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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만弗 덫에 걸린 한국, 스페인을 봐라

천하한량 2008. 7. 5. 16:34
2만弗 덫에 걸린 한국, 스페인을 봐라
과감한 시장개방ㆍ노동개혁ㆍ공기업 민영화…흔들림없이 추진 성공 이끌어

"최근 남미의 건설, 통신, 사회간접자본(SOC)산업 수주는 스페인이 싹쓸이하다시피 합니다." 마드리드에서 2년 가까이 근무 중인 배용준 대우인터내셔널 지사장이 밝힌 요즘 스페인 경제의 단면이다. "기업이 해외 진출할 때 정부가 변호사비, 출장비까지 대주니 당연한 결과 아니냐"는 게 그의 분석이다. '소득 2만달러의 덫'에 걸려 제2 경제위기를 걱정하는 한국과는 천양지차다. 하지만 시계를 13년 전으로 돌리면 스페인도 우리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공기업의 비효율은 극심했고, 방만한 연금제도는 정부 재정을 위기로 내몰았다. 사회당 집권 기간(1982~1996년)에 강화된 노동법규는 기업의 고용과 투자의욕을 감퇴시켰다. 정상적인 경제성장이 이뤄질 리 만무했다. 94년 실업률은 14%를 넘었고, 93년 재정적자는 국내총생산(GDP)의 7.3%에 달했다. 스페인의 1인당 국민소득(GNI)은 92년 이후 1만5000달러 주위를 맴돌았고, 급기야 93년엔 마이너스 성장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96년 집권한 우파 정권의 선택은 스페인의 국운을 바꾸어놓았다. 그들의 선택은 놀랄 만큼 현재 우리 정부와 비슷했다. 13년 전 스페인의 선택을 지금, 대한민국이 반추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 개방으로 경제 활로 뚫어

= 고용 촉진, 한ㆍ미자유무역협정(FTA) 등 개방정책과 공기업 선진화를 내세운 이명박 정부가 안팎의 우환에 허우적대고 있다.

고유가 쇼크로 정부는 이미 올해 경제성장률을 4.7%로 낮췄다. 대신 물가 전망은 4.5%까지 올랐다. 작년 환율 절상에 기대어 턱걸이했던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의 감격은 작년 한 해로 끝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이 우세하다.

96년, 스페인은 우리와 비슷한 선택을 했다.

당시 아스나르 정부는 △적극적인 대외개방 △노동 유연성 제고를 통한 노동시장 개혁 △공기업 민영화를 통한 공공부문 개혁에 팔을 걷었다. 안팎의 반발에 뒤로 밀리지 않고 뚝심 있게 개혁안을 밀어붙였다.

스페인의 1인당 국민소득은 2003년 1만7560달러, 2004년 2만1570달러, 2006년 2만7340달러까지 치고 올라왔다.

유럽이 침체의 늪에 빠졌던 2000~2003년에도 스페인은 연 3% 성장을 유지했다. 86년 당시 유럽연합(EU) 평균 1인당 GDP의 68%에도 미치지 못하던 스페인은 현재 유럽 주요 15개국 평균 89.6%, 그리고 최근에 가입한 국가들을 합친 27개국의 1인당 GDP의 97.7%에 도달했다. 1996~2004년간 새로 만들어진 일자리는 500만개 이상으로 추산된다.

스페인 경제의 활로는 경제 개방이었다.

만성적인 고실업, 저성장, 재정적자에 시달리던 스페인에 변화의 바람이 분 것은 1986년 EU(당시 EC) 가입이었다. 매년 약 20억유로 이상의 EU 기금이 유입되면서 경제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보조금은 공항, 철도 등 SOC 건설에 집중 투자됐다. 고용 창출과 이에 따른 경제 활성화를 노린 조치였다.

스페인 내 고속도로의 40%가 EU의 보조금으로 건설됐고, 마드리드 신공항 및 고속철도 건설 등이 가능했던 것도 EU 보조금 덕택이었다.

그러나 보조금만으로 스페인 경제가 우뚝 일어선 것은 아니다. 스페인이 프랑코 정권 시절 폐쇄경제의 잔재를 완전히 털어버린 또 다른 기폭제는 2002년 유로존(유로화 사용국가) 가입이었다. 연 16~18%를 웃돌던 스페인 국내 금리가 유럽통합금리(Euribor) 적용으로 하향 안정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신용대출이 늘고 기업과 개인이 돈을 구하기 쉬워지면서 내수가 살아났다. 이는 더 많은 일자리 창출과 국가 재정의 안정으로 이어져 경기가 더욱 좋아지는 선순환을 만들어냈다.

우파 정부가 집권한 1996~2004년의 평균 경제성장률은 3.6%를 웃돈다. 같은 기간 EU의 평균 성장률이 2% 안팎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경이로운 수준이다.

◆ 대형 공기업 50여 개도 민영화

= 스페인도 우리처럼 공기업을 개혁했다. 대신 기본 원칙을 우리처럼 모호한 '선진화'로 잡지 않았다. '민영화'가 최종 목표라는 것을 처음부터 명확히 했다. 그리고 과감하게 밀어붙였다. 공기업 민영화ㆍ통폐합 방안을 마련해 놓고도 반발이 두려워 발표시기를 9월로 미룬 한국 사정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1989~1995년간 스페인 공기업들은 총 520억유로 상당의 경영적자 상태를 기록하고 있었다.

비효율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던 공기업은 정부 재정적자의 주요인으로 지목돼 왔다. 우파 정부는 주저없이 '칼'을 댔다.

고질적인 재정적자를 탈피하기 위해 공공지출의 대폭적인 삭감과 함께 정부 재정에 부담을 주는 공기업의 매각을 강력히 추진하게 된다.

아스나르 정부는 96년 6월 에너지ㆍ전기ㆍ통신 관련 공기업의 독점적 지위를 폐지하는 '경쟁법'을 시행했다.

이어 98년 12월에는 스페인 최대 정보통신 독점기업인 텔레포니카의 정부 지분 42%를 완전 매각해 본격적인 민영화의 신호탄을 쐈다. 렙솔(석유), 가스내추럴(천연가스), 타바칼레라(담배), 엔데사(전기) 등의 공기업 정부 지분을 최소화하고 외국기업에도 시장 진입을 허용하는 조치를 취했다.

스페인 공기업 민영화는 96년 신설된 공기업 지주회사(SEPI)를 통해 수행됐는데, 96년부터 현재까지 총 53개사에 대한 민영화가 완료됐다.

스페인 재정을 망가뜨린 연금제도에 대한 개혁도 이루어졌다. 스페인 정부가 96년 노ㆍ사ㆍ정 합의로 시행한 연금제도 개혁안은 최소연금액 인상, 연금 대상 확대, 연금 기여분 현실화, 행정 효율화, 투명성 증대 등을 주요 내용으로 담았다.

◆ 국민 공감대 바탕으로 노동 개혁

= 노동시장 구조 개혁에 대한 스페인의 자세도 한국과는 달랐다.

실업률이 24%까지 치솟았던 94년 당시의 스페인 노동법은 △정규직 노동자 고용시 기업의 사회보장비 부담 △정규직 고용 노동자 해고시 최대 2년간 보상임금 지급 △노동자가 해고의 적법성을 따지는 소송을 제기하면 재판절차 완료시까지 임금 지급 등의 조항을 담고 있었다. 경직된 노동법 탓에 기업은 정규직 고용을 피했고 비정규직 노동계약이 관행으로 굳어졌다. 96년 스페인 전체의 노동계약 중 33%를 비정규직이 차지했다.

아스나르 당시 총리는 노ㆍ사ㆍ정 간의 긴 협상을 통해 97년 4월 노ㆍ사ㆍ정 대타협을 통해 4년간 적용될 '고용안정협약'을 채택했다. 새로운 형태의 정규직 고용 계약 틀을 마련하고 정당한 해고의 경우 해고비용을 33일치만 지급토록 완화했다.

2001년 3월에는 노동시장 유연성을 더욱 촉진하는 제2차 노동개혁을 시행했다. 해고보상비용을 적게 지급하는 대상을 더욱 확대하고, 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사회보장부담 비율을 20~100%로 다양화했다. 96년 23%에 달했던 실업률이 2002년에는 11.1%, 2007년에는 8%대로 낮아졌다.

◆ 영어 교육 열풍도 닮은꼴

=현재 국민소득 3만달러 진입을 바라보는 스페인의 아킬레스건도 한국과 비슷한 영어다. 스페인 국민의 약 35%만 영어로 대화가 가능한 수준으로 EU 국가 평균인 50%에 훨씬 못 미친다.

TV에서 방영되는 외국 프로그램은 물론 극장 영화도 대부분 스페인어로 더빙돼 상영된다. 심지어 외국 음악조차 더빙되는 나라가 스페인이다.

부족한 영어 실력이 자국 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 스페인 정부는 뒤늦게 영어교육 활성화를 위한 대책을 쏟아내고 있다.

올 3월에 집권한 사회당은 학교 수업의 15%를 영어로 강의하겠다는 공약을 내놓았다. 현 정부가 인수위원회 때 논의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받았던 '영어 몰입교육'과 비슷한 내용이다.

영어공부를 위한 해외연수도 정부 차원에서 적극 지원하고 있다. 스페인 해외연수진흥협회 자료에 따르면 2007년 총 15만명의 학생이 해외연수를 다녀왔는데 그 중 4만5000명은 정부 지원금을 받았다.

차종대 KOTRA 마드리드 무역관장은 "정부에서 해외연수 보조금을 지원하기 전에는 주로 14~17세 학생만 해외연수를 나갔지만 보조금을 지원한 다음부터는 그 이상인 학생들도 해외연수에 참가한다"고 전했다.

사회당에서는 해외연수 지원 프로그램을 확대해 1년에 한 달씩 영어권으로 학생을 연수 보내는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이다. 이 계획이 실현되면 매년 1300만명이 정부 보조금 혜택을 볼 것으로 기대된다.

공무원도 영어 열풍의 예외가 아니다. 최근 스페인에서 국제 행사가 많이 열리면서 공무원들도 영어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다.

영어 사교육 시장도 자연스럽게 활성화되는 분위기다. 일부 초등학교 학생들은 월 수업료가 500~1000유로에 달하는 영어학원을 다니고 있고 여름방학 중에는 아일랜드나 영국 등으로 영어캠프를 떠나기도 한다.

차 관장은 "스포츠 이외에 사교육이 전혀 없는 스페인 상황을 고려하면 '영어교육 열풍'이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진우 기자 / 김태근 기자 / 안정훈 기자]