 휴가를 보내러 온 평범한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벗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람들은 알몸으로 있으면서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걸고 대화를 했으며 그 누구도 민망해하지 않았다. 자연에서 또 하나의 자연처럼 보이는 사람들의 알몸에 옷이 꼭 필요한가,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자연스러웠다.
철저하게 자연의 일부로 며칠을 지낸 뒤 우연히 마드리드에서 차를 끌고 온 두 친구를 만나 600km가 넘는 거리를 히치하이킹해서 다리오의 고향집에 도착했다. 하루는 버스를 타고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외진 길, 잘 갖춰놓은 자전거도로를 지날 때였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흰머리의 아저씨가 열심히 자전거 페달을 밟고 있었다. 버스 뒷자석의 젊은 무리들은 아저씨를 향해 "브라보"를 외쳤고, 버스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한참을 웃었다. 진정으로 벗는 것에 너그러운 나라였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스페인에는 규모가 아주 작기는 하지만 '나체당'(Partido Nudista), 말 그대로 나체주의자들의 정당까지 존재했다. 나는 스페인 사람들의 심각해하지 않는 가치관에서 왠지 모를 해방감을 느끼며 스페인 생활에 빠져들었다.
지와 다리오 '배꼽 두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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