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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 출신 권헌

천하한량 2008. 11. 18. 00:27

한산 출신 권헌
뒤늦게 조선 최고의 미학가로 떠올라
2008년 11월 17일 (월) 12:09:18 허정균 기자 huhjk@newssc.co.kr
   
▲ 지난 14일 서천문화원에서 열린 진명 권헌 학술대회. 전 문화재청장 유홍준 교수가 발제하고 있다.

지난 14일 오후 서천문화원에서는 ‘진명 권헌(權憲) 학술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 발제자로 나선 전 문화재청장 유홍준 교수는 “조선 후기 영조 년간 참으로 뛰어난 시인이었고 한편으로 개성적인 선비였던 진명 권헌 이 오랬동안 그 이름조차 잊혀져 있다가 학계에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채 20년도 안된다”고 밝혔다.

그는 그가 세상에 재조명을 받게 된 것은 성균관대학교 임형택 교수 덕분이라고 말했다. 임교수에 의해 서울 인사동 고서점에서 그의 문집인 <진명집>이 발견되고 임교수에 의해 진명의 시가 소개되면서 비로소 진명 권헌(1713~1770)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임형택 교수는 권헌에 대해서 “중요한 시인이지만 완전히 사장되어 있었다”며 “리얼리스트로서의 성과가 그분만큼 풍부한 내용을 가진 시인도 찾아보기 어렵다”고 극찬했다. ‘관북민’과 ‘시노비’와 같은 장편시는 “가난하고 비천한 인생을 인간적 신뢰와 애정을 가지고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여 서사적 전향을 생동하게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날 학술대회에서 유홍준 교수는 “그의 시를 보면 당나라 두보를 연상케 하는 비감이 서려있고 그 사상이 매우 명확하고 단호한 사회고발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유 교수는 “<진명집>에는 그의 시 세계 못지 않게 미술사학계에서도 새로운 주목을 받는 그림에 대한 평론이 실려 있다”고 소개했다.

조선 최고의 미학가로 평가받고 있는 진명 권헌은 대체 누구인가. 그는 조선의 개국공신 양촌 권근의 후손으로 1713년 한산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이고 호는 진명(震溟)이다. 24세에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이듬해 별시 문과에 낙방한 후로 뛰어난 시인임에도 낙방을 거듭했다.

그가 교유했던 문인들은 신광수, 이민보, 남유용, 오원, 유인호 등 당대의 시인 명사들이었다. 35세에 말직인 참봉이 되어 관직에 나갔으며 사헌부 감찰, 형조좌랑, 제용감 판관을 거쳐 장수 현감을 지냈다.

1766년 장수 현감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그는 고향 한산으로 낙향하여 58에 생을 마감했다.

그가 남긴 문집 <진명집>에는 2,000여수가 넘는 한시와 미술작품을 대상으로 한 비평론, 기타 산문작품들이 실려있다. 이 가운데 오언율시 한 수를 소개한다.

漢南
更事悲時世 다시금 세상사에 슬퍼지고
因人作是非 사람들 때문에 시비가 생기네
直知身有幾 곧 내가 기약이 있음을 알지만
還與俗相違 돌아가려니 속세와도 서로 다르다네
久客嫌通籍 오랜 객지생활, 벼슬자리도 싫어
歸山憶採薇 산에 돌아가 고사리나 캐고 싶네
孤雲與夕鳥 외로운 구름과 저녁의 새 한 마리
只自順天幾 단기 천기에 따라 살고 싶구나
<번역 정경훈 / 충남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