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정집자료 ▒

가정집 제6권 번역

천하한량 2010. 1. 13. 01:26

 

가정집 제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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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寧州) 회고정(懷古亭)의 기문

 


지정(至正) 기축년(1349, 충정왕 1) 윤달에 내가 한주(韓州 한산(韓山))에서 서울로 가는 길에 영주(寧州 천안(天安)) 를 경유하였다. 그 고을의 수재인 성군(成君)이 정자의 이름을 지어 달라고 청하면서 나에게 말하기를옛날 우리 태조(太祖)가 백제(百濟)를 정벌하려고 할 적에, 어떤 술자(術者)가 말하기를만약 왕() () 형태의 성에서 세 마리의 용이 구슬을 다투는 땅에다 보루를 쌓고 관병(觀兵)을 한다면, 삼한(三韓)을 통일하여 왕이 되는 것을 바로 기대할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풍수의 형세를 관찰하여 이 성에다 군영을 차리고는 10만 군대를 주둔시켜서 마침내 견씨(甄氏 견훤(甄萱)) 의 후백제(後百濟)를 차지할 수 있었는데, 군대를 주둔시킨 군영의 장소를 고정(鼓庭)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고을의 역사에 기재되어 있는 내용이 이와 같습니다. 옛날부터 정자 하나가 고정에 우뚝 서 관도(官道)를 굽어보고 있는데, 이른바 용이 구슬을 다툰다고 하는 형세가 실로 그 정자 아래에 펼쳐지고 있으며, ‘자라고 하는 것도 바로 그 산의 형태를 가리킨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저는 정자가 황폐해진 데다가 그 이름까지 잃어버린 것이 가슴 아프게 느껴지기에, 이번에 옛 건물을 철거하고 확장해서 새로 지었습니다. 그러니 이 정자에 이름을 붙여서 이 정자를 지은 것이 우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게 해 주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나의 고향은 여기에서 겨우 300여 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그리고 이곳을 경유하여 지나간 것도 여러 차례나 된다. 그래서 영주가 어떤 고을인지는 내가 잘 알고 있는 터이다. 백성은 일정한 생업이 없고 관리는 일정한 주거가 없으니, 정사(亭榭) 등을 관리할 겨를이 어디에 있겠는가. 병술년(1326, 충목왕 2) 봄에 내가 사명(使命)을 받들고 이곳에 왔었는데, 그때에는 이군 귀을(李君龜乙)이 이 고을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황무지를 가꾸어 밭으로 만들고 가시덤불을 베어 길을 개통하였으므로, 나는 그가 훌륭한 관리라고 인정하였다. 그러다가 지난해 가을에 내가 어버이를 뵙기 위해서 다시 이곳에 돌아와 보니, 지금의 성군이 거의 반년쯤 정사를 행하고 있었는데, 이군이 다스리던 것과 비교해서 자못 뛰어난 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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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부임한 지 몇 달 만에 백성의 사정을 모두 파악하고는 백성에게 이익이 되는 일은 행하고 해가 되는 일은 반드시 제거하려고 노력하였으며, 농사를 권면하고 학문을 장려하고 부세(賦稅)를 균등히 하고 흉년에 구휼하는 일 등을 차례로 거행하였다. 그리하여 백성들이 일단 마음속으로 복종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자, 명령을 내리기를그대들은 지금 그대들이 살고 있는 이 땅의 유래를 아는가? 이곳은 바로 왕업을 일으킨 곳이다. 그래서 태조의 신궁(神宮)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전우(殿宇)가 퇴락한 나머지 지붕이 새고 벽이 뚫려서 혼령을 편히 모실 수가 없으니, 제사를 흠향하시라고 감히 말할 수가 있겠는가. 사람이 되어서 그 근본에 보답할 줄을 알지 못한다면, 이는 경건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관사(館舍)와 공해(公廨)는 빈객을 접대하고 관부(官府)를 존엄하게 하는 곳이다. 그런데 지금 모두 황폐한데도 수리하지 않는다면, 이는 태만함을 드러내 보여 주는 것이다. 경건하지 못하거나 태만할 경우에는 여기에 적용하는 일정한 법이 있다. 이는 이 땅을 맡은 나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 인민들이라고 할지라도 어떻게 그 처벌을 면할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니, 모두 명령대로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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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에 고을 사람들을 동원하되 호강한 자들을 불문하고 집집마다 일을 시키며 균등하게 배정하였다. 그리고는 재목을 마련하고 기와를 구워서 우선 신궁과 예전(禮殿)과 재방(齋房)을 신축하였는데, 모두 한결같이 규모가 크고 아름답게 꾸며서 신령의 거처를 편안하게 하고 제사를 엄숙하게 올릴 수 있게 하였다. 그런 다음에 이번에는 관사와 공해를 보수하기도 하고 또 새로 지을 작정을 하고는 이를 권면하고 감독하면서 금년 농한기까지 기필코 공사를 마무리하여 하나도 완전하지 않은 것이 없게끔 하려고 하였다. 그때 마침 국가가 새로 정사를 펼치면서 먼저 관리를 교체할 예정이라는 말을 듣고는 말하기를내가 장차 이곳을 떠날 것이니, 그대들도 잠시 공사를 중단하는 것이 좋겠다. 재목과 기와의 수량을 합산해서 이를 기록하여 보관해 둘 것이요, 또 주관하는 자에게 당부하여 이를 잃어버리지 말고 새로 부임하는 관원을 기다려서 나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또 이 정자야말로 한 고을의 승경을 차지하고서 사통팔달(四通八達)하는 요지에 있는 만큼 세우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는 시한을 정해 공사를 시작해서 마침내 낙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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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군은 이 고을에 조왕(祖王)이 후세에 끼친 사랑의 자취가 남아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나아가 초상을 우러러 볼 때면 엄연히 창업의 자취를 떠올리면서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지녔고, 물러나 고정(鼓庭)에 노닐 때면 아득히 행군(行軍)의 자취를 떠올리면서 길이 생각하고 사모하였다. 그러니 어찌 감히 심력(心力)을 다하여 근본에 보답하고 옛 자취를 회복하는 일에 힘을 기울이려 하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그가 거행한 것이 이와 같았던 것이니, 내가 이러한 점을 감안해서 이 정자의 이름을 회고(懷古)라고 하였다. 이 정자를 지은 것이 비록 조그마한 일이라서 쓰기에 부족한 점이 있다고 할지라도, 이를 통해서 다른 것도 볼 수가 있기 때문에 내가 아울러 기록하였다. 성군의 이름은 원규(元揆)요 창녕(昌寧) 사람이니, 동한(東韓)의 명가인
동암(東菴)의 외손이다. 이달 9일에 기록하다.

 

[주D-001]동암(東菴) : 이진(李瑱)의 호이다. 그는 이제현(李齊賢)의 부친이다.

 

 

 

한주(韓州)의 객사(客舍)를 중건한 기문

 


지 정(至正) 기축년(1349, 충정왕 1) 가을에 비가 많이 와서 마산(馬山) 객관의 남쪽 낭무(廊廡)가 무너졌다. 비가 일단 개고 농사도 틈이 났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보수하려고 하였다. 군수 박군(朴君)이 말하기를남쪽 낭무뿐만이 아니요 청사도 거의 무너졌는데, 어찌하여 한꺼번에 새로 단장하려 하지 않는가.”라고 하니, 고을 사람들이 말하기를이 지역에서는 재목이 생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주 작은 재목까지도 100리 밖의 다른 산에서 베어 오는 실정입니다. 여기에 또 우리 땅에 거하는 자들 대부분이 권귀(權貴)와 호강(豪强)의 비호를 받고 있으니, 누가 우리를 위해 거들어 주려고나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박군이 말하기를어쨌든 한번 해 보라. 어려울 것이 뭐가 있겠는가.”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옛 건물을 철거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힘을 쓰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고는 하루아침에 모조리 철거해 버렸다.
고을 사람들이 처음에는 의아해하면서 걱정하였다. 군이 이에 관리의 재능을 헤아려서 유능한 자에게는 큰 건물을 맡기면서 인부를 많이 배정해 주고, 졸렬한 자에게는 적게 배당해 주었다. 이와 같이 일단 일을 분담하여 주관하게 하고는 명령을 내리기를
편하게 주는 도리에 입각해서 백성을 부리면 아무리 수고롭더라도 원망하지 않는다고 옛사람이 말하였다. 지금 그대들이 이 땅에서 옷을 입고 밥을 먹으면서 의지할 곳이 없다고 탄식하지 않게 된 것은 모두가 윗사람이 베풀어 준 은혜 덕분이다. 무릇 빈객이 찾아오는 목적을 보면, 크게는 천자의 덕음을 선포하기 위해서요, 작게는 국가의 명령을 반포하기 위해서인데, 이 모두가 나라의 근본이 되는 백성들을 보살펴 주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관우(館宇)를 설치하는 것도 결국에는 백성을 위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니, 지금 공사를 진행하는 것도 그대들을 편하게 해 주려는 도리에 입각한 것이 아니겠는가. 더군다나 옛날에 집을 지을 때의 제도가 거칠고 촌스러워서 장차 무너져 쓰러질 운명에 처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신을 맞이하여 조령(詔令)을 받들 수도 없으니, 군수로서는 오직 불경스럽게 될까 두려움이 앞선다. 그러니 어떻게 감히 태만히 할 수가 있겠는가. 감히 이 명령을 어기는 자는 처벌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호적을 대조하여 인부를 동원하게 하되 오직 늙은이와 어린이만 제외시키고, 항해하여 재목을 구해 오게 하되 아무리 험하고 먼 곳도 꺼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와 함께 모금(募金)하여 조력하는 자와 음식을 제공하여 먹이는 자들이 또 서로 어깨를 스칠 정도로 많이 나왔다. 그리하여 그해 윤달에 공사를 시작해서 겨우 몇 개월이 지나자 청방(廳房)과 낭무(廊廡)의 골격을 세우는 일을 일단 마치게 되었는데, 그때 한창 추위가 몰아닥쳐서 흙을 바를 수가 없었으므로 우선 공사를 중지하게 하였다. 그리고는 이듬해 2월에 공사를 거의 완료하기에 이르렀는데, 높지도 낮지도 않게 하여 면세(面勢)에 걸맞게 하였으며, 사치하지도 누추하지도 않게 하여 시의(時宜)에 적합하게 하였다. 그러자 처음에 의아해하며 걱정하던 자들도 나중에는 열복하게 되었으며, 예전에 호기를 부리며 제멋대로 굴던 자들도 지금은 턱짓으로 일을 시킬 정도가 되었다. 박군이 또 고을 관원의 집무실을 비롯해서 서고(書庫)와 창고 등도 짓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는 이미 계획을 수립해 두었는데, 때마침 박군이 교체되어 떠나게 되었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망연히 어버이를 잃은 것처럼 생각하였다. 그러고 보면 박군 또한 유능한 수재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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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려서부터 시골 마을에서 생장하였으므로, 백성의 화복(禍福)이 실로 수령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그러한 점에 대해서는 나의 고향을 통해서 더욱 확인할 수가 있다. 내가 연곡(輦轂 연경(燕京)) 에 있을 무렵에, 나의 고향의 이민(吏民)들이 왕왕 도망쳐 숨어 버리는 바람에 고을 길이 가시덤불로 덮여 있어서 빈객이 갈 곳이 없고 군수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 인수(印綬)를 품에 안고 떠난다는 말을 듣고는, “이것은 이민에게만 죄를 돌릴 성격의 것이 아니요, 그 땅을 지키는 수령 역시 그 책임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탄식하곤 하였다. 그러다가 병술년(1326, 충목왕 2) 봄에 조칙을 받들고 귀국하였는데, 그때는 이군 자(李君資)가 정사를 행하고 있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관리를 어거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것을 모두 조례와 법규에 의거해서 행하였으므로 온 경내의 사람들이 눈을 씻고 그 효과를 기대하였는데, 반년도 채 못 되어 소명(召命)을 받고 조정의 관원이 되었다. 그 뒤를 이어 이군 자장(李君自長)이 부임하여 더욱 부지런히 정사를 행하면서 아는 것은 행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는 말하기를국가의 법제에 수령이 거하는 곳을 공아(公衙)라고 일컫는다. 그런데 이 고을은 수령이 거할 곳이 없어서 민가에 우거하고 있으니, 어떻게 고을로 행세할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고는, 고을의 관리에게 명하여 부서별로 일을 배정해서 단시일 내에 공사를 완료하게 하였다. 또 관우(館宇)도 차례로 수축하려 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부모상을 당하여 고을을 떠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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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에 박군이 부임하였는데, 그는 두 이군(李君)의 재능을 겸비한 인재였다. 그리하여 몇 년 사이에 백성에게 이로운 일은 행하고 해로운 일은 제거하여 사태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화합하게 하였으니, 실로 전일의 한산(韓山)이 아니었다. 그는 또 사람을 성의로 대하였고 빈객을 접대함에 게으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공급해야 할 필요한 물품과 상욕(牀褥)이나 집기(什器) 등 하찮은 물건들까지 모두 깨끗이 완비해 놓았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모두 관아의 창고에 비축한 것에서 충당하였을 뿐이요, 털끝만큼도 백성에게 거둔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성예(聲譽)가 애연(藹然)히 한 지방의 으뜸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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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고을 사람이다. 그래서
자시(慈侍)하 는 여가에 보고 들을 수가 있었으므로 지금 관사를 지은 것을 계기로 해서 대체적인 내용을 여기에 간략히 소개하게 된 것이다. , 지금 이후로 박군의 뒤를 잇는 자들이 한결같이 박군을 모범으로 삼고서, 박군이 완성하지 못한 공과 끝내지 못한 일을 마침내 성취시킬 수 있다면, 양리(良吏)가 되지 못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박군의 이름은 시용(時庸)이요 자는 도부(道夫)이니, 밀성인(密城人)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문한(文翰)의 직책을 맡고 감찰 규정(監察糾正)에 임명되었다가 관례에 따라 외방에 나와 이 고을을 맡았다고 한다.
경인년(1350, 충정왕 2) 3월 일에 기록하다.

 

[주D-001]편하게 …… 말하였다 : 《맹 자(孟子)》 진심 상(盡心上)편하게 해 주는 도리에 입각해서 백성을 부리면 아무리 수고롭더라도 백성이 원망하지 않고, 살게 해 주는 도리에 입각해서 백성을 죽이면 비록 죽더라도 백성이 죽이는 자를 원망하지 않는 법이다.〔以佚道使民 雖勞不怨以生道殺民 雖死不怨殺者〕라는 맹자의 말이 나온다.
[주D-002]자시(慈侍) :
홀어머니 한 분을 모시고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옛날에 과거에 급제했을 때에 부모 모두 생존시에는 구경(具慶), 부친만 생존시에는 엄시(嚴侍), 모친만 생존시에는 자시(慈侍), 부모 모두 여의었을 때에는 영감(永感)이라고 하였다.

 

 

 

청풍정기(淸風亭記)

 


지 정(至正) 기축년(1349, 충정왕 1) 여름 4월에 내가 근친(覲親)하러 고향에 돌아가는 길에 낙생역(樂生驛)에 머물렀는데, 광주 목사(廣州牧使) 백군 화보(白君和父)가 서한을 보내 초청하면서 말하기를관사 북쪽에 옛날 청풍정의 터가 있기에, 네 기둥을 세워서 집을 하나 지었는데, 실로 한 고을의 승경이라 할 만하다. 그대가 그 기문을 지어 주면 좋겠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때는 내가 가는 길이 바빠서 우선 회답하기를뒤에 서울에 갈 것이니, 그때 한번 가서 구경해 보고 기문을 지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듬해에 광주에 갔더니 백군은 이미 부름을 받고서 조정에 돌아갔고, 이군(李君) ()가 반년 전에 후임자로 와 있었다. 그 시절이 바야흐로 혹독하게 더운 때라서 기식(氣息)이 가늘게 이어지는 것이 실낱과도 같았다. 그래서 이른바 청풍정이라고 하는 곳에 올라가서 기둥에 기대어 옷깃을 풀어 헤쳤더니, 정신이 상쾌해지고 모발이 쭈뼛해지는 것이 마치 매미가 썩은 도랑 속에서 껍질을 벗고 진애(塵埃) 밖으로 빠져나온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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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군이 술자리를 베풀고는 조용히 말하기를네 개의 기둥으로 세운 그 규모가 간단하기는 간단하나, 아침저녁으로 햇빛이 비치는가 하면 동쪽과 서쪽으로 빗발이 들이쳐서 이 자리를 찾는 손님들이 모두 아쉽게 여기곤 하였다. 그래서 내가 그 양쪽에다 처마를 잇대고 남쪽에 각각 다섯 자의 추녀를 달았으며 북쪽도 그렇게 하였더니, 조금 넓어지면서 깊숙한 맛이 우러났다. 이에 흙손질을 끝내고서 단청을 하려는 참에 그대가 마침맞게 찾아와 주었다. 그러니 술잔을 들어 낙성을 축하하고 연월을 기록하여 기념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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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문을 써 주기로 한 것은 내가 이미 그 전에 백군에게 허락한 터였다. 그래서 정자가 무너져서 없어진 것이 몇 년이나 되었는지 물어보았더니 부로(父老) 중에도 아는 자가 있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지금 무너진 옛 정자를 다시 세운 것이야말로 정자를 새로 처음 세운 것과 같다고도 할 것이다. 그런데
《춘추(春秋)》의 경문(經文)에 ‘지었다〔作〕’라고 중에는 그렇게 지으면 되었다는 의미로 말한 경우도 있고, 노(魯)나라 장부(長府) 하필 새로 지어야 하느냐고 말한 속에도 성인(聖人) 가르침을 내린 은미한 뜻이 들어 있다고 해야 것이다. 내가 광주 고을의 형세를 살펴보건대, 삼면이 모두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북쪽이 비록 광활하게 멀리까지 보이기는 하였으나 지세가 낮고 평평하였으므로, 공해(公廨)와 민가가 마치 우물 속에 들어 앉아 있는 것과 같았다. 그러니 빈객이 이곳에 와서 볼 적에 어찌 비루한 곳보다 괴롭게 느끼기야 하겠는가마는, 몇 걸음도 되지 않는 사이에 이런 상쾌한 정자가 있을 줄은 아예 생각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정자를 지은 것은 성인이 볼 때에도 비난의 대상에 속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쓰게 된 것인데, 청풍이라고 이름 붙인 그 뜻에 대해서는 내가 정자에 처음 올라갔을 때에 그냥 토로해 본 느낌 속에 다 들어 있으니, 다시 췌언(贅言)을 하지 않으련다. 백군은 나와 동년(同年)이요, 이군은 나의 집우(執友)인데, 정사를 행하면서 모두 염근(廉勤)하다는 명성을 얻었다.
경인년(1350, 충정왕 2) 중하(仲夏)에 적다.

 

[주D-001]춘추(春秋)의 …… 있고 : 《춘 추좌씨전(春秋左氏傳)》 장공(莊公) 29년에연구라는 마구간을 새로 지었다고 공자가 기록한 것은 때에 맞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新作延 書不時也〕라고 하였고, 희공(僖公) 20년에새로 남문을 세웠다고 공자가 기록한 것은 때에 맞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新作南門 書不時也〕라고 하였다. 또 정공(定公) 2년의 경문(經文)치문과 양관을 새로 지었다.〔新作雉門及兩觀〕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서공자가 새로 지었다고 기록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크게 수축했기 때문이다. 옛 건물을 수축한 것은 기록하지 않는 법인데, 여기에서는 왜 기록하였는가. 비난하는 뜻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다. 무엇을 비난한 것인가. 공실에 힘쓰지 않은 것을 비난한 것이다.〔其言新作之何 脩大也 脩舊不書此何以書 譏 何譏爾 不務乎公室也〕라고 하였다.
[주D-002]노(魯)나라 …… 것이다 :
노 나라 사람이 장부(長府)라는 창고를 만들자, 민자건(閔子騫)옛것을 그대로 쓰면 어때서 하필 새로 지어야만 하는가.〔仍舊貫如之何 何必改作〕라고 말하니, 공자가저 사람이 말을 하지 않을지언정, 말을 하면 꼭 도리에 맞게 한다.〔夫人不言 言必有中〕라고 평한 말이 《논어(論語)》 선진(先進)에 나온다.

 

 

 

 

대도(大都) 대흥현(大興縣)의 용천사(龍泉寺)를 중건한 비문

 


지 원(至元) 3(1338, 충숙왕 복위 7) 4월 초하루에 전서사(典瑞使) 신공 당주(申公當住)가 나에게 말하기를지난번에 태황태후(太皇太后)의 명을 받들어 용천사의 불전(佛殿)을 중건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전지를 매입하여 이를 시주해서 해마다 그 수입으로 장명등(長明燈)의 자금으로 쓰게 하였으니, 이는 불승(佛乘)에 의지하여 황제와 태후와 황후와 태자를 위해 하늘에 영원한 명을 기원하여 아름다운 복을 받게 하려는 목적에서였습니다. 그리고 이와 함께 고려의 계명 선사(戒明禪師)에게 그 사원을 주지(主持)하게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이 본말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할 수 있게 해 주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일찍이 신공에게 지우(知遇)를 받은 처지에서 그 청을 사양하기가 어렵기에 자료를 모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불씨(佛氏)의 도가 천하에 행해진 것이 오래되었는데, 우리 성스러운 원()나라의 시대에 이르러서 받들어 섬기는 것이 더욱 근실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태황태후가 일찍부터 이 종교를 존숭하였는데, 문황(文皇 원 문종(元文宗)) 이 세상을 떠난 뒤로는 더욱 간절히 귀의하였다. 그리하여 부처를 공양하고 승려를 먹이는 일을 날마다 하면서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긴 나머지 불사(佛事)를 거창하게 벌이면서 이를 모두 신공에게 위임하였다. 신공은 유악(帷幄)에서 가까이 모시면서 오래도록 총애를 받은 사람이다. 그래서 부지런히 부처를 받들어 섬기며 상()의 은혜에 보답하려고 하였으니, 이는 이른바
위에서 무엇을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아래에서 그보다 좋아하는 자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上有好者 下必有甚焉者歟〕”라고 한 말에 해당된다고 할 것이다. 그러니 이 사원을 중수한 것이 비록 사소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역시 기록해 두지 않을 수 없다고 하겠다.
사 원은 대흥현의 숭양남향(崇壤南鄕)에 있으니, 현청(縣廳)에서 80여 리쯤 떨어진 거리에 있다. 어느 시대에 창건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원철법사(圓哲法師)라는 분이 중건했다고 한다. 지금의 불전 여섯 채는 실로 금()나라 대정(大定) 23(1183, 명종 13)에 세운 것인데, 국초에 병화로 소진될 적에 이 불전만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대개 유씨(劉氏)가 빚어서 만들었다는 법신(法身)ㆍ보신(報身)ㆍ화신(化身)의 삼신(三身), 문수보살(文殊菩薩)ㆍ보현보살(普賢菩薩)ㆍ사지보살(四智菩薩), 3006개의 몸으로 나누어 변화하는 관음대사(觀音大士 관세음보살)의 상이 있었는데, 여기에 기도하면 번번이 감응이 있었다고 하니, 불전이 화재를 당하지 않은 것도 어쩌면 그 영험인지도 모르겠다. 원철법사는
화(泰和) 말년에 시적(示寂)하였고, 그 뒤를 이어 상등(祥登), 덕인(德因), 지개(智改) 등이 차례로 사원을 주지하였다.
이 사원에는 예전부터 전지 600묘가 있었고, 지금 시주받은 전지 200묘가 또 있다. 이와 같은 전지가 있는 까닭에 이익을 탐하는 무리가 서로 다투어 뺏으려고 안달하는 형편이다. 그래서 연우(延祐) 정사년(1317, 충숙왕 4)에 현침(顯琛)과 현진(顯進)이라는 사람이 이 사원을 참반달법사(站班達法師)에게 귀속시켰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법사가 서역으로 돌아가면서 중정원사(中政院使) 이신(李信)에게 위촉하여 외호(外護)가 되게 하였다. 이에 이공이 현침과 현진을 위해 장실(丈室), 승방(僧房), 향적(香積)의 주방을 새로 만든 다음에 장차 전우(殿宇)도 신축하려고 하다가, 마침 일이 있어서 떠나게 되었으므로 신공과 그의 조카인 첨호북도염방사사(僉湖北道廉訪司事) 최백연(崔伯淵)에게 그 사원을 부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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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공이 첨사(僉事)의 아들인 계명(戒明) 스님에게 말하기를나는 일찍부터 중정공(中政公)을 아버님처럼 섬겨 왔소이다. 그런데 스님이 또 공의 친척이 되기 때문에, 이 절을 새롭게 해서 스님을 주지로 모셨으니, 이제 공의 뜻을 이룰 수 있게 되었소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내지(內旨)를 받들어서 4 5000의 저강(
저화(楮貨) 즉 지폐)을 시주하여 중건하게 하였다. 그때 참반달법사의 법사(法嗣)인 영고로숭참팔관(永古魯崇站八灌)이 서역에서 와서 다시 그 사원에 거주하려고 하다가, 신공이 그동안 해 온 일을 듣고는 흔연히 뜻이 서로 합치되었으므로, 천폐(泉幣 전폐(錢幣)) 8000()을 희사하여 그 비용에 보태게 하고 그 사원을 소유하지 않았다.
, 원철법사가 이 사원을 중건하면서, 단가(檀家 불교 신도) 의 시주를 모으고 자기 의발(衣鉢) 속에 저축한 돈을 모두 희사하여, 산문(山門)을 위해 구원(久遠)한 계책을 세운 것이 어떠했다고 하겠는가. 그런데 법사가 죽은 뒤로 수백 년이 지나는 동안 이 사원에 거처하는 자들이 오직 이익을 다툴 줄만 알았지, 흥복(興復)의 책임을 맡으려고 한 사람은 애당초 있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공과 같은 분이 앞에서 창도하고 신공이 뒤에서 화답하여 주석(主席)을 정함으로써 다툼이 일어날 소지를 막았으며, 여기에 또 계명 스님이 이를 잘 주관하였다. 그리하여 건물을 새로 짓고 자금을 풍부하게 하여 영원토록 갑과 을이 서로 전할 수 있게 함으로써, 산문으로 하여금 의지처가 있게 하고 불사가 거듭 빛나게 하였으니, 이 또한 기록할 만한 일이라고 할 것이다
.
내가 듣건대, 불자는 허무를 종지(宗旨)로 삼고, 자비를 베풀어 죽이지 않는 것을 교리로 삼는다고 하였다. 또 그들의 말을 들어 보면
악을 짓지 말고, 선을 봉행하라.〔諸惡莫作 衆善奉行〕”라고 하였다. 대개 그들이 교리로 삼는 것이 비록 세상을 다스리는 데에 절실하지는 못하다고 하더라도, 진실로 이 마음을 미루어 넓힘으로써 한 세상의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게 하여 인수지역(仁壽之域)에 오르게 한다면, 치세(治世)를 돕는 것이 어찌 적다고 하겠는가. 이것이 바로 불도(佛道)가 오래도록 천하에 유행하는 까닭이라고 할 것이니, 이에 대한 명()을 짓는 것도 당연하다고 하겠다. 명은 다음과 같다.

선왕이 세운 가르침은 / 先王立敎

오직 중정한 도에 입각하여 / 惟道之中
예악으로 인도하고 형벌로 다스려서 / 禮導刑驅
무지한 백성들을 깨우치려고 하였어라 / 莫牖顓蒙
불씨의 교설은 / 佛氏之說
진공 묘유에 입각하여 / 妙有眞空
자비심으로 교화하고 유인해서 / 慈悲化誘
따르지 않는 자가 거의 없었어라 / 鮮有不從
한당 이래로 면면히 이어 오며 / 綿歷漢唐
불교가 날로 더욱 성대해지다가 / 其敎日

성스러운 원나라가 일어나면서 / 聖元有興
이 종교를 또 믿고 숭봉하였나니 / 是信是崇
탑묘가 서로 바라다보이는 것은 / 塔廟相望
중국이나 타국이나 똑같았어라 / 夷夏攸同
연산의 볕 드는 곳 / 燕山之陽
역수의 동쪽 편에 / 易水之東
유명한 사찰이 쓰러지려 하자 / 寶刹將倒
거하는 승려가 가슴 아파하였어라 / 居僧迺恫
생각건대 우리 태황태후는 / 惟皇太后
일찍부터 불교를 신봉하신 분 / 夙慕玄風
내탕에서 돈을 꺼내 희사하시며 / 出錢內帑
새로 불전을 세우게 하였다오 / 俾立新功
누가 그 불사를 주관하였는가 / 孰尸厥事
그분은 바로 우리 신공이라 / 允也申公
신공은 궁중의 반열에 거하면서 / 公居內列
근신하며 충성을 바친 분 / 克謹克忠
예전에 문종황제를 섬기며 / 昔事文皇
중궁의 총애를 한껏 받았나니 / 寵遇中宮
천지처럼 큰 그 은혜에 비교하면 / 乾坤洪造
부앙 간에 하찮은 몸이라 하겠지만 / 俯仰眇躬
오묘한 불법에 의지하여 / 冀憑妙乘
미천한 정성이나마 표함으로써 / 以表微衷
황조의 경륜을 불법이 익찬하여 / 翊贊皇圖
천지와 함께 영속하게 해 주소서 하고는 / 天地相終
이에 대한 글을 돌에 새겨서 / 刻詞于石
무궁토록 후세에 전하게 하였다네 / 傳信無窮

 

[주D-001]장명등(長明燈) : 밤낮으로 등불을 켜 놓고 꺼지지 않게 하면서 부처에게 복을 비는 것을 말한다.
[주D-002]위에서 …… 마련이다 :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3]태화(泰和) :
()나라 장종(章宗)의 연호로, 고려 신종(神宗) 4(1201)에서 희종(熙宗) 4(1208)까지이다.
[주D-004]악을 …… 봉행하라 :
《아 함경(阿含經)》에 나오는 이른바 칠불 통계(七佛通戒)의 게송(偈頌) 중 약계(略戒)악을 짓지 말고 선을 봉행하라. 그리고 스스로 마음을 깨끗이 할 것이니, 이것이 여러 부처의 가르침이다.〔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라는 내용이 나온다. 또 백거이(白居易)가 항주 자사(杭州刺史)로 부임하여 조과 도림 선사(鳥窠道林禪師)에게 불법의 대의를 물었을 때, “악을 짓지 말고 선을 봉행하라.”라고 대답하였는데, 백거이가그런 대답은 세 살 먹은 아이도 다 아는 것이다.〔三歲孩兒也解恁柚道〕라고 하였다. 이에 선사가세 살 먹은 아이도 말할 수 있지만, 팔십 먹은 노인도 행할 수 없는 것이다.〔三歲孩兒雖道得 八十老人行不得〕라고 하니, 백거이가 탄복하며 귀의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주D-005]인수지역(仁壽之域) :
인 수는 《논어》 옹야(雍也)인을 좋아하는 사람은 장수한다.〔仁者壽〕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누구나 천수를 다하며 편안하게 살 수 있는 태평성대를 뜻한다. 《한서(漢書)》 권22 예악지(禮樂志)한 세상의 백성들을 인도하여 인수의 영역으로 오르게 한다면, 풍속이 어찌 성왕(成王)과 강왕(康王) 때처럼 되지 않을 것이며, 수명이 어찌 고종 때처럼 되지 않겠는가.〔驅一世之民 濟之仁壽之域則俗何以不若成康 壽何以不若高宗〕라는 말이 나온다.

 

 

 

 

금강산(金剛山)의 장안사(長安寺)를 중건한 비문

 


성 천자(聖天子)가 즉위하신 뒤로 7년째 되는 해에 황후 기씨(奇氏)가 원비(元妃)의 신분으로 황자(皇子)를 낳았다. 그리고 얼마 뒤에 중궁의 위의를 갖추고서 흥성궁(興聖宮)에 거처하였다. 이에 내시를 돌아보며 이르기를내가 숙세(宿世)의 인연으로 은혜를 입어 여기에까지 이르렀다. 이제 황제와 태자를 위해서 하늘에 영원한 명을 기원하려고 하는데, 불승(佛乘)에 의지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른바 복전(福田)이 되고 이익이 된다고 하는 일이라면 거행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러다가 금강산 장안사가 가장 수승(殊勝)하다는 말을 듣고는, 복을 축원하여 위에 보답하기 위해서는 이곳과 같은 곳은 없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지정(至正) 3(1343, 충혜왕 복위 4)에 내탕(內帑)의 저폐(楮幣) 1000(定 정()) 을 출연(出捐)하여 사원을 중건할 자금으로 삼고 길이 상주하게 하였으며, 다음 해에도 그렇게 하고, 또 그 다음 해에도 그렇게 하였다. 그리고 승도 500명을 모아 그들에게 의발을 시주하고 법회를 열어 낙성식을 거행한 다음에, 궁관인 자정원사(資政院使) () 용봉(龍鳳)에게 명하여 이 일에 대한 본말을 돌에 기록하게 하였다. 이에 그가 조서(詔書)를 받들고 얼마 전에 와서 마침내 신 곡()에게 비문을 짓도록 명하였다.
삼가 상고해 보건대, 금강산은 고려의 동쪽에 있는 산으로서 왕경(王京)으로부터 500리쯤 떨어져 있다. 이 산의 승경은 천하에 이름이 났을 뿐만 아니라, 실로 불서에도 기재되어 있으니, 《화엄경(華嚴經)》에서 설한
동북쪽 바다 가운데에 금강산이 있는데, 그곳에서 담무갈보살(曇無竭菩薩)이 1만 2000보살과 함께 항상 반야(般若) 설법하고 있다.”라 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옛날에는 동방 사람들이 당초 그런 줄을 알지 못하고서 단지 선산(仙山)이라고만 지칭하였다. 그러다가 신라 시대에 탑묘(塔廟)를 증보(增補)하고 수식(修飾)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선감(禪龕)이 벼랑과 계곡 가까이에 잔뜩 들어서게 되었는데, 장안사는 그 산기슭에 자리를 잡고서 이 산의 도회(都會) 역할을 하였다.
대개 이 사찰은 신라 법흥왕(法興王) 때에 창건되었고, 고려 성왕(成王) 때에 중건되었다. , 법흥왕 뒤로 400여 년이 지나서 성왕이 새롭게 할 수 있었는데, 성왕으로부터 지금 또 400여 년이 되어 가건마는 아직도 흥복(興復)하는 자가 있지 않았다. 비구(比丘) 굉변(宏辨)이 퇴폐한 사찰의 모습을 보고서 동지와 함께 이른바 담무갈보살에게 서원(誓願)을 세우기를이 사찰을 새롭게 하지 못할진댄, 이 산이 두고두고 증거하리라.” 하였다. 그리고는 즉시 그 일을 나누어 주관하며 인연 있는 중생들을 널리 모집하였다. 산에서 재목을 베어 오고 사람에게서 식량을 구해 모았으며, 그 고을 사람들에게 품삯을 주고 인부로 고용하여 돌을 다듬고 기와를 구웠다. 먼저 불우(佛宇)를 새롭게 하고 나서 빈관(賓館)과 승방(僧房)의 공사를 그런대로 차례차례 마무리해 가던 차에 계속해서 비용을 댈 수 없게 되자, 또 탄식하기를
세존(世尊) 기원(祇園) 지을 적에 고독(孤獨) 황금을 아끼지 않았다. 지금이라고 해서 어찌 그런 사람이 없기야 하겠는가. 다만 우리가 만나지 못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서쪽으로 경사(京師)에 갔는데, 그 일이 중궁에게 알려졌고, 또 고 자정(高資政)이 극력 주장하였기 때문에, 이처럼 성취하게 된 것이다.
삼가 생각건대, 건축(乾竺 인도(印度)) 의 종교는 시대에 따라 흥성하기도 하고 쇠퇴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예전에 우리 세조황제(世祖皇帝)가 이 종교를 존숭하고 신봉하였는데, 그 뒤로 열성이 이를 서로 이어받아 빛나게 하고 크게 하였으며, 지금의 황제 역시 그 뜻을 계승하고 그 사업을 이으면서 더욱 관심을 기울였다. 대개 성인의 호생(好生)의 덕()과 불자의 불살(不殺)의 계()는 똑같은 하나의 인()과 애(), 똑같은 하나의 자()와 비()라고 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중궁이 보고 느낀 것도 그 유래가 있다고 할 것이다
.
그 리고 옛날에 덕을 천하에 펼친 분으로는 오제(五帝)와 삼왕(三王)만 한 분이 없고, 후세에 가르침을 드리운 분으로는 공자(孔子)만 한 분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살펴보면 오제와 삼왕 가운데에 묘식(廟食)을 향유하는 분은 거의 없다시피 하고, 공자의 경우는 비록 사당이 있다고는 하나 예제(禮制)의 제한을 받는 관계로 제수를 진설하여 올리는 것도 모두 일정한 수가 있으며 그 무리가 생활하는 것도 겨우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면 다행인 형편이다. 반면에 부도씨(浮圖氏)의 경우는 그 사원이 중국과 타국을 막론하고 바둑돌처럼 분포되어 있고 별처럼 나열되어 있는 가운데, 전폐(殿陛)의 엄숙함과 금벽(金碧 단청(丹靑))의 휘황함이 왕자(王者)의 거처와 맞먹는가 하면, 향화와 복식의 봉공이 봉읍의 수입과 대등한 실정이다. 이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점이 실로 깊고 넓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니, 이 사원이 중건된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
사 원의 건물을 칸수로 계산하면 120여 개에 달하는데, 불전(佛殿)ㆍ경장(經藏)ㆍ종루(鍾樓)ㆍ삼문(三門)ㆍ승료(僧寮)ㆍ객위(客位)는 물론이요, 취사장이나 목욕간과 같은 사소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지없이 규모가 크고 화려하게 하였다. 상설(像設)을 볼 것 같으면
, 비로자나(毗盧遮那) 좌우 노사나(盧舍那) 석가문(釋迦文)이 외연(巍然)히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가운데, 미래의 1 5000()과 과거의 53불(佛)이 주위를 겹겹이 에워싸며 정전에 도열해 있고, 관음대사(觀音大士)의 천수천안(千手千眼)과 문수보살(文殊菩薩)ㆍ보현보살(普賢菩薩)ㆍ미륵보살(彌勒菩薩)ㆍ지장보살(地藏菩薩)이 선실(禪室)에 배치되어 있으며, 아미타(阿彌陀) 53불과 법기보살(法起菩薩)과 좌우 노사나가 해장궁(海藏宮)에 안치되어 있는데, 모두 장엄하기 그지없다. 장경(藏經)은 모두 4부가 봉안되어 있는데, 그중에 은으로 서사(書寫)한 것이 바로 황후가 하사한 것이다. 《화엄경(華嚴經)》 3본(本)과 《법화경(法華經) 8권을 모두 황금으로 서사하였으니, 이 또한 지극히 아름답게 꾸민 것이다.
그 리고 예전부터 소유한 전지를 국가의 법도에 의거하여 결수(結數)로 계산하면 1천 하고도 50결에 이른다. 그중에 성열현(成悅縣)과 인의현(仁義縣)에 각각 200결이 있고 부령(扶寧)과 행주(幸州)와 백주(白州)에 각각 150결이 있고, 평주(平州)와 안산(安山)에 각각 100결이 있는데, 이것은 바로 성왕(成王)이 희사한 것이다. 통주(通州) 임도현(林道縣)에 염분(鹽盆)이 한 곳 있고, 개성부(開城府)에 경저(京邸) 1() 있고, 시전(市廛)에 가게를 만들어 남에게 대여한 것이 30칸 있다. 기타 전곡과 집기의 숫자에 대해서는 이를 담당한 자가 따로 있으니, 여기에서는 기재하지 않는다
. 태정(泰定) 연간에 이 사원을 중건할 때부터 참여한 단월(檀越)로는 중정사(中政使) 이홀독첩목아(李忽篤怗木兒) 등의 제가(諸家)가 있는데, 그들의 명씨(名氏)를 비의 뒷면에 나열하여 기록하였다. ()은 다음과 같다.

산 하나 있어 뼈를 드러낸 채 / 有山露骨

바위가 깎아 세운 듯 우뚝 솟았나니 /
突兀
그 이름 바로 금강이로세 / 名金剛兮
패서
에도 기록되었듯이 / 貝書所著
보살이 머물러 설법하는 곳 / 菩薩住處
청량산
에 버금간다네 / 亞淸涼兮
안개와 구름을 숨쉬고 내뿜나니 / 吹虛烟雲
하늘과 땅의 기운이 한데 뒤엉켜 / 輪囷絪縕
신령스러운 광채를 발하누나 / 發神光兮
새와 짐승도 순하게 길들여지고 / 鳥獸其馴
벌레와 뱀도 어질게 바뀌고 / 蟲蛇其仁
풀과 나무들도 향기롭도다 / 草木香兮
석가의 제자들이 세운 암자들 / 釋子卓菴
공중에 다리 놓고 바위에 얹혀 / 梯空架巖
멀리 서로들 바라다보이누나 / 遙相望兮
장안이라 이름 붙인 불교 사원은 / 長安精舍
산 아래 기슭에 자리를 잡은 / 居山之下
불도들의 커다란 도량 / 大道場兮
신라 때 창건된 뒤로 / 肇基羅代
성주괴공(成住壞空)을 반복하면서 / 屢其成壞
시대에 따라 일정하지 않았어라 / 時不常兮
하늘이 성신에게 길을 열어 주어 / 天啓聖神
우리 세조황제의 후손들이 / 世祖之孫
만방에 군림하게 되었도다 / 君萬方兮
호생지덕(好生之德)이 넘치는지라 / 德洽好生
함령
을 따뜻이 품어 주며 / 煦濡含靈
공왕
을 흠모하였도다 / 慕空王兮
슬기로운 우리 황후께서는 / 於惟睿后
땅의 후덕함을 몸에 간직하고 / 體坤之厚
하늘의 강건함을 받드시는 분 / 承乾剛兮
신독국(身毒國)의 불교에 귀의하여 / 歸心身毒
그 오묘한 복을 취해 와서 / 取彼妙福
우리 황제를 섬기려 하였다네 / 奉我皇兮
생각건대 복된 이 지역은 / 惟此福地
신선과 부처의 은밀한 오지(奧地)로서 / 仙佛奧秘
많은 상서를 다투어 내는 곳 / 紛産祥兮
사람에게 경사가 있으면 /
一人有慶
하늘이 그에게 거듭 명해서 /
天其申命
수명이 끝이 없게 해 주고말고 / 壽無疆兮
개의 밝음이 이괘(離卦) 이뤘나니 /
明兩作籬
왕업의 터전을 굳게 다져서 / 永固鴻基
하늘과 함께 길이 이어지리라 / 與天長兮
우리 황후가 내신에게 이르기를 / 后謂內臣
저 법신불의 교화가 / 惟彼法身
환히 드러나게 하라 하셨다네 / 其化彰兮
그리하여 불전을 다시 새롭게 하였으니 / 旣新其宮
그 공을 기록하여 잊지 않게 하는 것이 / 宜紀其庸
또한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 俾無忘兮
이에 높다랗게 비석 하나를 / 有石峨峨
산언덕 위에 우뚝 세우고서 / 于山之阿
명문을 이렇게 새기게 되었다네 / 勒銘章兮

 

[주D-001]동북쪽 …… 있다 : 《신 화엄경(新華嚴經)》 권45 보살주처품(菩薩住處品)에 나온다. 담무갈(曇無竭)은 범어 Dharmodgata의 음역인데, 보통 법기보살(法起菩薩)로 많이 알려져 있다. 금강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우리나라의 금강산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주D-002]세존(世尊)이 …… 않았다 :
인 도 사위성(舍衛城)의 수달 장자(須達長者)가 석가(釋迦)의 설법을 듣고 매우 경모한 나머지 정사(精舍)를 세워 주려고 기타태자(祇陀太子)의 원림(園林)을 구매하려고 하자, 태자가 장난삼아서황금을 이 땅에 가득 깔면 팔겠다.”고 하였다. 이에 수달 장자가 집에 있는 황금을 코끼리에 싣고 와서 그 땅에 가득 깔자, 태자가 감동하여 그 땅을 매도(賣渡)하는 한편 자기도 원중(園中)의 임목(林木)을 희사하여 마침내 기원정사(祇園精舍)를 건립하였다. 수달 장자는 급고독 장자(給孤獨長者)로 일컬어지기도 하였는데, 이 정사가 기타태자와 그의 후원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으로 부르기도 한다. 왕사성(王舍城)의 죽림정사(竹林精舍)와 함께 불교 최초의 양대 정사로 꼽힌다.
[주D-003]비로자나(毗盧遮那)와 …… 석가문(釋迦文) :
모 두 부처의 이름인데, 불교의 종파에 따라 이들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 각각 다르다. 가령 화엄종(華嚴宗)에서는 노사나(盧舍那)를 비로자나의 약칭으로 간주하여 보신불(報身佛)로 규정하고는 《화엄경》에서 설한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의 교주라고 하고, 천태종(天台宗)에서는 비로자나를 법신불(法身佛), 노사나를 보신불, 석가모니를 응신불(應身佛)로 간주한다.
[주D-004]53불(佛) :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전신(前身)인 법장보살(法藏菩薩)의 스승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 이전의 53불을 말하는데, 정토종(淨土宗)의 소의경전(所依經傳)인 《무량수경(無量壽經)》에 설명되어 있다.
[주D-005]화엄경(華嚴經) 3본(本) : 60
권으로 한역(漢譯)한 《60화엄》과 80권으로 한역한 《80화엄》과 40권으로 한역한 《40화엄》을 말한다. 60화엄》은 동진(東晉) 불태발타라(佛馱跋陀羅)가 번역한 것으로 구화엄(舊華嚴)이라 칭하고, 80화엄》은 당()나라 실차난타(實叉難陀)가 번역한 것으로 신화엄(新華嚴)이라 칭한다. 40화엄》은 《화엄경》 중에서 선재동자(善財童子) 53분의 선지식(善知識)을 차례로 방문하며 구법(求法)하는 입법계품(入法界品)을 당나라 반야(般若)가 번역한 것이다.
[주D-006]태정(泰定) :
()나라 진종(晉宗)의 연호로, 고려 충숙왕(忠肅王) 11(1324)에서 14(1327)까지이다.
[주D-007]패서(貝書) :
인도의 패엽(貝葉) 위에 쓴 글이라는 뜻으로, 불경(佛經)을 뜻한다.
[주D-008]청량산(淸涼山) :
중 국 산서(山西)에 있는 오대산(五臺山)을 말하는데, 혹서기(酷暑期)에도 더위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청량산이라는 별칭이 생겼다고 한다. 아미산(峨眉山)ㆍ보타산(普陀山)ㆍ구화산(九華山)과 함께 중국 불교의 4대 영산(靈山)으로 꼽히는데, 특히 《화엄경》에 문수보살의 주처(住處)라는 기록이 있는 관계로 예로부터 문수가 시현(示現)하는 도량으로 일컬어져 왔다.
[주D-009]함령(含靈) :
범어 sattva의 음역인 살타(
)를 의역한 불교 용어로, 함식(含識)이라고도 한다. 영성(靈性) 즉 심식(心識)을 함유(含有)한 유정(有情)이라는 뜻으로, 곧 중생을 가리킨다.
[주D-010]공왕(空王) :
제법(諸法)의 성품이 공()하다는 것을 깨달아 적정(寂靜) 무애(無礙)의 경지를 체득했다는 뜻에서 붙여진 부처의 별명이다.
[주D-011]한 …… 있으면 :
임 금이 선정을 베풀어 하늘의 경사가 있게 됨을 말한다. 《서경(書經)》 여형(呂刑)위로 임금 한 사람이 선정을 베풀어 경사가 있게 되면, 아래로 만백성이 그 은택을 받게 되어, 그 편안함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一人有慶 兆民賴之 其寧惟永〕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2]하늘이 …… 명해서 :
《서경》 익직(益稷)하늘이 임금에게 거듭 명해서 더욱 아름답게 해 줄 것이다.〔天其申命用休〕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3] 개의 …… 이뤘나니 :
《주 역(周易)》 이괘(離卦) ()밝음이 둘인 것이 이괘의 상이다. 대인은 이를 보고서 밝음을 이어 사방에 비춘다.〔明兩作離大人以 繼明 照于四方〕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황제와 황후가 이괘의 상괘(上卦)와 하괘(下卦)처럼 똑같이 밝게 세상을 비춘다는 뜻으로 말하였다.

 

 

 

 

 

대숭은복원사(大崇恩福元寺) 고려 제일대사(第一代師) 원공(圓公)의 비문

 


무 종황제(武宗皇帝)가 불승(佛乘)에 귀의하여 숭봉하면서 도성 남쪽에 범찰(梵刹)을 기공하였다. 인종황제(仁宗皇帝)가 그 뒤를 이어 공사를 마무리하여, 황경(皇慶) 원년(1312, 충선왕 4)에 준공하였다. 이에 제방(諸方)의 이름난 승려들에게 명하여, 그해 겨울부터 법당을 열고 설법하게 하였다. 고려 유가종(瑜伽宗)의 교사(敎師) 원공(圓公)이 그의 문도를 거느리고 이 사원에 들어와 거하면서 29년 동안 주석(駐錫)하다가 지원(至元) 경진년(1340, 충혜왕 복위 1) 2 18일에 무휴당(無虧堂)에서 시적(示寂)하였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갑신년(1344, 충목왕 즉위년) 가을에 그의 법사(法嗣)인 고제(高弟) 현인(玄印) 30여 인이 그의 부도(浮圖 사리탑) 를 만들었다. 또 그의 도행(道行)을 비석에 새기려고 계획하면서 나에게 글을 청하며 말하기를삶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게 마련이니, 이는 인간의 상리(常理)입니다. 살아 계실 적에 봉양하고 돌아가셨을 적에 극진히 장례를 모시는 것은 사람의 자식 된 지극한 정리(情理)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자식과 부모의 관계나 제자와 스승의 관계는 그 도리가 동일한 것입니다. 공자가 죽었을 적에 제자들이 심상 삼년(心喪三年)을 입었는데
, 그중에는 여전히 묘소 옆에다 초막을 짓고서 떠나가지 못한 자도 있었습니다. 대저 공자는 후사를 두었는데도 그 문인들이 이와 같이 하였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우리 불자로 말하면 인륜을 끊고 전법(傳法) 제자로 후사를 삼고 있으니, 돌아가셨을 때에 신중히 모셔야 하는 의리가 과연 어떻다고 하겠습니까. 옛날에 석씨(釋氏) 시적(示寂) 적에 오른쪽 옆구리를 땅에 것은 제자들에게 생의 마지막을 보여 것이요, 황금 관에 안치한 것은 제자들의 예가 박하지 않은 것을 보여 것이니, 그러고 보면 우리 불교가 비록 사생(死生)을 도외시한다고 하더라도 자애(慈愛)와 효경(孝敬)에 대한 가르침이 미상불 그 사이에 깃들어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스승이 돌아가시고 다른 사람이 방장실(方丈室)에 들어온 뒤로부터는 우리 문도를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었으므로, 5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스승의 유골을 봉안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우리의 비통함이 골수에 사무쳐서 감히 하루라도 잊지 못하는 까닭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니 선생께서 우리 스승의 명()을 써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 스승이 비록 돌아가시긴 하였어도 길이 없어지지 않는 것이 있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과거에 그들 사제 사이에서 어울려 노닌 인연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어찌 감히 이를 승낙하여 명을 쓰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의 휘는 해원(海圓)이요, 속성(俗姓)은 조씨(趙氏)이니, 함열군(咸悅郡) 사람이다. 부친은 검교 감문위대호군(檢校監門衛大護軍) ()이요, 모친은 완산군부인(完山郡夫人) 이씨(李氏)이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단정하고 장중하였으며, 타고난 자질이 자애롭고 자상하여 행동거지가 보통 아이들과는 같지 않았다. 그래서 공의 부모가 일찍이 말하기를이 아이는 대관이 되거나 아니면 중생을 위한 큰
복전(福田)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나이가 겨우 열두 살이 되었을 적에 금산사(金山寺)의 대사(大師) 석굉(釋宏)에게 나아가 머리를 깎고 그의 학술을 배웠는데, 날로 발전하여 동료들이 감히 바라보지 못하였다. 갑오년(1294, 충렬왕 20) 봄에 선불과(選佛科)에 급제하고 불주사(佛住寺)를 주지하였다.
대덕(大德) 을사년(1305)에 안서왕(安西王)이 고려 승려의 계행(戒行)이 매우 높다는 말을 듣고는 성종(成宗)에게 청하여 사신을 파견해서 초치하게 하였다. 공이 그 명에 응하여 들어가서 뵙고는 안서왕을 따라 삭방(朔方)으로 갔다. 그곳 북방의 풍속은 농사짓는 일 대신 목축을 생업으로 삼기 때문에, 가축의 고기를 먹고 고깃국을 마셨으며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공이 그 사이에서 겨울과 여름을 두 번이나 보내는 동안, 차라리 굶주림을 참을지언정 훈채(葷菜)를 절대로 입에 대지 않고서 계율을 더욱 굳게 지키자 왕이 더더욱 공을 중하게 여겼다
.
정미년(1307) 겨울에 무종(武宗)의 유지(有旨)를 받들어 도제(徒弟)를 거느리고 국록을 받는 신분이 되었으며, 가을과 봄에 정기적으로 천자가 순수(巡狩)할 때에는 공에게 명령하여 호가(扈駕)하게 하였다. 인종(仁宗)이 황극(皇極)을 이어 즉위한 뒤에 공에게 명하여 이 사원에 거하게 하였는데, 은총 어린 지우(知遇)가 날로 성대해지는 가운데 공의 명예가 더욱 드러났다. 그리고 천력(天曆 원 문종(元文宗)의 연호) 초에 이르러서는 저폐(楮幣) 2 5000()을 하사하였으니, 이는 공을 남다르게 총애하였기 때문이다. 본국의 왕은 공에게 더욱 존례(尊禮)를 더하였다. ()를 올려 멀리 백제 금산사(金山寺)를 주지하게 해 줄 것을 청하는 한편, 혜감원명 편조무애 국일대사(慧鑑圓明遍照無礙國一大師)의 호를 내리고 중대광(重大匡) 우세군(祐世君)에 봉하였으니, 종문(宗門)을 영광스럽게 빛낸 것이 한 시대의 으뜸이었다
.
공은 마음가짐이 관대하고 온화하였으며 행동거지가 위엄이 있고 무게가 있었다. 그래서 누구나 공을 보면 사랑하고 공경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리고 이른바 유식(唯識)의 이론에 대해서도 이미 대의를 통하였으므로, 사람들과 말을 많이 떠벌리면서 논쟁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또한 감히 논란을 벌이지 못하였다. 공은 성품이 또 객을 좋아하여 귀천과 사정(邪正)을 막론하고 똑같이 대접하였다. 그래서 빈헌(賓軒)이 언제나 객으로 가득 차곤 하였는데, 그들을 상대로 피곤함도 잊고서 열심히 공()을 이야기하고 유()를 설명하였다. 그러나 수입이 지출을 충당하지 못하여 향적(香積 승려의 식량)을 잇지 못하는 때도 있었고 바랑도 쓸쓸하기만 하였다. 그리하여 죽는 날에도 남긴 재물이 없이 향년 79세로 입적하였으니, 참으로 중생의 복전(福田)이 된 분이라고 하겠다
.
내 가 원통(元統) 계유년(1333, 충숙왕 복위 2)에 과거에 응시하러 경사(京師)에 와서 공의 별원(別院)인 보은(報恩)의 승방에 우거하였으므로 공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는 터이다. 그런데 지금 와 보니 공이 세상을 떠난 뒤로 벌써 해를 넘겼고 그 문도 역시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으므로 내가 개연(慨然)한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 그리고 불씨(佛氏)의 가르침을 배운다고 하는 자들이 오히려 세속의 사람들만도 못하게 위세를 부리며 산문(山門)을 강탈하는 일을 자행하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그런데 공의 고제(高弟)인 현인(玄印) 등의 문도가 이미 사원을 회복하여 다시 소유하고 나서 스승의 상사(喪事)에 대한 일이 늦어지게 된 것을 비통하게 생각하며 제대로 이루어 놓았다. 그리고 그의 뜻을 잘 계승하여 은혜를 갚으려고 할 뿐만이 아니요, 나아가 그의 덕행을 추모하여 무궁히 전하려고 하니, 이는 당연히 명을 지어야 할 일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

위대하도다 성스러운 원나라여 / 皇矣聖元

한당의 시대를 멀리 뛰어넘었나니 / 軼漢跨唐
고대 제왕의 법도를 본받은 위에 / 憲章古帝
공왕의 교설을 숭앙하고 신봉했네 / 崇信空王
휘황하도다 보배로운 사찰이여 / 煌煌寶刹
무종황제 때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 創自武皇
인종황제 때에 공사를 마쳤나니 / 迄于仁廟
필요한 물건들을 빠짐없이 갖췄다네 / 供具畢張
그때에 우리 원공이 있어 / 時維圓公
명을 받고서 법당을 열었나니 / 受命開堂
주미(尾)
를 휘두르면 꽃비가 내리고 /
揮花雨
옷에는 하늘의 향기가 배었다네 / 衣襲天香
공이 문도에게 타이르기를 / 公謂其徒
혹시라도 나태하거나 방탕하지 말라 / 無或怠荒
백성의 힘을 모두 기울여서 / 竭民之力
이 도량을 지었느니라 / 爲此道場
우리 곳간엔 곡식이 이어지지만 / 我廩繼粟
백성들은 조강만 지겹게 먹느니라 / 彼厭糟糠
너희들이 그저 먹고 배만 채운다면 / 汝如徒餔
천치 아니면 광인이리라 하니 / 非癡則狂
공의 문도가 옷깃을 여미고서 / 其徒斂

감히 힘쓰지 않음이 없었더라 / 罔敢不
이와 같이 대숭은복원사에서 / 崇恩福元
거의 삼십 성상을 주지하다가 / 幾三十霜
홀연히 세상에 염증을 내어 / 忽焉厭世
인생의 무상함을 보여 주었네 / 示之無常
수많은 공의 고제들 중에 / 詵詵高弟
눈썹
이 가장 뛰어나서 / 白眉最良
산문이 의지할 수 있게 되었고 / 山門有託
종파가 성대하게 부흥했다네 / 宗派相當
저 혼미하여 무지한 자들이 / 彼昏不知
그만 감히 사원을 강탈했으나 / 乃敢

천도는 갚아 주기를 좋아하는지라 / 天道好還
그들에게 재앙을 내렸나니 / 降之咎殃
청전
이 예전대로 회복되면서 / 靑氈復舊
비단 장삼이 더욱 빛을 발했어라 / 錦袍增光
사리탑을 높이 세우고 / 屹爾浮圖
깊숙이 봉안한 원공의 유골 / 有密其藏
면세도 흠 없이 완전무결하게 / 面勢孔堅
신주의 남쪽에 자리하였다네 / 神州之陽
사람들은 말하기를 석가의 가르침은 / 人言釋敎
삼강오륜을 뛰어넘었다고 하는데 / 超出三綱
누가 생각했으리오 원공의 문도가 / 孰謂其徒
죽은 스승을 부모처럼 잊지 못할 줄을 / 克存其亡
이미 그 은덕에 보답을 하고 / 旣報其德
다시 그 향기를 백세에 전했나니 / 又流其芳
후사가 된 모든 사람들이여 / 凡百後嗣
이 명문을 한번 볼지어다 / 視此銘章

 

[주D-001]유가종(瑜伽宗) : 법 상종(法相宗)의 별칭이다. 인도의 대승불교 중에서 중관(中觀) 계통의 학파와 대립되는 종파로, 만법유식(萬法唯識)의 교리를 담고 있는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을 소의경전(所依經傳)으로 한다. 중국에 전해진 뒤로 점차 분파되어 지론종(地論宗)ㆍ섭론종(攝論宗)ㆍ법상종(法相宗)으로 나뉘었는데, 그중에서 법상종이 가장 성행하여 유가종의 대표가 되었다.
[주D-002]그중에는 …… 있었습니다 :
제자들이 돌아간 뒤에 자공(子貢)이 혼자 3년 동안 다시 여묘(廬墓)를 지킨 것을 말하는데,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이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주D-003]옛날에 …… 것이니 :
석 가모니가 45년간 설법하며 중생을 교화하다가, 중천축(中天竺) 구시나(拘尸那) ()의 발제하(跋提河) 강변 사라쌍수(沙羅雙樹) 사이에서 하루 동안 《열반경(涅槃經)》을 설한 다음에, 머리는 북쪽으로 얼굴은 서쪽으로 향하고 오른쪽 옆구리를 땅에 대고 누워서 입멸했다고 하는데, 이것을 화신불(化身佛) 8()의 하나인 열반상(涅槃相)이라고 한다. 이에 제자들이 전륜성왕(轉輪聖王)에 준하는 다비식(茶毘式)을 거행하려고 황금 관에 안치하고서 전단(栴檀)을 쌓은 뒤에 향촉을 던져 태우려고 하였으나 불이 붙지 않다가, 포교하기 위해 기사굴산(耆闍崛山)에 가 있던 수제자 가섭(迦葉) 500제자와 함께 7일 뒤에 돌아오자, 여래(如來)가 두 발을 황금 관 속에서 꺼내어 보여 준 뒤에 스스로 화광삼매(火光三昧)에 들었다고 한다. 《長阿含經 卷4》《四敎義卷7
[주D-004]복전(福田) :
봄에 씨 뿌리고 가꾸면 가을에 수확할 수 있는 것처럼, 공양(供養)하고 보시(布施)하며 선근(善根)을 심으면 그 보답으로 복을 받는다는 뜻의 불교 용어이다.
[주D-005]주미(尾) :
고라니의 꼬리털을 매단 불자(拂子)를 가리킨다. 위진(魏晉) 시대에 사람들이 항상 손에 쥐고서 청담(淸談)을 논하였으며, 나중에는 불교의 승려들도 설법할 때에 많이 애용하였다. 《世說新語 容止》
[주D-006] 눈썹 :
형 제나 제자들 중에서 걸출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삼국 시대 촉()나라 마량(馬良)이 다섯 형제 가운데에서 가장 뛰어난 면모를 보였는데, 그의 눈썹에 흰 털이 있었으므로 백미(白眉)라고 불렀다는 고사에서 나온 것이다. 《三國志 卷39 蜀書 馬良傳》
[주D-007]청전(靑氈) :
선 대(先代)로부터 전해진 귀한 유물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스승이 주지(主持)하던 사원을 되찾은 것을 말한다. ()나라 왕헌지(王獻之)가 누워 있는 방에 도둑이 들어와서 물건을 모조리 훔쳐 가려 할 적에, 그가도둑아, 푸른 모포는 우리 집안의 유물이니, 그것만은 놓고 가는 것이 좋겠다.〔偸兒 靑氈我家舊物 可特置之〕라고 하자, 도둑이 질겁하고 도망쳤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晉書 卷80 王羲之傳 王獻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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