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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재기(義財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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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봉(牛峯) 이경보(李敬父)가 나에게 묻기를,
“붕우와 형제 중에 누가 더 친한가?”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형제가 더 친하다.”
하였더니, 그가 또 묻기를,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이 붕우의 일에는 모두 급히 서두르는데, 형제의 일에는 늑장을 부리는 까닭은 무엇인가?”
하였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이는 욕심을 따르고 이익을 좋아하는 데 따라 생기는 폐해이다. 내가 그대에게 한번 말해 보아도 되겠는가? 대개 유년기에는 누구나 어버이를 친애하고 커서는 형을 공경할 줄 아는데, 이 인의(仁義)의 마음을 점차 확충해서 내부로부터 시작하여 외부로 적용해 나아가는 것이 야말로 하늘로부터 품부받은 성품이 참되게 발현되도록 하는 것이요, 사람이 정상적으로 행할 길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조ㆍ쌀ㆍ생선ㆍ고기, 그리고 삼베ㆍ목화실ㆍ명주실ㆍ솜 같은 것이 곧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먹고 입고 하는 것이지만, 혹시라도 욕심을 따르고 기이한 것을 좋아할 경우에는 반드시 계속 공급하기 어려운 물건이나 비상한 별미를 구해서 구복(口腹)에 맞게 하고 신체에 편하게 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구복에도 맞지 않고 신체에도 편치 못할 뿐만 아니라 장차 이에 따라 생기는 폐해를 감당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자기 형제에 대해서는 항상 보는 사람이라고 하여 무례하게 아무렇게나 대하는 경향이 농후하여 친애하고 공경하는 일은 아예 힘쓰려고도 하지 않으며, 심한 경우에는 시기하고 의심하며 화내고 싸우는 등 못할 짓이 없이 제멋대로 굴곤 한다. 그러나 타인에 대해서는 권세와 이익으로 유인하기도 하고, 돈과 물건으로 통하기도 하고, 술과 음식으로 즐기기도 하는 등, 돈독하게 친애하고 견고하게 결탁하는 면에서 또한 못할 짓이 없이 한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이미 권세와 이익이라고 말했다시피 권세와 이익이 다하고 나면 서로 유인했던 것이 이번에는 서로 해치기에 안성맞춤인 것으로 변하고 만다. 그러니 돈이나 물건이라든가 술이나 음식 같은 잗단 것이야 말할 것이 또 뭐 있겠는가. 이는 욕심을 따르고 이익을 좋아하는 데 따라 생기는 폐해인 것이다.
사람의 기본 윤리에 다섯 가지가 있는데, 성인이 차서를 매긴 그 조목을 보면 군신(君臣)에 대해 말하고, 부자(父子)에 대해 말하고, 부부(夫婦)와 형제(兄弟)에 대해 말한 다음에 붕우(朋友)는 맨 마지막에 언급하였다. 그러고 보면 붕우가 위의 네 가지 관계에 비해 형세상으로는 뒤처지는 것 같기도 하지만, 실제로 그 쓰임에 있어서는 앞선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책선(責善)을 하고 보인(輔仁)을 하여 인륜을 아름답게 이룰 수 있게 하는 것은 모두가 붕우의 힘이기 때문이다. 그렇긴 하지만 그 본말의 차원에서 보면 본래 질서 정연하여 바꿀 수 없는 점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상체(常棣)라 는 시가 나오게 된 까닭이라고 하겠다. 그 수장(首章)을 보면 ‘아가위 꽃송이 활짝 피어 울긋불긋, 지금 어떤 사람들도 형제만 한 이는 없지.〔常棣之華 鄂不韡韡 凡今之人莫如兄弟〕’라고 하였고, 3장에서는 ‘저 할미새 들판에서 호들갑 떨듯, 급할 때는 형제들이 서로 돕는 법이라오. 항상 좋은 벗이 있다고 하지만, 그저 길게 탄식만 늘어놓을 뿐.〔鶺鴒在原 兄弟急難 每有良朋 況也永歎〕’이라고 하였으며, 5장에서는 ‘환란이 일단 지나고 나서, 사태가 안정되어 몸이 편해지면, 비록 형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친구만 못하게 여기도다.〔喪亂旣平 旣安且寧 雖有兄弟 不如友生〕’라고 하였다. 예로부터 형제와 붕우 사이의 관계는 그 도리가 이와 같은 데에 지나지 않으니, 이 시를 상세히 음미해 보면 성인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대는 몸가짐을 근신하면서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인륜의 경중과 친소의 구분에 대해서 이미 익히 검토했을 것인데, 그대가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마 이유가 있어서일 것이다.”
하니, 이군(李君)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그렇다. 나에게는 가까운 형제와 먼 형제를 모두 합쳐서 20여 인이 있는데, 그들과 어울려 노닐 적에 절절(切切)하게 대하기도 하고 이이(怡怡)하게 대하기도 한다. 그리고 지금 각각 기금을 약간씩 출연하여 의재(義財)라고 명명하고는, 해마다 두 명씩 교대하여 번갈아 가며 주관하게 하고 있다. 그리하여 다달이 그 이자를 받아서 경조(慶弔)와 송영(送迎)의 비용에 대비하는 한편, 쓰고 남은 것이 있으면 장차 구휼하고 주신(賙贐)하는 밑천으로 삼으려 하는데, 앞으로 자손들로 하여금 이 법을 계속 지키면서 잘못되지 않게 하려고 한다. 이는 대개 범 문정공(范文正公)이 설립한 의전(義田)의 고귀한 뜻을 본받으려 함이니, 세상에서 행인들을 끌어와 형제처럼 대우하면서 정작 자기 동기들은 원수처럼 대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할 것이다. 그러니 그대가 나를 위해 기문을 지어 주면 좋겠다.”
하 였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이치에 합당해서 세속을 격려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의 마음에도 감동되는 점이 있기에, 내가 흐뭇하게 여겨서 의재에 대한 기문을 짓게 되었다. 그의 형제들의 연치(年齒)와 명씨(名氏)는 아래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주D-001]우봉(牛峯) 이경보(李敬父) : 이 양직(李養直)이다. 《가정집》 권7 경보설(敬父說)에 의하면 불곡(不曲)이라는 그의 자를 가정이 경보(敬父)로 고쳐 주었다고 하였으며, 권1 ‘절부(節婦) 조씨전(曺氏傳)’에 의하면 전임 감찰 규정(監察糾正)으로서 가정과 동년(同年) 수재(秀才)라고 하였다.
[주D-002]유년기에는 …… 것 : 《맹 자(孟子)》 진심 상(盡心上)에 맹자가 양지(良知)와 양능(良能)을 설명한 뒤에, “유년기의 아동 가운데 자기 어버이를 사랑할 줄 모르는 자가 없고 커서는 자기 형을 공경할 줄 모르는 자가 없는데, 어버이를 친애하는 것은 인에 속하고 윗사람을 공경하는 것은 의에 속한다.〔孩提之童 無不知愛其親也 及其長也 無不知敬其兄也 親親仁也 敬長義也〕”라고 말한 구절이 나오고,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사단(四端)을 설명한 뒤에, “내 속에 들어 있는 이 사단을 모두 확충할 줄 알아야 한다.〔凡有四端於我者知皆擴而充之矣〕”라고 말한 구절이 나온다.
[주D-003]사람의 …… 언급하였다 : 이른바 오륜을 말하는데, 순(舜) 임금이 설(契)을 사도(司徒)로 삼아 백성에게 오륜을 가르치게 했다는 내용이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나온다.
[주D-004]책선(責善) : 상 대방에게 선행을 하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책선은 붕우 사이에 적용되는 도리이다. 부자가 책선하는 것은 은의(恩義)를 해치는 것 가운데 큰 것이다.〔責善 朋友之道也 父子責善 賊恩之大者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5]보인(輔仁) : 상대방을 통해 자신의 인덕(仁德)을 보강하는 것이다. 《논어(論語)》 안연(顔淵)에 “군자는 학문을 통해서 벗을 모으고, 벗을 통해서 자신의 인덕을 보강한다.〔君子以文會友 以友輔仁〕”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6]상체(常棣) : 형제의 우애를 읊은 시로 《시경(詩經)》 소아(小雅)에 들어 있다.
[주D-007]이 시를 …… 것이다 : 여 기서 성인은 주공(周公)을 가리킨다. 주희(朱熹)는 이 상체 시에 대해서 주공이 자기 형제인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을 처형한 뒤에 지은 것 같다고 해설하였는데, 가정은 아마도 이 설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희공(僖公) 23년의 기록을 보면 “소목공이 예전처럼 주나라 왕실의 덕이 아름답지 못하게 된 것을 걱정한 나머지 종족들을 성주의 도성에 모이게 하고는 상체의 시를 지었다.〔召穆公思周德之不類 故糾合宗族于成周而作詩〕”라고 하였다. 소목공(召穆公)은 소공(召公)의 후손으로 이름은 호(虎)인데, 주 선왕(周宣王)의 명을 받고 회이(淮夷)를 정벌한 그의 공로를 기린 내용이 《시경》 대아(大雅) 강한(江漢)에 보인다.
[주D-008]절절(切切)하게 …… 한다 : 붕 우처럼 지내기도 하고 형제처럼 지내기도 한다는 말이다. 《논어》 자로(子路)에 “붕우는 절절(切切)하고 시시(偲偲)하게 대해야 하고, 형제는 이이(怡怡)하게 대해야 한다.”라는 공자의 말이 나오는데, 절절과 시시는 간곡하게 충고하고 자상하게 권면하는 것으로 책선(責善)하는 뜻이 들어 있고, 이이는 책선을 하면 정의(情誼)를 상할 염려가 있기 때문에 그저 사이좋게 지내기만 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9]범 문정공(范文正公)이 설립한 의전(義田) : 송 나라 전공보(錢公輔)의 의전기(義田記)에 “범 문정공이 바야흐로 귀현(貴顯)할 당시에 항상 풍작을 거두는 근교의 비옥한 토지 1000묘(畝)를 마련하여 의전이라고 이름 붙이고는 뭇 친족들을 공양하고 구제하는 자본으로 삼았다.”라는 말이 나온다. 문정(文正)은 송나라 범중엄(范仲淹)의 시호이다. 《事文類聚》
금내(禁內) 청사(廳事) 중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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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 초에 관부를 설치할 적에 6국(局)을 궁금(宮禁) 안에 두어 문한(文翰)의 직분을 수행하게 하였다. 즉 한림(翰林)ㆍ사관(史館)ㆍ비서(秘書)ㆍ보문(寶文)ㆍ동문(同文)ㆍ유원(留院)이 그것인데, 그중에서도 사관과 한림이 으뜸으로 꼽혔다. 그 뒤 국도를 옮기면서부터 왕궁과 관부가 남김없이 파괴되고 말았는데, 경오년(1270, 원종 11)에 옛 도성으로 돌아온 뒤에도 영건(營建)할 겨를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문한의 직분을 맡은 관원은 하루라도 업무를 수행할 장소가 없으면 안 되므로 예전에 정사를 의논하던 청사를 바로 하사하였는데, 그대로 고치지 않고 계속해서 60년을 사용해 오는 동안 날이 갈수록 퇴락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제대로 보수하는 자가 있지 않았다.
원통(元統) 계유년(1333, 충숙왕 복위 2) 6월 어느 날 금내의 제군(諸君)이 작은 술자리를 마련하고 바야흐로 술잔을 돌릴 적에 춘추 수찬(春秋修撰) 안원지(安員之 안보(安輔)) 가 유독 술을 마시지 않고 있다가 말하기를, “내가 여기에 머무른 지 7년 만에 이제 떠나려 한다. 그동안 여름에 비가 오기만 하면 지붕이 새어서 앉거나 누울 곳이 없었으며, 위태롭게 느껴지기가 마치 무너지려는 담장 아래에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이를 개의하지 않고는, 누가 보수하자고 말하기라도 하면 모두들 ‘우리 서생이야 술이나 마시고 시나 읊으면 그만이지 거처를 신경 쓸 것이 뭐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비웃었다. 아, 세상의 인사들을 보면 자기 개인이 살 곳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있는 힘을 다한 뒤에야 그만두곤 하는데, 여러분은 관부가 유독 개인의 거실보다 못하다고 여기는 것인가.” 하니,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이를 옳게 여기고는 수찬의 말을 따르기로 하였다.
이에 공해(公廨)의 돈 약간 민(緡)을 받았으나, 그래도 자금이 부족하자 인가에서 다시 돈을 차용한 다음에 즉시 재목과 기와를 사들였다. 그리고는 관아에 인부를 청구하였으나, 그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적으로 공장(工匠)을 고용하는 한편, 각자 집안의 하인들을 부역시키면서 각자 먹이고 각자 감독하였다. 그리하여 8월 을축일에 공사를 시작해서 50일 동안 인부 500명을 동원한 결과, 청사 4동(棟)을 지었는데 옛날의 규모에 비해 높이와 너비가 각각 3척(尺)씩 늘어났고, 사고(史庫)와 남문(南門)을 각각 2동씩 지었는데 모두 법도에 들어맞았다. 이처럼 예전보다 확장은 하였지만 사치스럽게 꾸미지 않아서 후세에도 이 전통을 이어받을 수 있게 하였으므로, 처음에 비웃던 사람들도 끝내는 부끄러워하며 납작 엎드렸다.
공사를 완료한 뒤에 도하(都下 연경(燕京)) 로 나에게 서한을 띄워 이 일에 대한 기문(記文)을 요청하면서 말하기를, “기문이야 누군들 짓지 못하겠는가마는, 수천 리의 길을 멀다 하지 않고 그대에게 이 글을 요청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대 역시 본관(本館)에 몸담았던 사람이고 지금은 또 원나라 조정의 한원(翰苑)에 있어 거이양이(居移養移)한 점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니, 본관을 중건한 사실에 대해서 그대에게 알려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였다. 내가 이 서한을 받고는 탄식하여 말하기를, “옛날에는 백성을 부리더라도 한 해에 사흘을 넘기지 않았는데, 본국에서 행하는 법을 보면 한 해에 혹 3년 치의 기간을 초과하기도 한다. 그런데 왕궁과 관부가 파괴되었는데도 보수를 하지 않다니, 도대체 백성들의 힘을 어디에다 썼는지 모르겠다. 돌아보건대 여기는 국사(國史)가 있고 문한(文翰)이 있는 곳인데, 정부에서 보수를 해 주지 않자 힘없는 속관들이 자기들이 가진 것을 털어서 새롭게 단장하였으니, 당로자의 입장에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내가 이런 말들을 써서 보내고 싶었지만 기회를 얻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는데, 이번에 다행히 조칙을 받들고 본국에 와서 이 청사에 올라 보니 윤환(輪奐)하 여 볼만한 점이 있기에, 내 글을 다시 재촉할 때까지 기다릴 것도 없이 당연히 기쁜 마음으로 써 주었다. 궁금 안에 있던 예전의 6국은 무신년(1308, 충렬왕 34)에 관제를 개편할 때 한림과 사관은 예문관(藝文館)과 춘추관(春秋館)으로 고치고, 비서는 전교시(典校寺)로 고쳤으며, 나머지는 모두 폐지하였다.
원통(元統) 2년(1334) 9월 16일에 짓다.
[주D-001]거이양이(居移養移) : 사 람이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한 것을 말한다. 맹자가 제(齊)나라 왕자의 의젓한 풍채를 멀리서 바라보고는 “지위가 기상을 변화시키고 생활이 체질을 변화시킨다.〔居移氣 養移體〕”라고 탄식한 말이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나온다.
[주D-002]옛날에는 …… 않았는데 : 《예기》 왕제(王制)에 “백성을 징발하여 노동에 복무하게 하는 기간은 1년에 3일을 초과하지 말아야 한다.〔用民之力 歲不過三日〕”라고 하였다.
[주D-003]윤환(輪奐) : 규 모가 크고 아름답다는 뜻으로, 건물이 낙성된 것을 축하할 때 쓰는 상투적인 표현이다. 진(晉)나라 헌문자(憲文子)가 저택을 신축하여 준공하자 대부들이 가서 축하하였는데, 이때 장로(張老)가 말하기를 “규모가 크고 화려하여 아름답도다. 제사 때에도 여기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상사 때에도 여기에서 곡읍을 하고, 연회 때에도 여기에서 국빈과 종족을 모아 즐기리로다.〔美哉輪焉美哉奐焉 歌於斯 哭於斯 聚國族於斯〕”라고 하니, 헌문자가 장로의 말을 되풀이하며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면서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자, 군자들이 축사와 답사를 모두 잘했다고 칭찬한 고사가 전한다. 《禮記 檀弓下》
김해부(金海府) 향교 수헌(水軒)의 기문(記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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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원(慶源)의 이군 국향(李君國香)이 도관 정랑(都官正郞)으로 있다가 외방에 나가 양주(梁州 양산(梁山)) 의 수령이 되었는데, 청렴하고 유능하다는 평판을 얻었다. 이때 국가가 제도(諸道)의 수령을 오래도록 바꾸지 않다 보니 백성들을 해치는 일이 상당히 많아졌다고 하여 그중에서 더욱 심한 수령들을 도태시키고 가까운 고을의 수령으로 하여금 그 직책을 겸임하게 하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군이 이 김해부를 임시로 다스리게 되었다.
이군이 일단 정사를 보게 되자 문묘(文廟)를 찾아가서 선성(先聖 공자(孔子)) 을 참배한 뒤에 물러 나와 제생(諸生)에게 이르기를, “무릇 임금을 섬기고 어버이를 섬기는 일과 자기를 닦고 남을 다스리는 일은 모두 학문을 통해서 제대로 행할 수 있는 것이다. 학문이란 농부의 일에 비유할 수 있다. 그 일을 태만히 하여 그 시기를 놓치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으니, 여러분은 노력하라. 그리고 이 학사(學舍)도 비좁고 누추하니 응당 넓혀야 하겠다.” 하였다.
그런데 예전부터 시내를 낀 작은 정자가 학사의 동쪽에 있어 매양 여름철에 과시(課試)를 보일 때마다 빈객들이 이곳에 몰려오곤 하였다. 그럴 때면 제생을 정자 밑에 앉혀 놓고서 각촉부시(刻燭賦詩)를 하였는데, 그런 과정에서 혹 폭우를 만나는 경우도 있었으므로 사람들 모두가 이를 괴롭게 여겼다.
이 군이 이런 사연을 듣고 알게 되자 그 즉시 고을의 관리에게 분부하여 농한기에 부역을 시키게 하는 한편, 재목을 넉넉하게 준비하고 기초를 단단하게 쌓은 뒤에 규모를 확장해서 새로 정자를 세우게 하였다. 그리하여 예전에는 겨우 두 무릎만 들여놓을 수 있을 정도로 비좁았던 곳이 지금은 스승과 제자가 한 길의 간격을 두고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넓어져서 빈객의 자리나 사생(師生)의 자리가 모두 널찍하게 여유가 있게 되었다.
여름철을 당하여 북쪽 산에 몸을 기대고 앉아서 남쪽 강을 굽어보노라면 자리 아래로 물이 흐르고 처마 사이에서 바람이 일어나곤 하니,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현송(弦誦)을 하다가 틈이 날 적에 붓을 잡고 시를 지으면 그렇게 되려고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초연한 정취를 맛볼 수 있게끔 되었다.
공사가 막 끝났을 적에 나의 발걸음이 마침 그곳에 이르렀다. 이에 이군이 제생을 이끌고 와서 그 일을 자세히 말하고는 나에게 기문을 지어 달라고 청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성스러운 원(元)나라가 문치를 크게 펼칠 목적으로 지금 천하에 조칙을 내려 학교를 새롭게 일으키도록 하였다. 내가 외람되게 천자의 조정에서 진신(搢紳)의 반열에 끼어 있게 된 덕분에 이번에 이 조칙을 받들고서 선포하기 위해 동방에 왔다. 그리하여 제군을 두루 돌아보았으나 묘학(廟學)은 퇴락하여 무너지고 생도는 학업에 태만한 현상이 어디를 가도 모두 똑같았으니, 이러고서야 성스러운 원나라가 유학을 숭상하는 아름다운 뜻을 그 누가 알 수 있겠는가. 그런데 지금 이 김해부는 유독 유능한 수재(守宰)를 얻어서 문풍을 진작시키고 있으니, 내가 비록 배운 것은 없지만 어찌 감히 이 사실을 기록하여 후세에 보여 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런 말을 이군에게 해 준 다음에 제생을 앞으로 나아오게 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옛사람 중에는 옹유(甕牖)와 규두(圭竇)의 집에 서 공부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니 공부를 열심히 하고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 어찌 거하는 처소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기야 하겠는가. 그렇긴 하지만 묘학의 제도만큼은 신중히 강구해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인데, 그런 면에서 이군은 해야 할 일을 아는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수헌(水軒)에 먼저 착수한 것을 보면 이군의 의도가 그 속에 있는 듯싶기도 하다. 중니(仲尼)도 ‘물이여, 물이여.〔水哉水哉〕’라고 말했지만, 이는 장차 학자들로 하여금 아침저녁으로 이 물을 보면서 근원이 있는 샘물은 위로 퐁퐁 솟아 나와 아래로 흘러내리면서 밤이고 낮이고 멈추는 법이 없는 것을 본받게 하려는 뜻이 들어 있지 않나 여겨지기도 하는 것이다.”
[주D-001]각촉부시(刻燭賦詩) : 초에 눈금을 그어 놓고 촛불이 그 눈금까지 타들어 가는 동안에 민첩하게 시를 짓게 하는 시험 방식을 말한다.
[주D-002]옹유(甕牖)와 규두(圭竇)의 집 : 옹 기 구멍의 들창과 규(圭) 모양의 길쭉한 쪽문이라는 뜻으로, 지극히 빈한한 선비의 거처를 가리킨다. 《예기》 유행(儒行)에 “선비는 가로 세로 각각 10보(步) 이내의 담장 안에서 거주한다. 좁은 방 안에는 사방에 벽만 서 있을 뿐이다. 대를 쪼개어 엮은 사립문을 매달고, 문 옆으로 규 모양의 쪽문을 내었다. 쑥대를 엮은 문을 통해서 방을 출입하고, 깨진 옹기 구멍의 들창을 통해서 밖을 내다본다.〔儒有一畝之宮 環堵之室 篳門圭窬 蓬戶甕牖〕”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3]근원이 …… 것 : 공 자가 “물이여, 물이여.”라고 찬탄한 까닭에 대해 맹자의 제자 서자(徐子)가 물어보자, 맹자가 “근원이 있는 샘물은 위로 퐁퐁 솟아 나와 아래로 흘러내리면서 밤이고 낮이고 멈추는 법이 없다. 그리고 구덩이가 파인 곳 모두를 채우고 난 뒤에야 앞으로 나아가서 드디어는 사방의 바다에 이르게 되는데, 학문에 근본이 있는 자도 바로 이와 같다. 공자께서는 바로 이 점을 취하신 것이다. 만약 근원이 없다면, 7, 8월 사이에 집중 호우가 내려서 도랑에 모두 물이 가득 찼다가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금방 말라 버리고 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명성과 소문이 실제를 지나치게 되는 것을 군자는 부끄러워하는 것이다.〔源泉混混 不舍晝夜 盈科而後進 放乎四海 有本者如是 是之取爾 苟爲無本七八月之間 雨集 溝澮皆盈 其涸也 可立而待也 故聲聞過情 君子恥之〕”라고 말한 내용이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나온다. 그리고 공자가 시냇가에 있으면서 “가는 것이 이와 같구나. 밤이고 낮이고 멈추는 법이 없도다.〔逝者如斯夫 不舍晝夜〕”라고 탄식한 말이 《논어》 자한(子罕)에 보인다.
경사(京師) 보은광교사(報恩光敎寺)의 기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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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延祐) 정사년(1317, 충숙왕 4)에 고려 국왕 휘(諱) 모(某 충선왕)가 이미 왕위를 물려준 다음에 경사(京師 연경) 의 저택에 머물러 있으면서 고성(故城)의 창의문(彰義門) 밖에다 땅을 구입하여 사찰을 창건하였는데, 3년이 지난 기미년(1319)에 공사를 모두 완료하였다. 그리하여 불상을 봉안하고 승려가 거처할 곳을 비롯해 재를 올리고 법회를 열 때의 도구 등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추어지자, 사찰의 이름을 대보은광교사(大報恩光敎寺)라고 내걸었다. 그리고는 전당(錢塘)의 행 상인(行上人)에게 명하여 천태교(天台敎)의 강석을 펴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인이 다시 산으로 돌아갔으므로, 그 이듬해에 화엄교(華嚴敎)의 대사 징공(澄公)을 초빙하여 사찰의 일을 주지(主持)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뒤에 왕이 황제의 명을 받고서 강남으로 향을 받들고 가기도 하고, 서역으로 불법을 구하러 가기도 하는 등 편히 거처할 겨를이 없다가 태정(泰定) 을축년(1325)에 경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징공도 바로 그 뒤를 이어서 입적하였으므로, 그 무리가 그대로 사찰에 거주하였으나 모든 일이 이 때문에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금상(今上 원 순제(元順帝))이 즉위한 해 3월에 현재의 고려 국왕과 심왕(瀋王)이 부왕(父王)의 유명(遺命)에 따라 본국의 천태사(天台師) 주지영원사(住持瑩原寺) 중대광(重大匡) 자은군(慈恩君) 특사 정혜원통지견무애삼장법사(特賜定慧圓通知見無礙三藏法師) 선공(旋公)을 불러서 그 사찰을 주지하게 하였다. 그러자 선공이 나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여기에서 오래 거주한 사람이니, 사찰의 내력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나를 위해 기문을 지어 주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선왕은 세황(世皇 원 세조(元世祖))의 외손으로, 좌우에서 모시며 천자의 은총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대덕(大德) 말년에는 난리를 평정하는 데에 참여하여 제실(帝室)에 큰 공훈을 세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우 중년의 나이에 이르러 왕작(王爵)을 헌신짝 벗어 버리듯 내팽개치고 불교에 온통 마음을 쏟았는데, 불탑을 세우고 불상을 조성하고 불경을 보시하고 불공을 올리고 불승을 공양한 일 등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 사찰을 지을 적에도 동우(棟宇)를 웅장하게 하고 자저(資儲)를 풍부하게 하였으니, 이는 대개 불자로 하여금 그 도를 정성껏 닦아서 임금과 국민이 축복을 받도록 하는 등 성대한 복덕이 끝없이 이어지게 하려는 목적에서였다. 그런데 10여 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주지할 적임자를 얻지 못한 가운데, 동우는 위태하여 제대로 부지하지를 못하고 자저는 사람들이 각자 이익을 꾀하여 가져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종고(鐘鼓)는 적막해지고 향화(香火)는 쓸쓸해지고 말았으니, 이른바 도를 닦는다고 한 것은 어떻게 되었으며 불교를 숭상하고 믿은 왕의 마음은 또 어떻게 되었다고 하겠는가. 지금 고려 국왕과 심왕이 부왕의 유명을 받들어 적임자를 택해서 위임하였으니, 어버이의 뜻을 계승한 효라 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선공(旋公)과 같은 분은 선왕의 뜻을 제대로 체득하여 전인이 행한 일을 결코 답습하지 않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이른바 복전(福田)이라고 하는 그 기반이 더욱 굳어지고 그 이익이 더욱 확대되어 그 스승의 가르침을 어기지 않게끔 될 것이다. 내가 그래서 이 기문을 쓰게 되었다.
사찰은 대지가 50묘(畝) 남짓 되고 동쪽에 부속 토지 3묘가 있다. 건물은 100여 동이다. 양향(良鄕)에 밭을 산 것이 3020묘요, 소주(蘇州)에 산 것은 30경(頃)이며, 방산현(房山縣)에 과원(果園) 120묘가 있다. 사찰을 조성하는 데에는 저폐(楮幣)로 모두 50여 만 민(緡)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지원(至元) 2년(1336, 충숙왕 복위 5) 8월 모일에 기록하다.
[주D-001]왕이 …… 없다가 : 양 위(讓位)한 상왕(上王) 즉 충선왕이 참소에 걸려 유배당한 것을 가리키는데, 앞으로 《가정집》에 나오는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상황을 대략 알아 두는 것이 필요하겠기에 그 과정을 아래에 간단히 설명한다. 원 영종(元英宗)이 즉위한 해인 1320년(충숙왕 7) 3월에 상왕이 환자(宦者)인 백안독고사(伯顔禿古思) 등이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게 한 일이 있었다. 그 뒤 4월에 상왕이 장차 시사(時事)가 변할 것을 감지하고는 환란을 피할 목적으로 황제에게 어향(御香)을 강남(江南)에 내리기를 청하여 5월에 향을 받들고 강남으로 갔다. 6월에 상왕이 금산사(金山寺)에 이르자 황제가 사람을 보내 체포하여 압송하게 하는 한편, 8월에 백안독고사 등에게 토지와 노비를 다시 지급하게 하였다. 9월에 상왕이 대도(大都) 즉 연경(燕京)에 이르자 황제가 본국에 호송하여 안치하게 하였으나, 상왕이 머뭇거리며 떠나지 않자 10월에 상왕을 형부(刑部)로 내려 보냈다가 이윽고 머리를 깎아 석불사(石佛寺)에 안치하였다. 그러다가 12월에 결국 백안독고사의 참소에 걸려 황제의 명을 받고 토번(吐蕃)의 철사길(撤思吉) 지역으로 귀양 갔다가, 영종 3년에 타사마(朶思麻)로 양이(量移)되었다. 그해 9월에 영종이 시해되고 진종(晉宗)이 즉위하여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리며 왕을 소환하였으므로 11월에 마침내 대도로 돌아오게 되었다.
[주D-002]고려 국왕과 심왕(瀋王) : 국 왕은 충숙왕을 가리키고, 심왕은 심양왕(瀋陽王)의 준말로 여기서는 왕고(王暠)를 가리킨다. 심양왕은 당초 원 무종(元武宗)이 충선왕에게 내린 봉호인데, 충숙왕 3년 3월에 충선왕이 황제에게 주청하여, 심왕의 세자로 삼았던 왕고에게 심왕의 지위를 전하고 자신은 태위왕(太尉王)이라고 칭하였다. 충숙왕 왕도(王燾)는 충선왕의 장자(長子)이고, 심양왕 왕고는 충선왕의 조카이다. 순제(順帝)는 1333년 6월에 즉위하였는데, 이에 앞서 그해 4월에 충숙왕과 심왕이 연경에 있다가 귀국하기 전인 3월에 먼저 의선(義旋)을 연경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그런데 1년 전인 1332년에는 충혜왕(忠惠王)이 연경으로 소환되고, 상왕으로 있던 충숙왕이 복위하는 등 이 사이의 사연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주D-003]선공(旋公) : 승 려 조의선(趙義旋)을 가리킨다. 《가정집》 권3 ‘조 정숙공(趙貞肅公) 사당(祠堂)의 기문’에 “정혜원통 지견무애 삼장법사(定慧圓通知見無礙三藏法師)의 호를 특별히 하사받고, 천원연성사(天源延聖寺)의 주지(主持)와 본국 영원사(瑩原寺)의 주지를 겸하였으며, 복국우세 정명보조 현오 대선사(福國祐世靜明普照玄悟大禪師)로서 삼중대광(三重大匡)의 품계에 오르고 자은군(慈恩君)에 봉해졌다.”고 소개되어 있다. 그는 정숙공 조인규(趙仁規)의 아들인데, 이 밖에 조순암(趙順菴)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주D-004]대덕(大德) …… 세웠다 : 대 덕은 원 성종(元成宗)의 연호이다. 대덕 11년(1307, 충렬왕 33) 정월에 성종이 죽자 황후가 임조(臨朝)하였다. 황질(皇姪)인 애육여발력팔달(愛育黎拔力八達) 태자와 우승상 답라한(答剌罕)이 회령왕(懷寧王) 해산(海山)을 황제로 세우려고 꾀하였는데, 이 모의에 충선왕이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2월에 안서왕(安西王) 아난달(阿難達)을 추대한 좌승상 아홀태(阿忽台) 등을 복주(伏誅)하고 해산을 황제로 세우니, 이 사람이 무종(武宗)이다. 무종이 즉위하고 나서 익찬(翊贊)의 공이 있다 하여 충선왕을 공신에 녹훈하고 심양왕(瀋陽王)에 봉하였다.
[주D-005]어버이의 …… 효 : “효라는 것은 어버이의 뜻과 사업을 잘 계승하여 발전시키는 것이다.〔夫孝者 善繼人之志善述人之事者也〕”라는 말이 《중용장구(中庸章句)》 제 19 장에 나온다.
경사(京師) 김손미타사(金孫彌陀寺)의 기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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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씨의 가르침이 중국에 전파되어 사람들을 교화하고 유도한 것이 오래되었다. 그런데 불씨가 주장하는 인과와 죄복(罪福)에 대한 설 중에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요소가 있기 때문에 왕공(王公)으로부터 사서(士庶)에 이르기까지 다투어 달려가서 받들어 섬기지 않는 자가 없게 되었다.
중봉대부(中奉大夫) 중상경(中尙卿) 백안찰(伯顔察) 김공(金公)이 그의 부인인 포해군부인(浦海郡夫人) 손씨(孫氏)에게 말하기를, “내가 대덕(大德) 초에 궁중에 입시하여 온 집안이 은혜를 입은 때로부터 지금 어언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그동안 작위는 높아졌고 의식은 풍족해졌다. 내가 비록 밤낮으로 두려워하고 조심하며 있는 힘을 다 바쳤다고 하더라도, 돌아보면 나의 재능이 부족해서 열성의 사은(私恩)에 보답하려고 생각해 보지만 그렇게 할 길이 없으니, 의당 불교에 귀의하여 숭배하는 것이 더 낫겠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이 부귀를 누릴 수 있는 것은 대개 전생의 인연 때문이라고 하니, 지금 좋은 인연을 쌓을 기회를 만났을 때에 선업을 닦아 두지 않는다면 후세에 가서 어떻게 하겠는가.” 하였다. 그리고는 지순(至順) 2년(1331, 충혜왕 1) 정월에 원평현(宛平縣)의 지수촌(池水村)에 불우(佛宇)를 창건하고는 그 가르침을 널리 펴면서 그 절의 이름을 ‘김손미타사’라고 하였으니, 이는 대개 부부의 두 성씨와 부처에게 기구하는 뜻을 취해서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이었다.
그 해 8월에 부인이 죽자 사원의 북쪽에 매장하여 명복을 비는 한편, 그 묘역 바깥의 땅 40여 묘(畝)를 모두 사원에 기증하여 승려의 양식을 공급하게 하였다. 그리고는 가동(家僮)을 사찰에 희사하여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게 한 다음에 그 향화(香火)를 주관하도록 하였는데, 그들의 이름은 각각 계홍(戒洪)과 계명(戒明)이라고 한다.
그 일이 있은 뒤로부터 공이 감상에 젖기도 하고 비애에 잠기기도 하면서 불교를 더욱 독실하게 신봉하였는데, 금년 가을에 병에 걸리자 계실(繼室 재취(再娶)) 윤씨(尹氏) 부인과 상의하여 저강(楮鏹) 5000전(錢)을 시주하여 절의 살림에 보태게 하였다. 그리고는 자제인 봉의대부(奉議大夫) 낭팔(囊八)과 도총관(都摠管) 타아적(朶兒赤)을 나에게 보내 기문을 청하게 하기를, “내가 이제 늙고 병들었으니 이 세상에 오래 있지 못할 듯싶소이다. 바라건대 시말을 갖추 기록하여 이를 비석에 새기게 함으로써 뒤에 이 절에 거하는 자들로 하여금 나의 뜻을 잊지 않게 해 주었으면 하오.” 하였다.
나는 불씨의 책을 보지 않으니 이른바 인과와 죄복의 설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렇긴 하지만 내외와 피차의 구별이 없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마음이다. 공은 어려서는 어버이에게 제대로 효성을 바쳤고, 커서는 임금에게 제대로 충성을 바쳤다. 그리고 늙어서는 이내 불씨를 신봉하면서 임금과 어버이의 은혜를 무궁히 갚으려 하고 있으니, 그 마음이 존경할 만하지 않은가. 그래서 이 기문을 짓게 되었다.
지원(至元) 2년(1336, 충숙왕 복위 5) 10월 모일에 짓다.
[주D-001]부처에게 기구하는 뜻 : 온 마음을 다해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부르면 죽어서 극락왕생(極樂往生)한다는 불교 신앙을 말한다. 원래 정토종(淨土宗)의 교리인데, 민간에 광범위하게 유포되면서 다방면으로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나무는 귀의한다는 뜻이고, 아미타불은 범어(梵語)를 음역(音譯)한 것으로, 무량광불(無量光佛) 혹은 무량수불(無量壽佛)로 의역되는데, 서방의 정토를 주관한다는 부처의 이름이다. 미타(彌陀)는 아미타불의 준말이다.
[주D-002]저강(楮鏹) : 원래는 제사나 불공을 올릴 때 불사르는 지전(紙錢)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단지 저화(楮貨)라는 뜻으로 쓰였다.
흥왕사(興王寺)에서 흥교원(興敎院)을 중수하고 낙성 법회를 개최한 일에 대한 기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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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천하 사람들이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올리는 대상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분을 꼽는다면 석씨(釋氏)와 노씨(老氏)와 공씨(孔氏)를 들 수 있다. 그런데 공씨의 사당의 경우는 변두(籩豆)에 관한 일이라면 전담하는 관원이 별도로 있는 만큼 감히 사적으로 청탁할 수가 없으니, 이는 대개 본원을 잊지 않고 은혜에 보답하려는 목적으로 올리는 제사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석씨와 노씨의 경우는 그 궁묘(宮廟)나 상설(像設)에 정해진 제도나 정해진 장소가 없고, 제사 지내는 사람도 공사나 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나 모두 가능하니, 이는 역시 사적으로 복을 구하려는 의도에서 올리는 제사이기 때문이다.
본국은 지역적으로는 비록 극동의 지역에 위치하고 있지만, 서방의 종교가 들어와서 유행한 것으로 말하면 가장 먼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왕성(王城)의 남쪽 20리 지점에 흥왕사라는 사찰이 있고 이 사찰 안에 흥교원이 있는데, 이는 실로 문왕(文王)이 창건한 사찰로서 동방의 거찰(巨刹)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사찰이 천도할 때에 불탄 뒤로 누차 보수하긴 하였으나 또 누차 훼손된 나머지 지금까지 완전하게 복구되지 못하였다.
지 순 경오년(1330, 충숙왕 17)에 화엄교(華嚴敎)의 제사(諸師)가 서로 이르기를, “문왕이 이 사찰을 창건할 적에 한껏 웅장하고 화려하게 지었으며, 여기에 또 토전을 많이 희사하고 자저(資儲)를 풍부하게 하여 어느 사찰보다도 낫게 하려고 힘썼으니, 이는 대개 우리 화엄의 법을 중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들이 세상에서 하는 일도 없이 남에게 얻어 입고 얻어먹는 입장에서 한가하게 노닐며 세월을 보내기만 할 뿐 원문(院門)이 퇴락했는데도 가만히 앉아서 구경이나 하며 중수하지 않는다면, 이는 우리의 허물을 더 가중시키는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각자 바랑 속에 저축해 두었던 것들을 털어서 자재를 사고 공장(工匠)을 소집하여 본원을 신축하기로 약속하는 한편, 정조(晶照)와 달환(達幻) 두 분 사(師)로 하여금 연곡(輦轂 연경)에 급히 가서 낙성의 법회를 개최할 수 있도록 주선하게 하였다. 그로부터 9년 뒤에 흥교원이 완성되었는데, 옛 건물을 철거하고 새로 지은 전당과 낭무(廊廡)가 모두 160동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해 여름에 달환 스님이 의발(衣鉢)과 위의(威儀) 관련 물품 등 법회에 필요한 것들을 가지고 도하(都下 연경)에서 귀국하였으며, 또 전서사(典瑞使) 신당주(申當住) 등이 태황태후(太皇太后)의 명을 받들어 불사를 빛내도록 향과 폐백을 내리는 은전을 입기도 하였다.
그해 가을 8월 병술일에 광학(廣學)의 법회를 처음 개최하였는데, 날짜로는 15일간이요 참여한 승중(僧衆)은 200명이었으며, 집사자(執事者)는 모두 200인에 이르렀다. 이 밖에 왕성 내외에서 다투어 달려와 공양한 사녀가 또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리하여 향과 꽃 등 공양하는 제구(諸具)가 모두 정결하게 갖추어진 가운데 풍송(諷誦)하고 강론하는 것이 반드시 그 극치에 이르게 함으로써 마치 구회(九會)에 직접 참여하여 구담(瞿曇)의 설을 듣는 것처럼 느끼게 하였으니, 그 법회가 실로 성대했다고 하겠다.
법 회를 마친 뒤에 달환 스님이 전말을 갖추어 나에게 보여 주며 말하기를, “당초에 내가 정조와 함께 경사에 들어갔던 것은 장차 이 법회를 개최할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정조가 불행히도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내가 그래도 그 뜻을 이루어 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제사(諸師)의 뜻도 후세에 전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을 기문으로 써 주면 좋겠다.” 하였다.
나는 석씨의 글을 읽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뭐라고 운운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겠다. 그래서 우선 유자(儒者)의 입장에서 말해 볼까 한다. 무릇 사람이라면 누구나 추우면 옷을 입고 배고프면 밥을 먹을 줄 알며, 이로운 곳을 향해 나아가고 해로운 곳을 피할 줄 안다. 그런데 여기에 또 사람들이 강상의 아름다움과 예의의 정대함을 알아서 금수의 지경으로 떨어지지 않게끔 되었는데, 이것은 누가 가르치고 누가 전해서 그렇게 된 것인가. 그렇다면 어찌 그 본원을 생각해서 그 은혜에 보답하려는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유자는 공씨를 배우는 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묘학(廟學)이 퇴락한 것을 보고도 개연히 마음 아파하며 차마 눈으로 보지 못하는 자들은 대개 얼마 되지 않는다. 반면에 석씨의 무리 중에는 달환 스님처럼 부지런히 교화하고 유도하여 도량(道場)을 새롭게 하고 사업을 확대하는 자들이 많은데, 그들이 자기의 스승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그 말을 믿지 못하겠다. 그들 무리의 입장에서는 응당 자기 스승의 설을 따르려고 힘쓸 것이요, 당초 그 도가 어떠한 것인지는 따져 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니, 석교(釋敎)가 성행하며 복을 구하는 자가 날로 불어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때의 법회에 참여한 승중(僧衆)과 단나(檀那 시주(施主))의 성명을 아래에 갖추어 열기(列記)한다.
무인년(1338, 충숙왕 복위 7) 10월 모일에 기록하다.
[주D-001]변두(籩豆)에 …… 만큼 : 《논 어》 태백(泰伯)에 “변두에 관한 일이라면 전담하는 관원이 별도로 있다.〔籩豆之事 則有司存焉〕”라는 뜻으로 증자(曾子)가 맹경자(孟敬子)에게 충고해 준 말이 있다. 변두에 관한 일이란 죽기(竹器)와 목기(木器)로 된 제기를 진설하는 등의 제사에 관한 일을 말한다.
[주D-002]문왕(文王) : 고려 문종(文宗)을 가리킨다. 황제의 나라인 원(元)에 대해 제후의 나라인 고려의 입장에서 조(祖)와 종(宗)의 묘호를 쓴 혐의를 피하기 위해 문왕이라고 한 것이다. 흥왕사는 1067년(문종 21)에 낙성되었다.
[주D-003]광학(廣學)의 법회 : 화 엄 법회의 이름이다. 《화엄경(華嚴經)》에서는 보살의 수행 단계를 모두 52계위(階位)로 나누는데, 그중 11계위에서 20계위까지를 십주(十住)라고 한다. 십주는 다시 초발심주(初發心住)로부터 마지막 관정주(灌頂住)까지 이어지는데, 관정주에 이른 보살이 구유(具有)하게 되는 3별상(別相) 중의 세 번째가 “열 가지 지혜를 널리 배워 일체의 법을 분명히 아는 것〔廣學十種智 了知一切法〕”이다. 《舊華嚴經 卷8 菩薩十住品》
[주D-004]구회(九會)에 …… 하였으니 : 석 가모니가 생존시에 화엄의 교리에 대해 직접 설법하는 것을 듣는 것과 같았다는 말이다. 구담(瞿曇)은 범어 Gautama의 음역으로 석가의 성씨이다. 구회는 불타가 《화엄경》을 설명하는 법회를 모두 아홉 차례 열었다는 말인데, 이는 《신역 화엄경(新譯華嚴經)》의 이른바 칠처구회(七處九會) 설을 따른 것이다. 《구역 화엄경》에는 칠처팔회(七處八會)로 되어 있다.
금강산(金剛山) 보현암(普賢菴) 법회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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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 4년 무인년(1338) 가을 8월 초하루에 어떤 사문(沙門) 하나가 내 집을 찾아와서 고하기를,
“소승은 보현암의 주지 지견(智堅)입니다. 원나라 조정의 규장공(奎章公)이 태정(泰定) 연간에 일이 있어서 왕경(王京)에 왔다가 마침내 풍악(楓嶽)을 유람하면서 여러 난야(蘭若)들 을 둘러보았습니다. 소승이 그때 본암(本菴)을 중수하고 있었는데, 공이 너무나도 아름다운 그 경치를 좋아한 나머지 소승을 앞으로 불러서 말하기를, ‘이 산은 천하의 명산인데, 이 산의 승지는 이곳이 또 최고이다. 스님은 우선 공사를 빨리 진행시키도록 하라. 내가 단월(檀越 시주)이 되겠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공은 조정으로 돌아갔고 소승도 10여 년 동안 산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지원 병자년(1336, 충숙왕 복위 5)에 본암의 비구인 달정(達正)이 대도(大都)에 들어가자, 공이 그를 보고는 기뻐하면서 저폐(楮幣)를 출연하여 이보새(伊蒲塞)의 찬수(饌需)에 충당하게 하였는데, 돈꿰미로 계산하면 5000민(緡)이 넘었습니다. 그리고는 공이 말하기를 ‘스님은 우선 이 돈을 가지고 가라. 내가 계속해서 시주하겠다. 지견은 이미 내가 잊었을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보현암의 정경은 지금도 나의 마음과 눈 속에 들어 있는데 스님이 오는 것이 본시 늦었을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해에 달정 스님이 돌아왔고, 그 이듬해 여름에 선열회(禪悅會)를 처음 개최하였습니다. 그리고 금년에는 더욱 규모를 확대해서 치류(緇流 승도) 300여 명을 불러들여 가사와 바리때를 새로 주고 큰 불사를 거행했는데, 4월 초파일에 시작해서 7월 15일 우란분절에 마쳤습니다. 이는 모두가 위로는 임금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고 아래로는 중생의 무궁한 복을 빌기 위한 것으로서, 이미 정성을 다하고 최선을 다했다고 하겠습니다만 그래도 공의 마음에는 아직 미진한 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공의 뜻을 기록으로 남겨서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알려 주면 좋겠습니다.”
하였다.
나는 신의야말로 사람 노릇을 하는 데에 중요한 덕목이 된다고 들었다. 신하가 되어서 신의가 없으면 충성을 바칠 수가 없고, 자식이 되어서 신의가 없으면 효성을 바칠 수가 없으니, 신의가 없이 사람 노릇을 제대로 하는 경우는 없는 것이다. 공이 도덕과 절의를 지니고서 천자의 팔과 다리 역할을 수행하는 신하가 되었으니, 공을 우러러 바라보며 그 은총을 기대하고 그 은택을 소망하는 천하의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리고 공의 입장에서도 상의 은혜를 베풀어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소원을 이루게 해 주려고 생각하노라면, 하루 종일 부지런히 힘쓰더라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걱정을 떨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여 년 전의 언약을 반드시 실천하려고 노력하면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 뜻이 더욱 독실해지기만 하였으니, 그 신의가 과연 어떻다고 하겠는가. 이를 통해서 공이 임금을 충성스럽게 섬기고 어버이를 효성스럽게 받들고 부처에게 정성스럽게 귀의하고 있다는 사실과 공이 부귀를 누릴 수 있는 것도 오직 신의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내가 감히 재배(再拜)하고 삼가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공의 이름은 사라반(沙剌班)으로, 지금 규장각태학사 한림학사 승지(奎章閣大學士翰林學士承旨)이다. 부인 기씨(奇氏)는 선경옹주(善敬翁主)의 소생이다. 동한(東韓)의 명족인 본국의 정순대부(正順大夫) 좌상시(左常侍) 기철(奇轍)이 부인의 친족이기 때문에 이 법회를 실제로 주선했다고 한다.
[주D-001]난야(蘭若) : 범어 āranyaka의 음역인 아란야(阿蘭若)의 준말로, 출가자가 수행하는 조용한 곳, 즉 사원을 말한다.
[주D-002]이보새(伊蒲塞)의 찬수(饌需) : 보 통 줄여서 이보찬(伊蒲饌)이라고 하는데, 재(齋)를 올릴 때 바치는 음식 등을 말한다. 이보새는 범어 upāsaka의 음역으로, 오계(五戒)를 받은 재가 남자 불교 신도를 말한다. 우바새(優婆塞)라고도 하며 근사남(近事男), 근선남(近善男), 청신남(淸信男), 청신사(淸信士) 등으로 의역된다. 여자 신도는 우바이(優婆夷)라고 한다.
[주D-003]선열회(禪悅會) : 선 정에 들어 마음이 자적(自適)하며 희열(喜悅)을 느끼게 하는 법회라는 뜻이다. 음식이 육체를 길러 주는 것처럼 선정에 드는 것이 정신을 길러 준다는 뜻에서 선열식(禪悅食)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법희식(法喜食)과 함께 성현이 취하는 이식(二食)이라고 한다. 《華嚴經淨行品》《法華經 五百弟子受記品》
춘헌기(春軒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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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객이 춘헌(春軒)에 와서 춘(春)이라고 이름 붙인 뜻을 물어보았으나, 주인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객이 다시 앞으로 나앉으며 말하였다.
“우 주 사이의 원기가 조화의 힘에 의해 퍼져서 땅에 있는 양(陽)의 기운이 위로 올라가 하늘과 막힘없이 통하게 되면, 만물의 생동하는 뜻이 발동할 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도 덩달아 활짝 펴지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봄이 오면 온갖 꽃이 아름답게 피어나고 새들이 즐겁게 노래하니, 봄의 풍광은 사람의 기분을 마냥 들뜨게 하고 봄의 경치는 사람의 마음을 따스하게 감싸 주는 법이다. 그래서 봄 누대에 오른 듯도 하고 봄바람 속에 있었던 듯도 하다는 그 뜻을 취해서 이렇게 이름 붙인 것인가?”
주인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자 객이 또 말하였다.
“원 (元)은 천지가 만물을 내는 근본이요, 춘은 천지가 만물을 내는 시절이요, 인(仁)은 천지가 만물을 내는 마음이니, 이름은 비록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 이치는 매한가지이다. 그래서 노쇠하고 병든 자들이 봉양을 받을 수 있고 곤충과 초목이 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것도 모두 이러한 이치 때문이라는 그 뜻을 취해서 이렇게 이름 붙인 것인가?”
이에 주인이 말하기를,
“아 니다. 굳이 그 이유를 대야 한다면 온화하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여름에는 장맛비가 지겹게 내리고 겨울에는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고 가을에는 썰렁해서 몸이 으스스 떨리니, 사람에게 맞는 것은 온화한 봄이 아니겠는가. 객이 말한 것이야 내가 어떻게 감히 감당하겠는가.”
하자, 객이 웃으면서 물러갔다.
내가 그때 자리에 있다가,
“그 만한 덕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자처하지 않는 것은 오직 군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내가 알기에 주인은 흉금이 유연(悠然)해서 자기를 단속하고 남을 대할 적에 속에 쌓였다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화기(和氣) 아닌 것이 없으니, 대개 기수(沂水)에 가서 목욕하고 바람 쐬며 노래하는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니 주인이 취한 뜻이 어찌 온화하다고 하는 정도로 그치겠는가. 그런데 객이 어찌하여 그런 것은 물어보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하고는, 마침내 붓을 잡고 이 내용을 벽에다 써 붙였다.
주인은 완산 최씨(完山崔氏)로, 문정공(文定公)의 후손이요 문간공(文簡公)의 아들이다. 박학강기(博學强記)한 데다가 특히 성리(性理)의 글에 조예가 깊어서, 동방의 문사들이 질의할 것이 있으면 모두 그를 찾아가서 묻곤 한다.
[주D-001]봄 누대에 …… 하고 : 《노자(老子)》 제 20 장에 “사람들 기분이 마냥 들떠서, 흡사 진수성찬을 먹은 듯도 하고 봄 누대에 오른 듯도 하네.〔衆人熙熙 如享太牢 如登春臺〕”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2]봄바람 …… 하다 : 주 희의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 권4에 “주공섬(朱公掞)이 여주(汝州)에 가서 명도(明道) 선생을 만나 보고 돌아와서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한 달 동안이나 봄바람 속에 앉아 있었다.〔某在春風中坐了一月〕’라고 했다.”는 말이 실려 있다.
[주D-003]기수(沂水)에 …… 부류 : 공 자의 제자 증점(曾點)이 “늦은 봄에 봄옷이 만들어지면 관을 쓴 벗 대여섯 명과 아이들 예닐곱 명을 데리고 기수에 가서 목욕을 하고 기우제 드리는 무우에서 바람을 쏘인 뒤에 노래하며 돌아오겠다.〔暮春者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자신의 뜻을 밝히자, 공자가 감탄하며 허여한 내용이 《논어》 선진(先進)에 나온다.
[주D-004]주인은 …… 아들이다 : 주 인의 이름은 최문도(崔文度)이다.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문정공(文定公) 최보순(崔甫淳)의 5세손이요, 광양군(光陽君)에 봉해진 문간공(文簡公) 최성지(崔誠之)의 아들이다. 자는 희민(羲民)이고, 관직은 첨의 평리(僉議評理)에 이르렀다. 1345년(충목왕 1)에 죽었으며, 시호는 양경(良敬)이다. 아들의 이름은 사검(思儉)이다.
고려국 강릉부(江陵府) 염양선사(艶陽禪寺) 중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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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至元) 경진년(1340, 충혜왕 1) 가을에 전 성균 사예(成均司藝) 박군(朴君)이 영해(寧海)의 수재(守宰)로 나갈 적에 나에게 들러 하직을 고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지 난 태정(泰定) 갑자년(1324, 충숙왕 11)에 내가 선모(先母)를 강릉 성 북쪽에 장사 지냈다. 그리고 장례를 마치고 나서 불사를 세워 명복을 빌고자 하였는데, 묘소 가까이에 염양(艶陽)이라는 오래된 폐사(廢寺)가 있기에 이를 얻어 바로 공사에 착수한 결과 지금에 와서 낙성을 보게 되었다. 이제 부처를 봉안할 전각도 있고 승려가 거처할 방도 있으며, 또 그 옆에다 집을 지어서 성승(聖僧 고승(高僧))이 거처하게도 하였는데, 전체적으로 사원의 기본 구조를 갖춘 가운데 화려하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게 조성하였다. 나는 또 자식이 없고 나이도 장차 쇠해질 무렵에 접어들었으니, 내가 가지고 있는 노비와 전토를 모두 희사하여 상주(常住)하는 비용으로 충당하게 함으로써 이 사찰을 길이 마음을 닦고 복을 축원하는 처소로 만들 예정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세태를 살펴보건대, 자기의 이익만을 욕심내는 무리가 재물이 약간 있는 것을 보기만 하면 분분하게 쟁탈전을 벌이면서 남의 복전(福田)을 탈취하여 자기의 잇속만 차리는가 하면, 심지어는 불상이 먼지 속에 파묻히게 하고 절간이 가시나무로 뒤덮이게 하는 경우 또한 허다한 실정이다. 나는 혹시라도 이렇게 될까 두려우니, 문사(文士)에게 이 절의 본말을 갖춘 글을 지어 달라고 부탁해서 이 글을 돌에다 새겨 뒤에 오는 사람들을 경계함으로써 무궁히 전하게 하고 싶다. 그리고 여기에는 또 네 가지 기이한 일이 있는데, 그대가 이러한 일을 기문으로 지어 줄 수 있겠는가?”
내가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리고는 이른바 기이하다고 하는 일에 대해서 물어보았더니,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땅 을 팔 적에 동기(銅器)로 된 향화(香火)의 기구를 얻었는데, 그 제작 형태가 매우 고풍스러웠다. 비록 설명해 놓은 기록은 없었으나 이름이 있고 숫자가 있었으며, 가마솥 안에 넣고 뚜껑으로 덮어서 막아 놓았으므로 모두 금방 만들어 낸 것만 같았으니, 이것이 첫 번째 기이한 일이다. 예전부터 절에 우물이 없었기 때문에 멀리서 물을 길어 오느라 고생하였는데, 지대가 또 높고 건조해서 사람의 꾀로는 어떻게 해 볼 길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부처에게 묵도(默禱)를 올리고 땅을 파자 한 길도 채 못 되어서 차가운 샘물이 세차게 솟아올랐으니, 이것이 두 번째 기이한 일이다. 계유년(1333, 충숙왕 복위 2) 봄에 우리 선군이 돌아가셨으므로 청동으로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주조하여 불은(佛恩)의 도움을 받고자 하였는데, 급기야 구리를 녹여서 부어 만들 적에 마침 폭풍우가 몰아치다가 홀연히 다시 날이 개어서 쉽게 그 일을 마칠 수가 있었으니, 이것이 세 번째 기이한 일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을해년에 불이 나서 산언덕을 태우고는 묘역까지 번져서 송추(松楸)를 거의 태워 버릴 기세였다. 불을 끄려 해도 마땅한 계책이 없어서 부처를 부르며 통곡하였는데, 이에 하늘이 반대 방향으로 바람을 불게 해서 마침내 불을 완전히 끌 수 있게 하였으니, 이것이 네 번째 기이한 일이다. 이 네 가지 일은 본 사람들마다 기이하게 여기면서 전생의 인연이 있거나 효성이 지극하지 않으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불씨(佛氏)는 그 마음이 자비로워서 구제하는 일을 행하고 있으니, 독실하게 인효(仁孝)를 행할 줄 아는 사람에 대해서는 특히 묘하게 감응해 주는 것이 그림자나 메아리 정도일 뿐만이 아니리라고 여겨진다. 박군은 자기 부모를 생전에 봉양하고 사후에 장례 지내는 일과 관련하여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있는 힘을 다하고 정성을 다 바쳤는데도 오히려 부족하다고 여기고는 부처에게 귀의하여 사후 세계의 복을 비는 등 자식으로서 하지 않은 일이 없었으니, 기이한 반응이 있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군을 위하여 기문을 써 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뒤에 이 사찰에 거하는 자들은 박군의 뜻을 알아야만 할 것이다. 그 뜻은 즉 전적으로 임금의 무병장수와 국가의 영원한 복덕을 기원하고 어버이에게 효성을 바치며 중생의 이익을 간절히 추구하려 하는 것으로, 재물에 대한 쟁탈전을 막는 동시에 때에 맞춰 사찰을 보수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인데, 나의 이 기문을 보면 모두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박군의 이름은 징(澄)이니, 강릉 사람이다. 처음에 재주가 있다고 이름이 나서 유사의 천거를 받고 과거에 등제(登第)하였으며, 벼슬길에 오른 뒤에는 청렴하고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누차 승진하여 3품(品)의 관직에 이르렀다. 강릉은 신라 시대에는 예국(蘂國) 혹은 철국(鐵國)이라고 칭해지기도 하고 도원경(桃源京)이나 북빈경(北濱京)으로 칭해지기도 하였으며 본국에 들어와서 명주(溟州)가 되었는데, 지금은 부(府)로 승격하여 관동의 으뜸으로 꼽히고 있다.
지원 6년(1340, 충혜왕 1) 9월 16일에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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