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 & 토크] 81년~89년 무패신화… 88올림픽 태권도金
끊임없는 연구로 173cm 신장 열세 극복
"정신 빠진 태권도는 단지 격투기일 뿐"
"국현아, 결승전에서 얼굴을 차면 절대 안돼! 알았지?" 88서울올림픽 시범경기였던 태권도 남자 웰터급 결승전. 이탈리아 박영길 감독은 경기에 앞서 한국 국가대표 정국현에게 사정했다. 올림픽 금메달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상대가 KO패를 걱정할 정도로 정국현은 천하무적이었다. 겁에 질린 이탈리아 선수는 결승전에서 뒷걸음만 쳤고, 정국현은 심판 직권승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 한국체육대 정국현 교수가 자신의 연구실 앞에서 과거 선수 생활을 회상하며 웃고 있다 / 사진=김지곤기자 jgkim@
88서울올림픽 '태권도 영웅' 정국현(47)은 어디서 무얼 할까? 모교 한국체육대학교 태권도학과 교수로 후배들을 지도하고 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날 수 없듯 정국현도 태권도를 떠날 순 없었다. 인터뷰가 시작할 무렵 연구실에는 전화가 빗발쳤다. "정 교수님, 태권도진흥재단 연구 과제 때문에 전화 드렸습니다." "미국 파견 사범 선발 인터뷰는 어떻게 됐습니까?" 쉬는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야 할 정도. 몸이 두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역대 최강의 태권 전사
세계선수권부터 올림픽까지. 각종 국제대회에서 정국현은 단 한번도 빠짐없이 모두 우승했다. 태극마크를 처음 단 81년부터 은퇴한 89년까지 정국현은 라이트미들급(웰터급) 최강자로 '무패 신화'를 썼다. 당시 대한태권도협회 전무였던 태권도 원로 황춘성씨는 "정국현은 역대 최고의 태권도 선수다"고 평가했다.
수많은 KO승을 만들어낸 정국현의 현란한 발차기는 경기 도중 상대가 박수를 칠 정도로 유명했다. "83년 덴마크 세계선수권대회에선 상대 선수로부터 경기 중 박수를 받았습니다. 스웨덴 선수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상대 공격을 유인하는 자세를 취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상대가 공격하더군요. 순간 한 발 뒤로 물러서면서 돌개차기로 가슴을 '빵' 소리가 나게 찼죠. 그랬더니 그 선수가 미소를 지으며 박수를 치더군요."
정국현은 세계선수권을 4번 연속 우승(82, 83, 85, 87년)한 선수로 기네스북에까지 올랐다. 세계선수권 4연패는 미국의 태권도 영웅 스티븐 로페스(2001, 2003, 2005, 2007년 우승)도 달성했다. 그러나 로페스가 금지 기술인 커트 발(상대 무릎이나 허벅지를 발날로 차는 기술)의 달인이기에 현란한 발차기로 상대를 제압했던 정국현이 더욱 돋보인다.
▲정국현에게 태권도란?
"키 작은 사람이 키 큰 사람을 때려잡는 게 태권도다." 교수 정국현이 태권도 학과 수업에서 종종 내뱉는 말. 키 크고 빠르고 강한 사람에게 속수무책이라면 태권도가 무슨 소용이냐는 게 정국현의 생각이다. "키가 얼마나 됩니까?" "반올림해서 1m 74㎝입니다. 하하하! 상대가 대부분 1m 90㎝에 가까웠기에 남들과 똑같이 움직여선 절대 이길 수가 없지요."
작은 키를 극복하고자 정국현은 중고 시절부터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상대가 공격할 때 뒤로 빠지면 계속 당할 수밖에 없어요. 옆으로 빠지면 반격하기가 좋죠. 머리로 생각한 걸 몸으로 보여주려면 동물적인 감각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강인한 체력도 필수죠." 세상에 공짜란 없단다. 정국현은 끊임없는 자기 계발을 통해 신체 조건을 극복했다.
89년 은퇴한 뒤 대학교수라는 목표를 위해 주경야독했다. 낮에는 후배들을 지도하고, 밤에는 공부에 매달린 결과 2000년 모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평생 선수로 살 순 없잖아요. 후배들도 공부하길 바랍니다. 사회 생활을 하다 보니 실력말고도 중요한 게 많더군요." 세계 최고의 선수였지만 보따리 장사(시간 강사)로 떠돌 수밖에 없었던 고충을 읽을 수 있었다.
태권도인 정국현에게 가장 중요한 건 '태권도 정신'이다. "멋진 발차기도 중요하지만 태권도 정신이 없다면 태권도가 아니라 격투기죠."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 원칙과 명분을 지키는 게 최고란다.
이상준기자 j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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