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만화 ‘베르세르크’의 주인공 가츠가 들고 다니는 검을 아시나요. 웬만한 사람의 키를 훌쩍 넘는 거대한 칼날에 도끼 자루처럼 투박한 손잡이를 한 무시무시한 칼이죠. 초인적인 힘으로 사도와 싸워나가는 가츠에게 딱 어울리는 무기라고 할 수 있겠네요.
갑자기 웬 만화 얘기냐고요. 베르세르크의 팬이거든요. 며칠 전 신간이 나왔길래 읽었지요.
(베르세르크의 가츠)
가츠의 검은 현실적으론 거의 불가능합니다. 칼의 전체적인 무게와 손잡이와의 균형으로 보건대 도저히 휘두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세시대 중무장 기사들이 사용한 투핸드스워드가 조금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이는 적을 벤다기보다는 갑옷 안의 적을 망치나 해머처럼 두드려 제압한다고 해야겠지요.
가츠의 검은 딱히 구분하자면 참마검에 가깝겠네요. 참마검(斬馬劍). 한번 휘둘러 말을 베어 쓰러뜨릴 만큼 크고 날카로운 검을 뜻합니다. 참마검은 역사적으로는 중국 전한 시대(기원전 206~8년)에 첫 등장합니다. 기병에 대항하기 위한 보병의 무기로 큰 칼날에 긴 손잡이를 한 무기를 만든 게 유래입니다. 참마검은 이후 참마도로 발전합니다. 아무래도 양날검은 군대에서 집단적으로 다루기가 쉽지 않아 외날검인 참마도로 바뀌게 되는 것이죠.
(광전사의 갑주를 입은 가츠. 파워업 중)
참마검을 실전에서 유용하게 사용한 사람으론 송의 명장인 악비를 들 수 있습니다. 악비는 무서운 기세로 남하하는 금나라의 중무장 기병에 대항하기 위해 참마도 부대를 만듭니다. 적의 기병이 돌격을 하면 참마도를 든 보병이 적의 말의 다리를 후려쳐 말을 쓰러뜨리면 도끼를 든 참수대가 땅에 넘어진 적병을 타격하는 것이었죠. 말이야 쉽지, 돌격해들어오는 말에게 달려들어 칼을 휘두를 수 있는 배짱을 가지기가 보통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두려워하는 장병들에게 악비는 다음과 같이 주문합니다. “위를 절대로 쳐다보지 마라. 오직 말의 다리만 예의주시하다가 근처에 오면 휘두르면 된다.”
이러한 전법으로 적의 예봉을 꺾은 악비는 일약 구국의 영웅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참마도는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에서도 전투력이 탁월한 무기로 매우 각광받았답니다. 언월도, 미첨도, 협도 등 이름도 다양하지요. 시대 배경과 맞아 떨어지지는 않지만, 삼국지의 관우도 청룡언월도를 사용하고 있지요.
조선시대 훈련도감을 비롯하여 장용영 등 5군영에서 익히던 무예였던 십팔기의 18가지 기예 중에도 참마도는 협도와 월도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보편적으로 사용된 무기였다는 말이지요. 일본에서는 나기나타라고 하고요.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된 한중일의 참마도들. 왼쪽부터 일본의 장도, 조선의 협도, 중국의 미첨도)
다시 베르세르크로 돌아가자면, 이 만화에는 다양한 무기들이 등장하지요. 스토리와 그림도 뛰어나지만 이런 다양한 무기들을 보는 재미도 꽤나 솔솔하답니다. 개인적으로는 ‘전장의 신’이라 불리는 불사신 조드의 참마도가 맘에 듭니다.^^
얼마 전 종영된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 출연한 배우 김현중도 베르세르크 매니아인 모양입니다. 그가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 드라마처럼 일본 만화가 원작인 ‘베르세르크’의 판권을 사서 영화로 만들고 싶다. 내가 제작과 주연을 하고 싶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꽃남의 연약한 이미지의 가수가 과연 가츠의 무지막지한 검을 휘두를 수 있을런지... 훗훗, 만약 그의 말대로 영화가 만들어진다면 꽤나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김현중의 베르세르크> 기대해봅니다.
(사진 출처:연합뉴스, 뉴시스)
서울 도심에 소림 무술이 등장했군요.
중국 국가여유국(관광국) 서울지국에서 초대했다고 합니다.
칼몸이 넓은 박도와 절편, 봉 등을 씩씩하게 선보였습니다.
쇠막대를 머리로 부수기도 하고, 목으로 창을 휘게도 만들고(절대 흉내내지 마세요)...
웬지 옛날에 우리 나라에서도 한때 유행했던 차력 시범을 보는 듯.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중국엔 이분들과 같은 소림무술 공연단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합니다.
이분들이 모두 승려인 것은 아니고, 대부분 무술학교 출신들이고요.
소림 무술을 표방하고 있지만, 과연 소림 전통 무술을 전수받았는지는 의문이 들지요.
현재 소림사는 거의 대기업 수준에 이르렀다고 하지요.
각종 공연과 사업, 관광수익금이 막대하다고 합니다.
아, 이 점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하겠군요.
중국이 1949년 공산화 된 후 소림사에는 승려를 더 이상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종교는 아편”이니까요.
이미 두 세대 전의 일이군요.
소림사도 당연히 폐허가 되었고요. 대가 끊긴 것이죠.
소림사가 다시 복원되기 시작한 것은 문화대혁명의 광란이 지난 한참 후의 일입니다.
지금 소림사에 있는 스님들도 이 이후에 새로이 모집한 것이고요.
과연 옛 소림무술의 출중했던 기예들이 제대로 전승되었을까요?
물론 서적들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구전심수로 전해지는 무술의 특성상 상승무공의 전승이 이루어졌다고는 솔직히 말하기 어렵지 않을까요.
아무튼, 중국 공산당이 세계에 내놓을 문화상품으로 들고 나온 게 바로 소림사입니다.
공산당이 폐문시켰던 소림사를 공산당이 다시 부활시켰으니,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그리고 이때 ‘소림사’라는 영화를 국가적인 차원에서 제작하여 1979년 세계 영화계에 당당히 내놓습니다.
중국 전국 무술대회를 5연패한 16세의 '무술영웅' 이연걸이 데뷔한 작품이죠.
그 영화가 다시 한번 보고 싶어지네요.
이소룡에게 무술을 가르쳐 준 사람은... 2009/04/03 01:11 | 추천 5 스크랩 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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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룡. '정무문' '용쟁호투' 등 불과 다섯 편의 영화로 신화와 전설이 된 인물입니다. "아비요~"라는 괴성을 지르며 쌍절곤을 휘두르는 그의 모습에 반한 코흘리개들은 지금은 40대 중년층이 되었지만 아직도 많은 이가 어린 시절의 영웅을 그리워할 겁니다. 그의 본명은 이진번(李振藩)으로 홍콩에서 미국으로 이민한 가정에서 태어납니다. '이소룡'은 아역배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출연한 작품에서 쓴 이름입니다. 그의 아버지도 배우였죠. 그의 가족은 그가 7세 때 다시 홍콩으로 돌아옵니다. 이소룡의 옆차기 이소룡의 짧은 인생은 투쟁의 연속이었습니다. 유년 시절에는 불우한 환경과 싸웠고, 무술에 푹 빠졌던 10대 때엔 길거리에 나가 싸웠습니다. 덩치 큰 영국 학생들에게 얻어맞은 것은 인정해도 패배는 절대 인정하지 않았던 "싸움에 환장한 놈"이었다고 합니다. 이소룡의 가장 큰 싸움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었습니다. 그는 간혹 자기 자신을 통제하는 데 곤란을 겪을 정도로 감정의 기복이 큰 사람이었습니다. 급하고 뒤틀리고 과격한 성격 때문에 스스로도 무척이나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절권도를 가르치는 모습. 사후에 출간된 잡지 표지
이소룡은 또한 ‘파괴자’였습니다.
"쓸모 없는 것은 내버려라." 이소룡은 이 말을 되풀이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변화를 시도합니다. 전통적인 수련법 대신 헤드기어와 글러브를 착용한 대련을 즐긴 그는 길거리 싸움에서 바로 적용할 수 있는 기술들을 중시하여 절권도(截拳道)라는 자신의 유파를 만듭니다.동양 무술에 서양의 격투기를 접목시킨 것이죠. 전통적인 무술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매우 어리석으면서도 위험한 시도이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는 ‘최고의 무인’이 아니라 ‘최고의 배우’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죠.
이소룡은 욕심이 아주 많은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늘 1인자가 되고자 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할리우드의 인종주의적 편견을 허물고 정상에 우뚝 선 스타가 되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난 스스로 세계 최강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세계 2인자도 아니다."
산이 높으면 골도 깊은 법입니다. 이소룡은 뇌부종으로 인한 돌연사로 사망하기 전 마지막 2년 동안 과도한 중압감에 시달렸습니다. 배우이자 각본가, 감독으로서 숨 막힐 듯한 무더위와 씨름하며 너무 많은 체력을 소모했으며, 갑작스런 유명세와 그에 따른 언론의 집중 조명도 견뎌내야 했습니다. 그는 무술 수련도 중단해야 했으며, 결국 웃음을 잃고 말았습니다. 약물에 점점 의존하게 되었고, 근육을 인위적으로 키우기 위해 몸에 너무 강한 충격을 주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부작용으로 그는 원인모를 발작을 종종 일으키게 되고, 마침내 33세의 나이로 요절하게 됩니다. 강철의 사나이, 불굴의 투사였던 그도 결국은 한 명의 나약한 인간이었던 것입니다.
그가 죽은 지 36년이 지났건만 그의 추모 열기는 아직껏 식지 않고 있습니다. 그에게 무술을 가르치고 인생을 알려 준 영춘권(詠春拳. 소림권의 일종)의 엽문 사부 일대기가 영화로 제작되어 곧 개봉된다고 합니다. 기대가 큽니다. 엽문 사부와 이소룡 |
소림사 밥 짓는 땡중이... 알고보니 천하고수 2009/03/12 22:11 | 추천 18 스크랩 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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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봉의 달인 긴나라화상
(첫 이야기를 뭘로 할까 고민하다가 긴나라(緊那羅)화상으로 정했습니다.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고 흥미도 있으며, 교훈도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원나라 말기 홍건적의 무리가 소림사에 닥쳤습니다. 소림사가 어떤 곳입니까. 天下武術出少林(천하무술이 소림에서 나왔다). 이 한마디면 족하겠지요. 또한 소림 담장 안에는 고수들이 구름처럼 많아 감히 속인들이 넘볼 수 없다 하였습니다.
하지만 대륙을 붉은 먼지와 피로 뒤덮은 홍건적의 떼법(인해전술)에는 천하의 소림승들도 어찌할 수 없었나 봅니다. 메뚜기떼처럼 밀려드는 도적들의 기세에 눌려 절의 무승들이 당해내지를 못하고 죽거나 상하는 자가 여럿 나왔습니다. 자칫하다간 천년 고찰의 본당까지 도적의 진흙발에 유린당할 절체절명의 순간, 영화의 한 장면처럼 홀연히 등장한 한 화상이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절 부엌에서 물을 긷고 나무를 해서 밥을 짓는 불목하니였습니다. 쑥처럼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등을 드러낸 남루한 모양새. 평소 말이 없고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지라 동료들에게 멸시에 가까운 대접을 받던 그였습니다. 이름조차 아무도 몰랐지요. 그런 그가 밥을 지을 때 불쏘시개로 사용하는 화곤(火棍)을 떡 하니 들고는 난폭한 도적떼 앞에 선 것입니다.
하하하. 모두가 웃었습니다. 도적도 웃고 절의 중들도 웃었습니다. 도적들은 ‘웬 미친 중이냐’고 황당해서 웃었고, 중들은 ‘저 놈이 드디어 미쳤구나’하고 헛웃었습니다.
그러나 웬걸요. 막상 싸움이 시작되자 불목하니는 화곤, 즉 곤봉을 휘두르며 물밀 듯이 밀려드는 도적들을 무서운 기세로 제압합니다. 찌르고 치고 때리고 누르고 휘두르고... 짧고 길어지는 곤의 변화는 끊임이 없습니다. 마치 제천대성 손오공이 동해용왕의 보물 여의봉을 휘두르는 듯이 말입니다. 한번 곤이 지나 간 자리마다 도적들이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져 뒹굽니다. 화염처럼 치솟는 화상의 무서운 기세에 흉포하기 그지없던 도적들도 그만 기세가 꺾이고 말았습니다. 노략질도 좋지만 어디 목숨만 하겠습니까. 다들 줄행랑을 놓았지요.
절 부엌의 이름없는 무명화상이 천하 고수일 줄이야. 역시 소림사는 명불허전입니다. 소림의 승들이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기 위해, 혹은 힘자랑하기 위해 무예를 연마한 것은 아니지요. 소림의 승들은 어디까지나 수양을 하고 득도를 하기 위해 출가한 이들입니다. 이들에게 무술은 단지 수양의 방편이지, 결코 무술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남이 알아주던 말던 묵묵히 무예를 연마했으며, 또한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도를 닦는 데 전념한 것입니다. 불목하니도 마찬가지였겠죠. 자신의 기예를 드러내지도 않고 묵묵히 맡은 바 소임을 다하는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고수일뿐더러 수양이 지극히 높은 선승이었음에 분명합니다. 자신의 상(像)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선승의 첫째 조건이니까요.
지어낸 이야기냐고요. 아닙니다. 소림사의 역사에 나오는 긴나라화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때부터 긴나라는 소림사의 호법신으로 추앙받게 됩니다. 우리가 홍콩 영화를 통해 친숙한 소림사 주방장의 전설이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죠. 또한 명말청초의 유명한 장군인 정종유는 자신의 저서 ‘소림곤법천종’에서 긴나라를 관음보살의 화신으로 얘기하고 있답니다. 아, 그리고 긴나라는 절의 수호신인 천룡팔부(天龍八部)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 아래 그림은 소림곤법천종에 나오는 숭산을 밟고 있는 긴나라의 위풍당당한 모습. 긴 곤봉을 들고서는 무수히 밀려드는 창칼의 군대를 대적하고 있군요. 긴나라의 뒤에 있는 절이 소림사이고요, 관음보살님도 보이네요. 곤봉을 움켜쥔 긴나라의 두 손의 모양을 유심히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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