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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집 제3권 번역

천하한량 2010. 1. 13. 01:16

가정집 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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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국(高麗國) 천태불은사(天台佛恩寺) 중건기

 


정 혜원통 지견무애 삼장법사(定慧圓通知見無礙三藏法師)의 호를 특별히 하사받고 대천원연성사(大天源延聖寺)ㆍ대보은광교사(大報恩光敎寺)의 주지(住持)와 고려 영원사(瑩原寺)의 주지를 겸한 복국우세 정명보조 현오 대선사(福國祐世靜明普照玄悟大禪師) 삼중대광(三重大匡) 자은군(慈恩君) 선공(旋公)이 천자의 명을 받들고 본국에 사신으로 왔다가 지원(至元) 무인년(1338, 충숙왕 복위 7) 가을에 장차 조정으로 돌아가려 할 즈음, 관소(館所)로 정한 불은사(佛恩寺) 승방으로 나를 초청하여 차를 끓이면서 말하기를,

옛 날 내가 연우(延祐) 갑인년(1314)에 왕경(王京)에 있을 적에 병에 걸렸는데 약을 먹고 치료를 해도 아무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이 절의 약사여래(藥師如來)에게 기도를 드렸는데, 그날 밤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영단(靈丹)을 주기에 복용하였더니, 그 다음 날에 병이 즉시 나았다. 이 일을 계기로 하여 그 가르침을 받들겠다고 죽음으로 맹서하면서사람이 정성스럽지 못한 것이 걱정이지, 정성스럽기만 하다면 어떤 것도 감동시킬 수가 있는 법이다. 더구나 그 응험이 신령스러운 약사여래인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실제로 그해부터 재물을 시주하고 공인(工人)을 고용하여 황금색의 륙(丈六) 보살(菩薩)을 조성하였으며, 그 뒤를 이어 대웅전을 신축하여 불상을 봉안하고 당무(堂廡)를 확장하여 승려들을 거하게 하였다. , 이렇게 해서 20여 년이 지난 지금 공사가 비로소 끝나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다행히 이곳에 와서 낙성(落成)을 독려(督勵)하게 되었고, 사원이 낙성되면서 내가 또 떠나게 되었으니, 이 일의 본말을 돌에 새겨서 나의 뜻을 이루고 싶다. 그대는 나를 위해 기문을 지어 달라.”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불씨(佛氏)의 도는 지극한데, 그 말이 광대하고 거창한 데다가 죄와 복을 받는다는 설이 사람의 마음을 꽤나 움직이기 때문에, 그 가르침이 천하에 성행하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우리 동방의 경우는 불씨를 더욱 독실하게 신봉하는 까닭에, 지우(智愚)나 노유(老幼)를 막론하고 사람들 모두가 불씨를 알고 있다. 그리하여 사상(死喪)이나 환난을 당할 때면 으레 부처에게 호소하면서 부처가 아니면 하루도 이 세상에 살 수 없는 것처럼 여기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불찰(佛刹)이 서로 바라다볼 수 있을 만큼 이어져서 인가의 거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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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모두가 새로 짓는 것만을 좋아할 뿐이요, 당간이 부러지거나 초석이 깨어져도 사람들이 그런 것은 돌아보려고 하지 않는다. 본사(本寺)는 광왕(光王 광종(光宗)) 때 약사여래의 도량이 되면서부터 국가의 의지처가 되었는데, 그 뒤에 병화로 소진되었으므로 위치를 조금 동쪽으로 옮겨 건물을 짓고는 그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러다가 지금 몇백 년의 세월이 지나서 공이 다시 옛터를 닦아 신축하기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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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런데 세상에서 탑묘(塔廟)를 만들 적에 관청에 돈을 구걸하기도 하고 백성의 노동력을 착취하기도 하여 나라를 병들게 하는 자들이 있는데, 공은 그렇게 하지 않고서 그동안 비축해 둔 물자는 물론이요 자기의 소유까지도 모두 희사해서 오랜 세월 동안 열심히 공들인 결과 이제 낙성을 보게 되었으니, 이는 기록해 둘 만한 일이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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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대대로 벼슬을 한 귀족의 후예로서 용맹심을 발휘하여 속세의 영화를 버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중국에 들어가 유자와 불도 사이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며, 마침내는 천자의 은총을 입고 은명(恩命)을 받아 종문(宗門)을 빛내는 한편 이름을 국사(國史)에 떨치게 되었다. 그리고 국왕의 융숭한 대우를 받고서 1품의 직질(職秩)로 뛰어올라 승류(僧流)의 어른이 되었으니, 이는 참으로 만승(萬僧)의 영수(領袖)가 된 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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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중에는 일단 뜻을 얻고 나면 처음에 품은 뜻을 저버리는 자들도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공의 경우는 중외(中外)에 출입하면서 이처럼 영광과 은총을 입었고 또 경사(京師)에 산 지도 15년이 되어 가는데, 종교를 부지(扶持)하고 이 사원을 중흥하려는 뜻을 하루도 가슴속에서 망각한 적이 없었으니, 이 또한 기록에 남겨 둘 만한 일이라고 할 것이다. 기타 토목의 공정과 같은 일상적인 일에 대해서는 생략하고 기록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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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찰이 어느 시대에 창건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예전에는 이름을 유암(留岩)이라고 하였다. 광왕(光王)이 날마다 이 절에서 재()를 올렸는데, 그때마다 참여하는 승려의 숫자가 항상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승려 한 사람이 모자랐으므로 길에서 한 명의 승려를 불러들였는데, 유독 생김새가 매우 추악하였으나 우선 그를 자리 아래에 앉게 하였다. 그러자 좌우의 승려들이 그를 희롱하면서 말하기를막내 비구야, 왕궁의 재에 참석했다고 말하지 말라.”라고 하였는데, 그 승려가너희들도 약사여래(藥師如來)를 친견했다고 말하지 말라.”라고 하고는, 말을 마치자마자 공중으로 올라가더니 마침내 유암사의 우물 속으로 몸을 감췄다고 한다. 왕이 이에 그 절을 크게 확장하고 신봉하며 마침내 불은사라고 이름을 고쳤다는데, 이는 국인(國人) 사이에 서로 전해 오는 이야기이다.

 

[주D-001]장륙(丈六) 보살(菩薩) : 장 륙은 부처의 별칭이다. 《후한서(後漢書)》 권88 서역전(西域傳) 천축(天竺)서방에 부처라는 신이 있는데, 그 모양을 보면 신장이 1 6척에 황금색을 띠고 있다.〔西方有神 名曰佛 其形丈六尺而黃金色〕라는 말이 나오는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두 보살은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의 좌우 협시보살(夾侍菩薩)로서 각각 지혜와 자비를 상징하는 문수(文殊)와 보현(普賢)을 가리킨다.

 

 

 

금강산(金剛山) 도산사(都山寺) 창건 기문

 


해동의 산수는 천하에 이름이 나 있는 바이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금강산의 기막힌 경치는 첫손에 꼽히고 있는 터이다. 게다가 불서(佛書)담무갈보살(曇無竭菩薩)이 주재(住在)한다는 설이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마침내 인간 정토(人間淨土)라고까지 말하게 되었다. 그래서 천자가 내린 향과 폐백을 받들고 오는 중국의 사신들이 끊이지 않고 길에 이어지는가 하면, 사방의 사녀(士女)들이 천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서 소에 싣고 말에 싣고 등에 지고 머리에 이고는 불승(佛僧)을 공양하기 위해 서로 줄을 잇고 있는 실정이다.
금강산 서북쪽에 고개가 있는데 비스듬히 깎아지르고 험준하여 마치 하늘에 올라가는 것과 같으므로 사람들이 이곳에 이르면 반드시 한참 동안 배회하며 휴식을 취하곤 한다. 또 이 지역은 궁벽해서 거주하는 백성도 극소수이기 때문에 풍우를 만나기라도 하면 노숙하느라 애를 먹기 일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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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至元) 기묘년(1339, 충숙왕 복위 8)에 쌍성 총관(雙城摠管) 조후(趙侯)가 산승 계청(戒淸)과 상의한 뒤에 요충(要衝)인 임도현(臨道縣)에 몇 경()의 땅을 매입하여 불사(佛寺)를 창건하고는 임금을 축원하는 도량으로 삼았다. 그리고 봄과 가을에 선박으로 곡식을 수송하여 출입하는 자들을 먹이는 한편, 그 나머지를 산속의 여러 사찰에 분배해서 겨울과 여름의 식량에 충당하게 하고는, 해마다 그렇게 하는 것으로 규례를 정하였다. 그래서 그 사원의 이름을 도산(都山)이라고 내걸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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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후가 이 절을 경영할 적에 경내의 승도(僧徒)에게 명령하기를부도(浮圖 승려)가 된 자에 대해서는 나도 잘 알고 있다. 위로는
사은(四恩)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삼도(三塗)를 제도(濟度)한다고 하지 않는가.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는 절학무위(絶學無爲)의 경지에 오른 자가 상등인(上等人)이요, 열심히 강설하면서 쉬지 않고 교화하는 자가 차등인(差等人)이요, 머리 깎고 편히 거하면서 부역을 피하고 재산이나 모으는 자는 하등인(下等人)이라고 할 것이다. 승려가 되어 하등인으로 전락한다면, 이는 불씨의 죄인이 될 뿐만이 아니라 국가의 유민(游民 일정한 직업이 없이 놀고먹는 백성)이 되고 마는 것이다. 너희들이 이미 관가의 부역에도 응하지 않으면서 나의 일을 돕지도 않는다면 처벌할 수밖에 없다.”라고 하였다.
이 에 승려들이 한편으로는 부끄러워하고 한편으로는 기뻐하면서 서로 다투어 각자 기예를 바치려고 모여들어, 도끼를 잡은 자는 도끼질을 하고 톱을 가진 자는 톱질을 하고, 깎고 다듬고 바르고 맥질하였다. 그리하여 조후가 자기 집의 곡식을 운반하여 그들을 먹이고, 자기 집의 기와를 걷어 내어 지붕을 덮으면서, 백성의 힘을 빌리지 않고 금세 일을 마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공사가 일단 마무리되자 사람을 나에게 보내 기문을 써 달라고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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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조후와 알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지만, 그가 현능(賢能)하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다. 무릇 어떤 일을 행하든 간에 만물에 이롭고 사람에게 편리하도록 도모해야 마땅하니, 자기만을 위해서 복을 구하는 것은 하찮은 일이라고 할 것이다. 대저 임도현은 한 산의 요해지이다. 그래서 여기에 사찰을 경영해서 출입하는 자들을 편하게 해 주려고 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쌍성(雙城)도 한 지방의 요해지이니, 이 마음을 미루어서 정사를 행한다면 인민을 편하게 해 주는 것이 반드시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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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동남쪽 변경의 백성들이 유랑하다가 그 경내로 들어오자, 조후가 그 사유를 힐문하여 책망하고는 거절하며 받아들이지 않고 말하기를그대들은
항산(恒産) 없어서 항심(恒心) 없게 까닭에 이처럼 유랑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항심이 없으면 어디를 간들 용납받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나는 이 일을 통해서 조후의 사람됨을 더욱 알게 되었다. 그러니 어찌 감히 기문을 써 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조 후의 이름은 임()이다. 일찍이 본국의 조정에 들어와 벼슬을 하다가 선왕을 수행하여 연경(燕京)에 가서 5년 동안 체류하였다. 그 공을 인정받아 세 번 옮긴 끝에 대호군(大護軍)이 되었고, 다시 승진하여 검교 첨의평리(檢校僉議評理)가 되었으며, 지금은 가업을 계승하여 쌍성등처 군민총관(雙城等處軍民摠管)으로 있다. 성품이 유교와 불교를 좋아하고 유람이나 사냥은 좋아하지 않으며, 시서에 통하고 예의를 숭상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 점을 훌륭하게 여기고 있다.

 

[주D-001]담무갈보살(曇無竭菩薩) : 담 무갈은 범어(梵語) Dharmodgata의 음역으로, 《신화엄경(新華嚴經)》 권45 보살주처품(菩薩住處品)에 나오는 보살의 이름이다. 보통 법기보살(法起菩薩)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이 밖에도 법희보살(法喜菩薩)ㆍ법기보살(法基菩薩)ㆍ보기보살(寶基菩薩)ㆍ법상보살(法尙菩薩)ㆍ법용보살(法勇菩薩) 등의 별칭이 쓰인다.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오대산(五臺山)을 주처(住處)로 삼는 것처럼, 법기는 영산(靈山)인 금강산에 거한다고 하는데, 금강산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으나 보통은 우리나라의 금강산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주D-002]사은(四恩) :
불 교에서 말하는 네 가지의 중한 은혜를 말한다. 부모은(父母恩)ㆍ중생은(衆生恩)ㆍ국왕은(國王恩)ㆍ삼보은(三寶恩)이라는 설과 사장은(師長恩)ㆍ부모은ㆍ국왕은ㆍ시주은(施主恩)이라는 설과 천하은(天下恩)ㆍ국왕은ㆍ사장은ㆍ부모은이라는 설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주D-003]삼도(三塗) :
지옥(地獄)ㆍ축생(畜生)ㆍ아귀(餓鬼)의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진 중생들을 말한다.
[주D-004]절학무위(絶學無爲) :
스 스로 도를 깨우친 결과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어서 할 일이 없어진 불교 최고의 경지를 뜻한다. ()나라 선승(禪僧) 영가 현각(永嘉玄覺)이 지은 증도가(證道歌) 첫머리에그대는 배움을 끊어 버린 채 아무 할 일도 없이 그저 한가하기만 한 도인을 보지 못했는가. 그는 굳이 망상을 없애려 하지도 않고 참된 진리를 찾으려 하지도 않는다. 그와 같은 사람에게는 무명의 참성품이 바로 불성이 되고 허깨비 같은 빈 몸이 바로 법신이 된다.〔君不見 絶學無爲閑道人不除妄想不求眞 無明實性卽佛性 幻化空身卽法身〕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5]항산(恒産)이 …… 것이다 :
《맹 자(孟子)》 양혜왕 상(梁惠王上)일정한 생업이 없어도 언제나 선한 본심을 견지할 수 있는 것은 선비만이 가능한 일이다. 일반 백성의 경우는 일정한 생업이 없으면 선한 본심을 지킬 수 없게 된다. 이처럼 선한 본심이 없어지게 되면 방탕하고 편벽되고 간사하고 넘치게 행동하는 등 못할 짓이 없게 된다.〔無恒産而有恒心者惟士爲能 若民則無恒産 因無恒心 苟無恒心 放僻邪侈無不爲已〕라는 말이 나온다.

 

 

 

 

대화엄보광사(大華嚴普光寺)를 중건한 기문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도읍한 곳이 지금은 전주(全州)가 되었다. 전주 남쪽 만덕산(萬德山)에 보광(普光)이라는 절이 있는데, 이곳은 바로 백제 시대에 세워진 대가람(大伽藍)으로서 화엄(華嚴)의 교법을 강설한 곳이다.
비 구 중향(中向)이 어려서부터 이 산에서 자라났는데, 그 보찰(寶刹)이 퇴락해 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개연히 중건할 뜻을 품었다. 그러던 차에 전주 사람으로 지금 자정사(資政使)인 고공 용봉(高公龍鳳)이 상에게 지우를 받고 있고, 그의 성품 또한 선을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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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통(元統) 갑술년(1334, 충숙왕 복위 3)에 배로 바다를 건너 중국을 유람하다가 연경에서 그를 만나 말하기를공이 변지(邊地)에서 태어나 상국(上國)에서 이와 같이 뜻을 얻은 것은 어찌 인과의 소치가 아니겠는가. 대개 전세에서 행한 일을 금세에서 징험할 수 있으니, 이와 마찬가지로 금세에서 행한 일도 반드시 후세에 과보(果報)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공이 유악(帷幄)에서 가까이 모시며 밤이나 낮이나 상의 좌우에서 반걸음도 떠나지 못하고 있기에, 향당에 있는 친척과 붕우들은 공이 얼마나 우악(優渥)하게 상의 은총을 받고 있으며 얼마나 화려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있으니
, 이것은 이른바 비단옷을 몸에 걸치고서 밤에 아다닌다고 하는 격이다. 만약 향당에 사우(祠宇)를 건립하여 위로 임금을 위해 축수하고 아래로 생령과 복을 함께 누리는 동시에, 우뚝이 한 지방 사람들이 귀의하는 장소가 되게 하여 보고 듣는 사람들이 모두 모()가 한 일이라고 말하게끔 한다면, 이는 대낮에 비단옷을 입고 다니는 격이 될 것이니,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 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공이 흔연히 승낙을 하고는 저폐(楮幣) 약간 꿰미를 내어 본사(本寺)를 새롭게 하고 삼장(三藏 대장경(大藏經)) 을 비치하게 하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공이 재신(宰臣)의 시기를 받아 남쪽 변방으로 나가 거하게 되었다. 그래서 중향도 산으로 돌아와서 동우(棟宇)를 수선하며 공이 속히 복귀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축원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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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지정(至正)으로 개원(改元)하기 두 달 전에 권간(權姦)을 배척하여 축출하고 정치와 교화를 경장(更張)하였다. 그리하여 풍정(風霆)처럼 호령을 발하고
뇌우(雷雨)처럼 풀어 적에 공도 사환(賜環) 은혜를 입고 돌아와서 상의 사랑을 더욱 새롭게 받게 되었다.
이 에 중향이 다시 연경으로 들어가니, 공이 예전에 자신의 뜻대로 마무리하지 못한 것을 아쉽게 여기고는 그 비용을 더 지급해서 속히 이루도록 독려하는 한편, 오래도록 쓸 자금을 대주어 본전은 그대로 놔두고 이식(利息)을 활용해서 세시마다
전장(轉藏) 법회를 열도록 하였다.
공 이 전후에 걸쳐 시주한 돈을 천 단위로 합산하면 2만 하고도 5000전이요, 색상을 새롭게 하려고 도금한 황금이 15근이었으며, 은사(銀絲)로 기명(器皿)을 장식한 백금이 30근이었다. 새로 지은 건물은 모두 100여 동으로, 불전(佛殿)ㆍ승당(僧堂)ㆍ빈헌(賓軒)ㆍ장실(丈室)을 비롯해서 해장(海藏)ㆍ향적(香積)ㆍ위광(威光)ㆍ조음(潮音) 등의 전각이 모두 갖추어졌다. 낭무(廊廡)가 날개처럼 펼쳐져 있고 원장(垣墻)이 사방을 두른 가운데, 문정(門庭)과 계사(
)는 등강(登降)과 주선(周旋)에 편리하도록 옛날의 제도를 증감해서 모두 적당하게 하였다.
공사는 정축년(1337, 충숙왕 복위 6) 봄에 시작해서 계미년(1343, 충혜왕 복위 4) 겨울에 완료하였다. 공사가 모두 끝나는 달에 산인(山人) 참숙(
) 등과 함께 단연(檀緣 시주한 신도) 들을 널리 모아 화엄 법회를 대대적으로 개최하여 낙성했는데, 이때 참석한 승중(僧衆) 3000명이요 기간은 50일이었다. 그 밖에 분주히 돌아다니며 공양하고 찬탄하는 사녀(士女)들이 골짜기를 가득 메우고 산등성이에 넘쳐흘렀는데, 그 숫자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에 중향이 이 일의 전말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는 마침내 고공(高公)의 명을 받들고 나에게 와서 기문을 청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견씨(甄氏)가 본국에 편입된 뒤로 40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그래서 그 사원이 비록 백제 시대에 창건되었다고는 하지만, 누차 병화를 입어서 비기(碑記)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언제 세워졌는지 확실한 연대를 상고할 수가 없다. 그 뒤로 중건되기도 하고 폐허로 변하기도 하다가 마침내는 오늘날에 와서 고공을 운명적으로 만나고 나서야 옛날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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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경사와 5000리나 떨어진 삼한의 땅에서 태어났다. 그런데도 후원자를 잘 만나고 때를 잘 만난 덕분에 천자의 일월과 같은 광채에 의지하고 우로와 같은 은혜를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영향력이 향국(鄕國)에까지 많이 미쳤으며, 그 밖에도 대대적으로 불사(佛事)를 펼쳐 복을 축원하고 은혜에 보답하면서 끝없이 전해지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우연히 이루어진 일이라고 하겠는가. 대저 봄에 씨를 뿌리면 가을에 반드시 거두게 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눈으로 보기 때문에 의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불씨의 인과설에 대해서만 유독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마침내 그들의 말을 인용해서 이렇게 기문을 짓게 되었다.

 

[주D-001]이것은 …… 격이다 : 고 향 사람 중에 그의 부귀를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리라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항우(項羽)가 진()나라 궁실이 모두 불타서 잿더미로 변한 것을 보고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면서부귀한 신분이 되었는데도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다면, 이는 비단옷을 몸에 걸치고서 밤에 돌아다니는 것과 같다.〔富貴不歸故鄕 如衣錦夜行〕라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 《漢書 卷31 項籍傳》
[주D-002]뇌우(雷雨)처럼 …… 적에 :
뇌 우는 각각 위엄과 은혜를 뜻하는 말로, 황제가 사면령(辭免令)을 내린 것을 말한다. 《주역(周易)》 해괘(解卦) ()우레 치고 비가 내리는 것이 해이다. 군자는 이 상을 보고서 잘못을 저지른 자를 사면하고 죄 지은 자를 너그럽게 처리한다.〔雷雨作解 君子以 赦過宥罪〕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3]사환(賜環) 은혜 :
신 하가 사면을 받고 다시 조정으로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순자(荀子)》 대략(大略)임금이 조정을 떠난 신하에 대해서 용서하지 않고 결별하는 뜻을 보일 때에는 한쪽이 떨어진 패옥을 보내고,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일 때에는 고리가 완전히 이어진 옥환을 보낸다.〔絶人以玦 反絶以環〕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4]전장(轉藏) :
대 장경(大藏經)을 전독(轉讀)하여 복을 기원하는 것을 말한다. 전독은 1()의 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 진독(眞讀)과 상대되는 말로, 불경이 너무 방대한 점을 감안해서 법회 때에 불경의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의 몇 줄 정도만 간략히 읽고 끝내는 것을 말한다.

 

 

 

새로 지은 심원루(心遠樓)의 기문

 


중 향(中向) 스님이 보광사(普光寺)를 중건한 것에 대해서는 내가 이미 기문에서 밝힌 바가 있다. 그런데 그가 사원의 동북쪽 모퉁이에 다시 누대를 세우고는 나에게 그 이름을 청하였다. 내가 말하기를이름이란 내용을 토대로 하여 나오는 것으로서, 그 사물과 비슷한 종류의 이름을 찾아내어 명명(命名)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귀로 듣지도 못하고 눈으로 보지도 못했는데 억지로 이름을 지으라고 한다면, 이는 귀머거리에게 귀를 빌리는 것과 같고 소경에게 길을 묻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중향이 말하기를사람이 태어날 때 천지의 기운을 품부받고서 오행을 번갈아 쓰게 되는데, 사시(四時)에 맞게 적용하는 것이 각각 다르다. 그래서 겨울에는 따뜻하게 하려고 하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하려고 하며, 거처에 깊이 들어앉아서 사려를 정리해 보려고 하고 높은 곳에 올라가서 심신을 풀어 보려고 하는 것이니, 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는 생각으로서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지금 나의 절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땅이 낮고 좁기 때문에 이 경내로 들어오기만 하면 마치 벽으로 둘러싸인 방 안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받는다. 따라서 이 누대를 지은 것도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려고 해서가 아니다. 그 목적은 여기에 거주하는 사람이나 여기에 찾아오는 사람으로 하여금, 찌는 듯한 무더위 속에 초목이 울창하게 우거지고 흐르는 땀이 몸을 적시면서 기식(氣息)이 실낱같이 되는 때나, 봄꽃이 산을 뒤덮고 가을 달빛이 골짜기를 가득 채우는 때에, 차를 끓이며 이 누대에 올라앉아서 가슴속에 쌓인 번뇌를 몰아내고 막힌 응어리를 풀어 보게 하려는 것일 따름이다. 그런데 그대는 어찌하여 이처럼 완강하게 거절하는 것인가.”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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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찍이 듣건대, 불법을 배우는 무리는 그 육신을 마른 나뭇등걸처럼 하고, 그 마음을 불 꺼진 재처럼 하여, 오직 산이 깊지 않고 거처가 외지지 않아서 외물에 빠지게 될까 걱정한다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벽에 얼굴을 대고서 돌아보지 않은 자도 있었고, 자기의 거처를 둥우리처럼 만들거나 바위 굴 속에 방을 만든 자도 있었던 것이다. 만약 사는 곳이 외진 것을 싫어한 나머지 크게 집을 확장하여 과시하고, 산이 깊은 것을 혐오한 나머지 용마루를 높이 내걸어 압도하면서, 시절마다 오르락내리락하며 자기 마음에 맞게 하고 자기 편할 대로만 한다면, 이러한 일은 우리 유자(儒者)라도 검박한 마음의 소유자라면 하지 않을 것인데, 불자(佛者)가 하겠는가. 그렇긴 하지만 누대가 이미 세워졌고 또 기문을 청하는 것이 간절하기만 하니, 우선 땅이 외진 것은 마음이 멀기 때문이다’라는 뜻을 취해서 심원루(心遠樓)라고 이름을 지어 볼까 한다.
비 록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마음의 속성으로 말하면 본래 원근과 피차의 구별이 없는 것이다. 유자는 정심(正心)을 하여 이를 통해 수신(修身)을 하고 나아가 제가(齊家)ㆍ치국(治國)ㆍ평천하(平天下)를 하며, 불자는 관심(觀心)을 하여 이를 통해 수행(修行)을 하고 나아가 견성(見性)ㆍ성불(成佛)ㆍ자리이타(自利利他)를 하는 것인데, 요컨대는 참으로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보거나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존심 양성(存心養性)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그래서 선유(先儒)
《관심론(觀心論)을 비난하면서마음은 하나일 뿐인데, 무슨 마음을 가지고 이 마음을 본다는 말인가.”라고 했던 것이다.
이 렇게 해서 일단 그의 요청을 들어주고는 이 말을 기문에 쓰도록 해서, 이 누대에 오르는 자로 하여금 외경(外境)과 내심(內心)이 융회(融會)하게 하고, 심원루라는 이 이름을 통해서 그 의미를 찾게 하는 한편, 우리 유자의 말도 고의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대개는 서로 드러내 밝히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임을 알게끔 하였다. 이 누대의 면세(面勢)와 관람(觀覽)의 흥치 같은 것은 꼭 써야 할 것이 아니기에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주D-001]벽에 …… 있었고 : 불 가의 면벽(面壁) 좌선(坐禪) 수행을 말한다. 보리달마(菩提達摩)가 남조(南朝) ()나라 때 인도에서 중국에 온 뒤에,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 머물면서 9년 동안이나 아무 말 없이 벽만 쳐다보고 좌선을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벽관바라문(壁觀婆羅門)이라고 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景德傳燈錄 卷3
[주D-002]자기의 …… 만들거나 :
()나라 우두종(牛頭宗)의 승려 조과 도림(鳥窠道林)이 진망산(秦望山)의 장송(長松) 위에 둥지를 틀자 사람들이 조과 선사(鳥窠禪師)라고 칭했으며, 그 옆에 또 까치 둥지가 있었으므로 작소 화상(鵲巢和尙)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백거이(白居易)가 그에게 불법의 대의를 묻자, “악을 짓지 말고 선을 봉행하라.〔諸惡莫作 衆善奉行〕라고 답한 고사가 유명하다. 《景德傳燈錄 卷4
[주D-003]땅이 …… 때문이다 :
도 잠(陶潛)의 음주(飮酒) 20수 중에내 집이 사람 사는 동네에 있어도, 내 귀에는 시끄러운 거마 소리가 안 들리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마음이 멀면 땅은 절로 외진다고 답하겠소.〔結廬在人境 而無車馬喧 問君何能爾 心遠地自偏〕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4]관심론(觀心論) :
남 조 양나라의 보리달마가 지은 것과 수()나라 천태대사(天台大師) 지의(
)가 지은 두 종류가 있는데, 보통 지의의 저술을 가리킨다. 그리고 수나라의 관정(灌頂)이 해설한 《관심론소(觀心論疏) 5권이 전하는데, 이는 지의의 《마하지관(摩訶止觀)》 사상에 의거하여 《관심론》의 주지(主旨)를 선양한 명저로 꼽힌다.

 

 

 

경사(京師) 곡적산(穀積山) 영암사(靈巖寺) 석탑의 기문

 


영암사 동쪽 봉우리에 있는 석탑은 전() 동지민장총관부사(同知民匠摠管府事) 박쇄노올대(朴瑣魯兀大)사리(舍利)를 보관하기 위해서 세운 것이다. 사리탑은 불서(佛書)에도 기재되어 있으니, 예컨대 석씨(釋氏 석가모니) 생존해 있을 당시에 칠보(七寶) 만든 탑이 땅속에서 솟아났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부처가 입멸(入滅)한 뒤에 아육왕(阿育王)이 조성한 탑들이 서역에 즐비하였고 또 천하에도 두루 퍼졌다고 하는데, 지금 수많은 세월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곳이 이따금씩 보인다고 한다.
박 군(朴君)은 삼한 사람이다. 원나라에 들어가서 내시(內侍)가 되어 오랫동안 은혜를 입었으므로, 상에게 보답하고 세상을 이롭게 할 방도를 생각하다가, 속립(粟粒)처럼 자그마한 불사리(佛舍利) 하나라도 얻어서 공경히 공양하면 이른바 한량없는 복덕을 반드시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마음속으로 구하여 마지않다가 마침내 몇 알의 사리를 얻어서 몇 년 동안이나 받들어 간수해 오더니, 이윽고 말하기를사리는 은현(隱見)이 무상해서 사람의 근태(勤怠)에 따른다고 한다. 지금 내가 늙었는데, 만약 명산의 복지(福地)에 보관해 두지 않는다면, 후손들이 혹 나처럼 경신(敬信)하지 않을 경우, 어찌 우리 집안의 소유가 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공인(工人)을 모집하여 부도(浮屠)의 법도에 맞게 석감(石龕)을 만들고 그 중심에 사리를 보관하였으며, 그 외면을 팔각의 형태로 만들어 제불(諸佛)의 형상을 조각하였다. 그리고는 거기에 새겨 넣을 수 있도록 기문을 써 달라고 나에게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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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불자의 말을 들어 보니, 사리는 범어를 음역한 것인데, 견고하다는 뜻이 그 속에 들어 있다고 한다. 혹 이 말을 믿지 못해서 금석(金石)을 가지고 사리를 깨뜨려 보려고 하고, 탄화(炭火)를 가지고 사리를 녹여 보려고 하더라도, 금석이 부서지고 탄화가 꺼질지언정 사리는 그대로 있으니, 이는 대개 사리가 불성을 표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박군이 이런 사리를 제대로 얻어 가졌고 또 보관할 장소를 제대로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이를 보고 예배하며 함께 복을 나누도록 하였으니, 이 석탑이 넘어지면 넘어졌지 상에게 보답하고 세상을 이롭게 하려는 그 마음만은 응당 견고해서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기문을 짓게 되었다.

 

[주D-001]사리(舍利) : 범어(梵語) śarīra의 음역으로, 사시(死屍)나 유골(遺骨)을 의미한다. 통상 부처의 유골을 가리키는데, 후대에는 고승이 죽은 뒤에 시신을 불태우고 남은 골두(骨頭)도 사리라고 칭하였다.
[주D-002]사리탑은 …… 그것이다 :
부 처의 앞에 칠보(七寶)의 번개(幡蓋)로 장식된 탑이 땅속에서 솟아 공중에 나타났다는 기록이 《법화경(法華經)》 견보탑품(見寶塔品)에 나온다. 칠보는 금()ㆍ은()ㆍ유리(琉璃)ㆍ차거(車渠)ㆍ마노(瑪瑙)ㆍ진주(眞珠)ㆍ매괴(玫瑰)를 말한다.
[주D-003]아육왕(阿育王) :
아 육은 범어 Aśoka의 음역이다. 중인도(中印度) 마갈다국(摩揭陀國)의 왕으로 기원전 3세기에 인도를 통일하였다. 대대적으로 불사(佛事)를 일으키고 도처에 사탑(寺塔)을 세웠으며,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하고 승중(僧衆)을 공양하는 등 불교를 보호한 최대의 후원자였다.

 

 

 

 

 

조 정숙공(趙貞肅公) 사당의 기문

 


지 정(至正)으로 개원(改元)하던 해의 봄에 내가 정동행성(征東行省)의 막부에 있었는데, 찬성사(贊成事) 조공(趙公)이 그의 조카 평원군(平原君)과 함께 가전(家傳)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서 기문을 요청하며 말하기를선군 정숙공은 사직을 위해 공을 세웠고, 후세에 전할 만한 덕도 남겼다. 그런데 유당(幽堂)에 묘지명이 있긴 하나 신도(神道)에는 아직 비문을 새기지 못하였다. 가승(家乘)이나 국사(國史)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니, 세월이 오래 흐르다 보면 인멸되어 전해지지 못할까 걱정이 된다. 그리고 선군은 일찍이 주택 뒤에다 집 한 채를 짓고 그곳에 한가히 거하면서 기원(祇園)이 라고 칭하였다. 그래서 지금 그 안에 선군의 초상화를 걸어 놓고 시절에 따라 제사를 모실까 한다. 그리고 이와 함께 뜰 안에다 비석을 세워 선군의 공과 덕을 갖춰 새김으로써 자손으로 하여금 익히 접하고 가슴에 새겨 선군의 뜻을 실추시키지 않고 선군의 교훈을 망각하지 않게 하려고 한다. 그러니 그대는 사양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때 내가 마침 임기가 만료되어 연경(燕京)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그 요청에 부응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지금 와서 정숙공의 자제인 삼장법사(三藏法師) 선공(旋公)이 연산(燕山)에 주석(住錫)하면서 나를 볼 때마다 그 일을 언급하며 말하기를내가 비록 부도의 법을 배우고 있기는 하지만, 하늘처럼 끝없는 어버이의 은혜를 어떻게 감히 잊을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그 말이 더욱 절실하고 그 청이 더욱 간절하였으므로, 내가 그 대략적인 내용을 서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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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인간이 살아온 오랜 시간 동안 다스려지면 혼란스러워지는 치세와 난세가 반복되었다.
근래에는 당가(唐家)가 쇠하자 오계(五季 오대(五代)) 가 번갈아 일어나면서 크게 혼란스러워졌고, ()와 금()이 송()과 더불어 남북으로 분열된 가운데 전쟁이 그치지 않았으므로 생민이 도탄에 빠진 것이 극에 이르렀다. 이에 하늘이 좋은 시운을 열어 주어 성군이 잇따라 일어나고 명신이 계속해서 나오게 한 결과, 천하를 통일하여 뭇사람들의 뜻을 안정시키고 같은 문자와 수레를 쓰게 해서 풍속을 변화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러고 보면 《주역(周易)》에서 위대하도다 건원이여, 만물이 여기에서 비로소 나온다.”라고 한 말도 바로 황원(皇元)을 지칭한 것이라고 하겠다.
정숙공(貞肅公)은 태종(太宗) 9년 정유년(1237, 고종 24)에 태어났다. 이때는
변채(汴蔡)를 얼마 전에 거두어들여 천하가 거의 평정되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아직은 남쪽과 서쪽으로 정벌하는 일이 그치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본국은 그때 이미 원나라에 귀부(歸附)하였다고는 하나, 권신의 제지를 당하여 강화(江華)에 임시로 도읍했기 때문에, 제때에 입조(入朝)하지 못하는 등 제후의 직분을 충실하게 이행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천병(天兵)이 국경을 압박하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또한 국가의 안위가 걸리고 인심의 향배가 결판나는 때인 동시에 속습이 바뀌기 시작하고 삼한이 다시 세워지는 때였다고 할 것이다.
이 때를 당하여 중국과 사방의 다른 나라들이 비로소 교통하기 시작하였는데, 윗사람의 덕을 선포하고 아랫사람의 정을 전달할 때면 으레 통역관의 도움을 받곤 하였다. 그때에 공이 중국어에 능하고 응대하는 말을 잘하였으므로 발탁되어 높은 관직에 뛰어올랐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관복을 착용하고 입조하여 빈객과 대화를 나누었고, 마침내는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보호하여 사직을 지키는 신하가 되었으니, 공이 이때에 태어나 활약한 것을 살펴보면 어찌 우연이라고만 할 수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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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至元) 기사년(1269, 원종 10)에 충렬왕이 세자의 신분으로 원()나라에 입조할 적에 공이 실로 수행하였고, 갑술년(1274)에 황제의 딸을
이강(釐降)하 여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는데, 공이 안에 들어와서 왕을 대할 때에는 국가의 이해관계에 대해서 두루 진달하였고, 밖에 나가서 왕을 수행할 때에는 간난신고(艱難辛苦)를 빠짐없이 맛보았다. 그러는 가운데 권간(權姦)을 복주(伏誅)하여 명분을 바로잡고, 도읍을 회복하여 나라를 안정시킴으로써, 바다 모퉁이의 창생들로 하여금 지금까지 생을 즐기며 베개를 편히 하고 눕게 하였으니, 공의 공로가 크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에 앞서 원나라 조정에서 사자로 파견한 흑적(黑的)이 유감을 품고 말을 꾸며 분란을 일으키려 하면서 상을 오도한 일이 있었고, 탐라(耽羅)와 평양(平壤) 사람들이 중국의 내군(內郡)에 직속(直屬)되어 거꾸로 자기 주인을 향해 짖어 댄 일이 있었고, 유둔(留屯)한 장수들 중에 해를 끼친 자들이 있었는데, 얼마 후 모두 그만두고 떠나게 한 일이 있었으며, 그 뒤에 유민들과 강제로 끌려가서 요동(遼東)과 심양(瀋陽)에 억류된 백성들을 모두 귀국시킨 일이 있었고, 아첨하는 신하가 일본을 다시 정벌하자는 의논을 제창하고는 군사를 일으켜 우리나라를 해치려 했으나 그 일을 중지시킨 일이 있었으니, 그때마다 공이 분주히 주선하며 전대(專對)한 덕분에 일이 모두 원만하게 해결되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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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공을 보내 상에게 주청할 때마다 상이 안으로 불러서 접견하고는 매우 우악(優渥)하게 위무하였으며, 공이 말하는 것이면 들어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 세조(世祖)가 일찍이 공에게 이르기를그대는 고려국의 사람이 아니더냐. 그런데도 어쩌면 그토록 아뢰고 대답하는 것이 자상하고 분명하단 말이냐. 사색(辭色)과 거지(擧止)를 보더라도 전혀 동방의 사람 같지가 않다.”라고 하였다. , 국가를 중흥한 공로를 따진다면, 공보다 앞서는 자가 있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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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인규(仁規), 자는 거진(去塵)이니, 평양군(平壤郡) 사람이다. () 휘 영()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에 추증되었고, () 이씨(李氏)는 내원승(內園丞) 문간(文幹)의 따님으로 토산군부인(土山郡夫人)에 봉해졌다. 이씨 부인이 품 안으로 태양이 들어오는 꿈을 꾸고는 얼마 뒤에 잉태하여 마침내 공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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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태어나면서부터 남다르게 영특하였으며, 장난하고 희롱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조금 장성해서는 글을 읽을 줄 알았는데, 대의를 대략 통하자 곧 그만두고, 무직(武職)을 통해 벼슬길에 진출하였다. 처음에 제교(諸校)를 거쳐서 몇 차례 옮긴 끝에 장군이 되고, 지합문사(知閤門事)가 되고,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고 좌승선(左承宣)이 되었으며, 그 뒤 네 차례 옮긴 끝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추밀원 부사가 되고, 두 차례 옮긴 끝에 어사대부(御史大夫)와 태자 빈객(太子賓客)이 되었다. 그리고 빈객으로 있다가 금자광록대부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 승진하였으며, 곧 이어 평장시랑(平章侍郞)의 지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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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년(1290, 충렬왕 16)에 상이 가의대부(嘉議大夫) 고려왕부 단사관(高麗王府斷事官)에 특별히 제수하고, 이어서 금호부(金虎符)를 내려 공의 유능함을 표창하였다. 임진년(1292)에 시중(侍中)이 가해졌다. 대덕(大德) 을사년(1305)에 재차 승진하여 판도첨의사사(判都僉議司事)가 되었다. 정미년(1307)에 나이를 이유로 퇴직을 청하자, 공신의 칭호를 하사하는 한편, 평양군(平壤君)에 봉하여 군부(君府)를 개설하고 관료를 두게 하였으며, 나라에 대사가 있으면 그 집에 가서 자문을 받고서 결정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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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에 공이 병에 걸리자 자제들이 명의를 불러들이니, 공이 말하기를내가 성년이 되어 상투를 틀면서부터 나랏일에 종사하였는데, 지금 나이가 이미 칠순(七旬)이 넘었고 관직은 1품에 이르렀다. 그리고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이니, 의원이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이때 여러 아들들은 모두 연경(燕京)에 가 있고, 오직 충숙(忠肅)만이 옆에서 모시고 있었다. 그래서 공이 그에게 위촉하기를나라를 다스리려면 먼저 집을 잘 다스려야 한다. 《시경(詩經)》에서도
형과 아우들이여, 서로 화목하게 지낼 것이요, 서로 도모하려 하지 말지어다.〔兄及弟矣 式相好矣 無相猶矣〕’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너희는 동기(同氣)가 많으니, 부디 화를 내며 다투어서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는 일이 없도록 하라. 너희 형제가 오거든 그때 가서 빠짐없이 가르쳐 주어 가법으로 삼게 하라.”라고 하였다.
그 리고는 4 25일에 병이 위독한데도 불구하고 목욕을 하고 옷을 새로 갈아입은 뒤에 단정히 앉아서 서거(逝去)하였다. 이에 국내의 사서(士庶)들이 달려와서 곡읍하며 말하기를공이 평생토록 정직했다고 들었는데, 지금 죽는 것을 보니 생전의 일을 알 수 있겠다.”라고 하였다. 부음이 들리자, 왕이
천불은유(天不憖遺) 탄식을 발하면서, 예법에 맞게 부의(賻儀)하고 장례를 행하게 하였으며, 시호를 내려 정숙(貞肅)이라고 하였다.
공 의 부인은 사재경(司宰卿) 조공 온려(趙公溫呂)의 따님으로서, 5 4녀를 낳았다. 장남 서()는 과거에 등제하여 회원대장군(懷遠大將軍) 고려 부도원수 삼사사(高麗副都元帥三司使)에 특별히 제수되었으며, 장민(莊敏)의 시호를 받았다. 다음 연()은 관직이 중의대부(中議大夫) 왕부단사관 첨의찬성사(王府斷事官僉議贊成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다음 연수(延壽)는 춘관(春官 예부(禮部))의 과거에 급제하여 소용대장군(昭勇大將軍) 관군만호 삼사사(管軍萬戶三司使)에 특별히 제수되었다. 다음 의선(義旋)은 정혜원통 지견무애 삼장법사(定慧圓通知見無礙三藏法師)의 호를 특별히 하사받고, 천원연성사(天源延聖寺)의 주지(主持)와 본국 영원사(瑩原寺)의 주지를 겸하였으며, 복국우세 정명보조 현오 대선사(福國祐世靜明普照玄悟大禪師)로서 삼중대광(三重大匡)의 품계에 오르고 자은군(慈恩君)에 봉해졌다. 다음 위()는 지금 중대광(重大匡)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재직중이다. 장녀는 좌승선(左承宣) 노영수(盧穎秀)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강절 평장(江浙平章) 오마아(烏馬兒)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대호군(大護軍) 백효주(白孝珠)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호부 시랑(戶部侍郞) 염세충(廉世忠)에게 출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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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 약간 명이 있다. 원수(元帥)의 장남 굉()은 급제하여 관직이 전교 부령(典校副令)에 이르렀고, 다음 천기(
)는 진사에 급제하여 지금 밀직 부사(密直副使)이고, 다음 천유(千裕)는 지금 원윤(元尹)이며, 딸은 안길왕(安吉王) 야아길니(也兒吉尼)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판서(判書) 김경직(金敬直)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연덕대군(延德大君) ()에게 출가하였다. 단사관(斷事官)의 장남 사민(斯民)은 지금 낭장(郞將)이고, 다음 덕유(德裕)는 지금 봉훈대부(奉訓大夫) 왕부단사관 판전의시사(王府斷事官判典儀寺事)이고, 다음은 윤선(允瑄)이고, 다음 보해(普解)는 머리를 깎고 천태교(天台敎)의 선발 시험에 뽑혔으며, 딸은 만호(萬戶) 권형(權衡)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우상시(右常侍) 김상린(金上璘)에게 출가하였다. 만호의 장남 충신(忠臣)은 지금 선무장군(宣武將軍) 관군만호 삼사좌윤(管軍萬戶三司左尹)이고, 다음은 신()이며, 딸은 낭장 김휘산(金暉山)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상호군(上護軍) 윤지표(尹之彪)에게 출가하였다. 찬성사(贊成事)의 아들 흥문(興門)은 지금 소부윤(少府尹)이다. 외손 약간 명이 있다. 장녀의 아들 탈()은 지금 경양군(慶陽君)에 봉해졌으며, 딸은 판서 허부(許富)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삼사사(三司使) 김상기(金上琦)에게 출가하였다. 삼녀의 아들 충윤(忠胤)은 지금 전리 좌랑(典理佐郞)이며, 딸은 상호군 이권(李權)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별장(別將) 김오만(金五萬)에게 출가하였다. 사녀의 장남 효신(孝臣)은 지금 삼사 좌윤(三司左尹)이고, 다음 불노(佛奴)는 지금 익정사 승(翊正司丞)이며, 딸은 호군(護軍) 민현(閔玹)에게 출가하였다. 증손 이하도 매우 많은데, 모두 기재하지 않는다.
공은 자질이 명민하고 기우(器宇)가 웅위(雄偉)하였으며, 과묵하고 풍채가 아름다웠다. 사람을 관대하게 대하고 일을 강직하게 처리하면서 4대에 걸쳐 임금을 보필하여 우뚝 국가의 원신(元臣)이 되었다. 공은 성품이 또 선을 좋아하고 베풀기를 좋아하였는데, 특히 석교(釋敎)를 독실하게 믿어 청계(淸溪)의 불사를 창건하고, 상을 위해 복을 축원하였다. 이와 함께 묘전(妙典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황금으로 쓰고 해장(海藏 대장경(大藏經))을 먹으로 찍어내는가 하면 범상(梵像 불상(佛像))을 회화(繪畫)하고 소조(塑造)하였는데, 이러한 일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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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리고 공은 집안을 엄격하게 단속하고 자제를 올바르게 가르쳤다. 그리하여 공이 아직 늙기 이전에 벌써 많은 자손들이 달관(達官)과 명사(名士)가 되어 중외에 퍼졌고, 공이 이미 죽은 뒤에도 모두 가훈을 준수하여 효도하고 우애하며 화목하게 지냈으므로 사람들이 다른 말을 하지 못하였으니
, 공평하고 균등하게 대하라는 시구(鳩) 환난에 급히 달려가야 한다는 척령(鴒) 에 비추어 보더라도 전혀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할 것이다. 보통 사람의 정으로 보면 날이 멀어질수록 더욱 잊히게 마련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공이 세상을 떠난 뒤로 30여 년이 지났는데도 다시 불후(不朽)하게 할 도리를 강구하여 죽은 이를 산 사람처럼 모시는 것이 이와 같기 때문에, 내가 이 기문을 짓게 되었다.

 

[주D-001]기원(祇園) : 사 원의 별칭이다. 옛날 인도의 기타태자(祇陀太子) 소유의 원림을 급고독 장자(給孤獨長者)가 구입하여 정사를 세운 다음 석가모니에게 희사했다는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의 준말로, 기원(祇洹) 혹은 기환(祇桓)이라고도 한다. 죽림정사(竹林精舍)와 더불어 불교 초기의 양대 사원으로 꼽힌다.
[주D-002] 세상에서 …… 반복되었다 :
맹자(孟子)가 요순(堯舜)으로부터 자신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역사를 개괄적으로 설명하기에 앞서 하나의 명제로 제시한 말인데,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나온다.
[주D-003]같은 …… 이르렀다 :
《중용장구(中庸章句)》 제 28 장의지금 온 천하가 같은 수레를 타고 같은 문자를 쓰게 되었다.〔今天下車同軌 書同文〕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문물과 제도가 통일되고 정비된 것을 말한다.
[주D-004]위대하도다 …… 나온다 :
《주역》 건괘(乾卦) ()위대하도다 건원이여, 만물이 여기에서 비로소 나오나니, 이에 하늘의 일을 총괄하게 되었도다.〔大哉乾元 萬物資始 乃統天〕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5]변채(汴蔡) :
()나라를 가리킨다. 금의 마지막 황제 애종(哀宗)이 수도인 변경(汴京)에서 채주(蔡州)로 달아났다가 원 태종(元太宗) 6(1234)에 몽고와 남송(南宋)의 연합군에 의해 완전히 멸망을 당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D-006]이강(釐降) :
() 임금이 딸을 순()에게 시집보낸 《서경》 요전(堯典)의 고사에서 유래하여 왕녀를 신하에게 시집보내는 것을 말하는데, 충렬왕이 세자의 신분으로 원 세조(元世祖)의 딸인 홀도노게리미실공주(忽都魯揭里迷失公主)와 결혼한 것을 가리킨다.
[주D-007]형과 …… 말지어다 :
《시경》 소아(小雅) 사간(射干)에 나온다.
[주D-008]천불은유(天不憖遺) 탄식 :
하 늘이 국가를 위해서 원로를 이 세상에 남겨 두려 하지 않는다고 한탄했다는 말인데, 《시경》 소아(小雅) 시월지교(十月之交)원로 한 분을 아껴 남겨 두어서 우리 임금을 지키게 하지 않는구나.〔不憖遺一老 俾守我王〕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또 공자(孔子)가 죽었을 때에 노()나라 애공(哀公)이 내린 조사(弔辭)에도하늘이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구나. 나라의 원로를 조금 더 세상에 있게 하여 나 한 사람을 도와 임금 자리에 있게 하지 않는구나.〔旻天不弔 不憖遺一老 俾屛余一人以在位〕라고 탄식한 구절이 있다. 《春秋左氏傳 哀公16年》
[주D-009]공평하고 …… :
《시 경》 조풍(曹風) 시구(
)뻐꾸기가 뽕나무에 둥지를 틀었나니, 새끼가 일곱 마리로다. 우리 훌륭한 군자님이여, 그 말과 행동이 한결같도다.鳩在桑 其子七兮 淑人君子 其儀一兮〕라는 말이 나온다. 한편 뻐꾸기가 새끼를 먹일 때의 순서를 보면 아침에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고 저녁에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굶는 새끼가 없도록 공평하게 먹이를 나누어 주기 때문에, 공평하고 균등하게 남을 대할 때의 비유로 흔히 쓰인다.
[주D-010]환난에 …… :
《시 경》 소아(小雅) 상체(常棣)저 할미새 들판에서 호들갑 떨듯, 급할 때는 형제들이 서로 돕는 법이라오. 항상 좋은 벗이 있다고 해도, 그저 길게 탄식만을 늘어놓을 뿐이라오.
鴒在原 兄弟急難 每有良朋 況也永歎〕라는 구절이 있는데, 물가에 있어야 할 할미새가 언덕에서 쏘다니며 자기의 짝을 찾듯, 그렇게 형제간에도 깊이 우애하는 마음을 발휘해서 서로 환난을 구하려고 급히 달려가야 한다는 뜻으로, 형제의 우애를 비유할 때 흔히 쓰는 말이다.

 

 

 

대원(大元) 고려국 광주(廣州) 신복선사(神福禪寺) 중건 기문

 


동지민장총관부사(同知民匠摠管府事) 박군(朴君)이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내 가 약관의 나이에 어버이를 하직하고 황제의 조정에 나아가서 벼슬을 하였다. 그리하여 무종(武宗)의 시대부터 이미 은혜를 우악(優渥)하게 받았으며, 인묘(仁廟)가 황통을 계승한 뒤에도 동궁의 옛 신하라고 하여 보통과 다른 대우를 받았다. 내가 이런 때를 당해서 어떻게 향리를 생각하고 부모를 그리워할 줄이나 알았겠는가.

그 런데 지난번에 황제의 옥음(玉音)을 받든 사신의 신분으로 역참의 수레를 타고 귀국해서 고향을 찾아 어버이에게 문안드렸더니, 그때 이미 늙으신 선군께서 나의 등을 어루만지며이 아비가 밤이고 낮이고 네가 귀하게 되기를 바라면서 네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는데, 네가 어떻게 그것을 알기야 하겠느냐.’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나를 데리고 신복사(神福寺)에 가시더니이곳은 네가 총각 시절에 노닐었던 곳인데, 황량하게 변하여 잡초만 무성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아비가 집안에 있는 것을 모두 털어 옷가지나 수건까지도 모조리 이 절에 희사하고는, 위로 군왕을 위해 복을 축원하고 아래로 너를 위해 복을 빌었는데, 이제는 당당하게 하나의 큰 불찰(佛刹)이 되었다.’라고 하셨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거의 3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때의 말씀이 아직도 귀에 들리는 듯하다. 내가 어떻게 감히 하루라도 이 일을 잊을 수가 있겠는가.

, 나를 낳아 주셨을 뿐만이 아니라 나를 가르치고 길러 주셨으며, 나를 마음속으로 생각해 주셨을 뿐만이 아니라 나를 위해 불전(佛前)에 기도까지 해 주셨으니, 이 일을 통해서도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지극하지 않은 것이 없는 반면에, 부모의 마음으로 자기의 마음을 삼는 자식은 이 세상에 드물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고 하겠다. 지금은 선군께서 이미 세상을 떠나셨고 나도 이제 늙었다. 그런데 신복사를 중건한 기록을 아직 남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불초자식이 어버이의 은혜를 잊은 것 중에서도 큰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래서 장차 좋은 빗돌을 구입하여 거기에 이에 관한 전말을 기재하고, 이와 함께 선군의 말씀과 우리 향리에 있는 형제의 이름을 함께 새겨서, 신복사 뜨락에 옮겨 세워 두려고 한다. 그리하여 우리 부자(父子)가 이 세상에 있었고 천성이 이와 같았다는 것을 우리 자손들이 알도록 해 주고 싶다. 그대는 나를 위해 붓을 들어 주기 바란다.”

하였다.
내 가 이 말을 듣고는 나름대로 느낌이 없을 수가 없었다. 무릇 부귀와 영달에 마음이 급한 나머지 만리 밖의 중국에 나아가 벼슬하는 자들 모두가 어찌 자기 향리를 생각하고 자기 부모를 그리워한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우리 동방의 사람들로 말하더라도 궁중에서 활보하며 한때 위세를 부린 자들이 많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그들 중에 향리를
진월(秦越)처럼 여기고 친척을 행인 보듯 대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어떻게 보장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박군은 어버이의 말을 한 번 듣고는 효경(孝敬)의 마음을 일으켜 종신토록 잊지 않으면서 반드시 빗돌에 새겨 무궁히 전하려고 하니, 어찌 그를 위하여 이 일을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찰은 광주(廣州)에 있는데, 창건된 것은 대개 그 주()가 설치된 것과 때를 같이한다. 그동안 흥폐(興廢)가 무상하다가, 지금에 와서는 부처를 봉안한 전각과 승려가 거하는 승당을 갖추었음은 물론이요, 낭무(廊廡)가 깊고 아늑한 위에 문정(門庭)이 시원하게 트인 데다가 한 고을의 승지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지역의 선객(禪客)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었다. 중건하는 공사는 연우(延祐) 갑인년(1314, 충숙왕 1)에 시작해서 지치(至治) 말년에 끝났는데, 산인(山人) 영구(永丘)가 실제로 그 일을 주관하였다. 예전에는 상주하는 승려가 없었는데, 박군이 그 고을 서쪽 마을의 오산(烏山)에 있는 15()의 양전을 시주하고, 그의 부인 김씨(金氏)가 저폐(楮幣) 500()을 시주한 덕분에 상주하는 공구(供具)를 충당하게 되었다고 한다. 광주는 삼한의 여러 목() 중에서도 으뜸을 차지하는 곳이다. 그런데 박씨가 또 이 광주의 대성(大姓)으로서 그 조부 수도(守道) 이전부터 모두 본주(本州)의 직책을 맡아 한 고을의 어른이 되었다
.
부친의 휘는 견()이다. 중랑장(中郞將)으로 벼슬길에 올랐는데, 나이를 이유로 치사할 때의 관직은 중현대부(中顯大夫) 감문위 대호군(監門衛大護軍)이었다. 나이 78세인 태정(泰定) 갑자년(1324, 충숙왕 11) 9 2일에 집에서 고종(考終)하였으며, 광정대부(匡靖大夫) 밀직사사 상호군(密直司使上護軍)에 추증되었다. 모친 장씨(張氏)는 당진군대부인(唐津郡大夫人)에 봉해졌는데, 원통(元統) 을해년(1335, 충숙왕 복위 4) 정월 25일에 나이 84세로 세상을 떠났다
.
군에게 형과 아우가 각각 2명 있다. 맏형 효진(孝眞)은 검교 별장(檢校別將)이고, 다음 연()은 낭장(郞將)이며, 아우 천우(天祐)는 벼슬하지 않았고, 다음 관()은 지안산군사(知安山郡事)이다. 여동생은 사온령 동정(司醞令同正) 이주(李注)에게 출가하였다. 효진은 3 4녀를 두었다. 장남은 순()이고, 다음 미찰실례(彌札實禮)는 지금 감문위 대호군(監門衛大護軍)으로 연곡(輦轂 연경) 에서 숙위(宿衛)하고 있으며, 다음은 탈첩목아(脫怗木兒)이다. 딸은 모두 사인(士人)에게 출가하였다. 천우는 3남을 두었으니, 인만(仁萬)과 평(), 문보(文保)이다. 관은 3녀를 두었는데, 모두 사인에게 출가하였다. 친손과 외손이 매우 많으나 기록하지 않는다
.
군의 소자(小字)는 쇄노올대(瑣魯兀大)이다. 무종(武宗) 초년에 유지(有旨)를 받들고 들어가 내시에 충원되었는데, 황제가 항상 소쇄노올대(小瑣魯兀大)라고 부르다가 그대로 이름으로 하사하였다. 처음에 의란국 대사(儀鸞局大使)에 임명되었다가 두 차례 자리를 옮겨서 조열대부(朝列大夫) 동지대도로북겁령구제색민장도총관부사(同知大都路北怯怜口諸色民匠都摠管府事)가 되었다. 성품이 신중하여 열성의 지우를 받았는데, 이윽고 겸퇴(謙退)하고 나서는 불사(佛事)로 노년을 보내고 있다 한다.

 

[주D-001]진월(秦越)처럼 여기고 : 진나라는 중국의 서북쪽에 있고 월나라는 동남쪽에 있어서 서로 멀리 떨어져 관계가 소원한 것처럼 관심없이 냉담하게 대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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