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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공(韓國公) 정공(鄭公) 사당(祠堂)의 기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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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 우(廟宇)를 세우고 제사를 받드는 제도는 오랜 옛날부터 있었다. 자기 어버이를 섬길 때에는 집에서 묘우를 세워 제사를 받들었고, 성현이나 공덕이 있는 자를 섬길 때에는 나라 혹은 주려(州閭)에서 묘우를 세워 제사를 받들었는데, 그 제도는 지금도 상고할 수가 있다. 한(漢)나라 이후로는 이 예가 시대에 따라 변하면서, 영정으로 신주를 대체하는 경우도 생겼고, 천복(薦福)을 하고서 일상적인 제사는 폐지하는 경우도 생겼다. 이렇게 해서 집에서 제사를 모시는 묘우 이외에 또 다른 사당이 있게 되었다. 그렇긴 하지만 자기의 근본을 잊지 않고 조상의 은혜에 보답하여 정성껏 제사를 지내려는 마음은 똑같았다. 그런데 그 공덕에도 대소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보답할 때에도 후박(厚薄)의 차이가 있게 되고 제사를 지낼 때에도 구근(久近)의 차이가 있게 된 것이다.
전(前) 휘정사(徽政使) 정공이 어버이를 위하여 사당을 세울 적에 그의 향인인 이곡(李穀)에게 말하기를 “내가 아동기에 어버이 곁을 떠났는데 지금 벌써 노년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어버이도 지금 모두 세상을 떠나셨으니, 반포(反哺)를 하지 못한 심정과 부미(負米)를 하지 못한 한스러움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그런 가운데에서도 불초한 이 자식이 천조(天朝)의 내신(內臣)의 반열에 끼어 관직이 높아지고 녹봉이 후해짐에 따라 삼대의 선조에게 추증하는 은혜가 구천(九泉)에까지 미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법당 옆에 사당을 세워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올림으로써 어버이의 명복을 비는 한편으로 오래도록 제향을 받으실 수 있게끔 하고, 또 역대 황제들의 은명(恩命)을 비석에 새겨 묘우 아래에 세우고 싶다. 그렇게 하면 상의 은사(恩賜)를 현양하면서 어버이에게 효도하지 못한 심정을 위로받을 수 있을 듯하니, 그대는 나를 위해 글을 지어 주기 바란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한국공(韓國公)의 사당이 세워지게 된 이유요, 내가 기문을 짓게 된 이유이다.
상고해 보건대, 《예기(禮記)》에 “부친이 사이고 아들이 대부일 때에는 사의 예법으로 장례를 행하고 대부의 예법으로 제사를 행한다.〔父爲士 子爲大夫 葬以士 祭以大夫〕”라고 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성조(聖朝)에서는 사해를 인으로 어루만지고 천하를 효로 다스리면서 인심을 교양하고 사기를 진작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내외의 신하를 막론하고 붉은색 관복을 입은 자 이상에게는 모두 그 부모를 봉증(封贈)할 수 있게 하되 한 등급 한 등급 올라가서 윗대의 조상들에게 추증하게 하는 등 그 법도를 빠짐없이 갖추었다. 하지만 보궤불칙(簠簋不飭)이나 유박불수(帷薄不修)의 죄를 범한 경우에는 여기에 끼이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는 부모나 처실(妻室)에게 그러한 일이 있을 때에도 모두 그와 같이 하였다. 아, 관원들에게 은혜를 널리 적용하게 한 위에 다시 그들의 행실을 따지게 하였으니, 이는 이른바 “덕으로 인도하고 예로 귀일시킨다.”고 하는 것으로서, 권선징악의 뜻이 나란히 행해지며 어긋나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내가 일찍이 살펴보건대, 선을 쌓고 악을 쌓은 데 따라 경사와 재앙이 이르곤 하였는데, 만약 그 사람 자신에게 이르지 않으면 반드시 그 자손에게 이르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혹 가업을 계승하여 대대로 봉록을 향유하고 은총을 빌려 위세를 부리면서 밖으로 나갈 때에는 천기(千騎)가 옹위하게 하고 안으로 들어와서는 만전(萬錢)의 식사를 하다가도 화기(禍機)가 한번 발동하면 후손에게까지 재앙이 미치는 경우도 있고, 이와 반대로 백옥(白屋)의 아래에서 몸을 일으켜 청운(靑雲)의 위에 올라 죽백(竹帛)에 이름을 전하고 귀신에게까지 효도를 하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 그 이유를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이는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지 금 살펴보건대, 한국공의 선조가 쌓은 공과 덕이 당시에는 드러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자손이 귀하게 되어 보답을 이와 같이 받게 되었으니, 이것도 어찌 공과 덕을 쌓아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더군다나 휘정공(徽政公)으로 말하면, 고인의 글을 읽고 장부의 뜻을 행하면서 자기 몸을 청렴하게 단속하고 공무를 공정하게 처리한 결과, 금달(禁闥)에서 상을 가까이 모시고 진신(搢紳)들을 아래로 내려다보게 되었으니, 입신양명(立身揚名)해서 부모님을 드러나게 한 것이 또한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한 국공의 휘는 인(仁)이요, 성은 정씨(鄭氏)이다. 고려 하동군(河東郡) 사람으로, 숭록대부(崇祿大夫) 요양등처행중서성 평장정사(遼陽等處行中書省平章政事) 주국(柱國)에 추증되고 한국공에 추봉(追封)되었다. 고(考) 휘 성량(性良)은 자선대부(資善大夫) 하남강북등처행중서성좌승 상호군(河南江北等處行中書省左丞上護軍)에 추증되고 영양군공에 추봉되었으며, 비(妣) 포씨(匏氏)는 영양군부인(榮陽郡夫人)에 추봉되었다. 조부 휘 공윤(公允)은 중봉대부(中奉大夫) 영북등처행중서성참지정사 상호군(嶺北等處行中書省參知政事上護軍)에 추증되고 영양군공(榮陽郡公)에 추봉되었으며, 비 최씨(崔氏)는 영양군부인에 추봉되었다. 한국공의 부인 이씨(李氏)는 한국태부인(韓國太夫人)에 봉해졌다. 아들은 5인이니, 장남 윤화(允和)는 관직이 정윤(正尹)에 이르렀고, 다음 윤기(允琦)는 관직이 호군(護軍)에 이르렀고, 다음 독만달(禿滿達)은 바로 휘정공이고, 다음 천좌(天佐)는 관직이 판내부시사(判內府寺事)에 이르렀고, 다음 모(某)는 벼슬하지 않았다. 딸은 3인이다. 손자와 손녀가 약간 명 있다.
이 에 앞서 대덕(大德) 경자년(1300, 충렬왕 26)에 휘정공이 태어난 지 11세 되던 해에 내시의 신분으로 충렬왕(忠烈王)을 따라가 입조하여 천자를 뵙고는 그대로 궐정(闕庭)에 머물러서 천자를 섬겼는데, 성종(成宗)이 그의 영오(穎悟)함을 사랑하였다. 임인년(1302)에 천자가 그를 태학에 입학시켜 공경의 자제들과 함께 글을 배우고 예법을 익히게 하였으며, 일단 대의(大意)를 통한 뒤에는 다시 인종(仁宗)의 잠저(潛邸)에서 일을 보게 하였다. 지대(至大) 기유년(1309, 충선왕 1)에 전보감승(典寶監丞)에 임명되고 봉훈대부(奉訓大夫)의 품계를 받았다. 얼마 뒤에 전서(典瑞)의 태감(太監)으로 옮겼으며, 감(監)에서 승진하여 원(院)이 되고 여섯 차례 옮긴 끝에 사(使)가 되었다. 그리고는 자선대부(資善大夫)에 가자(加資)되어 이용감(利用監)을 섭행하면서 금옥부(金玉府)를 감독하였으니, 인묘(仁廟)의 사랑과 지우를 받은 내신으로서 그보다 더한 자는 있지 않았다. 천력(天曆) 초기에 장패경(章佩卿)으로 옮겼다가 얼마 뒤에 전서사(典瑞使)로 복귀하였다. 다시 네 차례 옮겨 광록대부(光祿大夫) 휘정사(徽政使) 연경사(延慶使) 제조장알사사(提調掌謁司事)가 되었다.
공이 휘정사로 있을 적에 부지런히 현능(賢能)한 자를 추천하는 것으로 자기의 임무를 삼았으므로, 사론(士論)이 흡연히 공에게 귀의하였다. 나도 일찍이 공의 속관이 되어 공의 허여를 깊이 받고 공을 자세히 알게 되었으므로, 감히 공에 대해서 대략을 서술하게 되었다.
한국공은 79세의 나이로 원통(元統) 계유년(1333, 충숙왕 복위 2) 12월 12일에 집에서 서거하였으며, 그 이듬해에 상으로부터 봉작의 은혜가 내려졌다. 태부인(太夫人)은 봉작의 은혜를 받은 지 6년이 지난 지원(至元) 기묘년(1339) 7월 19일에 74세의 나이로 작고하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7년이 지나서 사당을 세웠으니, 때는 지정(至正) 5년 을유년(1345, 충목왕 1) 3월이었다.
[주D-001]반포(反哺)를 …… 있겠는가 : 어 버이가 살아 계실 적에 효도하지 못한 자식의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한 말이다. 반포는 까마귀 새끼가 다 크고 나서 자기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먹이는 것을 말한다. 예로부터 까마귀는 효조(孝鳥)로 알려져서 자오(慈烏)로 불리기도 하였다. 《本草綱目 慈烏》 부미(負米)는 쌀을 등에 지고 왔다는 말로, 공자(孔子)의 제자 자로(子路)의 효성에 관한 고사이다. 그가 옛날에 어버이를 모시고 있을 적에 집이 가난했기 때문에, 자기는 되는대로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도 어버이를 위해서는 백 리 바깥에서 쌀을 등에 지고 오곤 하였는데, 어버이가 돌아가시고 나서 높은 벼슬을 하여 솥을 늘어놓고 진수성찬을 맛보는 신분이 되었지만, 당시에 거친 음식을 먹으며 어버이를 위해 쌀을 지고 왔던 그때의 행복을 다시는 느낄 수 없게 되었다고 술회한 고사가 전한다. 《孔子家語 致思》
[주D-002]보궤불칙(簠簋不飭) : 보 궤는 서직(黍稷)과 도량(稻粱)을 담는 제기(祭器)이다. 옛날에 관원이 청렴하지 못하여 뇌물을 받는 등 탐오죄(貪汚罪)를 범했을 경우에, 제기를 정결하게 간수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그 죄를 직설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완곡하게 표현한 말이다. 《孔子家語五刑》
[주D-003]유박불수(帷薄不修) : 유박은 휘장을 치고 발을 늘어뜨리는 것으로 규문(閨門)을 상징한다. 그래서 관원의 가문에서 음란한 행위로 죄를 지었을 적에 이를 피해서 유박을 단속하지 못했다는 말로 대신하였다. 《新書 階級》
[주D-004]덕으로 …… 귀일시킨다 : 《논 어(論語)》 위정(爲政)에 “백성들을 법령으로 이끌고 형벌로 단속하면 백성들이 처벌을 면하려고만 하고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겠지만, 덕으로 인도하고 예로 단속하면 백성들이 부끄러움을 느껴서 더욱 선해질 것이다.〔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齊之以禮 有恥且格〕”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D-005]선을 …… 마련이었다 : 《주역》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선을 쌓은 집안에는 후손에게 반드시 경사가 있게 마련이고, 불선을 쌓은 집안에는 후손에게 반드시 재앙이 돌아오게 마련이다.〔積善之家 必有餘慶 積不善之家 必有餘殃〕”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6]밖으로 …… 하고 : 태 수(太守)나 주목(州牧)으로 부임하여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것을 가리킨다. 고악부(古樂府)인 맥상상(陌上桑)에, 나부(羅敷)라는 미녀가 한 성읍의 어른이 된 자기 남편을 자랑하면서 “동쪽으로 떠나가는 일천 기마병들, 우리 남편이 바로 그들의 앞자리에 앉아 있네.〔東方千餘騎 夫婿居上頭〕”라고 노래한 가사가 실려 있다.
[주D-007]안으로 …… 하다가도 : 자 제할 줄 모르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것을 말한다. 진 무제(晉武帝) 때의 태위(太尉) 하증(何曾)이 호사하기를 좋아하여 궁실ㆍ거마ㆍ의복ㆍ음식 등을 왕보다도 사치스럽게 하였는데, 특히 끼니때마다 만전(萬錢)의 값이 나가는 음식상을 받았는데도 “젓가락으로 집어 먹을 것이 없다.〔無下箸處〕”고 투정을 부렸다는 고사가 전한다. 《晉書 卷33 何曾傳》
[주D-008]백옥(白屋)의 …… 있는데 : 미천한 서민 출신이 출세하여 고관대작이 되는 것을 말한다. 백옥은 가난한 백성들이 사는 오두막집을 가리키고, 청운(靑雲)은 귀한 신분에 오르는 것을 가리킨다. 또 죽백(竹帛)은 역사책을, 귀신은 세상을 떠난 선조들을 지칭한다.
[주D-009]입신양명(立身揚名)해서 …… 것 : 《효 경(孝經)》 개종명의장(開宗明義章)에 “이 몸은 모두 부모님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다치지 않게 하는 것이 효의 시작이요, 자신의 몸을 바르게 세우고 바른 도를 행하여 이름을 후세에 드날림으로써 부모님을 드러나게 해 드리는 것이 효의 마지막이다.〔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라는 말이 나온다.
대도(大都) 천태법왕사(天台法王寺)의 기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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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정 3년 계미년(1343, 충혜왕 복위 4) 봄에 법왕사(法王寺)가 낙성되자, 영록대부(榮祿大夫) 태의원사(太醫院使) 조공 분(趙公芬)이 나에게 기문을 요청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고려 영춘(永春) 사람이다. 지난 지원 계사년(1293, 충렬왕 19)에 선발되어 내시(內侍)에 충원된 뒤로부터 액정(掖庭)에서 근무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삼가 살펴보건대, 세조황제(世祖皇帝)가 신무(神武)하여 불살(不殺)의 덕을 펼치면서 천하를 제대로 통일하였고, 그 뒤로 또 열성이 제위를 계승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켰는데, 이는 모두가 인애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그래서 불씨의 자비의 가르침에 신묘하게 계합된 가운데 이를 숭앙하고 이를 신봉하였으므로 내가 삼가 감격하며 앙모하였다. 또 삼가 생각해 보건대, 내가 외람되게 미천한 신분으로 과분하게 상의 은혜를 받았는데, 지금 이미 늙은 처지에서 보답하려 해도 보답할 길이 없기에, 삼가 부도(浮圖)의 법을 준행하며 가람을 개창해서 위로 상을 위해 축수하고 열성의 복을 기원하는 한편 아래로 생령의 끝없는 이익을 축원하려고 한다. 그래서 이에 대한 전말을 기록하여 오래 전해지도록 도모하려 하는데, 이 일을 그대가 맡아 주었으면 한다.”라고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신하된 자의 도리는 자기 몸을 바치고 있는 힘을 다해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극진히 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성을 다해 임금을 축수하려는 마음과 같은 것은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심정에서 우러나온 점이 있다고도 할 것이요, 또한 자기가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일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는 부처에게 귀의하는 것과 같은 일을 할 수밖에는 없으니, 이것이 바로 절이 생기게 된 이유라고 할 것이다. 상고해 보건대, 불씨의 법은 동한(東漢) 때부터 나왔는데, 삼한의 땅은 해 뜨는 동쪽 바닷가에 치우쳐 있는 만큼 서역의 종교가 늦게 전해졌어야 할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 살펴보면 산과 강 사이에 있는 축범(竺梵 불교) 의 유적이 중국보다도 앞서서 만들어진 경우가 있는 것이 왕왕 눈에 띄기도 한다. 그리고 삼한의 습속을 보면, 임금과 어버이를 섬기며 생전에 봉양하고 사후에 장례 지내는 일 등에 있어서 한결같이 불교의 방식을 따르고 있다. 그래서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이 있기라도 하면 많은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기고 흉을 보면서 충효(忠孝)에 미진한 점이 있다고 말하곤 한다. 아, 오래 전부터 이루어진 이와 같은 습속이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유래되었는지 그 근본을 알 수 없는 점이 있다. 지금 비록 천자의 도성에도 고구려사(高句驪寺)라고 하는 사찰이 곳곳에 있으니 공이 이 일에 급급해하는 것도 당연하다.
이에 앞서 유천 부사(有泉府使) 이공 삼진(李公三眞)이 안부리(安富里)의 저택을 희사하여 불사(佛祠)로 만들고 그 이름을 법왕사라고 한 뒤에, 동향의 승려인 자신(孜信)을 불러와서 주지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 뒤에 그 절이 권세가의 손으로 들어가서 말 타고 활 쏘는 연습장이 되었으므로, 이공이 그 값을 받아 내어 다른 곳에 별도로 사원을 경영하려고 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이미 늙고 병든 처지에서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던 차에, 조공(趙公)이 사원을 경영하려는 뜻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즉시 법왕사를 조공에게 맡기면서 자기를 단월(檀越 시주(施主))로 삼게 하였다. 이에 조공이 날마다 권세가의 집에 찾아가서 호소한 끝에 그 값의 반절을 받아 내어 2만 5000관(貫)에 상당하는 저폐(楮幣)를 만들고, 여기에 자기가 시주한 1만 5000관과 전서사(典瑞使) 신공 당주(申公當住)가 부조한 7000관을 합쳐서, 금성방(金城坊)에 땅을 매입한 뒤에 자신(孜信)에게 맡겨 그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공이 세상을 떠나자, 조공이 부인 최씨(崔氏)와 함께 또 복식과 기명 등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것들을 모두 내다 팔아서, 우선 삼면에 낭무(廊廡)를 지어 사람들에게 임대하였으며, 다음에는 그 가운데에 전각을 세워 부처를 봉안하였다. 자신이 또 입적하자, 경진년(1340, 충혜왕 복위 1) 2월에 천태종(天台宗)의 승려 일인(一印)을 초빙하여 주석(主席 주지(主持))하게 하였다. 그리고는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과 문수보살(文殊菩薩)ㆍ보현보살(普賢菩薩) 및 천태지자대사(天台智者大師)의 소상(塑像)을 만들어 금빛으로 입히고, 이른바 일심삼관(一心三觀)의 교설을 펼치게 하였다. 그 일이 위에 알려지자 중궁(中宮)이 저지(楮紙 저폐(楮幣)) 1만 관을 하사하여 그 비용에 보태게 하였다.
그 이듬해에 동쪽과 서쪽에 법당을 지었으며, 다시 남쪽에 낭무를 짓되 북쪽으로 꺾어 법당과 연결되게 해서 승도의 거처로 삼았다. 그리고 낭무의 중앙에 문을 만들어 삼문(三門)으로 삼고, 그 좌우에 전각을 날개처럼 배치해서 빈객을 접대하는 곳으로 삼았다. 또 그 이듬해에는 전각 뒤에 장실(丈室)을 짓고, 그 동남쪽에 방을 만들어 시자(侍者)가 거하게 하였으며, 다시 그 남쪽에 향적(香積 승려의 음식) 을 요리하는 주방과 자저(資儲)를 보관하는 곳간을 마련했다. 이 공사에 소요된 저폐는 전(錢)으로 환산해서 14만 관이 넘었으며, 세워진 건물은 80여 칸에 이르렀는데, 성대하면서도 사치스럽게 하지 않고 검소하면서도 누추하게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불상을 엄숙하게 봉안하고 단청을 현란하게 칠한 가운데, 위의(威儀)와 공구(供具) 등 사원에 비치해야 할 것들은 어느 것 하나도 갖추지 않은 것이 없게 하였다.
그해 10월에 황제가 서쪽 대내(大內)에 있을 적에 어떤 이가 황금으로 글자를 쓴 《연경(蓮經)》을 바치자 이 사원에 소장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중궁이 이어서 향과 폐백을 보내 《법화경(法華經)》을 독송하는 비용에 충당하게 하였는데, 그 이듬해에도 역시 그렇게 하였다. 이는 대개 《법화경》의 교설을 숭상하고 중시했기 때문이요, 이와 함께 상에게 보답하려는 공의 정성을 가상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공사가 한창 진행될 당시에 일인 스님이 말하기를 “우리 승도가 이미 불력(佛力)에 의지해서 사람들에게 의식을 해결하고 있는데, 단월(檀越)이 시주한 것을 우리 재산으로 그대로 지니고 있으면 되겠는가.”라고 하고는, 바랑에 모아 두었던 5000관을 모조리 내놓았다. 그리고 동지민장총관부사(同知民匠摠管府事) 박쇄노올대(朴瑣魯兀大)와 대부 태감(大府太監) 주완택첩목아(朱完澤帖木兒)가 각각 2000관씩 시주하여 장명등(長明燈)의 자금으로 쓰게 하였고, 향인 중에 선을 쌓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춘추로 모금하여 대경(大經)을 청송(聽誦)하는 비용으로 충당하게 하면서 이를 매년 정기적으로 행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리하여 갑술년(1334, 충숙왕 복위 3)에 공사를 시작해서 계미년(1343, 충혜왕 복위 4)에 공사를 마칠 수 있었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10년 동안 역시 부지런히 힘쓴 결과라고 하겠다.
내 가 일찍이 탑묘(塔廟)에 대해서 관찰한 바에 의하면, 탑묘가 어렵게 세워졌다가도 쉽게 무너지곤 하였다. 아무리 사는 곳을 크게 넓히고 먹는 것을 풍족하게 해 놓았다고 하더라도, 후인들은 이를 생업으로 삼아 자기의 이익만 챙기기 일쑤였다. 그래서 이익이 없어지면 사원도 따라서 망하곤 하였는데, 사람들은 그런 줄을 알면서도 서로 다투어 사원을 세우는 일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러니 “나는 나의 마음을 다 기울였고 나의 힘을 다 쏟았다. 나중에 어떻게 되든 그것은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니, 나의 일은 이것으로 끝이다.”라고만 말하지 말 일이다. 그러고 보면 공이 이 사원을 일단 이루어 놓고 나서 다시 그 일을 돌에 새기려고 하는 것도 뜻한 바가 있다고 할 것이니, 뒤에 이 사원에 거하는 자들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사원은 고(故) 감찰어사(監察御史) 관음노(觀音奴)가 살던 곳으로 땅의 면적이 사방 9묘(畝)에 달한다. 그런데 공사를 시작할 적에 옛날 가옥 아래에서 돌조각 하나를 우연히 발견하였는데, 거기에 법왕사(法王寺)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으므로, 공이 숙세(宿世)의 인연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감격한 나머지 법왕사라고 편액을 내걸었다고 한다.
[주D-001]일심삼관(一心三觀) : 하 나의 마음으로 일체 존재를 대하는 세 가지의 관법(觀法)이라는 뜻으로, 천태종(天台宗)의 기본 교의(敎義)의 하나인데, 원융삼관(圓融三觀)ㆍ불가사의삼관(不可思議三觀)ㆍ불차제삼관(不次第三觀)이라고도 한다. 삼관은 공관(空觀)ㆍ가관(假觀)ㆍ중관(中觀)의 삼제(三諦)를 말하는데, 《마하지관(摩訶止觀)》 권5에 그 내용이 상세히 나온다. 《마하지관》은 천태종을 개종한 천태대사(天台大師) 지의(智顗)가 강술하고 제자 관정(灌頂)이 필록한 것으로 천태종의 가장 중요한 교리서로 꼽힌다. 지의는 지자대사(智者大師)로 더욱 많이 알려져 있다.
[주D-002]삼문(三門) : 사원의 대문(大門)의 별칭이다. 실제로 문은 하나이지만, 삼해탈문(三解脫門)인 공문(空門)ㆍ무상문(無相門)ㆍ무작문(無作門)으로 들어간다는 뜻을 취해서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釋氏要覽 住處》
[주D-003]연경(蓮經) :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준말로, 천태종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이다. 보통 《법화경(法華經)》이라고 부른다.
[주D-004]장명등(長明燈) : 밤낮으로 등불을 켜 놓고 꺼지지 않게 하면서 부처에게 복을 비는 것을 말한다.
대원(大元) 증(贈) 봉훈대부(奉訓大夫) 요양등처행중서성 좌우사낭중(遼陽等處行中書省左右司郞中) 비기위(飛騎尉) 요양현군(遼陽縣君) 조공(趙公) 묘영(墓塋)의 기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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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정(至正) 4년(1344, 충목왕 즉위년) 4월 15일에 중정원사(中政院使) 조공이 그의 아우인 이용소감(利用少監) 완택(完澤)을 나에게 보내 말하기를 “나는 무종(武宗)의 시대부터 조정에 들어와 숙위(宿衛)하였다. 그리고는 이윽고 명황(明皇 명종(明宗)) 을 따라 삭방(朔方)에 가게 되었는데, 거리가 워낙 멀리 떨어져 있는 관계로 어버이에 대한 안부조차 오래도록 듣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호가(扈駕)하여 남쪽으로 돌아올 때쯤 되어서는 선인의 묘소에 나무가 벌써 한 아름이나 될 정도였지만, 여전히 내시의 직책에 얽매이고 상의 명에 억눌린 나머지 있는 힘을 다해 찾아가서 성묘할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에, 그저 동쪽 하늘을 쳐다보면서 지금까지 가슴 아프게 슬퍼하고 있을 따름이다. 지금 나의 아우로 하여금 귀국해서 조상에 대한 제사를 정성껏 지내게 하고, 비석을 세워 선영의 일을 기록하게 해서 나의 뜻을 밝히려 하니, 그대가 이 기문을 써 주면 좋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내가 그럴 능력이 없다고 사양하고는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다.
“사람의 자식이 되어 어버이를 섬기면서 도리에 합당하게 하고 마음을 극진히 하면 이것을 효라고 하는 것이다. 대개 양생송사(養生送死)하는 것은 누구나 당연히 해야 할 일이요, 신종추원(愼終追遠)하는 것은 덕이 후한 일에 속한다고 할 것이요, 입신양명(立身揚名)해서 부모를 드러나게 하는 것은 효를 마무리하는 일이라고 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중정공(中政公)이 어버이를 섬기는 것은 효의 도를 얻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가령 양생송사하는 일과 같은 것은 형제자매라도 모두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공으로 말하면 어린 나이에 어버이가 계신 향리를 멀리 떠나 황도(皇都)에서 발걸음을 높이 하고 황궁에서 천자를 가까이 모시다가, 이윽고 선제(先帝)를 위해 몸을 바쳐 만리 길에 온갖 고생을 다 겪으며 험난한 10년 세월을 한결같이 일편단심으로 절조를 지켜서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금상(今上)이 황제의 대통을 계승하고 나서 선제의 뜻을 추념하여 더욱 풍성하게 대우한 결과, 관직이 1품에 오르고 은혜가 구천에까지 미치게 되었으니, 형제자매가 구구하게 구체(口體)의 봉양(奉養)으로 효도를 행한 것과 비교해 본다면, 어떠하다고 하겠는가.”
낭 중공(郞中公) 휘 공탁(公卓)은 고려 순창군(淳昌郡) 사람인데, 뒤에 인아(姻婭)를 따라 수원부(水原府) 용성현(龍城縣)으로 옮겨 살았다. 나이 64세가 된 연우(延祐) 기미년(1319, 충숙왕 6)에 집에서 작고하여 그 지역에 안장하였다. 부인 김씨(金氏)는 요양현군(遼陽縣君)에 봉해졌는데, 토속(土俗) 음양가의 법도에 따라서 별도로 장사 지냈다.
장남 홀도불화(忽都不花)는 자선고 제점(資善庫提點)이요 본국의 첨의평리(僉議評理)이다. 다음은 중정공(中政公)으로 이름이 백안불화(伯顔不花)이니, 대부 태경(大府太卿)을 거쳐 다섯 차례 옮긴 끝에 영록대부(榮祿大夫)에 오르고 본국의 순창부원군(淳昌府院君)이 되었다. 다음 소감(少監)은 승휘시 승(承徽寺丞)을 거쳐 세 차례 옮긴 끝에 이용감(利用監)이 되었고 본국의 첨의평리가 되었다. 장녀는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김직방(金直方)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대호군(大護軍) 장수(長守)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밀직사(密直使) 박인수(朴仁守)에게 출가하였다.
아, 선과 악에 따른 보응은 그림자나 메아리보다도 빠른 것이다. 낭중공의 선세(先世)는 모두 은거하고 벼슬하지 않았다. 중정공의 충효가 이처럼 지극하고 부귀를 이처럼 한껏 누리게 된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묘소는 현의 북쪽 고성산(古城山) 기슭에 있는데, 산의 주위가 7, 8리에 이른다. 그 안에서 나무하고 풀 베는 사람들과 그 옆에서 밭 갈고 누에 치는 사람들이 한번 이 비석을 본다면,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운 공의 마음을 알고서 공경하는 마음이 구름이 피어나듯 저절로 일어날 것이다.
[주D-001]양생송사(養生送死) : 어 버이를 생전에 봉양하고 사후에 장사 지내는 것을 말한다. 《맹자(孟子)》 이루 하(離婁下)에 “살아 계실 때 봉양하는 것은 큰일에 해당한다고 할 수 없다. 오직 돌아가셨을 때 장례를 모시는 것이 큰일에 해당될 수 있다.〔養生者不足以當大事惟送死可以當大事〕”라는 말이 나오고, 《예기》 예운(禮運)에 “양생송사하는 일이야말로 귀신을 섬기는 큰일에 해당한다.〔所以養生送死 事鬼神之大端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2]신종추원(愼終追遠) : 부 모의 상을 당했을 때와 선조의 제사를 지낼 때 애통함과 경건함을 극진히 하며 예법에 맞게 행하는 것을 말한다. 종(終)은 부모의 죽음을 뜻하고, 원(遠)은 선조를 뜻하는데, 《논어》 학이(學而)에 “어버이 상을 당했을 때 신중하게 행하고 먼 조상님들을 정성껏 제사 지내면 백성들의 덕성이 한결 돈후하게 될 것이다.〔愼終追遠 民德歸厚矣〕”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3]입신양명(立身揚名)해서 …… 것 : 《효 경(孝經)》 개종명의장(開宗明義章)에 “이 몸은 모두 부모님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다치지 않게 하는 것이 효의 시작이요, 자신의 몸을 바르게 세우고 바른 도를 행하여 이름을 후세에 드날림으로써 부모님을 드러나게 해 드리는 것이 효의 마지막이다.〔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4]구체(口體)의 봉양(奉養) : 어버이의 뜻을 받들어 봉양하는 양지(養志)의 효도와 상대되는 말로, 의식을 풍족하게 하는 등 육신만을 위해서 봉양하는 것을 말하는데,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이에 대한 내용이 자세히 나온다.
대도(大都) 곡적산(穀積山)에 새로 지은 나한(羅漢) 석실(石室)의 기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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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정(至正) 갑신년(1344, 충목왕 즉위년) 겨울에 대부 태감(大府太監) 주완자첩목아(朱完者帖木兒)가 서산(西山)을 유람하다가 석실을 방문했다. 그 두 개의 동굴은 각각 동쪽과 서쪽에 위치하여 서로 마주 보고 있었는데 간격은 약 5장(丈)쯤 되었으며, 그 북쪽에는 단애(斷崖)가 벽처럼 서 있었다. 주군(朱君)이 그곳에 거하고 있는 승려 묘굉(妙宏)에게 말하기를 “우주가 생길 때부터 이 동굴도 있었을 것이니, 이는 이른바 ‘하늘이 만들어 놓고 땅이 감추어 두었다가 진짜 임자에게 주었다.’고 하는 그런 곳일 것이다. 만약 돌로 불상을 만들어 북쪽 단애에 안치하고서, 두 석실에 거하는 승려들로 하여금 참배하게 하며 석실과 함께 서로 짝이 되어 영구히 전하게 한다면, 불후(不朽)한 공이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즉시 솜씨 좋은 장인들을 모집하여 백석(白石)을 채취해 석가세존과 좌우 보처(補處)의 상을 만들게 한 뒤에 남쪽으로 얼굴을 향하고 중앙에 위치하게끔 하였으며, 16대아라한(大阿羅漢)을 차례로 나누어 배열하게 하였다.
그 이듬해 봄에 감수로총관부(監隨路摠管府) 김정주(金鼎住)가 이것을 보고는 말하기를 “제자인 승려들은 방 안에 거처하고 그들의 스승은 밖에 있게 해서야 어찌 말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김군이 다시 묘굉과 상의하여 그 단애를 뚫고 방을 만들어 봉안하게 하였는데, 방장(方丈)의 형태로 만들어 불상을 가운데에 놓고 또 그 앞에 지붕을 이어 달아서 풍우를 피하게 하였다. 그리고 단청을 칠하여 장엄하게 장식하고, 향불을 피워 올려 첨앙하고 예배하게 하니, 흡사 구담 화상(瞿曇和尙)이 기사굴산(耆闍崛山)에 다시 출현한 것 같았다. 그러고 나서 얼마 뒤에 두 군(君)이 나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내 가 일찍이 보건대, 불상을 만드는 자들이 대부분 황금과 동철로 형체를 만들고 거기에 주옥으로 장식하기 때문에 이를 지키는 자가 혹 태만하면 번번이 남에게 도둑을 맞거나 훼손당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재력이 부족할 경우에는 흙이나 나무로 형체를 만드는데, 흙으로 빚고 나무에 새기다 보면 쉽게 망가져서 설만(褻慢)하게 되는 혐의가 있었다. 그러니 견중(堅重)하고 간질(簡質)한 석상으로 만들어서 후환이 없게 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내가 또 듣건대, 불자들은 “이 세계도 이루어지고 무너지는〔成壞〕 일이 있는데, 그동안의 시간을 겁(劫)이 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대저 천지가 개벽된 뒤로 몇 천만 년이 지나서 석씨(釋氏)가 태어났고, 석씨가 죽은 뒤로 지금 수천 년이 되어 가는데도 세계는 끄떡없이 그대로 있으니, 앞으로 또 몇 천만 년이 지나야 이 세계가 무너지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이 불상과 이 석실은 당연히 이 산과 서로 시종을 같이할 것이요, 이 산은 또 이 세계와 함께 성괴(成壞)를 같이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고 보면 두 군(君)의 공이 그야말로 불후하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우선 그 일을 서술하여 연월을 기록해 두기로 하였다.
[주D-001]하늘이 …… 주었다 : 한유(韓愈)의 연희정기(燕喜亭記)에 “이곳은 대개 하늘이 만들어 놓고 땅이 감추어 두었다가 진짜 임자에게 준 것이다.〔凡天作而地藏之 以遺其人乎〕”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2]좌우 보처(補處) : 보처는 일생보처(一生補處)의 준말로, 내생에 세간에서 성불하는 보살을 뜻하는데, 석가모니불의 좌우 보처는 각각 지혜와 자비를 상징하는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가리킨다.
[주D-003]16대아라한(大阿羅漢) : 부 처의 명을 받들어 세간에 영주(永住)하면서 정법(正法)을 수호하는 임무를 맡는다는 16인의 아라한을 말한다. 아라한은 범어(梵語) arhat의 음역으로, 세간의 대공양(大供養)을 받을 만한 성자라는 뜻이다. 대승(大乘)과 소승(小乘)을 막론하고 불교 최고의 과위(果位)를 얻은 자를 말하는데, 줄여서 나한(羅漢)이라고 하고, 의역해서 응진(應眞)이라고 한다. 불경이 한역(漢譯)된 이래로 대개 선종(禪宗) 사찰에서 신선의 모습으로 그 상을 조성하였으며, 이 16나한에 달마다라 존자(達磨多羅尊者)와 포대 화상(布袋和尙) 혹은 강룡(降龍)ㆍ복호(伏虎) 두 존자를 합쳐서 18나한의 상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주D-004]구담 화상(瞿曇和尙) : 석가모니(釋迦牟尼)를 지칭한 말이다. 구담은 범어 Gautama의 음역으로 석가모니의 성씨이다.
[주D-005]기사굴산(耆闍崛山) : 중인도(中印度) 마갈다국(摩羯陀國)의 수도인 왕사성(王舍城) 동북쪽에 있는 산으로, 영취산(靈鷲山) 혹은 영산(靈山)으로 의역되는데, 불타가 설법한 장소로 유명하다.
[주D-006]겁(劫) : 범어 kalpa의 음역인 겁파(劫簸)의 약칭으로, 천지가 한 번 생겼다가 없어지는 동안의 한없이 멀고 긴 시간을 뜻하는 불교 용어이다.
허정당(虛淨堂)의 기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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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암(順菴) 삼장공(三藏公)이 거처하는 곳에 허정(虛淨)이라는 편액을 내걸었다. 어떤 객이 의아하게 생각하여 묻기를,
“공 이 비록 삭발을 하였다고는 하나 의관(衣冠)으로서 부귀를 누리던 습기(習氣)가 남아 있고, 공이 비록 명예를 피한다고는 하나 국조에서 포숭(褒崇)한 명호(名號)를 지니고 있다. 절 문을 나서면 궁중의 남다른 보살핌을 받으면서 경상(卿相) 등 고관들과 교분을 나누고, 절 문을 들어서면 유석(儒釋) 등의 빈우(賓友)와 환담을 나눈다. 음식은 풍성하고 정결함은 물론이요, 거처는 청랑하고 그윽하기만 하다. 그래서 간혹 참선하고 송경(誦經)하는 여가에 향을 피우고 차를 달이기도 하며, 좌우에 도서를 쌓아 놓고 고금의 일을 헤아려 보다가, 흥치가 일어나면 글자를 말〔斗〕처럼 크게 쓰기도 하고 종이 가득 시를 짓기도 한다. 그리고 예모(禮貌)를 차리고 담소할 때에는 인정에 맞도록 노력하여 화기가 훈훈하게 감돌기 때문에 모두 가슴 가득 뭔가 얻은 것이 있는 듯 충만한 느낌을 가지게 하며, 술 마시기 좋아하는 객이 있으면 술로 취하게 하기를 여산(廬山)의 고사(故事)처럼 하였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부귀를 누리며 호사한다고 일컬어지는 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것이니, 그렇다면 허정이라고 이름 지은 뜻이 어디에 있다고 하겠는가.”
하였으나, 공은 웃기만 하고 응대하지 않았다. 이에 공과 교유하는 가정(稼亭) 이자(李子)가 옆에서 다음과 같이 대꾸하였다.
“그 렇게 이름 붙인 뜻을 객이 어떻게 알겠는가. 대저 허(虛)라고 하는 것은 실(實)과 상대가 되고, 정(淨)이라고 하는 것은 예(穢)가 변한 것인데, 어떤 사물이든지 그 이치를 보면, 실에서 허로 가지 않는 것이 없고, 예에서 정으로 가지 않는 것이 없다. 인사를 가지고 말한다면 군신과 부자가 윤리의 실이고, 거처와 복식이 생양(生養)의 실이라고 할 것이요, 이것을 가까이 몸에서 취한다면, 형기의 실은 신체와 발부(髮膚)가 바로 그것이고, 정욕의 실은 성리(聲利)와 화색(貨色)이 바로 그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자기 하나의 사적인 일을 경영하노라면 갖가지 외물과 접촉하며 수작하게 되
자그마한 채마밭의 기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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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 사(京師)의 복전방(福田坊)에 가옥을 임대하였는데, 거기에 공한지(空閑地)가 있기에 이를 일구어서 자그마한 채마밭을 만들었다. 세로 2장(丈) 반, 가로는 그 3분의 1, 종횡으로 8, 9개의 고랑을 만들고는, 채소 몇 가지를 앞뒤로 때에 맞게 번갈아 심으니, 김치가 떨어져도 보충하기에 충분하였다.
첫해에는 비가 오고 볕이 나는 것이 제때에 맞았기 때문에, 아침에 떡잎이 돋고 저녁에 새잎이 나오면서 잎사귀는 윤기가 돌고 뿌리는 통통하게 살졌는데, 매일 캐어 먹어도 다하지 않았으므로 남는 것을 이웃 사람에게 나누어 주기까지 하였다. 2년째 되는 해에는 봄과 여름에 조금 가물어서 항아리로 물을 길어다 부어 주기를 마치 옥초(沃焦)처럼 하였지만, 씨를 뿌려도 싹이 트지 않고 싹이 터도 잎이 나오지 않고 잎이 나와도 넓게 펴지지 않았으며, 게다가 그것마저도 벌레가 거의 다 갉아 먹었으니, 뿌리나 줄기가 통통해지기를 감히 기대할 수나 있었겠는가.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장맛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가을 늦게야 개었는데, 흙탕물에 빠지고 진흙과 모래를 뒤집어쓰는가 하면 담장 아래에 있는 땅은 모두 담장의 흙이 무너지면서 덮어 버렸기 때문에, 지난해에 먹은 것과 비교하면 겨우 반절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3년째 되는 해에는 올 가뭄과 늦장마가 모두 심했으므로 채마밭에서 캐 먹은 것이 또 지난해의 반절의 반에 불과하였다.
내가 일찍이 나의 자그맣고 가까이 있는 채마밭을 가지고 천하의 규모가 크고 먼 곳에서 이루어지는 작황을 헤아려 추측해 보면서, 천하의 이익이 태반은 손상을 당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가을철에 과연 흉년이 들어 겨울철에 먹을 것이 떨어지자 하남(河南)과 하북(河北)의 많은 백성들이 유랑하며 옮겨 다녔고, 여기에 또 도적 떼가 출몰하였으므로 군대를 내보내 소탕하였으나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이듬해 봄이 되자 기민(飢民)이 경사에 구름처럼 모여들어 도성 안팎에서 울부짖으며 먹을 것을 구걸하였는데, 땅에 엎어지고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하는 자들이 서로 줄을 이었다.
이에 묘당이 노심초사하고 유사가 분주히 주선하여, 구제해 살릴 대책을 강구하며 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나라의 창고를 열어 진휼하고 죽을 쑤어서 먹이기까지 하였지만 죽는 자가 이미 절반을 넘었고, 흉년으로 인해 물가가 또 뛰어올라서 쌀 한 말 값이 8, 9천이나 나갔다.
그런데 지금 또 봄이 끝날 무렵부터 하지 때까지 비가 내리지 않고 있다. 그래서 나의 채마밭에 심은 채소를 보면 지난해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 지금부터라도 비가 와 줄지 어쩔지 모르겠다. 풍문으로 얻어 듣건대, 재상이 직접 사관(寺觀)에 가서 기우제를 지낸다고 하니, 반드시 비를 내리게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의 조그마한 이 채마밭을 가지고 헤아려 보면 역시 때가 이미 늦었다. 문을 나서지 않고도 천하의 일을 안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참으로 거짓이 아니다. 지금은 지정(至正) 을유년(1345, 충목왕 1) 5월 17일이다.
[주D-001]항아리로 …… 하였지만 : 상 황이 급박해서 잠시도 늦추지 않고 열심히 물을 대 주었다는 말이다. 《사기(史記)》 권46 전경중완세가(田敬仲完世家)에 “조나라가 제나라와 초나라의 울타리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는 치아에 입술이 있는 것과 같다. 입술이 없어지면 치아가 시릴 것이니, 오늘 조나라를 망하게 놔두면 내일은 제나라와 초나라가 환난을 당할 것이다. 따라서 새는 항아리의 물을 가지고 타들어 가는 가마솥에 부어 주는 것처럼 조나라를 급히 구해야만 할 것이다.〔且趙之於齊楚捍蔽也 猶齒之有脣也脣亡則齒寒 今日亡趙 明日患及齊楚 且救趙之務 宜若奉漏瓮沃焦釜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2]문을 …… 하였는데 : 《노자》 47장에 “문을 나서지 않고도 천하의 일을 알고, 창밖을 내다보지 않고도 하늘의 도를 볼 수 있다.〔不出戶知天下 不窺牖 見天道〕”라는 말이 나온다.
고려국 증(贈) 광정대부(匡靖大夫) 밀직사 상호군(密直使上護軍) 박공(朴公) 사당의 기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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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원(有元) 조열대부(朝列大夫) 동지대도로제색민장도총관부사(同知大都路諸色民匠都摠管府事) 박군 쇄노올대(朴君?魯兀大)가 그의 선인(先人)을 위하여 신복사중흥비(神福寺重興碑)를 세운 다음에, 다시 부모의 초상화를 그려 사당에 모시고 제사 지냄으로써 추모하는 정성을 보였다. 그런데 제사를 집에서 행하지 않고 반드시 이 사원에서 행하려고 하는 것은 대개 이 사원의 도움을 받아 명복을 무궁하게 빌려고 하기 때문이다.
박군이 나에게 말하기를 “일찍이 유자의 말을 들으니, ‘부모가 살아 계실 적에 예로써 섬기고, 돌아가셨을 적에 예로써 장사 지내고, 제사 지낼 때에 예로써 하면, 효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나는 어려서부터 어버이 곁을 떠나 멀리 중국에 가서 벼슬한 까닭에 정성(定省)할 줄도 알지 못하고 감지(甘旨)도 여쭙지 못하였으니, 살아 계실 적에 섬기는 예를 등한시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궁액(宮掖)에서 상을 가까이 모시고 있었던 관계로 부모의 상(喪)에 있는 힘을 다해 달려와서 상을 치르지도 못하였으니, 돌아가셨을 적에 장사 지내는 예를 빠뜨렸다고 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가묘(家廟)의 제도가 폐지되고 천복(薦福)의 설이 행해지고 있으니, 제례에 있어서도 미진한 점이 있게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생각이 여기에 미칠 때마다 가슴 아파하며 비통하게 여기지 않은 적이 없다. 나는 물론 나 자신이 제사를 올리고 싶지만 나에게는 또 아들이 없으니, 선인의 제사를 오래 지내지 못하게 될까 참으로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렇게 사당을 짓고는 다시 향리에 있는 전지(田地)를 내놓게 되었는데, 이는 12결(結)이 넘는 그 땅의 수입을 해마다 거두어 영구히 시제(時祭)를 지내는 자본으로 삼게 하는 동시에, 우리 형제의 자손들로 하여금 이 일을 잊지 않게 하려는 목적에서이다. 그러니 그대가 나를 위해 글을 지어 주면 좋겠다.”라고 하였다.
내가 박군의 일에 대해서는 신복사의 비석에 상세히 기록하였으므로 여기에서는 다시 언급하지 않고, 단지 그의 말과 그 전지의 사지(四至 사방 주위의 경계) 에 대해서만 비석의 뒷면에 기재한다. 그리고 박군을 대신해서 그의 형제의 자손들에게 고한다. 형제는 동기(同氣)이니, 형제의 아들은 자기의 아들과 같다. 그렇다면 그 아들 역시 박군을 부친으로 여겨야 할 것이니, 부친의 말을 소홀히 해서야 되겠는가. 어떤 자식이든지 자기 부모에 대해서 박군처럼 할 수 있다면 또한 효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박군이 그대 자손들에게 가르침을 내렸으니 그대들이 그의 말을 잊지 않고 그 공을 실추시키는 일이 없게 한다면, 이 사당을 지은 것이 헛되지 않을 것이요, 이와 함께 자손 대대로 효제(孝悌)의 마음이 뭉게구름 피어나듯 일어나게 될 것이다.
지정(至正) 6년 세차(歲次) 병술년(1346, 충목왕 2) 정월 보름에 적는다.
[주D-001]부모가 …… 있다 : 《논 어》 위정(爲政)에, 공자가 효(孝)에 대해 대답하면서 “부모가 살아 계실 때에는 섬기기를 예로써 하고, 돌아가시면 장사 지내기를 예로써 하고, 제사 지낼 때에도 예로써 하는 것이다.〔生事之以禮死葬之以禮 祭之以禮〕”라고 대답한 말이 나온다.
[주D-002]정성(定省) : 혼 정신성(昏定晨省)의 준말로, 어버이를 제대로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자식이 된 자는 어버이에 대해서,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 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 드려야 하며,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살펴 드리고 아침에는 문안 인사를 올려야 한다.〔凡爲人子之體冬溫而夏凊 昏定而晨省〕”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3]감지(甘旨) : 어 버이가 좋아하는 맛있는 음식이라는 말이다. 《예기》 내칙(內則)에 “새벽에 어버이에게 아침 문안을 하고 좋아하는 음식을 올리며, 해가 뜨면 물러 나와 각자 일에 종사하다가, 해가 지면 저녁 문안을 하고 좋아하는 음식을 올린다.〔昧爽而朝 慈以旨甘日出而退 各從其事 日入而夕 慈以旨甘〕”라는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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