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정집자료 ▒

가정집 제5권 번역

천하한량 2010. 1. 13. 01:24

 

 가정집 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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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해부(寧海府)에 새로 지은 소학(小學)의 기문

 

 


예 주(禮州)의 소학은 장서기(掌書記) 이천년(李天年)이 지은 것이다. 이군이 부사(府使)를 보좌하는 관원이 되고 나서 제생(諸生)을 보고 말하기를본국 향교의 제도는 사당과 학교가 한집 안에 있으니 설만(褻慢)한 데에 가깝다. 여기에 또 동자들을 끌어들여 대성전(大成殿) 뜰에서 시끄럽게 떠들게 하니 무례한 정도가 더욱 심하다고 하겠다.”라고 하고는, 제생과 함께 부로(父老)와 상의하여 부의 동북쪽에 땅을 마련한 뒤에 농한기에 공사를 시작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완공하였다. 중앙에 전각을 지어 노사구(魯司寇)의 영정을 걸고, 좌우에 동무(東廡)와 서무(西廡)를 지어 동자들을 가르치는 장소로 삼았는데, 이렇게 해서 낭무(廊廡)와 담장이 갖추어진 가운데 규모가 크고 아름답게 단장되었다. 이에 제생 중에서 조금 나이가 든 자를 뽑아 동자들을 가르치게 하고는, 이군이 하루에 한 번씩 들러서 그 근만(勤慢)을 고과(考課)하며 권면하고 징계하였는데, 비록 엄동설한이나 장마철을 당해도 감히 그 일을 게을리 하는 경우가 없었다. 이 때문에 그 고을 백성의 아이들이 입에서 젖을 떼기만 하면 소학에 나와서 배우지 않는 자가 없게 되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나 이군이 표전(表箋)을 받들고 정해년(1347, 충목왕 3) 원단(元旦)을 축하하기 위해 서울에 왔는데, 교관에 결원이 생기자 임시로 성균 학유(成均學諭)에 보임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군이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서울에 온 영해의 제생을 길에서 만나 말하기를그대 부()의 소학이 규모는 일단 이루어졌으나, 옥우(屋宇)를 제때에 수리하지 않으면 쉽게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니 그대는 글을 좋아하는 자에게 부탁해서 그 시말을 기록하여 후세에 보이게 함으로써 이루어진 그 공이 무너지지 않게 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제생이 마침내 나를 찾아와서 기문을 부탁하였다
.
내 가 생각건대, 본국의 문풍(文風)이 부진한 것이 오래되었는데, 이는 대개 공리를 급선무로 여기고 교화는 뒷전으로 미루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그리하여 왕궁과 국도(國都)로부터 주현(州縣)에 이르기까지 교육 사업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폐기되지 않은 것이 거의 없는데, 이군이 여기에 제대로 뜻을 두었으니 먼저 힘써야 할 일을 알았다고 하겠다. 다만 한 가지 모를 것은 소학에서 어떤 글을 읽게 하고 어떤 일을 익히게 했는지 하는 그 규정의 내용이다
. 구두만 익히면 그만이지 쇄소(灑掃)ㆍ응대(應對)ㆍ진퇴(進退) 예절을 따질 것이 뭐가 있느냐고 한다든가, 시문만 배우면 그만이지 예(禮)ㆍ악(樂)ㆍ사(射)ㆍ어(御)ㆍ서(書)ㆍ수(數) 글을 배울 것이 뭐가 있느냐고 한다면, 이는 그저 촌스러운 시골 서당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니, 제생을 위해 내가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바이다. 제생은 노력해야 할 것이다. 기타 옥우의 흥폐(興廢)에 대해서는 응당 책임을 진 자가 있을 것이니, 여기에서는 논하지 않는다.
지정(至正) 7(1347, 충목왕 3) 5 16일에 적는다.

 

[주D-001]노사구(魯司寇) : ()나라의 대사구(大司寇)를 지낸 공자를 가리킨다. 대사구는 법을 맡은 관원의 우두머리이다.
[주D-002]만약 …… 한다면 :
주 희(朱熹)의 대학장구서(大學章句序)사람이 태어나 8세가 되면, 왕공 이하로부터 서인의 자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소학에 입학시켰다. 그리고는 물 뿌리고 쓸며 응하고 답하며 나아가고 물러나는 예절과 예ㆍ악ㆍ사ㆍ어ㆍ서ㆍ수에 관한 글을 그들에게 가르쳤다.〔人生八歲 則自王公以下 至於庶人之子弟 皆入小學 而敎之以灑掃應對進退之節 禮樂射御書數之文〕라는 말이 나온다.

 

 

 

 

신효사(神孝寺)에 상주(常住)하는 승려를 새로 둔 것에 대한 기문

 


지정 기축년(1349, 충정왕 1) 봄에 신효사의 법사(法師)인 수공(修公)이 나를 찾아와서 말하기를,

내가 어려서부터 이 절에 몸을 의탁했는데, 이제는 늙은 몸이 되었다. 옛날에 우리 충렬왕(忠烈王)이 이 절을 중흥하였는데, 그때는 전세(田稅)로 해마다 들어오는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단가(檀家 불교 신도의 집안)가 날마다 시주하느라고 줄을 이었다. 그래서 곳간에는 물자가 가득 쌓여 넘쳐나고 주방에서는 풍성하고 정결하게 공양하였으며, 불공을 올리고 남은 것을 베풀어서 날마다 빈궁한 사람들을 구제한 것이 부지기수였다.

그 뒤에 왕이 세상을 버리고 나서 10년 동안은 그래도 예전과 같았는데,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나자 전세로 들어오는 것이 해마다 줄어들고 단가가 시주하는 것도 날로 감소하였으므로, 거승(居僧)이 그때부터는 물자가 부족한 것을 걱정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뒤로 다시 수십 년이 지나 오늘날에 와서는 곳간을 맡아 보는 자는 쌀이 떨어졌다고 보고하고 주방을 맡아 보는 자는 먹을 것이 없다고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거승이 돌아다니며 걸식하느라 날마다 겨를이 없게 되었으며, 아예 다른 곳으로 흩어져 떠나가는 경우도 열에 너덧은 되었다.

이에 내가 차마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없기에, 바랑 속에 모아 두었던 것들을 다 털어서 오종(五綜)의 포목 150()을 마련하고, 여기에 여러 단가가 시주한 300여 필과 미곡 몇십 석()을 합쳐서 상주하는 승려를 새로 둘 자본으로 삼았는데, 원금은 그대로 놔두고 이식만 활용하여 장구한 이익을 도모하면서 모자라는 수요를 보충하려는 생각이 간절히 들었다. 그래서 이를 주관하는 자에게 말하기를작은 물줄기들이 합쳐져서 바다를 이루고, 가벼운 물건들이 쌓여서 수레바퀴의 굴대를 부러뜨리는 법이니, 이 재물이 달마다 증가하고 해마다 더해져서 무진장한 보고(寶庫)가 될지 어떻게 알겠는가.’라고 하고는, 이어서 그와 약속하기를이 자본을 마련한 것은 장차 급한 상황을 구제해 주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급한 상황이 벌어지면 임시방편으로 빌려 주는 일을 그만둘 수야 없겠지만, 그때마다 바로 상환하게 해서 결손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점차 자본을 축적해서 포목은 5000필에 이르고 미곡은 1000석에 이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뒤에 꺼내어 써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일단 이렇게 약속을 하였으니, 이 내용을 벽에다 써서 뒷사람들에게 보임으로써 내 말을 잊지 않게 해 주면 좋겠다.”

하였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법 사와 오랜 친분이 있는 만큼 내가 어떻게 감히 사양할 수야 있겠는가. 그렇긴 하지만 앞사람이 만들어 놓은 것을 뒷사람이 계승하고, 앞사람이 이루어 놓은 것을 뒷사람이 지키는 것은, 앞사람과 뒷사람이 반드시 몸은 둘이지만 마음은 하나가 되고 때는 다르지만 함께 협력할 수 있게 된 뒤에야 가능한 법이다. 그런데 만들어 놓고 이루어 놓는 일은 이미 우리 법사가 하였지만, 이를 계승하고 지키는 것은 어떤 사람이 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만약 적임자를 얻지 못한다면 정녕하게 반복해서 일러 준다고 하더라도 그저 허문(虛文)이 되고 말 것이니, 이 기문은 짓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니, 법사가 말하기를,

내가 뒷사람에 대해서야 또 어떻게 감히 보장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러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자, 법사가 말하기를,

부처님이 위에 계시면서 이 일에 대해 증거해 주실 것이니, 뒷사람이 혹시 약속을 어기면 반드시 암암리에 처벌을 받게 하실 것이다.”

하였다. 내가 웃으면서 알았다고 하고는 이 글을 짓게 되었다. 때는 이해 청명절(淸明節)이었다.

 

[주D-001]가벼운 …… 법이니 : 깃털도 많이 실으면 배를 가라앉히고, 가벼운 물건도 많이 쌓이면 수레바퀴의 굴대를 부러뜨리고, 사람들이 말이 많으면 쇠도 녹이는 법이다.〔積羽沈舟 群輕折軸 衆口鑠金〕라는 말이 《전국책(戰國策)》 위책(魏策) 1에 나온다.

 

 

 

 

주행기(舟行記)

 


기 축년(1349, 충정왕 1) 5 16일에 진강(鎭江) 원산(圓山)에서 한밤중에 배를 타고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서 용연(龍淵)에 이르니, 아직 동이 트지 않았는데도 송정(松亭) 전 거사(田居士)와 임주(林州) 반 사군(潘使君)이 언덕 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과 동행하여 뱃머리를 돌려 북쪽으로 가서 저녁에 고성(古城)에 정박하였다.
그 이튿날에 부여성(扶餘城) 낙화암(落花岩) 아래에 이르렀다. 옛날에 당()나라가 소 장군(蘇將軍 소정방(蘇定方)) 을 보내 백제(百濟)를 쳤는데, 부여는 바로 그때의 도읍지였다. 당시에 포위를 당하여 상황이 매우 급박해지자 군신(君臣)이 궁녀들을 놔두고 도망쳤는데, 궁녀들이 의리상 당나라 군사들에게 몸을 더럽힐 수 없다고 하여 떼를 지어 이 바위에 이르러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그래서 낙화암이라고 이름 지은 것이다. 부여의 감무(監務)가 바위 모퉁이에 있는 승사(僧舍)에 음식을 차렸다
.
정 오가 지나서 닻줄을 풀고 조금 서쪽으로 가니, 물가에 거대한 암석이 반원(半圓)의 형태로 튀어나와 있었는데, 그 밑에 맑은 물이 잠겨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당나라 군사가 이곳에 와서 강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는데, 강을 건너려고 하면 구름과 안개가 끼어서 사방이 어두워졌으므로 방향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염탐하게 하였더니 용이 그 밑의 굴속에 살면서 본국을 호위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당나라 사람이 술자(術者)의 계교를 써서 미끼를 던져 낚아 올리기로 하였는데, 용이 처음에는 저항하며 올라오지 않았으므로 있는 힘을 다하여 끌어 올리는 과정에서 바위가 갈라졌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물가의 암석에서부터 그 바위 꼭대기까지 한 자 남짓 되는 깊이와 너비에 길이가 거의 한 길쯤 되는 파인 흔적이 마치 사람이 일부러 깎아 내어 만든 것처럼 보이는데, 이를 일러 조룡대(釣龍臺)라고 한다
.
조룡대에서 서쪽으로 5리쯤 가면 강의 남쪽 언덕에 호암(虎岩)이라는 승사가 있다. 거기에 암석이 벽처럼 서 있고 그 암석을 절이 등지고 있는데, 암석에 마치 바위를 타고 올라온 것 같은 호랑이의 발자국이 완연히 남아 있다. 그리고 호암의 서쪽에는 1000() 높이의 단애(斷崖)가 있는데, 그 꼭대기를 천정대(天政臺)라고 부른다. 대개 이곳은 백제 시대에 하늘과 통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람을 등용할 때면 언제나 그 사람의 이름을 써서 이 천정대 위에 올려놓고는 군신이 조복(朝服) 차림에 홀()을 쥐고 북쪽 강안의 모래톱 위에 줄지어 엎드려서 기다리다가 하늘이 그 이름 위에 낙점한 뒤에야 뽑아서 썼다고 한다. 그 지방 사람들이 서로 전하는 이야기가 이와 같다. 호암에서 걸어서 천정대에 오르니, 대에는 옛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없고 오직 바위가 반공에 솟아 있을 뿐이었다
.
이상이 이른바 부여의 사영(四詠)으로서, 한 지방의 승경으로 꼽히는 곳이다. 그래서 놀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천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이곳을 찾아오곤 한다. 나의 고향은 여기에서 겨우 60여 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그래서 소싯적부터 이곳을 지나다닌 것이 또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일찍이 눈여겨보지도 않았으므로, 나는 놀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자못 자부해 왔다. 그런데 지금 그만 농사철을 당한 이때에, 노래하고 춤을 추며 빈객을 잔뜩 모아 100명 가까이 대접하면서 왔다 갔다 하느라 사흘이나 넘겼으니, 놀기 좋아하는 것이 어떠하다고 하겠는가. 비록 그렇긴 하지만 역사책에도 이 일들이 전해지지 않고 상고할 만한 비석의 기록도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그 이야기를 들어 보아도 괴이쩍은 느낌이 드니 그 지방 사람들의 말을 믿어야 할지 어쩔지 모르겠다. 더구나 내가 눈으로 직접 본 경치가 귀로 들은 소문보다 훨씬 못한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내가 그래서 이렇게 기문을 지어서 후세의 놀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경계로 삼는 동시에 나의 허물을 기록하는 바이다.

 

 

 

 

동유기(東遊記)

 


지정(至正) 9년 기축년(1349, 충정왕 1) 가을에 장차 금강산(金剛山)을 유람하려고 14일에 송도(松都)를 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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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 천마령(天磨嶺)을 넘어 산 아래 장양현(長陽縣)에서 묵었다. 이곳은 산과 30여 리 떨어진 지점이다. 이튿날 아침 일찍 조반을 서둘러 먹고 산에 오르려 하니,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사방이 어두웠다. 고을 사람이 말하기를풍악(楓岳)에 구경 왔다가 구름과 안개 때문에 보지 못하고 그냥 돌아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라고 하였다. 동행한 사람들 모두가 걱정하는 기색을 띠면서 말없이 기도를 드렸다. 산에서 5리쯤 떨어진 지점에 이르자 음산한 구름이 차츰 엷어지면서 햇빛이 그 사이로 새어 나왔다. 절재〔拜岾〕에 오르니 하늘이 활짝 개고 날씨가 청명해졌다. 그래서 안 보이던 눈꺼풀을 떼어 내고 바라보듯 산이 선명하게 보여서 이른바 일만이천봉을 하나하나 셀 수가 있었다. 누구든지 이 산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이 재를 통과해야 하는데, 이 재에 올라서면 산이 보이고 산이 보이면 자기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지기 때문에 절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
이 재에 예전에는 집이 없었고 돈대(墩臺) 모양으로 돌을 쌓아서 쉴 곳을 마련했었다. 그러다가 지정 정해년(1347, 충목왕 3)에 지금 자정원사(資正院使)인 강공 금강(姜公金剛)이 천자의 명을 받들고 와서 큰 종을 주조한 다음에 이 재 위에다 종각(鐘閣)을 세워서 종을 매달아 놓고는 그 옆에 승려가 거처할 곳을 마련하여 종 치는 일을 맡게 하였는데, 우뚝 솟은 종각의 단청 빛이 눈 덮인 산에 반사되는 그 경치 또한 산문(山門)의 일대 장관이라고 할 만하였다
.
아직 정오가 못 된 시각에 표훈사(表訓寺)에 도착해서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에, 사미(沙彌) 한 사람의 인도로 산에 올랐다. 사미가 말하기를동쪽에 보덕관음굴(普德觀音窟)이 있는데, 사람들이 사찰을 순례할 때에는 으레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곳은 골짜기가 깊고 길이 험합니다. 서북쪽에 정양암(正陽庵)이 있는데, 이곳은 우리 태조가 창건한 암자로
법기보살(法起菩薩)의 존상(尊相)을 봉안한 곳입니다. 비록 경사가 급하고 높기는 하지만 거리가 비교적 가까워서 충분히 올라갈 수가 있고, 또 이 암자에 오르면 풍악의 여러 봉우리들을 한눈에 다 볼 수가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관음보살(觀音菩薩)이 야 어디에 간들 있지 않겠느냐. 내가 여기에 온 목적은 대개 이 산의 형승을 보려고 해서이다. 그러니 그 암자에 먼저 가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비탈길을 타고 어렵사리 올라갔더니 과연 그의 말과 같았으므로 마음에 매우 흡족하였다. 보덕관음굴에도 가 보고 싶었지만 해가 벌써 지려 하였고 또 산속에 머물러 있을 수도 없는 일이기에, 결국 신림(新林)과 삼불(三佛) 등 여러 암자를 거쳐 시내를 따라 내려와서 어스름 저녁에 장안사(長安寺)에 도착해 자고 이튿날 아침 일찍 산을 나왔다.
철원(鐵原)에서는 금강산까지의 거리가 300리이다. 그렇다면 서울에서는 실제로 500여 리 떨어진 셈이다. 하지만 그쪽 방향도 강과 산이 중첩한 가운데 길이 유심(幽深)하고 험절(險絶)하기 때문에 금강산을 출입하기 어려운 것은 역시 마찬가지이다. 일찍이 듣건대, 이 산은 이름이 불경에 나와 있어서 천하에 소문이 났기 때문에
건축(乾竺)과 같이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의 사람들까지도 이따금 와서 보는 자가 있다고 하였다. 대체로 눈으로 직접 보면 귀로 들은 것보다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 동방의 사람들 중에 서촉(西蜀)의 아미산(峨眉山)이나 남월(南越)의 보타산(
)을 유람한 자가 있었지만, 모두 소문보다 못하더라고 하였다. 내가 아미산이나 보타산은 가 보지 못하였지만, 내가 본 이 금강산은 실로 소문을 능가하였으니, 제아무리 화가가 잘 그려 보려 하고 시인이 잘 표현해 보려 하더라도 이 금강산을 비슷하게라도 형용할 수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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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 장안사에서 천마(天磨)의 서쪽 재를 넘어 또 통구(通溝)까지 와서 묵었다. 무릇 산에 들어가는 자는 천마의 두 재를 거치게 마련인데, 재에 오를 때에는 산이 바라보이는 까닭에 재를 넘어서 산에 들어가는 자들이 처음에는 험준하다는 걱정을 하지 않다가, 산에서 일단 재를 넘고 난 뒤에야 길이 험난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서쪽 재는 조금 낮은 편이지만 올라가고 내려오는 30여 리의 길이 무척 험하기 때문에 단발령(斷髮嶺)이라고 부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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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 회양부(淮陽府)에 와서 하루를 머물렀다. 26일에 철령관(鐵嶺關)을 넘어 복령현(福靈縣)에서 유숙했다. 철령은 본국의 동쪽 요해지로서, 이른바
사나이가 관문을 지키면 명이 공격해도 문을 없다.”고 하는 곳이다. 그래서 철령 동쪽에 있는 강릉(江陵) 등 여러 고을을 관동(關東)이라고 칭한다.
지 원(至元) 경인년(1290, 충렬왕 16)에 반란을 일으킨 원()나라 대왕(大王) 내안(乃顔)의 무리인 합단(哈丹) 등의 적도(賊徒)가 패배하여 동쪽으로 도망쳤다. 그리하여 원나라 개원로(開元路) 등의 제군(諸郡)으로부터 본국의 관동 지방으로 난입하였으므로, 국가에서 만호(萬戶) 나유(羅裕) 등을 파견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철령관을 방호하게 하였다. 적도가 화주(和州 영흥(永興))와 등주(登州 안변(安邊)) 이서(以西)의 여러 고을의 인민들을 겁탈하고 노략질하였다. 그리고는 등주에 이르러 등주 사람으로 하여금 염탐하게 하였는데, 나공(羅公)이 적도가 왔다는 말을 듣고는 철령관을 포기하고 도주하였으므로, 적도가 마치 무인지경을 치달리듯 하였다. 이에 온 나라가 불안에 떨고 인민들이 피해를 입는 가운데 산성에 올라가고 해도로 들어가서 적도의 예봉을 피하다가, 끝내는 중국 조정에 구원병을 요청한 뒤에야 겨우 섬멸할 수가 있었다. 지금 내가 본 바로는, 철령관의 험난함이야말로 한 사나이에게 지키게 하면 천 명, 만 명이 쳐다보고 공격하더라도 쉽사리 들어올 수 없는 곳인데, 나공은 참으로 담력이 적었다고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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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 등주에 도착해서 이틀 동안 머물렀는데, 지금은 그곳을 화주라고 칭한다. 30일에 일찍 화주를 출발하여 학포(鶴浦) 어귀에서 배를 타고 바다로 들어가 국도(國島)를 관광하였는데, 그 섬은 해안에서 10리쯤 떨어져 있다. 서남쪽 모퉁이로부터 들어갔더니 물가에 누인 비단처럼 흰모래가 깔려 있었고, 그 위로 평지 5, 6() 정도가 마치 반벽(半壁) 모양의 형태로 펼쳐져 있었다. 그 가운데에 집터가 보였는데,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승려가 거주하던 곳이라고 한다. 그 위에는 한쪽이 트인 고리처럼 산이 에워싸고 있었는데, 산세가 그다지 높지 않은 가운데 덩굴 풀만 덮여 있고 또 수목도 없었으니, 얼핏 보기에 흙을 쌓아 놓은 하나의 제방 같은 인상이 들었다
.
배를 타고 약간 서쪽으로 가니 단애(斷崖)와 물가의 언덕이 특이하게 변해 갔다. 단애의 바위들은 모두 직방형(直方形)으로 즐비하게 벽처럼 서 있었으며, 언덕의 바위들은 모두 평원형(平圓形)으로 배열되어 한쪽 면에 한 사람이 앉을 만하였으나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지는 않았다. 수백 보쯤 더 나아가니 수백 척은 될 만한 높이의 단애들이 나타났는데, 그 바위는 모두 백색에 직방형으로 장단(長短)이 한결같았다. 그리고 하나의 단애마다 그 꼭대기에 각자 하나의 작은 바위를 이고 있어서 화표주(華表柱)의 머리 같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얼굴을 위로 들고서 쳐다보노라니 아슬아슬해서 가슴이 떨리고 겁이 났다
.
자그 마한 동굴 하나가 있기에 배를 저어 들어갔으나 점점 좁아져서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었는데, 그 동굴 안을 들여다보니 얼마나 깊은지 측량할 수가 없었다. 그 좌우에 묶어서 세운 것 같은 바윗돌들은 외면(外面)의 것과 같았으나 그보다는 더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으며, 그 위에 있는 바위가 지면까지 내려오는 형태도 모두 외면의 것들처럼 평정(平正)한 것이 한 판의 바둑을 복기(復碁)하여 그대로 옮겨 놓은 것과 같아서 마치 일률적으로 잘라 낸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았다. 이렇게 본다면 외면만 그러할 뿐이 아니라 하나의 섬 전체가 그야말로 한 묶음의 네모진 바윗돌 덩어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그 동굴 속이 하도 험하고 깊어서 사람의 혼이 떨리게 하였으므로 오래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
그래서 배를 돌려 북쪽으로 가니 이번에는 한 면이 둘러친 병풍과 같은 곳이 있기에, 배를 놔두고 내려가서 배회하며 더위잡고 기어오르기도 하였다. 대개 그 바위는 동굴과 다름이 없었지만 단애가 그다지 높지 않았고 그 아래는 조금 평이하였으며 둥근 바위가 배열된 곳에는 1000명도 앉을 만하였으므로, 유람을 온 사람들은 으레 이곳에서 휴식을 취한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거기에 머물러 술을 마시기도 하였으나 풍랑이 일까 걱정도 되었고 게다가 그곳은 익힌 음식을 먹는 속세의 사람이 머물러 있을 곳이 못 되었다
.
그 석벽을 따라 동남쪽으로 다시 수백 보를 가니, 석벽의 바윗돌이 조금 특이하여 네모진 철망의 형태를 하고는 바닷물을 그 속에 담아서 조그맣고 둥근 자갈을 갈아 내고 있었는데, 길이는 5, 6십 척쯤 되었다. 서 있는 석벽을 하나하나 확인해 보니 한 면은 모두 그와 같았는데, 사람들이 이를 일컬어 철망석(鐵網石)이라고 하였다. 이상이 국도(國島)의 대략적인 경치이다. 그러나 그 기절(奇絶)하고 괴이한 형상으로 말하면 필설로는 방불하게 표현할 수가 없으니, 조화라는 것이 어떻게 해서 이런 극치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
포구로 돌아온 뒤에 술잔을 들며 서로 치하하였으니, 하나는 승경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요, 다른 하나는 풍랑이 일지 않았기 때문이다. 포구에서 배를 저어 이른바 학포(鶴浦)라는 곳으로 들어가서 원수대(元帥臺)에 올랐는데, 100()의 맑은 호수에 한 점 고둥처럼 떠 있는 외로운 섬이 또한 하나의 기관(奇觀)이었다. 날이 이미 저물어서 더 머물 수 없기에 현관(縣館)에 들어와서 묵었다
.
9
월 초하룻날에 흡곡현(歙谷縣)의 동쪽 재를 넘어 천도(穿島)에 들어가려고 하면서 그 형상을 물어보았더니그 섬에 굴이 있는데 남북으로 뚫려서 풍도(風濤)만 서로 드나들 뿐이다. 그렇지만 그 천도에서 바다를 가로질러 남쪽으로 가면 총석정(叢石亭)에 갈 수 있는데, 그 거리는 8, 9리쯤 된다. 그리고 총석정에서 바다를 또 가로질러 남쪽으로 가면 금란굴(金蘭窟)에 갈 수 있는데, 그 거리 역시 10여 리쯤 된다. 배 안에서 보이는 승경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
이날 바람 기운이 약간 있어서 배를 탈 수가 없기에 천도는 들어가지 못하고 해변을 따라 총석정에 갔더니 통주(通州)의 수재(守宰)인 심군(沈君)이 총석정 위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른바 사선봉(四仙峯)이라는 것을 보니, 바위를 묶어서 세운 듯한 것과 그 몸통이 직방형인 것은 대개 국도의 경우와 같았으나, 다만 색깔이 검고 단애의 바위 또한 들쭉날쭉해서 가지런하지 않은 차이가 있을 따름이었다. 그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건대, 네 개의 봉우리가 저마다 따로 우뚝 솟아서 깎아지른 듯한 단애의 위용을 자랑하는 가운데, 동쪽으로는 만 리의 푸른 바다를 굽어보고 서쪽으로는 천 겹의 준령을 마주하고 있었으니, 실로 관동의 장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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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비석이 단애 위에 있었다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고 받침돌만 남아 있을 뿐이다. 또 동쪽 봉우리에 오래된 비갈(碑碣)이 있는데, 비면(碑面)이 떨어져 나가고 닳아 없어져서 한 글자도 알아볼 수가 없으니, 어느 시대에 세워진 것인지 확인할 수가 없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 신라(新羅) 시대에 영랑(永郞)ㆍ술랑(述郞)ㆍ도(徒)ㆍ남(南) 명의 선동(仙童) 무리 3000인과 함께 해상에서 노닐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비갈은 그들 무리가 세운 것일지도 모르겠는데, 이 또한 상고해 볼 길이 없다. 사선봉에 임하니 자그마한 정자가 있기에 그 위에서 술자리를 베풀었다.
날 이 저문 뒤에 통주(通州)에 와서 유숙하였다. 통주는 옛날의 금란현(金蘭縣)이다. 그래서 성 북쪽 모퉁이에 있는 석굴을 사람들이 금란굴(金蘭窟)이라고 말하는데, 그곳은 관음보살이 머무는 곳이라고 한다. 이튿날 배를 타고 해안을 따라 들어가 멀리서 바라보니 희미하게 보살의 형상이 굴속에 서 있는 것도 같았으나, 그 굴이 워낙 깊고 비좁아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배를 조종하는 자가 말하기를내가 여기에서 거주한 지 오래됩니다. 그런데 원조(元朝)의 사화(使華 사신) 와 본국의 경사(卿士)는 물론이요, 부절(符節)을 나눠 받고 한 방면을 다스리는 자로부터 아래로 유람하며 구경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여기에 와서는 이 굴을 반드시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매번 나에게 배를 이곳으로 인도하게 하였으므로 나로서는 정말 질리게 와 본 셈입니다. 내가 일찍이 통나무를 파서 만든 작은 배를 조종하여 혼자 굴속에 들어가서는 끝까지 철저하게 살펴본 적이 있는데, 특별히 보살처럼 보이는 것은 발견하지 못하였고, 손으로 만져 보아도 한쪽 면에 이끼가 낀 바위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일단 굴을 나와서 뒤돌아보니 또 관음보살의 형상을 방불케 하는 것이 서 있지 않겠습니까. , 나의 정성이 미흡해서 굴속에서 보지 못한 것입니까, 아니면 내가 항상 그런 생각을 하였기 때문에 생각한 대로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런 현상이 보인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그 말을 듣고 보니 자못 수긍되는 점이 있었다
.
금란굴 동쪽에 석지(石池)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관음이 목욕하는 곳이라고 하였다. 또 암석이 밀집해 있는데, 아주 작은 크기의 것들이 무려 수 묘()에 걸쳐 깔려 있기도 하였다. 그런데 모두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는 이 암석들을 사람들이 통족암(痛足岩)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대개 관음보살이 발로 밟다가 통증을 느끼자 바위가 보살을 위해서 옆으로 몸을 기울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금란굴을 출발하여 임도현(林道縣)에 와서 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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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사흗날에 고성군(高城郡)에 도착하였다. 통주에서 고성에 이르는 150여 리의 길은 실로 풍악의 등줄기에 해당하는 곳으로서 산세가 깎아지른 듯 험준하기 그지없었다. 사람들이 이곳을 외산(外山 외금강(外金剛))이라고 칭하는데, 이는 대개 내산(內山 내금강(內金剛)) 과 기괴한 경치를 다투고 있기 때문이다. 그 동남쪽에 유점사(楡岾寺)가 있는데, 그 절에는 대종(大鍾) 53()의 동상이 안치되어 있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신라 시대에 53불이 이 종을 타고 서쪽 천축(天竺)으로부터 바다를 건너와서 고성의 해안에 정박하였다가 얼마 뒤에 다시 유점사까지 와서 멈추었다고 한다. 고성 남쪽에 있는 게방촌(憩房村)은 바로 금강산의 기슭에 해당하는데, 이 게방촌에서 60리쯤 곧장 위로 올라가면 유점사에 이른다. 내가 처음에는 함께 유람 온 사람들과 함께 반드시 유점사까지 가서 그 종과 불상이라고 하는 것을 보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런데 거리가 먼 데다가 길이 또 험해서 말이 모두 등창이 나고 발굽을 다친 탓으로 뒤처진 자가 있었으므로 더 이상 산에 오를 수가 없었다
.
초나흗날에 아침 일찍 일어나 삼일포(三日浦)에 갔다. 삼일포는 성에서 북쪽으로 5리쯤 떨어진 지점에 있었다. 배를 타고 서남쪽에 있는 조그마한 섬에 갔는데, 그 섬은 무지개 모양의 거대한 하나의 암석이었다. 그 꼭대기에 석감(石龕)이 있고 그 안에 석불이 있었으니, 이곳이 바로 세상에서 말하는 미륵당(彌勒堂)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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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단애(斷崖)의 동북쪽 벽면에 여섯 글자로 된 붉은 글씨가 보이기에 그곳에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았더니, 한 줄에 세 글자씩 두 줄로술랑도남석행(述郞徒南石行)”이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술랑남석네 글자는 매우 분명하였지만, 그 다음의 두 글자는 희미해서 알아볼 수가 없었다. 옛날에 그 고을 사람이 유람 온 자들을 접대하기가 괴로워서 이 글씨를 깎아 내려고 하였지만, 5촌가량이나 깊이 새겨져 있었던 까닭에 자획을 없애지 못했다고 하는데, 지금 이 두 글자가 분명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이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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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뒤에 배를 돌려 사선정(四仙亭)에 올라갔는데, 이곳 역시 호수 가운데의 하나의 섬이었다. 이리저리 배회하며 돌아보았더니, 이른바 36()의 그림자가 호심(湖心)에 거꾸로 박혀 있었다. 100()쯤 되는 넓이에 맑고 깊은 물이 가득 넘쳐흐르는 이 호수의 경치 또한 실로 관동의 승경으로서 국도(國島)에 버금간다고 할 만하였다. 이때 군수가 없어서 그 고을 아전이 자그마한 술자리를 마련했는데, 혼자 마실 수는 없기에 배를 준비하게 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이 호수는 사선(四仙)이 노닐었던 곳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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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봉에는 봉우리마다 비석이 있었는데, 호종단(胡宗旦)이 모두 가져다가 물속에 가라앉혔다고 한다. 지금도 그 비석의 받침돌은 아직 남아 있다. 호종단이란 자는
이승(李昇) 당(唐)나라 출신으로 본국에 와서 벼슬하였는데, 오도(五道)에 나가 순시할 적에 이르는 곳마다 비갈을 가져다가 비문을 긁어 버리는가 하면 깨뜨리기도 하고 물속에 가라앉히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심지어는 종경(鍾磬)까지도 유명한 것들은 모두 쇠를 녹여 용접해서 소리가 나지 않게 틀어막았다고 한다. 이는 한송정(寒松亭)과 총석정(叢石亭)과 삼일포(三日浦)의 비석, 그리고 계림부(鷄林府) 봉덕사(奉德寺)의 종 같은 경우를 통해서 확인할 수가 있다. 사선정은 박군 숙진(朴君淑眞)이 이 지역을 존무(存撫)할 때 세운 것인데, 좌주(座主)인 익재(益齋) 선생이 기문을 써 주셨다. 삼일포에서 성 남쪽의 강물을 건넌 뒤에 안창현정(安昌縣亭)을 지나 명파역(明波驛)에서 유숙하였다.
초닷샛날에 고성(高城)에서 묵어 거기에서 하루를 머물렀다. 초이렛날에 주인이 선유담(仙遊潭) 위에서 작은 술자리를 베풀었다. 청간역(淸澗驛)을 지나 만경대(萬景臺)에 올라가서 약간 술을 마시고 인각촌(仁覺村)의 민가에 묵었다. 초여드렛날에 영랑호(永郞湖)에 배를 띄웠다. 날이 기울어서 끝까지 돌아보지 못하고, 낙산사(洛山寺)에 가서 백의대사(白衣大士 관세음보살)를 참알(參謁)하였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관음보살이 이곳에 머문다고 하는데, 산 아래 석벽에 있는 동굴이 바로 관음보살이 들어가서 머무는 곳이란다. 저녁 늦게 양주(襄州)에 도착해서 묵었다. 그 다음날은 중구일(重九日)인데, 또 비가 와서 누대 위에서 국화 술을 들었다. 10일에 동산현(洞山縣)에서 유숙하였는데, 그곳에 관란정(觀瀾亭)이 있었다. 11일에 연곡현(連谷縣)에서 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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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일에 강릉 존무사(江陵存撫使)인 성산(星山) 이군(李君)이 경포(鏡浦)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배를 나란히 하고 강 복판에서 가무를 즐기다가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기 전에 경포대(鏡浦臺)에 올랐다. 경포대에 예전에는 건물이 없었는데, 근래에 풍류를 좋아하는 자가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또 옛날 신선의 유적이라는 석조(石竈 돌 아궁이)가 있었는데, 아마도 차를 달일 때 썼던 도구일 것이다. 경포의 경치는 삼일포와 비교해서 우열을 가릴 수가 없었지만, 분명하게 멀리까지 보이는 점에서는 삼일포보다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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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때문에 하루를 머물다가 강성(江城)으로 나가 문수당(文殊堂)을 관람하였는데,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의 두 석상이 여기 땅속에서 위로 솟아나왔다고 한다. 그 동쪽에 사선(四仙)의 비석이 있었으나 호종단에 의해 물속에 가라앉았고 오직 귀부(龜趺)만 남아 있었다. 한송정(寒松亭)에서 전별주를 마셨다. 이 정자 역시 사선이 노닐었던 곳인데, 유람객이 많이 찾아오는 것을 고을 사람들이 싫어하여 건물을 철거하였으며, 소나무도 들불에 연소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오직 석조(石竈)와 석지(石池)와 두 개의 석정(石井)이 그 옆에 남아 있는데, 이것 역시 사선이 차를 달일 때 썼던 것들이라고 전해진다. 정자에서 남쪽으로 가니 안인역(安仁驛)이 있었다. 해가 이미 서쪽으로 넘어가서 재를 넘을 수가 없기에 마침내 그곳에 머물러 숙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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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일찍 출발하여 역을 지나서 동쪽 산봉우리를 오르는데 길이 매우 험하였다. 등명사(燈明寺)에 도착해서 누대 위에서 일출을 구경하고, 마침내 바다를 따라 동쪽으로 향하여 강촌에서 휴식을 취한 다음 재를 넘어 우계현(羽溪縣)에서 묵었다. 12일에 삼척현(三陟縣)에서 유숙하였다. 이튿날 서루(西樓)에 올라 이른바
오십천(五十川) 팔영(八詠)이 라는 것을 마음껏 살펴보고 나와서 교가역(交柯驛)에 이르렀다. 이 역은 현의 치소(治所)에서 30리 떨어진 지점에 있다. 그곳에서 15리를 가면 바다를 굽어보는 단애 위에 원수대(元帥臺)가 있는데, 또한 절경이었다. 그 위에서 조금 술을 마시고는 마침내 역사에 묵었다. 18일에 옥원역(沃原驛)에서 묵었다. 19일에 울진(蔚珍)에 도착하여 하루를 머물렀다.
21
일에 아침 일찍 울진을 출발하였다. 현에서 남쪽으로 10리쯤 가니 성류사(聖留寺)가 나왔는데, 그 절은 석벽의 단애 아래
장천(長川) 가에 위치하였다. 단애의 석벽이 1000척의 높이로 서 있고 그 석벽에 작은 동굴이 뚫려 있었는데, 그 동굴을 성류굴(聖留窟)이라고 불렀다. 그 동굴은 깊이도 측량할 수 없었지만 으슥하고 어두워서 촛불 없이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절의 승려로 하여금 횃불을 들고서 길을 인도하게 하고는, 또 출입에 익숙한 고을 사람으로 하여금 앞뒤에서 돕게 하였다.
동굴 의 입구가 워낙 좁아서 무릎으로 4, 5()쯤 기어서 들어가니 조금 넓어지기에 일어나서 걸어갔다. 다시 몇 보를 걷자 이번에는 3()쯤 되는 단애가 나타났으므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더니 점점 평탄해지는 가운데 공간이 높다랗고 널찍해졌다. 여기서 수십 보를 걸어가자 몇 묘()쯤 되는 평지가 나타났으며, 좌우에 있는 돌의 모양이 매우 특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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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10여 보를 걸어가자 동굴이 또 나왔다. 그런데 들어왔던 동굴의 입구보다 훨씬 비좁아서 아예 배를 땅에 대고 납작 엎드려서 기어갔는데, 그 아래가 진흙탕이었으므로 돗자리를 깔아서 젖는 것을 방지하였다. 7, 8보쯤 앞으로 나아가자 조금 앞이 트이고 널찍해진 가운데, 좌우에 있는 돌의 형태가 더욱 괴이해서 어떤 것은 당번(幢幡) 같기도 하고 어떤 것은 부도(浮圖) 같기도 하였다. 10여 보를 가니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돌이 더욱 기괴해지고 모양이 더욱 다양해졌는데, 당번과 부도처럼 생긴 것들만 하더라도 이전보다 더욱 길고 넓고 높고 컸다. 여기에서 다시 앞으로 4, 5보를 가니 불상과 같은 것도 있고 고승과 같은 것도 있었다. 또 못이 있었는데 그 물이 매우 맑고 넓이도 수 묘쯤 되었다. 그 못 속에 두 개의 바위가 있었는데, 하나는 수레바퀴와 비슷하고 하나는 물병과 비슷하였으며, 그 위와 옆에 드리운 번개(幡蓋)도 모두 오색이 찬란하였다. 처음에는 석종유(石鐘乳)가 응결된 것이라서 그다지 딱딱하게 굳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고는 지팡이로 두들겨 보았더니 각각 소리가 나면서 길고 짧은 크기에 따라 청탁(淸濁)의 음향을 발하는 것이 마치 편경(編磬)을 치는 것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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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못을 따라 들어가면 더욱 기괴한 경치가 펼쳐진다고 어떤 사람이 말했지만, 내 생각에는 속세의 인간이 함부로 장난삼아 구경할 성격의 것이 아니라고 여겨지기에 서둘러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 양 옆으로 동굴이 많이 뚫려 있었는데, 사람이 한번 잘못 들어가면 나올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동굴의 깊이가 얼마나 되느냐고 그 사람에게 물어보았더니,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동굴 안을 끝까지 탐험한 사람은 없다. 하지만 평해군(平海郡)의 해변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 거리는 대개 여기에서 20여 리쯤 된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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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동굴 입구에서 옷에 훈김이 배고 더럽혀질까 걱정이 되어 동복(僮僕)의 의건(衣巾)을 빌려 입고 들어왔는데, 일단 동굴 밖으로 나와서 의복을 갈아입고는 세수하고 양치질을 하고 나니, 마치
화서(華胥)를 여행하는 꿈을 꾸다가 퍼뜩 잠에서 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조 물(造物)의 묘한 솜씨는 헤아릴 수 없는 점이 많다고 내가 예전부터 생각해 왔는데, 이번에 국도(國島)와 이 동굴을 통해서 더욱 확인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경치는 자연스럽게 변화해서 이루어지도록 한 것인가, 아니면 처음부터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인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도록 한 것이라면, 그 변화의 기틀이 어쩌면 이렇게까지 오묘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리고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이라면, 천세토록 만세토록 귀신이 공력을 쏟는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이렇게까지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낼 수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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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평해군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군에 이르기 전 5리 지점에 소나무 만 그루가 서 있고 그 가운데에 월송정(越松亭)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있었는데, 이는 사선(四仙)이 유람하다가 우연히 이곳을 지나갔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평해군은 강릉도(江陵道)의 남쪽 경계에 해당하는 곳이다. 강릉도는 북쪽의 철령(鐵嶺)에서부터 남쪽의 평해까지 대개 1200여 리의 지역을 관할하는데, 평해 이남은 경상도의 경내에 속한다. 이곳은 내가 일찍이 갔다가 온 일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는 기록하지 않는다.

 

[주D-001]법기보살(法起菩薩) : 《신 화엄경(新華嚴經)》 권45 보살주처품(菩薩住處品)에 나오는 보살의 이름으로,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오대산(五臺山)을 주처(住處)로 삼는 것처럼, 법기는 영산(靈山)인 금강산에 거한다고 한다. 금강산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으나 보통은 우리나라의 금강산으로 알려져 있다. 담무갈보살(曇無竭菩薩)이라고도 하는데, 담무갈은 범어 Dharmodgata의 음역이다. 참고로 가정이 원 순제(元順帝)의 명을 받아 지정(至正) 3(1343, 충혜왕 복위 4)에 지은금강산의 장안사(長安寺)를 중건한 비문아미타(阿彌陀) 53()과 법기보살과 좌우 노사나(盧舍那)가 해장궁(海藏宮)에 안치되어 있다.”라는 말이 나온다. 《稼亭集 卷6
[주D-002]관음보살(觀音菩薩) :
관 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준말이다. 고통 받는 중생들이 관세음보살의 명호(名號)를 암송하거나 일컫기만 하면 그 음성을 듣고서 바로 달려가 구원해 준다고 하는데, 구원을 청하는 양상이 다양한 만큼 보살 역시 천변만화한다고 해서 천수관음(千手觀音)이라고도 한다. 특히 달이 비친 바다 위에 하나의 흰 연꽃 위에 선 모양을 한 관세음보살상(觀世音菩薩像)을 수월관음(水月觀音) 혹은 백의선인(白衣仙人)ㆍ백의대사(白衣大士)라고 하며, 이 밖에 구세보살(救世菩薩)ㆍ연화수보살(蓮華手菩薩)ㆍ원통대사(圓通大士) 등의 별칭이 있다.
[주D-003]건축(乾竺) :
천축(天竺) 즉 인도(印度)를 가리킨다.
[주D-004]한 …… 없다 :
지 세가 험난해서 소수의 병력으로도 굳게 지킬 수 있는 요새를 말한다. 이백(李白)의 촉도난(蜀道難)검각이 험난하게 우뚝 솟아 버티고 있으니, 한 사나이가 관문을 지키면 만 명이 공격해도 열지 못할 것이다.〔劍閣崢嶸崔嵬一夫當關 萬夫莫開〕라는 표현이 나온다.
[주D-005]신라(羅) …… 한다 :
사 선정(四仙亭)은 신라 시대의 사선(四仙)이 사흘 동안 머물며 노닐었다는 곳에 그들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정자 이름이다. 그곳의 석벽에술랑도남석행(述郞徒南石行)’이라는 여섯 글자가 붉은 글씨로 새겨져 있다고 하는데, 사선의 이름과 관련하여 이 비문의 해석이 다양하여 아직 정설이 없다.
[주D-006]이승(李昇) 당(唐)나라 :
오 대십국(五代十國)의 하나인 남당(南唐)을 가리킨다. ()나라의 서고(徐誥)가 이승(李昇)으로 개명하고 칭제(稱帝)하며 금릉(金陵)에 도읍을 정하고는 국호를 당()이라고 하였는데, 이를 역사에서 남당이라고 부른다. 건국한 해는 A.D. 937년으로 신라가 망한 지 2년 되는 해요, 고려 태조 20년에 해당한다. 그로부터 39년이 지난 A.D. 975년에 북송(北宋)에게 멸망당하였다.
[주D-007]오십천(五十川) 팔영(八詠) :
죽 장고사(竹藏古寺)ㆍ암공청담(巖控淸潭)ㆍ의산촌사(依山村舍)ㆍ와수목교(臥水木橋)ㆍ우배목동(牛背牧童)ㆍ농두엽부(隴頭
)ㆍ임류수어(臨流數魚)ㆍ격장호승(隔墻呼僧)을 말하는데, 《가정집》 권20에 차삼척서루팔영시운(次三陟西樓八詠詩韻)이라는 제목의 칠언절구가 나온다.
[주D-008]장천(長川) :
지금 왕피천(王避川)이라고 불리는 하천이다. 경상북도 영양군(英陽郡)에서 발원하여 성류굴(聖留窟) 앞에서 매화천(梅花川)과 합류하여 동해로 들어간다.
[주D-009]화서(華胥) :
황 제(黃帝)가 낮잠을 자다가 꿈속에서 보았다는 이상 국가(理想國家)의 이름이다. 황제가 이 나라를 여행하면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이상적인 정치가 실현되는 꿈을 꾸고는, 여기에서 계발되어 천하에 크게 덕화(德化)를 펼쳤다는 전설이 전한다. 《列子 黃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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