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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한(水旱)에 대해 논한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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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수와 가뭄 현상은 실제로 천수(天數)와 관계된 것인가, 아니면 인사(人事)에 말미암은 것인가. 제요(帝堯)와 탕왕(湯王) 때에도 면하지 못했던 점으로 보면 천수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요, 선악에 따라 길흉의 응보가 있는 점으로 보면 인사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옛사람들은 인사를 닦아서 천수에 대응했기 때문에 9년이나 7년의 재앙을 당했어도 백성이 고달프지 않았다. 그런데 후세 사람들은 천수에 핑계를 대고 인사를 폐하기 때문에 1, 2년간의 재난만 당해도 백성의 시체가 구렁에 나뒹굴곤 한다.
국가가 해와 달과 날을 단위로 해서 살펴볼 뿐만 아니라 나아가 물자를 저장하여 대비까지 하고 있다면, 인사를 닦았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거년(去年)에 수재와 한재를 당한 때로부터 백성이 매우 고통을 받고 있는데, 다방면으로 구료(救療)해도 그 요령을 얻지 못하고 있으니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일찍이 부로(父老)의 말을 듣건대, 백성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양식을 운반해서 배고프고 목마른 자를 먹이고 마시게 하는 것 정도로는 눈앞에 닥친 위급함을 겨우 면하게 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과거에 이미 그러했던 사실을 참작해서 미래의 환란을 미리 방지하려고 할진댄, 어찌 근본적인 방법을 강구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대저 백성이 자기 목숨을 맡기는 자는 유사(有司)이다. 그래서 이해와 관련된 일이 있기만 하면 마치 자식이 부모에게 하듯이 으레 유사에게 달려가서 호소하곤 한다. 그러나 부모가 자식에 대해서는 자식에게 해가 되는 일을 없애 주려고 할 뿐이니, 어찌 자기의 이익을 계산하려고야 하겠는가. 지금의 유사는 그렇지 않다. 가령 두 사람이 송사를 벌이며 다툴 적에 갑(甲)에게 만약 돈이 있으면 을(乙)은 문득 죄인이 되고 만다. 그러니 그 백성이 어떻게 원통한 심정을 품고 죽지 않을 수 있겠으며, 그 억울한 기운이 어떻게 화기(和氣)를 상하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수재와 한재를 부르는 이유이다.
유사를 감시하는 자를 감사(監司)라고 한다. 유사가 탐욕스럽거나 청렴하거나 하면 감사가 바로 안찰하여 처벌하거나 포상하거나 한다. 감사를 감시하는 자를 감찰(監察)이라고 한다. 감사가 유능하거나 무능하면 감찰이 바로 안찰하여 축출하거나 승진시키거나 한다. 그런데 지금은 모두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그 사이에 옛날의 도(道)에 뜻을 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거꾸로 시대에 용납을 받지 못하는 형편이다. 왜냐하면 금일의 감사는 바로 전일의 감찰이요, 금일의 감찰은 바로 전일의 유사로서, 서로 빌붙어 의지하고 서로 덮어 주며 감싸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와 같은 것이다.
만약 오늘날의 백성으로 하여금 옛날의 유사를 한번 만나 보게 하고, 오늘날의 유사로 하여금 옛날의 감사를 한번 만나 보게 하고, 오늘날의 감사로 하여금 옛날의 감찰을 한번 만나 보게 한다면, 우리 적자(赤子)들이 죽음의 구렁에 떨어지는 재앙을 그래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천수든 인사든 간에 그 요점은 탐관오리를 제거하는 것일 따름이다. 만약 탐관오리를 제거하려고 한다면 그 방법은 국가의 법에 모두 명시되어 있다. 그리고 그 법을 적용하여 시행하는 것은 천하를 주재하는 자의 손에 달려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 글을 짓게 되었다.
[주D-001]9년이나 …… 재앙 : 요 (堯)와 탕(湯)의 시대에 있었다는 극심한 홍수와 가뭄을 말한다. 《장자(莊子)》 추수(秋水)에 “우가 치수(治水)할 때에는 10년 동안 아홉 번이나 홍수가 졌건마는 바닷물은 그 때문에 더 불어나지 않았고, 탕의 시대에는 8년 동안 일곱 번이나 가뭄이 들었건마는 바닷물은 그 때문에 더 줄어들지 않았다.〔禹之時 十年九潦 而水不爲加益 湯之時 八年七旱 而崖不爲加損〕”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2]국가가 …… 아니라 : “왕은 한 해를 단위로 살펴보고, 경사는 달을 단위로 하고, 사윤은 날로 한다.〔王省惟歲 卿士惟月 師尹惟日〕”라는 말이 《서경(書經)》 홍범(洪範)에 나온다.
조포(趙苞)의 충효(忠孝)에 대해 논한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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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금과 어버이 사이에는 실제로 선후의 관계가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성인이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임금에 대한 충성과 어버이에 대한 효성 사이에는 실제로 본말의 관계가 없는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내가 변론하지 않을 수 없다.
공자(孔子)가 역(易)의 차서(次序)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르기를 “천 지가 있은 뒤에 만물이 있고, 만물이 있은 뒤에 남녀가 있고, 남녀가 있은 뒤에 부자가 있고, 부자가 있은 뒤에 군신이 있고, 군신이 있은 뒤에 상하가 있고, 상하가 있은 뒤에 예의를 둘 곳이 있게 된다.〔有天地然後有萬物 有萬物然後有男女 有男女然後有父子 有父子然後有君臣 有君臣然後有上下 有上下然後禮義有所錯〕”고 하였다. 이것은 임금과 어버이를 나누어 생각할 때에는 선후가 없을 수 없다는 말이다. 사람은 밖에 나가서는 임금을 섬기고 집에 들어와서는 어버이를 섬기는데, 이는 타고난 성품에 근본하여 몸으로 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으로 설 수 있는 것은 충과 효가 있기 때문이니, 만약 이 도리를 모른다면 금수와 다름없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공자는 또 말하기를 “어버이를 효성스럽게 섬기기 때문에 그 효성을 임금에게 옮겨 충성을 바칠 수가 있는 것이다.〔事親孝 故忠可以移於君〕”라고 하였다. 그리고 맹자(孟子)는 말하기를 “어진 사람치고 자기 어버이를 버리는 자는 있지 않고, 의로운 사람치고 자기 임금을 뒤로 밀어 놓는 자는 있지 않다.〔未有仁而遺其親者也 未有義而後其君者也〕”라 고 하였다. 그러고 보면 효와 충이라고 하는 것은 인과 의에 해당하는 일로서, 사(事)로 보면 두 가지이지만 이(理)로 보면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과, 처한 형세가 각기 다르고 완급 면에서 같지 않은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본말의 관계로 말하면 질서 정연해서 어지럽힐 수 없는 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이에 대하여 옛사람의 과거 행적을 대략 거론해서 밝혀 볼까 한다. 오기(吳起)는 전국 시대(戰國時代)의 재능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모친을 버리고 벼슬을 구했는가 하면 처를 죽이고서 장수가 되려고 하였으니, 오기와 같은 잔인하고 각박한 행동의 소유자에 대해서야 충효 문제를 따지고 말고 할 것이 뭐 있겠는가. 왕능(王陵)은 서한(西漢)의 명신이었는데, 항왕(項王)이 그의 모친을 인질로 잡고 그를 불렀을 때 그는 가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모친이 먼저 의리를 내세워서 결단을 내려 그를 격려하였으니, 이 점을 감안하면 왕능의 죄책(罪責)이 조금은 가벼워졌다고 할 것이다.
사 부(士夫)만 그런 식으로 행동한 것이 아니었다. 고제(高帝)가 항우(項羽)와 천하를 다툴 적에 항우가 태공(太公)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는 삶아 죽이려고 하면서 항복하라고 다그쳤는데, 그때 고제는 “나에게도 국 한 그릇을 나눠 주면 좋겠다.”라고 하였다. 고제가 비록 실언하기는 하였지만, “천하를 위하는 자는 집안일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말도 있고 보면, 이 경우는 그래도 할 말이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조포(趙苞)와 같은 경우는 자기 모친과 처를 죽이고 하나의 성을 보전하였는데, 이 일에 대해서는 군자가 허여하면서 그만이 할 수 있는 고결한 행동이었다고 칭찬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아무래도 의혹을 지울 수가 없다.
당초에 조포는 요서(遼西)를 지키고 있으면서 모친을 그곳으로 모셔 오게 하였다. 그런데 그때 마침 선비족(鮮卑族)이 침입하여 그의 모친과 처자를 붙잡아 인질로 삼고는 수레에 태우고서 공격을 가해 왔다. 조포가 비통하게 울부짖으며 모친에게 아뢰기를 “전에는 어머님의 아들로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임금님의 신하가 되어 있으니, 의리상 사은(私恩)을 돌아보느라 충의를 훼손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니, 모친이 멀리서 말하기를 “사람은 각자 명(命)이 있는 법이다. 어찌 사은을 돌아보느라 충의를 훼손해서야 되겠느냐. 너는 부디 그 일에 힘쓰도록 하여라.”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는 조포가 즉시 앞으로 나아가 싸워서 적을 격파하였으나, 모친과 처는 모두 적에게 해를 당하고 말았다. 조포가 돌아와 장례를 치른 뒤에 향인에게 말하기를 “국록을 먹으면서 환란을 피하는 것은 충신의 도리가 아니요, 모친을 죽게 하고 충의를 보전하는 것은 효자의 도리가 아니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피를 토하고 죽었다.
군자가 그의 행동을 허여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니, 이렇게 본다면 조포는 충과 효 두 가지를 한꺼번에 모두 충족시켰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아마도 그는 마음속으로 “만약 어버이 때문에 적에게 무릎을 꿇은 나머지 내가 지키고 있는 지역의 백성을 잃게 된다면 한(漢)나라를 배반한 죄가 클 것이다.”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차라리 모친과 처자를 버리겠다고 결심하고서 감히 그런 행동을 취했을 것이요, 일단 그렇게 하고 나서는 또 “한나라는 배신하지 않았지만 나의 모친이 적에게 죽었고 나의 처자가 적에게 죽었다. 내 몸만 홀로 온전히 보전한 채 공을 향유하고 영광을 누린다면 이는 어버이를 팔아서 먹고사는 짓이니, 오기와 다를 것이 뭐 있겠는가.”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피를 토하고 죽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위태한 상황을 당하여 그가 취사(取舍)할 적에 자세히 살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선후와 본말을 따진다면 그의 행동에 미진한 점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의 모친이 옛날 칼로 자결했던 왕능의 모친처럼 먼저 의리를 내세우며 결단하지 못했는데, 조포가 그만 “의리상 사은을 돌아보지 못하겠다.”라고 말했고 보면, 이것은 조포가 먼저 모자의 관계를 끊은 것이니, 그의 모친이 그를 격려해 준 말도 어찌 부득이해서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당시 상황은 승패를 기약하기 어려웠으니, 조포 자신도 적의 손에 어육(魚肉)이 되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보장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다행히 자기 몸을 보전하고 자기 지역을 보전하고 자기 백성을 보전했어도 모친과 처자를 보전할 수 없었고 보면 자기도 끝내는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으니, 왕능이 한나라의 창업을 돕고 끝내는 유씨(劉氏)를 안정시켜 큰 공적을 세우고 아름다운 명성을 전하게 된 것과 비교할 때 하늘과 땅의 차이가 난다고 할 것이다.
그 리고 유방과 항우가 천하를 다툴 적에 승부가 한 호흡(呼吸) 사이에 달려 있을 정도로 긴박하였는데, 그 결과에 따라 천하의 향배와 민생의 치란이 결정되는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제가 차라리 부친과 처자를 버리겠다고 결단하고서 과감하게 행동했던 것인데, 일단 그렇게 하고 나서는 천자라는 존귀한 자리와 사해(四海)의 재화를 모두 차지하고서 천하를 가지고 어버이를 봉양하였으니, 그 효가 어떠했다고 하겠는가. 그렇긴 하지만 선후와 본말을 따진다면 그의 행동에도 미진한 점이 있다고 할 것이니, 그가 감히 그렇게 하고도 그와 같이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요행이었을 뿐이다.
혹 자가 맹자에게 “순(舜)이 천자가 되고 고요(皐陶)가 법관이 되었을 적에 순의 부친인 고수(瞽瞍)가 사람을 죽였다면 어떻게 하였겠는가?”라고 묻자 맹자가 “체포할 따름이다.”라고 대답하였고, “그러면 고요가 체포하는 것을 순이 금하지 않았을까?”라고 묻자 맹자가 “순이 어떻게 금할 수가 있겠는가. 고요는 그러한 권한을 부여받은 사람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순은 어떻게 하였겠는가?”라고 묻자 “순은 천하를 버리기를 마치 헌신짝 버리듯 할 사람이니, 부친을 몰래 빼내어 업고 도망쳐서 먼 바닷가에 숨어 살며 종신토록 흔연히 즐기면서 천하를 잊었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이 문답이 가정하여 한 말이기는 하지만, 도리에 입각해서 일을 처리한다면 그와 같이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선유(先儒)가 “ ‘나에게도 국 한 그릇을 나눠 주면 좋겠다.’고 한 말이야말로 하늘과 땅 사이에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조 포는 단지 일개 군수일 따름이었다. 지키는 것이라고 해야 고작 100리의 땅과 한 고을의 주민에 지나지 않았으니, 그곳을 온전히 해서 보유하든 실패해서 잃든 간에 한나라의 안위가 그 때문에 영향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 당시의 상황으로 말하면, 임금은 어리석고 신하는 아첨하여 충성스럽고 선량한 인재가 모두 화를 당하는가 하면 서민의 생활은 도탄에 빠지고 교화는 크게 무너진 때였다. 그리하여 마치 홍수가 마구 넘쳐흘러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것과 같고 병마가 고황에 들어 무슨 약으로도 치료할 수 없는 것과 같았으니, 어찌 군자가 임금이 먹여 주는 밥을 먹고 임금이 입혀 주는 옷을 입고서 자기 몸을 바쳐 공을 세워야 할 때였다고 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포는 구구한 절의에 사로잡힌 나머지 녹봉을 받는 신분에서는 환란을 피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만 알았을 뿐 걸(桀)과 같은 임금을 도와주고 부유하게 해 주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은 알지 못했으며, 모친을 죽여 공을 세우려고 꾀하는 것이 충성이라고만 알았을 뿐 몸을 보전하여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 효도라는 것은 알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왕능의 훌륭한 점을 부질없이 본뜨려고 하면서 실제로는 오기의 잔인한 행동을 답습하였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될 때를 당하여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 일을 하고 말았다. 그래서 내가 조포는 충과 효의 측면에서 미진한 점이 있다고 말한 것인데, 그렇게 말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조포의 입장에서 계책을 세운다면 어떻게 했어야 할 것인가? 맹자가 말한 대로 부친을 몰래 업고 도망친 다음에 흔연히 즐기며 천하를 잊는 도리에 입각해서 일을 처리했더라면,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에 따른 공과 사의 구별이 분명해졌을 것이요, 공자가 말한 대로 도가 있으면 자기를 드러내고 도가 없으면 숨는 도리에 입각해서 몸가짐을 취했더라면, 창졸간에 돌연히 발생하는 환란을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조포의 이 일은 명교(名敎)와 관계되는 점이 있는 만큼 분변하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이 설을 지었다.
[주D-001]천지가 …… 된다 : 공 자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주역(周易)》 서괘전(序卦傳)에 나오는 말이다. 원래는 “천지가 있은 뒤에 만물이 있고, 만물이 있은 뒤에 남녀가 있고, 남녀가 있은 뒤에 부부가 있고, 부부가 있은 뒤에 부자가 있고, 부자가 있은 뒤에 군신이 있고 ……”로 이어지는데, 가정(稼亭)이 구절을 생략했거나 아니면 착오를 빚은 듯하다.
[주D-002]어버이를 …… 것이다 : 《효경》 광양명장(廣揚名章)에 공자의 말로 인용되어 나온다.
[주D-003]어진 …… 않다 : 《맹자(孟子)》 양혜왕 상(梁惠王上)에 나온다.
[주D-004]모친을 …… 하였으니 : 오 기(誤起)가 소싯적에 벼슬을 하려고 수많은 가산을 탕진하고도 실패하자 향리에서 그를 비웃으니, 자기를 비방한 30여 인을 죽이고는 모친과 결별하고 길을 떠나면서 “경상(卿相)이 되지 않으면 고국인 위(衛)나라에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그리고는 노(魯)나라에 가서 증자(曾子)를 섬겼는데, 모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돌아가지 않자 증자가 각박한 사람이라고 하여 사제의 인연을 끊었다. 또 노나라가 제(齊)나라의 침략을 받았을 적에 오기를 장군으로 임명하고 싶어 했으나 오기의 처가 제나라 사람이라서 의심을 하니, 오기가 잔인하게도 자기의 처를 죽여 결의를 밝히고는 노나라의 장군이 되어 제나라 군대를 대파한 고사가 있다. 《史記卷65 孫子吳起列傳》
[주D-005]항왕(項王)이 …… 격려하였으니 : 진 (秦) 말기에 왕능(王陵)이 같은 고향 출신인 한왕(漢王) 유방(劉邦)을 따라 항우(項羽)를 공격하였는데, 항우가 왕능의 모친을 인질로 잡고 그를 유인해 부르려고 하자 그 모친이 몰래 사자를 보내면서 “한왕은 장자(長者)이니 나 때문에 두 마음을 지니지 말라고 전해 달라.”고 하고는 칼로 자결한 고사가 《한서(漢書)》 권40 왕능전에 나온다.
[주D-006]천하를 …… 않는다 : 유 방의 그러한 대답을 듣고는 항우가 노하여 실제로 유방의 부친인 태공(太公)을 죽이려고 하자, 항백(項伯)이 “천하를 위하는 자는 집안일을 돌아보지 않는 법이다. 죽여 봤자 이익은 없고 단지 화만 부추길 뿐이다.〔爲天下者不顧家雖殺之 無益 祗益禍耳〕”라고 충고하니, 항우가 그 말을 따라 죽이지 않았다는 내용이 《사기(史記)》 권7 항우본기(項羽本紀)에 나온다.
[주D-007]유씨(劉氏)를 안정시켜 : 왕 능은 혜제(惠帝) 6년에 우승상(右丞相)이 되었는데, 혜제가 죽고 여후(呂后)가 여씨(呂氏)들을 왕으로 삼으려고 하자 일찍이 고조(高祖)가 신하들과 “유씨가 아닌데 왕이 된 자에 대해서는 천하가 함께 공격해야 한다.〔非劉氏而王 天下共擊之〕”라고 맹세하였던 글에 근거하여 “지금 여씨를 왕으로 세우는 것은 맹약의 내용이 아니다.〔今王呂氏非約也〕”라고 강력히 항의하며 저지한 고사가 있다. 《史記卷9 呂太后本紀》
[주D-008]혹자가 …… 대답하였다 :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나온다.
[주D-009]선유(先儒)가 …… 것이다 : 선 유가 누구인지는 확실치 않다. 참고로 《호남집(滹南集)》 권25 군사실변 상(君事實辨上)에 “한 고조가 국 한 그릇 운운한 말이야말로 하늘과 땅 사이에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 아, 천하의 일 가운데 부친을 죽이는 것보다 더 큰 죄악이 있겠는가. 다행히 항우가 항백의 충고를 받아들였기에 망정이지, 가령 항우가 당시에 태공을 끝내 죽였더라면 제업(帝業)의 공을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장차 무슨 면목으로 사람들의 윗자리에 설 수 있었겠는가.〔漢高祖杯羹之語 天地所不容 …… 嗚呼 天下之事有大於殺父者乎幸而羽從項伯之諫 使羽當時遂殺之 帝雖成功 將何面目以立於人上哉〕”라는 말이 나온다. 《호남집》은 금(金)나라 사람 왕약허(王若虛 : 1174 ~ 1243)의 문집이다.
[주D-010]도가 …… 도리 : 《논 어(論語)》 태백(泰伯)에 “위태로운 나라에는 들어가지 말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거주하지 말아야 한다. 천하에 도가 있으면 자기를 드러내고, 천하에 도가 없으면 숨어야 한다.〔危邦不入亂邦不居 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후한(後漢)의 삼현(三賢)에 대한 찬(贊) 병서(幷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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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책을 열람하다가 《후한서(後漢書)》 영제기(靈帝紀)를 읽다 보니, 천하의 명현(名賢)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모두 구당(鉤黨)으로 지목받고서 남김없이 멸절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 화란을 당한 것이 이렇게까지 참혹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 사이에 몸을 깨끗이 하고 말을 겸손하게 하여 화를 당하지 않은 자는 대체로 몇 사람도 되지 않는데, 그중에서도 뚜렷이 드러난 자를 가려서 글을 지어 기리는 바이다.
태원 사람 임종은 / 大原林宗
곽태가 그 성명이라 / 郭泰其名
박학한 데다 사리에 통명하여 / 博學通朗
처음 낙양에 와서 노닐 적에 / 初游洛陽
한 번 보고서 찬탄하였나니 / 一見嗟異
부융의 식견이 밝기도 하였어라 / 符融之明
그의 소개로 이응을 만나 / 因介李膺
명성이 서울에 파다해져서 / 名聲流行
전송한 수레가 무려 수천 대요 / 送車千兩
신선의 배 타고서 귀향했더라오 / 仙舟還鄕
각지를 유력하며 권장하고 충고하여 / 周游獎訓
도고를 선한 방향으로 인도했는가 하면 / 屠沽俾臧
좌원(左原)을 위로하고 황윤(黃允)을 경계하였으며 / 慰原戒允
모용(茅容)을 벗으로 삼고 구향(仇香)을 스승으로 모셨다네 / 友容師香
떨어진 시루를 통해 덕성을 알았고 / 墮甑知性
죽 그릇을 던져서 성정을 보았으며 / 擲杯見情
송충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 不納宋沖
유자가 해 준 말은 들었는데 / 孺子是聽
벗으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을 / 不可師友
안 사람은 바로 범방이었지 / 知者范滂
탁세에서 몸을 온전히 하여 / 全身濁世
사람의 스승으로 그 도가 빛나는 분 / 人師道光
그 짝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으리오 / 未見其匹
아 우리 선생이시여 / 嗚呼先生
유자는 서치의 자(字)이니 / 孺子徐穉
예장이 그의 고향이라 / 豫章其鄕
자기 힘이 아니면 먹지 않으면서 / 非力不食
가난한 집에서 직접 농사지었어라 / 家貧自耕
사람들이 그의 덕에 감복한 가운데 / 人服其德
천자가 불러도 가지 않았는데 / 帝徵不行
진번의 초청을 받고서는 / 陳蕃見請
걸상 하나로 서로 맞았어라 / 一榻相迎
관아에서 벼슬로 부르는 것들이야 / 屢辟公府
가지 않아도 무슨 상관이랴 / 不往何傷
아무리 불러도 응하지 않던 그가 / 召之不往
빈소에는 배낭 메고 꼭 찾아갔더라오 / 負笈赴喪
사방의 명사들이 / 四方名士
황경의 상에 조문하러 모였는데 / 會弔黃瓊
처음엔 아는 척도 않는다고 여기다가 / 始不我知
나중엔 모두 알고 깜짝 놀라면서 / 衆後乃驚
계위에게 뒤쫓아 가게 하자 / 季偉追之
평생의 친구처럼 다정하게 대하면서 / 歡如平生
나랏일엔 대답을 하지 않고 / 不答國事
농사일은 자세히 답변하였는데 / 稼穡其詳
임종이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던들 / 林宗不言
지우를 어떻게 밝힐 수 있었으랴 / 智愚孰明
아 훌륭하도다 / 嗚呼賢哉
후세에 길이 앙모할 꽃다운 이름이여 / 世仰遺芳
지극한 행실에 순후하고 과묵했던 / 至行純嘿
진류 출신의 구향이시여 / 陳留仇香
사십 년 동안 이름도 없이 / 四十無聞
향리에서 경시되었어라 / 鄕黨以輕
나이 마흔에 비로소 벼슬을 하여 / 强而乃仕
포정의 정장(亭長)이 되었는데 / 爲長蒲亭
진원을 덕으로 교화하면서 / 德化陳元
세상이 처음 이름을 알았어라 / 世始知名
당초에 진원의 모친이 / 厥初元母
자식을 사랑하지 못하고서 / 不慈所生
불효 죄를 범했다고 고발하자 / 告以不孝
구향이 크게 놀라며 / 香乃大驚
교화하지 못한 것을 자책하고는 / 自咎不化
지성으로 깨우친 결과 / 譬之至誠
모친과 아들이 처음과 같이 / 母子如初
자애롭고 효성스럽게 되었다오 / 慈孝方彰
고성의 현령 왕환이 / 考城王奐
노잣돈으로 봉록을 내주면서 / 輟奉資行
태학에 입학하게 하여 / 使入大學
학업을 성취하게 하였는데 / 學業以成
임종이 사사할 정도였으니 / 林宗師事
그 도가 얼마나 빛났다고 하겠는가 / 其道乃光
벼슬하지 않고 집에서 생을 마친 / 不起終家
아 한 세상의 영걸이시여 / 嗚呼世英
[주D-001]후한서(後漢書) …… 되었다 : 구 당(鉤黨)은 서로 끌어 모은 한 패거리라는 말이다. 《후한서》 권8 효영제기(孝靈帝紀)에 “중상시(中常侍) 후람(侯覽)이 유사를 꼬드겨 어전에서 사공(司空) 우방(虞放)과 태복(太僕) 두밀(杜密) …… 등을 모두 구당으로 지목하여 하옥시키니, 죽은 자가 100여 인에 이르렀다.”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2]한 번 …… 하였어라 : 부 융(符融)이 태학에서 이응(李膺)을 사사(師事)하다가 곽태(郭泰)를 한 번 만나 보고는 감탄한 나머지 이응에게 소개하면서 “바다 속의 구슬이 아직 빛을 발하지 않고, 새 중의 봉황이 나래를 아직 펴지 않은 격이다.〔海之明珠 未燿其光 鳥之鳳凰 羽儀未翔〕”라고 말하였다는 내용이 《후한서》 권68 부융열전(符融列傳)과 그 주석에 나온다.
[주D-003]그의 …… 귀향했더라오 : 이 응은 자(字)가 원례(元禮)로, 사람들이 그의 영접을 받기만 해도 “용문에 올랐다.〔登龍門〕”고 자랑할 정도로 명망이 높았는데, 그런 그가 부융의 소개로 곽태를 만나 보고는 사우(師友)의 예로 대접하자 곽태의 명성이 경사(京師)를 진동했다고 한다. 그 뒤에 곽태가 고향에 돌아가려 하자 강가에 나와 전송한 제유(諸儒)의 수레가 수천 대나 되었으며, 이응과 곽태 두 사람이 타고서 건너가는 배를 바라보며 모든 빈객들이 신선과 같다고 찬탄하면서 부러워했다는 이곽선주(李郭仙舟)의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68 郭泰列傳》
[주D-004]각지를 …… 충고하여 : 곽태가 “군현과 봉국을 두루 유력하였다.〔周游郡國〕”라는 말과, “사류를 권장하며 인도하기를 좋아하였다.〔好獎訓士類〕”라는 말이 《후한서》 권68 곽태열전에 나온다.
[주D-005]도고(屠沽)를 …… 하면 : 도 고는 백정과 술장수 등 미천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말한다. 《후한서》 권68 곽태열전에 “소공자와 허위강 등은 모두 도고 출신이었다. …… 이들 60인 모두에 대해서 곽태가 이름을 이루게 해 주었다.〔召公子許偉康 並出屠酤 …… 六十人並以成名〕”라고 하였다.
[주D-006]좌원(左原)을 위로하고 : 좌 원이 군(郡)의 학생으로 있다가 범법 행위를 하여 쫓겨났을 때, 곽태가 과거에 개과천선하여 명현이 되었던 사례를 열거하며 위로하자 사람들에게 악인으로 지목받던 좌원이 뉘우치고 행동을 바꿨다는 이야기가 《후한서》 권68 곽태열전에 나온다.
[주D-007]황윤(黃允)을 경계하였으며 : 곽 태가 황윤을 한 번 보고는 “그대는 남보다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으니 큰 그릇을 이룰 수 있지만, 자신을 단속하는 것이 독실하지 못하니 그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잃을 듯하다.”라고 경계하였다. 뒤에 권세가의 집안에서 황윤의 재능을 욕심내어 사위로 삼으려 하자, 황윤이 그 소문을 듣고는 자기의 처를 내쫓았다가 그 처가 앙심을 품고 보복하는 바람에 톡톡히 망신을 당하였다는 이야기가 《후한서》 권68 곽태열전에 실려 있다.
[주D-008]모용(茅容)을 벗으로 삼고 : 곽 태가 모용의 집에 유숙한 다음 날 아침에 모용이 닭을 잡자 곽태는 자기를 대접하기 위한 것인 줄 알았다. 이윽고 모용이 그것을 모친에게 올린 뒤에 자신은 객과 함께 허술하게 식사를 하자, 곽태가 일어나서 절하며 “경은 훌륭하다.〔卿賢乎哉〕”라고 칭찬하고는 그에게 학문을 권하여 마침내 덕을 이루게 했다. 《後漢書 卷68 郭泰列傳》 그런데 《후한기(後漢紀)》 권23 효령황제기(孝靈皇帝紀)에는 “ ‘경이 이와 같으니 바로 나의 벗이다.〔卿如此 乃我友也〕’라고 하고는 일어나서 마주 대하고 읍(揖)한 뒤에 학문을 권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후한기》는 진(晉)나라 원굉(袁宏)이 각종 자료들을 종합하여 정리한 사서(史書)로 모두 30권인데, 가정이 이 책을 많이 참고하며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주D-009]구향(仇香)을 스승으로 모셨다네 : 구 향은 구람(仇覽)의 이명(異名)이다. 《후한서》 권76 순리열전(循吏列傳) 구람에 의하면, 태학의 학생 시절에 곽태가 부융(符融)과 함께 구향의 방을 찾아가서 인사를 나누고는 마침내 유숙하게 해 줄 것을 청했다고 하고, 또 곽태가 찬탄하면서 침상에서 내려와 그에게 절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후한기》 권23 효령황제기에는 곽태가 진류(陳留) 포정(蒲亭)의 정장(亭長)이었던 구향과 이야기를 나누고는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인사를 드리면서 “그대는 저의 스승이요, 저의 친구가 아닙니다.〔君泰之師 非泰之友〕”라고 말한 것으로 되어 있다.
[주D-010]떨어진 …… 알았고 : 맹 민(孟敏)이 시루를 시장에 팔려고 등에 지고 가다가 땅에 떨어져 깨졌는데도 거들떠보지 않고 미련 없이 떠나가는 모습을 보고 곽태가 그 이유를 묻자, “이미 깨진 시루를 다시 본들 무슨 소용이겠는가.”라고 대답했다는 내용이 《후한서》 권68 곽태열전에 보인다. 그런데 《곽임종별전(郭林宗別傳)》에는 곽태가 그런 그의 면모를 접하고는 “그의 덕성을 알았다.〔因以知其德性〕”라고 말한 것으로 되어 있다.
[주D-011]죽 그릇을 …… 보았으며 : 진 (陳)나라의 동자 위소(魏昭)가 간청하여 곽태의 옆에서 시중 들 적에 곽태가 그에게 밤중에 죽을 끓여 오라고 명하였다. 위소가 죽을 준비해 올리자 “어른을 위해 죽을 끓이면서 경의를 보이지 않는다.”고 꾸짖으면서 그릇을 땅에 던지고는 다시 끓여 오게 하여 그러기를 세 차례나 반복했는데도 위소가 공경하는 자세를 전혀 바꾸지 않자, 곽태가 “이제야 내가 그대의 마음을 알았다.〔今而後知卿心耳〕”고 하고는 마침내 벗으로 친하게 지냈다는 말이 《후한기》 권23 효령황제기에 나온다.
[주D-012]송충(宋沖)의 …… 않고 : 출 사를 권하는 말을 따르지 않았다는 말이다. “환제(桓帝) 때 곽태가 유도지사(有道之士)로 천거를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는데, 평소에 그의 덕을 흠모하던 같은 군(郡)의 송충이 한나라 초 이래로 그와 견줄 만한 사람이 없다고 하면서 항상 벼슬하기를 권했다.”라는 말이 《경재고금주(敬齋古今黈)》 권3에 나온다.
[주D-013]유자(孺子)가 …… 들었는데 : 유 자는 서치(徐穉)의 자이다. 그가 한나라 왕실이 갈수록 혼란스러워져 장차 환란이 일어나리라고 예측하고는, 곽태에게 “거목이 쓰러지려 할 때에는 밧줄 하나로 묶어서 붙들 수가 없는 법이다. 그대는 어찌하여 바쁘게 돌아다니기만 하고 편히 쉴 겨를도 없는가.〔大木將顚 非一繩所維 何爲棲棲 不遑寧處〕”라고 충고하자, 곽태가 감오(感悟)하여 “삼가 이 말을 배수(拜受)하겠다.”라고 하면서 사표로 삼았다는 말이 《후한기》 권22 효환황제기(孝桓皇帝紀)에 나온다.
[주D-014]벗으로 …… 범방(范滂)이었지 : 혹 자가 “곽임종(郭林宗)은 어떤 사람인가?”라고 묻자, 범방이 “그는 세상을 피해 숨어도 개지추(介之推)처럼 어버이의 뜻을 어기지 않고, 절조가 곧아도 유하혜(柳下惠)처럼 속세와 단절하지 않으며, 천자도 신하로 삼을 수 없고, 제후도 벗으로 삼을 수 없다. 나는 그 밖의 것은 알지 못한다.〔隱不違親貞不絶俗 天子不得臣 諸侯不得友 吾不知其他〕”라고 대답한 말이 《후한서》 권68 곽태열전에 나온다.
[주D-015]사람의 …… 분 : 위소(魏昭)가 곽태에게 시중 들겠다고 간청하면서 “경서를 배울 수 있는 스승을 만나기는 쉬워도 타인의 모범이 되는 스승을 만나기는 어렵다.〔經師易遇 人師難遭〕”라고 했다는 말이 《후한기》 권23 효령황제기에 나온다.
[주D-016]사람들이 …… 않았는데 : 《후 한기》 권22 효환황제기에 “서치가 사는 곳의 주민들이 그의 덕에 감화된 나머지 길에 떨어진 물건도 줍지 않았다.〔所居服其德化 道不拾遺〕”라고 하였고, 《후한서》 권53 서치열전(徐穉列傳)에 “도가 있다고 조정에 추천되어 집에서 태원 태수의 임명을 받기도 하였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擧有道 家拜太原太守皆不就〕”라고 하였다.
[주D-017]진번(陳蕃)의 …… 맞았어라 : 진 번이 예장 태수(豫章太守)로 있을 적에 다른 빈객은 맞지 않고 오직 서치만을 위해서 특별히 전용 걸상 하나를 준비해 두고는, 서치가 와서 환담을 하고 떠나면 다시 위에 올려놓았다는 현탑(懸榻)의 고사가 《후한서》 권53 서치열전에 전한다.
[주D-018]관아에서 …… 상관이랴 : 《후한서》 권53 서치열전의 “누차 관아에서 벼슬로 불렀어도 응하지 않았다.〔屢辟公府 不起〕”의 주(註)에 “효렴(孝廉)으로 4회, 재부(宰府)에 5회, 무재(茂才)로 3회 추천을 받고 관직에 임명되었다.”라고 하였다.
[주D-019]아무리 …… 찾아갔더라오 : 배 낭을 메고 각지를 유력하다가 누가 죽거나 상을 당하면 도보로 먼 길을 찾아가서 두주(斗酒)ㆍ척계(隻雞)를 흰 띠풀 위에 진설하여 제사를 올리고는 곧장 떠나갔으므로 그가 누구인지 상주도 몰랐다는 내용이 《후한기》 권22 효환황제기에 실려 있다. 두주는 술에 적신 솜을 햇볕에 말렸다가 다시 물에 적셔서 주기(酒氣)가 우러나오게 한 것이고, 척계는 미리 구워서 가지고 간 닭이다.
[주D-020]사방의 …… 있었으랴 : 서 치가 태위(太尉) 황경(黃瓊)에게 일찍이 배운 바도 있고 또 관직에 천거받은 적도 있었기 때문에 그의 부음을 듣고 달려가서 애곡한 뒤에 상주도 만나지 않고 그냥 떠나갔다. 당시에 천하 명사들이 원근에서 모두 모였는데, 서치가 왔다는 소리만 듣고 만나지 못하자 상주에게 물었다. 상주가 남루한 차림의 서생 하나가 슬피 곡하다가 이름도 적지 않고 떠났다고 하자, 그가 바로 서치임을 알고는 말을 잘하는 계위(季偉)에게 뒤쫓아 가게 하였다. 계위는 모용(茅容)의 자이다. 모용이 서치에게 술을 대접하면서 국가의 일에 대해 물었을 때에는 서치가 대답하지 않더니, 농사일에 대해서 묻자 상세히 대답해 주었다. 모용이 돌아와서 그 일을 그대로 보고하니, 혹자가 “함께 이야기할 만한 상대에게 말하지 않으면 사람을 잃은 것이다.〔可與言而不與之言失人〕”라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서치는 실인(失人)한 것이 아닌가.”라고 물었다. 이에 곽임종이 서치의 입장을 대변하여 자세히 설명해 주면서 역시 “그 지혜로움은 다른 사람도 따라갈 수 있겠지만, 그 우직함은 다른 사람이 따라갈 수 없다.〔其知可及 其愚不可及也〕”라는 공자의 말로 대답하였다. 《후한기》 권22 효환황제기에 이상의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주D-021]지극한 …… 구향(仇香)이시여 : 《후한서》 권76 순리열전 구람(仇覽)에 구향은 구람의 이명으로 진류(陳留) 고성(考城) 사람이라고 하였으며, 소싯적에 서생의 신분으로 순묵(淳默)하여 향리에서 그를 아는 자가 없었다고 하였다.
[주D-022]나이 …… 하여 : 《예기(禮記)》 곡례 상(曲禮上)에 “나이 마흔에는 신념이 흔들리지 않아 강하다고 할 수 있으니, 이때부터는 벼슬길에 나가도 좋다.〔四十曰强而仕〕”라는 말이 나온다.
[주D-023]포정(蒲亭)의 …… 되었다오 : 구 향이 포정의 정장으로 부임한 초기에 진원의 모친이 불효의 죄를 범했다고 진원을 고발했다. 이에 구향이 놀라면서 말하기를 “내가 최근에 집을 방문해 보니, 거처가 정돈되어 있고 때에 맞춰서 농사일을 잘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는 악인이 아니라 교화가 충분하지 못해서 그런 것일 뿐이다. …… 그런데 모친은 어찌하여 하루아침에 화풀이를 하려고 자식을 불의의 죄에 빠뜨리려고 하는가.”라고 하자, 모친이 감복하여 후회의 눈물을 흘리며 갔다. 이에 구향이 다시 그 집에 가서 모자와 함께 술을 마시며 인륜과 효행에 대해 설명하고 화복(禍福)의 도리로 깨우친 결과, 진원이 마침내 지극한 효자가 되었으므로 그 마을에 속담으로 전해지기까지 했다고 한다. 《後漢書 卷76 循吏列傳仇覽》
[주D-024]고성(考城)의 …… 하였는데 : 구 향이 진원을 덕으로 교화시켰다는 말을 왕환(王奐)이 듣고 구향을 주부(主簿)로 발탁한 뒤에, “가시나무 덤불은 봉황이 깃들일 곳이 못 되고, 이 작은 고을은 대현이 나아갈 길이 아니다.〔枳棘非鸞鳳所棲 百里豈大賢之路〕”라고 하고는, 1개월 봉급을 털어 노잣돈으로 주면서 태학 입학을 권유한 일이 《후한서》 권76 순리열전 구람에 나온다.
[주D-025]임종(林宗)이 사사(師事)할 정도였으니 : 임 종은 곽태(郭泰)이며 구향은 구람(仇覽)의 이명(異名)이다. 《후한서》 권76 순리열전(循吏列傳) 구람에 의하면, 태학의 학생 시절에 곽태가 부융(符融)과 함께 구향의 방을 찾아가서 인사를 나누고는 마침내 유숙하게 해 줄 것을 청했다고 하고, 또 곽태가 찬탄하면서 침상에서 내려와 그에게 절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후한기》 권23 효령황제기에는 곽태가 진류(陳留) 포정(蒲亭)의 정장(亭長)이었던 구향과 이야기를 나누고는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인사를 드리면서 “그대는 저의 스승이요, 저의 친구가 아닙니다.〔君泰之師 非泰之友〕”라고 말한 것으로 되어 있다.
[주D-026]벼슬하지 …… 마친 : 구 향이 학업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 주군(州郡)에서 벼슬로 불러도 모두 병을 핑계로 사양하였으며, 집에서 항상 예법에 맞게 몸을 단속하고 평생토록 희로의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는 말이 역시 《후한서》 권76 순리열전 구람에 나온다.
당고(黨錮)의 화를 슬퍼하며 지은 글 병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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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닫고 글을 읽으며 옛사람들을 상론(尙論)하는 것은 때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곧잘 하는 일이다. 선유(先儒)도 “옛사람들을 애도하며 옛 역사에 눈물 흘린다.”라고 하였지만, 나도 당고열전(黨錮列傳)을 읽다가 감회가 들기에 글을 지어서 애도하게 되었다.
임금을 성군으로 만들어 백성이 혜택을 받게 하는 것 / 致君澤民兮
그것이 물론 군자가 지향하는 목표이지만 / 君子所期
앞으로 크게 쓸 물건을 몸에 간직하고서 / 藏器於身兮
반드시 때를 기다려 움직여야 하는 법 / 動必以時
아 당인으로 몰린 그 사람들이 / 嗟彼黨人兮
나를 탄식하며 한숨짓게 만드누나 / 使余歔欷
옛날 공현이 득세하면서 / 昔恭顯之得志兮
한(漢)나라가 중도에 쇠미해졌나니 / 構炎正之中微
예로부터 아첨꾼이 권력을 쥐면 / 自古憸人之柄用兮
나라를 망치지 않는 때가 거의 없었지 / 不誤國者幾希
참언이 성행하여 선인을 해칠 때에는 / 苟讒說之殄行兮
성인이라도 잠시 머리를 숙여야 하는 법 / 雖聖智而低眉
아 현인들이 자기네 역량도 헤아리지 않고 / 嗟群賢之不量其力兮
입으로 시비를 다투려고 했단 말인가 / 將口舌以是非
천하에 홍수가 마구 흘러넘치는데 / 四海之橫流兮
한 손으로 막으려고 생각하다니 / 思側手以障之
큰 집이 장차 무너지려 하는 때에 / 大廈之將傾兮
약한 가지 하나로 붙들어 세우겠나 / 非弱枝之所支
탄주가 개미에게 농락당하고 / 呑舟制於螻蟻兮
도마뱀이 교룡을 기롱하였도다 / 蝘蜓欺彼蛟螭
가시나무가 바뀌어 향초가 되고 / 荊棘變爲蘭茝兮
모모가 서시를 투기하는 세상 / 嫫母妬其西施
하늘과 땅이 자리를 바꾸고 / 天地易位兮
비가 태를 밀어내는 시대의 운세 / 否泰相推
소망지(蕭望之)가 전에 죽으면서 / 望之昔死兮
한나라가 쇠퇴의 길에 접어들었는데 / 漢業以衰
진번이 이제 화를 당했으니 / 陳蕃今亡兮
떠나지 않고 어찌하리오 / 不去何爲
어둠을 써서 밝게 하는 것이 / 用晦而明兮
몸을 보전하는 요령이 되련마는 / 保身之機
군이니 주니 준이니 급이니 / 君廚俊及兮
누가 그렇게 표방하였는고 / 標榜者誰
이두와 이름을 나란히 할 것이라면서 / 李杜之齊名兮
범방(范滂)의 모친은 의심 없이 옳다 여겼고 / 范母之不疑
황보규(皇甫規)는 당인이 못 된 것을 수치로 여겼으니 / 皇甫之恥兮
조금 똑똑했지 크게 어리석은 사람이라 / 小黠大癡
곽임종(郭林宗)은 말이 겸손하였고 / 林宗言遜兮
신도반(申屠蟠)은 기미를 미리 알아서 / 申屠見幾
몸을 온전히 하며 해를 멀리하였으니 / 全身遠害兮
어지러운 세상의 스승이라 하리로다 / 亂世之師
난은 향을 발산하여 자기 몸을 불태우고 / 蘭以香而自焚兮
못 속에 숨은 진주는 사람이 알지 못하나니 / 珠潛淵而莫知
아 당인들이 불행하게 된 것도 / 嗟黨人之不辰兮
천명에 따른 당연한 일이었다 / 亦天命之所宜
[주C-001]당고(黨錮) : 후 한(後漢) 환제(桓帝)와 영제(靈帝) 때에 사대부인 이응(李膺), 진번(陳蕃) 등이 태학생들과 연합해서 권세를 쥔 환관들을 숙청하려다가 오히려 붕당을 결성하여 조정을 비방한다는 죄목으로 수백 명이 죽고 유배당한 사건인데, 《후한서》 권67 당고열전(黨錮列傳)에 자세히 나온다.
[주D-001]옛사람들을 상론(尙論)하는 것 : 《맹 자》 만장 하(萬章下)의 “한 고을의 훌륭한 선비일 경우에는 한 고을의 훌륭한 선비를 벗으로 사귀고, 한 나라의 훌륭한 선비일 경우에는 한 나라의 훌륭한 선비를 벗으로 사귀고, 천하의 훌륭한 선비일 경우에는 천하의 훌륭한 선비를 벗으로 사귀고, 천하의 훌륭한 선비를 벗으로 사귀는 것이 만족스럽지 못할 경우에는 또 옛사람을 숭상하여 논한다.〔一鄕之善士斯友一鄕之善士 一國之善士 斯友一國之善士 天下之善士 斯友天下之善士 以友天下之善士爲未足 又尙論古之人〕”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02]옛사람들을 …… 흘린다 : 소 식(蘇軾)의 유혜산(遊惠山) 시에 “옛사람들을 애도하며 옛 역사에 눈물 흘리고, 참언을 미워하며 소민을 노래한다.〔弔古泣舊史疾讒歌小旻〕”라는 구절이 있다. 《蘇東坡詩集 卷18》 소민(小旻)은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편명으로, 참언을 분개하여 지은 시이다.
[주D-003]앞으로 …… 법 : 《주역(周易)》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군자가 앞으로 자기가 크게 쓸 물건을 몸에 간직했다가 때를 기다려서 움직인다면, 어찌 이롭지 않은 일이 있겠는가.〔君子藏器於身 待時而動 何不利之有〕”라는 말이 있다.
[주D-004]당인(黨人)으로 …… 사람들 : 《후 한서》 권8 효영제기(孝靈帝紀)에 “황제가 주군에 조칙을 내려 함께 어울리는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게 하였다. 이에 천하의 호걸과 유학에 종사하며 의를 행하는 자들을 일체 당인의 테두리에 몰아넣었다.〔制詔州郡大擧鉤黨 於是天下豪傑及儒學行義者 一切結爲黨人〕”라고 하였다.
[주D-005]공현(恭顯) : 한 원제(漢元帝) 때 총애를 받던 환관 홍공(弘恭)과 석현(石顯)의 합칭인데, 이들이 참소하여 대신을 해치고 정권을 장악하였으므로 권세 부리는 환관의 뜻으로 흔히 쓰인다.
[주D-006]참언이 …… 때에는 : 《서경》 순전(舜典)에 “나는 참언이 선인(善人)의 일을 해쳐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을 미워한다.〔朕堲讒說殄行 震驚朕師〕”라는 말이 있다.
[주D-007]탄주(呑舟)가 …… 기롱하였도다 : 이 응(李膺)과 진번(陳蕃) 등 현인들이 거꾸로 소인배인 환관들의 손에 무참히 화를 당한 것을 비유한 말이다. 탄주는 배를 삼킬 만큼 큰 물고기라는 탄주지어(呑舟之魚)의 준말로 군자를 가리키고, 개미는 소인을 가리킨다. 《한시외전(韓詩外傳)》 권8에 “탄주지어가 크기는 하지만, 뭍에 뛰어올라 물을 잃으면 개미에게 제어를 당한다.〔呑舟之魚大矣 蕩而失水 則爲螻蟻所制〕”라는 말이 나오고, 《장자》 경상초(庚桑楚)에도 이와 비슷한 말이 보인다. 그리고 한나라 양웅(揚雄)의 해조(解嘲)에 “지금 그대는 그만 올빼미를 가지고 봉황을 조소하고, 도마뱀을 가지고 귀룡을 조롱하는구나.〔今子乃以鴟梟而笑鳳凰 執蝘蜓而嘲龜龍〕”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8]가시나무가 …… 세상 : 소 인이 군자를 시기하며 무함하는 세태를 비유한 말이다. 모모(嫫母)는 전설상 황제(黃帝)의 넷째 부인으로 품행은 정숙하였으나 모습이 매우 추해서 추녀의 대명사로 흔히 쓰이고, 서시(西施)는 오왕(吳王) 부차(夫差)를 유혹하여 망하게 했다는 월(越)나라의 미녀이다.
[주D-009]하늘과 …… 운세 : 세 상일의 성쇠와 운명의 순역(順逆)이 서로 극에 이르러 뒤바뀌게 된 것을 말한다. 《주역》의 천지 비괘(天地否卦)는 하늘과 땅의 기운이 서로 막혀서 통하지 않는 것을 상징하고, 지천 태괘(地天泰卦)는 그 반대로 만물이 형통하게 되는 것을 상징한다.
[주D-010]소망지(蕭望之)가 전에 죽으면서 : 한 원제가 즉위하자 소망지가 중서(中書)에 사인(士人)을 써야 한다고 상주한 일을 계기로 환관인 홍공(弘恭)과 석현(石顯)에게 미움을 받고 모함을 당한 나머지 하옥되었다가 결국에는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漢書 卷78 蕭望之傳》
[주D-011]어둠을 …… 되련마는 : 난 세에서는 밝다고 자처하며 자세히 살피기보다는 사리에 어두운 척 처신하면서 남을 포용하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밝게 처신하는 것이 된다는 뜻이다. 혼군(昏君)의 시대에 현인이 고난을 받는 것을 상징한 《주역》 명이괘(明夷卦) 상(象)에 “밝음의 덩어리가 땅속으로 들어가는 상이 명이이니, 군자는 이 상을 보고서 무리를 대할 적에 어둠을 써서 밝게 한다.〔明入地中 明夷 君子以 莅衆 用晦而明〕”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2]군(君)이니 …… 표방(標榜)하였는고 : 《후 한서》 권67 당고열전 서(黨錮列傳序)에 “세상에서 그 풍도를 흠모하는 자들이 마침내 서로 표방(標榜)하면서 천하의 명사들을 지목하여 호칭하였는데, 첫째는 삼군(三君)이요, 다음은 팔준(八俊)이요, 다음은 팔고(八顧)요, 다음은 팔급(八及)이요, 다음은 팔주(八廚)라고 하였으니, 이는 옛날의 팔원(八元)이나 팔개(八凱)와 비슷한 것이었다.”라는 말이 나온다. 표방은 칭송하며 선양한다는 뜻이다. 참고로 진번(陳蕃)은 삼군(三君), 이응(李膺)과 두밀(杜密)은 팔준, 곽태(郭泰)와 범방(范滂)은 팔고에 속하였다.
[주D-013]이두(李杜)와 …… 여겼고 : 범 방이 죽음의 길로 떠나면서 모친에게 마지막 인사를 드리자, 모친이 “네가 이제 이응과 두밀과 더불어 이름을 나란히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죽는다 한들 또 무슨 유감이 있겠느냐.〔汝今得與李杜齊名死亦何恨〕”라고 위로하며 격려한 내용이 《후한서》 권67 당고열전 범방에 나온다. 이응과 두밀 모두 옥중에서 고문을 받고 죽거나 자결하였다.
[주D-014]황보규(皇甫規)는 …… 여겼으니 : 황 보규가 환관에게 아부하지 않은 탓으로 무함을 받고 하옥되자 제공(諸公)과 태학생 300여 인이 억울하다고 호소하여 사면을 받고 풀려났다. 뒤에 당고(黨錮)의 화가 크게 일어나 천하의 명현이 체포되는데도 자신은 연루되지 않자, 이를 수치로 여긴 나머지 스스로 상소하여 자기도 당인(黨人)이라면서 함께 처벌받기를 원했으나, 조정에서 아예 불문에 부쳤다는 내용이 《후한서》 권65 황보규열전에 보인다.
[주D-015]곽임종(郭林宗)은 말이 겸손하였고 : “임 종이 동지들과 친하게 지내면서도 국정에 대해서는 자기 소신대로 할 말을 다하거나 심각하게 비평하지 않았으므로, 환관들이 정권을 휘두를 적에도 그를 해치지 못하였다.〔林宗雖善人倫 而不爲危言覈論 故宦官擅政而不能傷也〕”라는 말이 《후한서》 권68 곽태열전(郭泰列傳)에 실려 있다. 그리고 《논어》 헌문(憲問)에 “나라에 도가 있을 적에는 굽히지 말고서 소신껏 말도 하고 행동도 해야 하지만,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는 행동은 소신껏 하되 말은 겸손하게 해야 한다.〔邦有道 危言危行 邦無道 危行言孫〕”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D-016]신도반(申屠蟠)은 …… 알아서 : 경 사에 유학을 온 범방 등이 국정을 신랄하게 비평하자 공경 이하가 모두 경청하며 몸을 낮추고, 태학생들이 앞 다투어 그 풍도를 본받으면서 문학이 장차 흥기하고 처사가 다시 등용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신도반만은 홀로 탄식하면서 “옛날 전국 시대에 처사들이 횡의(橫議)할 적에 열국의 왕이 비를 들고 앞서서 달려가기까지 하였으나 끝내는 분서갱유의 화를 당하고 말았는데, 지금이 바로 그러하다.”라고 하고는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하여 당고(黨錮)의 화가 일어났을 때에도 신도반은 확실하게 처형 대상에서 제외되었다는 기록이 《후한서》 권53 신도반열전에 나온다.
[주D-017]난(蘭)은 …… 불태우고 : 목란(木蘭)이라는 향나무는 향기를 밖으로 강하게 풍기기 때문에 사람들이 분향용으로 가져다가 태운다는 말로, 당고의 화를 당한 사람들을 비유한 말이다.
[주D-018]못 …… 못하나니 : 진주조개가 물속 깊이 숨어서 사람 눈에 뜨이지 않으면 무사하다는 말로, 당고의 화를 면한 사람들을 비유한 말이다.
[주D-019]당인(黨人)들이 …… 일이었다 : 그들이 화를 당한 것도 알고 보면 조심하지 못하고서 타고난 성품대로 행동하다가 자초한 것으로 어쩌면 필연적인 일이라는 말이다. 《중용장구(中庸章句)》 수장(首章)에 “하늘이 명한 것을 성이라고 한다.〔天命之謂性〕”라고 하였다.
의심을 푸는 방법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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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떤 사람이 아무 근거도 없이 자기를 의심한다면 반드시 진실을 밝혀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 때도 있다. 왜냐하면 변명에 급급하다 보면 그 의심이 더욱 심해질 것이 뻔한 데에 반해서, 가만히 놔두면 뒤에 가서 저절로 의혹이 해소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여종이 주인 여자를 대신해서 아이에게 젖을 먹이다가 얼마 뒤에 임신을 했는데 분만을 하고 나서 그 사실이 발각되었다. 주인 여자가 노하여 매질을 하려고 하며 심문하기를 “무릇 젖을 먹일 때에는 남자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야 하는 법이다. 그 이유는 몸에 아이를 갖게 되면 젖을 먹이는 아이에게 해가 되기 때문이니, 이것이 너의 첫 번째 죄이다. 네가 아이에게 젖을 먹이기 시작할 때부터 발은 문지방을 넘지 말고 방 안에만 머무르면서 밤낮으로 안아 주고 업어 주게 하였다. 그런데 네가 감히 남자를 끌어들였으니, 이것이 너의 두 번째 죄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여종이 겁을 먹고는 애매한 말을 지어냈는데, 사실상 그 주인 남자를 지목한 것이었다. 그러자 주인 여자가 입을 다물고는 더 이상 그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이때 주인 남자가 연경(燕京)에 갔다가 반년 만에 돌아와서는 그 말을 듣고 말하기를 “아, 나는 미인도 가까이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데 너를 가까이할 리가 있겠느냐. 사실이 그렇더라도 내가 어떻게 너와 말싸움을 하겠느냐.”라고 하였다. 그 뒤에도 여종은 역시 사실대로 고백하지 않았으므로 주인 여자의 의심이 끝내 풀리지 않았는데, 주인 남자는 태연자약하기만 하였다.
내가 이 이야기를 듣고 다음과 같이 의심 풀이에 관한 글을 지어 보았다. 설령 여종이 사실대로 고백했다고 하더라도 내 생각에 주인 여자는 의심을 바로 풀 수 없었을 것이고, 주인 남자는 당연히 계속해서 태연자약했을 것이다. 직불의(直不疑)가 같은 방을 쓰던 사람이 금을 잃어버리자 보상해 주었는데, 이것이 어찌 잘못 알고 가지고 간 자가 나중에 돌아와 자기에 대한 의심이 풀리게 될 것을 미리 알고 한 일이겠는가. 그는 아마도 “남이 나를 의심하는 것은 평소 나의 행동이 남에게 신임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도 마음속으로 분개하고 큰소리로 다투면서 관부에 재판을 청구하고 신명에게 질정하여 기필코 해명하고 난 뒤에야 그만두는 법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나는 차라리 외면으로는 터무니없는 누명을 뒤집어쓰더라도 내면으로는 참다운 덕을 닦아야 할 것이니, 그 덕이 안에 쌓여 밖으로 드러나면 사람들 모두가 심복(心服)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실제로 도둑질을 했다고 하더라도 오늘날의 아름다운 행실이 지난날의 과오를 덮어 주기에 충분할 테니, 하물며 그런 일이 없는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행동했을 것이다. 이는 옛사람이 스스로 돌아보는 것을 귀하게 여겼음을 알려 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참으로 스스로 돌아보아 신실(信實)하기만 하다면 천지와 귀신도 나를 믿어 줄 텐데, 사람들에 대해서야 염려할 것이 뭐 있겠는가.
그런데 터무니없이 의심을 받는 것 중에는 굳이 해명할 필요가 없는 것도 있지만, 해명하려고 해도 쉽게 되지 않는 것이 또 있다. 가령 장인(丈人)을 때렸다는 의심에 대해서는 처에게 친정아버지가 없었다는 사실을 확인해 보기만 하면 바로 알 수가 있고, 증삼(曾參)이 살인했다는 의심에 대해서는 사람을 죽인 자가 진짜 증삼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해 보기만 하면 바로 해명할 수가 있다. 그러나 한번 들으면 의심하기 쉽고 일단 의심하면 변명하기 어렵고 변명하면 할수록 법문(法文)에 걸리기 일쑤인 경우가 있는데, 이를테면 절도의 혐의를 받는 것과 같은 경우가 그러하다. 그래서 법률을 만들 때에도 이에 대한 조항을 더욱 엄격히 해서, 귀로 듣고 마음속으로 의심이 가기만 하는 사건에 대해서는 심문하지 말라고 금한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마음속으로 의심하는 것까지 법령으로 금할 수는 없는 것이고 보면, 그런 의심을 받는 자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변명하지 않는 것이 훨씬 나을 수도 있다. 그래서 직불의가 과감하게 결단을 내려 진짜로 자기가 도둑질을 한 것처럼 행세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또 다행히도 금을 잘못 알고 가지고 간 자가 자백하며 금을 돌려주자, 금을 잃어버린 사람이 의심한 잘못을 스스로 뉘우치며 몸 둘 곳을 모른 채 다른 사람의 얼굴을 쳐다볼 면목도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직불의가 장자(長者)라는 칭송이 한 시대를 풍미했을 뿐 아니라 사책(史冊)에까지 기록되어 성대하게 전해지기에 이르렀는데, 지금 주인 남자가 자신 있어 하는 것도 대개는 이런 경우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나는 또 이 일과 관련하여 그 여종이 자기 죄를 면할 목적으로 주인 남자에게 책임을 전가한 것을 혐오하는 바이다. 이것은 남의 아랫사람이 된 자가 경계로 삼기에 충분한 사례라고 여겨진다. 비첩(婢妾)과 주인의 관계나 자식과 부모의 관계나 신하와 임금의 관계는 그 의리가 동일하다고 할 것이다. 내가 예전에 소진(蘇秦)이 한 말을 접한 적이 있다. 그것은 즉 “어 떤 객이 관리가 되어 멀리 떠났는데 그 처가 다른 남자와 사통을 하였다. 그 남편이 돌아올 즈음에 간부(姦夫)가 걱정하자, 그 처가 말하기를 ‘걱정하지 말라. 내가 이미 독약을 탄 술을 만들어 놓고 기다리고 있다.’라고 하였다. 3일이 지나서 그 남편이 과연 도착하니, 그 처가 첩을 시켜서 술잔을 올리게 하였다. 첩의 생각에, 사실대로 말하자니 주인 여자가 쫓겨날 걱정이 있고, 말하지 않자니 주인 남자가 죽을 위험에 처해 있었다. 이에 넘어지는 척하면서 술을 쏟아 버리자, 주인 남자가 노하여 그 첩을 50대나 때렸으니, 이것이 이른바 충신(忠信)으로 윗사람에게 죄를 얻는다는 것이다.”라고 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여종은 거짓말로 자기 죄를 면하려고 하였고, 여기에 또 주인 남자와 주인 여자 사이에 틈이 벌어지게 하려고 획책하였으니, 아, 소인의 마음 씀씀이가 정말 무섭기만 하다.
주인 남자는 바로 삼한(三韓)의 명가 출신으로 양파(陽坡 홍언박(洪彦博)) 선생이라고 일컬어지는 분인데, 나와 친하게 지내면서 현재 연경에 함께 거주하고 있다. 이야기를 하다가 그 일을 언급하게 되었기에 내가 한번 빙그레 웃고는 석의(釋疑)라는 글을 지으면서, 그 기회에 계자(季子 소진)의 말을 인용하여 아랫사람이 된 자가 경계할 자료로 삼게 하였다.
[주D-001]직불의(直不疑) : 한 나라 경제(景帝) 때 어사대부(御史大夫)를 지내다가 무제(武帝)가 즉위한 뒤에 과실로 면직되었는데, 사람됨이 순후하고 《노자(老子)》를 좋아하였다. 문제(文帝) 때 같은 방에 기숙하던 동료 낭관이 타인의 금을 자기의 금으로 착각하고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에 금을 잃어버린 낭관이 직불의를 의심하자 직불의는 아무 변명도 하지 않고 금을 사서 보상해 주었는데, 나중에 고향에서 돌아온 낭관이 금을 돌려주니 의심하였던 낭관이 크게 부끄러워했다는 고사가 《사기》 권103 만석장숙열전(萬石張叔列傳) 직불의에 나온다. 또 직불의가 형수와 사통했다고 어떤 사람이 무함했다는 말을 듣고도 “나는 형이 없다.”고만 말하였을 뿐 직접 나서서 해명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함께 실려 있다.
[주D-002]장인(丈人)을 때렸다는 의심 : 후 한(後漢) 광무제(光武帝)가 명신인 제오륜(第五倫)을 희롱하며 예전에 장인을 때린 일이 있지 않았느냐고 물어보자, 제오륜이 세 번 장가들었지만 당시에 모두 처부(妻父)가 없었다고 대답한 고사가 《후한서》 권41 제오종리송한열전(第五鍾離宋寒列傳) 제오륜에 나온다. 근거 없는 비방을 받는 것을 비유할 때 앞의 직불의(直不疑)의 고사와 함께 이 사례가 흔히 인용된다.
[주D-003]증삼(曾參)이 살인했다는 의심 : 증 삼 즉 증자(曾子)가 비(費)에 있을 적에 그 고을 사람 중에 증삼이라는 이름을 가진 동명이인이 사람을 죽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어떤 사람이 증자의 모친에게 “증삼이 사람을 죽였다.”라고 알려 주었으나 그럴 리가 없다면서 모친이 계속 베를 짰는데, 그 뒤에 세 차례나 다른 사람들이 와서 똑같이 그 이야기를 반복하자 모친이 담장을 넘어서 도망쳤다는 일화가 《전국책(戰國策)》 권4 진책(秦策) 2에 나온다.
[주D-004]어떤 …… 것이다 : 전국 시대에 어떤 사람이 소진(蘇秦)을 연왕(燕王)에게 모함하자, 이는 “충신하기 때문에 윗사람에게 죄를 얻게 된 것〔以忠信得罪於上〕”이라고 소진이 해명하면서 비유한 말로, 《사기》 권69 소진열전(蘇秦列傳)에 나온다.
절부(節婦) 조씨전(曺氏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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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부 조씨는 수령현(遂寧縣) 사람이다.
지원(至元) 경오년(1270, 원종 11) 5월 26일에 충경왕(忠敬王)이 강화(江華)에서 송도(松都)로 환도할 적에 장군 홍문계(洪文系) 등이 나라를 그르친 권신을 죽이고 왕에게 정권을 반환하였다. 6월 1일에 권신의 가병(家兵)인 신위(神衛) 등의 군대가 승화후(承化侯)를 옹립하고 장차 반역을 도모하려 하면서, 미처 강을 건너지 못한 신료와 군사들을 강제로 이끌고 항해하여 남쪽으로 떠나니 배가 앞뒤로 서로 이어졌다.
이 때 조씨는 태어난 지 6년이 되었는데, 부친인 대위(隊尉) 자비(子丕)를 따라 그 일행 속에 끼어 있었다. 적이 노정의 중간쯤 왔을 적에 거짓으로 관료를 배치하고는 재집(宰執)으로부터 장교(將校)에 이르기까지 자기들을 따르도록 위협하면서 유인하였다. 당시에 자비는 지모(智謀)와 여력(膂力)이 있다고 해서 특별히 자급이 뛰어 올라 별장에 임명되었는데, 그는 계책을 세워 그곳에서 빠져나와 서울로 돌아왔다. 뒤에 적이 패망할 적에 부녀와 소아에 이르기까지 거의 대부분이 창칼에 희생되거나 바다에 빠져 죽고 나머지 생존한 사람들도 중국 군대에 포로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는데, 오직 자비와 같은 배에 탔던 사람들만은 늙은이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온전히 살아날 수 있었다. 자비는 돌아오자마자 또 관군에 소속되었는데, 적을 공격하며 탐라(耽羅)까지 갔다가 신미년(1271) 겨울에 그곳에서 죽었다.
조씨는 13세에 대위 한보(韓甫)에게 출가하여 딸 하나를 낳았다. 시부(媤父)인 수령궁 녹사(壽寧宮錄事) 광수(光秀)는 일본을 동정(東征)했다가 신사년(1281, 충렬왕 7) 여름에 군중(軍中)에서 죽었다. 그리고 신묘년(1291) 여름에는 한보가 또 합단(哈丹)의 군대와 전투를 벌이다가 죽었다. 조씨는 과부가 된 뒤에 언니에게 몸을 의탁했다가 딸이 출가를 하자 그 딸에게 의탁하였다. 그런데 그 딸이 1남 1녀를 낳고 또 일찍 죽자 손녀에게 의탁해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조씨는 나이 서른이 되기도 전에 남편과 부친과 시아버지가 모두 전진(戰陣) 사이에서 잇따라 전몰하였다. 그리하여 과부로 지내는 50년 동안 길쌈이나 바느질 같은 부녀자의 일을 밤낮으로 열심히 하여 딸과 손자 손녀를 먹이고 입히며 살아갈 터전을 잃지 않게 하였고, 그 밖에 손님을 접대하고 혼례를 거행하는 일이나 상례와 제례에 소요되는 비용을 마련하곤 하였다. 지금 나이가 이미 77세나 되었는데도 아직 탈 없이 건강을 유지하고 있으며, 여기에 또 총명하고 지혜로워서 적에게 사로잡혀 있을 당시의 상황이라든가 근세의 치란이라든가 사대부 집안의 내력 등을 이야기할 때면 하나도 빠뜨리는 일이 없이 모두 기억하고 있다.
내가 현재 거주하고 있는 곳은 바로 조씨가 옛날에 살던 집이다. 그리고 손녀사위가 전임 감찰 규정(監察糾正)인 이양직(李養直)인데, 그는 나와 동년 수재(秀才)이다. 그래서 내가 이에 대한 일을 매우 자세히 들을 수가 있었다.
내 가 일찍이 중국에 가서 보니, 정절을 드러내려고 문려(門閭)에 정표(旌表)한 것이 서로 바라다볼 수 있을 정도로 흔하기에 처음에는 왜 이렇게 많은 것인지 괴이하게 생각되었다. 그런데 삼가 살피건대, 실제로 정절은 없어도 재산이 많은 집안에서 더러 정절의 이름을 훔쳐 정역(征役)을 교묘히 피하고 있기 때문에, 조정에서 매양 찰관(察官)과 헌사(憲司)로 하여금 유사에게 사실을 확인하도록 문책하고 있었으니, 이를 통해서 인륜을 후하게 하고 풍속을 돈독히 하려는 조정의 아름다운 뜻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니 가령 조씨의 일이 중국 조정에 알려지게만 된다면, 장차 대서특필하여 간책에 성대히 전해짐은 물론이요 주려(州閭)에 정표하여 광채를 발하게 할 것이니, 어찌 끝내 이름이 파묻혀 없어지고 말도록 하겠는가.
사씨(史氏)는 말한다. 부인은 삼종(三從)의 의(義)를 지킬 수 있어야 부인으로서의 도를 다하는 것이 된다. 조씨의 경우는 부친과 지아비가 모두 사직을 위한 전역(戰役)에 나아가서 전사하였고, 아들도 없이 묘년(妙年)에 과부가 된 뒤로 노년에 이르도록 절개를 지켰는데, 관에서 보살펴 주지도 않고 사람들이 알아주지도 않았으니, 아, 슬픈 일이다. 그러나 오직 천도는 어긋나지 않는 법이니, 조씨가 건강한 몸으로 장수를 누리고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주D-001]지원(至元) …… 반환하였다 : 《고 려사(高麗史)》 원종(元宗) 11년(1270) 5월 조에 의하면, 계축일에 어사중승(御史中丞) 홍문계(洪文系)와 직문하성사(直門下省事) 송송례(宋松禮)가 임유무(林惟茂)를 베고 그 당(黨)인 사공(司空) 이응렬(李應烈)과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송군비(宋君斐)를 유배 보냈다. 뒤에 서방(書房) 3번(番) 및 조성색(造成色)을 파하니, 조야가 크게 기뻐했다고 하였다. 또 을묘일에 임유무의 복주(伏誅)를 보고하자 왕이 기뻐하며 예물을 하사했다고 하였으며, 이날 홍문계 등이 행재(行在)에 가서 표문(表文)을 올려 하례를 하고 거가(車駕)를 맞이했다고 하였다. 충경왕(忠敬王)은 원종의 시호이다.
[주D-002]6월 …… 이어졌다 : 《고 려사》 원종 11년 6월 조에 의하면, 기사일에 장군 배중손(裵仲孫)과 지유(指諭) 노영희(盧永禧) 등이 삼별초(三別抄)를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런 다음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을 협박하여 왕으로 삼고는, 자녀와 재화를 약탈하여 배를 타고 남하하였다고 하였다. 그 뒤 그들이 진도(珍島)를 근거지로 삼고 저항하자, 조정에서 김방경(金方慶)을 역적추토사(逆賊追討使)로 삼아 진압에 나섰다.
[주D-003]삼종(三從) : 옛날에 여자로 태어나서 출가하기 전에는 아버지를 따르고〔從父〕, 출가해서는 지아비를 따르고〔從夫〕, 지아비가 죽은 뒤에는 아들을 따랐던〔從子〕 부녀자의 도리를 말한다.
책문(策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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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노라.
《서경(書經)》 홍범(洪範)에 나오는 팔정(八政) 중에 식(食)이 첫자리를 차지하고 화(貨)가 다음을 차지한다. 대개 식은 백성의 목숨과 직결되는 것이지만, 소위 화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물건인가? 화가 전폐(錢幣)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사대(四代)의 글에 그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태공망(太公望)이 구부(九府)와 환법(圜法)을 설치할 적에 전(錢)이 그중에 하나를 차지하였다. 그 제도는 어느 시대부터 비롯된 것인가? 관자(管子 관중(管仲)) 는 말하기를 “탕(湯)은 장산(莊山)의 금으로 화폐를 만들었고, 우(禹)는 역산(歷山)의 금으로 화폐를 주조했는데, 이는 당초에 흉년을 당하여 백성을 구제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곡백(穀帛)이 본이요 전폐는 말이라고 할 것인데, 후세에는 끝내 말을 중시하고 본을 경시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전폐의 크기와 무게가 누차 바뀐 사실은 사책을 통해 자세히 살필 수 있다. 소위 삼수전(三銖錢)과 반량전(半兩錢)과 오수전(五銖錢) 중에서 어느 것이 적당하다고 하겠는가? 선유 중에는 전폐의 폐단을 논하면서 이를 완전히 폐지하고 곡백을 사용하려고 한 자도 있었다. 과연 그 주장대로 시행할 수 있는 것인가?
저폐(楮幣 지폐) 가 성행하면서부터 전폐는 시행되지 않았는데, 그 법은 또 어느 때에 시작되었는가? 원래 화폐가 유래한 바를 살펴본다면, 대개 전폐를 모(母)로 삼고 저폐를 자(子)로 삼았다. 이 역시 당시의 상황에 적절하게 대응하기 위한 임시 조처에 지나지 않았다고도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아예 전폐를 폐기하고 저폐만을 사용하고 있으니, 그 이유는 무엇인가?
삼가 생각건대 원(元)나라의 공업(功業)이 성취되고 정치가 안정되자 예악을 제정하였다. 그런데 전폐의 경우만은 유독 근세의 누습을 답습하였으니, 그래도 되겠는가? 국가의 이익을 꾀하는 신하와 정책을 건의하는 인사들은 매양 “전폐와 저폐를 함께 사용함으로써 경중을 균형 있게 해야 한다.”라고 말을 하곤 한다. 그런데도 전폐를 끝내 사용할 수 없는 것인가? 국가에서 전폐 제도를 시행하지 않아도 민간에서는 아직도 사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유사는 금하지 않고 있으니, 이는 백성에게 편리하기 때문인가?
전폐의 경우는 금속을 제련하기 어려운 점이 있는데도 사적으로 위조하는 자들이 많이 나온다. 그런데 저폐의 경우는 종이에 인쇄하기가 쉽기 때문에 위조하는 자들이 더욱 많이 나올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들을 극형으로 다스려도 금할 수가 없을 텐데, 장차 이 폐단을 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본국은 예전에 동제(銅製) 화폐는 쓰지 않고 오직 은제(銀製) 화폐만 썼다. 그런데 그 법이 오래도록 시행되면서 폐단이 생겨 날로 경시되기에 이른 나머지 지금에 와서는 아예 폐기된 채 시행되지 않고 있다. 근래에 국가의 재정이 점차 고갈되고 백성의 생활이 점차 군색해지는 이유가 은제 화폐를 폐기했기 때문은 아닌가?
《서경》에 “선왕이 이루어 놓은 법을 준수하여 길이 잘못이 없게 하라.〔監于先王成憲 其永無愆〕”라고 하였다. 화폐 제도 역시 하나의 큰 성법(成法)이라고 할 것인데, 폐기하고서 쓰지 않아도 되겠는가? 지금 장차 농용(農用)ㆍ식화(食貨)의 정사를 행하면서 본말이 균형을 이루게 하고 상하가 함께 풍족하고자 한다면, 그 방법은 무엇이겠는가?
제생(諸生)은 경술로 천거를 받고 천자의 조정에 나아가 시험을 볼 사람들이니, 반드시 옛 제도에 통달하고 현재의 급무를 알고 있을 것이다. 청컨대 이에 대한 설들을 상세히 답변하라.
묻노라.
당우(唐虞 요순(堯舜))와 삼대(三代)의 법은 후세의 모든 왕들이 표준으로 삼는 바인데, 형법으로 말하면 또 법 중에서도 중대한 관계가 있다고 할 것이다. 우서(虞書)에 “국 가의 정식 형벌인 오형을 백성에게 포고한다. 그러나 가급적 오형을 경감하여 유형(流刑)으로 대체하기로 한다. 관부(官府)에서는 채찍의 형벌을 행하고, 학교에서는 회초리의 형벌을 행하며, 형벌은 돈을 내고 용서받을 수 있게 한다. 무의식적인 실수나 불운해서 지은 죄는 용서하여 풀어 주지만, 의도적으로 반복해서 짓는 죄는 사형에 처한다. 임금은 항상 스스로 ‘공경하고 또 공경하는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며 신중하게 형벌을 행해야지.’라고 다짐한다.〔象以典刑 流宥五刑 鞭作官刑 扑作敎刑 金作贖刑 眚災肆赦 怙終賊刑 欽哉欽哉 惟刑之恤哉〕”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당우 때에 제정한 것인가?
하(夏)나라에는 우(禹)의 형법이 있었고, 은(殷)나라에는 탕(湯)의 형법이 있었다. 그 제도를 어디에서 고찰할 수 있는가? 《주관(周官)》의 삼전(三典)과 목왕(穆王)의 여형(呂刑)도 당우 시대의 것과 합치하는가?
고대의 법제가 진(秦)나라 때에 모조리 바뀌었다. 그리하여 결국은 포학한 정사를 위주로 행하다가 망하고 말았다. 그런데 상군(商君)의 변법(變法)을 진나라 사람들이 크게 환영했던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한(漢)나라 초기에 고제(高帝)가 관중(關中)에 들어가서 삼장(三章)의 법을 약속하자 사람들이 또 크게 기뻐하였다. 한나라의 이 삼장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 소하(蕭何)의 구장(九章)은 진(秦)나라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닌가? 한 문제(漢文帝)가 처음으로 육형(肉刑)을 없앴는데, 후세에는 이를 그르게 여겨 그 법을 다시 쓰지 않았으니,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한 무제(漢武帝) 이후로는 법망이 점점 치밀해져서 사람들이 견디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도 한나라의 기업은 장구히 이어졌으니, 진나라와 다르게 된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진 나라 이전에는 춘추 시대의 여러 나라가 있었다. 그들 나라에서는 모두 취할 만한 점이 없는가? 한나라 이후에는 삼국 시대와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의 여러 나라가 있었다. 그들 나라에서는 그래도 취할 만한 점이 있는가? 후세에 치란을 논하는 자는 말하기를 “진(秦)과 수(隋)와 한(漢)과 당(唐)은 그 법이 모두 같다.”고 한다. 삼가 생각건대 원(元)나라는 송(宋)과 금(金)과 요(遼)의 뒤를 이어 그 폐단을 제거하였는데, 그래도 옛날의 잘못을 답습한 것이 있는가?
열성(列聖)의 법제를 보건대, 법령의 관대한 정도가 한나라와 당나라 때에는 일찍이 있지 않았던 바이다. 전에는 《대원통제(大元通制)》가 나왔고 뒤에는 《지정조격(至正條格)》이 나왔는데, 흠휼(欽恤)하 는 뜻이 참으로 당우에 비교해도 부끄럽지 않다. 그러나 지금 법리(法吏)는 판례(判例)를 많이 적용하고 있으니, 법률이 판례보다 못한 것인가? 판례 중에 혹 해당하는 조문이 없으면 법률에서 찾곤 하는데, 법률에 그런 조문이 없을 경우에는 장차 어디에서 구할 것인가? 당우와 삼대의 이상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법을 써야 할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현재의 시점에서 해괴한 인상을 주지도 않고 과거에 너무 얽매이지도 않게 하려면, 그 방법을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본국은 법을 확립하여 시행해 온 것이 이미 오래된 만큼 변경하기에는 중난(重難)한 점이 있다. 그런데 근래에는 정령이 나오는 곳이 한 군데가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이 법을 제대로 봉행하지 못하고 있다. 간혹 형률을 적용할 적에 원나라 조정의 법을 기준으로 하면, 유사는 공손히 손을 맞잡고서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혹자는 말하기를 “세황(世皇 원 세조(元世祖)) 도 훈계했듯이 본국의 습속을 변경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고, 혹자는 말하기를 “어느 하늘 아래든 왕의 땅 아닌 곳이 없으니, 원나라의 법령을 따라야 한다.”라고 한다. 지금 위로 원나라의 《조격(條格)》을 위배하지도 않고 아래로 본국의 옛 헌장(憲章)을 잃지도 않으면서 형법을 귀일시켜 사람들이 구차하게 피하는 일이 없게 하려면, 그 요체는 무엇인가?
제생은 장차 세상에 유용한 학문을 시험해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우리 유자(儒者)는 시서나 일삼을 따름이니 법률을 어디에다 쓰겠는가.”라고 말한다면, 유사는 결코 그런 사람은 뽑지 않을 것이다.
[주D-001]전폐(錢幣) : 금속 화폐로, 금(金)ㆍ은(銀)ㆍ동(銅)의 3종이 있었으나, 보통 동전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주D-002]사대(四代) : 우(虞)와 하(夏)ㆍ상(商)ㆍ주(周)의 삼대(三代)를 합친 말이다.
[주D-003]구부(九府)와 환법(圜法) : 구부는 주대(周代)에 재화를 관장하던 9개의 정부 기구인데, 뒤에는 국고(國庫)의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환법은 평등하게 언제 어디서나 통하는 법이라는 뜻으로, 화폐 제도를 가리킨다.
[주D-004]삼수전(三銖錢) : 한 무제 건원(建元) 원년(B.C. 140)에 주조한 화폐 이름이다. 중량이 3수(銖)이고, 화폐에 ‘삼수(三銖)’라는 두 글자를 새겼기 때문에 그런 명칭이 붙었다.
[주D-005]반량전(半兩錢) : 각 시대의 도량형에 따라 반 냥(兩)의 무게에 해당하는 화폐에 붙인 이름이다. 진 시황(秦始皇)이 천하를 통일한 뒤에 전국에 유통시킨 반량전의 무게는 12수였고, 한 문제가 주조한 반량전은 4수였는데, 보통 반량전은 한 문제 때의 화폐를 가리킨다.
[주D-006]오수전(五銖錢) : 삼 수전은 가벼워서 위조할 가능성이 많다고 하여 한 무제 원수(元狩) 5년(B.C. 118)에 주조한 화폐 이름인데, 위(魏)ㆍ진(晉)ㆍ육조(六朝)를 거쳐 수나라에 이르기까지 통용되다가 당나라 무덕(武德) 4년(621)에 폐지되었다.
[주D-007]공업(功業)이 …… 제정하였다 : 참고로 《예기》 악기(樂記)에 “왕천하(王天下)하는 자는 공업이 성취되면 악을 제정하고 정치가 안정되면 예를 제정한다.〔王者功成作樂 治定制禮〕”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8]선왕이 …… 하라 : 《서경》 열명 하(說命下)에 나온다.
[주D-009]농용(農用)ㆍ식화(食貨)의 정사 : 《서 경》 홍범(洪範)의 구주(九疇) 가운데 세 번째가 ‘농에 여덟 가지 정사를 행하는 것〔農用八政〕’이고, 그 여덟 가지 정사 가운데 첫 번째와 두 번째가 먹을 것〔食〕과 재화〔貨〕이다. 여기서 ‘농(農)’ 자는 농사짓는 것이 아니라 ‘생활을 풍부하게 한다〔所以厚生〕’는 뜻으로 쓰였다.
[주D-010]국가의 …… 다짐한다 : 《서경》 순전(舜典)에 나온다. 오형(五刑)은 이마에 먹물을 새겨 넣는 묵형(墨刑), 코를 베는 의형(劓刑), 발꿈치를 베는 월형(刖刑), 생식기를 제거하는 궁형(宮刑), 사형에 처하는 대벽(大辟)을 말한다.
[주D-011]하(夏)나라에는 …… 있었다 : 정 (鄭)나라가 철판을 주조하여 형법의 조문을 새겨 넣으려고 하자, 진(晉)나라의 숙향(叔向)이 자산(子産)에게 서신을 보내 충고한 글에 “하나라의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우의 형법이 제정되었고, 상나라의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탕의 형법이 제정되었으며, 주나라의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구형이 제정되었다. 이들 세 나라의 형법이 제정된 것은 모두 도의가 무너진 때의 일이었다.〔夏有亂政而作禹刑 商有亂政而作湯刑 周有亂政而作九刑 三辟之興 皆叔世也〕”라는 말이 나온다. 《春秋左氏傳 昭公6年》
[주D-012]주관(周官)의 삼전(三典) : 경 (輕)ㆍ중(中)ㆍ중(重)의 3종 형법을 말한다. 《주례(周禮)》 추관(秋官) 대사구(大司寇)에 “신국(新國)에는 경전(輕典)의 형법을 쓰고, 평국(平國)에는 중전(中典)의 형법을 쓰고, 난국(亂國)에는 중전(重典)의 형법을 쓴다.”라는 말이 나온다. 《주관》은 《주례》의 별칭이다.
[주D-013]목왕(穆王)의 여형(呂刑) : 여형은 《서경》의 편명이다. 여후(呂侯)가 주 목왕의 명을 받고 하우(夏禹) 시대의 속형(贖刑) 제도를 본받으면서도 좀 더 가벼운 쪽으로 개편하여 포고한 형법이다.
[주D-014]상군(商君)의 변법(變法) : 진 효공(秦孝公) 3년에 상앙(商鞅)이 부국강병을 목적으로 국가의 법령과 제도를 대대적으로 변혁한 것을 말한다. 처음에는 백성들이 괴롭게 여기다가 3년 뒤에는 편하게 여기고 10년 뒤에는 크게 기뻐하였는데, 나라가 부강해진 결과 천자가 제육(祭肉)을 보내오고 제후들이 와서 하례할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史記 卷68 商君列傳》
[주D-015]삼장(三章)의 법 :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이고,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도둑질한 자는 각각 그 죄에 해당하는 벌을 받게 한 것을 말하는데, 《사기》 권8 고조본기(高祖本紀)에 나온다.
[주D-016]소하(蕭何)의 구장(九章) : 소 하는 한(漢)나라의 3대 개국 공신 중 한 사람이다. 구장은 구장률(九章律)을 가리킨다. 한나라 초기에 유방(劉邦)이 관중에 들어가서 진나라의 가혹한 법을 모조리 없애고 삼장의 법만을 약속하였다. 뒤에 법망이 느슨한 데다 전란이 아직 종식되지 않아 삼장의 법만으로는 범법자를 처벌하기에 부족하였으므로, 마침내 상국(相國) 소하로 하여금 진나라의 법 중에서 당시에 적절한 것들을 뽑아 구장률을 만들게 하였다는 기록이 《한서(漢書)》 권23 형법지(刑法志)에 나온다.
[주D-017]한 문제(漢文帝)가 …… 무엇인가 : 육 형(肉刑)은 육체에 가하는 형벌로, 묵형(墨刑)ㆍ의형(劓刑)ㆍ월형(刖刑)ㆍ궁형(宮刑)ㆍ대벽(大辟) 등 오형이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한 문제 13년(167) 5월 제나라 태창령(太倉令)인 순우의(淳于意)가 죄를 지어 형을 당할 처지에 놓였다. 그의 막내딸인 효녀 제영(緹縈)이 상서하여 관비가 되겠다고 자청하면서 부친의 육형을 용서해 달라고 간청하자, 문제가 감동한 나머지 경형(黥刑)에 해당하는 자는 곤겸(髡鉗)하여 성단용(城旦舂)에 처하고, 의형에 해당하는 자는 태삼백(笞三百)에 처하고, 왼쪽 발목을 자르는 형벌에 해당하는 자는 태오백(笞五百)에 처하는 것으로 감형하여 3개의 육형을 없앴다. 《史記 卷10 孝文本紀》《漢書 卷4 文帝紀》 그러다가 후세에 이르러서는 형식적 명분상으로는 육형을 없앤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사람을 상하게 하고 죽이는 일이 더 많아졌다는 이유로, 특히 삼국 시대 위(魏)나라에서 육형 제도의 복원이 몇 차례 논의되고 시행되기도 하였는데, 당 태종 때에 와서는 다시 육형을 없애기로 하여 월형 대신 유삼천리(流三千里)의 처벌로 대체하기도 하였다. 《新唐書 卷56 刑法志》
[주D-018]대원통제(大元通制) : 원나라가 처음에는 독자적인 법제를 제정하지 않고 금(金)나라의 법률을 그대로 따랐는데, 영종(英宗) 지치(至治) 3년(1323)에 이르러 법전의 성격을 띤 2539조의 법률을 《대원통제》라는 이름으로 반포하였다.
[주D-019]지정조격(至正條格) : 원 순제(元順帝) 지원(至元) 6년(1340)에 반포한 법전으로 《대원통제》와 성격이 유사한데, 제조(制詔)ㆍ조격(條格)ㆍ단례(斷例)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D-020]흠휼(欽恤) : 《서경》 순전(舜典)의 “공경하고 또 공경하는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며 신중하게 형벌을 행한다.〔欽哉欽哉惟刑之恤哉〕”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석문(石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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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이 묻기를
“어떤 물건이 있는데, 견고하여 변하지 않고 천지와 시종을 함께한다. 그대는 그 물건이 무엇인지 아는가?”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천 지가 영기(靈氣)를 비축하여 만물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그중에서 오직 사람이 가장 뛰어나고, 이적(夷狄)과 금수가 그 다음을 차지한다. 저 높은 산과 깊은 바다 역시 만물 중에 큰 것으로서, 곤충과 초목 등 크고 작은 동물과 식물이 모두 그 안에 들어 있다. 하지만 이것들은 분분하게 영축(盈縮)ㆍ대사(代謝)를 거듭하고, 착잡하게 영고(榮枯)ㆍ계칩(啓蟄)을 반복하니 변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들이다. 그런데 가령 본말을 추구할 수 없고 거세(巨細)를 췌탁(揣度)할 수 없으며, 한서(寒暑)도 그 바탕을 바꿀 수 없고 고금(古今)도 그 쓰임을 고갈시킬 수 없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오직 돌이라는 물건 하나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대가 말하는 것은 바로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하였다.
그러자 객이 말하기를
“그렇다. 그렇다면 그 소이연에 대한 설명이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태극(太極)이 나뉘면서 양의(兩儀)가 성립하고, 성인(聖人)이 나오면서 삼재(三才 천지인(天地人))가 갖추어졌는데, 이때의 성인은 그 이름을 반고(盤古)라 고 한다. 그 당시의 상황은 아직도 한데 뒤섞여 있는 혼돈 상태라서 만물이 종류별로 분류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반고가 죽으면서 눈은 일월이 되고, 피는 강하가 되고, 뼈는 구산(丘山)이 되었다. 그런데 산이 형체를 부여받을 때에 돌이 그 바탕을 이루었기 때문에 산의 뼈〔山骨〕라고 칭하게 되었으니, 그러고 보면 돌이 생겨난 지가 오래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공공(共工)이 황제(黃帝)와 싸울 적에 성이 나서 부주산(不周山)을 머리로 치받자 하늘이 기울어졌는데, 여와씨(女媧氏)가 돌을 구워 메운 뒤에야 일월성신이 제자리를 잡고 도수(度數)에 맞게 운행하게 되었으니, 그러고 보면 돌의 공로가 크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두터운 땅속에 뿌리를 박고 웅장하게 꽂혀서 위엄 있는 모습으로 거해(巨海)를 진압하는가 하면, 만 길 위에 홀로 우뚝 서서 어느 물건에도 요동되는 일이 없고, 구천 깊이 그윽이 묻혀 있으면서 어느 물건에도 침해를 당하지 않는 가운데, 하늘과 더불어 시작하고 땅과 더불어 마감하니, 그러고 보면 돌의 덕이 후하다고 할 것이다. 우순(虞舜)이 음악을 만들자 사(絲)ㆍ죽(竹)ㆍ포(匏)ㆍ토(土)ㆍ혁(革)ㆍ목(木)의 앞에 위치하여 봉황을 춤추게 하였고, 주 선왕(周宣王)이 석고(石鼓)를 만들자 진(秦)ㆍ한(漢)ㆍ위(魏)ㆍ진(晉)ㆍ수(隋)ㆍ당(唐)을 거치면서 귀신이 보우해 주었으니, 됨됨이와 씀씀이가 기특하고도 위대하다고 말할 만하다. 내가 아는 것은 이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하였다.
이에 객이 말하기를
“옛날에 돌에 대해서 말한 자들이 많지만 아직 번역(藩閾)에도 미치지 못했고, 도를 찬양한 자들이 많지만 고작 사부(詞賦) 정도로 그쳤다. 그러니 그대가 역시 송(頌)을 지어서 돌의 공덕을 형용해 보지 않겠는가?”
하였는데, 내가 그만한 능력이 없다고 사양하니, 객이 이내 붓을 잡고는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위대하고 지극하다 / 大哉至哉
하늘과 땅의 정기여 / 堪輿精氣
이 견정(堅貞)한 물질을 내어 / 生此貞質
효용이 끝없게 하였도다 / 功用不旣
기이하도다 그 문채 그 결이여 / 文奇理異
선명하도다 가로 세로 그 무늬여 / 煥其經緯
모나게 쪼개지고 둥글게 나뉘어서 / 方裂圓分
귀천을 막론하고 은혜를 베풀도다 / 施之賤貴
삼재에 하나 더해 사재로 할 만하니 / 可四三才
이 물건은 어떤 일에도 관련이 있음이로다 / 可該衆彙
우가 바위를 뚫자 용으로 날아올랐고 / 禹鑿龍飛
진이 바위를 몰자 사슴이 죽고 말았도다 / 秦驅鹿死
비석에 새겨 공적을 기념하고 / 碑以紀功
토석을 쌓아 이정표를 세우도다 / 堠以表里
우묵하게 파서 절구통도 만들고 / 窊而爲臼
판판하게 갈아서 숫돌로도 쓰는도다 / 磨而爲砥
석경(石鏡)은 가인의 생활 필수품이요 / 鏡徇佳人
석정(石鼎)은 도사의 여행 도구로다 / 鼎隨道士
회지는 돌로 조를 잘도 제작했고 / 懷智作槽
숙신은 돌로 화살촉을 만들었도다 / 肅愼作矢
석연(石燕)은 비를 몰아오는데 / 燕能致雨
석서(石犀)는 수해를 물리치도다 / 犀能却水
살에 침을 놓을 때는 석망(石芒)이 있고 / 砭肌有芒
얼굴을 젊게 하려면 석수(石髓)가 있도다 / 駐顔有髓
초나라 석호(石虎)는 깃털까지 푹 박히고 / 楚虎飮羽
진나라 석우(石牛)는 발꿈치를 들었도다 / 秦牛擧趾
새는 돌을 입에 물고 어디로 가시는고 / 鳥㘅曷歸
석양(石羊)은 엎드려 있다가 일어났도다 / 羊伏且起
낭군을 기다리다 못해 돌이 되기도 하고 / 或望夫還
어떤 이는 돌을 형님으로까지 모셨도다 / 或作兄事
영척의 노래에서는 / 寗戚之歌
돌을 언급해 뜻을 전하였고 / 載言厥志
남산의 시에서는 / 南山之詩
바위를 말해 아름다움을 드러내었도다 / 式著其美
금은 따라서 변하는 것이 부끄럽고 / 金慚從革
옥은 시장 상인의 거래가 부끄럽도다 / 玉愧貿市
환퇴(桓魋)의 석곽(石槨)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 魋槨不成
요 임금의 흙섬돌엔 돌이 버림을 받았도다 / 堯階見棄
생각하면 신묘한 이 물건도 / 惟此神物
때에 따라 쓰임이 다르도다 / 用隨時異
내버려두면 돌덩어리에 불과하지만 / 抛之頑璞
갈고 닦으면 보배로 변신하도다 / 琢則寶器
송나라 사람은 깊숙이 감추었고 / 宋人深藏
초나라 왕은 늦게야 다듬었도다 / 楚王晩剖
지금은 묘당의 초석(礎石)인 것이 / 今礎廟堂
예전에는 왕부의 관석(關石)이었도다 / 昔關王府
하지만 실체야 변하는 일이 있으리오 / 體豈有渝
작용 역시 조금 도울 뿐이 아니로다 / 用非小補
그대의 공덕을 노래하노라니 / 頌爾功德
나의 폐부가 또 격동되는도다 / 激我肺腑
요컨대는 유능한 사관에게 부탁해서 / 要畀良史
만고에 길이 전해지게 함이로다 / 流光萬古
객이 송(頌)을 짓고 떠난 뒤에 내가 물러 나와 그 내용을 살펴보고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이치가 그 속에 있지 않음이 없음을 바로 인지하였다. 아, 자방(子房)이 경외한 것은 속임수가 섞인 괴담에 가깝다고 한다면, 승유(僧孺)가 품평한 것은 장난기가 섞인 해학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그 밖에 돌에 관한 제가(諸家)의 설들이 있지만, 모조리 거론하여 일일이 소개할 수 없기에 우선 객이 읊은 송으로 이 편을 장식할까 한다.
[주D-001]영축(盈縮)ㆍ대사(代謝) : 진퇴(進退)ㆍ굴신(屈伸)ㆍ다소(多少)ㆍ장단(長短)ㆍ수요(壽夭)ㆍ영허(盈虛) 등 온갖 변화하는 현상이 주기적으로 번갈아 새롭게 교대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2]영고(榮枯)ㆍ계칩(啓蟄) : 초 목이 무성하여 꽃 피고 열매를 맺었다가 다시 마르고 시드는 것처럼 모든 존재가 성하고 쇠하는 현상이 마치 겨울철에 땅속에서 칩거했다가 봄에 다시 나와 활동하듯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한 경제(漢景帝)의 이름이 계(啓)이기 때문에 이를 피해서 후대에 계칩을 경칩(驚蟄)으로 바꿔 불렀다.
[주D-003]양의(兩儀) : 보통은 음양을 가리키나, 여기서는 천지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
[주D-004]성인(聖人) : 여기서는 공자와 같은 성인이 아니라 신성한 능력을 소유한 초인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주D-005]반고(盤古) : 천 지가 개벽할 당시에 맨 먼저 나와서 세상을 다스렸다는 중국 신화 속의 인물로, 최초의 인간인 동시에 세상을 창조하는 조물주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하는데, 일명 혼돈씨(混沌氏)라고도 한다. 반고가 죽을 때에 숨기운은 풍운이 되고, 목소리는 뇌정(雷霆)이 되고, 좌우의 눈은 각각 해와 달이 되고, 사지와 오체는 각각 사극(四極)과 오악(五嶽)이 되고, 근맥(筋脈)은 지리(地理)가 되고, 기육(肌肉)은 전토(田土)가 되고, 머리카락과 수염은 성신(星辰)이 되고, 피모(皮毛)는 초목이 되고, 치골(齒骨)은 금석이 되고, 정수(精髓)는 주옥이 되고, 땀은 우택(雨澤)이 되었다는 기록이 《오운역년기(五運曆年記)》에 나온다.
[주D-006]산의 뼈〔山骨〕 : 바윗돌을 가리킨다. 참고로 한유(韓愈)의 석정(石鼎)이라는 연구(聯句) 시 첫머리에 “솜씨 좋은 장인(匠人)이 산의 뼈를 깎아다가, 그 속을 파내고서 음식을 끓일 그릇을 만들었다네.〔巧匠斲山骨 刳中事煎烹〕”라는 표현이 나온다.
[주D-007]공공(共工)이 …… 되었으니 : 공 공씨(共工氏)가 전욱(顓頊)과 싸우다가 성이 나서 부주산(不周山)을 머리로 치받자 하늘 기둥이 부러지면서 하늘은 서북쪽으로 기울고 땅은 동남쪽으로 꺼졌다. 이에 여와씨(女媧氏)가 자라의 다리를 잘라서 땅의 사방 기둥을 받쳐 세우고, 오색의 돌을 구워서 터진 하늘을 메웠다는 전설이 있다. 전욱은 황제(黃帝)의 손자이다. 황제와 싸웠다고 한 것은 가정의 착오이다. 《淮南子 覽冥訓》《列子 湯問》
[주D-008]우순(虞舜)이 …… 하였고 : “순 임금이 창작한 음악인 소소를 연주하자, 봉황이 듣고 찾아와서 춤을 추었다.〔簫韶九成 鳳凰來儀〕”라는 내용이 《서경》 익직(益稷)에 나온다. 그리고 8종의 악기인 금(金)ㆍ석(石)ㆍ사(絲)ㆍ죽(竹)ㆍ포(匏)ㆍ토(土)ㆍ혁(革)ㆍ목(木)을 팔음(八音)이라고 하는데, 석이 사 등의 앞에 있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주D-009]주 선왕(周宣王)이 …… 주었으니 : 석 고(石鼓)는 북 모양으로 된 10개의 석조 유품으로, 돌 표면에 진대(秦代)의 전자(篆字)에 가까운 문자가 새겨져 있는데, 중국 최고(最古)의 금석문으로 꼽힌다. 한유는 주 선왕 때의 작품이라고 하고, 위응물(韋應物)은 주 문왕(周文王) 때의 작품이라고 하는 등 이설이 많으나, 주 선왕이 사냥한 내용을 사주(史籒)가 송(頌)으로 지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통설이다. 원래 섬서성(陝西省) 부풍현(扶風縣) 서북쪽에 있던 것을 당나라 때 봉상부(鳳翔府) 공자묘(孔子廟)로 옮겨 왔다가 다시 북경(北京)의 국자감(國子監)으로 이전했다고 한다.
[주D-010]옛날에 …… 못했고 : 승 당(升堂)ㆍ입실(入室)은커녕 집 근처인 담장〔藩〕이나 문간〔閾〕에도 이르지 못했다는 뜻으로, 돌에 대해서 피상적으로만 언급했을 뿐 수준 높은 경지는 보여 주지 못했다는 말이다. 참고로 소식(蘇軾)의 시에 “시를 짓는 솜씨야 근처에도 못 갔지만, 울적한 심정을 풀려면 그래도 노름보다야 낫지 않소.〔作詩雖未造藩閾 破悶豈不賢樗蒲〕”라는 표현이 나온다. 《蘇東坡詩集 卷7 李杞寺丞見和前篇復用元韻答之再和》
[주D-011]위대하고 지극하다 : 각각 하늘과 땅을 찬양한 말이다. 《주역》 건괘(乾卦) 단(彖)이 “대재 건원(大哉乾元)”으로 시작하고, 곤괘(坤卦) 단(彖)이 “지재 곤원(至哉坤元)”으로 시작하는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주D-012]모나게 …… 나뉘어서 : 당나라 정유충(鄭惟忠)의 고석부(古石賦)에 “둥글게 나뉘는 것은 우박처럼 흩어지고, 모나게 찢어지는 것은 얼음처럼 갈라진다.〔圓分者雹散方裂者冰開〕”라는 표현이 나온다. 《文苑英華 卷31 地類7》
[주D-013]우(禹)가 …… 날아올랐고 : 하 우(夏禹)가 치산치수(治山治水)를 잘해서 순(舜)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되었다는 말이다. 우가 홍수의 물길을 강하로 유도할 적에 “용문의 바위를 뚫고 이궐의 길을 열었다.〔鑿龍門 辟伊闕〕”라는 말이 《회남자(淮南子)》 수무훈(修務訓)에 나온다. 또 《주역》 건괘 구오(九五)에 “용이 날아올라 하늘에 있다.〔飛龍在天〕”라는 말이 있는데, 보통 임금의 즉위를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주D-014]진(秦)이 …… 말았도다 : 진 나라가 학정으로 천하를 잃었다는 말이다. 진 시황이 돌다리〔石橋〕를 놓아 바다를 건너가서 해가 뜨는 곳을 보려고 하자, 신인(神人)이 바위를 바다로 몰고 가면서 채찍질을 하니 바윗돌이 모두 피를 흘리며 붉게 변했다는 전설이 진(晉) 복심(伏深)의 《삼제약기(三齊略記)》에 나온다. 사슴은 천하를 뜻한다. 제나라 변사 괴통(蒯通)이 한 고조(漢高祖)에게 유세하면서 “진나라가 사슴을 잃자 천하가 모두 그 뒤를 쫓고 있다.〔秦失其鹿 天下共逐之〕”라는 말로 군웅이 할거하여 천하를 놓고 쟁탈전을 벌이는 것을 비유한 고사가 있다. 《史記 卷92 淮陰侯列傳》
[주D-015]회지(懷智)는 …… 제작했고 : “당 개원(開元) 연간에 악공 하회지(賀懷智)가 비파를 잘 연주하였는데, 돌로 조(槽)를 만들고 곤계(鵾雞)의 힘줄로 현(絃)을 만들어 쇠로 퉁겼기 때문에, 소식(蘇軾)의 시에 ‘곤계의 현줄을 철로 퉁기는 솜씨여, 세상에 다시 볼 수 없도다.〔鵾絃鐵撥世無有〕’라는 표현이 있게 된 것이다.”라는 말이 《산당사고(山堂肆考)》 권162 계근작현(雞筋作絃)에 나온다. 조(槽)는 현악기 위에 현을 올려놓는 움푹 파인 격자(格子)를 말하는데, 단목(檀木)으로 만들면 단조(檀槽)라고 하고, 옥석(玉石)으로 만들면 석조(石槽)라고 한다.
[주D-016]숙신(肅愼)은 …… 만들었도다 : 주나라 무왕(武王)과 성왕(成王) 때에 숙신씨(肅愼氏)가 와서 호시(楛矢)와 석노(石砮)를 공물로 바쳤는데, 그 길이가 1척(尺)이 넘었다는 기록이 《국어(國語)》 노어 하(魯語下)에 보인다.
[주D-017]석연(石燕)은 비를 몰아오는데 : 상 주(湘州) 영릉산(零陵山)에 제비처럼 생긴 돌들이 있는데, 풍우가 몰아치면 크고 작은 돌들이 진짜로 제비 모자(母子)처럼 날아다니다가 풍우가 그치면 다시 돌로 환원한다는 전설이 북위(北魏) 역도원(酈道元)의 《수경주(水經注)》 상수(湘水)에 나온다.
[주D-018]석서(石犀)는 수해를 물리치도다 : 바 위에 물소의 형태를 조각해서 둑 위에 세우면 수괴(水怪)를 진압한다는 전설이 있다. 진(晉)나라 상거(常璩)의 《화양국지(華陽國志)》 촉지(蜀志)에 진 효문왕(秦孝文王) 때 이빙(李冰)이 촉군 태수(蜀郡太守)로 부임하여 석서 다섯 마리를 세워서 수정(水精)을 진압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주D-019]석수(石髓) : 석종유(石鐘乳)라고도 하는데, 복용하면 신선이 되어 장생불로한다는 도가의 전설이 있다.
[주D-020]초나라 …… 박히고 : 초나라 웅거자(熊渠子)가 밤에 길을 가다가 바위를 범으로 오인하고는 활을 쏘았는데 바위에 워낙 깊이 박혀서 화살 끝의 깃털이 보이지 않을 정도〔飮羽〕였다는 일화가 《한시외전》 권6 24장에 보인다.
[주D-021]진(秦)나라 …… 들었도다 : 돌 로 만든 소가 길을 인도했다는 ‘석우개도(石牛開道)’의 고사를 가리킨다. 진 혜왕(秦惠王)이 촉(蜀)을 정벌하려고 했으나 길을 알지 못하자, 다섯 마리의 석우를 만들어 꽁무니에 황금을 묻힌 다음 황금 똥을 누는 소라고 속였다. 이에 촉왕이 오정역사(五丁力士)를 시켜서 끌고 오게 하자, 진나라 군대가 그 뒤를 따라와 촉을 멸망시켰으므로 그 길을 석우도(石牛道)라고 불렀다 한다. 《華陽國志 蜀志》
[주D-022]새는 …… 가시는고 : 염 제(炎帝)의 막내딸인 여와(女娃)가 동해에 빠져 죽은 뒤에 정위(精衛)라는 작은 새가 되어 항상 서산(西山)의 나무와 돌을 입에 물고 동해를 메우려고 한다는 전설이 남조(南朝) 양(梁) 임방(任昉)의 《술이기(述異記)》 상권에 보인다.
[주D-023]석양(石羊)은 …… 일어났도다 : 황 초평(黃初平)이 15세에 양을 치다가 신선술을 닦으러 도사를 따라 금화산(金華山) 석실(石室) 속에서 수도하였다. 40년 뒤에 형이 찾아와서 양이 어디 있느냐고 묻자, 황초평이 형과 함께 그곳에 가서 백석(白石)을 향해 “양들아, 일어나라!〔羊起〕”라고 소리치니, 그 돌들이 수만 마리의 양으로 변했다는 전설이 진(晉) 갈홍(葛洪)의 《신선전(神仙傳)》 황초평전(黃初平傳)에 나온다.
[주D-024]낭군(郞君)을 …… 하고 : 각지에 두루 퍼져 있는 망부석(望夫石)의 전설을 말한 것이다.
[주D-025]어떤 …… 모셨도다 : 송 나라 서화가(書畫家)인 미불(米芾)이 기암괴석을 좋아하였는데, 언젠가 보기 드문 기이한 돌을 대하고는 뜰 아래로 내려와서 절을 하며 “내가 석 형님을 보기를 소원한 지가 20년이나 되었소.〔吾欲見石兄二十年矣〕”라고 했다는 일화가 송나라 비연(費兗)이 지은 《양계만지(梁溪漫志)》 미원장배석(米元章拜石)에 나온다. 원장은 미불의 자(字)이다.
[주D-026]영척(寗戚)의 …… 전하였고 : 춘 추 시대 위(衛)나라 영척이 제나라에 가서 빈궁하게 지내며 소에게 꼴을 먹이다가 제 환공(齊桓公)을 만나 쇠뿔〔牛角〕을 치며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는 노래를 부르자, 환공이 그를 비범하게 여겨 수레에 태우고 와서 객경(客卿)에 임명한 고사가 있는데, ‘반우가(飯牛歌)’라고 불리는 그 노래 중에 “남쪽 산은 말쑥하고, 하얀 돌은 번쩍이는데, 요순이 선양하는 것을 살면서 보지 못하였다.〔南山矸 白石爛 生不遭堯與舜禪〕”라고 하여 돌을 소재로 한 가사가 있다. 《淮南子 道應訓》
[주D-027]남산(南山)의 …… 드러내었도다 : 《시경》 소아(小雅) 절남산(節南山)에 “우뚝 솟은 저 남산이여, 바윗돌이 겹겹이 쌓여 있도다. 빛나고 빛나는 태사(太師) 윤씨(尹氏)여, 백성들이 모두 그대를 바라보도다.〔節彼南山 維石巖巖 赫赫師尹 民具爾瞻〕”라는 말이 있다.
[주D-028]금은 …… 부끄럽고 : 《서 경》 홍범(洪範)에 “금은 따라서 바뀌는 것이다.〔金曰從革〕”라는 말이 나오는데, 쇠는 돌과 달리 사람의 용도에 따라서 변할 가능성이 많다는 말이다. 또 《주역》 택화 혁괘(澤火革卦) 상육(上六)에 “백성은 임금을 따라 드러난 악행을 고친다.〔小人革面〕”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에 대해서 “불은 물건을 변화시키는 것이고, 금은 변화에 따르는 것이다. 그런데 택을 뜻하는 태는 금에 해당하니, 불에 따라서 변하는 것이다.〔火革物者也 金從革者也 兌金也 從火而革者也〕”라고 해설하기도 한다.
[주D-029]옥은 …… 부끄럽도다 : 귀 중한 옥이 다른 일반 상품과 함께 시장에서 상인들의 흥정에 의해 아무렇게나 취급되는 것이 부끄럽다는 말이다. 아름다운 옥이 있을 경우 어떻게 하겠느냐는 자공(子貢)의 질문을 받고 공자가 “나는 그 옥의 진가를 알고서 사 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我待賈者也〕”라고 대답한 말이 《논어》 자한(子罕)에 나온다.
[주D-030]환퇴(桓魋)의 …… 않았고 : 공 자가 송나라에 있을 적에 환퇴가 자기의 석곽(石槨)을 만드는 데 3년이 되도록 이루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이처럼 사치스럽게 만들려고 할진댄 차라리 죽으면 속히 썩게 하는 것이 더 좋겠다.〔若是其靡也 死不如速朽之愈也〕”라고 말한 내용이 《예기》 단궁 상(檀弓上)에 나온다.
[주D-031]요 임금의 …… 받았도다 : “요 임금은 천자가 되고 나서도 비단옷을 겹으로 입지 않았고 밥상에는 두 가지의 맛있는 반찬을 놓지 않았으며, 석 자 높이의 섬돌은 흙으로 만들었고 지붕의 띠풀도 가지런히 자르지 않았다.〔堯爲天子 衣不重帛 食不兼味 土階三尺 茅茨不剪〕”라는 말이 《태평어람(太平御覽)》 권696에 윤문자(尹文子)의 말로 인용되어 나온다.
[주D-032]송나라 …… 감추었고 : 송 나라의 어리석은 사람이 옥돌과 비슷하면서도 보통의 돌멩이에 불과한 연석(燕石)을 보옥인 줄 알고 주황색 수건으로 열 겹이나 싸서 깊이 보관하며 애지중지하다가 주(周)나라의 어떤 나그네에게 비웃음을 당한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48 應劭列傳 註》
[주D-033]초나라 …… 다듬었도다 : 춘 추 시대 초나라 사람 변화(卞和)가 진귀한 옥돌을 초왕(楚王)에게 바쳤다가 임금을 속인다는 누명을 쓰고 두 차례나 발이 잘렸으나, 나중에 왕에게 진가를 인정받고서 천하 제일의 보배인 화씨벽(和氏璧)을 만들게 되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韓非子 和氏》
[주D-034]예전에는 왕부의 관석(關石)이었도다 : 《서 경》 오자지가(五子之歌)에 “어디서나 통하는 석과 누구에게나 공평한 균이 곧 왕부에 있었다.〔關石和鈞 王府則有〕”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채침(蔡沈)의 주석에 따른 해석이다. 석(石)과 균(鈞)은 중량의 단위로, 30근(斤)이 1균이고 4균이 1석인데, 과거에는 국가의 도량형이 정확하고 공정해서 백성에게 믿음을 주었다는 말이다.
[주D-035]작용 …… 아니로다 : 《맹 자》 진심 상(盡心上)에 “군자는 지나는 곳마다 변화하고 마음을 두는 곳마다 신묘해진다. 위와 아래로 천지와 그 흐름을 같이하나니, 그 작용이 어찌 세상을 조금 도울 뿐이라 하겠는가.〔夫君子所過者化 所存者神 上下與天地同流 豈曰小補之哉〕”라는 말이 있다.
[주D-036]자방(子房)이 경외한 것 : 누 런 돌 즉 황석(黃石)을 말한다. 어떤 노인이 일찍이 하비(下邳)의 이교(圯橋) 가에서 장량(張良)에게 《태공병법(太公兵法)》을 전해 주면서 “13년 뒤에 그대가 나를 제북 땅에서 보리니, 곡성산 아래의 누런 돌이 바로 나이니라.〔十三年孺子見我濟北 穀城山下黃石卽我矣〕”라고 하였다. 13년 뒤에 장량이 실제로 그곳에 가서 황석을 발견하고 사당에 봉안하였으며, 장량이 죽자 황석도 함께 장사 지냈다는 기록이 《사기》 권55 유후세가(留侯世家)에 나온다. 자방은 장량의 자이다.
[주D-037]승유(僧孺)가 품평한 것 : 후 세에는 좋은 돌이 없어서 쇠로 침을 만들었을 것이라는 익살스러운 그의 발언을 가리킨다. 남조(南朝) 양(梁)나라의 왕승유(王僧孺)는 고사를 많이 알고 있었는데, 시랑(侍郞) 전원기(全元起)가 《황제내경(黃帝內經)》 소문(素問)에 주석을 내려고 하면서 폄석(砭石)에 대해 묻자, 대답하기를 “옛사람들은 응당 돌을 가지고 침을 만들었을 것이요, 쇠는 쓰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설문(說文)》에 이 폄(砭)이라는 글자가 있는데, 허신(許愼)은 ‘돌로 병근(病根)을 찌르는 것이다.〔以石刺病也〕’라고 해설하였고, 《동산경(東山經)》에 ‘고씨의 산에 침석이 많다.〔高氏之山多針石〕’라고 하였는데, 곽박(郭璞)은 ‘그것으로 돌침을 만들 수 있다.’라고 해설하였고, 《춘추좌씨전》 양공(襄公) 23년에 ‘보기 좋은 발진(發疹)이 아프게 하는 돌보다 못하다.〔美疢不如惡石〕’라고 하였는데, 복자신(服子愼)은 ‘돌은 돌침을 의미한다.〔石砭石也〕’라고 해설하였다. 그런데 말세에는 더 이상 좋은 돌이 없기 때문에 쇠로 대신한 것일 뿐이다.”라고 했다는 기록이 《남사(南史)》 권59 왕승유전에 나온다.
죽부인전(竹夫人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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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의 성은 죽(竹)이요, 이름은 빙(憑)이다. 위빈(渭濱) 사람 운(篔)의 딸로, 계보는 창랑씨(蒼筤氏)에서 나왔다. 그의 선조는 음률을 알았으므로 황제(黃帝)가 발탁하여 음악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우순(虞舜) 시대의 소(簫)도 바로 그의 후손이다.
창랑씨가 곤륜산(崑崙山) 북쪽에서 진방(震方 동방)으로 이주하였는데, 복희씨(伏羲氏) 시대에 이르러 위씨(韋氏)와 함께 문적(文籍)을 주관하여 크게 공을 세웠다. 자손들도 모두 가업을 지키면서 대대로 사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진(秦)나라가 포학하게 굴면서 이사(李斯)의 계책을 채용하여 서책을 불사르고 유자들을 산 채로 구덩이에 묻어 죽인 뒤부터 창랑씨의 후손도 차츰 쇠미해졌다.
그러다가 한(漢)나라 때에 와서 채륜(蔡倫)의 가객(家客) 중에 저생(楮生)이란 자가 자못 글을 배워서 붓을 가지고 때때로 죽씨(竹氏)와 어울려 노닐었다. 그러나 그 사람됨이 경박한 데다가 점차로 젖어들 듯한 참소를 잘하였는데, 죽씨의 강직한 성격을 미워한 나머지 남모르게 좀먹고 헐어서 마침내는 그 직임을 탈취하였다.
주(周)나라의 간(竿 낚싯대)도 죽씨의 후손이다. 태 공망(太公望)과 함께 위수(渭水) 가에서 낚시질을 하였는데, 태공이 갈고랑이를 만드는 것을 보고는 간이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큰 낚시질을 할 때에는 갈고랑이 없이 한다고 하였다. 작은 것을 낚느냐 큰 것을 낚느냐 하는 것은 꼬부라진 갈고리를 매다느냐 매달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갈고리 없는 낚시를 해야만 나라를 낚을 수 있지, 갈고리 있는 낚시를 하면 고작 물고기나 잡을 뿐이다.”라고 하니, 태공이 따랐다. 그 뒤에 과연 태공이 문왕(文王)의 스승이 되어 제나라에 봉해졌는데, 간을 유능하다고 천거하여 위수 가 즉 위빈(渭濱)을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죽씨가 위빈에서 일어나게 된 유래이다.
지 금도 그곳에 거하는 자손이 여전히 많으니, 예컨대 임(箖)ㆍ어(箊)ㆍ군(䇹)ㆍ정(筳) 등이 바로 그들이다. 그리고 양주(楊州)로 옮긴 자들은 소(篠)와 탕(簜)이라고 칭해지고, 호중(胡中)으로 들어간 자들은 봉(篷)이라고 칭해진다. 죽씨는 대개 재능 면에서 문(文)과 무(武)의 두 갈래로 분류되는데, 대대로 변(籩)ㆍ궤(簋)ㆍ생(笙)ㆍ우(竽) 등 예악에 쓰이는 것들로부터 짐승을 쏘고 물고기를 잡는 미세한 도구에 이르기까지, 모두 전적에 실려 있어서 분명히 알 수가 있다. 그런데 다만 감(䇞)의 경우만은 성품이 우둔하기 그지없어서 속이 꽉 막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채 생을 마쳤다.
그리고 운(篔)의 시대에 와서는 숨어 살면서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그에게 동생 하나가 있어서 이름을 당(簹)이라고 하였는데, 형과 더불어 이름을 나란히 하였다. 속을 텅 비우고 자신을 바르게 유지하며 왕자유(王子猷)와 친하게 지내니, 자유가 “하루도 차군(此君) 없이는 지낼 수가 없다.”라고 하였으므로 차군이 그대로 그의 호가 되었다. 대저 자유는 단정한 사람이니, 자기의 벗도 반드시 단정한 사람을 취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의 품격이 어떠했을지 짐작할 만하다.
당은 익모(益母)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를 낳았으니, 이 딸이 바로 부인이다. 처녀 시절부터 그 자태가 정숙하였는데, 이웃에 사는 의남(宜男)이 란 자가 음탕한 말을 지어내어 집적거리며 유혹하자, 부인이 노하여 말하기를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고 해도 절조를 지켜야 하는 면에서는 동일하다. 한번 남에게 그 절조가 꺾인다면 어떻게 이 세상에 다시 설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의생(宜生)이 부끄러워하며 그 자리를 떠났다. 그러니 어찌 소를 끌고 다니는 무리가 부인을 감히 넘볼 수나 있었겠는가. 부인이 장성하고 나서 송 대부(松大夫)가 예의를 갖춰 청혼을 하니, 부인의 부모가 말하기를 “송공(松公)은 군자다운 사람으로서 그 고상한 절조가 우리 가풍과 서로 대등하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그에게 시집보냈다.
그 뒤로 부인은 날이 갈수록 성품이 더욱 굳세고 두터워졌다. 간혹 일을 당하여 분변할 적에는 마치 칼을 대는 대로 쪼개지듯 민첩하고 신속하게 처리하였을 뿐 매선(梅仙)의 서신이 있거나 이씨(李氏)의 무언의 기대에 도 전혀 거들떠보지 않았는데, 하물며 감귤 노인이나 살구 아이의 청탁을 들어줄 리 있었겠는가. 간혹 안개 낀 아침이나 달 밝은 저녁에 바람을 만나 읊조리고 비를 만나 휘파람 불 적에는 산뜻하고 말쑥한 그 자태를 어떻게 형용할 수가 없었으므로 호사가들이 그 모습을 살짝 화폭에 담아 보배로 전하곤 하였는데, 문여가(文與可)와 소자첨(蘇子瞻) 같은 사람은 더욱 이를 좋아하였다.
송공(松公)은 부인보다 나이가 18세 위였는데, 만년에 신선술을 배우더니 곡성산(穀城山)에서 노닐다가 돌로 몸을 바꾸고는 돌아오지 않았다. 부인이 홀몸으로 살면서 왕왕 위풍(衛風)의 시를 노래 부르곤 하였는데, 그럴 때면 마음이 마구 흔들려서 스스로 걷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술 마시기를 좋아하는 성품인지라, 사관이 정확한 연대는 잊어버렸지만 5월 13일에 청분산(靑盆山)으로 집을 옮긴 뒤로 술에 마냥 취한 끝에 고갈증(枯渴症)에 걸려 마침내 치료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병에 걸린 뒤로는 사람을 의지해서 살았는데, 만년에 들어 절조가 더욱 굳었으므로 향리의 추앙을 받았다. 그래서 부인과 동성(同姓)인 삼방 절도사(三邦節度使) 유균(惟箘)이 부인의 행실에 대해서 장계를 올려 보고하니, 조정에서 절부의 호를 내렸다.
사 씨(史氏)는 말한다. 죽씨(竹氏)의 선조는 상세(上世)에 큰 공을 세웠다. 그리고 그 후손들도 모두 재능을 발휘하며 절조를 고수하여 세상에서 일컬어졌다. 그러니 부인이 현덕을 소유한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할 것이다. 아, 부인이 이미 군자의 배필이 된 데다가 사람들로부터 기특하게 여겨졌는데도 끝내 후사를 두지 못하였으니, 하늘이 무지하다는 탄식의 말이 어찌 근거 없이 나온 것이라고 하겠는가.
[주D-001]우순(虞舜) 시대의 소(簫) : 《서경》 익직(益稷)에 “순 임금이 창작한 음악인 소소를 아홉 번 연주하자, 봉황이 듣고 찾아와서 춤을 추었다.〔簫韶九成 鳳凰來儀〕” 하였다. 소소(簫韶)는 우(虞)나라 순(舜)임금의 음악이름이다.
[주D-002]위씨(韋氏) : 옛날에 죽간을 멜 때 쓴 무두질한 가죽 끈이다. 공자가 만년에 《주역》 읽기를 좋아해서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는 ‘위편삼절(韋編三絶)’의 고사가 유명하다. 《史記 卷47 孔子世家》
[주D-003]채륜(蔡倫) : 후 한 화제(和帝) 때의 상방령(尙方令)으로 종이를 처음 만들어 보급한 사람이다. 그 공으로 용정후(龍亭侯)에 봉해졌으므로 당시에 종이를 채후지(蔡侯紙)라고 불렀다. 본문의 저생(楮生)은 종이를 의인화한 것이다. 《後漢書 卷78 宦者列傳 蔡倫》
[주D-004]점차로 …… 참소 : 누 구나 들으면 믿게끔 만드는 근거 없는 고자질을 말한다. 자장(子張)이 총명한 사람에 대해서 묻자, 공자가 “점차로 젖어들 듯한 참소와 피부로 절박하게 느끼게 하는 호소를 해도 효과가 없다면 그런 사람은 총명하다고 이를 만하다.〔浸潤之譖 膚受之愬 不行焉 可謂明也已矣〕”라고 대답한 말이 《논어》 안연(顔淵)에 나온다.
[주D-005]태공망(太公望)과 …… 따랐다 : 태 공망 여상(呂尙)이 꼬부라진 갈고리를 매달지 않고 이른바 곧은 낚시를 하면서 미끼로 유인하지도 않은 채 물의 표면에서 석 자 정도나 위로 떼어놓고는 “내 말을 안 듣는 물고기만 올라와서 물어라.〔負命者上釣來〕”라고 했다는 말이 《무왕벌주평화(武王伐紂平話)》 하권에 나온다.
[주D-006]왕자유(王子猷)와 …… 되었다 : 자 유는 진(晉)나라의 명필 왕희지(王羲之)의 아들인 왕휘지(王徽之)의 자이다. 그가 빈집에 잠깐 거할 적에도 언제나 대나무를 심도록 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묻자 “어떻게 하루라도 차군이 없이 지낼 수가 있겠는가.〔何可一日無此君耶〕”라고 대답한 고사가 전한다. 《晉書 卷80 王徽之傳》
[주D-007]자유는 …… 것이다 :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대저 윤공지타는 단정한 사람이니, 자기의 벗도 반드시 단정한 사람을 취했을 것이다.〔夫尹公之他端人也 其取友必端矣〕”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8]익모(益母) : 부인 특히 산모에게 효과가 있고 시력을 좋게 한다는 약초 이름이다.
[주D-009]의남(宜男) : 풀이름으로, 훤초(萱草)라고도 하는데, 옛날에 임신한 부인이 허리에 차고 다니면 아들을 낳는다는 미신이 있었다.
[주D-010]매선(梅仙)의 서신 : 매 선은 매화를 말한다. 남조(南朝) 송(宋)의 육개(陸凱)가 강남의 매화 한 가지를 역사(驛使)를 통해서 장안(長安)에 있는 친구 범엽(范曄)에게 부치며 시를 지어 안부를 전한 고사가 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太平御覽 卷970 荊州記》
[주D-011]이씨(李氏)의 무언의 기대 : 이 씨는 도리(桃李)를 말한다. 사마천(司馬遷)이 이광(李廣)의 인품을 흠모하여 “복사꽃과 오얏꽃은 말이 없지만 사람들이 알고서 찾아오기 때문에 그 아래에 자연히 길이 이루어진다.〔桃李不言 下自成蹊〕”라고 평한 글이 《사기》 권109 이장군열전 찬(李將軍列傳贊)에 나오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이광은 흉노(匈奴)가 비장군(飛將軍)이라고 무서워하면서 감히 침입을 하지 못했던 한 무제 때의 명장이다.
[주D-012]문여가(文與可)와 소자첨(蘇子瞻) : 여 가는 송나라 문동(文同)의 자이다. 석실선생(石室先生)이라고 칭해졌는데, 너무도 대나무를 사랑한 나머지 차군암(此君庵)이라는 호를 지어 애용하기도 하였다. 시(詩)ㆍ초사(楚辭)ㆍ초서(草書)ㆍ화(畫)의 4절(絶)로 일컬어졌는데, 그림 중에서도 특히 묵죽(墨竹)에 능했다. 자첨은 소식(蘇軾)의 자이다. 그도 대나무를 좋아하여 문동의 묵죽에 제찬(題讚)한 시가 몇 편 있는데, 그중에서도 《소동파시집(蘇東坡詩集)》 권27 서문여가묵죽(書文與可墨竹)에는 장자(莊子)가 혜시(惠施)를 애도하고 백아(伯牙)가 종자기(鍾子期)를 애도하듯 지기인 여가의 죽음을 슬퍼하는 그의 심정을 20자의 짧은 시 속에 생생하게 표현하였다.
[주D-013]송공(松公)은 …… 않았다 : 진 (秦)나라 말기의 선인(仙人) 황석공(黃石公)을 적송자(赤松子)라고도 하기 때문에 가정이 이렇게 꾸민 것이다. 어떤 노인이 일찍이 하비(下邳)의 이교(圯橋) 가에서 장량(張良)에게 《태공병법(太公兵法)》을 전해 주면서 “13년 뒤에 그대가 나를 제북 땅에서 보리니, 곡성산 아래의 누런 돌이 바로 나이니라.〔十三年孺子見我濟北 穀城山下黃石卽我矣〕”라고 하였다. 이 노인이 바로 황석공이었다. 13년 뒤에 장량이 실제로 그곳에 가서 황석을 발견하고 사당에 봉안하였으며, 장량이 죽자 황석도 함께 장사 지냈다는 기록이 《사기》 권55 유후세가(留侯世家)에 나온다.
[주D-014]위풍(衛風)의 시 : 춘 추 시대 위 무공(衛武公)이 9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라 사람들에게 자신을 일깨울 만한 좋은 말을 해 달라고 당부할 정도로 훌륭한 덕을 지녔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칭송했다고 전해지는 《시경》 위풍의 기욱(淇奧)을 말한다. 그 시 첫머리에 “저 기수 물굽이를 굽어다 보니, 푸른 대나무가 무성하도다. 아름답게 문채 나는 우리 님이여, 깎고 다듬은 듯하고 또 쪼고 간 듯하도다.〔瞻彼淇奧綠竹猗猗 有匪君子 如切如磋 如琢如磨〕”라는 대나무에 관한 구절이 나오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D-015]술 …… 말았다 : 음 력 5월 13일이 대나무를 옮겨 심는 최적의 날로 꼽힌다. 절조가 강해서 무척 까다로운 대나무도 이 날만은 술에 취한 듯 정신이 몽롱해지며 나른해지기 때문에 이식해도 잘 살아난다는 뜻으로 그날을 죽취일(竹醉日) 혹은 죽미일(竹迷日)이라고 하는데, 이런 사연이 있기 때문에 가정이 음주와 소갈증을 죽부인과 연관시켜 말한 것이다. 청분산(靑盆山)은 청자 화분을 비유한 것이다.
[주D-016]삼방 절도사(三邦節度使) 유균(惟箘) : 《서경》 우공(禹貢)의 “화살 만드는 재료인 균로와 호라는 대나무를 세 고을에서 이름난 것만 골라서 바친다.〔惟箘簵楛 三邦底貢厥名〕”라는 말을 차용한 것이다.
[주D-017]하늘이 …… 말 : 진 (晉)나라 하동 태수(河東太守) 등유(鄧攸)가 석늑(石勒)의 병란 때에 아들과 조카를 데리고 피난하다가 둘을 모두 보호할 수 없겠다고 판단하고는, 자기 아들은 버려두어 죽게 하고 먼저 죽은 동생의 아들을 대신 살렸다. 그 뒤에 끝내 후사를 얻지 못하자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며 “하늘이 무지해서 백도에게 아들이 없게 했다.〔皇天無知 使伯道無兒〕”라고 탄식했다는 고사가 《진서(晉書)》 권90 등유전에 나온다. 백도(伯道)는 등유의 자이다.
2010-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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