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권도자료 ▒

전통무예... 십팔기(十八技)

천하한량 2008. 7. 25. 01:05

 

 

 

 

 
 
그러던 중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임금이 압록강까지 피난 가는 사태가 벌어지자 조선은 다시금 무비(武備)에 힘쓰게 된다. 당시 명(明)의 원병이 사용했던 척계광의 병법을 받아들이기 위해 《기효신서(紀效新書)》를 입수하고 명나라 장수들에게 기예를 배워 이를 조선군에게 훈련시켰다. 이를 위해 조선후기 최대의 군영으로 발전하는 훈련도감(訓練都監)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왜구를 물리친 후, 선조는 곤봉(棍棒) · 등패(藤牌) · 낭선 · 장창(長槍) · 당파 · 쌍수도(雙手刀)의 6가지 무예를 정리한 《무예제보》를 편찬하여 다시는 무예를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명(明)이 기울어지며 새로이 부상한 후금(後金)은 조선에게 새로운 위협의 대상이었다. 왜구와는 전혀 달리 주로 기마전술(騎馬戰術)을 사용하는 후금에 대비하기 위해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 · 협도곤(俠刀棍) · 구창(鉤槍) 등의 무예가 도입되었다. 그리하여 선조 다음에 등극한 광해군(光海君)은 위의 기예들과 《무예제보》의 편찬과정에서 빠진 권법(拳法) · 왜검(倭劍) 을 추가하여 《무예제보번역속집》을 편찬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이 인조반정을 통해 강제로 퇴위된 후로 이 책은 조선의 공식 무예서로 전해지지 못하였다.
 
드디어 명(明)을 멸망시키고 중원을 차지한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 조선에 본격적인 압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에 유연하게 대처하던 광해군과는 달리 인조(仁祖)는 명분론을 앞세워 청나라에 정면으로 대항하다 결국 1636년 병자호란을 맞아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였다. 이러한 치욕을 씻기 위해 효종은 북벌(北伐)을 강조하여 다시금 무비(武備)에 힘을 쏟았다. 비록 북벌은 실행되지 못하였으나 계속되는 청나라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조선은 다양한 무기의 개발과 무예의 확립에 지속적인 노력을 경주하였다. 이를 위해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던 우리의 무예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무예까지 우수한 것들을 모두 수합하여 다듬어나갔다.

그러한 노력으로 숙종(肅宗) 대에 이르기까지 죽장창(竹長槍) · 기창(旗槍) · 예도(銳刀) · 본국검(本國劍) · 왜검(倭劍) · 교전(交戰) · 월도(月刀) · 협도(俠刀) · 쌍검(雙劍) · 제독검(提督劍) · 권법(拳法) · 편곤(鞭棍) 등의 12가지의 다양한 기예가 점차 추가되어 갔다. 또한 청나라의 기병에 대항하기 위해 장창, 월도, 쌍검, 편곤 의 말을 타고 사용하는 기예도 정리되었다.
영조(英祖) 대에 왕세자로서 대리청정을 한 사도세자(思悼世子)는 이러한 무예들이 훈련도감 · 어영청 · 금위영 등의 군영에서 서로 다르게 훈련하던 것을 통일하고자 《무예제보》의 6기에 앞서 말한 12기와 기창(騎槍) · 마상월도 · 마상쌍검 · 마상편곤을 묶어 《무예신보》를 편찬하였다. 이로부터 십팔기(十八技)라는 명칭이 탄생하였다. 십팔기의 확립에는 조선 무예의 표준, 즉 국기(國技)를 세운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당시 각 정파별로 장악하고 있던 5군영의 기예를 통일시키켜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군사훈련이 가능해졌다. 여기에는 일원적인 병권을 장악하려고 한 사도세자의 의지가 담겨있었던 것이다.
 
사도세자가 노론의 견제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자 그의 아들인 정조(正祖)가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비운에 죽어간 아버지 사도세자를 복권(復權) 시키고 그 뜻을 이어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사도세자가 《무예신보》를 편찬한 업적을 이어 여기에 '격구(擊毬)'와 '마상재(馬上才)'를 추가하고, 십팔기에 관련된 모든 자료를 집대성하여 교본으로 편찬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무예도보통지》이다.
정조 당시 최대의 군영이었던 장용영(壯勇營)에 '십팔기군(十八技軍)'이라는 제도를 두어 군사들의 무예수련을 직접 독려했을 만큼 십팔기 확립에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던 정조에 의해 십팔기는 국기(國技)로서 그 위치가 확고해졌던 것이다.

 

 

 

 
  1905년 을사늑약과 함께 조선군이 해체되면서 십팔기를 할 줄 아는 군인들은 대부분 의병활동으로 숨지거나 산으로 숨어들고 말았다. 따라서 일제 식민시대에는 누구도 십팔기를 입에 담을 수가 없었다.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십팔기가 다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한국무예계의 지존으로 숭앙받고 있는 해범(海帆) 김광석(金光錫) 선생에 의해서였다. 수양하던 문중의 내력 덕분에 소시적부터 무예를 익혀왔던 선생은 구한말의 무관이었던 오공(晤空) 윤명덕(尹明德) 선생으로부터 십팔기를 배워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선생은 일평생 동안 오직 십팔기의 전승과 보급을 위해 힘써 그동안 수많은 제자를 길러왔다. 또한 여러 권의 저서를 통해 십팔기뿐만 아니라 무예 전반에 관한 많은 이론과 실기들을 공개해 한국무예 발전에 큰 주춧돌을 놓았다.

십팔기의 유일한 전승자인 해범 선생은 1969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십팔기도장을 열어 후학들을 지도해왔다. 그러다가 87년 민속학자 심우성(沈雨晟) 선생과 함께《무예도보통지실기해제》를 펴냄으로써 그 실기인 십팔기가 최초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뒤이어《권법요결》(1992),《본국검》(1995),《조선창봉교정》(2002)를 통해《무예도보통지》가 담고 있는 십팔기는 물론 선생이 일평생 터득한 무예이론을 모두 일반에게 공개하였다. 현재는 해범 선생의 제자들이 주축이 된 전통무예십팔기보존회가 시연회를 통해 일반인들에게 십팔기를 알리고 있다. 이를 계기로 이후 국내에서는 전통무예 붐이 일어나고 이를 소재로 한 드라마나 영화 등 공연예술이 만들어지는가 하면, 각종 문화관광 상품으로도 개발되어 역동적인 한국문화를 알리는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예로부터 창은 무예의 으뜸이라 불리었다. 장창은 길이 1장 5척의 창으로 검날 모양의 창날이 달려 있다. 창날에는 혈조가 파져 있으며, 날과 자루가 연결되는 부위에는 석반이 달려 있어 상대의 병기를 감아 채거나 걸어 젖히는데 도움이 되고, 또 창날이 너무 깊이 들어가 빠지지 않는 폐단을 막아 준다. 장창과 같이 긴 무기는 긴 것의 이점을 잘 이용하고 짧게도 사용하는 법을 익혀 장단의 묘를 살리면 훌륭한 무사가 된다. 이를 장병단용(長兵短用)이라 한다.
 
길이 20척의 대나무에 4촌 길이의 날을 댄 창으로 십팔기 가운데 가장 긴 병장기를 운용하는 무예이다. 대나무 창은 통대나무를 이용한 창과 여러 조각의 대나무를 아교로 붙이고 심줄로 엮어 만든 창이 있는데, 후자가 더욱 강하고 견고하다. 적의 기병 또는 성 위의 적을 공격하거나 먼 거리에서 적을 제압하는데 매우 유용하다. 길이가 길기 때문에 기법은 비교적 단순하다.
창에 깃발을 달아 사용하는 창으로 장창에 비해 길이 짧아 단창(短槍)이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의전이나 호위용으로 사용되는 창이지만 짧은 길이의 이점을 이용해 근접전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 그 기법이 활달하며 변화무쌍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위용을 느끼게 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조선의 십팔기에만 그 운용법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독창적인 무예 종목이다.
 
창끝이 세 갈래로 갈라져 있어 삼지창으로 불려 지기도 하는 조선군의 대표적인 병장기이다. 가운데 날이 양쪽 두 갈래 날보다 길어 적을 찌르고, 두 갈래 날은 상대의 병장기를 걸어 젖히거나 내려치기에도 용이하다. 또한 당파는 전투 초기에 화전(火箭)을 걸어 쏘는 화기(火器)로도 사용되었는데, 화전으로 원거리에서 공격하고 이어서 근접전에서 당파를 사용하였다.
 
예로부터 창은 보병 뿐 아니라 기병도 함께 사용했다. 말 위에서 운용하는 기창은 조선 전기 북방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매우 필수적인 무예여서 조선 초기부터 무과 응시과목으로 채택되었을 만큼 매우 중시되었다. 장창의 응용종목이지만 당파나 기창(旗槍)을 사용해도 무방하다.
 
낭선은 긴 대나무를 사용하여 만드는데, 끝에는 창날을 달고 가지에는 얇고 날카로운 철편을 달아 독을 발라 사용한다. 낭선은 무기가 크고 무거워 체격이 크고 힘이 좋은 병사들을 선발하여 훈련시켰다. 원앙진에서 등패와 함께 최전방에 위치한 낭선은 상대에게는 위압감을 주고 아군에게는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는 엄폐물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임란 때 왜군을 방어하는데 매우 효과적인 무예였다. 무겁고 크기 때문에 단순한 동작으로 짜여졌다.
 
쌍수도는 검이 길고 무거워서 두 손으로 사용하는 검법으로 매우 위력적이었다. 본래 명칭은 장도(長刀)이며 용검(用劍) 혹은 평검(平劍)이라고도 불렸다. 이 검법은 왜구가 중국의 연안을 침범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 때 왜구를 상대하기 위해서 도입하여 우리 실정에 맞게 새로이 개발하였다. 동작은 비교적 단순하면서도 힘이 있어 파괴적이다.
 
예도는 원래 ‘조선세법’이라고 불리던 우리나라의 고대 검법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멸실되어 전해지지 못하다가 중국 명나라 때 장수인 모원의(茅元儀)가 편찬한《무비지(武備志)》권86 <진련제>편에 소개되면서 본래의 검보를 되찾았다. 모원의는 조선의 검보를 구하여 실으면서 “이는 본디 조선세법(朝鮮勢法)……”이라고 하여 조선에서 구한 것을 정확히 밝히고 있다. 모두 24가지 검법의 기본세법(基本勢法)으로 구성된 이 검보는 이후 모든 중국 검법의 이론적 근간을 이룸은 물론 다른 무예의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원래 양날의 검으로 구사하는 검법이지만《무예도보통지》에는 ‘예도’라는 이름의 도법(刀法)으로 실려 있다. 또한 당시에 별도로 수련하던 속보로 ‘예도총도’를 함께 싣고 있다. 동양3국을 통틀어 최고 수준의 검법으로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 때 왜구들이 긴 칼을 휘두르면 막을 자가 없다고 할 정도로 왜검은 그 위력이 대단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숙종 때 김체건이 일본에 들어가 검보(劍譜)를 얻어 그 기예를 전하였다고 한다. 왜검에는 토유류(土由流) · 운광류(運光流) · 천류류(千柳流) · 유피류(柳彼流)의 네 종류가 전하고 있다. 이는 현재 일본에서도 그 모습을 찾기 힘든 고대의 검법으로 십팔기에만 유일하게 남아 있다.
 
공격과 방어를 연습하기 위해 짜여 진 칼의 교전법(交戰法)으로 왜검의 기법을 응용하여 온전히 우리것으로 짜여졌다. 원래는 검으로 수련하였으나 후에 요도를 사용하게 되었다. 두 사람이 정해진 약속대로 서로 부딪히며 검법을 익히는데 연습 중에는 목검을 사용한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 왜군을 물리쳐 공을 세운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 제독을 기려 이름이 붙여진 검법이다. 칼은 쪽 곧은 직도를 사용하였는데, 벨 때는 도(刀)의 이점을, 찌를 때는 검(劍)의 이점을 얻었다. 모두 14세로 짜여졌는데 왜구의 긴 칼을 상대하기에 매우 효율적이다. 나중에는 예도와 같이 요도를 사용하였다.
 
예도와 마찬가지로 요도(腰刀)를 사용하며, 일명 신검(新劍)이라고도 한다. 실학사상에 바탕하여 독창적인 우리것으로 내세우던 무예로서 신라의 화랑에서 기원된 가장 오래된 고대 검법이다. ‘본국’이라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무예의 종주국으로서 자주적이며 진취적인 기상을 드러내고 있다. 본래는 양날의 검을 사용하는 검법이었으나 십팔기로 정리되던 당시에는 이미 도법으로 사용하였다. 전후좌우로 공격과 방어를 구사하도록 구성되어 있는 매우 활달한 검법이다.
 
두 자루의 칼을 양손에 쥐고 사용하는 검법으로 십팔기 가운데 난이도가 높아 상당히 숙련된 자만이 구사할 수 있는 검법이다. 양손을 동시에 사용하여 공격과 방어를 변화무쌍하게 구사하므로 매우 위력적이다. 쌍검에 사용되는 칼은 암수를 한 쌍으로 하여 하나의 칼집에 꽂았다가 뽑아서 사용하지만 일반적으로 환도(還刀) 가운데 작은 칼을 골라 사용하였다.
 
쌍검을 말 위에서 운용하는 응용종목이다. 조선의 기병은 반드시 무예십팔기에 능숙한 군사들로서 어느 한 가지 기예만을 다루지 않았다. 대개 활, 장창, 편곤, 쌍검 등 여러 가지 무기를 휴대하여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전투를 치렀다. 쌍검의 응용종목이다.
 
일명 대도(大刀)라 불리며 칼 중에서 가장 화려하다. 월도는 자루 길이 6척4촌, 날 길이 2척8촌으로 폭이 넓고 큰 날이 옆으로 누운 달 모양과 같다고 하여 언월도(偃月刀)라고 부르기도 한다. 칼 중에 가장 큰 것으로 그 움직임이 크고 활달하여 위맹스럽기 그지없어 보는 이의 간담을 서늘케 한다.
 

말 위에서 사용하는 마상월도는 조선 후기 거기보(車騎步) 전법에서 기병(騎兵)이 사용하던 무예로 먼저 삼혈총을 사용하여 원거리에서 공격을 하고 이어 월도를 사용하여 공격을 하였다. 이때 기병이 사용하던 무예로는 월도 외에도 편곤(鞭棍),장도(長刀),구창(鉤槍)이 있다. 월도 대신 협도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월도의 응용종목이다.

 

 
협도는 자루길이 7척의 봉에 날 길이 3척의 날을 끼워 칼을 더 멀리 힘차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장도(長刀), 혹은 날의 모양이 눈썹 끝과 같이 생겼다고 해서 미첨도(眉尖刀)라고도 불린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모두 중시하여 병장무예에서 널리 사용하였다. 사도세자는 협도를 특히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이는 자루가 있어서 원거리와 근거리에 모두 사용할 수 있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손가락 굵기의 오래되고 거친 등나무와 등나무 껍질로 만든 방패를 등패라고 한다. 등패는 요도, 표창과 함께 사용하는데, 왼손에 등패를 잡고 손목 위에 요도를 얹은 다음 오른손에 표창을 지닌다. 상대와 대적할 때는 먼저 표창을 던지고 곧이어 맹렬히 뛰어 들어가 칼을 휘둘러 공격한다. 등패는 원앙진을 구성할 때 최전방에서 상대와 맞서야 하기 때문에 몸이 날쌔며 가볍고 유연한 사람이 운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등패 바로 뒤에는 낭선이 등패를 구원하도록 배치되어 있어 서로 짝을 이뤄 진퇴를 번갈아가면서 상대를 공격하고 방어한다.
 

맨손으로 공격과 방어를 하는 기술을 권법, 또는 권술이라 하며 예로부터 수박(手搏), 각저(角抵) 등 여러 명칭으로 불리었다. 권법만으로는 원칙적으로 무예라 칭할 수는 없으나, 모든 무예를 위한 기초 수련으로서 매우 중요시하였다. 권법에는 손과 발을 사용해서 치고, 찌르고, 잡아채고, 꺾고, 차고, 걸어 넘기는 등의 기술들이 포함되어 있다. 십팔기의 권법은 시중의 일반 호신술과는 달리 여타 병장무예를 익히기 위한 기초적인 공법과 원리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이를 먼저 익히게 되면 호신은 물론 이후 십팔기의 어떤 무기를 들었을 경우에라도 그 무기의 특성에 따라 운용하여 익히기가 쉬워진다.

 
긴 장봉에 오리 주둥이 모양의 날을 단 것으로 가장 기본적인 무기 가운데 하나이다. 권법과 더불어 병장술을 익히는 사람이면 제일 먼저 배우는 기초 과목이다. 때려치는 기술과 찌르는 기술을 주로 구사한다. 곤봉은 모든 무예의 어머니라고 불릴 정도로 중시되었으며, 유가 경전인《사서(四書)》에 비견되기도 했다. 곤봉(사서)을 익히게 되면 나머지 무예(六經)들은 자연스럽게 익혀지게 된다는 뜻이다. 곤봉은 협도곤이나 구창과 마찬가지로 북방의 기마민족과 대항해 싸울 때 매우 효과적이었다. 무장한 기병이 달려들 경우 장창은 너무 길어서 부러지기 쉽기 때문에 곤봉이나 협도곤(俠刀棍) 등으로 대체하여 사용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었다.《연병지남》에는 살수대에서 장창대신 대봉이나 도곤(刀棍)을 사용하는 법이 보인다.
 

편곤은 긴 봉에 짧은 봉(子鞭)을 쇠줄로 연결한 것으로 도리깨와 비슷한 모양을 가지고 있다. 긴 봉은 길이 8척9촌 짧은 봉은 길이 2척2촌5푼으로 휘둘러 치는데 매우 위협적인 무기이다. 곤봉과 함께 교전하며 연습한다.

 

 
편곤은 보병이 사용하는 보편곤(步鞭棍)과 마병이 사용하는 마상편곤이 있다. 둘 다 규격은 동일하나 마상편곤은 말의 기동력이 휘둘러 치는 힘을 배가시키기 때문에 더욱 위력적이다. 편곤의 응용종목이다.
 
격구는 무예는 아니지만 예로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말을 타는 장수나 기병들이 즐겨 익혔던 운동경기의 일종이다. 오락성이 강하지만 익혀 놓으면 무예 훈련에 도움이 된다하여 조선 왕조에서 자주 행하던 기예(騎藝)였다.
 
역시 무예는 아니지만 말을 잘 다루는 것이 군사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하여 즐기던 군사오락이었다.《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할 때 격구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