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권도자료 ▒

공수도(가라데)

천하한량 2008. 7. 25. 01:51
공수도란 일본을 대표하는 타격계 격투술로써 일반적으로 '가라데'로 불리고, 세계적으로는 'karate' 라고 표기한다. 공수의 연혁과 역사에 관해선 뒤에 설명하겠지만 원래 일본 본토에서 발생한 무술이 아니었고, 가라데는 중국남권과 일본에 흡수되기전의 류쿠왕국(현 오키나와)의 토착무술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격투였다.

그러던 것이 오키나와 무사집안 태생의 '기친 후나코시'(FUNAKOSHI GICHIN)가 명치시대에 일본 본토에 처음으로 가라데(당시 이름 당수(唐手))를 소개하면서 체계화 시켰고, 1929년에 가라데 (空手)로 이름이 바뀌면서 일본무도로 내세워지기 시작하였다.

일본군국주의 영향과 2차대전이후의 동양무술붐. 그리고 이민자들에 의해 동서양에 의해 전파된 가라데는 이미 몇십년 먼저 서양에 전해진 유도보다 빠른 속도로 퍼지기 시작하였고, 동양무술하면 가라데라는 등식을 서양인들의 머리에 깊이 각인시켰다. 그리고 그 영향은 수련인구면에서 가라데보다 많은 태권도 보다 아직도 인지도가 더 높다.
가라데를 간단히 말하자면 호신술을 제외하고는 꺾기, 조르기,메치기,굳히기등 그래플링의 혼합이 거의 없는 순수 타격계통의 격투술이며 태권도,쿵푸,무에타이와 더불어 동양을 대표하는 입식 격투기라고 할 수 있다.

☆ 공수도의 역사

공수도의 역사를 살펴보자면 지금은 오끼나와로 편입된 옛 류쿠 왕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일본의 공수인들중에는 가라데가 기친 후나고시에 의해 체계화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일본 그 자체에서도 옛 기록을 살펴볼 때 발차기라든가 주먹치기의 술기가 분명히 있었고 (골법이나 제상류라고 한다) 그것을 원형으로 현재의 공수도가 이루어 진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리고 오끼나와의 당수와 공수도는 완전히 다른 무술이다 라고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원래 당수(唐手)였던 것이 일본 국수주의에 의해 발음이 비슷한 공수, 즉 가라데로 바뀐 것과 비슷한 이치 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느 나라에서나 기록을 살펴볼 때 맨손격투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경우가 거의 없다. 당당히 무술 이름까지 표기되어 있고 그것을 외래 무술을 자국무술화 시키면서 전통무술로 탈바꿈 하는 계기로 삼는 것은 드문 경우가 아니다. (우리나라 무술을 생각해 보라)
아무튼 현재 일본의 공수도는 중국의 무술이 오끼나와에 전해져서 토착화한 후 그 무술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체계화된 것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옛 류쿠왕국에는 토착무술이 있었고, 그 이름을 [데]手라고 하기도 하고 권법이라고 하기도 하였으며 중국에서 건너온 무술이라는 뜻으로 唐手(당수)라고도 하였다. 그러던 것이 1609년 일본 시마즈가 류쿠를 오끼나와로 지배하면서 禁武(금무.무기 휴대를 금한다)정책을 취했고 류쿠인들은 그 정책에 맞서 몰래 맨손격투와 또 하나 쌍절곤(이소룡의 전매특허인 그 무기)의 기술을 발전시켰다.
1625년에 명나라 사람 진원빈이 오끼나와에 와서 자국의 권법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고 이것은 공수역사에서 꼭 다루어지는 사실중 하나이다. 그리고 1700년에는 사꾸가와가 중국으로부터 당수를 배워서 전했다고 한다.
당시 일본은 예전 당나라 시대에 중국과 견당선을 띄어 직접 무역과 교류를 활발히 하였고 그때문에 중국이 명나라 시대였음에도 중국을 칭해 唐이라 칭했음이 분명하다. 아마도 진원빈이라든지 사꾸가와가 배워온 중국무술이 중국남부지방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탓에 중국남권이 오끼나와에 전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불러일으킨다. 실제로 북파와 달리 남파의 무술은 내공보다 외공을 중시하는점,그리고 화려한 기술이나 발차기보다 손기술 위주의 권법이 많았다는 사실에서 옛 가라데와 비슷한 점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1800년대 들어 마쯔무라, 이또스 ,후나고시등이 오끼나와에서 각각 태어나었다. 가라데도(空手道)를 체계화시킨 기친 후나코시(1868~1957)는 오끼나와 나하시의 사무라이 집안에 태어나 본시 몸이 허약했던 탓에 당수에 입문을 하였다고 한다. 그는 무술 뿐만 아니라 유교를 진지하게 공부한 사람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일하면서 고국을 여행하면서 정형화된 품새나 카타를 연습한 후 가라데를 체계화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일본 본토에 가라데가 소개된 것은 후나고시에 의한 것이었다. 1916년 무덕전에서 시범을 보였고, 1920년 에는 유도의 총본산인 강도관에서 가라데의 시범을 보였다. 그리고 1922년에는 도쿄에서 황태자와 군사 장교에게 가라데 시범을 보인 뒤 교육적이고 군사적인 교육과정을 겸비한 가라데를 이끌 게 되었다.후나고시는 도쿄에 머물면서 늘어만 가는 수많은 학생들을 가르쳤고 저점 가라데는 퍼져나가게 되었다.

그때 그는 가라데의 철학적 토대를 마련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몇 권의 책들을 저술 하였다. 그 중하나인 가라데도 교범 '가라데의 길'은 동시에 그의 기술 이름을 두가지로 바꾸었다. 이때 그는 당수(唐手)라는 중국식이름을 버리고 불교경전에서 쓰이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빌 공 (空)자를 빌려 공수라고 지은후 여기에 일본 고유의 부시도(武士道)와 유교철학을 빌려 道자를 붙여 공수도라 명하였다. 당수를 공수라 바꾼 이유는 비교적 명확하다. 당시 일본은 군국주의 열풍으로 중국과 적대 관계였고 유도와 마찬가지로 검에서 맨손격투로 바뀐 무술에 무사도의 확립이 필요했기 때문이라 보여진다.
그리고 자국의 무술을 확립하는데 타국, 특히 적국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걸 누가 반기겠는가? 그런 이유로 오끼나와에서부터 대대로 당수라 이름 불리운 가라데는 공수도라 변하게 되었다. 여담이지만 당시 일본 지배하에 있었던 조선은 가라데역시 수입된 상태였는데, 그때에는 당수가 가라데로 바뀌지 않은 모양으로, 해방후에도 가라데는 당수라 불리고 있었고, 그 당수를 수련한 분들이 미국에 건너가 계속 당수도라 명칭한 탓에 미국에는 따로 당수도라는 무술협회가 있기도 하다. 그 예는 UFC2회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데 킥복서 패트릭 스미스의 무술 스타일을 열거할 때 외국사회자가 태콘도,탕수도,합키도라고 외치는걸 분명히 들 을 수 있다.

☆ 현대의 가라데

그 후 가라데는 일본 군국주의의 영향하에 동양과 서양으로 전파되기 시작하였고 2차대전 이후에는 동양무술붐과 해외 이민자들에 의해 전세계적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후나고시에 의해 현대화된 공수는 그의 제자들에 의해 쇼토칸 가라데로부터 시작하였지만 그 후 수많은 유파로 쪼개지게 되어 현재는 세계공수연맹이 있지만 아직도 하나로 뭉쳐지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2차대전이후 유도의 그늘에 묻혀 가라데는 언제나 비주류의 무술이었다. 그러나 일본프로레슬링에 역도산(한국명 김신락)이 있었다면 가라데에는 오야마 마쓰다쓰라는 불세출의 격투스타가 있었으니..그가 한국명 최영의(애칭 최배달)이다. 가라데는 오야마 마쓰다쓰라는 탁월한 격투가를 맞아 일본내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크게 성장하는 계기를 맞이한다. 오야마 마쓰다쓰는 전일본 공수대회 우승을 시작으로 일본내의 유명공수가들을 모두 제압하고 맨손으로 소를 때려잡는가 하면, 세계의 강자들과 겨루기위해 격투여행을 떠나는등 온갖 기행을 펼치고, 또 그것을 만화나 소설,신문등 매스미디어에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언론플레이를 하는등 격투능력뿐만 아니라 사업에서도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였다.
때문에 일본내에서 공수도의 위치는 더욱 향상되었고 오야마 마쓰다쓰는 極眞空手 (교쿠신 가라데)라는 문파를 창시하기에 이른다. 그는 실전위주의 가라데라는 명제를 들어 기존의 정통파 가라데에서 탈피하여 세계 무술기행에서 보고배운 타무술의 유용한 기술들을 흡수하여 가라데를 재 창조하였다. 그로 인해 교쿠신 가라데는 현재로서도 일본내의 많은 가라데 유파중에서도 가장 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인기도 가장 높다.

극진공수 시합은 타 공수유파의 시합과는 다른 실전위주의 경기방식과, 격파의 도입, 차별적인 훈련방식 등으로 일본을 대표하는 가라데로 성장하였고, 세계적으로도 헤아릴 수 없는 수련인구를 자랑한다. 특히 그 시합의 관중동원 능력은 어느 유파와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이다. 극진의 시합방식은 타 무술과도 다르고 자국의 여러 가라데의 시합과도 상당히 다르다. 이전까지 가라데의 조수(대련)는 슨도메라 해서 주먹이라든지 발을 상대방의 몇센티 앞에서 멈추거나 가상으로 치는 정도였는데 극진공수는 안면과 낭심을 주먹으로 가격하지 못하는 대신 글러브 없이 어디든지 가격할 수 있는 파격적인 룰로 시합을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정통 가라데에서 쪼개져 나온 교쿠신 가라데처럼 극진회관에서도 그 제자들에 의해 여러개의 문파로 갈라져 나오게 되었다. 그 중에서 현대에 들어 가장 주목해야할 유파가 정도관 가라데라고 할 수 있다. 이시이 관장이 주도하는 정도관 가라데는 오사카를 중심으로 그 세를 넓히고 타유파와의 시합이나 대외시합을 적극 추진하였고 킥복싱,무에타이와의 교류도 하면서 프로 격투를 지향하였다.
그리고 93년 모든 타격기(가라데,킥, 태권도,쿵후등)의 영문 이니셜과 카 그랑프리의 이름을 본따, K-1이라는 지상최강의 타격기를 가리자는 취지의 시합이 탄생하게 되었다. K-1은 헤비급만의 시합으로 출범하였고, 박진감 넘치는 시합운영과 하이클래스 선수들의 참가로 인해 나날이 인기를 높아가고 있으며, 이제는 복싱에 이어 가장 지명도 있는 프로 격투시합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타유파와 시합, 특히 킥복싱과의 시합으로 인해 여러 가지 가라데의 문제가 드러났고 근본적으로 가라데시합 룰이 바뀌어야 하지 않겠느냐라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또한 일각에서는 타유파와의 시합으로 인해 가라데만의 고유한 개성이 말살하면서 저건 가라데가 아니라 킥복싱일 뿐이다라는 탄식도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타유파와 활발한 교류와 실전중심의 훈련으로 인해 가라데는 계속 변해가고 있고, 강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링위나 어디서나 통할 수 있는 가라데를 만들되, 품새라든가 기본 철학등 공수의 골격자체는 바뀌지 않는 방향으로 바뀐다는 점이다. 이런점으로인해 앞으로 가라데의 앞날은 결코 어둡지 않다고 단정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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