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집(稼亭集) 전체 목차
가정 선생 연보
가정집 제1권
가정집 제2권
가정집 제3권
가정집 제4권
가정집 제5권
가정집 제6권
가정집 제7권
가정집 제8권
가정집 제9권
가정집 제10권
가정집 제11권
가정집 제12권
가정집 제13권
가정집 제14권
가정집 제15권
가정집 제16권
가정집 제17권
가정집 제18권
가정집 제19권
가정집 제20권
가정집 잡록
가정집 발
가정집(稼亭集) 목차
가정 선생 연보
가정 선생 연보(稼亭先生年譜)
가정집 제1권
잡저(雜著)
수한(水旱)에 대해 논한 글
조포(趙苞)의 충효(忠孝)에 대해 논한 글
후한(後漢)의 삼현(三賢)에 대한 찬(贊)
당고(黨錮)의 화를 슬퍼하며 지은 글
의심을 푸는 방법에 대하여
절부(節婦) 조씨전(曺氏傳)
책문(策問)
석문(石問)
죽부인전(竹夫人傳)
가정집 제2권
기(記)
의재기(義財記)
금내(禁內) 청사(廳事) 중건기
김해부(金海府) 향교 수헌(水軒)의 기문(記文)
경사(京師) 보은광교사(報恩光敎寺)의 기문
경사(京師) 김손미타사(金孫彌陀寺)의 기문
흥왕사(興王寺)에서 흥교원(興敎院)을 중수하고 낙성 법회를 개최한 일에 대한 기문
금강산(金剛山) 보현암(普賢菴) 법회기
춘헌기(春軒記)
고려국 강릉부(江陵府) 염양선사(艶陽禪寺) 중건기
가정집 제3권
기(記)
고려국(高麗國) 천태불은사(天台佛恩寺) 중건기
금강산(金剛山) 도산사(都山寺) 창건 기문
대화엄보광사(大華嚴普光寺)를 중건한 기문
새로 지은 심원루(心遠樓)의 기문
경사(京師) 곡적산(穀積山) 영암사(靈巖寺) 석탑의 기문
조 정숙공(趙貞肅公) 사당의 기문
대원(大元) 고려국 광주(廣州) 신복선사(神福禪寺) 중건 기문
가정집 제4권
기(記)
한국공(韓國公) 정공(鄭公) 사당(祠堂)의 기문
대도(大都) 천태법왕사(天台法王寺)의 기문
대원(大元) 증(贈) 봉훈대부(奉訓大夫) 요양등처행중서성 좌우사낭중(遼陽等處行中書省左右司郞中) 비기위(飛騎尉) 요양현군(遼陽縣君) 조공(趙公) 묘영(墓塋)의 기문
대도(大都) 곡적산(穀積山)에 새로 지은 나한(羅漢) 석실(石室)의 기문
허정당(虛淨堂)의 기문
자그마한 채마밭의 기문
고려국 증(贈) 광정대부(匡靖大夫) 밀직사 상호군(密直使上護軍) 박공(朴公) 사당의 기문
가정집 제5권
기(記)
영해부(寧海府)에 새로 지은 소학(小學)의 기문
신효사(神孝寺)에 상주(常住)하는 승려를 새로 둔 것에 대한 기문
주행기(舟行記)
동유기(東遊記)
가정집 제6권
기(記)
영주(寧州) 회고정(懷古亭)의 기문
한주(韓州)의 객사(客舍)를 중건한 기문
청풍정기(淸風亭記)
비(碑)
대도(大都) 대흥현(大興縣)의 용천사(龍泉寺)를 중건한 비문
금강산(金剛山)의 장안사(長安寺)를 중건한 비문
대숭은복원사(大崇恩福元寺) 고려 제일대사(第一代師) 원공(圓公)의 비문
가정집 제7권
설(說)
배갱(杯羹)에 관한 설
차마설(借馬說)
경보설(敬父說)
심보설(深父說)
사설(師說)을 지어 전정부(田正夫)에게 작별 선물로 주다
신설(臣說)을 지어서 귀국하는 이 부령(李府令)을 전송하다
내옹설(乃翁說)을 지어 동쪽으로 돌아가는 배군 윤견(裵君允堅)을 전송하다
시사설(市肆說)
제발(題跋)
근설(勤說)의 뒤에 제(題)하다
복산(福山) 시권(詩卷)의 발문(跋文)
명찬(銘讚)
영암사(靈巖寺) 새 우물의 명(銘)
새로 만든 십이현(十二弦)의 명(銘)
순암(順菴)의 진영(眞影)에 대한 찬(讚)
식무외(式無外)의 송석헌(松石軒)에 제한 명(銘)
새로 주조한 연복사(演福寺) 종(鍾)의 명(銘)
가정집 제8권
서(書)
동년(同年) 조 중서(趙中書)와 최 헌납(崔獻納)에게 준 글
중국의 언관(言官)을 대신해서 글을 지어 고려(高麗)의 동녀(童女)를 데려오는 것을 그만두도록 청한 글
본국(本國)의 재상(宰相)에게 부친 글
계(啓)
정당(政堂)에게 올린 글
서(序)
수정 장로(水精長老)를 전송한 시의 서문
상국(上國)으로 유학(遊學)하러 떠나는 동년(同年) 김동양(金東陽)을 전송한 시의 서문
정 참군(鄭參軍)을 전송한 시의 서문
가정집 제9권
서(序)
안 수찬(安修撰)을 전송한 시의 서문
합포(合浦)로 출진(出鎭)하는 홍 밀직(洪密直)을 전송한 글
입조(入朝)하는 정 부령(鄭副令)을 전송한 글
입조(入朝)하는 신 시승(辛寺丞)을 전송한 시의 서문
박 지평(朴持平)에게 부친 시의 서문
황도(皇都)로 돌아가는 백운빈(白雲賓)을 전송한 시의 서문
게 이문(揭理問)을 전송한 시의 서문
최 시승(崔寺丞)이 등제(登第)한 것을 축하한 시의 서문
가정집 제10권
서(序)
화평부(化平府)에 부임하는 김회옹(金晦翁)을 전송한 시의 서문
계림부(雞林府) 공관(公館) 서루(西樓)의 시서(詩序)
표전(表箋)
책립(冊立)한 뒤에 올린 하표(賀表)
태후(太后)에게 같은 뜻으로 올린 하표(賀表)
황후(皇后)에게 올린 하전(賀箋)
활과 무기와 마필(馬匹)을 원상회복해 준 데 대해 사은한 표문(表文)
정조(正朝)를 하례하기 위해 태후에게 올린 표문
정조(正朝)를 하례한 표문
사은(謝恩)한 표문
소어(疏語)
불정 도량(佛頂道場)에 올린 소
외원 도량(外院道場)에 올린 소
팔관재(八關齋)에 올린 소
청사(靑詞)
하원(下元) 초제(醮祭) 때의 청사(靑詞)
동지(冬至)에 가까운 갑자일의 초제에 올린 청사
소왕(小王)의 본명(本命)에 초제를 지내면서 올린 청사
가정집 제11권
제문(祭文)
교감(校勘) 김천조(金天祚)를 위하여 모친에게 제사드린 글
원 재상(元宰相)을 위하여 양부(養父)인 정승(政丞) 김이용(金利用)에게 제사드린 글
남 부마(男駙馬)를 위하여 심왕(瀋王)에게 제사드린 글
장곡강(張曲江)에 대한 제문
묘지명(墓誌銘)
유원(有元) 봉의대부(奉議大夫) 태상예의원 판관(太常禮儀院判官) 효기위(驍騎尉) 대흥현자(大興縣子) 고려(高麗) 순성보익찬화 공신(純誠輔翊贊化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우문관대제학 영예문관사(右文館大提學領藝文館事) 순천군(順天君) 채공(蔡公)의 묘지명
대원(大元) 고(故) 장사랑(將仕郞) 요양로 개주 판관(遼陽路蓋州判官) 고려국 정순대부(正順大夫) 검교성균대사성 예문관제학 동지춘추관사(檢校成均大司成藝文館提學同知春秋館事) 최군(崔君)의 묘지(墓誌)
고려국 봉상대부(奉常大夫) 전리총랑 보문각직제학 지제교(典理摠郞寶文閣直提學知製敎) 이군(李君)의 묘표(墓表)
고려국 정순대부(正順大夫) 밀직사우부대언 종부령 겸 감찰집의 지판도사사(密直司右副代言宗簿令兼監察執義知版圖司事) 유군(柳君)의 묘지명
대원(大元) 고 장사랑(將仕郞) 요양로 개주 판관(遼陽路蓋州判官) 고려국 삼중대광(三重大匡)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 영예문관사(領藝文館事) 시(諡) 문정(文貞) 안공(安公)의 묘지명
가정집 제12권
묘지명(墓誌銘)
고려국 중대광(重大匡) 첨의찬성사 상호군(僉議贊成事上護軍) 평양군(平壤君) 조공(趙公)의 묘지(墓誌)
고려국 광정대부(匡靖大夫) 첨의평리 예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상호군(僉議評理藝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上護軍)으로 치사한 윤공(尹公)의 묘지명
행장(行狀)
고려국 승봉랑(承奉郞) 총부 산랑(摠部散郞) 사(賜) 비어대(緋魚袋) 증(贈) 삼중대광(三重大匡) 첨의정승 판전리사사 상호군(僉議政丞判典理司事上護軍) 기공(奇公)의 행장
유원(有元) 고(故) 아중대부(亞中大夫) 하남부로총관 겸 본로제군오로총관 관내권농사 지하방사(河南府路摠管兼本路諸軍奧魯摠管管內勸農事知河防事) 증(贈) 집현 직학사(集賢直學士) 경거도위(輕車都尉) 고양후(高陽侯) 시(諡) 정혜(正惠) 한공(韓公)의 행장
가정집 제13권
정문(程文)
한(漢)나라가 사예교위(司隸校尉) 왕존(王尊)을 문책하여 강등시킨 조서(詔書)를 모의(模擬)하여 지어 본 글
한(漢)나라 양진(楊震)의 두 아들을 낭(郞)에 임명한 조서를 모의하여 지어 본 글
응거시책(應擧試策)
향시책(鄕試策)
정시책(廷試策)
가정집 제14권
고시(古詩)
기행(紀行) 시 한 수를 지어 청주 참군(淸州參軍)에게 주다
차운(次韻)하여 백화보(白和父)에게 답하다
운명이 기박한 첩〔妾薄命〕. 태백(太白)의 운(韻)을 써서 짓다.
애왕손(哀王孫)
사바(闍婆)의 칼. 전배(前輩)의 운(韻)을 쓰다.
당 태종(唐太宗)의 육준도(六駿圖)
한양(漢陽) 정 참군(鄭參軍)을 보내며
천력(天曆) 기사년(1329, 충숙왕16) 유월에 예성강(禮成江)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여 남쪽으로 한산(韓山)에 가려다가 강어귀에서 바람에 막히다
포사(曝史)의 임무를 띠고 남쪽으로 돌아가는 안원지(安員之)를 전송하며
음주(飮酒) 시 한 수를 백화보(白和父), 우덕린(禹德麟)과 함께 짓다
무극(無極) 스님의 시에 차운(次韻)하여 그의 문도(門徒)인 경초(景楚)가 전당(錢塘)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며
7월 4일에 집에서 온 편지를 받고
소백수(蘇伯脩)가 호성(湖省)의 참정(參政)으로 가는 것을 전송할 적에 시운(詩韻)을 나눠 동화진(東華塵)을 얻다
순암(順菴)이 새로 대장경(大藏經)을 봉안한 일에 대해 이극례(李克禮) 주판(州判)이 시를 지어 찬미하였기에 내가 그 시에 차운하다
한식날에 홀로 앉아 심회(心懷)를 적다
황산가(黃山歌). 정중부(鄭仲孚)가 울주(蔚州)에서 지은 시에 차운하다.
십일국(十日菊)
우곡(愚谷)의 시에 차운하여 우 선생 탁(禹先生倬)에게 바치다
총석정(叢石亭)의 시에 차운하다
서주(西州) 용당(龍堂)과 장암(長岩)의 두 사당을 지나며
도중(途中)에 읊다
부여 회고(扶餘懷古)
금내(禁內)의 제생(諸生)과 함께 자하동(紫霞洞)에서 노닐며 차운하다
이생(李生)의 운을 써서 용두사(龍頭寺)의 노승에게 부치다
진주(眞州) 중대사(中臺寺)의 고장로(古長老)와 작별하며 남겨 준 시
가정집 제15권
율시(律詩)
영해(寧海)의 무가정(無價亭)에서 김간재(金簡齋)의 시에 차운하다
무진년(1328, 충숙왕15) 겨울에 얼어붙은 한강(漢江)을 건너며
천력(天曆) 기사년(1329)에 예성강(禮成江)에서 배를 띄웠다가 강어귀에서 바람에 막히다
강화군(江華郡)에서 차운하다
자연도(紫燕島)에서 차운하다
제물사(濟物寺)에 묵으면서 벽 위의 시에 차운하다
연흥도(延興島)에서 차운하다
도의(道義)로 우정을 맺은 제군(諸君)에게 부치다
동년(同年) 윤 내상(尹內相)에게 부치다
우 선생(禹先生)이 규정(糾正)에 임명된 것을 축하하며 부치다
동년(同年) 남 한림(南翰林)에게 부치다
동년 유 한림(柳翰林)에게 부치다
안원지(安員之)와 이중권(李仲權)이 동시에 옥당(玉堂)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시를 지어 축하하다
영사(詠史)
묵매(墨梅)
매화. 권일재(權一齋)의 시에 차운(次韻)하다.
금벽전(金壁傳)의 후벽(後壁)에 제(題)하다
중서(中書) 역사(譯史)의 모란도(牡丹圖) 뒤에 제하다
송 좨주(宋祭酒)의 육준도(六駿圖)에 제하다
허 이문(許理問)을 전송하며
차운하여 이 승통(李僧統)의 시권(詩卷)에 제하다
권일재(權一齋)가 중구일(重九日)에 용산(龍山)에 올라 두목(杜牧)의 시를 차운하여 지은 시에 차운하다
박치암(朴恥菴)이 사의(司議)에 제수된 것을 축하하며
영양(英陽) 신촌(新村)의 이 거사(李居士)에게 부치다
게 이문(揭理問)이 작은 술자리를 베풀고서 함께 마시자고 나를 초청했는데 병 때문에 가지 못하였다
홍 합포(洪合浦)가 귤과 차를 부쳐 준 것을 감사하다
안강(安康) 이 선생(李先生)에게 부치다
완산(完山)의 최 장원(崔壯元)에게 부치다
강남(江南)으로 돌아가는 비 태의(費太醫)를 전송하며
강남으로 떠나는 식무외(式無外)를 전송하며
최 어사(崔御史)의 경친(慶親)의 시권(詩卷)에 제하다
동년(同年) 성의숙(成誼叔)에게 부치다
경진년(1340, 충혜왕 복위1) 봄날에 느낀 바가 있어서
병중(病中)에 초청을 받고서 게 이문(揭理問)에게 사과하다
게이충(揭以忠)이 화답했기에 또 짓다
차운하여 방 판각(方判閣)의 죽음을 애도하다
안겸재(安謙齋)를 축하하다
게이충(揭以忠)을 축수(祝壽)하다
경상도 박 안렴(朴按廉)의 글을 얻고 나서 시를 지어 감사하는 뜻을 표하다
대신 지어서 전라도 민 안렴(閔按廉)에게 부치다
차운하여 김 재상(金宰相)을 축하하다
김 사공(金司空)의 초청을 받았으나 병으로 참석하지 못하고 시를 지어서 감사의 뜻을 표하다
안근재(安謹齋)를 축하하다
의령(宜寧)의 남 중서(南中書)에게 부치다
진주(晉州)의 수재(守宰)로 나가는 우 좨주(禹祭酒)를 전송하며
안강(安康) 이 선생(李先生)에게 부치다
가정집 제16권
율시(律詩)
기 재상(奇宰相)이 새로 정승에 임명되어 신정(新正)을 축하하러 황궁에 들어가는 것을 축하하다
신사년(1341, 충혜왕 복위2) 원일(元日)에 감회에 젖어
인일(人日)
신사년(1341) 여름 연경(燕京)에 들어가면서 장눌재(張訥齋)에게 부치다
절성(浙省)의 검교(檢校)로 나가는 동년(同年) 달겸선(達兼善)을 전송하며
중시(仲始) 사보(思補)에게 부치면서 박 판사(朴判事)에게도 증정하다
식무외(式無外)의 염주(念珠)에 대해서 장난삼아 짓다
구운(舊韻)을 써서 우생(友生)에게 답하다
강 헌납(康獻納)에게 부치다
귀향하는 벗을 전송하며
장생(張生)의 〈칠석(七夕)〉 시에 화운하다
중구일(重九日)에 제공(諸公)의 방문을 받고 술을 조금 마시다
신 대언(辛代言)이 동쪽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며
소백수(蘇伯脩) 참의(參議)의 자계서당(滋溪書堂)에 제하다. 소씨(蘇氏)는 5대에 걸쳐 각 대마다 서책을 불린 결과 무려 만 권을 소장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좌주(座主)인 송 상서(宋尙書) 성부(誠夫)가 맨 위에 기문(記文)을 쓰고, 제공(諸公)이 모두 시를 지었다.
홍문야(洪文野) 이문(理問)에게 부치다
최춘헌(崔春軒)이 새로 전법 판서(典法判書)에 임명된 것을 축하하는 시를 지어 부치다
김중시(金仲始) 사보(思補)에게 부치다
동국(東國)에서 관광하러 온 제생(諸生)과 함께 서산(西山)에서 노닐다
요동(遼東)의 최(崔)와 홍(洪), 두 염방(廉訪)에게 부치다. 그들은 모두 동향인이다.
임오년(1342, 충혜왕 복위3) 한식(寒食)에
김경선(金敬先)이 낙제하여 동쪽으로 돌아가려 할 적에 한식(寒食)에 창화(唱和)한 시의 운을 써서 만류하다
차운하여 순암(順菴)에게 답하다
6월 15일에 서호(西湖)에서 노닐며
칠석(七夕)
도중에 비를 피하며 느낀 바가 있어서
중추절에 달을 구경하며
8월 20일에 새 운하에 물을 방류하는 것을 구경하며
9월 15일 밤에 〈중추절〉의 운을 써서 시를 짓다
문야(文野) 낭중(郞中)에게 부치다
가을비 속에 밤에 앉아서
순암(順菴)의 운을 써서 한성재(韓誠齋) 정승의 죽음을 애도하다
순암의 동지 팥죽을 고마워하며 아울러 박경헌(朴敬軒)에게도 증정하다
수세(守歲)
계미년(1343, 충혜왕 복위4) 원일(元日)에 숭천문(崇天門) 아래에서
정월 보름날 밤에 석진교(析津橋) 위에서
가까이 거하면서 순암(順菴)에게 증정하다
서교(西郊) 도중(途中)에
서산(西山) 영암사(靈巖寺)에 제하다. 그 사원의 승려는 모두 동향인이다.
3월 14일에 성남(城南)에서 노닐다
극례(克禮) 주판(州判)에게 부치다
송경(松京)의 친우(親友)에게 부치다
가랑비에 느낌이 있어서
6월 1일에
6월 6일 밤에 비가 오기에
가형(家兄)의 글을 받고
거리에서 서산(西山)을 바라보며
오랜 비로 물이 넘치는 바람에 성안에서 물고기를 많이 잡다
순암(順菴)의 육순음(六旬吟)에 차운하다
진주(晉州) 안 판관(安判官)에게 부치다
연성사(延聖寺)의 옥잠화(玉簪花) 시에 차운하다
칠석(七夕)에 조촐하게 술자리를 갖고
황도(皇都)의 가을날
귀국하는 홍의헌(洪義軒)을 전송하며
가정집 제17권
율시(律詩)
7월 17일에 법가(法駕)를 보고 남교(南郊)에서 돌아오다
교제(郊祭)를 지내고 대사면령(大赦免令)을 내린 일에 대해 조하(朝賀)했다는 말을 병중(病中)에 듣고
병중에 회포를 읊다
첫 추위
동지(冬至)
견흥(遣興)
제야(除夜)에 홀로 앉아서
갑신년(1344, 충혜왕 복위5) 원일(元日)에
정단(正旦)의 눈
인일(人日)
입춘(立春)에 회포를 적다
대서(代書)하여 중시(仲始) 사예(司藝)에게 답하다
극례(克禮) 주판(州判)에게 부치다
홀로 앉아서
소원(小園)에 오이를 심고 느낀 점이 있어서
의무려(醫巫閭)에 대신 제사 지내러 가는 기 집현(奇集賢)을 전송하며
가랑비 내리는 새벽에 일어나서
연성사(延聖寺)에서 노닐며
봄비
황 회산(黃檜山)을 전송하며
한 상국(韓相國)을 전송하며
다시 중시(仲始) 사예(司藝)에게 부치다
이 정랑(李正郞)에게 답하다
차운하여 최심보(崔深父)에게 답하다
제비
사명을 받들고 동방으로 돌아가는 김 동지(金同知)를 전송하며
병에서 일어나서 지기(知己)에게 증정하다
내일이 단오 명절이라 다시 앞의 운을 써서 시를 짓다
항주(杭州)를 유력하며 승상(丞相)을 만나려는 정중부(鄭仲孚)를 떠나보내면서 지은 시
비 오는 가운데 홀로 앉아서
죽순을 먹으며 지은 시
순암(順菴)의 원숭이를 읊은 시
비 때문에 길이 막힌 소회를 써서 정중부(鄭仲孚)에게 부치다
중부(仲孚)가 화답했기에 다시 지은 시
중부(仲孚)가 날이 개어 기쁘다고 재차 화답하며 서호(西湖)에 놀러 가자고 약속하기에 다시 지은 시
정중부(鄭仲孚)가 거년(去年)에 울주(蔚州)에서 지은 동래(東萊)의 시 십 수를 나에게 보여 주기에 그 시에 차운하다
객사(客舍)
두 분의 김 지평(金持平)에게 축하하며 부치다
신초정(辛草亭)에게 부치다
안강(安康) 이 선생(李先生)에게 부치다
병술년(1346, 충목왕2) 중추(中秋)에 한양부(漢陽府)에 제(題)하다
이듬해에 또 한양부에 제하다
여흥(驪興)의 객사(客舍)에서 차운하다
성 안렴(成按廉) 여안(汝安)에게 부치다
가정집 제18권
율시(律詩)
중구일(重九日)에
겨울의 초입에
눈 내린 밤에 술을 조금 마시며
치통(齒痛)
혹독한 추위
입춘(立春)
을유년(1345, 충목왕1) 원일(元日)에
인일(人日)에 두시(杜詩)를 읽으며 그 운을 그대로 써서 시를 짓다
귀향하는 국정(菊庭) 기 참정(奇參政)을 전송하며
낙제하고 동쪽으로 돌아가는 윤 정언(尹正言)을 전송하며
안근재(安謹齋)에게 축하하는 시를 부치다
홍양파(洪陽坡) 제거(提擧)가 정동 유학(征東儒學)으로 부임하는 것을 전송하며
전송하는 시를 거듭 짓다
청명(淸明)에 내리는 눈
청명 뒤에 성 남쪽으로 나가서 서산(西山)의 눈을 바라보다
차운하여 가형(家兄)에게 답하다
가형(家兄)의 시운(詩韻)을 써서 아자(兒子) 눌회(訥懷)에게 부쳐 보이다
이행촌(李杏村)에게 부치다
차운하여 동년(同年) 김천조(金天祚)에게 부치다
동년 안원지(安員之)가 등제(登第)하고 귀향하는 것을 전송하며
김경선(金敬先) 부령(副令)에게 부치다
극례(克禮) 주판(州判)이 대언(代言)을 제수받았다는 말을 듣고 시를 지어 축하하다
사명(使命)을 받들고 동쪽으로 돌아가는 순암(順菴)을 전송하며
전송하는 시를 거듭 짓다
안겸재(安謙齋)에게 부치다
최덕림(崔德林) 정윤(正尹)이 운남왕(雲南王)을 따라서 서남이(西南夷) 지역으로 들어가는 것을 전송하며
난경기행(灤京紀行)
아침 일찍 떠났다가 길을 잃고서
중부(仲孚) 사의(司議)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의 형인 정 판사(鄭判事)에게 증정하다
중추(中秋)의 밤에 앉아서
평생에 종유(從游)한 이들을 하나하나 셀 수가 있는데, 그중에서 졸재(拙齋)와 춘헌(春軒)이 서로 잇따라 세상을 떠난 뒤를 이어 중부(仲孚) 사의(司議)가 또 황천객이 되었다. 이에 삼애시(三哀詩)를 지어서 치암(恥菴)과 급고당(汲古堂)에게 부쳐 드리다.
의령(宜寧)의 남 동년(南同年)이 조정에 복관(復官)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지난날의 추억을 서술하며 애오라지 단편을 지어 부치다
유 정언(兪正言)에게 부치다
백화보(白和父) 간의(諫議)에게 부치다
홍 총관(洪摠管)이 회안(淮安)의 둔전관(屯田官)으로 부임하는 것을 전송하며
삼장(三藏)의 시에 차운하다
녹(鹿)이라고 표시해 놓은 움집을 보고서
신산배면도(神山背面圖)에 제하다
의주(義州) 신루(新樓)에 차운하여 제하다
우인(友人)에게 달력을 기증하며
차운하여 장눌재(張訥齋)가 거처하고 있는 야운장(野雲莊)에 제하다
차운하여 안 조마(安照磨)가 요양(遼陽)으로 부임하는 것을 전송하다
병술년(1346, 충목왕2) 제야(除夜)에
정해년(1347, 충목왕3) 정단(正旦)
오십
신년(新年)
정 대언(鄭代言)에게 부치다
백화보(白和父)에게 부치다
홍양파(洪陽坡)에게 부치다
남촌(南村)의 박 판서(朴判書)에게 부치다
김경선(金敬先) 대언(代言)에게 축하하는 시를 부치다
조사(詔使) 김 성사(金省舍)에게 부치다
기 참정(奇參政)에게 부치다
차운하여 기 참정의 초정(草亭)에 제하다
홍양파(洪陽坡) 제거(提擧)가 작약(芍藥)을 감상한 시에 차운하여 화답하다
백화보(白和父)와 함께 매화 시를 지으면서 동파(東坡)의 운을 쓰다
안강(安康) 이 선생(李先生)에게 부치다
가정집 제19권
율시(律詩)
흥의역(興義驛)에서 묵으며
자비령(慈悲嶺)을 넘으며
순암(順菴)에게 부치다
눌재(訥齋)에게 부치다
박 판서(朴判書)에게 부치다
김 장원(金壯元)에게 부치다
방 상서(方尙書)에게 부치다
민급암(閔及菴)에게 부치다
전운(前韻)을 써서 홍양파(洪陽坡)에게 부치다
김 좨주(金祭酒)에게 부치다
이 총랑(李摠郞)에게 부치다
원지(員之)가 본국의 관직을 잃었다는 말을 듣고 시를 지어서 안 총랑(安摠郞)에게 부치다
기국정(奇菊庭)에게 부치다
차운하여 남의춘(南宜春)에게 답하다
이 밀직(李密直)에게 부치다
이초은(李樵隱)에게 부치다
복건(福建)으로 부임하는 최 염사(崔廉使)를 전송하며
죽헌(竹軒)을 애도하며
안강(安康) 이 선생(李先生)에게 부치다
강천모설도(江天暮雪圖)에 제하다
감창(監倉) 유감
자영(自詠). 백낙천(白樂天)의 시체(詩體)를 본떠서 읊다.
차운하여 죽헌(竹軒)을 애도하다
동년(同年) 장 시승(張寺丞)에게 부치다
김맹견(金孟堅)의 시권(詩卷)에 제하다
우곡(愚谷)이 은배(銀杯)를 보시(布施)한 시에 차운하다
김 이문(金理問)의 부인(夫人) 대흥현군(大興縣君)의 죽음을 애도하며
김 동년(金同年)의 시에 차운하다
연아(演雅) 한 수
정 안렴(鄭按廉)의 시에 차운하다
허 낭중(許郞中)의 시에 차운하다
두 분 곽씨(郭氏) 동년에게 부치다. 모두 나주(羅州)에 있다.
주행(舟行)을 기록하여 송정 거사(松亭居士)에게 봉정(奉呈)하고 아울러 임주(林州)에게도 보내다
도원역(桃源驛)에서 묵다
중추(中秋)에 오계역(五溪驛)에서 묵다
충숙왕(忠肅王)이 철원(鐵原)에서 사냥할 적에 고석정(孤石亭)에 올라 절구 한 수를 남겼는데, 이때 안부(按部) 정공 자후(鄭公子厚)가 객관(客館)에 썼다. 그리고 뒤에 삼장법사(三藏法師) 조순암(趙順菴)도 그 운에 의거해서 응제(應製)하였다. 이에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기에 삼가 절구 두 수를 지었다.
김화역(金化驛)에서 묵는데 밤에 비가 내리다
금성현(金城縣)에서 묵다
천마령(天磨嶺)에 오르다
천마령 위에서 금강산(金剛山)을 바라보며
금강산 정양암(正陽菴)에 올라가서
장안사(長安寺)에서 묵다
천마(天磨)의 서령(西嶺)에 오르다
재차 통구현(通溝縣)에서 묵으며 느낀 점이 있기에
회양부(淮陽府)에서 묵으며 벽 위에 있는 허 집의(許執義)의 시에 차운하다
윤 학사(尹學士)의 시에 차운하다
철령(鐵嶺)에 오르다
화주(和州) 벽 위의 시에 차운하다
국도(國島) 관광 소감
학포(鶴浦)의 원수대(元帥臺)에 올라
학포현(鶴浦縣)의 정자에 안근재(安謹齋)의 시가 있는데, 그 말구(末句)에 “어떡하면 동해의 물이 불어나게 해서, 좋은 경치 모두 잠겨 이 고통 면하게 할꼬.〔若爲添得東溟水沒盡奇觀免此勞〕”라고 하였다. 이는 대개 구경하려고 놀러 온 자들이 백성을 괴롭히기 때문이었는데, 나는 그 뜻을 반대로 해서 절구(絶句) 한 수를 지어 보았다.
고성(高城)의 벽 위에 있는 삼일포(三日浦)의 시에 차운하다
삼일포(三日浦) 사선정(四仙亭)의 시에 차운하다
흡곡(歙谷) 객사(客舍)의 시에 차운하다
열산현(列山縣) 객사의 시에 차운하다
간성(杆城)의 판상(板上)에 있는 시에 차운하다
영랑호(永郞湖)에서 안근재(安謹齋)의 시에 차운하다
만경대(萬景臺) 시에 차운하다
양주(襄州) 누대 위의 시에 차운하다
동행했던 유 소경(柳少卿)이 마병(馬病)으로 뒤에 처졌는데, 양양(襄陽)에 도착해서 머무르며 기다려도 오지 않기에 누대 위의 시를 차운해서 빨리 오라고 재촉하였다
상운역(祥雲驛)의 정자에 올라 보니 정자의 경치가 좋은데도 시가 없기에 절구 한 수를 남기다
동선역(洞仙驛) 관란정(觀瀾亭)의 시에 차운하다
강릉(江陵) 객사(客舍)의 동헌(東軒)에 있는 시에 차운하다
한송정(寒松亭)에서 예천군(醴泉君)이 제한 시에 차운하다
경포대(鏡浦臺)에서 안근재(安謹齋)의 시에 차운하다
강릉(江陵) 등명사(燈明寺) 시에 차운하다
가정집 제20권
율시(律詩)
〈삼척 서루 팔영(三陟西樓八詠)〉 시에 차운하다
울진(蔚珍) 객사(客舍)의 시에 차운하다
영희정(迎曦亭)의 시에 차운하다
월송정(越松亭)의 시에 차운하다
평해(平海) 객사(客舍)의 시에 차운하다
임의정(臨漪亭)의 시에 차운하다
영해(寧海) 북량루(北凉樓)의 시에 차운하다
영해부(寧海府) 객사(客舍)의 시에 차운하다
흥해현(興海縣) 객사에 제하다
영주(永州) 객사에서 전현(前賢)이 제한 죽시(竹詩)에 차운하다
팔거(八莒)의 동년(同年) 배 규정(裵糾正)의 초당(草堂)에 제하다
경산부(京山府) 백화헌(百花軒)의 시에 차운하다
경산부 남루(南樓)의 시에 차운하다
신초정(辛草亭)에게 부치다
길이 성산(星山)을 지날 무렵부터 황간현(黃澗縣)에 이를 때까지 갈수록 더 황폐해지는 것이 애처롭게 느껴지기에 영동군(永同郡)에 도착해서 시 한 수를 남겨 왕래하는 사람들에게 보이기로 하였다
양산현(陽山縣)에 도착해서 보니 벽 위에 시가 있었는데 그 명자(名字)가 누군가에 의해 지워졌기에 장난삼아 그 운을 써서 두 수를 지은 다음에 그 시를 판(板) 위에 함께 써 놓고는 “이 판도 누가 떼어 내지 않을지 어떻게 보장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금주(錦州)의 객사에 제하다
내가 지치(至治) 연간에 일 때문에 진동현(珍同縣)에 왔었는데, 그때 몇 안 되는 인가의 가옥이 무너져서 비바람도 피할 수 없었으므로 이미 유망(流亡)해서 다시는 인연(人煙)을 볼 수 없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번에 와서 보건대 영접하는 관리도 있고 응접하는 장소도 있기에 어떻게 된 영문인지 물어보았더니, 성은 진(陳)이요 이름은 신로(臣老)요 직책은 호장(戶長)인 자가 제대로 복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내가 너무도 기쁜 나머지 진씨(陳氏) 집의 벽에 시를 제하여 백성의 풍속을 살피는 자에게 보이고 현감(縣監)을 일깨우는 한편, 온 마을 사람들이 진씨 집안을 본받도록 하였다.
연산(連山)에 도착해서 듣건대 김 선생 광정(金先生光鼎)이 근읍(近邑)에서 생도를 가르치고 있다고 하기에 절구 두 수를 지어 부치다
대안사(大安寺)의 중지(中之) 승통(僧統)에게 부치다
변산(邊山)의 여러 암자를 돌아본 뒤에 소래루(蘇來樓) 위의 시에 차운하고 세월을 기록하다
도솔(兜率)의 벽 위에 있는 시에 차운하다
윤 동년(尹同年)을 찾아갔다가 만나지 못하고
흥덕(興德)의 객사에 제하다
금산사(金山寺)의 벽 위에 있는 시에 차운하다
장 상국(張相國)에게 부치다
용두동(龍頭洞)을 지나면서 전현(前賢)의 시에 차운하다. 이곳은 고(故) 상신(相臣) 조 장원(趙狀元)이 살던 곳이다.
탄(坦) 스님에게 증정하다
고부군(古阜郡) 북루(北樓)의 시에 차운하다
은 학사(殷學士)가 홍산(鴻山)에 제한 시에 화답했기에 삼가 그 운을 써서 두 수의 절구를 봉증(奉贈)하다
죽파(竹坡) 조 선생(趙先生)의 거소에 제하다
자정대(紫汀臺)
천태산(千太山) 제륜사(濟淪寺)에서 노닐며
완산(完山) 도중(途中)에
눌재(訥齋)가 화답하였기에 다시 한 수를 짓다
경포(京浦)에서 바람에 길이 막혀
허 집의(許執義)에게 부치다
관도(官渡)를 건너면서 우스개로 짓다
촌사(村舍)에 제하다
차운하여 남 안렴(南按廉)에게 답하다
영해(寧海)에 유증(留贈)한 시
사(詞)
진주(眞州) 신기(新妓)의 이름과 관련한 사(詞)를 완계사(浣溪沙)의 사체(詞體)로 짓다
정중부(鄭仲孚)의 〈울주 팔영(蔚州八詠)〉에 차운하여 무산일단운(巫山一段雲)의 사체로 짓다
평해(平海) 객사(客舍)의 시에 차운하여 남가자(南柯子)의 사체로 짓다
가정집 잡록
이중보(李中父)가 정동행성(征東行省)에 사신으로 나가는 것을 전송하며 지은 서(序)
이중보(李中父)가 사명을 완수하고 원나라 조정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며 지은 서
가정기(稼亭記)
가정사(稼亭詞)
도연명(陶淵明)의 시구를 모아서 가정(稼亭)에 봉제(奉題)하다
《시경》의 구절을 뽑아서 가정(稼亭)에 제하다
이중보(李中父)가 정동행성(征東行省)에 사신으로 나가는 것을 전송하며 지은 서
가정집 발
발(跋)
초간본(初刊本)
중간본(重刊本)
삼간본(三刊本)
사간본(四刊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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